달콤한 인생
( Bucky Barnes X Tony Stark )
0.
바람이 불었다.
흔들리는 것은 무엇인가.
1.
남자의 이름은 무기였다. 온 세상이 전쟁으로 비명을 지르던 시기, 전장의 가장 앞에서 용감무쌍하게 총과 검을 휘두르던 남자는 명예를 알았다. 조국을 위해서 목숨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남자가 영원히 잠들지 못하는 몸이 된 것은 그러한 연장선에서였다. 적진에 포로로 잡혀 있을 때 그에게 행해진 생체실험은 남자를 바꾸어 놓았고, 작전 중 불의의 사고로 차가운 계곡 아래에 떨어져서도 삶을 연장하게 만들어 주었다. 사고의 충격으로 잃은 왼쪽 팔 부위에는 은색 금속으로 만든 팔이 달아졌고 남자는 스스로 마지막 기억들을 떠올리기 전에 얼려지고야 말았다.
무기로서의 삶은 혹독했다. 남자는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동료들에게 돌아갈 수 없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 제일 먼저 보았던 것은 자신에게 생체실험을 했던 그 작은 박사였다. 한 생명을 무기물로 만들기 위해 박사는 남자의 뇌를 온통 지져 놓았다.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해지고 모든 기억들이 사라질 때까지 고문처럼 행해지는 행위들은 계속되었다. 마침내 얼굴에 표정이 사라지고, 말을 잃고, 저항마저 없어졌을 때, 남자는 비로소 감정 없는 기계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용맹스러운 미국의 군인이자 영예로운 남자는 이제 없었다.
깨어난 이례로 남자는 상부층으로부터 미션을 받았다. 대부분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었고, 남자는 군말 없이 그것들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가끔 정신이 온전할 때면 남몰래 죄책감으로 몸부림을 쳤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 했다. 들켰다가는 다시 머리가 지져지고 그다음에는 제기 불능한 상태까지 가버릴지도 모를 일이었기에 남자는 철저하게 그런 자신을 숨겨왔다. 숨긴다고 그런 제 마음이 가라앉는 것도 아니었는데.
1991년, 그 해는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웠다. 걸프전이 일었고, 독일이 통일하며 일어난 파장으로 소련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 혼란을 틈타 조직은 숨겨져야 했고 이는 곧 남자가 꽤 오랫동안 얼려질 것임을 말하고 있었다. 그 해 12월, 남자는 긴 잠에 빠지기 전 마지막으로 미션을 수행했다. 한 부부를 죽이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탈취하면 되는 일이었다. 달리는 차를 전복시켰고 이미 피를 흘리면서도 죽지 않은 그들을 제 손으로 처리했다. 물건을 챙기고 차도에 CCTV를 파괴한 뒤 차에 불을 질렀다. 그들의 사인은 단순 교통사고가 될 것이고 아무도 남자가 다녀간 흔적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동면에 들어가기 전, 누군가가 환호를 질렀던 것을 기억한다. 자신이 죽인 부부의 아들을 찾아냈다는 소식이었다. 온전한 머리로 자신이 망쳐버린 삶을 살게 될 그 아이의 얼굴이라도 보길 원했지만 그럴 순 없었다. 남자는 얼려졌다. 이 날의 기억도, 이젠 그에겐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2.
남자는 눈앞에 호화로운 저녁식사를 두고도 먹지 못 했다. 허기가 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달궈진 접시에 올라온 스테이크와 샐러드는 충분히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다만 이런 호의가 익숙하지 않을 뿐이었다. 건너편에 앉은 하이드라의 수장 알렉산더 피어스, 그는 남자를 오랜 동면에서 꺼낸 장본인이었다. 그는 손조차 대지 않은 남자의 그릇과 굳어있는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어서 들지. 고기가 식겠어."
짐짓 점잖게 하는 말에 남자는 고개를 들어 피어스를 봤다가 다시 식탁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는 어색하게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고기 끄트머리를 썰어 입에 넣자 와인으로 만든 달콤한 소스와 담백한 육즙이 입안에 퍼졌다. 하이드라 기지에서 늘 먹던 러시 안식 스튜 같은 것들과는 달리 풍부한 맛에 남자는 다시 고기를 썰었다. 조용한 레스토랑의 룸 안에 두 사람의 고기를 썰고 씹는 소리만 들렸다. 고요한 정적을 깨트린 것은 다른 이의 등장으로 인해서였다.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어떤 이가 남자의 옆자리에 경박한 자세로 앉았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아, 아닌가? 밖에서 들으니 별 대화는 없는 것 같던데. 하긴, 이런 거랑 무슨 대화를 하겠다고..."
브룩 럼로우는 제법 불만스러운 듯 빈정거리며 말했다. 불만의 원인이 무엇인지 아냐는 듯 그는 옆에 앉은 남자를 흘끗 보았다. 고작 '무기' 주제에 자신이 땀나게 일하고 있는 동안 호화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제 상사와 식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이 절대적인 신뢰로부터 이어진다는 것을, 그 신뢰의 바탕이 묵묵히 미션을 수행하는 사람 같지 않은 남자의 능력 때문이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껍질뿐인 인형 주제에. 럼로우는 그를 그렇게 폄하했지만, 자신이 그를 절대로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 역시 분하게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남자는 아랑곳 없이 입에 있는 고기를 씹었다. 그 말에 반응한 것은 피어스였다. 그는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린 채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리고 럼로우를 보았다. 세월을 이기지 못해 주름진 얼굴이었지만 그 눈매만큼은 누구보다 날카로워서 더 말을 이으려고 했던 럼로우는 그만 입을 닫아버렸다.
"너 뭐 하는 새끼야?"
"그.. 오늘까지 보고하시라고..
"나가 있어. 나가서 대기해."
단호한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그 명령이 불만스러웠지만 럼로우는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문을 닫고 나가고 다시 침묵이 내려앉은 방 안에서 식사는 계속되었다. 스테이크가 말끔히 비워지고 디저트로 초코 케이크가 나올 때쯤 피어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자네가 우릴 위해 얼마나 애써주는지 안다네."
애쓴다, 그 말은 어불성설이었다. 그의 손에 동면에서 일어나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었을 뿐, 남자가 자발적으로 애써 조직을 위해 무언가를 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무기였지, 충견은 아니었다. 비록 잠에서 깬 이례로 피어스가 그에게 얼마나 잘해주었는지 열거한다면 끝도 없다고 해도 말이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식사를 포함한 그가 했던 모든 행위들은 그저 사탕발림에 지나지 않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그 뒤에 내려지는 명령들은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끔찍한 것들이었다. 다만 그것을 군말 없이 수행했기에 피어스가 남자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는 남자를 아마 가지고 있는 총들 중 가장 길이 잘 들여진 하나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사실 자네에게 다른 미션을 좀 줄까 하네. 자네가 잠들어 있는 동안, 내 밑에서 일해준 아이가 있네. 꽤나 아끼는 아이일세. 굉장히 영특하고 똑똑한 아이야. 몸이나 쓰고 수작이나 부리는 우리랑은 영 다른 부류라 지금까지 여러 가지로 많이 도움이 되어 주었지."
"...."
"그런데 말이야, 그 애가 요즘 수상하단 말이야. 아무래도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도통 알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그 애를 좀 감시해주게. 뭐, 말이 감시지 옆에서 돌봐주고 챙겨 주라는 거야. 어릴 적에 부모를 잃어서 그런지 정에 많이 약해. 사실 럼로우를 시킬까 했는데, 그래도 자네가 일처리는 깔끔하잖아."
음흉한 얼굴을 하고 피어스가 웃었다.
"만약에, 정말 그 애가 딴짓이라도 하고 있는 거라면.. 알지?"
남자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작은 스푼으로 초콜릿 케이크의 가장자리를 떠서 입에 넣었다.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랜만에 맛보는 초콜릿은 썼다.
3.
높이 솟아있는 타워 제일 위쪽에는 STARK라고 적혀져 있었다. 남자는 피어스가 쥐여준 선물 상자를 들고 그 앞에 섰다. 그 익숙한 알파벳 단어를 보다가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잠시 휘청거렸다. 가을의 중간이었다. 뉴욕 빌딩 사이사이로 찬 바람이 스미었고 남자의 긴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휘날리고 지나갔다. 남자는 고개를 흔들어 대충 시야가 보일 정도로 머리를 정돈했고 타워 안으로 들어갔다.
안내 데스크에 피어스의 이름을 대자 상냥한 직원이 그를 가장 위층까지 안내해 주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붉은 머리의 여성이 보였다. 사장님 비서입니다. 단조로운 말로 자신을 소개한 여자의 명찰에 새겨진 이름이 낯설지 않았지만 온전하게 기억날 리 없었기에 남자는 더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비서는 유심히 그를 보다가 보스에게 보고를 하겠다며 그를 라운지로 안내한 뒤 사라졌다. 라운지 소파에 앉아 남자는 얌전히 '아이'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익숙하지 않은 현대식 깔끔한 인테리어를 둘러보는데 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모습을 보였다.
"아저씨가 보냈다고?"
아이, 라고 불리기엔 나이가 좀 있어 보였다. 하지만 왜 그렇게 불리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멋들어진 수염에 눈 옆에 옅은 주름이 져있었지만 커다란 눈망울이나 호를 그은 입매가 그의 나이를 훨씬 어려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얼굴에 짓는 표정이 부드럽고 평안해 보였다. 처음 보는 남자를 향해서도 웃을 수 있을 만큼 여유로워 보이기도 했다. 한 번도 걱정 같은 거 하지 않고 살아온 것만 같아 보였다.
편안한 검정 나시티와 청바지를 입고 있던 그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남자를 보다가 들고 있던 선물 상자에 시선을 빼앗겼다. 잠시 시선을 잃었던 남자가 묵묵히 선물 상자를 건넸다. 그것을 받아든 그가 남자의 건너편에 앉아서 상자를 풀었다. 고개를 숙이자 정돈되지 않은 다갈색 머리카락이 아래로 흐트러졌다. 시야를 가리는지 그걸 다시 쓸어 올리다가 그는 남자를 보았고 순간 눈이 마주친 것이 민망해 다시 시선을 내렸다. 그는 아랑곳 없이 포장지에 다시 집중을 했다. 리본을 푸는 손끝, 손톱이 동글동글했다. 투박하면서도 관리를 받은 듯 정리가 잘 된 손이었다.
포장지를 풀자 나온 것은 검은색 피아노 모양의 오르골이었다. 피아노 뚜껑을 열자 작고 은은한 노래가 울려 퍼졌다. 그 음색을 따라 그는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Try to remember the kind of September-. 그리고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흐린 미소가 아까와는 달리 무언가에 젖어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내긴 어려웠다.
"은근히 아날로그를 좋아한다니까. 아저씨 답네. 노래 좋죠?"
"...네."
탁자 위에 오르골을 내려놓으며 그가 남자를 보았다. 다갈색 투명한 눈동자와 마주하자 남자는 시선을 떼지 못 했다. 고작 단답을 하는데도 머뭇거릴 정도로. 이번엔 그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남자도 그를 따라 얼떨결에 몸을 일으켰다. 남자는 자신이 꽤 얼간이 같다고 생각했다.
"아저씨가 무슨 생각으로 보내신 줄은 알겠는데, 경호원은 필요 없어요. 이미 넘쳐 나는데.."
"명령입니다."
"아저씬 나한테 명령 안 해요. 그쪽은 모르겠지만."
볼멘소리를 당당하게 하는 통에 남자는 혼란스러웠다. 명령을 지키라는 말만 있었지 그 대상이 거절할 때는 어떻게 판단하라는 지시는 없었다. 보통의 사고라면 유연성을 십분 발휘했겠지만 남자에게는 이미 배제된 능력이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남자는 자리를 지켰다. 입을 꾹 닫고 있는 고집스러운 얼굴의 남자를 보며 그는 한숨을 푸욱 쉬고 졌다는 듯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그리고 손을 뻗어 악수를 청한다.
"앤써니 에드워드 스타크, 그냥 편하게 토니라고 부르면 돼요."
호의로 내밀어진 손을 보며 남자는 망설였다. 어떠한 이름으로 불러진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남자는 가장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 냈다. 불린지 아주 오래되어서 이제는 있으나 마나 한 그런 이름을.
"제임스 뷰케넌 반즈입니다."
손을 맞잡는다. 남자를 바라보는 토니의 눈이 잠시 흐려졌지만 착각이라 느껴질 정도로 잠시뿐이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반가워요. 기꺼운 반응이었지만 남자는 웃음을 몰랐다. 그저 잡은 손에 조금 힘을 줄 뿐이었다. 남자는 맞잡은 오른손 너머 체온이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따스함이었다.
4.
지켜본 결과 피어스의 걱정과는 다르게 토니의 생활은 딴짓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단조로웠다.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잠이 들 때까지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의 연구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의 인공지능 비서 자비스가 만들어진 홀로그램을 통해 차의 엔진을 수리하거나 피어스의 부탁에 따라 무기를 만들거나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가 대표로 군림하고 있는 세계적인 회사는 CFO인 페퍼 포츠에 의해 모든 것이 처리되었고 그 외의 자잘한 대외적인 일들은 비서인 나타샤 로마노프에 의해 마무리되었다. 토니는 이따금 나타샤에게 개인적인 부탁을 하곤 했지만 거기서 특이점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대부분은 찾던 물건이 나왔으니 브루클린 경매 대리인에게 미리 일러두라는 것과 곧 있을 파티 때 주문할 폭죽 개수 같은 것들뿐이었다.
"버키, 당신 팔 좀 봐도 돼?"
어느 순간부터 토니는 남자에게 말을 놓았다. 액면가로는 내가 더 어려 보이는데 괜찮지?라고 말한 그는 제멋대로 남자를 애칭으로 부르기까지 했다. 살아온 세월로 본다고 하면 나이는 남자가 훨씬 많을 테지만 부러 그 사실을 정정하진 않았다. 사실 남자는 은근히 그 사실을 즐기고 있었다. 남자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은 대부분 피어스처럼 명령하거나 럼로우처럼 빈정거리거나, 연구원들처럼 겁을 먹는 것이 다였다. 누구도 토니처럼 남자에게 살갑게 굴지 않았다.
남자는 말없이 제 왼손을 내어주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공구들을 끌어다가 왼 팔을 보고 있는 토니의 얼굴을 가만히 훔쳐보았다. 하루 종일 그의 옆에서 망부석처럼 그를 관찰하고 감시하는 것에 온 신경을 쓰는 남자는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고, 그것이 퍽 기분이 좋았다. 오로지 자신만이 알았다. 흥미로운 기계를 볼 때 그의 눈이 얼마나 반짝거리는지, 집중하느라 찡그려진 미간 아래 쭉 뻗은 콧날과 그 끝에 콧망울이 얼마나 동글동글한지, 알아들을 수 없는 용어들을 말하는 입술이 얼마나 도톰한지,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들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을 써서 그를 표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절여진 뇌에 들어있는 단어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것이 못내 속상하면서도 자신이 기계라는 사실 때문에 그가 관심을 보인다는 것에 대해 처음으로 이렇게 된 자신의 처지가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절단된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복잡한 기계를 보면서 토니는 얼굴을 찡그리고 물었다.
"아파?"
남자는 머뭇거렸다. 처음 듣는 누군가의 걱정 어린 말이었다. 미션 중 총탄에 박혀도, 팔의 일부가 고장 나도, 신경을 예민하게 건드리는 치료를 하는 중에도 그의 아픔이나 고통은 배제되어 있었다. 무기물에 그런 섬세한 걱정을 하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여기 자기 앞의 토니만이 유일했다. 집요하게 대답을 요구하는 토니를 보고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픈 것은 팔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이 닿는 자리로부터 뻗어 나오는 따끔거리는 것이 심장을 쿡쿡 쑤시는 것이, 그것이 더 남자를 아프게 했다.
"괜찮아. 이제 아프지 않게 해줄게."
남자는 울고 싶어졌다.
5.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토니가 나타샤에게 지시하는 것이 단순한 업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에서였다. 그녀의 다이어리에 나와있는 그의 스케줄상 그들이 말하는 '파티'는 어디에도 없었고, 결정적으로 그들이 논의한 '폭죽의 개수 빌딩에 설치되어 있는 폭탄을 발견했을 때 모든 것은 확실해졌다. 남자는 나타샤를 미행했고 토니가 그녀를 통해서 브루클린의 누군가와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녀가 도달한 허름한 아파트에서 나오는 금발의 건장한 청년을 보았을 때, 남자는 들쭉날쭉한 솟구치는 감정에 혼란스러워했다. 뾰족하고 날이 선 것들이 심장을 난도질하는 것 같았다. 배신감, 분노, 질투심, 그리고 그 바닥 아래 깔려있는 슬픔을 느끼며 남자는 자신을 냉정하게 타일렀다. '알지?' 머릿속에 피어스의 음성이 들렸다. 미션은 완벽해야만 했다. 남자는 총기를 손에 쥐었다.
타워를 돌아왔을 때, 토니는 라운지에서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것을 알아차린 남자의 얼굴을 착잡하게 바라보면서도 애써 자신의 행위를 숨기려 하지 않았다. 담담하게 손에 쥔 총기와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그는 두려움 없이 남자에게 다가왔고 오히려 겁을 먹은 것은 남자였다. 남자는 총구를 그의 미간에 겨누었다. 총구 끝이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버키."
동그란 손끝을 가진 두 손이 총을 쥔 남자의 손에 닿았다. 놀란 남자가 그 손길을 뿌리치고 총을 휘둘렀다. 총구에 머리를 맞은 그가 옆으로 고꾸라졌다. 풀썩하고 쓰러져 버리는 몸을 남자는 혼란스러워했다. 흔들리는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남자를 토니가 올려다보았다. 맞은 머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의 눈에는 공포가 없었다. 피로 젖은 머리를 손으로 닦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를 본다. 자신에게 겨눠진 총구가 무섭지도 않은지 다시금 조심스럽게 손을 댄다. 저항이 없는 손을 잡아 내린다. 내려간 손에 힘이 풀렸다. 털컹- 하고 총이 바닥에 떨어졌다.
남자의 왼손이 올라갔다. 저를 보는 토니의 얼굴에 닿을 듯하다가 닿지 않는다. 하지만 그 손을 다시 겹쳐 잡아 제 얼굴을 댄다. 만약 제 팔이 기계가 아니었다면 그 보드랍고 따뜻한 살결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고개가 숙여진다. 코 끝이 닿을 정도로 얼굴이 가까워지고 내쉬는 숨이 섞였다. 저를 보는 눈이 감겼다. 남자는 벌어진 그의 입술을 보았고 살며시 그곳에 입을 맞추었다. 살짝 닿았는데도 온몸이 저렸다. 서투르고 천천히 벌어진 입술을 모아 그 끝을 붙이고 다시 입을 열어 숨을 섞고 맛을 보듯 혀로 아래 입술을 핥는다. 제 손을 잡았던 토니의 두 손이 허리에 감기고 매달린다.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고 나서야 남자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를 떼어냈다.
"오늘 일은 없었던 거야. 그냥 지워버려."
한참을 허덕이며 열기를 잠재우던 남자가 그렇게 말했다. 남자는 오늘 보았던, 오늘 했던 모든 것에 대해서 부정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남자의 삶이 그러했듯이 오늘 일도 지워버리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될 것이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남자는 믿었다.
"지운다고 지워지니, 그게."
여전히 덜덜 떠는 손으로 제 어깨를 감싸 쥔 남자의 왼손을 보면서 토니가 읊조렸다. 안타깝고 씁쓸함이 묻어나는 얼굴을 하고 은빛 남자의 팔뚝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는 남자에게서 벗어나 뒷걸음질을 쳤다. 하나, 둘, 셋. 발자국에 맞춘 카운트다운을 하고 그는 주머니에서 꺼낸 버튼을 눌렀다. 어디선가 쾅-! 하고 터지는 소리가 났다. 지진이 난 것처럼 빌딩 전체가 흔들렸고 방심했던 남자는 휘청이며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경악이 어린 시선으로 그를 본다. 토니는 웃었다.
어디선가 날아온 기계 파츠들이 남자의 몸을 감싼다. 그리고 무너지는 빌딩 밖으로 그를 튕겨져 나가게 했다. 콰광!!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계속해서 났다. 흙먼지를 만들며 빌딩이 가라앉았다. 그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내려진 남자는 땅에 다리가 닿자마자 뛰었다. 명령이 아닌 이유로 그토록 필사적으로 뛰어본 것은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남자의 발이 멈췄다. 건물들의 잔해로 엉망인 자리에 토니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희망을 가져보려 남자는 막무가내로 그 자리를 파냈지만 곧 도착한 럼로우의 부하들에 의해 억지로 제지당했다.
송환되는 차 안에 라디오가 지직거리며 말을 했다. 스타크 타워의 붕괴는 한 익명의 시민 제보로 테러가 일어날 것임을 신고받아 사전에 주변 시민들과 직원들을 대피시킬 수 있었으며 사망자는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거기에 스타크사의 대표인 토니 스타크는 현재 미국 국방부의 보호를 받고 있으며 조만간 기자회견을 열 것이라는 소식이 더해졌다. 감정 없는 여자 아나운서의 무감각한 말을 들으며 남자는 온몸을 굳혔던 긴장을 놓았다. 아- 이제 다 되었다.
6.
"윈터 솔져 프로젝트는 폐기된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고문을 당한 온몸은 삐걱거렸고 얻어맞은 얼굴은 거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남자는 입에 고인 피를 뱉었다. 그리고 거만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럼로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맞고도 여전히 반항기 어린 눈을 하고 있는 남자를 보며 럼로우는 이죽거렸다.
"병신 같은 새끼. 기계인 줄로만 알았더니 꼴에 죄책감은 있었나 보네.
"무슨... 소리야."
"허, 몰라? 1991년 12월 미션. 스타크 부부 죽인 거 너였잖아."
아. 남자가 탄식한다. 뇌리에 스치는 아직 씻기지 않은 기억들이 있다. 그 겨울 제 손에 죽어 나간 부부의 얼굴, 그리고 누군가가 외쳤던 그들의 아이를 납치했다는 이야기. 그래, 그 아이가 너였구나. 남자는 그제야 저를 볼 때 토니의 눈이 흐려지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심장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덜컥 내려앉았다. 칼로 후벼 파인 듯, 내장을 온통 난도질이라도 당한 거처럼 극심한 고통이 밀려 들어왔다. 얼굴을 찡그리는 남자를 보며 럼로우는 혀를 찼다. 하긴 그런 머리로 뭘 기억해. 그는 남자를 지독히도 폄하했다. 뒤에 일렬로 서있는 부하들에게 턱짓을 하자 총구를 남자에게 겨누며 장전을 한다. 럼로우는 품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입에 물었다.
"넌 죽어. 그 스타크 꼬맹이도 죽고. 이게 니가 한 짓에 대한 결과야, 솔져."
사람이 가장 사람답게 되는 순간은 언제인가? 제패토의 인형에 요정이 요술을 부렸지만 그건 완벽한 인간이 될 수 없었다. 목각인형 피노키오는 자신을 희생해 그의 늙은 아버지를 구했을 때 비로소 인간이 될 수 있었다. 누군가를 위한 선행과 희생으로 인해 인간이 될 수 있다면, 남자는 그 순간이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때보다 격렬한 고통과 슬픔, 그리고 분노로 남자는 울부짖었다. 몸을 동여맨 쇠사슬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남자는 방심하던 럼로우의 목을 잡아챘다. 그리고 구석으로 던져버렸다.
럼로우가 던져짐과 동시에 뒤에 있던 부하들이 총을 쏴댔다. 왼팔로 그걸 막아낸 남자는 하나둘 부하들을 처치했다. 목이 부러지고 빼앗은 총에 맞은 이들이 줄을 잃은 인형처럼 바닥에 하나둘 쓰러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총구를 돌린 순간 옆구리에 박혀 들어오는 날카로운 칼날을 느꼈다. 정신을 차린 럼로우가 남자의 살에 박힌 칼을 비틀며 웃었다. 살과 내장이 짓이겨지며 왈칵 피가 쏟아졌지만 남자의 얼굴엔 동요가 없었다. 남자는 총을 휘둘러 럼로우를 떨쳐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아악!!! 하고 비명이 울렸다. 총알은 빗나갔고 그것은 럼로우의 손가락을 날려버렸다. 다시 한 번 총을 쏘았고 이번에는 총알이 무릎에 박혔다. 그는 끔찍한 고통을 지르며 바닥 위에서 꿈틀 거렸다. 고통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그는 사라진 손가락 부위를 잡고 허덕거렸다. 그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제 머리로 총구가 닿는 것을 느끼며 그는 비참한 자신의 마지막을 맞이하기 전 이죽거리며 웃었다. 너도 사람이었네. 그 말은 닿지 않았다. 탕- 소리와 함께 피와 뇌수가 뿌려지며 럼로우의 뒤통수가 터져 나갔다.
남자는 옆구리에 꽂힌 칼을 뽑아냈다. 그리고 피가 쏟아지는 부위를 손으로 눌렀다. 정신이 아득해 지려는 것을 억지로 잡으며 남자는 바닥에 떨어진 총기를 하나하나 주웠다. 죽게 할 수 없어. 죽게 할 수 없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남자는 연신 입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빈 차에 올라탔다. 옆자리에 총들을 쑤셔 넣고 차를 운전했다. 차는 흔들림 없이 빠른 속도로 길을 달렸다. 목적지가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듯 한치의 엇나감도 없었다.
7.
이미 다 죽어버린 시체들로만 가득한 자리에서 나는 피비린내에 나타샤 로마노프는 그 예쁘장한 얼굴을 찡그리고 말았다. 뒤따라 들어오며 시체를 넘던 푸른 제복의 군인 역시 마스크 아래 단정한 얼굴을 사정없이 구기며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그는 손가락이 터져나가고 엉망으로 죽어버린 럼로우의 시체를 보며 들고 있던 커다란 방패를 고쳐 잡았다.
"아무래도 여길 벗어난 것 같아."
"코 앞에서 놓쳤네요. 빨리 안 찾아내면 스타크가 우릴 죽이려 들 거예요, 캡."
"마음이 급한 건 나도 마찬가지야, 로마노프."
"뭐, 우정보다는 사랑에 더 끌리는 게 여자거든요."
그녀는 제법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군인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사랑?"
"네, 사랑. 안타깝게도 우리 보스가 그쪽 친구랑 사랑에 빠진 것 같던데요?"
"헛소리. 동정이겠지."
"여자의 감을 무시하지 마요. 자기가 탈출하려고 만든 아머를 다른 사람한테 씌우고 정작 자기는 죽을 뻔했잖아요. 비상책으로 나라도 남아 있었으니 다행이었지. 세상에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이 자기 목숨 걸고 하는 건 사랑 밖에 없어요."
"그건 내가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고..."
"키스 하는 거 봤어요."
"...그래."
실 없는 얘기를 주고받던 두 사람은 자리를 떴다. 사랑이건 우정이건 그들에겐 찾아야 할 것들이 있었다. 남자의 동선은 뻔했고, 쉬이 추측할 수 있었다. 둘은 남자가 섣부른 행동으로 죽어 나가지 않길 소망할 뿐이었다. 이렇게 본래 있어야 할 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원인이 그들이 말하는 그 빌어먹을 사랑 때문이라는 것까지는 눈치채지 못한 채, 그 사랑이라는 맹목적인 감정에 목숨을 아끼지 않는 것이 토니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꿈에도 알지 못하고...
8.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은 처음 왔을 때와 다름이 없었다. 남자는 피로 얼룩진 차의 가죽 시트를 내려다보았다. 백미러에 비치는 얼굴이 창백했다. 숨은 얕았고 남자의 생명은 한계치까지 몰려있었다. 있는 힘을 쥐어짜 옆 좌석의 총기를 움켜쥐었다. 후으-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남자는 차에서 내렸다. 레스토랑 밖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들이 일제히 그를 보았고 남자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남자가 지나가는 길 시체들이 널브러졌다. 조용히 식사를 하던 피어스가 총성에 고개를 들었다. 레스토랑 입구 문이 열리고 비틀거리던 경호원이 그대로 쓰러졌다. 단정한 걸음으로 들어온 남자가 총을 들어 다시 한 번 쓰러진 경호원의 머리를 맞췄다. 탕- 소리와 함께 경호원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피어스 주변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들이 일제히 긴장한 채 남자를 보았다. 피어스는 그런 경호원들을 손짓으로 제지 시켰다. 그는 입에 묻은 소스를 냅킨으로 닦아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요한 레스토랑 안에 발자국 소리만 크게 울렸다. 남자의 정면에 피어스가 섰다. 피어스는 남자의 엉망인 몰골을 훑어보았다. 얼굴은 다른 이로부터 튄 피로 난자했고 어디서 맞았는지 옆구리로부터 흐르는 피가 바지와 그 아래 신발까지 적셔 놓았다. 그중에서 제일 엉망인 것은 그의 눈이었다. 흐리기만 했고 감정 따위 없었던 남자의 눈이 어느 때보다 다채로운 감정들로 일렁이고 있었다.
"이러지 마라."
피어스는 늘 그랬던 것처럼 남자를 타일렀다.
"소란 피우지 말고 여기서 그만둬.
근엄하게 하는 말은 달래는 듯하면서도 명령과 다르지 않았다. 광분한 개를 달래는 것과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남자는 그런 피어스의 역겨운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왜 그랬어요?"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묻는다. 왜 그랬어요? 그 질문엔 많은 것들이 함축되어 있었다. 1991년 12월, 자신의 부모를 죽게 만든 장본인을 그의 앞에 데려다 놓은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서 처리하라는 말은 정말 그의 부모를 죽였던 것처럼 그를 죽이기라도 했어야 했던 거였는지, 비록 뒤로 배신행위를 했다고는 하나 몇 십 년을 그들을 위해 일했던 그를 그렇게 죽여야 하는 거였는지, 왜 하필 그게 나여야만 했는지. 달리는 차 안에서 내내 생각을 하고 고민을 해봐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이 망가져버린 뇌 탓인지 아니면 이성을 잃게 한 생소한 감정들 때문인지 남자는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물었다. 왜 그랬냐고. 하지만 정확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피어스는 한숨을 쉬며 남자에게 되물었다.
"뭐 때문에 흔들린 거냐? 그 애 때문이냐?"
"...."
"이제 그만해라. 이 일은 없었던 것으로 묵인해주지. 기억은 지우면 그만이야. 이제 흔들 일 일도 없을 거야. 앞으로 해왔던 것처럼 하면 돼."
지운다고 지워지니, 그게. 갑자기 문득 머리에 스치는 그 음성에 남자는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입술 끝을 올려 허망하고 아스러지게 웃는 모습을 본 피어스의 얼굴에 안도감이 서렸다. 그는 오만했고 남자가 자신의 말을 따르리라 생각했기에, 그래서 사람처럼 미소 짓는 남자가 스스로 무사할 수 있다는 생각에 웃었다고 생각했다. 실로 저 다운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남자는 흐린 미소를 지웠다. 피어스를 본다. 손을 올렸고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에서 빠져나온 총알은 정확하게 피어스의 심장을 맞췄다. 그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고 뒤로 털썩 쓰러져 몇 번 경련을 했다. 생명이 꺼져가는 희미한 눈을 한 그를 보며 남자가 말했다.
"그렇다고 돌이킬 순 없잖아요."
피어스의 눈이 빛을 잃었고 일순 뒤에 있던 경호원들이 일제히 품에 있던 총을 들었다. 레스토랑 밖으로 총탄 소리와 비명소리, 철벅이는 피 튀기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렸다. 하지만 곧 정적은 다가왔다. 레스토랑의 흰 대리석 바닥이 온통 핏빛으로 난자했다. 머리가 터지고 내장이 흐르는 시체가 곳곳에 쓰러져 있었다. 시체들의 산과 붉은 웅덩이 위 유일하게 숨 쉬는 것은 남자 하나뿐이었다.
인간, 제임스 뷰캐넌 반즈, 버키, 오로지 그뿐이었다.
9.
외부의 신고조차 들어오기 전 처참한 현장에 들어오는 것은 나타샤와 푸른 제복의 군인 둘이었다. 입구에서부터 이어지는 피의 향연과 시체 더미를 보며 그들은 불길함을 지울 수 없었고 그것은 레스토랑 안, 정 가운데에 앉아 있는 버키를 보았을 때 현실이 되었다. 눈을 반쯤 감은 채 아래를 내려다보며 손으로 피가 흐르는 제 옆구리를 움켜쥐고 있는 버키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 그들을 보았다. 그리고 이미 안면이 있는 나타샤와 브루클린에서 얼핏 보았던 청년, 이제는 이름이 기억나는 그리운 이를 보며 웃었다.
"스티이브으...."
"버키."
힘이 없어 어그러지는 발음으로 버키가 스티브를 불렀다. 그의 생명은 꺼져가고 있었다. 이미 핏기 없이 하얗게 질린 모습만 봐도 쉬이 알 수 있었다. 이 상황이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듯 스티브가 절망 섞인 무거운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앞에 주저앉았다. 바닥에 고이는 피는 버키의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의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옆구리를 쥐고 있는 손 위에 스티브가 손을 겹쳐 눌렀다. 고통에 신음하며 버키가 흔들렸다. 버키, 안 돼, 조금만 참아, 구급 요원을 부를 테니까... 그렇게 넋을 놓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이명이 지고 점점 희미해져 갔다. 버키는 제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정신을 유지하게 하려 애를 쓰는 나타샤의 손목을 잡았다.
"토니, 토니이... 목소.. 리가아..
듣고 싶다. 청각이 완벽하게 차단되기 전, 그가 숨 쉬고 있는 이 순간에 가장 듣고 싶은 목소리였다. 자꾸만 흐려지길 반복하는 버키의 눈을 나타샤가 보았다.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품에 있는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 그의 귀에 대주었다. 약간의 신호음 끝에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들린다.
[여보세요.]
흐, 흐으.. 버키가 끊어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자꾸 초점이 맞질 않고 귀에 들어오는 소리도 온통 엉망인데 그 목소리만 유독 머리에 자꾸 꽂힌다. 소리에 맛이 있다면 귀를 타고 넘어오는 토니의 목소리는 너무 달았다. 그 언젠가 먹었던 초콜릿보다 훨씬 더 달아서, 그래서 이제야 비로소 살아있는 것 같았다. 버키는 눈을 감았고 눈 아래 흐르는 눈물이 피에 섞여서 흘러 떨어진다.
[여보세요? 버키?]
대답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가 더 나오지 않았다. 아으.. 하고 낮은 신음만 흐를 뿐이었다. 정신을 차리라며 스티브가 그를 흔들었고 매가리 없는 목이 뒤로 꺾이며 시선은 레스토랑의 천장으로 향한다. 천장 위 샹들리에가 좌우로 흔들거리고 있었다. 흔들흔들거리는 것이 아기였을 적 제 머리 위에 달아준 어머니의 모빌 같았다. 이제 그만 쉬어도 된다고, 이젠 잠들어도 좋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소란스러움은 가신다. 자신을 부르며 우짖는 목소리가 꺼지고 이제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흔들리는 빛이 흐려지고 그 흐려지는 빛 사이로 버키는 토니의 얼굴을 그렸다. 입 끝이 올라가고 그의 일생을 통틀어 가장 행복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가 눈을 감았음에도, 그 미소는 지워지질 않았다.
0.
바람이 불었다.
흔들리는 것은 무엇인가.
바람결에 흩날리는 나무를 보았다. 푸른색 언덕 위 커다란 느티나무가 춤을 추고 있었다. 바람에 실린 나뭇잎이 공중을 떠다니다가 버키에게로 닿았다. 나무 아래 커다란 흰 피아노가 있었다.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기만 한 피아노 앞에 토니가 있었다. 건반을 누르며 맑은 소리를 내다가 노래를 부른다. Try to remember the kind of september. When life was slow and oh, so mellow-. 맑은 음성으로 노래를 부르던 토니가 버키를 보았다. 동그란 눈으로 그를 보다가 눈 끝을 휘어 예쁘게 웃는다. 입술을 오물거려 연신 노래를 부르면서도 호를 그려 넣은 미소가 온전히 버키를 향하고 있었다.
Try to remember and if you remember. Then follow, follow...
아아- 버키는 웃었다.
흔들리는 것은 그의 마음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꿈을 꾸는 그의 마음이 바람결에 흩날리고 있었다.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버키는 행복했다.
-
스타크 부부가 죽고 하이드라가 토니를 납치했는데 뒤로 쉴드랑 연락하면서 탈출 계획을 세우고 있던 거지. 그걸 눈치챈 피어스가 버키를 보냈는데 토니는 이미 버키가 자기 부모님 죽였다는 거 알고 있었고 세뇌 때문에 그렇게 된 것도 다 알고 있던 거. 스티브가 찾는 거 아니까 몰래 정보 알려주고 버키 데리고 탈출 계획 생각하고 있는데 생각보다 빨리 들켜버린 거야. 최악의 경우 버키 죽이고라도 나올 계획이었는데 처음에는 불쌍해서, 그러다가 어느 순간 사랑에 빠져버리니까 이 사람은 어떻게든 살려야겠다 싶어서 작전 날 자기 입을 아머 씌워서 날려보낸 거. 자기는 나타샤가 겨우 살려주고. 버키가 자기 죽이겠다고 하는 하이드라에 대항해서 목숨 던질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버키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며느리도 모름. 오픈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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