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Crimes

( Bucky Barnes X Tony Stark X Steve Rogers )



 













- 어느 비 오는 날의 토니 스타크. 




Leave me out with the waste. 

날 쓰레기와 함께 버려줘. 



비가 오고 있었다. 완연한 여름, 그 싱그러움을 느끼기도 전에 장마가 찾아왔다. 며칠째 비는 그치지 않았고 어디 지역은 홍수가 일어났다는 소식이 뉴스를 통해 들려왔다. 올해는 비가 얼마나 오려나, 그런 의미 없는 생각들을 하다가 그래 차라리 비라도 와라, 그러고 나면 내 마음이 좀 말끔히 씻길까 싶어 창가에 앉아 비 오는 풍경을 그냥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어둡게 낀 회색 하늘과 그것만큼 우중충해 보이는 도시의 전경은 내 지난날들처럼 그저 우울하기 그지없었다. 쏴아- 하고 시원하게 떨어지는 물 소리를 들으며 나는 창에 비치는 내 얼굴이 빗물에 섞여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생각보다 나는 멀쩡해 보였다. 멀쩡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는데, 그랬다. 손안에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한 줌에 잡히는 그 작은 기계가 처음에는 그렇게 무거웠는데 이제는 가볍기 그지없었다. 


그 짧은 문장 하나 쓰는데 내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아마 그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나는 언제나 기계에 능했고, 모든 것에 익숙하지 않은 그를 가르치는 입장에 있었으니.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기계의 조작 때문만은 아니었다. 평소처럼 가벼운 말로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할 순 없었다. 하고 싶었던 말이 수백 가지였고, 그중 올바른 단어와 적절한 문장을 찾다가 결국 남은 것이 그 한 줄이었다. 하지만 나는 전송을 누르지 못하고 내동 망설였다. 이것만 보내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간절히 원하면서도 주저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억울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허무했다. 이 모든 것들이 그냥 말 한 마디면 끝나버린다는 것이. 


그래, 우리 관계는 끝났다. 나는 그 사실을 인정했다. 이미 너덜너덜 어느 한구석 멀쩡한 곳이 없는 그런 관계였다. 난 항상 상처받아왔다. 창밖에 내리는 저 빗방울만큼 눈물을 쏟아냈고, 그는 그걸 알면서도 어쩌지 못 했다. 나에게는 그가 최선이었고 그에게도 내가 최선이길 바랐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항상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상처가 아물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이리 찢기고 저리 찢기다 보니 이렇게 왔다. '쓰레기' 딱 그 짝이었다. 아무렇게나 버려진 고철 같은 느낌. 


그래, 그러니까 이건 내가 끝을 내야 하는 거겠지. 오기와 집착으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아파도 참아내며 억지로 이어가던 이 끈을 끊어내야 했다. 그날, 내가 완벽하게 그에게 버려진 그 순간, 나는 오늘이 오기까지 천천히 그를 지웠다. 그와 내가 나눴던 수많은 대화들과 쌓아왔던 추억들, 소중하게 간직하던 감정들까지. 그리고 마지막 한 장까지도 비워내자 내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그와 나를 엮어주던 '연인'이라는 호칭만이 그 자리에 가느다란 흔적을 만들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흔적마저 지워내려 한다. 어설프게 시작했던 관계라 해도 마지막은 확실한 매듭이 필요했다. 그래야만 했다. 


뒤에서 손목이 잡혔다. 목덜미와 어깨로 떨어지는 물방울에 방 안에 비라도 오는 줄 알았다. 축축한 머리카락이 내려앉고 나서야 나는 그게 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버키, 머리는 말려야지." 

"네가 말려줘." 



비 같은 사람. 이른 장마처럼 소리 없이 갑자기 찾아와 나를 흠뻑 적셔 놓은 남자. 이제는 내가, 나를, 나의... 


유독 말이 없다. 우리 둘이 있으면 별로 오가는 대화가 없었다. 버키는 필요한 말만 간단하게 나에게 말했고, 나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챙겨주는 그의 손길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사실 나는 조금 지쳐있기도 했다. 말로 시작해서 말로 끝나버리는 관계는 발전이 없다는 걸 이미 겪은 상태라 더 그랬다. 과거의 그와는 너무 많은 말들을 쏟아냈고, 일방적인 대화 속에서 갈라지는 의견, 그로 인한 싸움은 항상 일어나곤 했다. 그러고 나면 결국 한 쪽이 체념하게 되고 결국 대화는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겪어왔기 때문에 더는 입을 열고 싶지 않아져 버리고 만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우리가 별로 대화가 없음에도, 내가 직접적으로 말해주지 않아도, 독심술을 하는 것처럼 곧장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옆에 있어서. 


그래서 아마 그랬나 보다. 버키는 내 손을 보았고 내 손에 쥐어진 핸드폰과 그 액정에 올라와 있는 글자들의 나열을 보았다. 그 핸드폰에 담겨 있을 번호는 하나밖에 없어서, 나는 혹여나 기분이 상해하진 않을까 퍽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목덜미에 올라오는 입맞춤을 받는 순간, 그것이 내 괜한 기우일뿐이라는 걸 알게 되어 마음이 놓였다. 허리에 감긴 손이 내 손 위, 핸드폰을 쥔 손가락, 망설이듯 올라와 있는 손가락에 올라왔다. 나는 고개를 돌렸고 버키는 내 눈을 보았다. 흔들림 없는 시선 속에 그 파란색 눈이 담고 있는 저의를 안다. 해야만 한다는 강요가 아니었다. 괜찮아, 라고 나를 위로하는, 이제 자신이 있으니 안심하라는 든든함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마음을 놓았다. 


눈을 감고 다가오는 그의 입술을 받아들이며 손에 힘을 뺐다. 핸드폰은 여전히 내 손안에 있었고, 내 손을 겹쳐 잡은 버키의 손이 망설임 없이 버튼을 누른다. 오래된 핸드폰에서 메시지가 전송되었다는 짤막한 문구가 떠올랐고 그제야 나는 망설임 없이 핸드폰을 놓을 수 있었다. 추락한다. 그리고 버려진다. 핸드폰이, 그리고... 






비가 그쳤지만 하늘은 여전히 우중충했다. 아침부터 격렬한 정사와 늘어지는 낮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버키는 여전히 한 손으로 나를 끌어안은 채 세상모르고 잠이 들어 있었다. 얼굴의 반을 덮고 있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치우자 잘생긴 면상이 드러났다. 자고 있는 얼굴이 어느 때보다 평안해 보여서 나는 조금 안심했다. 처음 왔을 때, 마르고 피폐했던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변화였다. 머리카락이 많이 길었다. 조만간 다듬어야겠다, 하다가 허전한 옷장을 생각하면 쇼핑도 해야 할 것 같고, 생각하다 보니 해야 할 게 참 많다, 우리. 그것보다 팔을 먼저 다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와카다에서 얼려졌다, 시베리아에서 돌아와 들은 그의 소식은 그게 다였다. 그렇구나, 하고 말았다. 부모님에 대한 복수심이나 분노 그런 것들은 이미 꺼진지 오래다. 그것이 불가항력이었다는 걸 이해했기에, 그리고 그때의 말처럼 이것의 잘잘못을 따져봐야 돌아가신 부모님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그래서 그를 용서했다. 사실 용서라는 말은 무의미했다. 사실 내가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내 믿음을 배반하고서도 여전히 입을 꾸욱 다물고 있는, 시베리아 얼음장보다 차가웠던, 그런 연인. 


하지만 용서와는 별개로 나는 버키를 싫어했다. 내게서 자꾸 내 사랑하는 이를 데려가는 그가 싫었다. 게다가 이 싸움은 내게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겉보기에 나는 모든 걸 다 가진 사람이었고,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서, 그런 그를 질타했을 때, 그려먼 내가 정말 관용 없는 사람처럼 보이니까 결국 내가 나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없는 사람에게 있는 하나뿐인 친구를 빼앗아가는 못된 토니 스타크. 결국 그 친구도 나에겐 하나 밖에 없는 연인이었는데도. 그래서 나는 나를 나쁘게 만드는 그가 싫었다. 싫었어야만 했다. 



"보지 마." 



버키는 기척에 민감했다. 특히 나에 대한건 눈을 감고도 알아맞힌다. 가끔은 그의 머릿속 어딘가에 센서가 달려 있는 것 같다는 의심이 들곤 했다. 



"팔, 불편하지? 빨리 완성해야 하는데... 

"너 안기엔 충분해." 



눈도 뜨지 않고 웅얼거리면서 그는 보란 듯이 한 팔로 나를 더 꽈악 안았다. 사실 그의 왼 팔이 지지부진하게 늦어지는 이유 중 팔 할이 그 때문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런 느긋한 반응이 아주 예상되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언젠가 그와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롯이 혼자 찾아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 했다. 그날도 비가 오고 있었다. 가뭄을 논하며 떠들어 대던 언론의 걱정 어린 소리를 잠재우는 꿈같은 비를 타고 그가 왔다. 얼굴을 적신 것이 비인지 눈물인지 좀처럼 구분되지 않는 처참한 모습으로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나를 기다린답시고 타워 입구 앞을 지키고 앉아 리셉션 경비원을 반쯤 질리게 만들었다. 내가 그를 데리고 내 플로어로 올라오기 무섭게 전화벨이 울렸다. 단조로운 단음이 침묵을 뒤흔들며 무섭게 나를 재촉하고 있었다. 그 핸드폰에 담긴 단 하나의 번호가 액정에 띄워졌고, 소리를 끊어낸 것은 내가 아닌 그였다. 굳어있는 나를 대신해 그는 망설임 없이 핸드폰의 종료 버튼을 누르고 배터리를 분리시켰다. 그러고 나자 오롯이 둘만이 침묵 속에 있을 수 있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나는 꽤 많은 시나리오를 머릿속에 떠올렸던 것 같다. 미안하다고 용서해 달라고 할까, 아니면 팔을 고쳐달라고 할까, 그것도 아니면... 이런 내 예상들을 깨트리고 그는 엉뚱한 말을 했다. 잠은 자는 거야? 하고. 그제야 나는 내 몰골이 지금 마주하고 있는 그만큼이나 처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면의 창가에 보이는 얼굴은 피곤에 절어서 한 10년은 더 늙어 보이는 것 같았다. 악몽과 악습의 반복으로 하루에 한 시간의 수면조차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건 사실이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나를 끌고 침실로 갔다. 나를 눕혀 놓고 제멋대로 내 욕실을 이용한 그는 깨끗하게 씻은 몸을 내 옆에 누인 채 잠을 잤다. 그 뻔뻔하기 짝이 없는 행동에 어이가 없어서 무어라 말을 쏟아내려고 했는데 천천히 편하게 뛰는 심장소리와 숨소리가 너무 단조로워서 입을 열기도 전에 나 역시도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매일 밤 나를 찾아오는 검은 악몽조차 꾸지 않았다. 몇 달만의 단잠이었다. 


내리 하루를 꼬박 자고, 프라이데이를 통해 들어온 페퍼의 부재중 연락이 열 개를 넘어갈 때쯤 나는 눈을 떴다. 그리고 나를 보고 있는 버키를 마주했다. 취한 잠에 아직 깨지 못해 말을 하지 못하는 나를 보며 그는 조근조근 오래된 옛이야기를 해주는 것처럼 지금껏 있었던 일들에 대해 말해주었다. 아마도 내가 기억하는 한 그가 가장 많은 말들을 쏟아냈던 날이었을 것이다. 자꾸만 잠이 오는 바람에 중간중간 졸아서 사실 그의 말을 다 기억할 수는 없었다. 그냥 마지막 결론은 그것뿐이었다. 잠에서 깨자 내가 생각났고 그래서 왔다고. 비어있는 팔을 이어붙일 생각조차 하지 않고서는 그렇게 이곳으로 달려왔다 말했다. 그리고 나서도 그는 미안하단 말은 하지 않았다. 감히 사과의 말로 모든 것을 덮어 둘 수 없었으니, 내가 내리는 판결에 따르겠다고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난 그를 도와주는 것이 내가 어른스럽게 대처하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에게 그는 여전히 껄끄러운 상대였다. 나는 판결을 미룬 채 그의 팔을 고치겠다는 명목으로 연구실에 박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간혹 성가신 로스 장군이나 정부의 부름 따위가 있을 때만 밖으로 나왔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것을 외면하고자 했던 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수트를 입지 않으면 민간인에 불과한 나보다 몇 배의 완력을 가진 그는 내 저항에는 아랑곳 없이 밤만 되면 나를 연구실에서 끄집어내 억지로 침대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내가 무어라 하든 말든 나를 끌어안은 채 잠이 들어 버렸다. 그게 진짜 잠이 든 건지 아니면 무시를 하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결국 어느 순간부터는 제풀에 지쳐 나도 그냥 그렇게 잠이 들어 버렸다. 그렇게 그의 왼 팔을 만드는 일은 시간의 제약을 받으며 늦어졌다. 하지만 그는 불편한 기색조차 없었다. 오히려 내가 제 옆자리에 없는 것을 더 견디지 못 했다. 



"오늘은 잠만 잘 거야? 

"비오잖아." 

"버키." 

"어." 

"제임스, 자기야." 

"배고프지, 너. 뭐 시킬래?" 

"응, 타이 음식 먹자." 



여상한 일상을 보낸다는 게 이제는 너무 자연스러워졌다. 대부분은 그가 요리를 했고, 이렇게 늘어지게 다 귀찮은 날이면 음식을 시키기도 하고, 기분 좋은 날이면 같이 외식을 하기도 한다. 나는 딱 한 번 요리를 했다. 퐁듀였다. 치즈를 녹이고 빵만 자르면 되는 음식이라 아무리 재능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유일한 요리였다. 그걸 보며 버키는 웃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페기 이모에게 그 요리를 먹자고 했을 때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치즈에 빵을 찍어 먹었다. 그에게서 처음으로 듣는 아버지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그리고 생각보다 쉽게 나는 그의 말에 맞장구치며 웃을 수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이름을 이야기하면서 조금은 어색해하다가도 내 웃음을 보며 마음에 어려 있던 죄책감을 덜어냈다. 


그렇게 가까워지고 어느 순간, 그래 그 순간을 딱 꼬집어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는 그의 품에 안겨있게 되었다. 너 나한테 아직 판결 안 내렸어. 내 몸을 가르고 들어와 있는 상태에서 뜬금없이 그가 그렇게 말했을 때, 쾌감으로 정신이 나가버린 상태에서도 나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그리고 기억을 한참 더듬어 처음 그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 나서야 나는 말했다. 움직여, 빨리, 나를 체워줘. 그다음은 기억이 드문드문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버키는 나를 '여보'라고 불렀다. 나는 그가 그러게 내버려 두었다. 사실, 설레고 좋았다. 지난 일 같은 거 다 잊어버릴 정도로. 


그래서 사실 그보다 더 좋을 일이 있을까, 싶었다. 지금껏 내 인생이 온통 먹구름뿐이라 이만큼 좋은 것도 더 그러면 안 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있더라, 그런 날이. 오늘 이렇게 시원하게 비가 왔고, 나는 찌꺼기처럼 남아있던 지난 연인을 정리하고, 별일 없는 어느 하루들처럼 식탁에 앉아 시킨 타이 음식을 먹으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오늘이 그날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 했다. 



"합법이라며." 



눈앞에 놓인 작은 상자, 그 안에 놓여 있는 작은 보석이 박힌 심플한 반지를 내보이며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제 오른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똑같은 반지를 보인다. 누들 안에 들어있는 새우를 골라 먹고 젓가락을 내려놓은 그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 손 위에 내 손을 올렸다. 그는 자신의 손 위에 올라와 있는 내 손과 반지를 번갈아 보더니 아차, 하고 탄식했다. 반지를 끼워주려 보니까 왼 팔이 없는 거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거봐, 불편하지?" 

"모냥 빠지네." 

"됐어, 내가 끼지 뭐. 시청엔 비 그치면 가자. 아니지, 그전에 자기 사망 신고부터 취소해야 되잖아. 

"그냥 신분 새로 만들면 안 돼? 여기저기 불려 다니는 것도 싫고, 너 90살 넘은 할아버지랑 결혼한다고 신문에 날 텐데... 여보, 나 후추 좀." 

"신분이 무슨 뚝딱하면 만들어지는 줄 아나. 내가 알아서 할게. 간 너무 치지 마. 짜게 먹는다고 뭐라 할 땐 언제고..." 

"식성은 닮는다잖아. 그리고 여기 너무 싱거워. 우리 지난번에 시켜 먹었던 데 어디지? 거기가 나아." 

"응, 맞아. 거기 치킨 수프 맛있었어. 담엔 거기서 시켜 먹자. 아니다, 나가는 김에 먹고 오지 뭐." 



대화는 다시 돌아온다. 아무렇지 않은 프로포즈와 별것 아닌 것 같은 일상이. 그러다가 문득 갑자기 기쁜 게 주체가 안돼서 입안에 있던 음식을 삼키자마자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나 프로포즈 받았다!!! 으아!! 이게 무슨 일이야?!! 하고 크게 떠들자 그는 놀라서 먹던 음식을 뱉을 뻔했다. 그러면서도 낄낄거리며 웃고 귀가 빨개져서는 결국 나를 한 손에 들쳐 안고 거실을 한 바퀴 돌았다. 그 작은 소란에 프라이데이가 축하 말을 전했다. 축하드려요, 보스. 그렇게 일생에 가장 기쁠법한 날도 단조로운 하루를 보냈다. 남은 음식을 해치우고 하루 영화나 보면서 빈둥거리다가 일찌감치 잠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까지도 우리는 같은 반지를 낀 손을 깍지 낀 채 놓지 않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아침, 비는 그쳐있었고 침실 바닥에 떨어졌던 핸드폰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것을 누가 처리했을지 알고 있었지만 나는 아무 말하지 않았다.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고, 뉴스에서는 장마가 끝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 어느 안개 낀 날의 스티브 로저스. 




Give my gun away when it's loaded. Is that alright? 

장전되어 있을 때 내 총을 가져가. 그걸로 괜찮은 거지? 

If you don't shoot it how am I supposed to hold it. 

네가 쏘지 않을 거라면, 내가 어떻게 그걸 가지고 있겠니. 



얼어붙어 버린 너의 마음 따위 모른다.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것이 아니었으니. 


아프리카의 정글은 매일 아침 안개가 꼈다. 축축하고 눅눅한 환경보다 더 적응하기 어려웠던 것은 안개가 불러오는 우울함이었다.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풍경들을 보며 나는 내 인생을 되짚었다. 사실 이곳에 숨어있으면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별스럽지 않게 생각했던 것들을 떠올리곤 했다. 그 오랜 세월을 지나왔지만 잠들어있던 시간을 제외하면 지극하게 짧은 시간 동안 나에게 소중했던 것들, 또는 내가 지나왔던 것들, 그리고 나를 잠식하게 만든 것에 대해서. 


모든 것이 빠르게만 느껴지는 현대에서 유일하게 나를 기다려주던 사람이 있었다. 누구보다도 빠른 사람이 나를 위해 걸음을 멈춰 느린 나의 걸음을 맞춰주었다. 이건 이렇게 하는 거야, 저렇게 하는 거야, 하면서 친근한 목소리로 나를 가르쳐 주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맘이 갔다. 그러고서도 나는 여전히 느렸고, 그는 내가 순수한 애정을 인정할 때까지 또 기다려 주었다. 수줍은 고백과 첫 키스, 처음으로 누군가를 안았다는 그 황홀감까지 그 모든 것을 천천히 같이 해주었다. 나는 느린 만큼 서툴렀다. 연애도, 사랑도. 그런데도 그는 나를 탓하지 않았다. 내가 맞추면 되지. 그는 늘상 그렇게만 말했다. 


그래서 그랬다. 때로는 내 솔직한 말들이 그에게 상처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외면했던 것은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괜찮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괜찮다고 해서 정말 괜찮은 사람은 없었다. 나도 알았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왜 그렇게 솔직하지 못했을까. 생각해보면 내가 또 느려서 그랬다. 당장 눈앞에 내 문제들을 처리하기 바빠서, 지나간 시간에 대한 미련들과 또 그것들을 빨리 벗어내지 못 해서, 그래서 하려던 말을 놓치고 자꾸 그렇게 지나쳐 버리고 그러고 나면 또 잊어버리게 된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그는 나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일상처럼 싸우던 날들마저 줄어들었다. 그렇게 그는 내게서 말을 잃었다. 



"캡, 괜찮은 거예요? 

"왜 안 자고 나왔어." 

"그냥, 잠이 안 와서요. 



잠을 좀처럼 자지 못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완다는 처음 감옥에서 나왔을 때보다 더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감옥을 탈출해 와칸다로 돌아왔을 때, 내 머릿속을 읽은 아이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어요. 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목소리로 아이는 나를 꾸짖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어요. 그렇게 버려두면 안 되는 거였어요. 나는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꾸 꿈을 꿔요." 

"미안하다. 나 때문에..." 

"그냥 상상을 하게 돼요. 다시 만나면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까. 미안하다고 해야 하겠죠. 감옥에 가둔 건 결국 내가 자초했던 일인데 바보같이 원망만 했어요. 밉고 싫고 그랬는데 생각해보면 그렇게 만들지 않으려고 했던 거였는데..." 

"...완다." 

"내 사과를 받아 줄까요?" 



무서워요, 아이는 내가 할 말을 대신하며 그렇게 말했다. 사실 이곳으로 피난 온 누구도 두렵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우리에게 그는 이제 권위로운 재판관이나 다름없었다. 모두가 나름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비난 어린 소리를 말해 놓고도 마음을 쓰던 바튼은 그가 자신의 가족을 돌봐주고 있다는 사실을 타찰라에게 전해 듣고서 말을 잇지 못 했다. 스콧에게 핌 박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는 그토록 싫어하는 스타크가 우리의 소식을 전해주었고 자신을 비롯해 스콧의 가족들 역시 언론으로부터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했다. 그리고 샘은, 그는 몸이 부서져라 산을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매일 아침 인터넷이며 신문이며 기사들을 확인하며 그의 소식을 찾았다. 샘은 부러 말이 없었지만, 가끔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소리 없는 원망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제 말을 듣고 홀로 그 차가운 시베리아로 향한 그에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완다가 했던 똑같은 의미를 담은 그 눈을 나는 차마 쳐다볼 수가 없었다. 


나 역시 무섭긴 마찬가지였다. 사과를 받아주지 않을 것 같아서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다만 나는 내가 버려두었던 그를, 그렇게 내팽개쳐버린 관계를, 그와 마주함으로 그 끝을 인정하는 것이 두려워졌다. 그가 더 이상 나를 아무것도 아닌 사물을 보듯이 대할 때, 그걸 못내 인정해야 하는 현실이 무서웠다. 


그리고 이런 내 마음을 배반한 채 핸드폰은 울렸다. 보내진 이례로 단 한 번도 울리지 않던 그 핸드폰이 짧은 소리를 내고 다시 침묵한다. 나는 차마 그걸 열 수 없었다. 그 안에 적혀졌을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아서 그럴 수 없었다. 비겁하게 핸드폰을 바라만 보는 나를 대신해 완다가 그것을 열었다. 액정 위에 간결하게 쓰여있는 메시지를 보고 완다는 더 말이 없었다. 조용히 그걸 나에게 넘겨주고 자리를 피할 뿐이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걸 받았다. 파리한 액정에 떠오르는 한 줄의 문장을 읽는다. 그리고 기어이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핸드폰이 손에서 떨어졌다. 조각나버린 이 관계처럼, 그 추운 시베리아 바닥에 버려졌던 그처럼, 그렇게 아무렇게나 널려있는 쓰레기처럼. 


나는 아직도 느렸고, 너는 여전히 빨랐다. 벌써 너는 나를 버렸는데, 나는... 






[사랑은 다 그렇게 지나가는 거야.] 



나타샤는 어른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내 옆에서 꾸밈없는 말들로 어린 내 마음을 케어해주곤 했다. 이건 이런 거다, 저건 저런 거다, 하면서 마냥 괜찮다고 했던 그를 대변하며 나에게 항상 조언을 해주는 역할을 자청했다. 그마저도 모든 것이 망가져버린 상황에서는 무슨 소용인가 싶었지만, 나타샤는 그래도 여전히 나를 타일렀다.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수배령 때문에 나타샤는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며 숨어 있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우리, 그리고 나와 연락을 취했다. 어떻게 그녀가 소식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덧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사랑은 다 그렇게 지나가는 거야. 나는 할 말을 잊었다. 그래, 알고 있다. 사랑이 그렇게 지나가는 것이라는걸, 아스라지는 시간 속에 묻혀버린 사랑을 이미 겪었기 때문에 더더욱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잘 지내. 너무 잘 지내서 배 아플 정도야. 아, 협상도 마무리될 거야. 수배령도 풀릴 거고. 그러면 다시 복귀할 수 있을 거야. 다들 꽃 다발 하나씩 준비하라고 해. 사과와 축하에 꽃만큼 좋은 거 없으니까.] 

"사과는 알겠고, 축하는 무슨 소리야?" 

[스티브, 친애하는 동료이자 친구로서 말해주는 거야. 사실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는데, 그래도 눈앞에서 맞닥뜨리는 것보다는 충격이 덜할까 싶어서. 언론에는 아직 발표 안 났어. 시간문제겠지만... 뉴스로 듣는 것보단 나한테 듣는 게 낫겠지] 

"무슨..." 

[결혼했어.] 

"...." 

[상대가 누군지는 당신도 알겠지. 시청에 신고도 했고, 식은 안 할 거래. 번잡해서 싫다고 하더라고. 그래도 신혼여행은 갈 건가 봐. 이거 다 마무리되고 다들 다시 자리 잡고 나면 그때 갈 거라고 하더라. 일이라면 치를 떨던 인간이 미친 듯이 일만 하고 있어. 얼른 끝내버려야 쉴 수 있다고 하면서.] 

"..." 

[그러니까 얼른 당신도 정리해.] 



정리, 그래, 정리해야지. 나는 또다시 다짐한다. 하지만 내 안에 담아 둔 게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답이 없는 나를 기다리다 나타샤는 수화기 너머 한숨을 쉰다. 그녀도 아는 거다. 내 미련 맞은 어리석음을. 잘 지내. 짧은 인사와 함께 그녀는 별 수확 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나는 오롯이 홀로 남아 내 안에 것들을 정리한다. 웃을 때 휘어지는 눈가와 둥글게 뻗은 콧대와 분홍빛 입술, 그 입술이 갈라지고 나오던 말들, 스티브, 그렇게 부르던 부드러운 음성, 알고 있었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덜덜 떨리는 목울대, 하얀 입김으로 흩어지는 헛헛한 숨, 그 조화로운 얼굴 위로 맺히던 붉은색 피, 그런 것들. 


어떻게 지울 수 있을까. 내 시간은 그날 시베리아에서 다시 멈춰버린 것 같은데.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장면들을 되새기며 하루에도 수십 번을 토해내듯 후회하고 울기를 반복하며 제자리걸음을 걷는다. 그러면서도 말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내가 감히 후회와 회환을 그에게 이야기한단 말인가. 고작 그 작은 편지지 한 장을 쓰면서도 수백 번을 고쳐 적으며 그날 그를 등졌던 나의 정의를 되게 기려 무던히 노력했다. 만약 내가 그리도 나약하게 내 잘못을 시인하고 나면, 그는 또 괜찮다고 하면서 스스로를 찌르고 감내하며 나를 견뎌낼 것 같았다. 그는 나를 원망해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그가 쏟아낸 핏덩이만큼, 아파했던 고통들만큼 나를 꾸짖고 원망해야 옳았다. 그래야 지난 시간 내가 그를 괴롭혔던 모든 어리석은 행동들이 속죄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핸드폰을 보내고도 내 스스로 연락조차 하지 못 했다. 입술로는 수십 번 미안하다는 말을 되뇌면서도, 나는. 


사과를 해야지. 버키는 나에게 그렇게 단호히 말했다. 세뇌 코드가 완전히 지워지고 나서 그는 그날 시베리아의 사건이 오기까지의 이야기를 듣길 원했다. 사실 나는 망설여졌다. 온전한 정신이 아닌 친구를 위해 연인이었던 그를 내팽개쳤다고 하면, 그러고 나면 버키의 마음에 굳혀질 죄책감이 더 커져버릴까 봐 걱정스러웠다. 그리고 두려웠다. 버키에겐 내가 여전히 브루클린 애송이이기만 해서, 성장 하나 없이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나를 한심하게 여길까 그래서 무서웠다. 떨리는 목소리로 솔직하게 지난 이야기들을 해주었을 때, 버키는 참을성 있게 내 말 하나하나를 곱씹어 들었다. 그리고는 딱 한 마디를 했다. 사과를 해야지. 그건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그 자신에게도 하는 말이기도 했다. 나는 또 침묵하고 말았고 친구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자책이나 힐난이 담긴 눈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호함이었다. 네가 하지 않으면 나라도 하겠다는.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그는 비어있는 팔을 달 생각조차 하지 않고, 퀸젯 하나를 탈취해 달아났다. 난 잡지 않았다. 대신 손때가 묻어 반질거리는 핸드폰을 주어 들어 단 하나뿐인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기계적인 통화음을 들으며 내가 얼마나 목을 가다듬었는지 모를 것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첫 마디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얼마나 고민했는지도 아마 모를 것이다. 하지만 결국 전화는 연결되지 않고 끊겼다. 다시 전화했을 때 핸드폰의 전원은 꺼져 있었다. 그리고 전화가 연결되는 일은 없었다. 나는 다시 전화를 걸지 못했고, 핸드폰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우리는 버키가 얼려졌을 때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계속했다. 가끔씩 TV를 보면 공식적인 자리에 나오는 그를 볼 수가 있었다. 처음에는 홀쭉하고 핏기 없던 얼굴이 점차 나아지는 것을 보았을 때 내 마음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다행이다, 나아지고 있구나, 그런 안도감과 함께 이젠 나를 잊어가는구나, 내가 없어도 좋아지는구나, 나아가는구나, 하며 점점 그가 멀게 느껴져 갔다. 어느 순간 그러고 나면 나는 항상 꿈을 꿨다. 걸음이 느린 나는 저 먼 시간에 발목이 잡혀 허우적거리고 있었고 그는 저만치 앞에서 힘차게 달려가며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내가 아닌 나를 벗어난 나의 친구가 함께였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결국. 


나는 그래도 나여야 했다. 나타샤의 말대로 나는 내가 지키고자 했던 친구와 내가 버려야 했던 연인이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 내가 닿지 못 했던 관계로까지 이 발전에 나는 의연해져야 했다. 하지만 추잡하고 저열한 속내 한 편으로는 버키가 원망스럽고 미웠다. 왜 하필 그여야만 했는지, 우리가 겪어온 수많은 날들을 짓밟고 기어이 거기까지 올라야 했는지, 아직까지 그를 잊지 못하고 이렇게 못나게 남아있는 나를 알면서도 꼭 그래야만 했는지, 하지만 그마저도 나는 물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사랑에 빠지게 된 경위를 듣게 된 것은 푸른 새벽을 지새우며 결국 아무것도 버리지 못 했던 그때였다. 나타샤가 나에게 소식을 전한 그 밤, 핸드폰에는 음성 메시지 하나가 남겨졌다. 



[스티브, 나야. 아마도 이 번호로 연락이 오는 건 이번이 마지막 일 거야. 토니 말로는 협정이 무산되었다고 하더라. 내일이면 발표가 날 거래. 이젠 그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 너한텐 기쁜 일이겠지. 물론 나한테도. 내 혐의는 벗어졌어. 그렇다고 내가 했던 모든 일이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글쎄. 적어도 지금 남아있는 사람한테 충실히 갚아나가면 되겠지, 나는. 내 소식은.. 아마 들었으리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이젠 내가 제임스 뷰캐넌 스타크-반즈가 되었다는걸. 


날 원망한다고 하면, 그래,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하지만 내 선택을 후회하진 않아.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건 아니야. 처음 그를 봤을 때, 그냥 알아차렸어. 지금 내가 할 사과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그냥, 많이 지쳐 보였거든. 사과를 받을 기력도 없어서, 억지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어서, 그래서 나에게 벌을 줄 생각도, 용서를 받아줄 마음도 없다는 걸.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였을까. 내가 가진 건 아무것도 없잖아. 외팔뿐인 이 몸뚱이뿐이지. 생각하다가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어. 곁에 있어줬어. 옆자리를 체워줬지. 그날 우리가 시베리아에서 그에게 등을 돌렸을 때, 홀로 남겨져 있던 것이 마음에 걸려서, 여지껏 혼자라는 게 외로워 보여서 그렇게 했어. 그러다 보니까 좋아져. 자꾸 마음이 가. 그리고는... 


집을 구했어. 뉴욕에서 좀 많이 떨어진 곳으로. 그나 나나 별로 좋은 기억이 없잖아, 여기에. 돌아오면 우릴 보긴 힘들 거야. 아마 앞으로도, 그를 볼 일은 거의 없겠지. 너에게서 무작정 떨어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러니까, 은퇴하기로 했거든. 수트를 다 부쉈어. 그래도 될까라고 망설이길래 그러라고 했어. 나는 그가 영웅이길 원치 않아. 그냥 내 남편 앤서니 에드워드 스타크-반즈 그거면 돼. 앞으로 네 일을 돕기야 하겠지만, 나서진 않을 거야. 나도 마찬가지고. 40년대가 아니잖아. 억지로 전쟁에 끌려 나가야 했던 군인들이 아니니까, 나는 가정을 지키고 싶어. 평온한 삶을 살고 싶어. 우리 그때는 정말 꿈꾸지도 못 했던 일이었잖아. 최근까지도.. 그래서 스티브, 우리는 그러기로 했어. 그러니 너도 이해해 줬으면 바래, 친구.] 



그렇게 평온한 말들을 이야기하는 버키는 이제 내 곁을 지키던 충직한 동료도 아닌, 현재 누군가의 배우자가 되어 있었다. 나만이 이곳에 홀로 남았다. 나만이 이곳에, 이렇게, 이런 모습으로 버려졌다. 그날 내가 버렸던 나의 연인처럼, 차가운 이 얼어붙은 시간 속에서. 



[그러니까 잊어줘. 그를, 그 마음을, 지워줬으면 좋겠어. 우리를 제발 이 평화 안에 내버려 둬. 부탁이야.]



모른다, 나는 그런 거 모른다. 이제는 쓰레기처럼 조각난 채 버려진 그의 마음을 끌어안고 나는 버리는 방법을 몰라 그저 끌어안고 있었다. 오로지 나만이, 나만이, 나의, 내... 



[너무 늦었어, 스티브.] 



그걸 알면서도 버리지 못하는 나는 그렇게 또 다른 과거에 갇혔다.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가 결국 버리지 못 했다. 액정에 뜨는 그 짧은 단어를 수백 번 되뇌며 끊임없는 후회를 하고 조각난 마음을 주워 담으며 나는 또 제자리걸음을 했다. 이른 새벽, 여전히 안개가 걷히지 않았다. 나는 또 길을 잃은 듯했다. 






- 어느 화창한 날의 버키 반즈. 




It's small crime. And I've got no excuse. 

이건 작은 범죄인 거야. 그리고 난 변명할 수가 없어. 



말리부의 태양은 뜨거웠다. 장마철을 비껴간 미국 서부의 날씨는 따사롭기 그지없었다. 비로 얼룩져 우중충했던 뉴욕과는 달랐다. 바닷가 해변 근처, 인적 드문 동떨어진 집으로 이주한 우리는 매일 아침 바닷물이 밀려들어오는 소리와 차양 좋은 창으로부터 들어오는 아침 햇볕에 눈을 뜨곤 했다. 매일매일이 새롭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잠에서 깨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이토록 만족스러운 일인 줄, 그와 만나기 전에는 꿈에도 몰랐다. 늦잠을 자는 그의 얼굴을 쓰다듬다가 나는 문득 내 손가락에 걸려있는 반지를 보았다. 왼손 약지에 잡혀있는 반지가 햇볕에 반짝반짝 빛이 났다. 


결혼 선물이랍시고 그가 만들어준 왼 팔은 일상생활에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로 견고했고, 또 남들과 달라 보이지 않았다. 이질적인 쇠의 느낌이 나질 않아 처음 거울 앞에 섰을 때 조금 어색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금세 적응을 했다. 진짜 내 팔인 듯 그의 섬세한 손짓과 체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가장 좋았던 것은 절대로 빠지지 않도록 아예 손가락에 접붙여버린 반지 때문이었다. 너 인생 나한테 저당 잡혔어, 큰일이다. 그는 씨익 웃으며 그렇게 말했고 나는 거기에 순응했다. 손가락이 잘려나가지 않는 이상 반지는 그 자리를 계속 지킬 것이었다. 내 스스로의 만족보다는 그런 상황을 그가 직접 만들었다는 사실이 나는 못내 뿌듯했다. 이제 정말 이 사람이 내 사람이다 싶어서. 



"여보, 일어나. 아침 먹어야지." 

".... 자기야, 나 5분만..." 



낯간지러운 호칭이 익숙해지고 서로가 없는 일상을 이젠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이 좋았다. 일상이라고 해봐야 별것도 없다. 회사 일을 모두 페퍼에게 위임한 그는 아이언맨까지 그만두고 나자 제법 여유가 생겼다. 여전히 공식적인 자리는 늘 존재했고, 일하지 않는다고 해서 특별히 연구실에 있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흔히들 말하는 평범한 일상의 것들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은 충분히 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내가 아침에 그를 깨우고, 같이 식사를 하고, 장을 보고, 가끔은 산책을 하고,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 그런 단조로운 날들을. 


처음엔 어색해했다. 이미 관계가 이렇게 되기 전부터 내가 봐왔던 그의 악습들을 생각하면 그럴 만 했다. 하지만 곧장 익숙해진다. 그렇게 그가 일상에 익숙해지면 나는 이를 통해 그를 배웠다. 토스트에 올리는 잼은 딸기보단 블루베리를 더 좋아하고, 생선보다는 육고기를 더 잘 먹고 연구실에 있을 때 군것질거리는 필수품이다. 산보다는 바다를 더 좋아했지만 수영보다는 모래사장에 있는 걸 더 선호한다. 액션 영화를 좋아하지만 잔잔한 멜로드라마 영화를 더 좋아했다. 과학적 오류가 있는 SF 영화는 질색을 했지만 보면서 신랄한 비판을 날리는 건 좋아한다. 좋아하는 영화배우는 로버트 드니로와 오드리 헵번, 제레미 아이언스. 책은 대체적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공학 계열 책을 읽었지만 의외로 고전 영미문학에 해박했다. 그에게 헤밍웨이는 마초이즘에 젖은 얼간이었고, 피츠제럴드는 심각한 찌질이었다. 대신 에밀리 브론테와 허먼 멜빌, 헤르만 헤세를 좋아했다. 그는 의외로 섬세한 묘사와 풍부한 언어로 쓰인 감정 표현을 좋아했다. 


나는 이런 그가 좋았다. 겉으로만 알던 화려한 이력, 스티브가 묘사했던 모습, 내가 알던 하워드를 닮은 듯한 멀끔한 차림새, 그 아래 숨겨져 있는 진짜 토니 스타크가 좋았다. 내가 아는 그는 생각보다 남을 많이 생각하고, 손에 익은 매너만큼 배려를 알았고, 가끔 이기적일 때가 있지만 자기한테 피력하는 의견들을 들어줄 줄 알았다. 의외로 외로움이 많아서 자기 주변 가장 친한 사람들이 떠나진 않을까 늘 불안해하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속이 곪을 정도로 상처를 쉽게 받기도 한다. 단단한 껍데기를 까면 한없이 물렁하기만 한 과실 같다. 나는 그런 그가 좋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에게만 보여주는 그의 가장 여린 모습들이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졌다. 그게 내가 그와 결혼한 이유였다. 


이런 거 나는 몰랐었다. 어린 시절은 너무 힘들었고 청년에는 전쟁 탓에 한치 앞을 몰랐기에 누군가와 미래를 꿈꾸지도 못했으며, 그 후에는 모든 것에 무지하기만 했다.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걸 싶다가도 그가 없으면 알아차린다 해도 무의미하니 그냥 지금으로 좋다 했다. 지금, 이때, 내가 자고 있는 그를 내려다보는 이 아침, 9시 27분을 가리키는 이 시간이 내게는 소중하기만 했다. 



"일어나. 우리 이제 준비하고 나가야 해. 

"으... 아무래도 당신 때문에 게으름이 습관 되는 것 같아. 예전엔 안 그랬던 거 같은데 잠이 너무 늘었어." 

"좋지 뭐. 아침 만들고 있을 테니까 먼저 씻어." 

"응." 



눈을 반쯤 뜨고도 습관처럼 하는 입맞춤, 미적거리는 걸음으로 욕실로 사라지는 그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간다. Good morning, sir. 허공에 울리는 아침 인사를 받고 그녀가 말하는 오늘의 날씨를 들으며 나는 간단한 식사를 준비한다. 조금 있으면 머리에 물기를 털며 나오는 그가 메뉴가 뭐냐고 물어볼 테고 그럼 나는 토스트와 스크램블 에그, 커피 한 잔을 내보이겠지. 그냥 그런 일상이다. 지극히 평범하고 단조로운, 그래서 더 행복한 화창한 날의 아침이었다. 






언젠간 마주해야 할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영웅을 그만두었다고는 하지만 완벽하게 쉴드에서 멀어질 수는 없었다. 그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컨설턴트라는 이유로 쉴드를 방문했고, 나는 거기에 동참하였다. 사실 그의 스케줄은 내 스케줄이나 다름없었다. 대외적으로 나는 토니 스타크의 남편이자 법적 대리인이기도 했지만, 가장 가까운 경호원이기도 했으니까. 쉴드에 방문하자마자 그는 가장 친한 배너 박사와 연구실로 들어갔고 나는 회의실에 나타샤와 앉아 작당모의를 하고 있었다. 



"이탈리아가 최고야. 휴양지에 거기 만한 데가 어딨어?" 

"매일 보는 게 바다인데, 괜찮을까?" 

"지중해를 말리부 따위와 비교하지 말아줄래. 그리고 솔직히 이런 건 너보단 토니가 더 잘 알 텐데 왜 고생을 해? 그냥 맡기지." 

"싫어. 호텔이나 골라줘 봐," 



당장 다음 달 초에 가기로 약속을 잡은 신혼여행지는 결국 나타샤의 의견으로 정리되었다. 여행사에서 끌어다 모은 카탈로그지와 인터넷을 뒤적거리며 그녀는 답지 않은 인내심을 십분 발휘해 나를 성심성의껏 도와주었다. 애초에 반지를 같이 골라주고 결혼 들러리 중 한 명으로 섰던 걸 생각하면 우리의 결합에 그녀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물론 그때마다 고마움의 대가로 고가의 가방 같은 것들을 사다 바쳐야 하긴 했지만, 어쨌든 나에게 그녀는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하이드라의 기계였던 나를 꺼내는데 일조했고, 지금 이 행복을 만들기까지 도움을 준 사람이었으니까. 



"그거 알아? 토니한테 이태리 내니가 있었던 거. 

"보고 받은 적 없는데, 들은 적도 없고." 

"프랑스 내니도 있었데. 하워드랑 마리아가 바빠서 어릴 땐 거의 그녀들이랑 놀았나 봐. 덕분에 이태리어를 배웠다고 하더라고." 

"프랑스어는? 모르는 것 같던데. 프랑스 내니도 있었다면서." 

"혀에 버터 바른 것 같아서 싫데." 

"그럴 줄 알았어. 이거 어때? 포시타노 절벽 쪽에 있는 고성을 리모델링 해서 만든 호텔이라는데, 스위트룸에 개별 수영장도 있고 수영장 밖에 바로 바다가 보인다는데." 

"딱 좋네. 참, 베니스도 가고 싶은데. 너무 멀어?" 

"어차피 전용기 타고 갈 거면서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그렇게 안 멀어." 



지금껏 가본 여행지 중 베니스가 제일 좋다고 그가 말했었다. 부모님이랑 처음 갔던 여행지라고 했다. 그를 관찰하고 알아가는 것들이 많아지면서 대화가 늘어났다. 나는 또 그렇게 그를 알아갔다. 그가 프랑스 내니 미셸과 이탈리아 내니 줄리아의 보살핌을 받으며 커온 것을 알았다. 그중 줄리아를 조금 더 좋아했는데, 이유는 그녀의 외모가 마리아랑 많이 닮아서 그랬다고 했다. 영미문학에 해박한 것은 절대적으로 마리아의 독서 취향 탓이라고 했고, 아버지의 영향이 아니었으면 작가가 됐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어쩌면 평론가라든지. 미술에는 크게 관심은 없지만 아예 무지하진 않았다. 어렸을 때 앤디 워홀을 만났는데 성격이 괴팍하다고 했다. 우리 신혼집에 걸려있는 작품은 잭슨 폴록의 것이었다. 토니의 취향을 아는 포츠씨가 선물한 그림이었다. 그는 정물, 또는 사실 화보다는 인상파의 풍경화나 추상화를 더 좋아했다. 사진처럼 그리는 거 너무 딱딱하고 경직되어 보이잖아. 그는 그 말을 하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그의 인생에서 지난 연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서 고민했다. 그는 불현듯 여상한 이야기를 하다가도 무엇이 떠올랐는지 말을 멈출 때가 있다. 나는 그게 스티브의 흔적임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말을 멈추고 나서 다시 입을 열 때 그는 대게 어색한 얼굴을 했고, 나는 괜찮으니까 말해달라고 떼를 썼다. 사실 누가 지금 배우자에게 지난 연인에 대한 이야기를 쉽게 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그 연인이 배우자의 친구였고 그 끝이 엉망이었다면 더더욱 말하기 힘들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부러 질투를 하기보다는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며 그것들을 토해내게 만들었다. 일종의 정화 과정 같은 거였다. 한 번 말로 뱉고 씻어내면 다음에 또 그런 상황이 와도 그를 떠올리기보다 나를 생각할 수 있게. 그러다 보니 그는 어느 순간 몽땅 스티브를 털어 내고 말았다. 이제 그가 입을 열다가도 멈칫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언젠간 마주해야 할 거야." 

"뭘?" 

"스티브 말이야." 



호텔에 예약을 해주다가 나타샤가 그렇게 말했다. 안다, 나도. 언제까지 피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와 내가 결혼을 했다 해도, 이 그룹 안에 묶여있고, 스티브가 내 제일 친한 친구이자 동료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언젠가 우리는 마주해야 할 것이었다. 



"아직은 아냐." 

"왜? 아직 마음의 정리가 안된 것 같아서? 아니면 사실을 말해주기 두려워? 알게 되면 뺏길까 봐? 

"..." 

"사실은 속죄하겠답시고 함께 지내면서 마음이 생긴 게 아니라, 기억이 돌아오고 나서 스티브를 찾아갔다 우연히 보게 된 그의 연인에게 첫눈에 반해 사랑하게 되었다는 거, 둘 사이가 망가지기 무섭게 달려가서 그 자리를 꿰찬 거 말이야. 스티브는 몰라, 아무것도 모르지. 천치처럼 머리가 망가진 줄 알았던 자기 친구가 알고 보니 이렇게 치밀하고 계산적인 줄은 누가 알겠어." 



말을 잇지 못 했다. 그녀가 나를 힐난하기 위해서 하는 말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마음속이 쿡쿡 쑤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했던 말이 모두 진실이었고, 그것이 내 친구 스티브에게 얼마나 큰 죄인지 알기 때문에 변명조차 하지 못한다. 반짝반짝 빛나던 사람, 그 큰 스티브를 작은 몸으로 끌어안으면서 자애로운 얼굴을 하고 있던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잊을 수가 없었다. 사랑이라는 게 참 얄궂게도, 그래선 안된다고 생각하니까 더 보고 싶고 그리워졌다. 시베리아의 일로 그들이 헤어진 것이 전적으로 내 탓이 될 수는 없었지만, 원인 제공을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순 없었다. 하지만 그를 버리고 돌아선 것은 스티브였다. 나는 스티브에게 돌아가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괜찮으니 그를 이렇게 버려두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이건 내 욕심이었다. 


나는 스티브를 안다. 그는 올곧았지만 항상 서툴렀다. 연애를 안 해봐서 가 아니라 그냥 그의 성격이 그랬다. 신념을 외는 것은 줄 곳 하면서 정작 중요한 감정 표현은 망설이고 머뭇거리곤 했다.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애써 괜찮은 척하는 그를 달랬던 것은 내 몫이었다. 그래서 안다. 스티브가 결국 그에게 찾아가지 않을 것이라는걸, 나는 내심 확신하고 있었다. 차라리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들이 여전히 연인이었다면 그랬다면 나는 이 마음을 곱게 접어 내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멀었고, 그 사실을 확인한 순간 나는 저열하게도 안심하고야 말았다. 그래서 그 기회를 그냥 차버릴 수가 없었다. 나는 스티브를 마지막으로 보았고, 무언의 질문을 했다. 정말 가지 않을 거야? 이렇게 이 관계를 져버리고 말 거야? 스티브는 대답이 없었다. 그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토니에게 향했다. 잔인하지만, 그게 나의 선택이었다. 


토니를 만나고 지금 이때에 오기까지 내가 얼마나 불안한 마음으로 떨었는지 아는 사람은 나타샤가 전부였다. 똑같은 꿈이 반복됐다. 여전히 행복한 연인인 그들과 먼 치에서 지켜보는 나, 비참한 그 꿈을 꾸고 나면 아침에 일어나서 그가 내 옆에 있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안심을 했다. 다시 그들이 만나면 그가 나를 버리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불안감이 깃들 때마다 나는 더 그에게 잘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가 완전히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내게 사랑을 이야기했을 때도 내 한구석은 여전히 불안했다. 절대로 헤어지지 않을 거란 확신이 내게는 필요했다. 차라리 결혼을 하지그래. 내 이런 마음을 토해냈을 때, 나타샤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날로 나는 반지를 사러 갔다. 작은 상자 하나 내미는데 속으로 얼마나 떨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여상하게 그가 그걸 받아들이고, 이내 소리를 지르며 기뻐했을 때, 나는 지난 인생에서 괴로웠던 과거들을 모두 씻겨낸 것처럼 행복해졌다. 앞으로의 불행은 생각하기도 싫어질 정도로. 



"내가 이렇게 욕심이 많은 줄 몰랐어. 내가 이런데 스팁이라고 다를까. 스티브를 안 보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걔 마음에 일말의 미련이라도 남아있는 이상은 만날 수 없어. 불안해. 나처럼 그에게 더 욕심을 낼까 봐 그래서 더 불안해." 

"토니는 당신을 사랑해. 서류상으로도 완벽한 부부이면서 뭘 또 그렇게 불안해해? 

"결혼은 얼마든지 깨질 수 있어." 

"토니를 못 믿어?" 

"아니, 그를 믿어. 나를 못 믿지. 한 번도 순탄하게 뭐가 지나간 적이 없으니까." 

"버키. 이젠 괜찮을 거야." 

"알아, 그래야지. 그래야만 해." 



같은 반지를 끼고, 서약을 했다. 들러리인 나타샤와 포츠씨가 축복을 해줬고, 우리는 좋아하는 타이 음식점에서 애프터 파티를 했다. 애프터 파티라고 해봐야 소박하기 그지없다. 그저 음식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술과 함께 이야기를 곁들여 즐길 뿐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결혼을 했다. 같은 집에서 같은 침대를 쓰고 같은 하루를 보내며 내 마음은 안정을 찾아갔다. 하지만 스티브에 대해서라면 좀 달랐다. 여전히 나는 그가 스티브와 마주하는 것이 꺼려졌다. 그가 이제는 스티브에게 전혀 마음이 없고, 나를 온전히 사랑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지금이 너무 행복해서 내가 스티브에게 범했던 작은 범죄를 벌하려 과거의 불행들이 한꺼번에 덮쳐오면 어쩌나, 그래서 그가 그렇게 스티브의 곁으로 다시 떠나버린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스티브에게 전화를 했다. 이 모든 사실들을 알려주지 않은 채, 그저 그에게 제발 나의 그를 버려달라 말했다. 핸드폰은 두 동강이 난 채 말리부 바다에 버려졌다. 마지막 남은 그 흔적마저 지워버렸다. 



"뭐 하고 있었어?" 



일이 다 끝났는지 목뒤에서 나를 끌어안는 체온에 아까까지 우중충한 마음이 상쾌하게 가셨다. 



"신혼여행지 보고 있었어. 이태리 갈 생각인데 어때?" 

"좋지. 냇. 너도 갈래? 배너는 내가 꼬실게." 

"커플 사이에 끼기 싫어요. 됐으니까 올 때 밀라노에서 코트 하나 사줘요." 

"모델명 찍어 보내." 



찡긋하고 윙크를 하는 그의 볼에 입을 맞추고 나타샤와 간단하게 인사를 한 뒤 회의실을 나왔다. 쉴드 건물 밖으로 나오는 내내 그는 배너와 했던 모든 일들에 대해서 신나게 떠들었고, 깐깐한 꼰대라며 퓨리 욕을 하기도 했다. 그런 조근조근 하는 말을 들으며 나는 문득 지나가는 사람들 틈 사이로 우리를 보고 있는 파란색 눈과 마주하고 말았다. 여전히 40년대, 그리고 마지막 마주쳤을 때와 다르지 않은 차림으로 스티브는 우리를 먼 발치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애써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토니의 어깨를 감아 안았다. 내 이런 스킨십을 받으며 그는 자연스럽게 내 허리에 손을 감아 안겼다. 우리를 보는 파란색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발, 오지 마. 그 무언의 말을 알아들은 건지, 아니면 실제로 눈앞에서 보고 나자 믿어지지 않는 건지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의 모습이 그에게는 어떻게 비쳤을까. 지난 일은 모두 잊은 듯, 머리를 짧게 자르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평상복을 입은 채, 사랑하는 배우자를 끼고 걷는 내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그것은 후회일 수도 있다. 지금도 여전히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향한 자책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면 내가 지금 있는 자리가 자신의 자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지도 몰랐다. 고작 몇 년 전만 해도 군중 속에서 누군가를 바라보는 그의 자리가 바로 내 자리였다는 것은 까맣게 모르고 있겠지. 뒤바뀌어 버린 관계에 대해서, 나는 한 번 바뀐 자리가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훔친 것은 다시 훔쳐지기 마련이었고, 나에게는 이것이 바뀌지 않을 안전장치가 필요했다. 



"그래도 신혼은 1년 정도 즐기는 게 나을까?" 

"응? 무슨 소리야?" 

"아이를 입양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차를 타고 가다가, 그에게 프로포즈를 했을 때와 다름없는 평온한 어투로 말을 했다. 이제 막 결혼을 한 사이에 너무 빠르게 이야기하는 건 아닐까 싶긴 했다. 어쨌든 둘이서 즐기는 신혼도 좋았으니까. 그렇다고 아주 충동적인 것은 아니었다. 차근차근하려고 했던 것을 조금 서두르는 것뿐이었다. 처음 가정을 가지고 나자 나는 우리 사이에 있을 어여쁜 아이에 대해서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같은 성이니 아무래도 직접 아이를 가지기는 어렵겠지만 대리모를 구하는 방법이나 입양 같은 것들에 대해서 알아보기도 했다. 그리고 아이를 안고 있을 그를 떠올리기도 했다. 완전한 가정, 그 완벽한 울타리는 지난 시간 동안 우리가 절대 꿈꾸지 못한 것들이라서 더 간절하기도 했다. 동시에 우리 사이를 더욱더 완고하게 만들어 줄 잠금쇠이기도 했다. 절대로 어느 누가 침범하지 못하도록. 


그는 조금 놀란 듯 나를 보았다. 나는 혹여나 그가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조금 걱정했다. 이제야 조금 안정을 찾은 그를 또다시 별스럽지 않은 내 욕심으로 고뇌와 불안으로 떨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나보다 더 평온한 얼굴로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고집스럽게 말했다. 



"절대로 여자애여야 해. 

"그래, 좋지." 

"뭐, 남자애도 나쁘진 않지만. 그리고 1년은 무슨... 애 입양하는 절차가 그렇게 쉬운 줄 알아?" 

"나야 법은 잘 모르잖아." 

"어련 하겠어. 어차피 생각하던 일이었으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 저쪽 코너에서 돌래? 아이스크림 먹고 싶은데." 

"응. 아, 자기야." 

"응?" 

"소리 지를 거면 내려서 질러. 사고 나." 

"안 질러. 대신 이따 페퍼한테 자랑은 할 거야. 남편이 애를 가지자고 했어. 우리 가족계획 좀 들어봐, 하면서. 몇 분이나 버틸 거 같아?" 

"어.. 10분?" 



그는 킬킬 거렸고 나 역시 웃었다. 나는 그가 이 문제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그 말에 또 기분이 좋아졌다. 아, 그래 우리는 부부였지. 같은 곳을 보고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그런 사이였지, 싶어서. 하지만 나만큼 그도 좋았는지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들어간 가게에서 내 허리를 꼭 안으며 말했다. 어쩜 그렇게 내 맘을 다 알아? 나는 웃었다. 매일 너를 봐왔으니까.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아주 오래전부터 너를 봐왔고 너를 알아가려 노력해서 그래서 나는 너를 다 알아. 알아갈 거야. 그 말은 전해지지 않았지만 절대로 바뀌지 않을 사실이기도 했다. 그리고 스스로의 맹세이기도 했다. 내가 법과 신의 앞에서 그와 서약을 했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를 지켜볼 것이라는 약속, 절대로 변하지 않을 함께한다는 것을. 


고개를 돌려보니 모퉁이 너머 길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를 쳐다보는 스티브의 눈 역시 보이지 않았다. 그의 것을 탐한 것에 대해서 미안할 일이었지만, 과거는 우리를 범하지 못할 것이다. 누구도 잡을 수 없게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달음박질치며 앞으로 나아갈 테고 그게 설령 스티브라고 해도 감히 끼어들 수 없도록 견고한 울타리를 만들 것이다. 이렇게 우리와 우리의 가정 그리고 그를 위해 또 수많은 평범한 날들을 지나올 것이며 그곳에 슬픔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확신했다. 


아이스크림 한 통에 숟가락 두 개를 꽂아 넣고 같은 차에 올라 같은 길을 달렸다. 저 너머 파란 하늘을 빨갛게 물들인 채 해가 지고 있었다. 인터넷에 나오는 내일의 날씨는 맑음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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