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잡고 있는 손은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

내 말은 답지 않게 제법 두서가 없었다. 차분하게 말을 하려고 해도 터져 나오는 눈물과 함께 쏟아지는 단어들은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했다. 아이는 내가 애써 쏟아내는 말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 내 우는 걸 달래는 데 더 열중하는 듯 했다. 왜 이래, 애처럼. 괜찮으니까. 조금 진정이 되고 나서야 다시 처음부터 설명하려는 내 말을 막았다. 무슨 말인지 이해 했어. 그리도 덤덤하게 말을 하는 것을 보고 조금은 욱 하고 성질이 났다. 나조차도 이렇게 분이 차는데 어린 네가 제 성질 머리를 억눌러가며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꼴이 답답하기만 해서. 뭘 이해했는데, 라고 묻자 아이는 답했다. 알고 있었어, 이미.

당황한 내 낯을 모른 척 시선을 돌리며 아이는 제 책상 서랍 속에 고이 모셔둔 것 같은 서류 봉투를 하나 꺼냈다. 끝이 까지고 너덜너덜한 서류 봉투는 아이의 심장이고 곧 내 것인 듯 했다. 불길한 예감이 전신을 타고 피를 얼게 만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받아 든 봉투가 미끄러져 내렸다. 열려 있는 봉투 틈 사이로 서류 뭉치와 사진들이 쏟아져 나왔다. 카피를 뜬 것이 분명한, 테두리에 검은 결이 가득한 종이는 구겨지고 다시 펴진 자국이 가득했다. 끝이 헤져 있는 서류들 속 문자 나열은 익숙했다. 아까 내 기분을 분탕질 친 그 보고서와 같았으니까.

첫 상담 때 선생님이 상담사랑 얘기하는 사이에 어떤 남자가 주고 갔다며 아이는 차분하게 말을 늘어 놓았다. 바닥에 흩어진 서류와 사진들을 주우려 허리를 숙이려는 것을 잡은 손을 끌어 올려 다시 눈을 마주하게 했다. 자세히 말해봐. 다그치듯 그렇게 말하자 아이는 내 눈을 맞추다가 얕게 한숨을 쉬었다. 일단 선생님 진정 되면. 그리고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내 볼 위를 문질렀다. 그 손이 목을 따라 내려와 목덜미를 간질이고 다시 가슴 위에 올라온다. 괜찮아, 나는, 이제. 그러니까 이제 나도 괜찮아질 거라는 것처럼 말하는 아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경계가 애매한 얼굴이 말하고 있었다. 전혀 괜찮지 않다고.

잡은 손을 끌어 품에 안았다. 나보다 작은 아이의 몸이 한 품에 들어왔다. 이렇게 여물지 않은 채로 너는 잘도 내 덩치 큰 절망을 품으려 했구나.


“아팠니?”


알고 싶었다. 지금의 나만큼 너도 그러 했는지.


“응, 아팠어.”


너에게만 보이는 내 눈물처럼 내 앞에서만큼은 네 까맣게 바래진 속을 보여줄 순 없는지.

잡혀진 손에 아플 만큼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아이는 끝끝내 울지 않았다. 바짝 끌어 안는 내 몸을 마주 안아오며 얕게 떨었을 뿐, 아프다고 말하는 아이의 목소리는 까슬했다. 무척이나 건조해서 갈라지고 부서질 것만 같았다.

 



피에타





8.

그렇게 서로의 상처를 맞대 듯 껴안고 있다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시간이 훌쩍 흐른 뒤였다. 어두운 방 안, 창으로부터 들어오는 해질녘의 볕이 아이의 금발에 반사되었다. 핏기 없는 피부와 색이 옅은 눈동자, 그리고 결 좋은 머리 결이 노을이 만드는 화려한 색에 물이 들었다. 눈이 부셨다. 열일곱의 바쿠고는 썩고 곪아가는 속과는 달리 그 외면만큼은 어느 누구보다도 싱그러워 보였다.


“어떻게 할까.”


문을 등지고 주저 앉아 나는 기어이 해답이 없는 질문을 던졌다. 색색거리는 얕은 숨을 쉬며 길이 잘 들인 고양이처럼 내 품에 안겨 있던 아이는 한참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손가락 끝으로 떨어진 서류 한 장을 잡아 들었다. 너덜너덜 구겨지고 끝이 찢긴 종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말도 안돼는 진실을 읽어 내려가다가 믿기지 않아서 몇 번을 읽고 또 읽다가 분에 못 이겨 기어이 구겨 버렸다가도 다시 냉정을 찾으려 애쓰며 한 장 한 장을 펴냈을 것이다. 첫 상담 때라면 몇 주나 지나간 일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서류를 감쪽같이 품에 숨겨 놓았는지, 아니 그렇게 자랑할 만한 관찰력을 가졌다면서 왜 나는 무지렁이처럼 모르고만 있었는지 스스로가 통탄 스러울 뿐이다. 그 동안 아이는 나를 매번 마주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속은 또 얼마나 망가져 갔을지 생각하니 가슴이 저민다.


“어떻게 할까가 아니야.”
“…그럼?”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야지.”


혼자서도 잘 하는 아이, 바쿠고 카츠키에 대한 어른들의 평가는 한결 같았다. 카미노의 밤, 빌런들 소굴 속에서도 홀로 냉정하게 머리를 굴려가며 잘 버텨주던 아이다. 어린애 특유의 약한 감정을 드러내며 미도리야와 한 바탕 일을 벌이긴 했지만 평소의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시간이 지날 수록 그런 약함을 보이는 일도 드물어졌다. 철이 들었다, 나 조차도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누군가가 밟고 지나간 자리를 따라가지 않고 스스로의 길을 찾아가는 아이. 그래서 더욱이 홀로였다. 미도리야를 이끌어주는 올마이트나 제가 품은 증오와는 별개로 아버지의 등을 쫓는 토도로키와 같이 아이들 모두 선망의 대상이 있고 길을 닦아주는 스승이 있었지만 아이에겐 그 누구도 없었다. 아이 역시도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듯 했다. 무관심의 사각지대, 아이는 그 곳에 있는 것을 당연히 생각했다. 모두가 그러했던 것처럼.

가슴팍을 밀어내는 팔은 단호했다.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은 마치 나와 아이 사이에 선을 긋는 듯한 뉘앙스처럼 들려왔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혼자 견뎌낼 테니 여기까지 하라는 듯. 멀어지려는 몸을 끌어 당겼다. 이거 놔. 메마른 목소리는 대번 냉정하게 바뀌었다. 떨어지는 손을 다시 그러쥐고 팔꿈치를 붙잡아 다시 몸을 끌어 당겼다. 아이는 몸부림을 쳤다. 옷을 잡아 당기고 어깨를 밀어내고 손톱을 세워 손등 위를 할퀴었다. 그럴수록 나는 집요하게 아이의 허리를 끌어 안고 손에 깍지를 끼워 내 팔 안에 그 애의 몸을 우겨 넣었다.


“알량한 동정심이야? 그래서 그래? 이제까지 관심도 없었으면서 졸지에 고아 신세가 되니까 불쌍한 맘이 좀 들었나 보지?!! 선생질에 어울려 준다고 지금까지 고분고분 따라줬더니 내가 우습지? 착각 하지마! 이건 내 일이고, 내가 알아서 할거야. 선생이 뭔데 이제 와서 참견질이야?!!”


제 힘으로 따라주지 않자 아이는 성을 내기 시작했다. 뱉어내는 말들이 죄다 비틀려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말들은 아무런 해가 되지 않았다. 밀치는 힘도 찢겨진 피부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직접적으로 가해지는 고통이 아니었다. 휘두른 주먹이 어깨뼈를 가격했을 때 치미는 신음을 참지 못하자 저조차 놀랐는지 멈칫하는 것을 보며 나는.


“혼자서 힘들었지.”


고독이 익숙해서 정말 오롯이 이 세상에 저 혼자가 되어버린 상황에서도 그 무거운 짐을 저 홀로 끌어 안고 있는 아이를 보고 있는 것이, 그게 더 아팠다.


“이제는 혼자 내버려 두지 않을 거니까...”
“...이거 놔, 제발.”
“혼자 아파하지 않아도 되니까.”
“...”
“제발 밀어내지만 말아주라.”


곁에 있어 줄게, 라는 말 만큼 책임감 없는 말이 또 있을까. 드라마에 나왔던 대사를 읊으며 감동하던 카야마를 향해 그렇게 빈정거렸었다. 핏줄 하나 이어져 있지 않은 얄팍한 관계가 제 아무리 사랑으로 이루어 있다 한들 쉽게 변하는 게 사람 마음이라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다. 대게 모든 일에 염세적이었던 그때의 내가 할 법한 생각이었다. 그랬던 내가 아이를 붙잡고 빌고 있었다. 곁에 있게 해달라며 어린 몸을 잡고 매달렸다. 제발 너로 하여금 나를 떼어내지 말아달라고.

아이의 몸부림이 잦아 들었다. 섹섹 쉬는 숨이 거칠었다. 분한 걸까. 선생이란 작자가 부리는 고집이, 아니면 개성도 쓰지 못하고 잡혀 있는 자신이, 그게 아니라면 납득할 수 없는 사실을 수긍해야만 하는 우리가. 고요한 방 안에 꼬리의 꼬리를 무는 물음들이 머리를 어지럽히다가 그런 게 이제 무슨 소용인가 싶어 지워 버리기를 수십 번. 그 동안 품 안의 아이는 진정된 듯 얕은 숨을 고르고 있었다. 힘 없이 축 늘어진 몸은 아까의 긴장을 지우고 내 안에 오롯이 기대어 있었다.


“선생님이니까, 그래서 그래?”


기운 빠진 목소리로 아이가 묻는다. 그렇다, 라고 말할 수 없어서 나는 답을 미뤘고.

차라리 아이의 말 따마 알량한 동정심이라고 해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선생이라는 직책이 가지고 있는 책임감이라면 이 범주는 이미 그것을 넘어선지 오래다. 아무리 좋은 선생이라고 한들 한 아이를 향해 집중된 관심은 합리성과 거리가 멀었다. 내 책임 아래 놓인 아이들이 수십이다. 지금의 A반을 포함하여 나를 거쳐간 아이들, 거기에 에리까지. 그 아이들 모두에게 각자의 사연이 있고 아픔이 있다는 걸 고려 했을 때 단연 아이의 삶이 비참하게 바닥을 긴다 한들 눈길을 더 주는 것은 선생으로서 공정치 못한 처사였다.


“그런 거 아냐.”
“...그럼 뭔데.”
“그냥 내가 그러고 싶어서.”


이것은 내가 아니다. 내가 바라보는 선생의 상이 아니었다. 책임감, 죄책감, 동정, 연민, 어떠한 이유를 대어봐도 납득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러니까 이건 나, 아이자와 쇼타가 한 인간으로서의 독단적인 결정이었다. 내가 원해서, 그렇기에 아이의 곁에 있고 싶은 것.


“우리 도망갈까.”


나를 나로 있을 수 없게 하는 꺼림칙한 것들이 가슴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 나를 울게 하고 웃게 하고 절망하게 했다. 오만하게 내 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에 더욱 입에 담을 수 없어서, 그래서 비겁하게 도망치기로 했다.





 
9.

“데쿠는?”
“그 애야 잘 하고 있잖아. 올마이트가 특별히 도움을 많이 주는 것 같으니까 내가 더 나설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 세뇌는?”
“신소. 이름 정도는 외워 두지 그러냐. 매 주 두 번씩 개별 수업 하는 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리고 너도 참가 해야해.”
“아, 왜!”
“기록원. 잘하던데 뭐. 덕분에 효율도 좋고.”
“억지로 감투 씌운다고 따라줄 줄 아나. 그럼...”
“...우리 반 애들 이름 다 말해야 끝낼 거냐?”


산행을 하는 내내 아이는 작정하고 날 괴롭히기로 한 모양이었다. 어제 도망가자고 했던 내 말이 꽤나 어이가 없었는지 벙 찐 얼굴로 무슨 미친 소리를 하냐는 듯 날 보았었다. 기숙사 들어오기 전에 살았던 아파트 해약 안 했다며 짐이 적어서 그럭저럭 다 들어가겠다는 말을 꺼내고 나서야 진심이라는 걸 알았는지 제정신이냐며 펄쩍 날뛰었다. 갑자기 울 때부터 이상 했다며 어디 머리라도 다친 거 아니냐는 둥 내일 상담소 가면 내가 상담을 받아야겠다는 둥의 말을 쏟아냈다. 말의 빠르기로 봐서는 날 회유하기 위한다기보단 당황스러움 쪽에 가까웠다. 난 결정 했으니까 그런 걸로. 어차피 너도 기숙사 나가서 살 집 알아본다고 했었잖아. 너 미성년자라 아직 보호자가 있는 편이 좋아. 단호하게 말을 매듭짓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싹 닫는다. 그리고는 한 참이 말이 없는게 고민을 하는 건지 거절할 말을 고르는 건지. 차마 싫다, 라는 말을 면전에서 듣고 싶지 않아 잘 자고 내일 보자는 인사를 남긴 뒤 꽁무니를 뺐다.

그리고 마주한 아침, 침착한 표정으로 차에 올라탄 아이는 가타부타 어제 했던 내 권유에 대한 말이 없었다. 밤새 잠을 설친 까실한 얼굴을 하고 날이 좋네, 라며 의미 없는 날씨 얘기를 할 뿐이었다. 그냥 못들은 척 하기로 했나 해서 다시 한 번 확실히 말하는 편이 좋을까 고민했는데 상담이 끝나고 등산을 가자 마자 나랑 나가면 그럼 걔는 어떻게 하려고? 라는 시작으로 아이들 이름을 마구잡이로 불러 대기 시작했다. 예상 했던 질문은 아니었지만 아주 고민하지 않았던 부분은 아니었기에 차근차근 답을 해주다 보니 어느새 산 중턱이다. 영 끝날 기미도 안 보이고, 그 정도도 생각 못하고 무턱대고 일을 저지를 정도로 내가 그렇게 못미더워 보이나 싶어 그만 하자는 식으로 묻자 아이는 걷던 발을 멈추고 나를 본다. 돌아보는 얼굴이 꽤 진지했다. 나름 고민해서 하는 말일 텐데 실수했구나 싶어 얌전히 입을 닫았다.


“어중간하게 개새끼 줍듯이 이러는 거면 사양이야. 선생이 책임져야 할 사람이 한두 명도 아닌데 거기에 괜히 훼방 놓고 싶지도 않고.”
“그 정도 생각 못하고 아무렇게나 한 말은 아니야. 훼방이라고 폄하할 정도로 널 짐 떠안 듯 짊어 진다고 생각한 적 없어. 너랑 같이 산다고 해서 학교 일에 차질이 생기지는 않아.”


내가 하는 말의 무게가 비단 가볍게 느껴지지마는 않았을 테지. 성격을 보건 데 내 의도가 뭔지, 내 제안을 받아 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자서 머리 싸매고 밤새 고민을 했을 게다. 그래도 답이 나오지 않자 작정하고 떠보기로 했을 거고. 여차하면 핑계 삼아 거절할 생각으로. 그런 아이 속을 모르지 않지마는 나 역시도 내가 한 말의 책임을 짓기 위해 밤잠을 설쳐가며 이런저런 대책을 세웠다. 출퇴근 시간으로 축소될 보충 학습 일정을 수정하고 교과과정 스케줄에 따른 아이들 개개인의 커리큘럼도 다시 한 번 훑어 보았다. 무거운 감정을 등에 이고 있는 내 남아있는 이성은 ‘도망친다.’라는 선택지를 골랐다고 해서 다른 아이들에 대한 의무와 교사로서의 직무를 져버릴 정도로 무책임하지는 않았다.


“...학교 야간 순찰은?”
“그건 순번 정해져 있으니까 그 때만 기숙사에서 자야지.”
“비상일 때도 있잖아.”
“집이 학교에서 멀지도 않고 비상 호출 울리면 바로 갈 수 있어.”
“그 꼬맹이가 폭주라도 하면?”
“에리를 말하는 거냐? 카야마, 아니 미드나이트가 돌볼 거다. 여차하면 폭주 전에 재울 수도 있고 지금은 개성 컨트롤이 많이 나아져서 그럴 일도 없어.”
“나보단 걜 돕는 게 낫지 않겠어? 아직 어리잖아.”
“누구를 선택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잖아. 학교에 있는 이상 아이를 보는 일은 내 일이고 내 힘이 닿는 만큼 도울 거니까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바뀌는 건 아무 것도 없어. 물리적 거리가 조금 멀어졌다 뿐이지 말했다시피 집이 먼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기숙사를 나가겠다는 건 내 결정이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는 알겠는데 하던 일에 대한 책임 전가를 할 생각은 없어. 그걸로 널 불편하게 만들 일도 없을 테니까 그냥... 조금만 날 믿어줬으면 좋겠는데.”


아이는 아랫입술을 삐죽거렸다. 내가 내놓는 반증들에 대해서 좀처럼 반박할 수 있는 틈을 찾지 못한 듯 보였다. 이제 궁금한 건 다 물었냐고 묻자 아이는 뭐 믿음직스러워야지, 라며 작게 투덜거렸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산 아래 전경을 본다.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주변에 가득했다. 바람을 타는 머리카락이 밀리고 아이의 곧은 옆모습이 드러났다. 표정 없이 담담한 얼굴이 어쩐지 착잡해 보이는 듯 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는지 한참 말이 없다가 조금 머뭇거리며 꽤나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보호자는 싫어. 무슨 애완동물 마냥 얹혀 사는 것도 아니고...”
“그럼?”
“동거인으로 해.”


집세 꼬박꼬박 낼 테니까. 그렇게 덧붙이고는 등을 돌려 다시 걷던 길을 걷는다. 거절당하면 어떻게 설득을 해야하나 조렸던 마음이 풀리자 저도 모르게 한숨이 크게 나왔다. 동거인이라. 애초에 집세 받을 생각은 없었지만 도움을 받는 다고 할지라도 동등한 위치에서 있고 싶은 속을 모르지 않아 그렇게 하자고 답했다. 애초에 교사라는 직권 하에 결정한 것도 아니니 그 편이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이는 강인했다. 혼자서 고민하고 결론을 내리고 그 길을 스스로 밟을 수 있을 정도로. 그런 네 곁에 서려면 나도 분발해야겠네, 언제까지고 현실이 주는 절망에 젖어있을 수 없다고 홀로 반성을 하며 앞에서 걷는 아이의 등 뒤를 바짝 쫓았다.


“참, 가끔 집에 에리 올 수도 있다. 너 육아는 좀 하지?”
“아, 씨발 진짜 요즘 툭하면 나한테 다 떠넘기고 난리야! 알아서 해!!!!”


바락 성내는 목소리가 산울림을 따라 왕왕 퍼졌다. 이제야 좀 아이답다 싶어서 씨발은 빼라, 라며 핀잔을 주면서도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지 못했다.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뱃속에서 똬리를 틀고 숨죽이고 있는 이기적인 감정의 크기를 억누르기 위해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했다. 밤새 고민했던 것은 비단 업무에 대한 것만은 아니었다. 자각하기 시작한 마음의 크기는 내가 모르는 새에 배를 불린 채 무겁게 가슴 안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 모양새가 사치스러워서, 그래서 부끄러웠다. 그래서 외면하기로 했다. 새는 댐을 손가락으로 막는 것만큼 무의미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미 절망의 길을 걷고 있는 아이에게 걸림돌 밖에 되지 않을 내 감정을 얹어주고 싶지 않아서 지워 버리기로 했다. 아이가 물었다. 괜찮아? 그래서 답했다. 괜찮아. 울렁거리는 뱃속을 스스로 찢어 발기며 웃었다. 나는 괜찮다고.





 
9.

종이 한 가득 방대한 리스트가 내 책상 위로 올라왔다. 필요한 것들이니까 추가 하고 싶은 거 있으면 적어 놔. 등산 후 내 아파트를 보러 간 아이는 살풍경한 집안 꼴에 혀를 찼었다. 티브이와 쇼파, 잠을 잘 매트리스가 가구의 전부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애초에 잠잘 때를 제외하면 집에 갈 일이 없어 효율적인 것들만 들여 놓았던 탓이다. 이걸 어떻게 집이라고 불러.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은 부엌 찬장 서랍을 열며 아이는 그렇게 말했다. 역시 쇼핑 해야겠지? 라고 묻는 말에 그걸 말이라고 하냐며 기어이 성을 내고 말았고.

기숙사를 나가는 절차는 의외로 깔끔했다. 교장은 군말없이 승인을 내주었다. 유일하게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이니 내 고집을 꺾지 못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보는 눈들이 많아 질 거야. 에둘러 하는 말 속에 공안에서 주시하고 있다는 걸 염두 해 두라는 뜻임을 모르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보고서를 올린 지 세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공안측에서 연락이 왔다. 갑자기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조금 짜증 섞인 공안국 직원의 말에 나는 제법 뻔뻔스럽게 답했다. 전학이 문제라고 했지 기숙사를 나가는 것에 대한 지침은 없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나는 머릿속에 그려 놓은 시나리오 대로 이런 저런 이유를 붙여 제법 그럴싸한 변명거리를 늘어 놓았다. 집은 학교와 가까운 곳이며 동시에 상담소와 멀지 않아 이동에 용이하다는 것과 출 퇴근시 아이와 함께 동행할 테니 따로 길을 새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 무엇보다 같이 사는 편이 개인적으로 관리하기 용이하다는 것을 설명했다.


“그래 봤자 개성도 쓰지 못하는 어린애 입니다. 감시 감독엔 어려움이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 주시길.”


그렇게 말하자 공안국 직원은 납득하는 듯 이 보고는 소장에게 올라갈 것이며 별달리 문제되지 않는다면 따로 연락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또한 혹여 차후 이와 관련되 예기치 못할 ‘사고’가 생긴다면 그 때는 공안국 관리 하에 정해진 지침을 따라줘야 한다는 말을 단호하게 남겼다. 끊어진 전화기 위로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누가 순순히 그 뜻에 따라줄 줄 알고.

이사 날짜는 학업 스케줄을 고려해 오는 토요일로 정해졌다. 그리고 츠카우치 형사로부터 연락이 온 것은 그 후로부터 한 달이 흐른 뒤였다.





10.

애초에 남자 둘이 사용할 수 있을 만큼 큰 집은 아니었다. 침실 용으로 딸려 있는 방 한 칸과 부엌과 일체형으로 되어있는 거실, 작은 발코니가 다였다. 인테리어는 오롯이 아이의 몫이 되었다. 워낙 이쪽에 눈이 어두운 나였기에 꽤나 합리적인 선에서 집 기구를 고르는 아이의 의견에 대게 따라주었다. 유일하게 합의가 어려웠던 것은 침실이었다. 집주인이 안방을 쓰는게 맞다며 쇼파에서 생활하겠다는 아이의 주장과 집세도 똑같이 내면서 누가 집주인이니 마니 하는 건 어불성설이라며 싱글 침대 두 개를 넣어도 모자랄 것 없이 큰 방이니 둘이 쓰는 게 옳다는 내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결국 이 공방전에서 이긴 것은 나였다. 힘으로라도 묶어서 방 안에 집어 넣는 수가 있다며 억지를 부리자 결국 아이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며 싱글 침대 두 개를 결제했다. 도망치자라는 말로 기숙사까지 나와버렸으니 기어이 내가 그러고도 남을 거란 걸 이젠 아는 모양이었다.

아이나 나나 가지고 있는 짐이 적었다. 두 사람 분의 짐이었지만 차를 두 번 오가자 끝날 정도로 적은 양이었다. 나야 효율성을 생각해 애초에 소지품을 만들지 않으니 당연하겠지만 아이는 그 나이 대 아이들을 생각하면 이상할 정도로 짐 가짓수가 적었다. 옷가지 몇 개와 잘 개어 놓은 교복, 생필품들과 필수 교과 과정의 교과서들과 이와 상관 없는 책들, 그리고 제 부모가 담긴 하얀 단지가 아이가 가져온 물건의 전부였다. 그 어느 곳에서도 아이의 히어로 활동복이나 이에 연관된 교과서 같은 것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부러 이에 대해 언급하진 않았다. 게임기 같은 것도 없냐, 라며 농담 삼아 묻자 아이는 제 옷가지를 서랍에 넣으며 무감각하게 답했다. 다 버렸어, 라고.

이사 첫 날 우리는 거실 한 구석에 아이의 부모를 모실 수 있는 작은 사당을 만들었다. 향 꽂이에 향을 올리고 나란히 합장을 했다. 나는 결국 해야할 말을 찾지 못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라고 해야할까 사죄를 먼저 해야할까 하다가 죄송하다는 말만 짧게 남겼다. 아이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지 꽤 긴 합장을 했다. 이후 아이가 만든 찬가지 몇 개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부엌에서 누군가가 요리를 하는 모양이 아직은 어색하기만 했다. 아이가 만든 식사는 훌륭했다. 간이 적절하게 베인 음식들은 그리운 집 밥을 떠올리게 했다. 생각해보니 집에서 제대로 식사를 한 게 얼마만인지 까마득했다. 설거지를 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다가 기분이 묘해져 생각을 털어버렸다. 이런 식으로 하나 하나에 의미 부여를 하는 건 아무래도 좋지 않았다.

그렇게 일상은 평온하게 흘러갔다. 생각보다 빠르게 나와 아이는 이 어색할 줄 알았던 동거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제법 부지런한 아이가 저혈압이라 아침마다 죽을 쓰는 나를 깨우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아이의 입맛에 따라 간단하게 서양식으로 차려 놓은 아침을 먹고 함께 출근길에 나선다. 학교에 도착하면 각자의 스케줄을 소화한다. 나는 A반의 수업을 진행했고, 아이는 필수 교과 과정을 제외한 나머지 수업 시간을 주로 일반과 경영 수업을 듣는 것으로 보충했다. 방과후 특별 보충 수업이나 잔업 서류를 정리하는 나를 기다리며 아이는 과제를 하거나 내 일을 돕거나 하는 식으로 시간을 보냈다. 퇴근 후 간혹 같이 장을 보기도 했다. 꼼꼼하게 필요한 만큼의 식재료를 고르는 아이의 손은 살림을 오래 한 사람처럼 야무졌다. 아무래도 어머니의 영향이겠거니 싶었다. 아이가 저녁식사를 준비하면 나는 남은 잔업을 했고 같이 식사를 했다. 설거지와 청소는 내 담당이었지만 간혹 일이 많으면 아이가 도맡는 일도 더러 있었다. 식사 후 나는 남은 일을 처리했고 아이는 독서를 했다. 정치, 경제, 역사, 문학과 비문학까지 아이가 읽는 책의 범위는 방대했다. 요즘은 주식에 관심이 생겼는지 관련된 책이나 주식시장을 훑어보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투자라도 하는 걸까 했지만 미성년자라는 제약도 있고 딱히 그런 눈치도 아니었다. 같이 티브이를 보는 날도 있었다. 주로 뉴스였고 간혹 시답지 않은 쇼프로를 보기도 했다. 제법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아이가 먼저 잠자리에 들면 나는 하던 일을 마무리 하고 조금 나중에서야 잠을 잤다. 좋은 아침, 부터 잘 자, 라는 인사를 나눌 때까지 우리는 다른 듯 같은 몸인 것처럼 붙어 다녔다. 그게 어색하다가도 익숙해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공안에서 명령한 아이의 상담은 계속 진행되었다. 실상 이를 그만두기엔 적당한 명분이 없었다. 이사 이후로 당장 공안의 심기를 거슬려 지금의 통제된 평화를 어지르고 싶지 않았다. 일주일에 두, 세 번씩 한, 두 명 정도의 미행이 따라 붙었다. 공안 직원이 말했던 ‘예기치 못할 사고’를 염두 해 두는 듯 했다. 특별히 접촉을 하는 일이 없어 일단은 내버려 두기로 했다. 어차피 딱히 트집 잡힐 만한 부분은 없으니 좋게 보고가 올라간다면 감시도 줄어들 거라는 판단이었다. 그에 대한 반증으로 상담 횟수가 줄어들었다. 월요일과 목요일 두 차례로. 트라우마를 많이 극복한 듯 보인다는 상담의의 말은 흘겨 들었다. 공안에서 지정한 상담소라는 것을 고려했을 때 아이의 심리 상태에 대한 보고는 공안 쪽으로 넘어갈 것임은 분명했다. 게다가 아이가 서류봉투를 받은 곳이 여기라는 것을 고려했을 때 상담소를 백프로 신뢰할 수는 없었다.

아이는 이런 상황을 알고 있는 듯 했지만 부러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감각이 예민하고 눈치가 빠른 편이니 모르는 게 더 이상할 터다. 미행이 붙건 안 붙건 아이는 평이하게 하루를 보냈다. 인식하지 않은 것처럼 부자연스러움 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관심이 없는 건지 아니면 모른 척 하는 편이 좋다고 판단했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와 별개로 나와 아이 사이에는 나누는 시간에 비례해 많은 대화가 오갔다. 보통은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한 넋두리였다. 아이는 오늘 배운 것들이나 슈퍼에서 세일하는 품목으로 내일 만들 찬거리, 지금 읽고 있는 책 같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 했고 나는 토시노리 상이 엉망으로 작성한 서류를 보충해야하는 불만들과 길목에서 보았던 고양이, 먹고 싶은 음식 같은 것들을 말하곤 했다. 하지만 역시 거기 어디에도 히어로에 대한 건 없었다. A반 아이들의 직업 체험에 대해서 무심결에 이야기 한 적이 있지만 아이는 별 반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티브이를 보면 어느 채널에서 건 히어로들을 볼 수 있었지만 나와 아이는 그저 시답지 않은 대화들을 나누었을 뿐이었다. CM에서 나오는 제품에 대해서 라든가 배경으로 나오는 지역에 가면 좋을 것 같다는 무의미한 말들. 아이가 히어로에 대한 반응을 보인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평화롭네.”


어느 평소와 다르지 않은 하루, A그룹이 운영하는 히어로 육성 제단 출신의 모 히어로가 공로 표창을 받았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우리 모두 함께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 봅시다! A그룹의 총수 츠지이 카즈마사가 스크린 너머로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그러게.”


나도 그렇게 수긍했다. 지난 일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냥 세상은 그렇게 평화로웠다. 익숙해지는 우리의 일상처럼 시간은 무심하게 모든 것을 지워가는 듯 했다. 그 날 아이는 잠드는 순간까지 입을 닫았다. 잘 자라는 인사 조차 없었다.




 
11.

“봉사활동?”


갑자기 할 말이 있다며 쉬는 시간에 교무실로 찾아 왔다 했더니 아이는 뜬금 없는 서류를 건넸다. 성 마리아 고아원에서 나온 봉사활동 프로그램에 대해 적혀 있는 선전물과 아이의 이름이 들어간 지원서 였다. 그간 아이의 행적을 볼 때 봉사에 관심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고 뭘 하겠다고 나선 건 요 근래 처음이라 조금 놀란 것은 사실이었다.


“애들 직장 체험 나갈 때마다 청강이나 자습 하는 것도 지겨웠는데 때마침 인터넷에 올라와 있길래. 기왕 시간 뺏는 거면 좋은 일 하는 편이 낫고 나중에 취직 할 때도 가산점 붙는 걸로 알고 있어.”
“갑작스럽긴 하네. 좋은 의도인 건 알겠는데 미리 언질이라도 줬으면 좋았잖냐.”
“안 그래도 말하려고 했는데 요즘 바빴잖아, 선생님.”


요즘 애들 인턴 기간이라 이래저래 처리할 서류로 바빴던 것은 사실이었다. 각 회사로부터 받은 제안서를 분류해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돌아오는 활동 보고서를 읽은 후 정리해서 평가서를 작성해야 하는 등의 복잡한 일 처리가 한가득이었다. 덕분에 집안일도 죄다 미뤄버린 건 둘째치고 대화를 나눌 시간도 없었으니 근래 아이에게 관심을 덜 둔 것은 내 불찰 임이 분명했다.

그런 와중에 자기 할 바를 정해서 말해주는 아이가 기특하긴 했지만 덥썩 좋다고 하자니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봉사활동을 직업체험 카테고리에 넣어 커리큘럼을 진행시키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었다. 문제는 공안의 시선이었다. 아무리 미행이 잦아들었다고 해도 그 쪽에서 아이의 개별 활동에 사람을 붙이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애초에 단순 봉사활동이니 책 잡힐 만한 것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마냥 안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아이의 모든 활동을 내가 직접 꽁무니를 쫓아 다니 자니 효율성이 떨어졌다. 그럴 시간도 없었고. 이러니 저러니 해도 믿음직한 아이니 하고 싶은 걸 하게 내버려 두고 싶은 마음과 아이를 물가에 내어 놓은 것 마냥 불안해 내 시선 닿는 곳에 놓고 싶은 사심이 뒤죽박죽 엉켰다. 


“무슨 생각 하는 지 알아.”
“...이젠 독심술도 하냐.”
“진짜, 아, 농담 하지 말고. 지난 번 상담 때 상담의한테 진단서 받았어. 뭘 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긍정적인 반응이라면서 추천서도 써주던데.”
“그건 또 언제... 아니다. 미안하네, 이런 건 선생님인 내가 처리해야 하는 건데.”
“아니 뭐 나도 인터넷 뒤지다 우연히 본 거라 갑자기 정한 감도 있어. 그리고... 그 쪽은 걱정 하지 마. 알아서 행동 조심할 테니까.”


그 쪽, 이라하면 공안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한 숨이 나왔다. 역시 알고 있었구나. 알 거라고 생각 했지만 막상 직접적으로 아이 입으로 듣고 나니 착잡해 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상담의의 추천서를 받은 것으로 봐선 그 쪽도 공안이랑 연결 되어 있다는 것을 짐작했을 것이다. 아이의 일 처리는 반박할 만한 구석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표면상으로는 문제될 부분이 전혀 없었고 학교측에서 고아원에 제안서만 보내 승인만 받으면 끝나는 일이다. 그래서 불안했다. 서류봉투를 감쪽 같이 숨겨 놓은 이후로 아이가 제 감정을 절제하는 법을 배운 만큼 감추는 것도 능숙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더 그랬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그 꿍꿍이 속을 말해달라 한들 입을 열지 않을게 뻔했다.

제안서 보내고 확인되는 대로 알려주겠다는 말로 아이를 돌려보내고 인터넷을 뒤져 성 마리아 고아원에 대해 알아보았다. 주로 빌런들에 의해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 가는 곳이라고 알려진 곳으로 몇몇 히어로들이 그 출신이라며 대게 긍정적인 반응의 기사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성 마리아 고아원? 거긴 갑자기 왜 찾아?”


갑자기 끼어든 카야마가 켜진 화면을 보고 묻는다. 나보다 사회면에서 더 많이 아는 편이니 도움이 될까 싶어 아이가 지원하는 봉사활동 프로그램에 대해 털어 놓았다. 바쿠고가 봉사활동을? 의외네~ 하면서도 아이의 상황에 대해 떠올렸는지 어쨌든 좋은 일이잖아! 하면서 꽤나 긍정적으로 평가를 했다.


“그래서 아는 건 있어?”
“뭐? 아, 성 마리아 고아원? 알지. 내 예전 사이드 킥 중 몇 명도 그쪽 출신이었는 걸. 얼마 전에도 뉴스에 나왔었는데 A그룹 히어로 양성 제단에 대해서 들어 봤어?”
“아, 그 공로 표창...”
“맞아. 고아들이나 가정 형편 때문에 힘든 아이들을 육성하는 프로그램이야. 시작한지는 좀 됐는데 아무래도 애들 자라는 속도가 있다 보니 이제서야 조명을 받는 것 같더라고. 덕분에 A그룹 주가가 엄청 올랐지, 아마? 여튼 성 마리아 고아원이랑 그 제단이랑 연계되어 있어. 그곳에 온 고아들 중에 능력 있는 아이들을 제단에서 관리하고 지원한다고 들었어.”
“그럼 그쪽도 결과적으로 히어로 관련 사업인 샘이네.”
“그렇지. 뭐, 공공사업 개념이라 나라에서 지원 나오는 것도 있고 주로 기부되는 자금으로 운영 된다나봐. 물론 기부금의 대부분은 그룹 총수로부터 나오겠지만.”


인터넷 뉴스 기사 안에 성 마리아 고아원에서 찍힌 A그룹 총수 츠지이 카즈마사의 사진이 보였다. 대기업 A그룹을 통솔하는 거물급 재벌이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아이들 사이에 서있는 것은 표면상으로는 꽤 그럴싸해 보였다. 괜한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건 재벌 총수가 하는 선행이라는 괴리감 때문인지 아무리 급하게 한 결정이라고 해도 이 모든 걸 알고 있을 아이의 속내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히어로 쪽 일은 아주 손에서 놓은 줄 알았는데, 판단 미스였을까. 자신이 버린 꿈을 대신해 후진 육성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을 순수하게 돕고 싶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앞뒤가 맞지 않았다. 아이가 겪은 트라우마를 생각한다면 더욱이 이런 사업과 관련된 일에 봉사활동을 나갈 이유가 없었다. 고아원이라면 성 마리아가 아니더라도 히어로 사업과 관련 없는 곳은 많았다. 왜 구지 공안의 감시가 느슨해지는 차에 명분까지 만들어가며 이 고아원을 선택한 걸까. 주시하는 눈이 있음에도 일을 만드는 이유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을 것이다.

이도 아니라면 내가 그저 혼자 상황을 과장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좋잖아, 모처럼 그 애가 나서서 좋은 일을 한다는데. 카야마가 속 좋은 소리를 하며 등을 두드렸다. 그래, 봉사활동 좋지. 라고 답하면서도 속은 시꺼멓게 타 들어간다. 역시 조금 더 조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 불안감이 그저 기우이길 바라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12.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츠카우치 형사는 반듯하게 생긴 외형만큼 유려한 매너를 가진 사람이었다.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 그는 내 젖어가는 옷깃을 보고 제 우산을 선뜻 내밀었다. 아닙니다, 젖는 건 익숙해서요, 라고 호의를 물리자 괜찮겠냐며 다시 한 번 물어왔다.


“비를 좋아하시나 봅니다.”
“구지 말하면 그 반대 입니다. 싫은 기억들을 불러와 서요.”
“그런가요? 제가 괜한 말을 했군요.”
“아닙니다. 그것보다 상황은...”


반파된 차량에서 시꺼먼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연소된 차량은 검게 타 들어가 있었고 폴리스 라인을 친 안 쪽에선 경관들이 서둘러 사건 검증을 하는 듯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래도 비가 와서 다행이네요, 라는 말에 츠카우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근방 인적이 드문 데다가 CCTV가 없어서 추측이 힘들지만 차에 있는 술병들을 보건대 음주운전 인 것 같습니다.”
“단순 음주 운전이라면 제 지원은 필요 없을 텐데요.”
“어디까지나 가설입니다. 듣기로는 이 구역을 잘 아신다고요. 혹여나 빌런의 소행 일지도 모른다는 걸 항상 염두 해 둬야하니 현장 검증 때 히어로 지원을 받는 편이 저희 쪽에서도 편해서요.”
“그것 참 합리적이네요.”


말이 조금 빈정거리듯이 나가고 말았다. 방과 후 갑자기 받은 지원 요청으로 아이의 하교를 야마다에게 맡기고 달려왔다. 요 근래 큰 일이 없어 지원 명령이 떨어진 적이 없었다. 요청이 온 쪽이 츠카우치 형사이니만큼 큰 일이겠 거니 지레짐작을 하고 하던 일을 뒷전으로 한 채 뛰어 왔는데 단순 사고라는 말에 힘이 빠졌다. 가뜩이나 아이 일로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어 평소라면 그냥 넘어갈 일인데도 괜히 짜증이 났다. 이럴 시간에 아이랑 시간을 보내는 편이 훨씬 더 효율적일 거라는 생각을 지워낼 수가 없었다.

내 저조한 기분을 눈치 챘는지 형사는 바쁜 시간을 빼앗아서 미안하다며 사과를 했다. 애초에 그의 잘못도 아닌데다가 괜히 심보를 부리는 것 같아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현장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피해자 신분은 확인 됐습니까?”
“아니요. 보시다시피 너무 다 타버려서 말입니다.”


까맣게 탄 차체의 번호판은 일그러져 읽을 수가 없었다. 조사원이 차량에서 시트에 늘러 붙은 시체의 사진을 찍었다. 잿더미처럼 검은 육신은 아이의 부모를 떠올리게 했다. 속이 좋지 않았다.


“감식반에서 치아 확인이 될 때까지는 기다려 봐야겠네요.”
“안 그래도 지금 요청 중입니다.”
형사는 빠르게 핸드폰으로 타이핑을 치며 답했다. 무성의한 모습에 도대체 왜 지원 요청을 한 건지 화가 나려는 차에 그가 손에 쥔 핸드폰 화면을 내게 보인다.
“이 정도면 합리적일까요? 요즘 사내에서 상사가 부하직원을 부리는 방법에 대해 말들이 많아서요. 말투도 괜히 조심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네요.”


[경관 중 차량 오른쪽 남자와 차량 뒤 쪽 감식반 조사원은 공안조사청 출신입니다. 최근 미행이 붙은 사람들을 기억한다면 낯이 익을 겁니다.]


“...그렇군요. 몰랐습니다.”
“하하, 경찰 내부 일이니 모르는 게 당연하지요.”


핸드폰을 물리며 형사는 너스레를 떨었다. 경찰청 자체가 공안 소속이니 미행원이 그 중 섞여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았다. 의문인 것은 츠카우치 형사의 의도였다. 생각해보면 그로부터 지원 요청을 받을 때부터 이상하긴 했다. 올마이트와 더 가까운 사이인 형사는 나와 그다지 접점이 있진 않았다. 기껏 마주해봐야 히어로 회의장에서나 아니면 학교와 관련된 사건에서 시정 청취를 할 때 정도였다. 그런 그가 사적으로 나를 도와주기 위해 지원 요청이라는 핑계를 들어 내게 정보를 넘긴다는 건 어디까지나 수상하게 여길 수 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형사도 내 이런 생각을 아는지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하면서 수첩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하는 말보다 빠르게 펜으로 글씨를 적기 시작했다.


“혹시 이 근방에서 빌런 출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습니까?”


[B쇼핑몰 폭발 사고와 관련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습니까?]


“아는 바는 별로 없습니다만...”
“보시기에 눈 여겨 볼만한 흔적은 없습니까? 불이나 폭발 관련 개성을 가진 빌런이라든지요.”


[사고를 덮은 건 공안조사청 국장의 지시. 이와다 켄지. 현재 차기 국무총리 후보로 거론 중.]


“아뇨. 특별한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만, 확실히 빌런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냥 확실히 해두자 싶어서 여쭤보는 겁니다. 정보 공유 차원에서요.”


[도지사와 같은 지역 출신 선후배 관계.]


하하, 하고 웃으며 형사는 아닌 게 확실하다면 괜한 일로 시간을 잡아 먹게 했다며 습관적으로 사과를 했다. 수첩을 접어 품 안에 넣은 그는 대신 작은 종이 하나를 꺼내 들었다. 건네지는 명함에는 그의 이름 대신 리타, 라는 이름과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명함 한 쪽에 달려있는 로고는 익숙했다. C신문사. 사설 신문사로 공안의 영향을 덜 받지만 폭로성 기사를 주로 많이 다루기 때문에 세간으로부터는 이를 신봉하는 사람들과 쓸데 없는 가십거리로 관심을 받으려 애를 쓴다는 사람들 반반이 섞여 속히 말하는 타블로이지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취급을 받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따금 큰 건을 물어 터뜨리는 경우도 더러 있어 신뢰성이 아주 떨어지는 곳은 아니었다.

왜 형사가 사설 신문사 기자의 연락처를 뜬금 없이 건네는 걸까? 분명한 것은 리타라는 기자가 형사 본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경찰 공무원 규칙상 기자를 겸업하고 있진 않을 테니 아마도 친분이 있는 타인의 명함일 것이다. 기자가 소속된 신문사를 보건대 아마도 그의 정보원일 확률이 컸다. 하지만 이걸 왜 나에게, 라는 의구심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섣불리 물을 수도 없었다. ‘보는 눈’이 있다는 걸 의식하는 듯 그는 제 개인 번호 입니다, 라며 강조하듯 덧붙였다. 지금 당장은 내가 의문을 가진다고 해서 답을 해주기는 어렵다는 의사였다.


“조사가 끝나는 대로 연락 한 번 드리겠습니다. 빌런 관련이건 아니건 어쨌든 지원을 받으셨으니 궁금해 하실 것 같아서요.”
“상관은 없습니다만, 이런 건 토시노리상에게 부탁해도 될 텐데요. 아니면 다른 히어로라든지. 여기 근방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이래저래 요즘 신경을 못쓰기도 했고요.”
“아시다시피 그 사람들 워낙 바쁘니까요. 너무 눈에 띄기도 하고.”


외부에 큰 일처럼 보여져서 좋을 건 없으니까요, 라며 그는 부산스러운 사건 현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공안조사청 파견 직원들의 용태를 살피는 듯 하더니 그들이 딱히 신경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낮은 목소리가 빗소리에 묻혀 들릴 듯 말듯 흐렸다.


“흐르는 정보가 워낙 많아 신뢰할만한 사람을 찾기는 영 힘이 드네요.”
“...제가 그 기대에 뒷받침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레이저에게는 명분이 있지 않습니까.”


뭔가를 안다는 듯이 형사는 그렇게 답했다. 불연 듯 아이의 얼굴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대외적으로 학교 사정에 대해 들어 왔을 테고 이쪽에 대해 조사했다면 내가 그만큼 아이에게 신경 쓴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더욱이 미행이 붙은 것까지 안다면 동거를 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선생으로서 제자에게 깊이 신경 쓴다고 생각했겠지. 괜히 속이 찔리는 것을 모른 척 도움이 된다면 언제든 불러 달라며 겉치레 비슷한 인사를 했다. 상대도 아는지 그럴듯한 미소를 띄며 감사하다는 인사로 답을 했다.


“지금 당장 드릴 수 있는 말은 이 것뿐입니다만 기회가 된다면 꼭 다음 번에 같이 ‘일’을 했으면 좋겠네요.”


사건 현장을 등지고 나오며 손에 쥔 명함을 품 안에 넣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라는 말로 보건대 알고 있는 정보가 더 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당장 나를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여지를 뒀을 거다. 자신의 편에 서겠다는 확신이 들지 않는 이상 저 쪽에서도 쉽게 자기가 가진 패를 다 보이지는 않겠지. 하지만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을 보면 아직 정보가 모자라거나 이를 더 캐낼 만한 행동원의 부재 때문일 것이다. ‘일’을 같이 하자는 것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명함에 쓰인 연락처로 전화를 건다는 건 곧 일에 가담하겠다는 의사가 될 것이고.

신뢰할 수 있을까? 츠카우치 형사는 악과 적당히 타협할 줄 아는 인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거짓말을 못하기도 하고. 하지만 그만큼 능숙하게 말을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오늘의 대화에서처럼. 그런 사람이 앞으로 같이 일을 한들 나에게 감추고 있는 것이 없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을까? 오늘 오픈한 정보의 가치와 그에 대한 리스크를 따졌을 땐 아주 못 믿을 만한 사람인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위험성을 감당하면서까지 나를 끌어들이려는 동기는 무엇일까? 왜 상관 조차도 쉬쉬하는 일을 구지 들추려 드는 걸까? 그건 과연 형사의 독단적인 판단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지시였을까? 서장은 알고 있을까? 서장이 아니라면 그 윗선일 수도 있다. 이미 경찰청 내 조사청에서 파견된 끄나풀이 가득한 것으로 봐서는 함정일 가능성도 아주 염두 해두지 않을 수 없다. 딱히 두드러지는 동향이 없으니 이 일에 관심이 떨어졌는지 확실히 해두기 위해서. 그렇다면 나와 아이에겐 이 일이 되려 독이 될 수도 있었다.

단순한 판단이라면 응당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일의 핵심 주체는 내가 아닌 아이에게 있었다. 내가 독단적으로 결정하기에는 아이의 대리인을 자청할 만한 근거가 어디에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그저 그런 고등학교 담임 선생, 미성년을 벗어나기 직전까지 함께 살아야할 동거인, 아이의 안에 나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딱 그 정도일 것이다. 그런 내가 아이를 대신해 이 일에 가담한다 한들 거기에 무슨 의의가 있겠는가? 정의를 가르친다는 선생이 사적인 감정을 내세워 하는 복수가 아이의 눈에는 과연 정당하게 보여 지기나 할까? 무엇보다 이 일이 아이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무고한 부모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아이에게는 나아가야 할 미래가 있다. 괜한 사심에 아이의 발목을 잡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일을 없던 일인 냥 넘어갈 수 있냐, 하면 아니었다. 뿌리에 근원을 뽑지 않으면 사회는 바뀌지 않는다. 돌고 도는 시스템 안에서 아이와 같은 피해자는 늘어날 것이다. 암만 정부에게 놀아나는 꼭두각시에 불과한 영웅이라고 하더라도 이 일을 알고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은 내가 품고 있는 정의를 배반하는 일이다. 믿고 있는 바 대로 행동하라는 네즈 교장의 말이 불연 듯 떠올랐다. 사회를 바꾸겠다는 신념은 아직도 건재했다. 선생의 본질을 져버린 채 심장 한 구석 가득히 아이를 향한 더러운 마음을 품고 있음에도 아직은 영웅으로서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일념이었다.

결론은 정해졌고 남은 숙제는 하나였다. 일에 가담하면서 동시에 아이에게 돌아갈 피해를 없앨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돌아오는 길 편의점에 들려 맥주를 골라 담으면서도 머릿속에서는 그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암만 생각해도 묘수가 떠오르지 않아 답답하기만 했다. 피해자 신원 보호를 해달라고 하기엔 폭발 사고 때 언론에 뿌려진 게 있으니 소용 없을 테고, 그 사고와 별개로 일을 진행 시키자니 아직 제대로 아는 바가 없는 상태에서 뭘 결정 내리기가 어려웠다. 그냥 아이에게 모조리 털어 놔 버리고 선택지를 넘겨줄까 하는 미친 생각도 했다가 너무 무책임 한 것 같아서 그냥 지워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걔보단 한참 어른인데.


“늦었네?”


그런데 참 이상하기도 하지. 나보다 한참 어린 아이가 저도 모르는 새에 나를 쉬이 품어주는 걸 보면 어미 품을 찾는 어린 아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에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지니 말이다. 저녁을 하던 참이었는지 앞치마를 두른 채 현관문을 열어주는 아이의 얼굴을 보자 차갑게 식었던 머리가 돌아왔다. 따뜻한 집안의 온기와 금세 허기를 지게 하는 음식 냄새, 젖은 옷은 빨래 통에 넣어 놓으라며 핀잔을 주는 아이의 모습이 너무나도 따사로워서, 그게 지금껏 내가 가져보지 못한 것들이라 어린애처럼 손 안에 쥐고 놓고 싶지 않았다. 바깥의 어둠을 등진 불안한 평화. 내가 절대로 가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안온한 가정. 그게 설령 한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뭐해, 안 들어와?”


지키고 싶어서.

현관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 나를 보며 아이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불퉁한 말과는 상반되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는 시선에는 걱정이 비췄다. 밖에서 무슨 일이라도 당했는지 싶어 불안해 하는 아이에게 손에 쥔 맥주를 불쑥 앞으로 내밀며 나는 재미있는 장난을 떠올린 어린애처럼 웃었다.


“너 오늘만 어른 해라.”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느냐는 듯이 아이가 인상을 찡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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