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lueberry Nights

( Steve Rogers x Tony Stark, Loki Asgard x Thor Asgard, Bruce Banner x Clint Barton )

 

 

 

 

 

 

 



 

1. 반지에 남겨진 미련.

 

겨울의 초입이었다. 딸랑- 차임벨이 울리면서 사람들이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면서도 스티브는 즐겁게 웃었다. 문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뉴욕의 차가운 겨울바람 때문에 스티브의 다부진 팔뚝 위에도 오도독 소름이 돋았다. 그 손은 허공을 가로지르며 그 추위들을 잊고 놀라운 열정으로 바삐 커피를 내리고 음식을 만들며 분주했다. 그 분주함만큼이나 어지러운 재즈 음악이 낡은 라디오를 타고 어지럽게 흐트러졌다. 천둥이 내리치는 것처럼 지하철이 지나갔다. 낡은 카페 전체가 부르르 떨며 위태롭게 흔들렸다. 따르릉- 카운터에 있는 전화기가 울렸다.

 

 

여보세요? 네, 네. 맞는데요. 금발 여자요? 손님이 많아서 그렇게 말하시면 누군지 몰라요. 미트로프. 미트로프라.. 사이드로는, 으깬 감자요? 아뇨, 그건 우리 집 제일 잘 나가는 메뉴라. 연락처 적어주세요. 혹시 생각나면 연락드릴게요.

 

 

이상한 전화는 금발의 여자를 찾았고 스티브는 그의 연락처를 메모지 위에 대충 휘갈겨 썼다.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금발의 여자는 기억나지 않을 지도 몰랐고, 심지어 그 짧은 통화마저 잊혀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기억을 앗아가기엔 무색하게도 그 금발의 여자를 찾는 전화 너머의 남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스티브의 카페로 찾아왔다. 고급 정장을 피트 되게 차려입고 나이가 조금 있어 보이는 그는 작은 손가락들로 딸랑- 차임벨이 울리는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카페 안은 여전히 소란스러웠고 그는 어딘가 그 소음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처럼 좀 초조해 보였다. 어지러운 카페 안에서 그는 거의 고함을 지르듯이 스티브에게 말을 해야 했다. 그의 미간이 짜증스럽게 구겨졌다.

 

 

키가 조금 크고 말랐어. 금발을 묶고 다니기도 하고 푸르면 약간 컬이 지는데..

그런 사람은 많아요. 다른 특징은 없어요? 이봐! 그건 7번 테이블이라고!!

제길, 이 근처에 살아서 자주 온다고. 미트로프.. 그래 폭찹, 폭찹을 좋아하는데.

오, 폭찹! 진작 말하시지. 우리 집에서 제일 맛있는 메뉴인데.

이봐, 그게 중요한 게 아냐, 그녀를 봤어?

미트로프와 폭찹. 사이드로 으깬 감자를 좋아하는 키 큰 금발 여자. 네, 봤어요. 어제 폭찹 2인분을 사갔죠.

2인분?

애인이랑 둘이 먹었나 보네요. 저희 집 폭찹은 양이 꽤 많아서 2인분을 다 먹으면서 마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걸요?

 

 

제길. 그 남자는 머리를 흐트러뜨리면서 카페 밖으로 나가버렸다. 스티브는 바삐 움직이면서도 호기심 넘치는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남자는 카페 입구에서 망설이듯 서성거리다가 누군가에게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비싼 구두코가 언 바닥을 얕게 두드린다. 카페 안은 복작거리며 시끄러웠고 라디오는 여전히 어지러운 재즈 음악을 뱉어내고 있었다. 치익- 커피가 담긴 포트가 열기를 내뿜으며 울었다. 그 소음 사이로 밖에서 통화를 하는 그의 고함소리가 언뜻 섞여 왔다.

 

 

Fuck, 페퍼! 이렇게 쉽게 끝내자는 거야?! 오... 오, 모두 내 탓으로 돌리지마!! 일이 많은 건... 그건 당신도 알고 있었잖아! 나는... 당신이 이해 해줄 수 있을 줄 알았어. 그래... 그래, 알아. 내가 나빴지. 하지만... Shit! 왜 하필 그 자식이야! 필? 필?! 언제부터..!! 됐어, 그만둬. 말 돌리는 게... 울지 마. 페퍼, 울지 마. 나는..

 

 

남자는 몇 번이고 입을 열었다가 또 머뭇거리며 침묵했다. 날카롭게 전화가 끊겼다. 딸랑- 차임벨이 거칠게 울렸다. 퍼덕이는 도어가 요란하게 움직였다. 이젠 초조함보다 분노가 섞인 그는 짧은 손가락에 알맞게 들어차있는 반지를 빼어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탁- 나무와 금속이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가 섞였다. 스티브는 피어오르는 김 사이에서 그의 얼굴을 보았고 또 이별을 보았다.

 

 

이거 그 여자한테 전해줘.

 

 

남자는 몇 번인가 스티브에게 말을 하려는 듯 입을 꿈쩍거리다가 이내 들어왔던 것처럼 다급하게 카페를 나갔다. 딸랑- 차임벨이 다시 날카롭게 울렸다. 남자는 택시를 잡으려다가 허공에 욕을 했다. 길거리에 버려진 유리병이 그의 발에 체여 산산조각이 났다. 그는 어디론가 떠났다. 스티브는 반지를 집어 들었다. 심플한 반지에 보석이 알맞게 들어간 반지 안쪽에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페퍼와 토니의 영원한 사랑을 위해. 어쩌면 그들이 헤어진 이유는 ‘영원한 사랑’따위의 진부한 표현 때문이었을 지도 몰랐다. 그들은 이별했고 남은 반지만 영원히 보존될 것이다. 그 묵직한 것이 바 구석의 유리병에 넣어져 다른 잡동사니들과 섞여버렸다. 바래진 추억들 사이에서 반지만 반짝 빛나고 있었다.

 

 

 

 

***

 

 

 

 

남자, 토니 스타크는 다시 카페를 찾았다. 반지를 던지고 나온 바로 그 다음날 카페가 닫을 때쯤의 늦은 밤이었다. 그는 처량 맞은 얼굴로 바람을 잠시 쐬러 나온 스티브에게 다가왔다. 성내던 모습과는 달리 조금 차분해진 그는 어제와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대화 상대가 필요하다며 말하는 그를 스티브는 이미 가게를 닫을 늦은 시간임에도 선뜻 들여보내 주었다. 같이 일하는 주방장 버키 마저도 퇴근한 카페 안은 평소와는 달리 조용했다. 스티브는 멈춰버린 라디오를 틀려다가 말았다. 고요한 공기를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였다.

 

 

그 남자, 그러니까 콜슨. 페퍼와 폭찹을 먹은 남자. 내 비지니스 파트너였지. 착하고 다정한 남자야. 어쩌면 나보다 페퍼에게 더 어울릴지도 모르고.

폭찹 1인분을 나눠먹을 정도의 남자는 아니었겠죠.

 

 

네온사인이 비추는 카페의 전경을 보면서 그는 쓸쓸하게 얘기를 시작했고 스티브는 테이블에 앉은 그를 멀찍이서 마주보고 있다가 위로하듯 말을 내던졌다. 우리 집 폭찹은 양이 꽤 된다고요. 스티브의 입가에 다정한 미소가 걸리자 토니도 못내 웃는 듯 했다. 단정한 구둣발이 바닥에 닿지 못하고 허공을 휘젓는다. 고양이 꼬리처럼 흔들리는 그것이 고요한 카페 안으로 작은 소음을 냈다. 부딪히지 않는 그저 공기를 가르는 작은 바람 소리. 토니는 단정하고 각 잡히게 입은 양복과는 달리 테이블 위로 흐트러졌다. 대화상대가 필요하다는 말과는 달리 그는 침묵을 고수했고 스티브는 이 카페에 내려앉은 익숙하지 않은 이 침묵을 깨트리고 싶었다. 냉동 진열대에 거의 다 잘려 나간 파이들 사이 온전하게 형태를 갖고 있는 파이를 꺼냈다. 접시도 파이도 온통 차갑게 얼었다.

 

 

이상한 건, 이 파이만 유독 팔리지 않는단 거예요. 애플파이, 치즈케잌은 매번 동이 나고, 심지어 다른 것들도 모두 나가는데 블루베리파이만 항상 이 모양으로 남죠.

맛없는 거 아냐?

맛있어요. 제가 다른 데서 먹어 본 블루베리 파이보다 이게 제일 맛있으니 더 이상하다는 거죠. 한 번 먹어 볼래요?

한 조각 줘봐.

아이스크림도?

응, 바닐라로.

 

 

손이 바삐 움직여 파이를 썰고 렌지에 데워 작은 접시 위로 옮겼다. 블루베리의 보랏빛 과즙이 스며든 파이의 단면이 스르르 녹아내리고 그 위로 하얀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얹어졌다. 따뜻한 파이에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이 파이 단면에 하얗게 스며들어 먹음직스럽게 비춰졌다. 첫 블루베리파이 시식자에 신이 난 스티브가 콧노래를 부르며 접시를 토니에게 주었다. 앞에 놓인 파이를 물끄러미 보다가 토니가 포크를 집어 들었다. 뾰족한 끝이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파이 표면을 찢어내고 블루베리와 녹은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섞인 안을 헤집어 떠낸다. 작게 조각난 파이가 입속으로 들어갔다. 분홍색 혀 안으로 숨는 그것들이 새큼하게 올라오는 침과 섞였다. 남아버린 피칸파이를 퍼먹으면서 스티브는 자신만만하게 물었다. 맛있어요? 혀 안을 순회하며 달콤하고 시큼한 맛을 내는 걸 씹어내며 토니가 웃었다.

 

 

응, 맛있네.

 

 

 

 

 

 

침묵이 비집고 들어올 틈을 만들지 못하도록 밖에서 힘차게 달리는 지하철이 카페를 흔들었다. 무너질 것처럼 부스스 떨고 있는 마룻바닥과는 달리 침묵이 머물다간 카페 안 공기는 안정되어 있었다. 바 위에서 작게 소음을 냈던 잡동사니가 들어있는 유리병 표면을 작고 거친 손가락이 매만졌다. 테이블에 있던 토니는 어느새 바 앞에까지 침범했다. 유리병 안에 그가 어제 버려두고 간 반지가 여전히 꺼지지 않는 빛을 뽐내고 있었다. 왜 이런 것들을 모아? 라고 토니가 물었을 때 스티브는 행주로 접시를 닦아내며 말했다.

 

 

아직 전해지지 않은 물건을 버릴 권리는 내게 없잖아요. 언젠가 누군가가 와서 이 물건을 주세요, 했는데 내가 버려버리면 안되니까 갖고 있어요. 아직까지 아무도 찾아가진 않았지만.

누군지는 기억해?

전부 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똑똑한 줄 알았는데, 기억력도 좋군, 자네.

골라 봐요.

 

 

턱을 괸 탓에 볼록하게 올라온 볼 위로 입술이 개구지게 웃었다. 너스레를 떠는 것이 한결 나아진 모양이었다. 표면을 매만지던 손이 병 안으로 들어가 경품을 추첨하듯 물건 하나를 끌어올렸다. 회전목마가 그려진 지포라이터였다. 나무로 된 바에 마찰하며 묵직한 소리를 내자 스티브가 입을 열고 사연을 털어놓았다. 그건 어떤 나쁜 남자를 좋아하던 소녀 것이었죠. 10대에 할 수 있는 위험한 사랑에 목매다가 그것만 놓고 사라졌어요. 다시 병으로부터 물건이 빠져나간다. 파란색으로 예쁘게 투명한 유리구슬이었다. 그건 어떤 노신사. 사랑하는 아내의 목걸이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더군요. 장례식 후였는지 검은 양복을 입고 왔었어요. 얼마 전에 아내 품으로 가셨고. 낡은 바 위로 여러 가지 물건들이 쌓여 올랐고 그 때마다 나긋한 목소리는 그 물건들에 얽힌 추억들을 이야기해주었다. 다시 병으로부터 물건이 빠져나간다. 이번엔 별모양 열쇠고리가 달린 녹슨 열쇠였다. 바닥으로 내려앉은 그것을 보면서 스티브는 접시를 내려놓았다. 행주로 대충 손을 씻은 그는 차마 그 열쇠를 만지지 못하고 그 근처에 손을 내려놓았다.

 

 

그러니까 그건, 어떤 군인의 것이었죠. 아프카니스탄에서 전쟁을 치르다가 막사 안에서 사랑을 나누던 연인과 결혼하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왔었죠.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게 꿈이라 직업이었던 군인마저 그만뒀는데 갈색 머리가 예쁘던 여자는 그럴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죠. 그녀는 다시 아프카니스탄으로 돌아갔고, 남자만 혼자 남았죠.

설득하지 못한 건가?

사랑이 설득한다고 되던가요? 라고 그녀가 말했다고 하더군요. 여자들은 감정적인 문제를 이성적으로 끌어내기 때문에 그걸 따라가려면 힘에 부쳐요.

 

 

톡톡 다듬어진 손톱이 바 위를 두드렸다.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토니는 그 젊은 군인의 손을 잡아 주려다가 차마 그러지 못하고 땀이 고인 손바닥을 바지 위에 슬쩍 닦아냈다. 작은 접시 위 아이스크림이 반은 녹아내려 하얗게 웅덩이를 만들고 그 위로 블루베리의 과즙이 그림을 그리듯 얽혀 기묘한 모양을 만들어낸다. 아이스크림 더 줄까요? 스티브의 물음에 고갤 저었다. 블루베리 파이가 흔적도 없이 달큰한 입 안으로 사라져갔다. 언젠가 물건들이 남겨져 사라졌을 기억들처럼.

 

 

 

 

***

 

 

 

 

날은 또 계속해서 바뀌었고, 카페는 언제나처럼 다시 소음으로 가득 찼다. 낡은 라디오는 제멋대로 무질서한 재즈 음악을 흘려보내고 사람들의 입에선 일상의 속삭임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렇게 분주한 하루가 지나면 곧 어둠과 함께 침묵이 찾아오고 곧 토니가 올 것이다. 사람들이 머물다간 흔적이 사라지면 토니는 항상 카페로 들어왔다. 스티브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를 기다리며 그가 앉았던 자리에 냅킨을 올리고 작은 앞 접시와 포크 나이프를 세팅해 놓았다. 그 침묵의 시간 안에서 지하철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다섯 번쯤 지나갔고 그 때쯤 토니가 카페로 들어섰다. 늦었네요? 스티브의 웃음에 토니도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자리에 앉지 않았다. 그저 조금은 주저하는 듯 하다가 이내 단호함을 등에 얹고 스티브를 바라보았다.

 

 

반지 돌려줘.

 

 

내미는 손은 작았지만 흔들림이 없었기에 스티브는 유리병 가장 위쪽에 놓인 반지를 꺼내 그 손에 올려주었다. 화해했어요? 조금은 억지스러운 밝음으로 스티브는 물었고 토니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저 고맙다는 짧은 인사만 남기고 떠났다. 짤랑- 차임벨이 울리고 시린 뉴욕의 겨울바람이 스며들었다. 차가운 바람이 스티브의 온 몸을 감싸 안다가 가슴 안으로 스민다.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스티브는 몇 번이고 안절부절 못하는 듯 손으로 입술을 매만지고 시선을 돌려보다가 돌아섰다. 그리고 주인 없이 덩그러니 놓여 진 식기들을 치웠다. 몇 번이고 씻었을 그것들이 세면대에 처박혔다.

 

 

 

 

 

 

스티브는 기계에 대해 전혀 모를 뿐더러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카페 구석에 달린 CCTV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화면이 일그러지는 것을 바로 잡기 위해 의자를 딛고 이것저것 만져보았다. CCTV의 화면이 파랗고 빨갛게 스티브의 얼굴을 담아냈다. 카페 안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언제나 소음뿐인 카페 안을 살을 부대끼는 소리와 욕설로 혼란을 만들어냈다. 이봐요!! 스티브가 재빨리 몸을 돌려 그들을 말렸다. 그러다가 잘 못 해서 콧대를 맞았다. 스티브의 주먹이 콧대를 짓누른 남자의 배에 꽂혔다. 싸울 거면 나가서 싸워!! 그들의 목덜미를 잡아챈 억센 팔뚝은 티셔츠 표면 위로도 보이는 근육이 바짝 서서 겁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그들은 줄행랑을 쳤다. 아, 젠장. 평소라면 입 밖에 내지 않을 욕을 지껄였다. 얼얼한 콧대를 부비자 후드득- 코피가 쏟아졌다. Shit. 티슈를 뽑아 다급히 막아본다. 하얀 티슈 위에 빨간 피가 물감처럼 번졌다.

 

딸랑- 차임벨이 울렸다. 들어온 것은 그들이 아닌 토니였다. 토니는 조금 헐떡이고 흐트러진 모습으로 스티브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도 줘. 그 것이 티슈라는 것을 알아차리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의 얼굴이 엉망으로 터져 코 밑으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까 전 반지를 가지고 당당하게 나가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 자식이 때렸어요?

아니, 아냐. 그냥.. 강도당했어. 제길, 젠장 맞을 브루클린!

이 코앞이 그 여자 집이라면서 강도는 왜 당해요?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어! 골목길을 좀 산책하다 마음이 좀 가라앉으면 그 때 반지를 돌려주려 했단 말야. 그런데 당신이야 말로 왜 그래?

그냥... 초콜릿을 좀 많이 먹었어요. 그것보다 괜찮아요?

응, 나도 반지도. 괜찮지 않은 건 그놈들일걸? 구둣발로 거시기를 차줬으니까.

 

 

둘은 코 밑을 흐르는 피를 닦으면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닮아있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저도 모르게 실없는 웃음을 지어 보인다. 유리 문 밖으로 빵빵- 거리며 크락션을 울리는 차들이 지나가고 교량 위에 덜컹거리며 위압적인 소리를 내는 지하철이 지나갔다. 낡은 라디오는 여전히 작게 어지러운 재즈 음악을 불렀고 그 사이로 둘의 작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토니가 앉던 자리에 다시 세팅이 올려졌다. 그리고 그 위로 블루베리 파이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담은 접시가 올라온다. 끝이 뾰족한 포크로 단단하고 부드러운 표면을 누르면 블루베리의 과즙이 포크에 얹혀 온다. 그걸 아이스크림과 함께 떠서 입 안에 넣으면 달큰하고 시큼한 맛이 입 안을 점령했다.

 

스티브는 다시 CCTV 삼매경이다. 블루베리파이는 레시피 대로 만들면 맛있는 맛을 내지만 기계는 어디서부터 잘 못 되었는지 몰라 끙끙거렸다. 내가 봐줄까? 토니가 선뜻 말했다. 스티브는 의자 위에 서서 토니를 내려다보았다. 자신과 똑같이 코 안에 하얀 휴지를 집어넣은 토니가 멀뚱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계 고칠 줄 알아요? 순진한 물음에 파이를 한 입 더 배어 물은 토니가 유쾌하게 말했다.

 

 

손 있고 머리 있음 그깟 작은 CCTV 정도야.

난 손 있고 머리 있는데 잘 안되네요. 기계랑 친한 줄은 몰랐는데.

이래봬도 MIT 수석이야. 비켜. 이거 고쳐줄게. 대신 보여줘.

뭘요?

찍힌 영상.

 

 

그 영상의 시점이 언제쯤이냐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그게 언제인지, 또 누구를 찍은 것인지 스티브는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어깨를 으쓱이며 그가 내려왔고 토니가 올라갔다. 그는 닿지 않는 키 때문에 까치발을 들고 기계를 이리저리 보다가 드라이버로 어떤 한 구석을 톡 건드렸다. 카운터 안에 있는 CCTV 화면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오- 감탄사를 내뱉은 스티브를 향해 이번엔 토니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바 안쪽은 비좁아서 화면을 보기 위해선 두 남자가 옹기종기 모여 쭈그리고 앉아있어야 했다. 낡은 TV 화면 위로 익숙한 카페의 전경이 비춰진다. 토니가 이 카페에 오기 전의 어느 날의 어떤 시점이 화면 안에 비춰졌다. 파랗게 깜빡이는 화면 안에 잡히는 금발머리 여성과 단정한 정장을 입은 남자는 폭찹을 주문하며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문득 토니를 보았을 때, 그 높게 솟은 속눈썹 위로 작게 습기가 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토니는 코피를 막았던 휴지마저 빼버린 채 정말 서럽게 훌쩍였다. 비록 입 밖으로 처절한 울음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아마 아무도 보지 못하는 이 작은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감정표현이었을 것이다. 스티브의 다부진 팔이 토니의 여린 어깨를 감싸 안았다. 품에 안기면서도 토니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위로를 남기듯 스티브의 입술이 정수리에 닿았다. 그렇게 스티브는 그를 한참이나 안고 있었고, 토니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세상은 깜깜한 어둠뿐이었다. Close 팻말이 붙여지고 반짝이는 조명이 꺼졌는데도 내부의 밝은 형광등 하나는 꺼지지 않고 그들을 비추었다. 바 안쪽 주방에 앉아 스티브는 깔끔하게 비워진 접시를 치우고 토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블루베리파이는 이미 잔뜩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으로 엉망이 되었지만 그는 끝까지 그걸 입에 쑤셔 넣었다. 초라하게 지쳐 바에 엎드려 자고 있는 토니의 입가에 하얀 아이스크림이 묻어 있었다. 분홍색 입술 위에 뭍은 하얀 크림이 입술에 진 여러 주름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지하철이 지나갔다. 우르릉- 천둥치는 소리처럼 지나간 탓에 카페 안이 삐걱거리며 울었다. 라디오는 언젠가부터 멈춰있었다. 밖에는 더 이상 차가 다니지 않았다. 잦게 이는 바람소리조차 들리지 않은 온전한 침묵 안에 그가 내는 작은 숨소리만 울렸다. 토니의 지친 얼굴 위로 작게 그림자가 진다. 스티브가 고개를 숙인다. 탁- 탁- 탁- 시계가 초침을 움직이며 작게 울었다. 그리고 스티브가 굽힌 허리를 폈다. 토니의 지친 얼굴 위에 졌던 그림자가 떠나간다. 분홍색 입술에는 더 이상 아이스크림이 없었다. 스티브는 혀끝에 닿았던 달콤한 맛을 떠올리며 아랫니 뒤 쪽을 살짝 핥았다. 자고 있던 토니가 슬쩍 아랫입술을 빨았다. 깨끗한 입술이 짙게 호가 그려지며 미소를 지었다. 마치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끝내 눈을 뜨지는 않았다.

 

 

 

 

 

딸랑- 차임벨이 울렸다. 겨울바람에 문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달칵- 문이 닫힌다.

 

토니는 그 날 반지만 남겨둔 채 사라졌다.

 

 

 

 

 

 

2. 미련을 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 Day 1. (ny)

 

지하철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교각 위를 지나갔다. 신호등이 깜빡이는 교차로에 사람들과 차들이 분주하게 지나갔다. 그 어중간한 곳 어디 즈음에 서서 토니는 위를 올려보았다. 고풍스러운 아파트 어느 한 창문은 노란색의 밝은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창문을 열고 창가 위에 걸터앉은 금발의 여자는 뒷모습뿐이었지만 웃고 있다는 것이 확연하게 보였다. 그녀를 향해 어떤 남자가 다가왔다. 셔츠 단추를 두어 개쯤 푸른 남자는 조금 흐트러져 있었지만 젠틀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녀의 손이 다정하게 그의 목 어딘가를 쓰다듬는 것까지 토니는 보았다. 토니는 더 보지 못하고 바닥에 시선을 떨구었다. 비싼 구두의 네모난 코가 바닥 타일 사이를 비집고 있었다.

 

안녕이라는 인사조차 하지 못한 것을 토니는 떠올렸다. 하지만 그는 결국 마지막 인사를 건네지 못하고 등을 돌렸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살 위로 오도독 돋는 소름을 감추려 팔을 부비었지만 매정한 바람은 코트 사이사이로 스며들어 그를 괴롭게 했다. 아스팔트 위를 딛는 발걸음이 빠르지만 무겁다. 횡단보도는 저 멀리쯤 있었다. 토니는 길을 건너기 위해 조금 멀리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떠났다.

 

 

 

 

***

 

 

 

 

To. Steve.

이 편지가 도착했을 때쯤에 난 멤피스에 있을 거야. 사업상이라는 명목으로 핑계를 댔지만 호텔에 있을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쉴틈 없이 바빠. 내 새로운 비서는 날 쉬게 할 생각이 전혀 없었나봐. 아침은 간단하게 카페에서 해결하고 해가 떠있는 동안은 여러 거래처를 들쑤시고 다니다가 저녁때엔 호텔에 있는 바에서 한 잔 하고 잠이 들지. 잔소리쟁이인 자네가 안다면 주정뱅이라고 했을지도 모르겠군. 걱정 마, 매번 술을 마시진 않으니까. 자네를 대신해 내 말동무가 되어주는 사람들이 있거든. 바 주인인 퓨리라는 짱짱한 꼰대랑 바텐더인 마리아가 다지만... 어쨌든 난 잘 지내. 아주 바쁘고 말야. 그 덕에 여기선 그녀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네.

Tony.

 

 

 

 

 

 

3. 하얀 칩의 제왕 - Day 57. (1,120 miles since ny)

 

이제 오늘 할 일은 다 끝났네요. 서류를 정리하며 나타샤가 드물게 웃었다. GOD! 토니는 땀이 나는 머리를 넘기며 신을 찾았다. 높은 구두가 바닥을 두드리며 또각이는 예쁜 울림을 냈다. 한 잔 하지 않겠냐는 토니의 말에 나타샤는 지금 나 보고 하는 말이냐며 웃었다. 그녀는 러시안이었다.

 

호텔에 딸린 바 안에는 진한 시가 냄새와 쾌쾌한 담배 냄새, 그리고 텁텁한 알코올과 여자들의 향수냄새로 코를 자극시켰다. 바 옆에 놓인 커다란 오디오에서는 스테레오 사운드로 아름답게 울리는 바이올린 선율이 단조롭게 흘러 나왔다. 그 사이로 사람들의 속삭이는 소리들이 섞였다. 사랑을 나누는 연인, 사업을 하는 비즈니스 파트너, 서로를 축하하고 때로는 위로하는 친구들이 옹기종기 앉아 자기들만의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홀로 선 토니는 바에 앉았다. 작은 미소와 올곧은 눈빛이 매력적인 바텐더 마리아가 그를 반겼다. 오늘은 좀 늦었네요? 보드카를 믹스하며 그녀가 말했다. 오늘은 할 일이 좀 많았어. 토니의 주먹이 가볍게 마호가니 나무로 된 바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투명하고 아름다운 유리잔에 호박색 술이 따라지고 얼음 몇 개가 넣어져 잔 안을 가득 채웠다. 손 안의 잔을 가볍게 흔들자 얼음이 부딪히며 작은 소음을 냈다. 코 안으로 아일레이산 싱글몰트 스카치 특유의 스모키한 향이 번졌다.

 

마른안주로 나온 땅콩을 손에 굴리며 마리아와 농담 따먹기를 하다가 바 한 구석에 홀로 앉아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남자는 고주망태로 취해 바 위에 머리를 밀어 넣을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긴 금발 머리가 흐트러져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고집스럽게 다부진 손아귀 안에 술잔을 놓지 않았다. 무채색 술이 그가 꾸벅일 때 마다 위태롭게 흔들렸다.

 

 

저 치는 누구야?

아, 주정뱅이 토르에요.

매번 이렇게 늦게 와?

네. 이 호텔 오너 아들인데 한량이라 낮에는 이 동네 지구대 일을 좀 하다가 밤에는 여기로 오죠.

 

 

토니는 잘 다듬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그를 유심히 보다가 마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못 말리겠다는 듯 옅게 웃더니 그 손 위로 계산서를 내어 주었다. 계산서 위에는 꽤 긴 숫자들의 나열이 타이핑되어 있었다. 토르가 고개를 들어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슬로우모션처럼 잔이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간다. Hey. 하얀색 계산서 종이가 토르의 술잔 옆으로 내밀어졌다. 고개가 돌아가고 축 늘어진 금발 사이에 파란색 눈이 토니를 바라보았다. 문득 토니는 멤피스에 발 닿았을 때 처음 썼던 편지를 기억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여기서 일하나?

아니, 당신처럼 술이나 마시는 사람. 오늘은 마리아가 좀 바빠 보여서. 당신이랑 말도 붙일 겸. 외롭게 혼자 와서 대화 상대가 필요하거든.

흠...

 

 

말을 하는 입술은 단정했지만 그 사이로 나오는 묵직하고 느릿한 음성은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다. 술잔을 놓은 손이 계산서를 가져갔다. 그리고 품에서 펜 하나를 꺼냈다. 검정색에 금색 띠가 둘러진 고급스런 만년필은 금박으로 글씨가 새겨져 있었지만 누군가의 이름처럼 보이는 그것은 알아보기 힘들었다. 만년필의 까만 잉크가 계산서 위에 묻어 나왔다. 자신의 이름처럼 보이는 글씨들은 단정치 못하고 이리저리 휘갈겨져 도통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끝이 굵은 손가락이 그 계산서를 밀어냈다. 달아둬, 계산은 나중에 수표로 하지. 토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산서를 받아 들였다.

 

 

당신이랑 더 얘기 하고 싶지만... 안타깝군.

왜?

오늘이 마지막이야, 여기 오는 거.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하얀 이를 드러내 웃었다. 그 웃음은 어딘가 환한 웃음이라기보다는 비꼬인 듯 한 것 같았다. 마지막 술이 그의 목으로 넘어갔다. 꿀꺽- 목울대가 울리고 탕- 유리잔이 바 위로 거세게 내려왔다. 그럼. 남자는 비틀거리는 몸을 억지로 추스르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품을 뒤적여 낡은 지갑을 꺼내 그 안에서 10달러짜리 지폐 하나를 꺼냈다. 바에 던져진 구겨진 지폐는 초라했다. 팁. 토르는 씨근거렸다.

 

스텝이 꼬여 테이블에 몇 번이고 부딪힐 뻔 하다가 힘겹게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을 지탱하는 경첩이 삐걱 이며 울었다. 토니는 빈 잔에 다 녹지 못한 얼음들을 바라보다가 제 술잔에 담긴 술을 마셨다. 토니에게 계산서를 받아든 마리아가 그 사인이 되어 있는 계산서를 바 안쪽 벽에 붙였다. 같은 사인이 붙여져 있는 수십 장의 계산서 위로 한 장이 더 얹혔다.

 

 

 

 

***

 

 

 

 

다시 그와 재회하게 된 것은 바로 다음날이었다. 카페에서 늦은 브런치를 즐기다가 깔끔한 복장에 금발을 묶어낸 남자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Hey. 경쾌한 목소리를 알아차리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어제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토니는 조금 놀란 듯 했지만 이내 옆 자리를 내어주었다. 아이보리색의 지구대 제복은 피트되어 그에게 어딘가 딱 맞아보였다. 허리춤에 찬 무전기에서 치직거리는 무전 소리가 어지럽다. 토르는 프랜치식 토스트와 블랙커피를 시켰다.

 

 

자네가 쌍둥이가 아니라면 또 보는 거겠군.

오, 난 내가 쌍둥이였으면 좋겠네. 내 비서는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라. 좀 쉬고 싶은데 쉴 시간이 없어.

난 아니라서 다행인데.

왜?

나 같은 사람은 너무 많거든.

 

 

그러면서 토르는 좁은 카페 안을 휘휘 바라본다. 토니도 그 시선을 따라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득 찬 카페 안에는 여러 사람들이 있다. 혼자 온 할머니가 바닥에 내려놓은 지팡이를 잡으려 애를 썼고, 세 명의 아이들을 데려온 부부가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청바지에 모자를 쓴 10대 아이들이 커피를 마시면서 신나게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는 곳에는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리를 꼰 채 서로의 손톱을 자랑하고 있는 여자들이 있었다. 그저 평범할 뿐인 사람들 사이에 토르는 전혀 어색하지 않는 것처럼 끼어 있었다.

 

둘은 식사하는 내내 서로에게 말을 붙이지 않았다. 침묵은 익숙하지 않았지만 몇 번 토르에게 말을 건넸던 토니는 이내 입 열기를 포기했다. 토르는 어딘가 불안하게 먹는 내내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찾는 것도 같았고, 사람들의 시선에 눈치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커피까지 말끔히 마시고 나서야 토르는 토니를 보았다. 거기까지 오기가 꽤 긴 시간인 것 같았다.

 

 

자네는 왜 여기에 왔나?

그냥 여행. 그러기엔 내가 하는 일이 너무 많아서 여행 같지도 않지만.

 

 

차마 뉴욕에서 도망쳐 나왔다는 얘기를 하지 못했다. 좋군, 좋아. 토르는 껄껄거리면서 웃었다. 환하게 빛나는 미소가 어제와는 달라 생소했다. 아니 또 익숙하기도 하다. 카페, 금발, 그리고 다정한 미소. 그걸 생각하다 토니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토르는 계산을 하고 나갔다. 토니는 그가 나간 빈자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핸드폰이 몇 번인가 울리는 것 같았지만 받지 않았다. 토니는 문득 그녀가 아닌 다른 것을 그리워하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어김없이 해는 떨어지고 저녁은 찾아왔다. 카페에 앉아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나태한 시간을 보낸 탓에 저녁 늦게까지 나타샤에게 붙잡혀 일을 해야 했다. 잔뜩 지친 걸음으로 바에 가자 똑같은 자리에서 마리아가 반겼다. 오늘은 오너인 퓨리도 있었다. 오늘은 논 알콜 칵테일을 시켰다. 카페에서 보냈던 어딘가 붕 뜬 느낌을 술로 지우고 싶지 않아서였다. 토니의 건의를 받아 오늘은 바 전체에 어지러운 재즈 음악이 울렸다. 경쾌한 박자가 고급스런 스피커를 통해 울려 귀를 즐겁게 했다.

 

유리문이 열린다. 경첩이 또 시끄럽게 울었다. 퓨리는 경첩에 기름칠을 해야겠다며 투덜거렸다. 음료수 같은 칵테일을 마시고 있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 두터운 손으로 등을 쳤다. 초록색과 파란색이 오묘하게 섞인 칵테일이 잔 안에 위태롭게 흔들렸다. Hey. 경쾌한 목소리는 낮에 카페에서 들었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밝은 웃음이 가득한 토르는 낮의 단정한 복장과는 다르게 어딘가 다소 흐트러진 모습이다. Hey. 토니도 반갑게 인사했다.

 

 

어쩐 일이야?

축하하러 왔지!

뭘?

오늘이 내가 술 마시는 마지막 날이야!

 

 

그 말이 어제 들었던 무겁고 느릿한 목소리와 겹쳐져서 토니가 오묘한 표정을 했다. 토르가 앉아서 보드카 스트레이트를 시켰다. 바 구석 멀찍이서 퓨리가 토니에게 손짓을 했다. 잠시만. 양해를 구하고 퓨리에게 다가가자 억센 손이 그를 잡아끌었다. 저 치랑 알아? 퓨리의 검은 표정은 어딘가 이상하다. 어제 만났고 오늘 낮에도 만났고 이번에 만난 게 세 번째라고 토니는 털어 놓았다.

 

 

찝쩍거리거나 그런 건 아니고?

아니, 그러진 않았어. 게이야?

뭐... 때린 건 아니겠지?

그럴 사람은 아닌 것 같던데.

 

 

퓨리가 어딘가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의 눈이 술에서 진탕 마시고 있는 토르에게 향했다. 벌써 그의 앞에 세 개의 빈 잔이 놓였다. 쯧- 짧게 혀 차는 소리가 났다. 그럼 됐어, 혹시라도 찝쩍거려도 그러려니 해. 부리부리한 눈이 경고를 하듯 토니를 다그쳤다. 어딘가 속사정을 알고 있는데 숨기는 것 같은 느낌에 토니가 물었다.

 

 

호텔 오너 아들이라며? 잘 사는 거 아녔어??

아직도 그렇게 생각해서 문제인거지...

 

 

그렇게 말했을 때 유리문이 열렸다. 경첩이 또 시끄럽게 울었다. 시선이 간 곳에 어떤 남자가 들어왔다. 단정한 양복을 멋들어지게 입고 긴 검은 머리를 세련되게 빗어 올린 남자의 목에 녹색에 금색 자수가 수놓아진 고풍스런 머플러가 걸쳐져 있었다. 토니가 신은 구두만큼이나 비싸 보이는 구두가 나무 바닥을 두드리며 고아한 걸음을 옮겼다. 타이밍 맞게 스피커에서는 어딘가 우아하면서도 매혹적인 음악이 흘러나갔다. 바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눈에 잡혔다. Shit. 토니는 작게 지껄이는 퓨리의 욕지기를 들었다. 그리고 술에 흐트러진 토르가 정신이 번쩍 든 듯 남자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남자는 토르를 못 본냥 지나쳤다. 하얀 피부에 잘생긴 얼굴이 가식적으로 웃었다. 퓨리도 그에 따라 웃었다.

 

 

퓨리, 오랜만이야. 반가워.

로키, 오늘은 어쩐 일이신가? 지금쯤 LA호텔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일단 비지니스라고 해둘까?

 

 

로키가 엄지로 뒤쪽을 가리켰다. 호텔 카운터가 보이는 유리문 뒤쪽으로 빨간 드레스를 입은 매혹적인 여자가 그를 기다리는 듯 서있었다. 검은 머리를 흐트러트린 여자는 빨간 립스틱을 고쳐 바르며 바 쪽을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예쁘군. 퓨리가 순수한 감탄을 내질렀다. 로키가 넉살스럽게 어깨를 으쓱 거리며 킬킬거렸다. LA건은 잘 마무리 됐어. 잘 하면 오하이오 쪽에 호텔을 하나 더 지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아버지랑 상의도 해야 하니까. 여기에 온 이유를 줄줄 말하면서 그는 아까의 가식적인 웃음과는 달리 정말 흥미로운 웃음을 지었다.

 

토니는 멀뚱하게 그들을 보다가 슬쩍 지나가려고 했지만 그 시도는 길고 커다란 손에 제지되었다. 여자처럼 예쁘고 가는 손이 거미처럼 토니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토니가 그를 올려다보자 그 녹색 눈동자가 내리깔듯 그를 보았다. 아플 정도로 움켜쥐었던 손이 언제 그랬냐는 듯 스르르 풀어졌다. 그리고 악수를 청해온다. 바 안의 은은한 조명 아래 비추는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토니는 손을 마주 잡았다. 손아귀를 감싸 쥐는 손은 겉보기와 다르게 강인함을 가지고 있었다.

 

 

매니저가 거물이 왔다고 하더니 그게 토니 스타크일줄은 몰랐습니다. 로키 라우페이슨. 뉴욕 자선 파티에서 만난 적 있는데 기억 하실지 모르겠군요.

워낙 사람이 많았던 파티라 기억나진 않지만 라우페이슨이라면 알 것 같군. 당신 아버지 오딘과는 좀 친분이 있지. 여기 호텔도 아스가르드사 계열인 줄은 몰랐는데.

아스가르드사 계열이 아닌 아버지 개인이 따로 지은 호텔이라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아버지가 이 근처에서 요양을 하시는데 모르셨나 보군요.

어쩐지 파티라면 죽자 사자 오던 노친네가 안 보인다 했네.

 

 

투덜거리듯 내뱉은 농담에 로키가 유쾌하다는 듯 웃었다. 그의 점잔빼는 얘기를 들으며 마리아가 말했던 호텔 오너의 아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토르는 거의 굳어있는 것처럼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에게서 등지고 있는 로키의 뒤통수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가 어딘가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객실 서비스에 대한 간단한 얘기와 오딘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가 그는 여자를 더 기다리게 했다간 기껏 잡은 객실이 소용없게 되겠다며 대화를 마쳤다. 걸음을 돌리기 전 모양 좋은 웃음을 지으며 젠틀하게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가 발을 몇 발짝 떼었을까, 앞을 가로 막는 무언가에 의해 그 걸음은 멈췄다. 씩씩거리는 숨이 로키의 코끝에 닿아왔다. 무심하게 바라보는 시선 위에 잔뜩 흐트러진 토르가 있다. 뜨거운 숨 안에 지독한 알코올 냄새가 났다. 다듬어진 까만 눈썹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할 말 있어, 로키.

난 너랑 하고 싶은 말 없어.

 

 

아까까지 젠틀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굵직한 거부의 비명이 신경질적으로 울렸다. 악수를 하던 길고 커다란 손이 토르의 다부진 어깨를 밀었다. 스텝이 꼬인 토르가 엉망으로 주저앉았다. 그런 그럴 거들떠보지도 않고 로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비싼 구둣발이 바닥을 울렸다. 유리문이 열리고 닫힌다. 삐걱거리는 경첩이 울었다. 주저앉은 토르는 말이 없다. 그저 먼지 낀 바닥에 닿았던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그가 나간 문 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유리문 뒤로 빨간 드레스의 육감적인 여자가 로키의 품에 매달렸다. 열정적으로 키스하며 여자의 낭창한 손이 로키의 목에 감겼다. 토르는 그걸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침묵했다.

 

 

 

 

 

 

바 안은 한적하다. 이제 손님이라고는 거의 남지 않아 켜져 있는 불이라고는 바를 은은하게 비추는 조명 몇 개가 다였다. 금발이 엉망으로 마호가니 나무로 된 바에 흐트러졌다. 셀 수 없는 술잔이 줄을 서 있었다. 그나마도 마리아가 조금 치워 놓은 것이 저 정도였다. 토르의 이마가 몇 번인가 바 위를 두드렸다. 쿵- 쿵- 묵직한 소리가 어지러운 재즈 음악에 섞였다.

 

침묵. 토니가 오롯하게 지키고 있던 것이었다. 분명 아까의 만남에 대해 물어봐야 할 테지만 토니는 묻지 않았다. 대신 토르 옆에서 아무 말 없이 논 알콜 칵테일을 세 잔쯤 비웠다. 마리아가 곤란한 듯 인상을 찡그렸다. 바를 닫아야 할 시간이 되었던 것이다. 다부진 어깨를 망설이듯 툭툭 치자 토르가 고개를 들었다. 오.. 늘어지는 목소리로 그가 탄성을 냈다. 끝내야 할 시간이 됐음을 눈치 챈 것이다.

 

 

이런 말은 내가 하기 뭐하지만 술을 끊어 보는 건 어때?

 

 

바이올린 퉁기는 소리와 드럼의 경쾌한 선율 사이로 조심스러운 권유가 흘렀다. 토르는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 토니를 향해 김빠지게 웃었다. 끝이 굵은 다부진 손가락들이 청바지 주머니 틈을 비집고 들어가 뒤적인다. 그리고 무언가를 한 움큼 꺼내 바 위에 올려놓았다. 차르르- 플라스틱으로 된 동그란 칩들이 흩어지며 드럼 선율에 맞는 경쾌한 소리를 냈다. 하얀색 칩들 사이로 단 하나뿐인 보라색 칩이 구르다 소리를 내며 주저앉는다. 토르가 칩 하나를 집어 들었다. 하얀색 칩이다.

 

 

내가 가는 모임에서 주는 걸세. 흰색은... 처음 금주를 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칩이야.

 

 

칩이 다시 바닥에 놓여진다. 그리고 다른 칩이 들어 올려졌다. 하얀색 칩이다. 하얀색 칩 테두리 끝은 까맣게 때가 타있었다. 금박으로 박힌 글씨를 읽지 않아도 날짜가 꽤 된 것임에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금주를 실패하게 되면 다시 흰 칩을 받고 다시 금주를 시작하는 거지.

 

 

칩이 다시 바닥에 놓여진다. 그리고 다른 칩이 들어 올려졌다. 보라색 칩이다. 흰 칩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는 보라색 칩이 토르의 굵은 손가락 사이에서 노닐며 춤을 추었다.

 

 

이건.. 금주를 90일 했을 때 주는 칩이야. 그 땐.. 꽤 버텼지. 아주 오래 되었지만...

 

 

토르는 몇 번인가 그 칩이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흔들다가 내려놓았다. 흰 칩 위로 부딪히며 짤그랑 거리는 소리가 났다. 수많은 흰 칩들 가운데 유일하게 놓여진 보라색 칩은 얼룩진 것처럼 어색했다. 이 많은 흰 칩들이 보여? 그렇게 말하는 무거운 목소리 끝이 떨리고 있었다. 파란색 눈에 눈물이 고여 곧 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바르르 떨리는 입술이 애처롭게 웃는다.

 

 

난 흰 칩의 제왕이야.

 

 

파란 눈이 토니를 보았을 때 토니는 그것을 차마 마주 바라보지 못했다. 바르르 떨리던 입술이 무언가를 몇 번인가 말하려다가 체념한 듯 입을 닫는다. 김빠지는 웃음소리. 은은한 재즈 선율이 그쳤다. 그가 몸을 일으켰다. 끼익- 오랫동안 앉아있던 의자가 그리움을 부르며 울었다. 토르는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걸음이 휘청거린다. 유리문이 열리고 닫힌다. 삐걱 이는 경첩이 울었다. 유리문 밖으로 떠나가는 토르를 보다가 다시 마호가니 바를 바라본다. 바 위로 흰색 칩들과 단 하나뿐인 보라색 칩이 덩그러니 버려져 있다.

 

 

 

 

***

 

 

 

 

To. Steve.

술을 끊기 위한 토르의 그 많은 칩들에 대해서 생각해 봤네. 각오를 다지기 위해 필요한 것들 말이야.

내가 만약 중독자라면 블루베리파이를 칩으로 할 거야.

Tony.

 

 

 

 

 

 

애인한테 쓰는 건가?

 

 

햇살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 커피를 두고 작은 엽서에 써내려가던 글씨가 멈췄다. 무슨 말을 더 써야할지 팬 끝을 매만지다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을 때, 햇살처럼 빛나는 금발을 단정하게 묶은 토르가 있었다. 어제의 흐트러진 모습은 보이지 않고 지구대 제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모습에선 피곤함조차 보이질 않았다. 아니. 고개를 저었다. 그냥 아는 사람. 토니는 그냥 그렇게 말했다.

 

 

전화를 하지 그래.

그냥.. 때로는 전화보다 편지가 더 좋을 때가 있어.

 

 

간결한 대답에 물끄러미 작은 엽서를 바라보던 토르가 무언가를 한참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몸을 돌려 나갔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엽서에 고개를 돌렸다. 몇 자 적지 못하고 마무리 된 엽서에 무언가를 더 적을까 망설이던 토니가 대신 엽서에 코를 박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마른 종이 냄새가 났지만 왠지 달콤하고 시큼한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요 며칠 늦었던 걸음을 조금 일찍 옮겼을 때 마치 요 며칠 토니의 일상에 늘 끼어있었던 것처럼 마주치던 토르는 이미 바에 앉아서 골몰히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그의 머리맡에는 여전히 술 한 잔이 놓여 있었지만 빈 잔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구겨져 있는 메모지들이 수북하다. Hey. 토니가 웃으면서 인사하자 토르도 간결하게 웃었다. 그의 오른손은 평소에 달려있던 술잔 대신 고급스런 검정색 만년필이 들려져 있었다. 작은 메모지 안에는 삐뚠 글씨들이 줄줄 나열되어 있었다.

 

 

뭐하는 거야?

나도 편지를 써볼까 해서. 내 동생은 워낙 바빠서 나랑 얘기할 틈조차 주질 않거든.

 

 

그렇게 말하는 토르의 입가에 기분 좋은 웃음이 걸렸다. 토니도 함께 웃었다. 유쾌한 웃음소리가 공기 중에 퍼졌다. 경쾌한 재즈 선율에 잘 어우러지는 웃음이었다. 토르는 글씨를 쓰면서 몇 번인가 혀를 씹으며 단편적인 단어들을 이어가려 노력했다. 뭉뚝한 손끝이 만년필 끝을 몇 번이고 쓰다듬은 탓에 손가락 끝은 온통 잉크 투성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토니는 시켰던 오렌지 주스에 꽂인 빨대를 쪽쪽 빨았다. 주스가 빨대에 빨려 들어가면서 괴상한 소리를 냈다.

 

유리문이 열렸다. 삐걱이는 경첩이 비명을 질렀다. 들어오는 이들은 시끄러운 소리로 떠들며 웃었다. 유쾌한 웃음소리가 경쾌한 재즈 선율에 잘 어울러졌다. 그 중에 하나는 낯이 익었다. 검은 머리를 매혹적으로 늘어뜨린 여자는 어제 봤던 빨간 드레스의 여자였다. 깔깔거리는 입매에 발라진 빨간 립스틱이 유혹적이었다. 사각거리며 종이 위를 가로지르던 만년필이 멈췄다. 그들이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호텔 매니저로 보이는 남자가 그들을 위해 술을 시켜주었다. 곧 호박색 액체가 담긴 술 한 병과 얼음 통 그리고 유리잔들이 놓여졌다. 그들은 낄낄거리며 신나게 떠들었고 그들이 떠들수록 토르는 침묵했다.

 

탁- 만년필이 바 위에 올려졌다. 그 흔적이 남은 종이는 뜯겨져 엉망으로 구겨진 체 바 위에 버려졌다. 잔 안에 거의 가득 차있던 술을 토르는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바로부터 떨어졌다. 성난 발걸음이 그들을 향했다. Hey. 낮고 느릿한 목소리가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들이 토르를 쳐다보았고 토르는 이죽이며 웃었다. 커다란 손이 테이블 모서리를 잡아 올렸다. 와르르- 테이블 위에 있던 것들이 쏟아지며 혼란스런 소음들을 뿜어냈다. 유리잔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와장창 깨졌다. 바닥이 온통 유리 조각으로 엉망이다. 온 몸이 술로 젖은 여자가 높게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허공을 가르는 소프라노의 고성에 맞춰 토르가 주먹질을 했다. 이름 모를 남자가 광대뼈를 맞고 쓰러졌다. 살이 마찰하는 소리가 불규칙적으로 울렸다. 퓨리가 냉큼 그를 제지했다. 그만하게, 토르!! 그 말은 그들의 비명소리에 묻혀 화음조차 내지 못하고 꺼졌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경찰이 들이닥쳤다. 남자 몇은 들것에 실려 나갔다. 낡은 바닥 위에 빨간색 피가 그림처럼 떨어졌다. 빨간 립스틱을 바른 여자는 마스카라가 잔뜩 번져 검은 눈을 부라리며 호텔 매니저에게 따지고 들었다. 그녀의 쨍쨍한 목소리가 가뜩이나 어지러운 홀 안을 가득 채웠다. 술이 올라온 모양인지 토르가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숙였다. 지구대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그의 앞에 섰다. 자네는 해고야, 더는 못 참아 주겠군. 한심스런 목소리에 토르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양 옆에 경찰을 끼고 토르는 끌려 나갔다. 골치가 아픈지 퓨리가 한숨을 쉬었고 마리아는 묵묵히 엉망이 된 홀 안을 청소했다. 이도저도 아닌 방관자처럼 어색하게 끼어있던 토니가 그 모습을 보다가 토르가 앉아있던 자리에 놓여있는 만년필을 보았다. 검은색 만년필에 금색 글씨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스물다섯 번째 생일을 축하하며, 형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존경하는 동생 로키가.

 

 

 

 

***

 

 

 

 

삐익- 커피를 담은 포트가 증기를 내면서 소리 지른다. 작은 카페 안이 복작거리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사람들의 삶의 소리가 얽히고 문에 달린 경첩은 쉼 없이 울려댄다. 카페 밖으로 경적을 울리는 자동차들의 어지러운 소리, 우르릉- 무너져 내릴 것처럼 위엄 있는 지하철이 달리는 소리가 섞인다. 낡은 라디오에서 규칙적이지 않은 재즈 선율이 흘러져 나온다. 그의 다부진 손이 싸구려 볼펜을 들고 메모지에 줄을 그었다. 볼펜과 종이가 마찰하며 괴상한 소리가 났다. 굳센 손가락이 전화기의 번호를 몇 번이고 누른다.

 

 

네, 멤피스에 있는 호텔. 아, 네. 혹시 거기 손님 중에 토니라는 사람 있나요?

네, 토니요. 토니. 성은 모르는데... 하여간 토니라는 손님 있나요?

토니, 토니.

토니! 아, 드디어 통화가 되네요. 정말.. 드디어!! 이봐요, 잘 지내고 있는 거죠? 나는 그냥 궁금해서... 다시 통화가 되서 기뻐요. 어디에요? 엄청 기다렸다고요. 그리웠어요! 편지 잘 받았어요. 그러니까.. 아....... 당신 토니가 아니죠? 그러니까 제가 아는.. 네. 네 그렇군요. 네, 죄송합니다. 아뇨, 친구를 좀 찾고 있어요. 네.

 

 

달칵- 전화가 끊겼다.

 

 

 

 

***

 

 

 

 

토르!!

 

 

유리문이 열렸다. 삐걱이며 경첩이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들어온 남자도 비명을 질렀다. 속 안으로부터 올라오는 뜨거운 증오를 담은 목소리는 잔뜩 갈라지고 격양되어 있었다. 또 다시 바에서 술을 마시며 잔뜩 흐트러진 토르를 향해 로키의 신랄한 걸음이 빠르게 다가왔다. 토르가 잔을 마저 비우고 일어났다. 그가 흰 이를 드러내며 이죽거렸다. 드디어 나랑 말 섞을 생각이 생긴 거니, 아우야. 그 말에 단박에 주먹이 날아왔다. 퍽- 얼굴이 뭉개지며 토르의 고개가 돌아갔다. 씩씩거리는 숨이 진정치를 못한다.

 

 

니가 지금 무슨 짓을 한지는 알아?! 제길, 그 여자는 LA 홍보 컨설트 매니저였단 말이야!!

오.. 난 LA에서 니가 들여온 창녀라도 되는 줄 알았지.

어제 니가 한 짓 때문에 LA건이 무산 되게 생겼어. 아버지가 얼마나..!!

아버지는 너 같은 능력 좋은 자식을 두었으니 걱정할 것도 없겠지!! 어디서 너 같은 자식을 사왔는지..

미친 자식!!

 

 

다시 한 번 주먹이 날아왔다. 토르가 속절없이 쓰러졌다. 그는 어제 난동을 부렸던 힘을 차마 쓰지도 못하고 나가 떨어졌다. 아니지, 아니야. 잔뜩 꼬인 혀가 무질서한 발음을 내뱉었다. 그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고 애를 썼다. 의자에 기댄 손이 속절없이 무너져 다시 바닥에 처박혔다. 바에서 그 광경을 물끄러미 보던 토니가 손을 쓰려 했지만 이내 그만 두었다. 가늘고 예쁜 커다란 손이 토르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다른 손이 그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마호가니 바 위에 찍어 눌렀다. 굵은 손발이 애처롭게 퍼덕거렸지만 오히려 머리를 누르는 손에 더 힘을 주게 할 뿐이었다.

 

 

이 도시에서 나가, 토르. 다신 오지 마.

안 돼, 안 돼 그럴 수 없어 로키. 씨발...난 네 형이야!! 넌 내 동생이고!!

오, 제발 그러지 좀 마!! 우린 절연했어!! 잊었어?!! 넌 더 이상 우리 가족이 아니라고!!

 

 

머리채를 잡은 손이 그를 잡아당겼다 다시 밀어냈다. 우당탕- 요란하게 토르의 커다란 덩치가 지저분한 바닥 위를 굴렀다. 바닥을 구르던 토르가 엉금엉금 기었다. 비싼 구둣발이 있는 곳까지 와서 질감 좋은 양복의 바지 밑단을 잡고 늘어졌다. 로키, 로키이. 어눌한 발음이 그의 이름을 쉼없이 불렀다. 하얀 얼굴에 아까까지 올라왔던 분노의 잔재가 묻어나 있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 절대적인 연민이나 동정은 보이질 않았다. 흔적처럼 가라앉던 분노가 토르의 처량 맞은 모습을 보더니 다시 솟아올랐다. 발치에 매달린 토르의 몸이 구둣발에 채여 형편없이 나가떨어졌다. 작은 소음을 내며 나가떨어진 몸은 포기를 모르고 다시 매달렸다. 눈물이 양복에 묻어 짙은 수분 기를 남긴다. 눈물이며 콧물이며 흘리고 질질 짜는 토르는 어딘가 길 잃은 어린아이 같기도 했다.

 

 

이젠 술 끊을게, 로키. 이번에는 정말..

제발, 토르!! 이젠 지긋지긋해!! 정말이지 지긋지긋하다고!!

 

 

퍽- 다시금 매정한 발길질에 토르가 나가떨어졌다. 짐승처럼 짖으며 로키가 달려들었다. 바닥의 먼지로 얼룩져 엉망이 된 금발을 잡아채 끌어내어 소처럼 그 큰 몸뚱이를 이끌었다. 그리고 바 옆쪽에 비어있는 룸으로 들어가 버렸다. 퓨리가 한숨을 쉬었다. 마리아는 그 남은 자리들을 청소했다. 토니는 그들이 들어간 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룸 너머에서 작은 소음들이 일었다. 무언가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 그리고 토르의 비명 같은 끙끙거리는 신음. 하지만 로키의 목소리는 어디에도 울리지 않았다.

 

몇 분이 지나가는 것이 하루가 지나가는 것처럼 길었다. 룸 안의 소음은 멈추었다. 삐걱이는 나무문을 열고 로키가 나왔다. 처음 들어갔을 때처럼 단정한 모습이었지만 곱게 넘겼던 머리는 땀으로 젖어 잔뜩 흐트러졌다. 토니는 그가 나온 자리 열린 문 너머의 룸 안을 바라보았다. 깔끔한 그의 모습과 대비될 정도로 룸 안은 엉망이었다. 허벅지에 잔뜩 하얀 점액질을 묻힌 토르가 벗은 다리를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채 앉아있었다. 테이블은 부서져 그 잔재만 언뜻 보였다. 늘어진 다리 사이에 수표가 구르고 있었다. 깨끗하고 반듯한 수표들이 토르의 다리 사이에서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비척이는 걸음으로 후들거리는 다리를 추스린 토르가 일어섰다. 바지춤을 여미고 룸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품 안에서 권총 한 자루를 꺼내어 막 유리문을 밀고 나가려던 로키의 걸음을 붙잡았다. 로키. 무겁고 잔뜩 쉰 목소리는 끝이 갈라져 있었다. 장전된 권총의 총구가 로키의 반듯한 등을 향했다.

 

 

여기서.. 여기서 나가기만 해봐.

 

 

그 등을 노려보는 푸른 눈은 단호했지만 총을 들고 있는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멈춰있던 걸음이 빙그르 돌았다. 과장하듯 손을 뻗어 로키가 웃었다. 어쩔 건데? 이죽거리는 비웃음소리가 공기 중을 가른다. 토르의 나약함을 비웃는 듯 보였다. 토르는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 쏘지 못했다. 장전된 총구가 로키의 벌어진 가슴 위에서 춤췄다. 로키의 눈이 단숨에 단호하게 변하고 끔찍한 소리를 뱉었다.

 

 

It’s OVER!!

 

 

유리문이 열리고 닫힌다. 삐걱이는 경첩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총성은 울리지 않았다. 부들거리면서 총을 힘겹게 들고 있던 손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무릎이 꺾이면서 큰 몸이 주저앉았다. 나무 바닥 위에 작게 먼지가 일었다. 토니의 다갈색 눈동자가 그 장면들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잘그락- 반쯤은 녹아버린 얼음이 잔 안에서 서로 부딪히며 작은 소음을 냈다. 재즈 선율은 여전히 어지럽고 또 잔잔했다.

 

 

 

 

 

 

침묵의 시간이 도래했다. 토니는 먹던 술을 내려놓고 망가진 룸 안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토르는 그 곳에 멍청하게 앉아서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지도 못하고 있었다. 손 안에 다부지게 잡힌 수십 장의 수표들이 그 떨림에 따라 춤을 추었다. 파란색 눈에서 나오는 짭짜름한 눈물들이 볼 위를 점령하고 턱 밑으로 떨어져 그가 입고 있는 회색 티셔츠 위로 얼룩을 만들었다.

 

그는 이내 곧 일어났다. 비척이는 걸음이 토니를 향한다. 그 수표 다발이 토니가 앉아있는 바 위로 올라왔다. 외상값이라면 퓨리나 마리아한테 줘야지. 토르는 고개를 저었다.

 

 

팁이야. 얘기를 나눠 준 값일세.

팁치고는 많은데.

여행 다닌다고 하지 않았나? 여행 값이라 치지.

 

 

이미 그만한 돈은 넘쳐난다는 소리는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0이 수없이 찍힌 수표가 그의 손에 억지로 쥐어졌다. 토르가 뒤를 돌아 떠났다. 바닥을 밟는 발은 유독 힘이 없다. 이봐. 토니가 그를 잡았다. 안주머니를 뒤적여 그것들을 바 위에 털어 놓았다. 하얀 칩들과 보라색 칩 그리고 그가 항상 품에 지니던 만년필이 바 위로 떨어졌다. 이거 가져가야지. 토니가 말했다. 눈물을 가득 머금은 눈이 처연하게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이내 감겼다. 눈이 감기고 고개를 돌리고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마지막 선물쯤으로 받아두게.

 

 

유리문이 열리고 닫힌다. 삐걱이는 경첩이 울었다. 유리문 뒤로 사라지는 토르의 축 쳐진 어깨가 애처롭다. 창문 밖으로 어둠 사이에 꾸물거리는 하늘이 우중충 하게 걸려있다. 그리고 토르처럼 울었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무겁게 내리는 빗방울들이 창문을 때렸다. 그리고 그 소리들이 우울한 울림을 냈다. 그런 밤이었다.

 

 

 

 

 

 

비는 무섭게 내린다. 그것은 마치 어떤 울음과도 같았다. 그 빗소리 사이로 휘양 찬란한 사이렌의 굉음이 섞였다. 파란색 빨간색으로 점열하는 불빛이 어두운 밤거리를 물들였다. 그 차들 사이에 엉망으로 부서진 검은 트럭 한 대가 있다. 가로등에 박힌 채 영영 나오지 않을 것처럼 엉망이다. 운전석에 앉은 사람의 팔이 덜렁거리며 차 밖으로 나와 있다. 그 손끝이 굵은 손가락으로 핏방울이 빗방울에 섞여서 옅게 떨어져 내렸다. 눈물로 뒤덮였던 볼은 빨갛게 물들었고, 파란색 눈동자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사고를 기록하기 위한 사진들이 찍혀졌다. 후레쉬의 강렬한 빛이 번쩍였다. 깨진 차창으로 붙은 물방울들이 빛을 머금고 반짝거렸다.

 

경찰은 사고라고 했다. 그는 인사불성인 채로 운전했고 도로를 벗어났다.

 

 

 

 

 

 

해가 떠오르고 비가 그쳤다. 교차로 전선에 달린 신호등이 밤새 머금은 빗방울을 떨구면서 춤을 추었다. 하늘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비를 뿌리던 구름이 꾸물거리며 사라졌다. 거리는 한적했다. 밤새 있었던 사고는 흔적조차 없었다. 마치 그가 살아있다는 흔적조차 사라진 듯 했다.

 

 

 

***

 

 

 

 

온통 검은 남자가 들어섰을 때 바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은 그곳으로 몰렸다. 스피커에서는 매혹적인 남성 보컬의 브루스가 울렸다. 그는 열었던 문을 닫지 못하고 멍한 눈으로 바 안을 둘러보았다. 긴 손이 문을 놓았다. 삐걱이며 경첩이 울었고 문은 닫혔다. 비싼 구두가 나무 바닥을 울렸다. 그가 지나가는 자리만 끼익 거리며 우는 듯 했다. 그는 홀로 앉은 토니 옆에 앉았다. 기다란 손가락들이 춤추듯 마호가니 나무로 된 바 위를 두드렸다. 보드카 스트레이트. 격자무늬 유리잔에 보드카가 따라져 그의 앞으로 내어졌다. 그는 술을 마시지 않고 멀뚱하게 그것을 쳐다보았다. 6년 만에 마시는 건데... 그는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토니가 먼저 들고 있던 잔을 들어올렸다. 로키가 거기에 맞춰 잔을 부딪쳤다. 유리끼리 부딪히며 맑고 청아한 울림이 울렸다. 액체가 흔들리며 얼음이 부딪혔고 작은 소음이 났다.

 

 

자유를 찾아간 토르를 위해. 우리 마을을 지키던... 잘려버렸지만.

 

 

부설을 붙이며 그가 킬킬거렸고 이내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토니도 그에 맞춰 술을 들이켰다. 식도로 넘어가는 술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식도를 괴롭혔다. 단정하게 다듬어진 검은 눈썹이 잔뜩 일그러졌다.

 

 

젠장, 쓰네.

 

 

그렇게 말하던 그는 다시 술을 시켰고 말없이 몇 잔인가 들이켰다. 비어버린 잔들이 줄을 지어 그의 옆에 쌓여간다. 둘은 자연스럽게 말문을 잃은 것뿐이었는지 아님 의도된 것이었는지 침묵했고 그렇게 몇 잔을 넘기다보니 로키는 완벽하게 취해버렸다. 그의 형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긴 머리카락을 멋대로 바 위에 흐트러트리고 고개를 꾸벅이고 있었다. 홀 안의 불이 꺼지고 남은 것이라곤 바를 비추는 은은한 조명이 다였다. 마리아가 머뭇거리듯 계산서를 내밀었다. 두툼한 그것들은 토르가 남겨두었던 것들이었다. 긴 손가락이 그것들을 쥐어 넘겼다. 엉망으로 휘갈겨진 싸인들을 보며 그가 미친 것처럼 낄낄거렸다. 그가 품 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지폐 뭉치를 꺼내 그녀에게 쥐어주었다. 그리고 남아있는 계산서를 품에 넣었다.

 

구둣발이 휘청이며 균형을 잡지 못했다. 읏- 작게 신음하며 넘어지려는 그를 토니가 부축했다. 초록색 눈동자가 그를 물끄러미 보는가 싶더니 고개를 돌렸다. 길고 커다란 손이 토니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악력이 세서 어깨가 부서질 것 같았지만 토니는 말하지 않았다. 누구나 무너질 때 잡아 주어야할 어떤 것들이 필요하니까. 둘은 바를 나갔다. 유리문이 열리고 닫힌다. 경첩은 울지 않았다.

 

 

 

 

 

 

객실 안 커다란 더블 침대에 커다란 몸을 눕히고 토니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양복 자켓을 벗겨주려다가 이내 말아버렸다. 묵직하게 계산서가 자리 잡고 있는 품 주머니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러나 곧 제지되었다. 하얀 손이 손목에 얽혀들었다. 뒤를 바라보자 베개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얼굴 위 녹색 눈동자가 흐릿한 초점을 그에게 맞추고 있었다. 토니는 하는 수 없이 침대 옆에 앉았다. 그는 언젠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서 누군가를 잡았던 그 때의 그 밤을 떠올렸다.

 

컬 진 브루넷이 배게 위로 흐트러졌다. 둘은 마주보고 누워있었다. 손목을 덮은 뜨끈한 체온은 떨어지지 않았다. 어딘가 나른한 졸음이 몰려올 것 같았지만 잠이 오진 않았다. 몽롱한 기운이 기분 좋게 머리 안을 간질이는 기분이었다. 얇은 입술사이 두서없이 흐르는 목소리가 잔잔하게 울렸다.

 

 

형은.. 집에서 모든 지원과 압박을 받으면서 컸어. 나는 입양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과 거리가 멀었지만 옆에서 도와주고 싶었지. 나는 형이 좋았거든. 그게 우애에 의한 동경이었는지, 아니면 항상 밝아있는 형에 향한 간곡한 애정이었는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내가 좋아했던 부분들이 그에게 그렇게 압박인 줄은 몰랐어. 압박에 못이긴 형은 술에 빠졌고 실망한 아버지는 형을 내쳤고, 자연스럽게 그 자리는 내게 돌아왔어. 형에 대한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어. 그 때 처음 형을 안았지. 반쯤은 애정이었고 반쯤은 초라해진 형을 향한 분노였고 내 실망감이었지. 형은.. 나무라지 않았고.

 

 

손가락들이 손목 위로 춤을 추듯 작게 두드렸다. 로키의 눈은 반쯤 감겨있었다. 메마른 눈가는 슬픔을 내보이지 않았지만 지독하게 잠긴 목소리는 잃어버린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과 지독하게 패인 상처에서 나오는 핏덩이로 물들어 아프고 또 아파보였다.

 

 

그를 증오했어?

아니, 난... 그냥 형이 자유롭게 되길 원했을 뿐이야. 평생을 압박당하며 살아야했던 것들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자연스럽게.. 하지만 형은 그러지 않으려고 했지. 오히려 그 날 하룻밤뿐이었던 걸 끄집어내며 어떻게든 나와 연결고리를 만들고 그 안에 속박 당하려 했어. 끊지도 못할 술을 끊겠다고 하면서 어떻게든 내 품으로 들어오려고... 나는 그게 정말 싫었어. 싫었는데.. 막상 형이 이렇게 자유로워지고 나니까, 이렇게 아플 수가 없는 거야.

 

 

손가락들이 가슴 위에 닿아 검은 셔츠를 엉망으로 잡아냈다. 반쯤 감긴 눈이 파르르 떨리며 온전히 감겼다. 그 밑으로 눈물 한 방울이 작게 고이다가 흘렀다. 고통을 토해내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뜨거운 숨이 슬픔에 섞여 토니의 코끝에 닿았다. 그가 다시 눈을 떴다. 녹색 눈동자가 토니를 바라보았다. 그 얼굴이 어딘가 어중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슴을 쥐어짜던 손이 토니의 볼 께를 슬쩍 매만졌다. 간질이듯 닿는 손에도 토니는 어떤 반응 없이 그냥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이봐.

...아까부터 자꾸 말이 짧아지는데?

키스해도 돼?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젖은 입술이 입가에 닿았다. 격정적이고 섹슈얼한 입맞춤은 분명이 아니었다. 그저 입가에 닿은 입술은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살짝 닿은 혀끝에서는 술의 쓴 맛이 느껴졌다. 촉- 작은 마찰음과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엄마 품 찾는 어린 아가처럼 그가 어깻죽지 안으로 파고들었다. 토니는 말없이 그를 안아주었다. 숨소리 외에 어떠한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어깨가 조금 젖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CCTV, 카페 안, 정수리 닿던 뜨거운 입술. 머릿속에 그런 것들이 떠오르면서 토니는 그제야 잠을 잘 수 있었다.

 

 

 

 

 

 

햇살이 창을 비추고 침대 안을 침범했다. 날카로운 빛의 무리에 토니가 힘겹게 눈을 떴다.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어리둥절한 머리를 휘휘저으며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낯선 방. 토니는 그제야 어제 다른 사람의 방에서 잠이 든 자신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방의 주인이 사라졌다는 것도. 침대 옆 협탁에는 작은 메모 한 장이 묵직한 계산서 뭉치와 함께 올려져 있었다. 메모지에는 반듯한 필체로 휘갈겨 쓴 글귀가 적혀있었다.

 

토니는 그것을 물끄러미 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창밖을 내려 보자 주차장에 멋진 스포츠카를 옆에 두고 멀뚱하게 서있는 키 큰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온통 검은 옷을 입은 그는 해가 떠오르는 수평선 어디쯤을 보는 것 같았다. 선글라스를 쓴 탓에 그의 표정이 어떤지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어디선가 아침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났던 것 같다. 그는 차에 탔고 스포츠카는 요란한 엔진 소리를 울리며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는 수평선 어디 즈음을 토니는 멀뚱하게 보았다. 그가 사라진 자리 떠오르는 태양이 위태롭게 일렁거렸다.

 

마치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로키는 떠났다.

 

 

 

 

 

 

계산서는 바에 붙여주세요. 모두가 그를 기억할 수 있게... 당신이 갖고 있던 만년필이랑 칩들은 가져갑니다.

인연이 닿는 다면 또 볼 수 있겠죠.

Loki

 

 

 

 

***

 

 

 

 

싸구려 볼펜이 커다란 손 안에서 몇 번인가 재주를 부렸다. 아직 어떤 것도 쓰이지 않은 엽서 한 장을 앞에 두고 스티브는 씨름을 한다. 그의 발이 불안하게 달달 떨렸다. 그는 맨 위에 Tony라고 적었지만 그 앞에 To 라고 써야할지 Dear이라고 써야할지도 정하지 못했다. 몇 번인가의 통화가 무산된 이후로 정기적으로 오는 엽서에 스티브는 답장을 쓰기로 했다. 하지만 막상 쓰려고 하니 방대하게 늘어난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더러워진 볼펜 끝을 매만지다가 스티브는 기어이 한 마디를 썼다. I miss you. 짧게 쓰인 엽서가 테이블 옆에 쌓였다. 토니로부터 온 엽서가 빨간 끈으로 묶여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 옆으로 부쳐지지 않은 엽서 수십 장이 놓여있었다. 거기엔 모두 같은 말들뿐이었다.

 

 

 

 

***

 

 

 

 

Dear. Steve.

사람들은 토르를 어떻게 기억할까? 사람이 죽고 나면 누군가의 삶에 새겨놓은 작은 기억들만 남는 것 같아. 아니면 계산서라든지.

여기서의 시간을 기념하며 자네를 위해 만든 계산서를 동봉하네. 당신이 나를 어떻게 기억할지 궁금하군. 블루베리를 좋아하던 남자? 아님 실연당한 남자?

Tony.

 

 

 

 

 

 

3. 낡은 기억들이 다시 찾아올 땐. - Day 185. (3,906 miles since ny)

 

어지러운 기차역에 사람들이 오간다. 중구난방으로 뻗어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분주했다. 기차로부터 나오는 소음들 방송에서 누군가를 찾는 여자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삼삼오오 몰려있는 사람들이 커다란 캐리어를 옆에 두고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입을 열 때마다 하얀 입김이 진하게 흩어졌다. 그 입김만큼이나 하얗게 모락모락 연기를 내는 군밤가게 남자가 돈을 받으며 사투리 섞인 억양으로 씨불였다. 따뜻한 군밤 한 봉지를 받은 아이가 방긋 웃었다. 아이가 타박이는 걸음을 재촉해 엄마의 품에 안겼다. 그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 사이로 토니가 앉아있다. 그가 앉아있는 의자는 낡은 탓에 알록달록 물든 페인트 끝이 벗겨져 그 안으로 녹이 슬어 있었다.

작은 엽서는 그의 작은 손바닥 위에 올라와 있다. 그는 몇 번이나 반듯하게 글씨를 쓰려고 자세를 바꿔가며 애를 먹었다. 삐뚤어진 글씨와는 다르게 그의 입가에 작게 웃음이 돌았다.

 

 

 

 

 

겨울의 마지막. 다가오는 봄을 시기한 듯 추운 겨울바람이 마지막 심술을 부렸다. 눈이 오고 있었다. 뉴욕에서의 눈은 흔하게 볼 수 있지만 내릴 때마다 스티브는 저도 모르게 설레어 했다. 카페 앞에 놓인 우편물 사이에 엽서 하나를 발견하고 그는 웃었다. 삐뚤어진 글씨들을 읽어 내리는 눈 끝이 휘어있다.

 

엽서는 다시 테이블에 올려졌다. 커피 한 잔이 그 곁을 지켰다. 창가에 기대어 스티브는 하얗게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잘게 흩어지는 눈발 사이로 번쩍이는 도시의 불빛이 비춰졌다. 아스팔트 위로 떨어지고 다시 녹아내리는 눈들이 소리를 잡아먹었다. 덕분에 온 마을이 고요하다. 오로지 시끄러운 것이라곤 무질서한 재즈 음악을 내뱉는 낡은 라디오뿐이었다. 스티브의 파란 눈이 그윽하게 그 광경들을 담았다. 함께 눈을 보고 싶은 이를 떠올리며 스티브는 하늘에 그리움을 담았다. 어딘가 떨어져 있을 그에게 전해지길 바랬다.

 

 

 

 

 

 

쓰레기 한 무더기를 질질 끌어내고 스티브는 카페의 온 불을 껐다. 옆에 옮겨진 커다란 검은 비닐봉지 안에 유리병이며 플라스틱 병이며 부딪히면서 아우성을 친다. 딸랑- 차임벨이 울렸다. 열쇠가 그 소리를 막았다. 문고리를 잠근 열쇠를 주머니에 넣고 스티브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쉬었다. 잔뜩 차가워진 공기가 코를 통해 들어갔다가 입을 통해 하얀 입김으로 번졌다. 검은 어둠에 먹혀들어가듯 그것들이 곧잘 번지다가 사라졌다.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며 스티브는 쓰고 있던 모자를 고쳐 썼다.

 

 

스티브.

 

 

낯익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웃고 있는 얼굴. 컬이진 브루넷이 겨울바람에 휘날렸다. 스티브는 웃었다. 미련하나 없이 깔끔한 웃음이었다. 여자는 성큼 거리며 당당한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그 걸음은 어딘가 각이 지고 품위 있었지만 또 부드러웠다. 스티브는 그게 그 여자의 매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옆에 선 여자는 스티브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다가 담배를 물었다. 스티브가 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주었다. 당신은? 묻는 말에 스티브가 답했다. 끊었어.

 

 

좋아 보이네. 카페도... 그대로고.

응. 의자를 바꿀까 했는데 어울리질 않아서 그냥 놔뒀어. 당신도 좋아 보여. 아직도 군에 있는 거야?

응. 이제 다시 가야해. 내일 아침 비행기라 잠깐 들린 거야. 아직 여기 있을 줄은 몰랐어.

어렸을 때, 엄마가...

길을 잃으면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고? 벌써 예전에 했던 말이잖아.

예뻐졌어, 당신.

엄마 닮았거든.

 

 

실없는 이야기를 하는 그들은 한 때 사랑하고 또 아프게 헤어져 오랜만에 다시 만난 연인인 것 치고는 너무 편해보였다. 스티브는 그 해의 뜨거웠던 사랑을 기억한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사랑했고 행복했던 만큼 불행했던 날들. 여름에 시작했던 사랑은 이듬해 봄을 마지막으로 끝났다. 어느 날 그녀의 문은 닫혀버렸고 스티브는 더 이상 그 문을 열 수 없었다. 문을 열었을 때, 아무도 없는 텅 빈방이라면 너무 허탈해 질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그들은 헤어졌다.

 

차가운 밤거리를 웅장하게 울리는 교각 위에 지하철이 지나갔다. 큼.. 여자가 웃던 것을 그만두고 스티브를 바라보았다. 우는 눈은 아니었지만 그 안에 촉촉한 그리움이 남아있는 것을 스티브는 보았다.

 

 

열쇠, 아직 있어?

버리지 말라고 했잖아. 문은 잠기면 안 된다는 말, 명심하고 있거든.

설령... 열쇠가 있어도 도저히 열리지 않는 문이 있잖아.

때로는 문을 열어도 네가 찾는 사람이 없을 수도 있어.

 

 

그 말에 그녀의 다부진 입술이 호를 그리며 웃었다. 공기 중에 담배 연기가 스며들었다. 한 모금 가득 빤 그녀가 짧아진 꽁초를 바닥에 비벼 껐다. 발로 짓이겨진 그것이 마지막 빨간 불꽃을 태우고 초라하게 꺼졌다. 그녀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앵무새처럼 말을 반복했다.

 

 

아직도 여기 있을 줄이야...

왜 온 거야?

그냥..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모습, 그 느낌 그대로일까 궁금해서 왔어.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바닥에 납작하게 짓이겨진 회색의 담배꽁초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 끝이 쓸쓸하게 떨어졌다. 그들이 쌓았던 어느 날의 사랑이 추억으로 시드는 것처럼 짓이겨진 담배꽁초는 초라했다. 이만 가야겠어. 그녀가 웃었다. 스티브도 마주 웃었다. 고개를 내리고 얼굴이 가까워졌다. 가볍게 입술이 부딪혔다. 찬 공기에 노출된 차가운 공기 안으로 뜨거운 입김이 잠시 마주 닿았다가 떨어졌다. 깔끔한 마지막 키스.

 

 

안녕, 스티브.

안녕, 페기.

 

 

그들은 마지막 인사를 했다. 건널목을 뛰어가며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스티브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익숙하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얕은 숨 아래로 하얗게 입김이 흘러 나왔다. 그것들이 그가 기대어 있는 유리에 달라붙어 뿌옇게 흐려졌다. 다시 돌아보았을 때 그녀는 없었다. 그는 잦은 한숨을 쉬었다. 또 다시 하얗게 입김이 흩어진다. 어딘가 개운해 보이는 얼굴. 낡은 과거의 허상이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그런 밤이었다.

 

 

 

 

 

 

4. 양치기 소년의 포커페이스 이론. - Day 256 (5,603miles since ny)

 

Dear. 스티브.

벌써 여름이네. 뜨거운 뉴욕 여름 햇볕 한 가운데 있을 자네 카페가 보고 싶군.

새로 옮긴 도시엔 혼자 왔어. 드디어 진짜 휴가라는 걸 보내게 됐지. 나타샤가 고생할 것 같지만.. 상으로 연봉이라도 올려줘야 할까봐.

여기 호텔은 나쁘지 않아. 근처에 카지노가 있어서 요즘은 거기서 시간을 보내고 있네. 화려한 조명을 보거나, 칩 굴러가는 소리를 듣다보면 시간가는 줄 모르거든.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조차 분간이 안가니 말이야. 덕분에 요즘은 잠 때문에 고생하진 않아. 그럭저럭 나았는지...

Tony.

 

 

 

 

***

 

 

 

 

카드판 위로 칩들이 쌓여있다. 빨갛고 초록색 칩들이 탑처럼 높게 쌓여서 앞으로 내밀어졌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아님 그대로 떠나가기도 한다. 토니는 그 판을 유심하게 바라봤다. 룰렛이나 머신 사이에 있는 것보다 포커 판을 구경하는 재미는 꽤 쏠쏠하다. 그걸 보고 있노라면 시계는 빠르게 지나가 어느 샌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많은 시간들을 흘려보내곤 했다. 초록색 포커판 위에 카드가 섞인다. 긴장감이 흘렀다. 서로 속고 속이는 게임 위은 말 많은 수다쟁이 여자와 그런 여자의 농담은 단 한마디도 받아주지 않는 굳은 얼굴의 남자의 대결이었다. 대게 판은 남자에게 유리하게 굴러갔다. 여자가 말을 할 때마다 쓸 때 없는 이야기들을 흘려보냈다. 딜러가 카드를 나눠주고 칩수를 올리며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카드를 뒤집는다. 그 서슬 퍼런 긴장감이 더운 여름인데도 살 떨리게 서늘했다. 토니는 아까부터 말 한마디 없고 그저 인상만 쓰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 카드를 보고 있는 그의 시선이 매처럼 날카로웠다.

 

 

어.. 30에 18. 이봐, 인상만 쓰지 말고 좀 걸어보던지 아님 포기하던지.

...40에 24.

좋아, 난 다 걸까봐. 이번에는 정말 느낌이 좋거든.

 

 

천박하게 칠한 검붉은 립스틱을 바른 그녀의 입이 웃었다. 불규칙한 치열이 비춰졌다. 남자는 잠시 고민하는 듯 했다. 물론 이것조차 추측일 뿐이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남자에겐 어떠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가지고 있던 칩을 다 내밀었다. 올인이었다.

 

딜러가 마지막 카드를 나눠 주었다. 한 장씩 나눠진 카드가 뒤집어 졌다. Oh, shit! 이래서 포커를 사랑하지!! 녹색 테이블 위 남자를 향하던 승기가 여자에게로 돌아갔다. 길게 기른 손톱이 테이블 위에 수많은 칩들을 긁어모았다. 남자는 약간의 감정 변화도 하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게임은 끝났다. 또 다른 상대가 그 자리를 채웠다. 사람들은 또 다른 얘깃거리를 만들었다며 깔깔거리고 웃었다.

 

게임이 시시해지자 토니는 졸린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왔다. 카지노를 나가자 새까만 어둠이 그를 덮쳤다. 어둠 안에서 알록달록 색색의 네온사인이 더 밝게 빛났다. 그 빛나는 빛의 무리가 곤색의 재규어에 반사되었다. 항상 거기 있던 것처럼 세워져 있는 차는 뽑은 지 얼마 되어 보이지 않아 그 빛깔마저 번쩍이고 있었다. 그 번쩍이는 외관 위로 수많은 불빛들이 알록달록 물들어 마치 밤하늘을 수놓은 별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래, 한 2천만 보내줘 봐. 24시간 안으로... 뭐? ..................................Fuck you very much!

 

 

탁- 플립이 닫혔다. 토니는 아래쪽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카지노 옆 벤치에 앉아 싸구려 샌드위치를 뜯어먹고 있는 것은 아까 포커 판에서 된통 당하고 나간 남자였다. 남자는 핸드폰을 손에 쥐고 무언가 망설이는 듯 하다가 고개를 젓고 핸드폰을 품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시 샌드위치를 뜯다가 토니를 바라본다. 아까 포커 판에서 봤던 표정이랑 별로 다르질 않다. 남자가 말을 붙였다.

 

 

차가 예쁘죠?

 

 

흠.. 토니는 흥미롭게 그를 바라보다가 차를 한 번 바라봤다. 고급스러운 차의 외관과 싸구려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 남자의 접점은 별로 없어보였다. 그러면서도 그가 입고 있는 화려한 셔츠는 짓고 있는 표정과는 영 어울리지 않아 오히려 멋진 외관의 스포츠카와 어울려 보였다. 자네 건가? 라고 묻자 그는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게임은 잘 봤네. 마무리가 좀 그랬지만...

실수였죠. 돈만 더 있었으면 내가 이겼을 거예요.

대단한 자신감인데?

사람 속이는 데는 천부적이거든요. 이봐요, 돈 있어요?

 

 

우적우적 샌드위치가 씹혔다. 양상추와 피클, 오이, 치즈, 햄들이 그의 이빨에 눌려 와사삭 부서졌다. 남자는 먹고 말하는 내내 인상이 그대로다. 자네 그러다가 주름 생길걸. 토니가 유쾌하게 말하며 자신의 미간을 톡톡 건드렸다. 그는 쓸 때 없는 걱정이라는 듯 손을 저었다. 돈이라.. 토니는 지갑을 살펴보았다. 언젠가 토르에게서 받은 수표들은 처음 받았을 때 그대로 구겨져 지갑에 들어 있었지만 그걸 쓰고 싶진 않았다. 그 외의 돈은 현금과 수표들로, 그 금액은 3천 달러를 조금 넘을 정도였다. 한 3천 달러정도 있는데? 그의 손이 두툼히 들어있는 지폐와 수표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럼 그 돈 나한테 빌려줘요. 저 판에서 이기면 그 돈에 딴 돈 1/3을 더 얹어서 줄게요.

만약 잃으면?

차 가져요.

 

 

무덤덤하게 그가 말했다. 눈썹을 찡긋하며 여유까지 있어보였다. 그가 앉아있는 벤치에 토니가 앉았다. 잠시 고민 좀 해볼게. 토니는 그가 포커판에서도 지금에도 하고 있는 포커페이스를 따라하려고 고민하는 척 했다. 사실 돈이야 넘쳐나니 고민할 거리도 아니었는데도... 상대는 그러던지 말든지 깔끔하게 남은 샌드위치를 입에 우겨넣었다.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손목에 찬 시계에서 틱톡거리며 초침을 돌리고 시간을 흘려보낸다. 15분쯤 지나고 토니는 더 참을 수 없었는지 말했다.

 

 

딜!

 

 

지갑에서 나온 빳빳한 지폐와 수표들이 그의 앞으로 떨어졌다. 남자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그걸 받아들고 카지노 안으로 들어갔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토니는 벤치에 앉아 있다가 포커 판에도 있다가 식당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기도 하고 왔다 갔다 하면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포커 판 안으로 들어갈 때 마다 여자의 얼굴은 매번 바뀌었다. 그걸 보는 재미는 카드 판을 보는 것만큼 쏠쏠했다. 처음에는 환하게 웃던 그 얼굴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일그러져 갔다. 그건 마치 시간을 먹고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 과정을 순간적으로 보는 듯했다. 토니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 힘내라는 듯 주먹을 쥐어보였다. 뭐냐는 듯 그는 인상만 부러 찡그렸다.

 

 

 

 

 

 

토니가 나간 포커판 위에 긴장감이 돌았다. 시간은 이미 새벽을 지나고 있었고 여자의 앞에 놓인 칩은 처음보다 많이 없어졌다. 여자는 웃는 낯이었다. 그녀도 포커페이스를 고수하기로 한 건지 내내 천박하게 놀리던 입을 닫아버렸다. 남자는 여전히 침묵했다. 카드 두 장이 각각 그들의 앞으로 떨어졌다. 딜러의 손에서 떠난 얇은 카드들이 초록색 부드러운 바닥을 스치고 지나갔다. 가자미처럼 찢어지는 눈들이 카드 패를 확인했다. 여자가 또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남자는 여전히 무표정이다.

 

또다시 몇 개의 칩들이 오가고 몇 장의 카드가 더 나눠졌다. 거의 끝물쯤에 가자 긴장감은 극에 달았다. 턱을 괴고 여자가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고개를 수그린 탓에 깊게 파인 옷 아래로 굴곡 있는 몸매와 풍만한 가슴이 그대로 드러났다. 흥- 남자는 콧방귀를 꼈다. 처음으로 포커판에서 드러낸 감정은 같잖지도 않다는 듯 했다. 여자가 제 앞에 있던 칩을 죄다 밀어 넣었다. 올인. 짧게 터진 말에 주변에서 함성소리가 울렸다. 남자는 여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깊고 어두운 눈동자가 형광등 아래에 서슬 퍼렇게 빛이 났다. 남자는 코끝을 받치고 있는 손가락들 아래로 입 꼬리를 슬쩍 올렸다. 받아주지. 남자의 칩들이 모두 올라왔다.

 

그리고 카드들이 뒤집혔다. 사람들의 함성소리가 홀 안을 가득 채웠다.

 

 

 

 

 

 

우당탕- 하고 카지노 문이 요란하게 열렸다. 벤치에 앉아서 꼬박 졸고 있었던 토니가 옆을 보았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불을 붙이는 손이 느긋했다. 패인 볼이 홀쭉해 지며 필터를 빨아들이자 그 끝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봐, 어떻게 됐어? 토니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하품을 하면서 물었다. 남자는 여전히 얼굴 가득 무표정이다. 입술 사이로 담배 연기가 번진다. 그리고 눈썹을 으쓱 올리면서 엄지로 제 차를 가리켰다.

 

 

차 가져요.

 

 

 

 

***

 

 

 

 

빛나는 재규어가 매끈한 바디를 자랑하며 고속도로 위를 달렸다. 굽이치는 도로 위를 달리는 몸체는 잽싸다. 따가운 햇살이 그 위를 덮쳤다. 간간히 보이는 초록색 표지판에 어느 도시까지 몇km따위의 문구가 쓰여 있다. 차 옆으로 커다란 트럭이며 작은 중형차며 높은 속도를 내며 지나갔다. 왱- 하고 굉음을 내는 엔진 소리와 아스팔트를 긁는 타이어 소리와 함께 그 반동으로 작게 먼지바람이 일었다. 한 손으로 유연하게 핸들을 휘어잡은 남자는 당차게 차를 몰았다. 나란히 끼고 있는 선글라스 위로 태양이 뜨겁게 타오른다. 네 개의 검은 렌즈가 볕에 반사돼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근데 당신 이름이 뭐야?

클린트 바튼.

우리 어디 가는 건데?

라스베이거스.

 

 

그는 그 새벽 잘빠진 재규어의 키를 넘겨주면서 차를 줄 테니 자기를 태워 달라고 말했다. 토니는 그걸 흔쾌히 수락했다. 어차피 혼자서는 딱히 할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클린트는 동행자로서 그리 재밌는 남자가 아니었다. 토니가 딱히 말을 걸지 않으면 달리는 차안은 적막했다. 그 침묵을 라디오에서 흥겨롭게 흘러나오는 락앤롤 사운드와 가끔 옆을 지나가는 차들의 바퀴 구르는 소리, 스쳐지나가는 바람소리들이 메웠다. 하지만 그는 라스베이거스에 가는 이유만큼만은 정확하게 말했었다.

 

그는 베가스에 돈을 대줄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서두르는 기색 없이 그는 느긋했다.

 

 

 

 

 

 

태양은 여전히 뜨겁게 그들을 비추고 있었고, 이런 날 오픈카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며 스스로를 고문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둘은 그럭저럭 깨끗한 모텔 방에 누워 오전을 보내기로 했다. 커다란 킹사이즈 침대에 나란히 누운 둘에게선 전혀 섹슈얼한 느낌이라곤 나질 않았다. 밤새 달려온 여파로 늘어지게 누워있는 남자들은 흡사 침대 위로 녹아내릴 것처럼 아찔하다. 창가에 쳐져있는 파스텔 빛 커튼이 얕게 이는 바람에 흔들렸다. 뜨거운 태양 볕에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침대 귀퉁이를 밝게 비추었다. 창 밖에서 간간히 고속으로 지나가는 차 몇 대의 바퀴소리가 났다. 선선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기분 좋게 비집고 들어갔다가 흘러나왔다. 클린트는 눈가리개를 하고 누워있었다. 하지만 토니는 그가 자고 있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라스베이거스에 누가 있어?

 

 

늘어지는 목소리는 얼핏 졸음이 가득 끼어 있었다. 토니는 무거운 눈꺼풀을 구지 고정시키지 않았다. 덕분에 깜빡거리는 횟수가 늘어났다. 눈 위를 뒤덮고 있는 눈가리개를 치우고 클린트가 모로 누워 토니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토니도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다. 여전히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얼굴이었다.

 

 

날 키워준 사람.

부모님?

자식이랑 섹스 하는 부모도 있어요?

 

 

거북이처럼 꿈쩍거리며 느리게 눈을 감고 뜰 때마다 볼 위로 속눈썹이 만든 그늘이 옅게 지는 듯 하다가 사라졌다. 토니는 그의 얼굴 어딘가를 잘 살펴보았다. 감정의 기미를 조금이라도 잡고 싶었지만 힘들었다. 무표정한 남자는 어쩌면 감정을 드러내는 방법을 아주 잊어버렸을 지도 모른다. 도톰한 입술이 열려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흘렀다. 토니는 눈을 감았지만, 클린트는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계속해서 그의 귓속에 말을 집어넣을 뿐이었다.

 

 

그 남자는 그러니까.. 소위 말하는 수학자였는데... 내게 처음 포커를 알려줬죠. 확률 계산이라며 재밌는 방법으로 나를 깨우치게 할 생각이었나 봐요. 안타깝게도, 나는 숫자놀음보다 카드노름에 더 빠져버렸지만. 그 남자는 참 잘해줬어요. 피 한 방울 섞인 남이었는데도... 그게 문제가 됐죠.

 

 

감기는 눈꺼풀을 슬쩍 들어 올리자 클린트의 무표정한 얼굴이 들어왔다. 어쩌면 이건 돈을 빌려준 답례로 재밌는 거짓말쯤으로 자기를 포장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동자에 아리는 옅은 그리움을 토니는 보았다. 거짓말을 알아채는 법은 몰랐지만 진심을 알아채는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마치 안심을 하는 것처럼 토니는 다시 눈을 감았다. 눈꺼풀 위로 한 번도 만나지 않은 타인을 그려보면서.

 

 

왜 다들 그렇잖아요. 타인이랑 살 붙이고 살다보면 정도 들고 애정도 생기고.. 처음 자자고 그를 유혹한건 나였는데 결국 거기서 도망치는 것도 항상 나였죠. 부모도 없는 내가 진짜 아버지랑 잔 것 같은 죄책감도 들고.. 도망쳐 나와서 정처 없이 다니다보면 항상 도박장이죠. 거기서 사람 사귀는 건 쉽질 않더라고요. 그 남자가 멋대로 만들어놓은 좋은 환경에서 자라다가 사람들에게 치이니까 결국 나도 자연스럽게 사람 속이는 방법을 알게 되더군요.

 

 

만나서 지금까지 가장 많은 말을 하면서도 느긋하고 건조한 목소리 때문이었는지 그는 퍽 수다쟁이처럼 느껴지질 않았다. 두서없는 말들이 어영부영 공기 중에 나열되다가 곧 잊힐 것처럼 사라졌다. 자세를 고쳐 잡으며 몸을 움직이자 매트리스가 출렁거렸다. 끼익 거리는 녹슨 소리가 침대 아래로부터 울렸다. 그는 창가로 시선을 가져갔다. 얕은 바람에도 쉬이 휘날리는 파스텔 빛의 커튼이 그의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기도 했다. 그 창가 너머 마르고 텁텁한 대지가 보였다. 황금빛 모래를 머금은 땅은 그의 얼굴처럼이나 지독하게 말라보였다.

 

 

그 사람은 좋아하지 않았어요. 내가 도박을 하는 것보다 정직하지 못하다는 걸 꼬집었죠. 그 사람은 정직했거든요.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으면서 남에게 부탁도 잘 안하는데 이상하게 그 사람한테는 뭐든 부탁하게 되죠.

 

 

그리고 그는 한참을 침묵했다. 방 안에 시간가는 초침 소리만 어지럽게 얽혔다. 그의 가지런한 손가락들이 안대를 잡아 내렸다. 그의 헤이즐넛 어두운 눈동자가 종적을 감췄다.

 

 

그런데 그게 난 싫어.

 

 

잠에 빠져들면서 토니는 그가 마지막으로 했던 어린아이 투정 같은 목소리가 처음으로 사람처럼 느껴졌다.

 

 

 

 

***

 

 

 

 

 

다시 한참을 달린다. 직선으로 쭈욱 뻗은 아스팔트 도로는 그 끝이 보이질 않고 수평선 너머로 길게 이어진다. 낮보다는 온도가 많이 내려갔지만 달리면서 끊임없이 피부를 부딪치는 바람은 미적지근했다. 간간히 모래바람이 섞여 눈을 덮은 선글라스 위로 부서지기도 했다. 핸들을 잡고 있는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할지도 모르는 길을 달리며 토니는 막막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아주 멀리 돌아왔다는 생각을 했다. 토니는 클린트에게 사람을 속이는 법에 대해서 물었다. 당신이 할 수 있겠어요? 클린트는 드물게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포커페이스가 중요해요. 절대로 자기 안에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거죠.

어떻게 감정을 얼굴에 안 드러낼 수 있지? 난 그게 힘들던데.

아무도 믿지 않으면 되요. 주관을 버리고 분석을 하면 대게 이겨요.

그렇게 잘 하는 양반이 왜 그 판에서는 진거야?

모든 경우의 수에도 운을 이기는 방법은 없어요. 무엇보다 오류가 생기기도 하거든요.

무슨 오류?

자기 자신도 믿지 못하는 오류. 포커페이스의 완성이자 실패죠.

 

 

뜨거운 바람이 차 안을 스치고 지나갔다. 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휘날렸다. 작렬하듯 뜨겁게 타오르는 태양 저편을 보다가 옆을 바라보았을 때 클린트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의 웃음이 그대로 남아있었지만 어딘가 어색해 보이기도 했다. 토니는 그런 그에게 마주 웃어주었다. 귓가에는 웃음소리 대신 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시끄럽게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품에서 검은색 플립으로 된 핸드폰을 꺼냈다. 파란색 화면 위에 상대방의 이름은 떠있지 않았지만 그는 번호만 보고도 누군지 안 것 같았다. Damn it! 그가 드물게 신경질을 냈다. 핸드폰이 그의 단호한 손아래 분리가 됐다. 배터리가 빠진 핸드폰이 뒷좌석으로 던져졌다. 그걸 보던 토니는 그게 누구냐고 묻지 못했다. 그의 미간이 평소보다 더 짙게 구겨져 있었다. 포커페이스에 균열이 일었다. 토니는 어쩌면 그 상대방이 그를 유일하게 믿고 있는 사람은 아닐까 생각했다.

 

차는 계속해서 달린다. 요란한 엔진소리는 이제 익숙하다. 옆으로 트럭 두 대가 지나가면서 먼지를 일으켰다. 하늘은 파랗게 그리고 점점 어둡게 짙어지고 있었다. 한 낮을 모두 태운 태양이 서서히 서쪽 하늘로 내리우고 있었다. 모래 바람이 사라지고 어느 샌가부터 초록색 초원들이 즐비했다. 저 멀리 만년설을 머금은 높은 산이 보이기도 했다. 옆으로 수 없는 전선줄이 그들과 함께 달렸다. 차는 멈추지 않았다. 끊임없이 이어진 아스팔트 도로 위를 달렸다.

 

 

 

 

 

 

모텔에 당도했을 때 태양은 이미 서쪽 하늘 아래로 꺼지고 있었고 마지막을 장식하듯 빨갛게 그 끝을 물들이고 있었다. 하늘 위로 철새들이 하루를 끝내는 작은 울음을 내며 사라졌다. 빨갛고 노랗게 물드는 하늘과는 달리 지상 위엔 어둠이 내려앉았다. 검게 지는 어둠 아래 태양이 떠있는 동안 대지를 뜨겁게 타오르던 열기가 식었다. 검게 물든 높은 산맥들과 파란 초원들. 그리고 토니는 노을이 지는 창가에 서서 완벽하게 포커페이스가 무너진 클린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을이 커튼 뒤에 숨어있는 그를 빨갛게 물들었다. 클린트는 밖에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 바닥을 밟으며 왔다 갔다 하는 걸음은 대게 빠르고 불안정했다. 그는 검은 전화기 하나를 귀에 대고 열성적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어요? ..... 젠장, 이번 달만 세 번 바꿨는데? ..... 그 소리 좀 그만 해요! 제발 날 내버려 둬요, 전화하지 말라고요!!

 

 

탁- 플립이 닫혔다. 커뮤니케이션의 단절.

 

 

 

 

 

 

단조로운 시간은 흘러간다. 아침을 먹기 위해 작은 식당에 들렸다. 띠리리- 다이너에 크게 벨소리가 울렸다. Shit! 클린트가 스크럼블 에그를 씹다 말고 욕지기를 했다. 품에서 꺼낸 핸드폰에는 어제 차에서 봤던 번호와 똑같은 번호가 찍혀있다. 그가 골이 아픈 듯 머리를 부여 집었다. 가뜩이나 좁은 미간사이가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손에 쥔 핸드폰이 토니의 앞으로 다가왔다. 대신 받아줘요. 그는 처음 돈을 부탁했을 때처럼 뻔뻔하게 말했다. 토니는 씹던 토스트를 삼키고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켠 뒤 그 핸드폰을 받았다. 손아귀에 들어오는 작은 핸드폰이 애처롭게 울었다. 삐리리- 귀를 찌르는 것처럼 날카로운 음이었다.

 

 

뭐라고 해?

그냥 잘 못 걸었다고 해요.

 

 

토니는 난처하게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내가 알려줬잖아요, 사람 속이는 거. 클린트가 남은 스크럼블 에그를 입 안에 쓸어 넣으면서 말했다. 토니는 한 숨 한 번 크게 쉬고는 이내 전화를 받았다. 플립을 열고 귀에 가져 대자 핸드폰의 뜨거운 열기가 귀를 타고 흘러들어 왔다.

 

 

여보세요? 네. 네, 아뇨. 전화 잘못 거셨... 네? 어디라고요? 아... 네. 알겠.. ..... 그거 정말인가요? 네. 알겠습니다.

 

 

탁- 전화가 끊겼다. 토니는 낯선 남자의 말을 머릿속에서 정리하려고 애를 썼다. 이런 일은 정말이지 익숙하지가 않았다. 침묵이 맴도는 동안 클린트가 커피를 마셨다. 달각하며 식기구들이 부딪히며 작은 소란을 만들었다. 잔뜩 얼어버린 표정을 보면서 클린트가 또 드물게 웃었다. 이번엔 또 뭐에요? 그가 부쩍 너스레를 떨었다.

 

 

베가스의 병원이래. 네 아버지.. 아니, 그 남자 위독하다는데?

...개자식. 맨날 죽는다지.

 

 

그는 마치 누군가를 찌르는 것처럼 포크로 빈 접시 위를 거세게 찍어댔다. 뾰족한 포크 끝이 그릇과 마찰하면서 소리를 냈다. 깨지고 부딪히는 소리. 절레절레 고개를 젓기도 한다. 토니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저 반응은 결코 자기를 키워주고 몸까지 섞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로는 보이지 않았다. 설령 그들이 어떤 사정으로 거하게 싸우고 떨어져 있는 상황이라고 해도. 하지만 그런 그의 반응에 오히려 클린트가 더 어이없다는 듯 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건 토니를 향한 것이 아니라 전화를 건 상대방을 향한 것이었다.

 

 

내가 뜬 이후로 계속 전화해서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한다고요. 그렇게 정직, 정직 하던 인간이. 한 달 전에도 그랬는데 가보니 멀쩡 하드만. 보나마나 강의 준비 한다고 밤이나 새다가 과로라도 했나보지.

어쩌면, 꾸며서라도 당신이 보고 싶었나보지.

 

 

어깨를 으쓱이며 토니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 말에는 어느 정도의 깊은 진심이 들어가 있었다. 클린트는 그런 그를 외면했다. 그리고 진하게 내린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코끝에서 열기가 일며 따뜻하고 향긋한 커피 향기가 코 안으로 스며들었다. 토니는 별 수 없다는 듯 접시에 남은 토스트를 씹었다. 어딘가 껌 씹는 것처럼 질겅질겅하는 것이 맛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뭔가 불편한 건지 알 수 없었다.

 

토니는 지금으로부터 채 1년이 되지 않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돈이 많다는 이유로, 사업상의 위치 때문에 아무도 믿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면서도 곧잘 잘 속아 넘어갔던 자신. 어쩌면 자신이 만든 포커페이스는 실패작일지도 몰랐다. 그것은 믿음을 기반으로 만들어져있었다. 마지막까지도 콜슨에게 가버린 페퍼를 그저 믿고만 있었던 것처럼. 그런 것들은 생체기가 되어 항상 그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믿음이 없다면? 정말 사람은 상처받지 않게 될까? 정말 클린트가 짓고 있는 포커페이스처럼 모든 일에 무감각해질까?

 

토니는 힐끗 클린트를 보았다. 클린트는 아까부터 뚫어지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 닿았다.

 

 

내가 가길 바래요?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진짜라고 믿고 있군요. 어쩌면 진짜 일지도 모르잖아. 죽어버리면 어쩌지? 라면서..

이봐, 진짜일 수도 있어.

상관없어요. 죽든지 말든지 알바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면서 클린트는 토니의 시선을 피했다. 창가에 닿은 시선은 이상하게 떨리고 있었다. 포커페이스의 균열이 일었다. 클린트는 그걸 감추기 위해 체한 사람처럼 커피를 들이켰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하지만 토니는 그 안에서 불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토니는 처음으로 그가 딱하다고 느꼈다. 아무도 믿지 못해 자기를 유일하게 믿고 있는 사람마저 믿지 못하고 그런 그를 의심하는 자기 자신도 믿지 못하는 남자.

 

 

거짓말.

 

 

토니의 말에 클린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드물게 입 꼬리를 울려 웃을 뿐이었다.

 

 

 

 

***

 

 

 

 

차는 계속해서 달린다. 하늘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달리는 차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높은 교각들이 머리 위를 지나갔다. 저 멀리 끝이 없어보였던 아스팔트의 마지막 자리에 높은 빌딩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화려한 조명을 뽐내며 활력이 넘치는 도시는 마치 그들을 환영하는 것도 같았지만 어쩌면 그것은 클린트의 포커페이스처럼 그 안에 들어있는 어둠들을 가리기 위한 수단일지도 몰랐다. 작열하는 태양이 마지막 길목을 축복하듯 화려하게 타올랐다.

 

라스베이거스였다.

 

 

 

 

 

 

난 안 들어가요.

 

 

내리쬐는 태양 아래 베가스 병원이라고 적힌 간판이 번뜩이며 빛났다. 높은 빌딩 사이에 갇힌 제규어가 갓길에 섰다. 곤색의 재규어가 그간 달려온 길을 대변하듯 먼지로 뒤덮여 제 색을 뽐내지 못하고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그 차에 기대어 클린트는 고집을 부렸다. 그 눈이 단호해서 토니는 더 설득할 기운도 내질 못했다.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겠다고? 마른 입술을 씹고 있는 클린트는 완벽하게 포커페이스를 무너뜨린 채다. 그는 초조한 듯 짧은 손톱을 이로 씹었다. 이빨 사이에 부서지는 손톱이 딱딱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당신이 가 봐요.

내가 왜?

부탁이에요.

 

 

부탁치고는 으레 뻔뻔한 말투였지만 토니는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토니는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하다가 이내 한숨으로 그것들을 흘려보냈다. 정면으로 마주하는 얼굴은 좀처럼 인상을 찡그리지도 그렇다고 무덤덤하지도 않다. 하는 수 없이 토니가 건널목을 건넜다. 은빛 간판이 태양빛에 반사되어 번쩍거렸다. 재규어에 기대어 클린트가 토니가 지나간 그 길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리고 스스로를 끌어안았다. 다부진 팔뚝을 부여잡은 손은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병원의 복도는 분주하다. 차트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간호사들과 의사들. 환자들은 느긋한 걸음으로 온 복도를 휘저었다. 환자 하나가 굴러가는 침대에 실려 수술실로 향하고 있었다. 퀭한 눈으로 복도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환자의 몸에서는 생기라곤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 복잡한 복도와는 달리 1인 병실은 조용했다. 침대 옆에 놓인 기계가 규칙적인 음을 내지 않았다면 그저 침묵뿐일 것이었다. 토니는 침대에 누워있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인상이 퍽 좋은 남자는 어딘가 지쳐 잠든 듯 해 보이기도 했고 영영 깨어나지 않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코와 입을 가리고 있는 커다란 산소호흡기가 달려있어 얼굴의 반을 가렸지만 토니는 쉽게 그를 연상할 수 있었다. 아마 목소리가 꽤 좋을지도 모른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벌어진 환자복 사이사이 복잡한 전선들이 얽혀있다. 삐- 삐- 삐- 기계가 느리게 운다.

 

 

조금 더 빨리 오셨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전화를 했는데.. 환자분이 많이 찾더군요. 이틀 전에 코마상태에 빠졌습니다. 언제 깨어날진 미지수이니 그저 기적을 바랄 수밖에는.... 나이가 오십도 되지 않은 것 같던데.. 뇌졸중이 요즘은 흔한 질환이긴 하지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모양입니다. 한 달 전에 약 처방을 하긴 했었는데, 혼자 살아서 챙겨주는 사람도 없었을 테니...

 

 

 

하얀 가운을 입은 백의의 의사는 무감각한 목소리로 그에 대해서 읊었다. 그 소리들이 마치 현실감 없는 것처럼 느껴져 토니는 침대 위의 남자를 보았다. 다부진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하지만 그 것이 꽤나 미약해 보였다. 토니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선이 연결되어있고 링거가 꽂힌 손은 어딘가 많이 상해보이고 투박해 보였다. 그 손은 포커 판에서 카드를 신중하게 뒤집던 그 손과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작은 손이 그 두터운 손을 잡았다. 미약하게나마 체온이 잡혔다. 그는 침대 머리맡에 달린 명함 패를 보았다. 그 곳에는 브루스 배너라는 깔끔한 이름이 쓰여 있었다.

 

 

 

 

 

 

갑자기 닥치는 빛에 시야를 잡기위해 토니는 인상을 찡그려야 했다. 병실에서 보냈던 시간은 아주 많은 것 같기도 했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도로 위는 한적했다. 태양을 피해 모두가 빌딩 안으로 숨어버린 시간, 갓길에 세워둔 제규어는 아직도 그 자리이다. 토니가 다가가자 그 앞을 불안하게 서성이던 클린트가 재빨리 시선을 돌린다.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지만 대답을 재촉하는 듯 했다. 포커 판에서 보았던 그 눈빛이 토니 위로 꽂혀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코마 상태야.

 

 

그 말을 뱉으면서도 어딘가 현실감은 없다. 머릿속에 아까 봤던 장면들이 꿈처럼 떠올랐다. 코끝을 괴롭히는 약품 냄새라던가, 규칙적으로 울고 있는 기계소리 같은 것들. 클린트는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술을 고집스럽게 꾹 다물었다.

 

 

거짓말.

 

 

짧게 말하며 클린트가 등을 졌다. 필사적으로 현실을 부정하는 모습에 토니는 화가 났다. 귓속에서 무감각한 의사의 목소리가 흘렀다. 조금 더 빨리 오셨어야 했습니다. 초라해진 남자의 단상. 어쩌면 그 날 전화를 받았던 날 왔다면 적어도 목소리는 들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잠들기 전 마지막을 지켰을 수도. 성난 걸음이 클린트 앞에 섰다. 커다란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그를 바라본다. 거짓말 아냐. 자네도 알 텐데. 토니의 말에 클린트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눈을 마주치고 있었을까, 그리고 그 때 토니는 처음으로 포커페이스라는 껍질을 벗고 클린트라는 남자의 처음 인간다운 얼굴을 보았다. 미간에 잡혔던 주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표정은 어딘가 허탈해 보이기도 했다. 그 표정이 어느 순간 일그러졌다. 그는 마른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어떻게든 가려냈다. 흐으.. 입사이로 작은 흐느낌이 쏟아졌다.

 

 

거짓말... 거짓말!!

 

 

클린트는 그렇게 외치며 달렸다. 그의 다급한 발걸음이 건널목을 건너 베가스 병원 안으로 사라졌다. 그가 도망간 뒤를 바라보면서 토니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머리끝까지 올라왔던 화가 어느 정도 가라앉는 듯했다. 하지만 가슴 안은 어딘가 꽉 막힌 것처럼 먹먹했다. 짧은 손가락이 먼지가 잔뜩 뭍은 재규어를 쓸었다. 먼지가 묻어나오며 그 밑으로 곤색의 반짝이는 표면이 드러났다. 그 빛을 머금은 곳이 햇살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이 났다.

 

 

 

 

 

 

침대 한쪽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가라앉았다. 끼익- 매트리스가 소음을 냈다. 삑- 삑- 삑- 기계가 규칙적인 소리를 냈지만 지금껏 들어온 소리 중 가장 느긋하고 느린 소리였다. 꽂혀진 링거 병에서 액체가 떨어졌다. 그걸 이은 튜브를 따라오다 보면 조금 마른 듯한 두터운 손이 보인다. 그리고 그 두터운 팔을 지나 넓은 가슴 위에는 알지도 못하는 전선들이 이리저리 붙어있다. 몽롱한 눈은 그 넓은 품에 안겼던 기억을 회상하는 듯 했다. 그 품은 비록 작아졌을지언정 여전히 포근해 보였다. 두터운 손을 닮은 클린트의 손이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곱실거리는 머리카락에는 흰머리가 섞여 있어서 그게 참 낯설었다. 세월이 새겨진 주름살은 미소를 지으면 옴폭 파이곤 했다. 거친 얼굴은 어딘가 평온해 보이기도 했고 근심이 쌓여 있는 듯 하기도 했다.

 

올라오는 눈물을 클린트는 막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입술 사이로 끊임없이 짐승 같은 흐느낌이 섞였다. 기계소리를 빼면 온통 침묵이 가라앉았던 병실 안에 울음이 그득했다. 브루스, 브루스... 입은 부정확한 발음으로 계속해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클린트는 그의 품에 안기듯 뛰어들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쉭쉭- 거리는 작은 숨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가느다란 생명줄을 잇고 있는 초라한 남자의 품에 안겨 클린트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울기만 했다. 눈으로 부터 떨어진 눈물이 엉망으로 그의 볼을 적시고 환자복을 물들였다. 그의 다부진 손이 질척이며 온 병실을 물들이고 있는 죽음으로부터 남자를 끌어올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마른 몸을 부여잡았다. 따뜻한 체온이 가득하던 두터운 손은 아이처럼 엉엉 우는 그를 더 이상 달래주지 못했다.

 

병실 문 옆에 기대어 그것들을 바라보던 토니는 고개를 돌렸다. 병실 복도까지 울리는 짐승 같은 울부짖음을 들으며 토니는 가만히 서 있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그것은 갈피잡지 못하고 길을 잃어버린 아이의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점점 멀어지는 그 울음소리를 들으며 토니는 자신이 누군가를 믿고 있고 그것에 상처를 받고 있었던 사실에 대해서 안도감을 느꼈다. 적어도 그에겐 돌아갈 곳이 있었다.

 

 

 

 

 

 

미안해요, 차 못 줘요.

 

 

병실 밖으로 나온 그의 목소리는 그 끝에 아직 울음이 남아있었다. 태양은 여전히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고, 빛나는 재규어 옆에 서서 클린트를 기다리고 있던 토니는 한가롭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청명하게 푸른 하늘은 어딘가 오늘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차들이 간간히 지나가며 뿌연 도시 매연을 흩뜨렸다. 클린트는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토니에게 대뜸 그리 말했다. 차 못 줘요. 그리 말하는 단호한 눈 밑이 빨갛게 부어있었다. 그 분위기와 전혀 맞지도 않는 신나는 댄스곡이 옆에 있는 상점으로부터 흘러나왔다. 왜 라고 물었을 때 클린트는 잠시 고민하는 듯 토니를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그것은 기분 나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가 자기 속 얘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믿을만한 사람인지 재고 있는 것일 지도 몰랐으니.

 

 

왜냐면 이거 브루스 거거든요. 내가 카드 노름에 빠지니까 저도 한 번 해보겠다고 나서더니 크게 한 방 터뜨렸죠. 그리고 그 다음날 이걸 샀어요. 그러니까... 저는 왜 어떻게 이길 수 있었냐고 물었는데 그가 말하더군요. 포커에 한에선 누구도 믿을 수 없지만 적어도 자기 자신을 믿을 줄은 안다고. 그게 무작정 날 그냥 꾸짖는 것 같아서.. 그게 싫어서 차를 훔쳐 도망갔어요.

 

 

그는 그리움이 섞인 눈으로 차를 바라보았다. 토니도 그 차를 바라보았다. 화려한 외관은 병실 안에 있던 단정하고 소박한 남자와 전혀 어울리질 않아서 토니는 어쩌면 그가 누군가를 위해 이 차를 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가 어떻게 할까 생각했어요. 경찰에 신고를 할까? 자식처럼 키워서 마음 섞고 몸 섞은 사람을 도둑이라고 감옥에 처넣을까? 브루스는 둘 다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더 끔찍한 짓을 했죠.

무슨 짓?

그는 서두르지 않고 몇 달에 걸쳐 내 주소를 알아냈어요. 어느 날 집에 와보니 그에게서 온 우편물이 있더군요. 열어보니까...

 

 

거기까지 말하고 그는 다시 올라오는 울음을 참기 위해 애를 쓰는 듯 입가를 가렸다. 일그러진 눈가가 또 촉촉하게 젖었다. 하지만 눈물을 쏟아내지는 않았다. 위태롭게 걸려있는 눈물방울들이 포커페이스를 집어 던진 나약한 그를 대변해 주고 있었다. 위태롭고, 곧 무너질 것 같은...

 

 

그는.. 그는 내 이름이 적힌 차량양도 증명서를 보내줬죠. 제기랄...

 

 

킁- 그가 코끝이 시큰거리는 듯 킁킁 거렸다. 그 때를 회상하며 다시금 올라오는 눈물을 참아내기 위해 클린트는 마른세수를 했다. 다부진 손끝이 눈물을 훔쳐냈다. 빨간 눈물길만 남았다. 다시 클린트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표정은 울음의 기미가 남아있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항상 늘 봐왔던 그 표정이었다. 그는 다시 자신을 완벽하게 가려버린 포커페이스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많이 깨지고 균열이 일어 있었다.

 

 

차 못 줘요. 닳고 없어질 때 까지 내가 타고 다닐 거예요.

 

 

그는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 처음 삼천달러를 가져가는 그 뻔뻔함이 떠올라 토니는 저도 모르게 픽- 웃어버렸다. 그를 따라 클린트도 웃었다.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조금은 멋쩍은 웃음이었지만, 토니는 그게 나쁘지 않았다. 그 침묵을 틈타고 거리로 차들이 지나갔다. 빠앙- 한 차가 크락션을 울렸다. 시끄럽게 울리는 소리 아래로 아스팔트에 긁히는 타이어의 마찰소리가 났다. 고무 탄내가 나기도 했다.

그럼 난 어떡하라고? 자네 때문에 3천 달러도 날려, 차도 못 가져..

 

 

돈 줄게요. 사실 거짓말 했어요.

뭘?

그 게임 내가 이겼거든요.

 

 

그렇게 말하면서 클린트는 입 꼬리를 살짝 올려 멋쩍게 씨익 웃었다. 어딜 얻어맞은 것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토니의 얼굴은 꽤 봐줄만 했다. 얼빵한 모습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토니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왜 거짓말 했어? 따지고 드는 물음은 아니었다. 그냥 궁금해졌다. 클린트는 말하기 싫은 듯 인상을 살짝 찡그리면서 입술을 물었다. 상점에서 나오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만 울렸다. 그는 조금 힘들게 입을 뗐다.

 

 

이야기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어요.

 

 

그 말에 토니는 언젠가의 자신을 떠올렸다. 딸랑- 하고 차임벨이 울리는 소리, 삐그덕 거리는 카페의 나무 바닥, 낡은 라디오에서 멋대로 흘러나오는 재즈 노래, 콧속 가득 채우는 향긋한 커피 냄새, 그리고 달콤하고 시큼했던 블루베리 파이. 그래서 토니는 웃었다.

그는 한참을 돌아온 건널목을 건너야할 때임을 깨달았다.

 

 

 

 

***

 

 

 

 

차들이 햇볕 아래 고문을 당하는 것 같았다. 뜨겁게 달궈진 철판들 위로 아지랑이가 일었다. 촌스러운 컨츄리 음악이 낡은 스피커를 통해 갈라지고 째지는 음성으로 흘러나왔다. 하늘위에 빨강이며 노랑이며 단색으로 휘양 찬란한 깃발들이 줄에 꿰어져 얕게 이는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토니의 눈은 마치 포커 판에서 카드를 보던 클린트의 눈과 같다. 대륙을 횡단하기 위해 중고차를 사는 것이 큰 모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토니는 카지노에서 걸지 못한 돈을 여기에 걸어보기로 했다. 중고차를 한참 바라보던 토니는 자신이 딱 타기 알맞은 2인승 스포츠카를 골랐다. 조금 때가 타긴 했지만 외관은 꽤 그럴싸했다. 옆을 따라다니던 판매원이 가격을 불렀다. 3천 5백이요. 그냥 보기에도 터무니없는 가격이었지만 토니는 그를 승낙하려 했다. 그 시도는 클린트에 의해 제지당했다.

 

 

3천.

이봐요, 이거 상태 꽤 좋다고요. 3천 3백. 그 밑으론 안돼요.

좋아요. 가요, 토니.

 

 

클린트가 토니의 손을 잡아끌었다. 뒤 돌아보지 마요. 라면서 낮은 목소리로 토니를 구박했다. 토니는 뭣도 모른 채 그저 끌려갔다. 고개는 저도 모르게 자꾸 판매원을 돌아보게 된다. 판매원은 마치 그가 다시 올것을 예감이라도 한 듯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다. 왜? 왜 그러는 데? 저건 내 차야, 저게 제일 좋아 보인다고. 조금 짜증스럽게 말하자 클린트가 휙- 고개를 돌렸다. 외려 그의 얼굴이 더 짜증스러웠다.

 

 

저거 바가지에요. 이렇게 가는 척 하면 안달내면서 깎아 줄걸요?

안 그럴 수도 있잖아. 저 차가 3천 3백일 수도 있다고.

젠장, 나랑 다니면서 뭘 배운 거예요? 저걸 믿는 거예요 지금?

이봐, 자네야말로 한 번쯤은 믿어보는 게 어때? 아님 속아주던가.

 

 

토니는 손을 뿌리치고 그리 말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부러 너스레를 떠는 모습에 클린트가 한심하다는 듯 굴었지만 이내 입가에 미소를 뗬다. 호쾌하게 토니가 웃었다. 기분 좋은 웃음이 공기 중으로 퍼져나갔다. 끝없이 파란 하늘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다가 토니는 토르가 주었던 수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수표의 끝은 조금 찢겨지고 너절해져 있었다. 망설임 없이 그걸 꺼내 판매원에게 건넸다. 판매원의 얼굴에 기분 좋은 웃음이 걸렸다. 그 수표는 판매원을 거쳐 어디론가 흘러갈 것이다. 토르가 찾아갔던 자유는 아마 그쯤에 존재할 것이다. 토니는 왠지 그 수표를 갖고 있지 않아도 토르를 잊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수표를 대신해 차의 낡은 열쇠를 받아들었다. 손 안에 가볍게 열쇠가 들어왔다. 그걸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손에 꾸욱 쥐어보았다. 언젠가 열쇠에 얽혀있던 이야기를 해주던 남자처럼 이 열쇠를 두고 이 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무도 믿지 못하는 양치기 소년과 그런 그를 믿어주었던 어떤 신사의 이야기를.

 

 

 

 

 

 

하늘 위로 쨍쨍하게 타오르던 태양이 서서히 고개를 떨어뜨린다. 하늘 위로 붉고 노랗게 노을이 졌다. 하늘에 지는 노을을 만끽하면서 토니는 낡은 중고차를 운전했다. 액셀을 밟을 때마다 세월을 머금은 차는 기분 좋은 떨림을 내며 긴 노래를 불렀다. 토니는 차 밖으로 손을 흔들었다. 뒤를 따라오던 곤색 재규어를 향한 것이었다. 선글라스를 멋들어지게 쓴 클린트가 기분 좋게 웃으며 손을 마주 흔들어 주었다. 앞으로 뻗은 길은 양쪽으로 갈라져 있었다. 토니는 이제 헤어질 시간임을 감지했다. 그건 별로 슬프지 않은 이별이었다.

 

토니의 낡은 중고차는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는 길을 향했다. 곤색의 재규어는 그 반대방향으로 차를 꺾었다. 다시 라스베이거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각자 돌아가야 할 자리를 향해 가는 두 대의 차가 서로 밀어내듯 거리가 멀어져갔다. 산등성이 아래로 태양이 장렬하게 가라앉는다. 그 노을에 비치는 풍경들이 아름답게 물들었다. 라스베이거스가 마지막 인사를 했다.

 

 

 

 

 

 

Dear. Steve.

요 며칠 클린트에게 불신하는 법을 배웠는데, 실패해서 기쁘네.

이따금 우린 자신을 파악하기 위해 타인을 본보기로 삼는 것 같아. 남과 견주어 보며 조금씩 자신을 회복하고 토니가 되는 거야.

Tony

 

 

 

 

***

 

 

 

 

한창인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의 초입이었다. 그럼에도 커피의 뜨거운 증기에 못 이겨 스티브는 짧뚱한 소매를 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의 다부진 손 위로 땀이 흘렀다. 사람들이 떠들고 있었다. 카페 안을 가득 채운 삶의 소리들이 낡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잔잔한 재즈소리와 어울려 섞여갔다. 갖은 식기들이 부딪히는 것이 꼭 실로폰을 치는 것 같았다. 치익- 커피포트가 길게 나팔을 불었고 우르릉- 지하철이 심술을 부리며 카페가 작게 떨렸다. 그 떨림마저 기분 좋게 느껴지는 어느 날이었다. 음식을 만들고 커피를 내리는 스티브의 손은 분주했다. 그는 허리를 두드리며 크게 몸을 일으키고 땀을 닦았다. 전화가 온 것은 그 때즈음이었다. 따르릉- 전화기가 울면서 요동을 쳤다. 단 한 번의 울림에 스티브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5. 우리가 함께했던 밤, 달콤한 이 순간, 사랑은 찾아온다. - Day 300. (ny)

 

가을로 접어드는 뉴욕의 밤공기는 겨울만큼이나 차가웠다. 사람하나 보이지 않는 어두운 길목에 화려한 네온사인도 잦아드는 시간이었다. 카페의 간판은 아직도 밝혀있다. 홀에 사람하나 남아있질 않는 카페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 자리에 서있다. 얇은 코트를 입은 스티브가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딸랑- 하고 울리는 차임벨이 문 안쪽 카페 안으로 먹혀들어갔다. 문이 닫히자 그는 온전하게 차가운 공기에 노출되어 있었다. 추위에 움츠러드는 몸을 비비며 스티브의 눈이 끝이 보이질 않는 어두운 길목 어딘 가쯤을 바라보았다. 얼어버리는 맨 손을 녹이기 위해 그가 입김을 불었다. 뜨거운 입김이 하얗게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그는 맨손을 서로 비볐다. 마찰되는 손바닥 사이로 온기가 조금 일었다. 요란하게 교각위로 지하철이 지나갔다. 스티브는 그곳에 있었다. 카페 앞 난간에 앉아서 무언가를 한참을 기다리며 그는 꽤 즐겁게 웃었다.

 

 

 

 

 

 

토니는 아파트 앞에 있었다. 약 1년 전 이곳을 떠나오면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아파트의 어느 한 층은 빛 하나 없이 어둡다. 창문에는 For Rent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이사를 간 걸까? 토니는 막연하게 그렇게 생각했다. 그 아파트를 보면서 토니는 그가 있던 그 자리에 서있었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눈물어린 눈으로 페퍼의 행복을 무던하게 바라보던 그 미련 맞은 모습을. 그의 도톰한 입술이 작게 웃었다. 미련하나 없는 깔끔한 웃음이었다. 그가 서있는 건널목 어디 즈음에 있는 신호등이 빨간 불이 꺼지고 파란 불을 빛냈다. 토니는 건널목을 건넜다. 그 건널목을 건너기 위해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의 비싼 구두가 느긋하다가 어느 순간 점점 속력을 올렸다. 아스팔트에 부딪치는 구두 소리가 어둡고 스산한 골목 안을 경쾌하게 울렸다.

 

 

 

 

 

 

다섯 번째 지하철이 지나갔다. 푸른빛을 내는 그것이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그 푸른빛들이 어둠 안에 남아 긴 꼬리를 만들었다. 가로등은 주홍색 빛을 잔잔하게 거리 안에 뿌려냈다. 그 밑으로 잘게 그림자가 졌다. 어디선가 길고양이가 울었다. 어렴풋이 하품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구두 소리가 들린다. 바닥을 때리고 있는 그것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다가 이내 천천히 멎어들었다. 그리고 멈췄다.

 

 

아직도 여기 있네?

 

 

고개를 숙이고 바닥의 자글자글한 무늬를 보고 있던 스티브가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서있는 남자는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고급 정장에 고급 구두를 신고 그 자리에 있었다. 어쩌면 머리가 조금은 길어졌을 것이지만, 적어도 그 모습은 스티브가 기억하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는 웃고 있었다. 멋쩍은 듯 네모난 구두코가 지저분한 바닥을 살짝 긁었고 그의 다갈색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스티브에게서 시선을 떼진 않았다. 그래서 스티브는 따라 웃었다.

 

 

예전에 엄마가 길을 잃어버렸을 땐,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고 했었거든요.

그래서 찾았어?

아뇨, 엄마가 길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그렇지만..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리에 있는 게 맞겠죠.

그게 누군데?

당신이요.

 

 

스티브가 직설적으로 토니를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 끝에 걸린 토니는 놀랄 것도 없다는 듯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 거렸다. 그럼 들어가도 될까? 토니의 말에 스티브가 난간에 붙이고 있던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마치 신사처럼 길을 터주었다. 문이 열렸다.

 

딸랑- 하고 카페 문이 열리면서 차임벨이 울렸다. 마치 흡수되는 것처럼 두 사람이 들어갔다. 카페 안은 딱 좋을 정도로 덥혀져 있었다. 토니는 마치 처음 온 사람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지하철이 지나갈 때마다 부스스 날리던 낡은 나무 바닥, 은은하게 홀 안을 가득 비추는 불빛, 제멋대로 무질서한 재즈 음악을 뱉어내는 낡은 라디오가 그 곳에 늘 붙어 있던 것처럼 그대로다. 바 위를 보았을 때 그 곳에는 식기가 올려져 있었다.

 

 

예약이 있나?

당신한테 예약되었죠.

 

 

바 안에 들어가 코트를 벗은 스티브가 웃었다. 토니는 그 자리에 앉았다. 같은 걸로? 라고 스티브가 물었을 때 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열대에 놓인 블루베리 파이가 올라왔다. 두툼한 파이 표면이 칼로 잘려 한 조각을 꺼냈다. 작은 접시에 올려져 렌지에 덥혀진 파이 위로 하얀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올라왔다. 뜨겁게 달궈진 파이에 오른 하얀 아이스크림이 표면 위로 녹아내려 보라색 블루베리 위를 흘러내려 섞여졌다. 앞에 놓인 파이를 물끄러미 보다가 작은 손가락들이 포크를 잡았다. 뾰족한 포크 끝이 단단하고 부드러운 파이 표면을 눌렀다. 표면이 부드럽게 갈라지면서 블루베리를 떠냈다. 하얀 아이스크림이 섞여있다. 그걸 입 안으로 넣었다. 분홍색 혀끝에 달콤하고 시큼한 맛이 퍼지면서 입 안 가득 침이 고였다. 맛있다. 토니가 작게 웃자 남은 피칸파이를 먹던 스티브도 함께 웃었다.

 

 

왜 팔리지도 않는 블루베리 파이를 계속 만드는 거야?

만약을 위해서요. 그러니까.. 음.. 혹시라도 당신이 올지 모르잖아요.

 

 

부끄러운 듯 피칸파이를 푹푹 쑤셔 넣으면서 스티브가 말했다. 그의 귓가가 빨갛게 달아오른 것은 추운 밖에서 오랫동안 기다렸기 때문일지는 알 수 없었다. 토니는 그저 묵묵하게 파이를 먹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던 토니는 사진 찍힌 것처럼 그대로 시간이 멈춰버린 이 카페 안에서 바 위에 유일하게 변화가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바 위에 놓였던 잡동사니를 담은 유리병은 꽃병으로 변모해있었다. 하얀 꽃잎을 지닌 꽃들이 활짝 펴있었다. 숨을 들이켰을 때 어딘가 향긋한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다 버렸어?

아뇨, 전에도 말했듯이 그건 내가 버릴 권리가 없잖아요. 대신 어딘가에 넣어 놨죠. 항상 눈앞에 두고 있는 것 보다 가끔 떠올리며 추억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당신 열쇠도?

아뇨, 그건 버렸어요. 이젠 필요가 없거든요.

 

 

그렇게 말하면서 스티브는 꽤 개운한 웃음을 지었다. 토니는 반지를 도로 달란 말도 그녀가 가져갔는지도 묻지 않았다. 궁금하지도 않았으니까. 어쩌면 스티브의 말대로 언젠가 추억에 젖을 때쯤 한 번 꺼내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둘은 파이를 먹으면서 시답지 않은 말장난을 했다. 대게 토니가 여행하면서 엽서에 적었던 이야기들이었고 스티브는 마치 엽서를 한 번도 읽지 않았던 사람처럼 그것 하나하나에 답장을 하듯 이야기를 했다. 낡은 라디오에선 계속해서 잔잔한 재즈 음악이 나왔다. 차 하나 돌아다니지 않는 거리는 한적해서 두 사람의 속삭임만 카페 안에 계속해서 섞였다.

 

가을바람이 심술을 부리듯 카페를 때렸다. 누가 들어오지도 않은 카페 문이 딸랑- 거리며 차임벨을 울렸다. 파이를 먹던 토니가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 문 건너편에서 토니는 과거의 잔상을 보았다. 떠나기 전의 자신이 그 곳에 서서 망설이듯 카페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떠나는 날, 여기에 왔었어. 들어오지 못했지. 아마 그 때 여기 들어왔다면, 나는 그 때 그대로의 나였을 거야.

그 날 기억해요?

뭐?

그... 떠나던 날. 같이 CCTV를 봤던 날 말이에요.

 

 

엉거주춤 망설이는 목소리가 그날의 기억을 깨웠다. 스티브는 마치 피칸파이에 원수라도 진 것처럼 포크로 그걸 찍어댔다. 눈은 또 파이에 고정되어 토니를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토니는 아까처럼 빨개진 귓가를 보았다. 아, 귀엽다. 하마터면 입술 사이로 그 말을 내뱉을 뻔 했다. 대신 그는 아랫입술을 살짝 빨았다. 입술에선 달콤한 맛이 났다.

 

 

그 날 잠들었다가 새벽에 간 기억은 나지.

 

 

블루베리 파이를 씹으면서 토니가 흘리듯 말했다. 마주친 스티브의 눈에는 어딘가 실망감이 가득했지만 이내 눈치를 보며 농담을 건넸다. 그 때 파이를 이렇게 먹었었죠, 하면서 커다란 파이 조각을 떠서 입에 쑤셔 넣었다. 내가 언제 그랬어? 토니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커다란 파이 조각을 씹으며 스티브가 웃었다. 두 사람의 기분 좋은 이중창이 재즈 소리에 섞였다. 몇 번째일지 모르는 지하철이 지나갔다. 카페가 기분 좋게 떨려왔다.

 

그렇게 웃고 떠들다가 토니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늘 보냈던 엽서 한 장이었다. 끝이 바삭하게 마른 깔끔한 그것은 최근에 쓰인 것으로 보였다. 토니는 그걸 뒤집어서 스티브에게 건네주었다. 부끄러운 것처럼 그의 귓가가 스티브와 똑같이 물들었다. 스티브는 파이접시와 포크를 내려놓고 그걸 받아들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긴 도로와 건널목이 보이는 사진으로 된 엽서가 손 안에 곱게 들어왔다. 토니를 보자 그가 뒤집으라는 듯 손짓했다. 엽서를 뒤집자 정갈하게 쓰인 글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천천히 읽은 스티브가 다시 토니를 바라보았다. 토니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그의 눈가에 잘게 주름이 지었다. 괜히 쑥쓰러운 듯 그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스티브는 눈을 감았다. 입가가 가볍게 웃었다. 쥐고 있던 엽서를 코에 가져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코끝에서는 빳빳하게 마른 종이냄새와 함께 달큰하고 시큼한 향기가 섞이는 것 같았다.

 

 

 

 

 

 

시계는 벌써 새벽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하철도 지나가지 않는 고요한 새벽, 카페의 불은 바 위에 아직도 머물러 있었다. 토니는 바 위에 고개를 얹고 잠이 들어있었다. 분홍색 입술 위에 하얀색 아이스크림이 묻어있다. 녹은 아이스크림들이 주름진 입술 사이에 스며들었다. 비워진 접시를 치우면서 스티브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입술 위로 가져갔던 손이 머뭇거리듯 그것을 치우지 못하고 내려왔다. 대신 스티브는 그 날 그랬던 것처럼 허리를 숙였다. 토니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바에 닿은 얼굴이 토니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입술 위로 머뭇거리던 그가 다가왔다. 분홍색 입술이 그의 입술에 먹혔다. 하얀색으로 얹힌 아이스크림을 가볍게 빨았다. 혀끝에 다가오는 달콤함이 머리를 울릴 정도였다. 금세 허리를 들었던 그날과는 달리 키스는 토니가 수없는 길을 돌아왔어야 했던 그 시간처럼 깊고 또 길었다. 마치 문을 열어달라고 때를 쓰는 것처럼 입술이 그 자리에 계속해서 머물며 도톰한 입술을 핥고 가볍게 빨아올렸다. 토니는 눈뜨지 않았다. 마치 맛있는 것을 음미하는 것처럼 낮게 콧소리를 내기만할 뿐이었다.

 

바 아래로 처져있던 손이 스티브의 결 좋은 금발을 쓸어내며 뒤통수를 잡아끌었다. 단단한 파이 껍질이 터지는 것처럼 입술이 열렸다. 기다렸다는 듯 스티브의 말랑한 입술이 잡아먹을 듯이 파고들었다. 입술 사이로 달큰한 숨이 섞였다. 얽히는 혀끝에선 달콤하고 시큼한 맛이 났다. 뒤통수를 잡았던 손이 스티브의 귓가를 잘게 애무했고 다른 손이 그를 열정적으로 끌어당겼다. 스티브의 손이 토니의 볼께에 닿았다. 뜨거운 체온이 닿아왔다. 그 닿은 부분으로부터 뜨겁게 녹아내릴 것 같았다.

 

하얀 아이스크림이 보라색 블루베리파이 사이로 녹아드는 것처럼 그들은 깊고 또 달콤하게 입을 맞췄다.

 

그들이 함께 했던 밤, 달콤한 이 순간, 사랑은 찾아왔다.

 

 

 

 

 

 

Dear. Steve.

여기로 건너오는데 1년 가까이 걸렸네.

건널목을 건너는 것은 그리 어려울 게 아니었어. 건너편에 누가 기다려주느냐에 달렸을 뿐.

Tony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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