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거짓을 알게 된 순간, 지금 당장 지구가 터져버렸으면 좋다고 생각했다.
딱 그만큼, 슬펐다.
Ah Ch'infelice Sempre
2
그 영상은 아직 지우지 못했다.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서 다행이다.
“뭐 해요?”
생각이 이성을 잠식시킬 때가 있다. 예를 들어 그 날 저녁, 입 밖으로 저녁식사를 모조리 토해내고 난 날은 잠 조차 오지 않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었다. 이대로 침대에 누워 있으면 문이 열리고 당신이 조심스럽게 들어와 나를 달래주진 않을까 라는 부질없는 희망을 품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진짜 잠들지 못했던 이유는 생각들 때문이었다. 생각은 생각을 만들어 내고 그것들은 머릿속에서 넘쳐나 내 마음을 잠식 시켰다. 순식간에 불어난 강물에 쓸려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홍수에 표류 되는 나뭇조각들이 이런 기분일까? 그때 나는 아마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동이 트고 내가 했던 것은 '일'이었다. 군말 없이 페퍼가 주는 서류에 싸인을 하고, 아머를 업그레이드 시켰다. 생각의 강에 휩쓸린 나를 붙잡아 둘 수 있는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가장 효율적인 것은 일 밖에 없었다. 내게 남은 것은 그거 하나뿐이었으니까.
“보시다시피 일 하고 있어요.”
지금 나에게도 그랬고.
정신없이 손가락을 놀리며 패널에 집중하는 나를 보며 배너는 못내 웃었다.
“무섭네요, 이렇게 집중하는 거 보는 게 처음이라. 식사는 한 거에요? 안색을 보니 잠도 못 잔 거 같은데, 잠은 좀 잤어요?”
“하나씩 물어요. 식사는 아까 닥터랑 먹은 치즈 버거가 다고 잠은 확실히 못 잤어요. 그렇게 티나요?”
“아까 회의실에서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티가 나네요.”
“나이 40이 넘으면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게 되잖아요. 안 그래요?”
20대는 싱그러운 순수함이 있다. 자신을 표현하는데 가감이 없다. 그것이 곧 개성이 되며 동시에 그것들이 짓밟혀 나가는 것을 오롯이 느끼고 상처를 입는 시기이기도 하다. 30대는 무디다. 상처는 고름이 얹어 다시 아물고 또 굳은 살이 된다. 상처 받기 위한 나름의 규칙들이 있지만 어딘지 어설프다. 그리고 그 과정을 거쳐 40대에는 비로소 완벽해 진다. 상처 받지 않기 위해 계산을 하고 비겁해 진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겐 철저하다. 일정 부분은 타협을 본다. 그러면서 자신의 상황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게 쉽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냉정하고 빠른 현대 사회에 적응 하기 위한 나약한 인간들의 성장 과정인 것이다.
“근데도 얼굴에 티가 나는 걸 보면 난 성장이 더딘가봐요.”
“뭐, 이런 상황에서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박사는 별로 그래 보이지 않아서요.”
“저는 이런 거에 익숙하잖아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배너가 어깨를 으쓱한다. 하긴 고수 앞에서 애 같은 투정을 했다 싶어 괜히 웃고 말았다. 파트너로 배너 박사가 된 것이 어찌 보면 다행이다 싶었다. 사실 기술적인 부분 때문에 박사가 올 수 있을 수 밖에 없긴 했지만, 그런 걸 떠나서 지금 이럴 때 내 약한 모습을 알고 있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가 곁에 있다는 게 맘이 놓인다.
“건강 챙겨요, 토니. 이러다 쓰러지겠어요.”
“그러게요. 이번 일 끝나면 여행이라도 갈까 봐요.”
여행 좋지. 현실을 비껴 어디라도 도망갈 걸 생각하면 그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기분이 든다. 덥지 않은 따뜻한 남쪽 섬에 가서 몇 날 며칠 물놀이나 하고 태닝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던지, 알프스 산자락에 별장을 빌려놓고 스키를 타던지, 아니면 너도 나도 가는 사람 많은 관광지에서 오래된 유적지 같은 것들을 보며 맛있는 것들을 먹고 피로를 씻어내는 거다. 생각만으로는 당장 짐이라도 싸서 떠나버릴 마음이 굴뚝 같다. 그래, 이번 일만 끝나면…
이번 일만 끝나면, 이라는 말은 스스로에 대한 반복된 변명이었다. 이번 일이 끝난다고 해서 할 일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일단 언론에 터뜨려 놓은 말을 수습하고 협정 결렬에 대한 정부 인사들과의 미팅 역시 줄줄이 이어질 것이다. 지금 일로 타격을 입었을 회사를 생각해서 경영진 회의 때 얼굴이라도 비춰줘야 할 터였고, 그동안 손 놓고 있던 아머도 업그레이드를 해야겠지. 할 일이 태산이다. 휴가는 글렀네. 스스로 자조하면서도 안심한다. 붙잡을 것이 있다. 생각이 날 표류하게 하지 못하도록 매달릴 것이 있다. 일을 한다는 건 그렇다. 기계처럼 몸을 움직이게 만들어 생각을 지워버릴 구실이 되어준다.
“다 온 것 같네요.”
퀸젯 창 너머 흰 세계가 펼쳐진다. 여기는 그 때도 지금도 여전히 하얗다. 지금 시기가 여름이면 조금 나았을까, 싶다. 문득 그 날의 일이 떠오른다. 그 때의 기억은 명확하진 않지만 적어도 하나는 기억한다. 바닥에 누워 옆을 보았을 때 나란히 가는 두 사람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분노에 찬 내 목소리를 등진 채 내 아버지가 준 방패를 버리고 돌아선 당신을 보다가 기가 차서 나도 모르게 허공을 향해 헛웃음을 짓고 말았었다. 그래, 잘났어, 아주 좋겠네. 저 정도로 목숨 걸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어서. 나는 그 정도는 아니었던 거고. 하하, 웃다가 또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르고 그 다음에 느낀 것은 외로움이었다. 바람은 너무 찼고 나는 혼자였다.
다시 한 번 느끼지만 참 다행이다. 그 때도 일이 있어서. 로스 장군에게 거짓으로 둘러대며 정부의 힘에 이리저리 개처럼 끌려다녀야 했지만 그래도 일은 일이었다. 사랑했던 누군가에게 버려져 혼자가 되어버린 내가 외로움을 느낄 틈을 주지 않았다. 그러지 않았다면 불쌍한 독거 노인처럼 넥타이에 목이 졸린 채 썩어가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혼자는 싫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는 더. 기억 속 그 커다란 저택의 적막함을 이제 와서 견딜 수 있을리 없었다.
“그럼 일 하러 가볼까요?”
그리고 그런 지금 나는 다시 일에 매달린다. 새삼 내가 당신과 동행하지 않은 것이 현명한 판단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지 이런 곳에 당신을 끌고 와 그 때의 기억을 상기시키며 버려졌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싶지 않았다. 일이 함께하는 한, 나는 외롭지 않았다.
헤어짐을 먼저 이야기 한 것은 나였다.
“그만 만나자, 이젠 지겨워졌어.”
그것만큼 이별에 좋은 핑계는 없었다.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시베리아 기지는 손상이 많았다. 애초에 감정적으로 무분별하게 이뤄졌던 싸움이다 보니 어디를 부수고 망가뜨렸는지 일일이 기억할 수는 없었지만 확실히 처음 들어왔을 당시의 모습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멀쩡한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부서지고 망가진 잔재들 뿐이었다. 내가 이것들 사이에 버려져 있던 사실이 새삼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패널도 망가졌고 전원도 들어오지 않아요. 토니, 여기가 확실한 거에요?”
“날 의심하는 거에요? 분명 어딘가 있을 거에요.”
“만약 아니면 퓨리가 당신 머리에 총구멍을 낼까 봐 무서워서 그래요.”
“박사는 참 무서운 것도 많네요. 이리 와 봐요. 여기 지하실이 있어요.”
이 정도 방대한 공간을 사용했다면 어딘가 숨겨진 곳도 있었을 것이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바람 발 닿는 곳으로부터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려 아래를 보자 아니나 다를까 손잡이가 보인다. 얼어붙어 잘 떨어지지 않아 배너와 힘을 합쳐 꽤 힘겹게 열어 젖히자 사다리 아래로 끝이 보이지 않는 검은 공간이 보인다. 안에서는 고요한 적막 뿐인 이 시베리아와 어울리지 않는 기계 소리가 났다.
서버가 손상될 까봐 섣불리 조명탄을 던질 순 없어서 때마침 챙겨 온 구식 손전등으로 아래를 비추며 천천히 내려갔다. 생각보다 깊지는 않았지만 안에 있는 것은 거대했다.
“세상에, 이게 다…?”
배너 역시 적지 않게 놀란 눈치인 듯 입을 떡 벌린다. 사다리로 내려온 자리를 제외한 모든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기계는 웅웅- 거리는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면서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었다. 당시의 저장 매체 시스템으로 봤을 때, 그 정도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서는 컴퓨터의 덩치가 커야 한다는 것은 예상했던 바이지만 이정도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전면 뿐이라 후면까지 얼마나 큰 지는 보이지도 않았다. 위에 대기하고 있던 아머를 통해 프라이데이에게 스캔을 해보라고 하자 서버의 거대한 몸집이 드러난다. 이게 조라 박사의 뇌란 말이지? 이 와중에 공학도로서 흥미가 이는 것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는지 배너가 퍽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다. 난 웃었다. 괜찮아요. 이 호기심 덕분에 아직 내 숨이 붙어 있는 거에요.
하지만 마냥 놀라기만 할 수는 없어 성애가 낀 표면을 더듬어 연결할 수 있는 라인이 있는지 찾았다. 다행히도 사람 하나 겨우 비집고 들어갈 작은 문 하나를 발견했고 문을 열자 아니나 다를까, 그 거대한 컴퓨터 내부로 들어가는 길이 보였다.
“이게 다 뭔가요?”
배너가 문 안쪽 기계들 위에 붙어있는 종이들을 보며 물었다. 붙은 종이들이 낡고 헤져서 정확하게 읽기는 어려웠지만 개발 당시 연산이나 코드 같은 것들을 적어 놓은 것으로 추측되었다.
“개발자 노트인 것 같은데, 아마 코어 쪽으로 들어가면 더 많을 거에요. 도움이 되면 좋겠지만 의도적인 함정으로 심어 놓은 것도 있을 거라서.. 어쨌든 안으로 들어가야 뭘 확인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박사, 이것 좀 받아봐요.”
“잠깐만요, 설마 이 추위에 옷을 다 벗고 들어가겠다는 거에요?”
“스트립쇼를 하겠다는 건 아니고, 문 안 쪽으로 손을 뻗어봐요.”
“무슨… 아, 덥군요.”
“기계 열 때문이에요. 스캔 결과 안에 쿨러 기능이 있어서 어느 정도 온도를 유지할 순 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았을 거에요. 그게 여기 이 추운 곳에 서버를 방치한 이유일 거고요. 일단 박사는 위에서 대기하면서 하이드라 기지에 대한 것을 계속 조사해봐요. 난 여기 이 조라 박사랑 긴 대화를 해야할 것 같네요.”
“혼자 괜찮겠어요? 내가 같이 들어갈 수도 있어요.”
“일단 안이 좁아요. 그리고 일이 잘 못 돼서 박사가 초록 친구가 되면 서버를 완전 망가뜨릴 지도 모르잖아요? 그럼 우리 작전도 물거품이 되는 거구요. 통신기는 들고 가니까 문제가 생기면 말 할게요.”
“바로 얘기 해줘요.”
“박사는 여전히 걱정이 너무 많아요.”
백팩에 챙겨온 공구들을 이고 작은 문 안으로 들어갔다. 괜찮다는 사인이라도 보내고 싶어 뒤를 돌아보려 했는데 공간이 좁아 여의치가 않다. 하는 수 없이 그냥 무작정 앞으로 들어갔다. 문 밖에서 흘러 들어오는 냉기 때문에 살갗이 쓰리도록 아팠지만 곧 더해지는 열기로 인해 무뎌졌다. 안에 들어가 일을 끝내고 나면 익은 통구이가 되는 거 아닐까? 의미 없는 혼잣말을 하자 프라이데이가 내부 온도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설계 한 지 얼마 안 된 A.I라 자비스와 같은 유연함 없이 농담을 곧이곧대로 받아 들인다. 일곱 살 난 똑똑한 여자아이를 키우는 기분이다. 네가 시니컬해지면 아빠는 조금 슬플 거 같아, 라는 내 말에 노력해 볼게요, 보스, 라고 답하는 아이가 있어 요 며칠 새 처음으로 웃을 수 있었다.
프라이데이가 안내해주는 방향대로 이동하자 드디어 허리를 조금 펴서 앉을 수 있는 공간이 나타나고 시스템 코어로 보이는 것이 드러난다. 거대한 원형 형태에 사방으로 뻗어 있는 모든 전선들이 모이는 중심이었다. 웅-웅- 괴이한 소리를 내면서 울고 있다. 배낭을 뒤져 꺼낸 드라이버로 코어의 뚜껑을 열었다.
“세상에-“
[무슨 일이에요, 토니?]
“박사, 지금 내가 보는 걸 사진 찍어서 보내 줄게요. 보고도 믿기 힘드네요, 이거.”
그 안에는 얇은 선에 연결된 채 박동하고 있는 분홍색 뇌가 있었다. 뇌를 프로그래밍 했다고 했지만 설마하니 진짜 뇌를 집어 넣었을 줄이야. 무슨 대의가 있어서 자기 뇌를 심어 놓고 사람을 괴롭히는지, 하소연 할 수 없는 불만을 토로하며 조금이라도 편하게 자리를 잡는다. 백팩에 넣어 놓은 패드를 꺼내 키보드와 연결시키고 여러 선들을 뇌에 꽂혀 있는 연결 선에 연결시킨다. 코드를 치고 연결을 시도하려 하자 암호화된 코드가 화면 위를 덮는다. 엑세스 거부. 이래서야 인터페이스까지 들어가는 데만 시간이 꽤나 걸리게 생겼다. 하지만 이런 건 아무 것도 아니다. 하필이면 나에요, 상대를 잘 못 골랐어요. 타인을 배제시키는 데 나만큼 능숙한 사람이 없거든요.
“자, 나한테 말해봐요, 닥터. 세계를 폭발시킬 만큼 뭐가 그렇게 불만이었는지.”
시계를 본다. 앞으로 다섯 시간. 한 사람을 이해시키기엔 지나치게 부족한 시간이었다.
눈 앞에 고기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미슐렝 쓰리 스타 쉐프가 정성들여 만든 음식이었지만 그것들은 시간을 이기지 못하고 식어 빠져 볼품 없는 모양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오늘 저녁은 시간이 괜찮을 것 같은데, 라고 운을 먼저 띄웠던 것은 당신이었어. 테이블 위에 핸드폰을 본다. 액정은 빈 화면 뿐이다. 부재중 메시지는 없습니다, 전화도 없습니다, 하고 싶은 말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라고 약을 올리는 것 같아 기어이 분에 못 이겨 핸드폰을 집어 던졌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폰이 박살 났다. 내일이면 연락이 안된다고 화를 낼 페퍼의 목소리가 선연했지만 지금 당장은 그런 것을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신경질이 머리 끝까지 올라 자꾸 턱에 힘이 들어 갔다. 화가 났다. 근데 그 대상이 약속시간이 다섯 시간이나 지나도록 연락 한 번 없이 나타나지 않는 당신을 향한 건지, 아니면 미련 맞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를 향한 건지 모르겠다.
다섯 시간, 그 시간이 내가 당신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부족한 시간이었던 모양이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당신이 땀에 젖은 모습으로 들어왔을 때, 나는 이미 위스키 한 병을 다 비운 상태였고, 정신은 취하기 전 보다 말짱한 상태였다. 평소라면 미안함이가득 담겨 처량해보이기까지 한 당신의 얼굴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았던 것을 보면. 내가 유리 잔에 남아 있는 위스키를 털어 넣는 동안 당신은 답지 않게 허둥거렸다. 여태껏 기다렸나? 미안하네- 갑자기 일이 생기는 바람에… 자고 있을 줄 알고 연락 안 했어. 화가 난 거 같은데, 그래, 그럴 만 해. 요즘 내가 좀… 그래, 무슨 말을 해도 변명이 안된다는 거 알아. 미안해, 토니. 미안해, 또는 미안해 같은 말들.
“그만 해.”
당신의 변명을 자르고.
“그만 만나자, 이젠 지겨워졌어.”
이별을 고했다. 당신은 더 말이 없었다. 소음 하나 없이 조용한 정적. 목구멍에 막혀있던 분노가 조금 가라앉고 나는 조금 편하게 숨을 쉬었다. 컵을 비우고 앉은 의자의 등받이에 편히 몸을 기댔다. 그리고 당신을 보았다. 굳어있는 얼굴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당신이 있다. 몸에 힘이 빠져 늘어진 나와는 달리 경직되어 빳빳하게 굳어버린 당신이. 그런 당신을 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간 내가 방금 했던 말을 철회할 것만 같았다. 시선을 떼 자리에서 일어나서 컵을 싱크대에 넣고 그대로 몸을 돌려 당신을 지나쳤다. 침실로 향하는 그 복도가 얼마나 길어보였는 지, 내 발소리가 슬로우 모션 처럼 느리게 들렸다. 뒤에서 뛰어 오던 당신의 발걸음도 조금 빠르게만 느껴졌을 뿐이다. 내 팔목을 잡고, 당신은 떨었다. 팔목이 아팠다. 뼈가 부러질 것 같았다. 아파, 아파,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날 것 같아, 억지로 이를 악 물고 참았다.
내 손목을 잡아 끌어 성급한 발로 침실에 향한다. 당신이 내 몸을 침대에 밀어 넣고 억센 손으로 턱을 잡아 입을 맞추고 내 셔츠를 벗겨낼 때, 피부 위에 소름이 돋고 뼈가 삭아 뱃속이 부패하는 것 같았다. 내 가슴 께를 더듬는 당신의 손을 잡아 밀어냈다. 거의 필사적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강압적이었던 당신은 내 손에 너무 쉽게 밀려났다. 내 손 때문인지, 아니면 내 말 때문이었는지.
“기분 나빠.”
침실은 어두웠다. 그래서 말 없이 나를 내려다보던 당신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한참 동안 나를 내려다보던 당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보이며 침실을 빠져나갔다. 무언가 말을 하려고 잠시 멈칫 했지만 나를 다시 돌아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뚜벅이는 발걸음이 멀어지며 거실의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났고, 프라이데이가 당신이 완전히 나갔다는 소리를 하고 나서야 나는 그제야 어둠 속에 길을 잃은 내 시선을 거두고 눈을 감을 수 있었다. 그리고 크게- 숨을 쉬었다.
아- 이제야 숨통이 트인다. 살 것 같았다. 당신은 아마 모르겠지만, 내가 그 말을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혀 위에 올려 놓았는지 모를 것이다. 약속을 취소하는 당신의 전화를 받았을 때, 페기 카터를 만나기 위해 병원에 들렸다는 당신의 소식을 들었을 때, 잠자리 후 말 없이 한 참 내 등을 돌아보다가 한 숨을 쉬던 것을 들었을 때, 아머를 업그레이드 하기 위해 공구를 들었다가도, 식사를 하다가, 날씨가 좋아서 혹은 날씨가 나빠서, 그래서 숨 쉬듯이 생각했다. 이제 그만 둬야지, 이제는 헤어져야지. 그리고 기어이 그 말을 꺼냈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먼저 느꼈던 것은 후련함이었다. 드디어 끝냈어. 나는 그날 실로 오랜만에 깊은 잠에 들 수 있었다.
다음 날 해가 중천에 뜬 시간에 느즈막히 일어나서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배고프다, 였다. 어기적거리며 일어나 프라이데이의 날씨 정보와 스케줄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부엌으로 갔다. 거실과 이어진 부엌에는 햇볕이 들어오고 있었다. 냉장고를 열어봐야 먹을 것이 별로 없다는 걸 알아 물만 한 컵 꺼내 마른 목을 축였다. 그러고보니 예전에는, 그러니까 당신이 그렇게 많이 바쁘지 않았을 때는, 나를 깨워 아침을 먹이는 것이 당신의 하루 일과 중 하나였다. 나는 못이긴 척 일어나 당신이 만든 스크램블 에그와 샐러드 따위를 먹었고 프라이데이가 말해주는 빽빽한 스케줄에 투덜거리면 당신은 웃는 낯으로 그런 나를 달래고….
아, 안돼, 그만.
“흐어어어어엉…..”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자리에 주저 앉아 눈물을 흘렸다. 손목이 자꾸 시큰거렸다. 헤어져서가 아니다. 손목이 아파서, 찬 물에 닿은 이가 시려서, 스케줄이 너무 빡빡해서, 배가 고파서, 날씨가 너무 좋아서, 그래서, 울었다.
헤어짐을 먼저 이야기 했던 건 나였지만 이에 정면으로 맞서지 못한 것 역시 나였다.
두 시간이 흘렀다. 통신이 들어왔다. 나타샤였다.
[살만 해요?]
“배너한테 들었어? 나 여기 꼼짝 없이 갇혀 있는 거.”
[전반적으로 퓨리가 그쪽 상황을 전체에게 말해주고 있거든요. 아직도 엑세스는 안 된 거에요?]
“쉽게 될 거라 생각 안 했어. 프로그램이 아니잖아? 엄연히 사람이니까 낯선 타인이 머릿 속에 들어오는 걸 거부하는 것도 당연하지.”
[말로 잘 구슬려 봐요. 당신 특기 잖아.]
“그거 참 용기가 되네. 쨌든 고마워. 그 말 하려고 연락 한 거야?”
[아뇨. 지금 막 벨로루시 바브뤼스크에 있는 백업시스템과 폭탄을 해체했어요. 이걸로 세 번째 인데 작업은 끝도 안보이고 더 퀸젯을 탔다가는 멀미로 토할 것 같아서요. 이러다 죽겠다, 싶으니까 문득 해야할 말이 떠올랐어요.]
“그게 뭔데?”
[나 결혼해요.]
혀를 씹었다. 덕분에 하마터면 코드를 잘 못 칠 뻔했다. 이런 상황에서 결혼 얘기라니, 첫 만남부터 안하무인이었던 걸 생각하면 이상하진 않지만.
“어.. 축하해? 박사한텐 말 못 들었는데.”
[그거야 배너랑 하는게 아니니까요. 상대는 일반인이에요.]
또 한 번 손이 미끄러진다. 패널에 집중하던 정신이 한 순간에 나타샤에게 돌아갔다. 다시 집중하기 위해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가다듬는다. 별일 아니다, 별일 아니지, 나타샤가 결혼을 한다, 그것도 배너가 아닌 다른 사람, 그것도 이 일과 전혀 관련이 없는 일반인이랑. 그것 참 잘 됐네. 이 일에서 복잡한 연애 관계까지 더해지는 것만큼 재앙은 없지. 배너에겐 유감스럽겠지만, 어쨌든 그녀가 행복하다면야…
“제정신이야?”
[당신이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통신기 너머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반인이라니, 이 일의 위험성을 알고 있다면 섣불리 그러지는 않았을 거다. 이미 얼굴이 알려진 영웅, 그것도 전직 스파이, 남들의 표적이 되기 가장 쉬운 위치에 있는 그녀다.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불안정한 자리에 있고, 주거지는 일정하지 않았다. 그만큼 가짜 신분은 넘쳐났고. 그런 그녀가 자신의 상황에 일반인을 끌어들이면서까지 안정됨을 추구해야하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랑 때문이야?”
[아뇨, 외로워서요.]
나도 모르게 혀를 차고 말았다. 예상한 답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를 안다. 이해한다기보다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에 가까웠다. 마음에 구멍이 있는 상실된 사람은 서로를 알아보기 마련이다. 우리가 서로를 역겨워하면서도 가까이 하는 것도, 배너를 같은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다 그러한 것의 연장선이었다. 상실된 만큼 불안정하고 더 불안정한 대상을 동정하기도 하고 애정을 품기도 한다. 스스로를, 그 불안감을 견디기 위해 안정된 무언가를 붙잡아 둔다. 그것이 일이든.
[수배령 때문에 미국을 벗어났을 때, 알다시피 난 와칸다로 입국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라서 여기저기를 헤맸어요. 혼자서요.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지만 시간이 길어지니까 외로워지는 건 어쩔 수 없더라구요. 그러다가 우연히 만난 사람이었는데, 내 정체를 알고도 자기 집에 숨겨 주었죠. 사실 수배령 풀리기 직전 한 달이 전부였지만, 같이 있는 동안 참 좋았거든요. 아, 이젠 방황하지 않아도 돼. 그 생각만으로도 얼마나 안심이 되던지… 그래서 거길 떠나 오면서 이 일만 끝나면 결혼하기로 했어요. 그 사람이랑은 그래도 될 것 같았거든요.]
아니면 사람이든.
[외로워지기 싫어서 사랑보단 안정을 택했어요. 내가 비겁한가요?]
마지막 물음을 하면서 그녀는 목소리의 떨림을 숨기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그게 어쩐지 부모님에게 결혼 허락을 받는 것 같아서, 자신의 선택을 확인 받기 위해 동류의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듯 해서 차마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스스로의 감정과 상황에 직접 부딪히지 않는 건 분명 비겁한 일이다. 당신과 나의 연애가 그랬듯이. 하지만 그만큼 나 역시 외로움을 안다. 혼자있다는 것이 얼마나 우울한 것인지, 사람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지, 그런 감정들이 스스로의 목을 죄며 자학과 자살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걷게 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원하는 답을 해주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 축하해, 나타샤.”
살고 싶어서 했던 선택이 비겁할 수는 없다. 통신기 너머 작게 고마워요, 라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통신을 끊고 조금 긴장이 풀려 무거운 목을 두어번 돌렸다. 여자들은 참 강해요, 그쵸 배너? 아마도 같이 통신을 듣고 있었을 배너에게 묻자 그는 나즈막하게 웃음소리를 들려주었다. 나는 그녀가 행복했음 좋겠어요. 진심 어린 그의 말에 나도 답했다. 나도 그래요. 그녀가 행복했음 좋겠다. 그럼 나도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좋았다. 무엇이든 삶을 이어나가기에 희망만큼 좋은 각성제는 없었다.
살기 위해서는 누구나 선택을 한다. 나타샤가 배너가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을 약속하고, 내가 습관처럼 떠올리던 이별을 말했던 것처럼.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선택의 끝이 삶인지 죽음인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결국은 그것들 모두 스스로의 책임인 것이다.
사람의 뇌를 파헤치는 일은 쉽지 않다. 엑세스부터 거부를 해오는 그를 달래기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안타깝게도 주어진 시간은 이미 30분 밖에 남지 않았다. 대책을 세워야 해. 통신이 걸려온 퓨리가 하는 말에 나는 선택을 해야했다. 남은 시간에라도 어떻게든 하던 일을 계속 해야할지 아니면 당장 터질 폭탄에 집중해야 할지.
“어쩌는게 좋겠어요? 배너.”
[당신이 결정해야하는 일이에요, 토니.]
“가끔 잊거든요. 이 작전 책임자가 나라는 걸 말이에요. 하던 일이 아니니까 영 익숙하질 않네요.”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좋아요, 우선 당장 눈 앞에 일부터 생각하자구요. 천재 박사와의 대담은 조금 미루기로 하죠.”
일단 진행 방향을 살짝 틀었다. 아날로그이기 때문에 폭탄을 터트리기 위해 신호를 보내려면 적어도 10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즉 앞으로 20분 뒤에 메인 서버로부터 통신망을 통해 신호가 갈 거고 그 신호의 목적지를 알면 폭발물의 위치를 알 수 있다. 적어도 그 곳의 시민들만 대피시킨다면 인명피해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신호가 어디로 갈 지 모르는 상황에서 작전 성공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지만 달리 더 나은 방법이 떠오르진 않았다. 프라이데이에게 메인 서버를 중심으로 한 모든 통신망을 감시하게 했고 각지에 퍼져있는 멤버들의 위치를 다운 받았다. 그 동안 나는 마지막 방어벽을 뚫기 위한 작업을 이어나갔고 13분을 남겨 놓은 시점에서 겨우 인터페이스에 접근하는 것에 성공했다.
“일단 들어 갔어요. 내부를 파헤치려면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훔쳐보는 정도는 가능한 것 같아요. 지금 메인 서버가 신호 준비를 하고 있어요. 위성에 접근하려는 것 같은데… 위성 신호가 남미 쪽으로 가는 것 같은데, 남미에 지금 누구누구 있죠?”
[어… 윌슨씨와 카터 요원이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대기 중이고, 캡틴과 반즈 병장이 아타카마 사막 쪽에 있어요.]
“좋아요. 되도록 잭팟이 그 쪽으로 터지길 바래보자구요.”
초침을 본다.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초조해진다. 나도 모르게 다리 한 쪽을 달달달 떨면서 패널을 본다. 애간장을 녹이려는지 움직임이 없던 서버가 갑자기 아까와는 다르게 커다란 소리를 내며 복잡한 연산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프라이데이, 신호 잡았어? 묻자 통신망과 위성을 감시하고 있던 그녀가 신호가 잡히는 곳을 알려준다. 카라마와 아타카마 사이 23번 국도 인근이었다. 나는 즉시 캡틴에게 통신을 걸었다.
“캡, 지금 위치 보내 줄 거야. 국도 근처라 마을은 없지만 지금 차량 세 대가 그 쪽으로 향하고 있어.”
이건 일이다, 이건 일이다, 이건 일이다, 이건 일이다, 이건 일이다, 이건 그저 일일 뿐이다.
[알겠네.]
짧은 대답과 함께 통신이 끊겼다. 이제는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외부와 차단된 좁은 안에 갇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것뿐이었다. 일 분에 한 번씩 시계를 보면서 나는 그게 희소식이든 아니든 누구라도 연락을 취해주길 기다렸다. 배너조차도 말이 없었다. 그리고 시간은 정확하게 10분이 지나, 말한 20시간에서 카운트가 끝나는 시점이 온 것이다. 나는 서둘러 통신을 걸었지만 상대는 받지 않았다. 제발, 제발, 제발- 연결음이 나오는 그 짧은 순간 동안 내 뇌는 할 수 있는 모든 상상력을 총 동원해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고 있었다. 작전이 실패해 민간인 사상자가 나오고, 동료 두 명이 거기에 휘말리고, 모두가 내 실패에 대해서 떠들어대는 그런 장면들이 필름처럼 머릿속에서 빠르게 지나갔다. 때문에 겨우 통신기 너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나도 모르게 신경질을 낼 수 밖에 없었다.
“왜 연락을 안받아??!!”
[….미안, 하네. 현장을 수습하느라 바로 받을 수가 없었어. 국도 일부가 손상되었네. 폭탄을 제거할 순 없었지만 인명 피해는 막을 수 있었어.]
그제야 머리를 들쑤시던 모든 신경증이 날라가고 몸에 힘이 쭉 빠진다. 갑작스런 피로가 밀려와 벽에 등을 기댄 채 크게 숨을 한 번 푹 쉬었다. 열로만 가득 찬 기계 안, 검은 어둠이 들어찬 공간에서 혼자 다섯 시간을 버틴 결과가 나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토니?]
당신이 죽지 않아서 다행이야, 라고 생각하는 내 머리를 총으로 쏴버리고 싶었다.
[… 토니, 토니!!]
“살아 있으니까 그만 소리 질러. 어쨌든 수고했어.”
통신기 너머에는 거친 숨소리만 들려왔다. 한참을 침묵한 채 서로의 숨소리만 듣고 있다. 귀로 타고 들어온 그 소리가 목을 타고 들어와 폐부를 누른다. 숨이 막혔다. 목구멍이 턱 걸리면서 식은땀이 줄줄 나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그럼 이만, 이라는 짧은 인사 끝에 통신을 꺼버렸다. 그리고 소리가 끊기자 마자 허리를 굽히며 무너져 버렸다. 흐어- 으으- 구토감이 올라와 침을 질질 흘리며 손으로 목을 긁어댔다. 숨을 쉬어야 해, 살아야 해, 나는 아직 죽으면 안돼는 이유가 있어. 여기 일도 정리를 해야하고, 은둔하며 살아가던 동료들을 완벽히 자유롭게 세상에 풀어줘야 하고, 나타샤의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도 봐줘야 해서, 그래야 하니까, 나는...
“하, 하하… 하하…”
해야할 일들을 떠올리자 숨구멍이 트인다. 살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기 위해 살아야만 한다, 라는 사실이 날 다시 숨쉬게 했다. 그런 내가 스스로 불쌍하고 초라해 거무튀튀한 어둠 속에서 홀로 자조했다. 불안정함을 감추기 위해서 무언가를 붙잡아야 했다. 그리고 난 사람이 없어서 결국 일을 잡았다. 적어도 그건 나를 배신 하진 않으니까.
Ah Ch'infelice Sempre.
왜 나의 슬픔 외에는 원치 않을까.
페퍼로부터 급한 통신이 들어왔다. 지금 동영상이 올라왔는데 확인해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이번 건 좀 수습하기 어려울 거에요. 그렇게 말하는, 울음기가 가득한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불안했다. 급히 프라이데이를 연결해 패널에 영상을 띄웠다. 폭발 시점에 올라온 영상은 익히 아는 것이었다. 너무 익숙해서 이제는 다 외울 수도 있을 것 같은 장면들이 나타난다. 흑백으로 처리된 화면에는 내가 있었다. 내가 있었고, 그 옆에 당신이 있었고, 좀 멀찍이 총을 들고 서있는 제임스 반즈가 있다. 그 장면과 교차되어 편집된 또 다른 동영상이 잠깐잠깐 나타난다. 그건 아주 오래된 영상, 그 날의 싸움이 있게 했던 그 영상이었다. 내 부모님의 죽음, 그리고 이를 있게 한 남자의 냉혈한 얼굴까지도. 그리고 그 오래된 영상이 끝나는 시점 깨끗하게 편집되지 못한 내 목소리가 나왔다. Did you know?
소리를 죽이고 있던 서버가 다시 크게 우웅- 하고 운다. 마치 비웃는 것 처럼. 패널의 화면이 바뀌면서 서버의 인터페이스가 뜬다. 검은색 시스템 화면 위 깜빡이는 커서가 곧 글씨를 만들어 냈다. 완성된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가장 고결한 상대를 저열하게 만들고 스스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가 된 기분이 어때?]
죽고 싶었다.
당신의 거짓을 알게 된 순간, 지금 당장 지구가 터져버렸으면 좋다고 생각했다.
딱 그만큼, 슬펐다.
그리고 우습게도 소원을 이루어주는 천사라도 나타난 냥 2년 뒤 세상은 폭탄으로 뒤덮여 버렸다. 그저 상황이 만들어 낸 우연일 뿐이었지만 내가 책임을 자처한 건 그 생각이 불러온 죄책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결연한 마음으로 이 책임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거기엔 분명 원망이 따라왔다. 당신이 내게 그런 짓만 하지 않았다면, 내게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면, 내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고 이런 상황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몰라, 라는 논리 없는 책임의 전가. 그래서 당신이 더 미웠다. 역겨울 정도로 싫었다.
그럼에도 폭탄이 터진 그 순간, 당신이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지금껏 그렇게 이를 갈면서 증오를 불태웠음에도, 당신이 죽길 원한 적은 없었다. 나는 그랬다. 설령 당신 스스로가 얼마나 죄책감에 썩어 들어가든, 내가 버틴 만큼, 딱 그만큼은 당신도 살아 주어야 했다. 당신을 미워해야, 그 감정이라도 있어야 내가 당신을 생각하고, 그 생각을 멈추려 악착 같이 일을 하고, 그 일이 나를 지금 살리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고결하고 완고한, 내가 미워해야만 하는 대상 그 자체로 변하지 않고 살아 주기를 바랬다. 그것이 내 지난 2년간 미친듯이 일에 나를 내몰아가면서 스스로에게 내린 정당성이었다.
숨 쉬고 싶어 헤어지자고 했음에도 살기 위해서 당신을 늘 내 생각의 곁에 매어두었다. 결국 내가 붙잡았던 건 일이 아닌 당신이었던 거다. 괴롭고 힘들더라도 당신을 완벽하게 잊어버린다는 선택지가 있었음에도 나는 식은 식사 앞에서 다섯 시간을 기다렸던 그 때처럼 여전히 미련하기만 했다. 지울 수 없어서 증오하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 영상을 완전히 소거하지 못하고 깊숙히 덮어둔 채 당신을 미워하기 위한 수단으로 남겨두었다. 그리고 그런 내 선택이 나를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동정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모두 나 자신으로 인해.
비겁한 건 나였다. 그 사실이 끔찍해져 지금 딱 죽었으면 좋겠다, 고 나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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