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크, 제발..."


간절하고 애달프게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토니는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결정된 일을 번복할 수는 없어 그는 그저 마른 입술을 씹을 뿐이었다.


"안돼, 버키."


고개를 저으며 거절의 의사를 완고하게 표현한 토니는 거울 너머 일렁이는 버키의 눈을 보았다.


"이젠 내가 한계야."


더이상 보고만 있는거... 이젠 참을 수가 없어. 그렇게 하는 말에 버키는 체념을 한 듯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차마 이 상황을 다 받아들이긴 어려운지 눈을 감아버린채 고개를 끄덕여 토니의 강압적인 의사를 수긍했다. 더는 반항이 없음을 확인한 토니는 제 옆에서 대기하고 있는 여자를 향해 눈짓을 했다. 답지 않게 초조해 하는 토니를 등지며 그녀는 손에 쥔 은빛 흉기를 들어올리고 분위기와 맞지 않게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커팅 시작하겠습니다~"


갈색 머리카락이 그녀의 손에 사정없이 잘려 나갔다. 약 30분 후 지저분한 단발머리는 포마드로 올린 깔끔한 머리로 바뀌어 있었고 버키는 윈터솔져가 아닌 브루클린 멋쟁이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를 모두 지켜보던 토니는 감동의 눈물을 훔치며 기립박수를 쳤다. 그리고 이 모든 작업을 마친 그녀에게 팁을 두둑히 얹어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굳잡 선생님. 브라보, 액설런트, 퐌타르틱!!






그러니까 버키는 이게 정말 불공정한 거래라고 다시금 생각했다. 때는 어제, 그러니까 버키가 스스로 얼려지길 자청한지 만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때에 일어난 일이다.


"협정이 무산 되었네."


제법 허탈한 얼굴을 한채 와칸다의 국왕은 깨어난 버키에게 그렇게 말했다. 눈뜨자 처음 보는 게 시꺼먼 남자(절대로 흑인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었다.)라는 것이 불쾌했지만 그 의사 표현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얻어 맞을 때 꽤 아팠던 것을 상기하며) 버키는 관심조차 없는 협정(애초에 자신과 전혀 상관 없는 일이었기에.)에 대해 유심하게 듣는 척을 했다. 심지어 그가 눈뜬 곳이 와칸다가 아닌 비행기 안이었는데 억지로 깨운 것도 모자라 잠든 자신을 출국수속까지 마쳐 고이 퍼스트 클래스에 태운 것에 대해서도 무어라 말하지 못했다.

타찰라는 이게 다 금수저의 횡포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했다.(그렇게 말하는 자신은 다이아 수저라는 사실을 잊은 듯 했다.) 그러니까 그 날 그렇게 시베리아에서 격렬하게 싸운 토니 스타크는 기본적으로 박애주의자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지만(어디까지나 토니 스타크의 관점에서.) 그렇게 얻어 맞은 것도 모자라 답답하기 짝이 없는 스티브의 편지를 받았을 때, 그는 '모든 잘못을 수용해주는 관대한 나'라는 코스프레를 즉각 떼려치웠다고 한다. 그는 놀라운 정보력으로(미국 정부는 물론이요 FBI 자료를 단 3분만에 탈탈 털어낼 정도의.) 전 세계에 숨어있는 하이드라 일당의 명단을 찾아내 한 편의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유투브에 뿌려버렸다. 거기엔 하이드라의 만행을 모르는 일반인을 위한 친절한 설명까지 붙여 놓았으며 관련자료영상 중에는 캡틴 아메리카가 채권팔이를 하던 시절의 영상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건 분명한 고의였다.(물론 인터넷 까막눈인 스티브는 이 사실을 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 밤마다 이불을 차며 일어나 프라이데이를 귀찮게 만들었다.)

어쨌든 그 명단엔 꽤 많은 수의 정치인들과 정부관료들, 그리고 각 기관의 고위직들이 있었는데 덕분에 전 세계 언론은 들썩거렸다. 당연하게 이 모든 상황을 야기시킨 토니에게로 사람들은 시선을 돌렸고, 쓰리피스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톰포드와 비비안 웨스트우드를 절묘하게 매치시킨 코디로 이 때의 사진은 보x, 엘x, 코스모xx탄 등의 패션지에 실리게 된다.) 토니는 기자 회견장에서 아주 당당하게 외쳤다. 이렇게 스파이로 가득한 정부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냐며 협정 무효화를 주장하였고 이런 식이면 자신은 아이언맨을 그만 두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기어이 그 자리에서 모든 수트들을 폭파시켰다.(세상에서 가장 비싼 불꽃놀이로 기록된 이 광경을 지켜보며 토니는 언제 챙겨왔는지 3D안경을 낀채 팝콘을 씹어먹고 있었으며 페퍼는 눈물의 기립박수를 쳤다.)

벌집을 들쑤시면 응당 벌이 침을 세우기 마련이었다. 당연히 각기 숨어있던 하이드라는 발악을 하기 시작했고, 첨단 무기를 갖춘 그들에게 각 정부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미정부는 군대에 귀속된 워머신을 불렀지만 로드는 하반신 마비로 수트를 입을 수 없었다. (그렇게 말하는 로드는 토니가 만들어준 보조기를 찬 채 힘찬 조깅을 하고 있었다.) 어벤져스는 수배령과 협정으로 묶여 있었기에 최후의 수단으로 그들은 토니에게 매달렸지만 그는 매정하게 이를 거절했다. 남아있는 수트가 없으며(내게 남은 수트는 이것들 뿐이다, 라고 하며 그는 드레스룸을 공개했다.) 자신은 평범한 민간인이고(그렇게 주장한 그는 식빵에 캐비어를 발라 먹었다.) 철저하게 기업인의 입장으로서 정 그렇다면 수트를 다시 만들 비용을 지불하라고 큰소리를 쳤다. (청구서에 찍힌 금액은 나라 하나를 살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었다. 이걸 받은 로스 장관은 뒷목을 잡고 쓰러졌다.) 결국 각 정부는 울며 겨자먹기로 어벤져스의 수배령을 철회하고 협정을 파기했다. 덕분에 와칸다에 숨어있던 어벤져스는 다시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고(정확히 말하면 스티브를 포함한 모두가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발에 땀띠 나도록 뛰어다녀야 했고 그시각 토니는 발리 최고급 리조트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을 만든 로스 장관은 해임 되었다.(그 발표가 있은 직후 그는 토니로부터 온 전화를 받았고 수화기 너머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를 약 30초간 듣고 있어야 했다.)

어쨌든 불과 한 달 안에 일어난 이 모든 사건으로 어벤져스를 포함한 세상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한 가지 교훈이 생겼다. 작은 토니를 건들면 X되는 거에요. 아주 X되는 거야.


"아, 자네 혐의도 풀렸어."
"아... 어떻게..."
"스타크가 법정에서 진술을 했거든."


협정의 무효화, 수배령의 철회, 그 다음은 반즈 병장에 대한 처리였을 것이다. 이것을 만들어낸 것 역시 토니 스타크의 몫이었다. 제모가 조작한 자료들을 근거로 들어 버키가 철저하게 이용당한거라고 그는 주장했으며 더불어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버키의 인생사와(동화책을 읽는 것처럼 과장된 연기 톤으로 토니는 이를 풀어냈는데 이는 꽤 드라마틱한 연출이었으며 이야기를 마칠 때 쯤 판사는 오열했다.) 이로인한 정신적 타격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수많은 증상들에 대해서 나열했다. 불안장애, 인식장애, 충동통재장애, 반사회성성격장애 등등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토니 스타크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버키 반즈는 뇌가 언 탓에 판단능력을 상실한 저능아이고 처음 보는 사람한테 총을 갈길 정도로 사회성이라고는 눈씻고 찾아볼 수 없는 찌질이라 능동적으로 범죄를 저지를 수 있을 만한 위인이 못된다.' 라고 하더군."
"....."
"어쨌든 자넨 무죄야."
"아 예.."


어쩐지 엄청난 욕을 얻어 먹은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절대 기분탓은 아니라는 걸 알지만) 버키는 빠르게 이 상황을 수긍했다. 하지만 그렇게 판결이 났다고 해도 자신이 저지른 모든 일이 정당화 될 수는 없었다. 비행기는 뉴욕으로 향하고 있었으며 곧 토니를 만나게 될거라는 타찰라의 말에 버키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사과를 하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버키의 시도는 보기 좋게 실패했다. 그 실패의 원인을 따지자면 첫 째로 그들이 도착했을 때 때마침 어벤져스들은 회의를 하고 있었으며, 둘 째로 토니와 스티브는 박터지게 싸우고 있었고, 셋 째로 '친절한 토니씨' 코스프레를 관둔(그러니까 어디까지나 토니 스타크의 입장에서) 토니는 어느 때보다 신경질적이었고 사르카즘으로 가득 차있었다. 회의실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두 사람 사이에 낄 엄두 조차 나지 않아 버키는 조용히 어벤져스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나타샤가 그의 옆구리를 치며 어디에 걸거냐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토니가 이긴다에 이미 100불을 걸어 놓았다.) 그리고 그들이 싸우는 이유가 버키 자신이라는 것을 안 순간부터는 더더욱 입 닥치고 찌그러져 있어야 했다. 토니는 버키의 팔에 대해 익스트리미스를 사용하면 된다고 주장했고 스티브는 그게 위험하다고 반대를 했다.


"대가리가 아직 안 녹으셨나봐요, 조상님! 왜 이게 이해가 안돼?? 영어 몰라?? 멀쩡한 팔을 만들어 주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버키를 실험실 생쥐처럼 이용할 생각은 말게!! 아직 완벽하지 않은 걸 어떻게 버키에게 행할 수가 있겠나!!"
"이 천재를 뭘로 보고 하는 소리야?? 오류야 잡으면 되는 거지!! 아니 이 수식을 보고도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오지?? 눈에 딱 보이잖아!! 젠장 브루스, 이 눈 먼 노인내한테 설명좀 해줘!!! 고구마 500개 쳐먹은 것처럼 답답해 돌아가시겠으니까!!"
"전 싸움에서 빼주세요, 토니."
"어쨌든 날 이해시키기 전까지는 절대 안되네!!!!"
"과학에 과 자도 모르는 인간을 어떻게 이해시켜??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이 똥고집 할배야!!!!"
"어... 저기..."
"넌 닥쳐!!!"
"그래 벜, 가만히 있어!!!"


나 몇 마디 안 한 것 같은데, 그래도 내 팔인데 내 의사는 들어주지 그래, 그것보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인사라도...하려던 말은 결국 응, 그래, 닥치고 있을게, 이렇게 축약되었다. 뭐라 한 마디 하려다가 맹렬한 거부반응을 본 버키는 쭈구리가 되어 시무룩해졌다. (안쓰러웠는지 샘이 그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지만 입은 히죽 웃고 있었으므로 별 효과는 없었다.) 하지만 버키와는 달리 그들의 싸움을 중단 시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피터였다. 핸드폰으로 연신 게임을 하던(그는 이미 토니의 편이었으므로 중간 과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손을 번쩍 들었고 아낌없이 비난을 쏟아내던(내 아버지가 만든 혈청 내놔라 이새끼야!! 라는 말도 안되는 어그로를 시전하였다.) 토니는 막 말을 하려는 스티브의 입을 막으며(팔을 걷은 걸로 봐서 어디 내 피에서 빼갈 수 있으면 빼가라고 할 작정이었던 것 같다.) 발언권을 허용해 주었다.


"저 숙제하러 가야하는데 가봐도 될까요??"
"너 자꾸 깨는 소리 할래? 그리고 내가 숙제 다 하기 전까진 오지 말라고 했지."
"아차! 깜빡 했어요~ 저같이 어린 십대들은 생각해야 할게 많아서 그러니까 이해해 주세용."
"생각은 무슨. 야한 생각? 니 담임한테 다 들었어. 요즘 만난다는 애 이름이 그웬이었나?"
"악!!! 악!!!! 악!!!! 저 가요!!!! 갈 거야!!!!!!"
"하긴 넌 여자라도 있지 이건 동정에다가 애인도 없고 그러니까 나한테 맨날 말도 안되는 싸움만 걸고..."
".... 그 동정이 나 말하는 건가?"
"어머, 눈치는 있네?"
"...야이, ㅆ..."
"랭귀지! 말 이쁘게 해야지, 로저스! 애 들을라!"


비전의 귀를 막는 시늉을 하며(정확히 하자면 비전은 귀가 달려있지 않음으로 귀가 있을법한 위치를 덮었다.) 토니가 밉살맞게 굴었고 스티브는 분노로 부들부들 떨었다. 깔깔거리며 웃은 토니는(내기는 나타샤의 승리였다.) 반대를 하니 버키에게 익스트리미스는 사용하진 않겠지만 어쨌든 팔 수리에는 힘을 내겠다고 했다. (애초에 익스트리미스를 사용할 생각이 없었다. 그냥 싸울 구실이 필요했고, 그는 성공적으로 스티브의 복장을 뒤집어 놓았다.) 회의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고(오로지 스티브의 상처난 자존심만이 남았다.) 버키는 나가려는 토니를 냉큼 붙잡았다. 스티브 만큼이나 버키를 싫어하는(그래도 굳이 순위를 매기자면 스티브가 조금 우위에 있었다. 토니는 그가 보낸 편지와 아날로그 폰을 도전장으로 받아들였고 여전히 그가 괘씸했다.) 토니는 자연스럽게 인상을 찡그린채 그를 올려다 보았다.


"뭐야?"
"아, 그... 고마워. 미안하고..."
"사과 받으려고 하는 거 아닌데."
"그치만..."
"그리고 이거 공짜 아냐."
"....어?"
"나 박애주의자 안한다니까.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 아 물론 돈을 받는 건 아냐. 아무리 나라도 벼룩에 간을 빼먹을 정도로 치사하진 않아."
"그럼 뭘... 뭐든 시켜줘."
"너 오늘부로 내 개야."
"응. 나 열심히 할게. 정말 개처럼 일할게."
"아니 너 이제 개 하라고."
".....??????"


토니의 폭탄 선언에 버키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고 모두들 할 말을 잊은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물론 스티브는 뭐라 말하려 했지만 나타샤가 벌어지는 입 사이로 주먹을 넣는 바람에 실패했다.) 버키는 지금 들은 말을 되새김질 하며 그 의도를 알아차리기 위해 노력했다. 개? Dog? 멍멍짓고 네 발로 걷고 혀 내밀고 침 질질 흘리는 개 말하는 건가? 아니다 그럴리 없었다. 아무리 토니가 괴짜라고 해도 그런 일은...


"넌 오늘부로 내 펫이야, 반즈."


아... 망했다. 망연한 버키의 얼굴을 보고 토니는 상큼하게 웃었다. 나 정말 개가 키우고 싶었거든. 굳이 붙일 필요 없는 같잖은 이유를 대며 웃는 그를 향해 버키는 말을 잇지 못했다.(그리고 눈 앞에서 알짱거리면서 왜? 감동받았어? 라고 묻는 토니의 말에 주먹을 내지르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나타샤가 허리를 꺾으며 깔깔거리는 웃음을 터뜨렸고(그녀는 아직도 버키에게 흉터를 얻은 앙금이 남아 있었다. 그 와중에 마귀할멈 같다고 클린트가 빈정거리다가 정강이 킥을 얻어 맞았다.) 그렇게 버키는 토니의 애완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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