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모두 여기 이 눈물 겨운 촌극을 보세요!
Ah Ch'infelice Semp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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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황된 상상으로 짜여진 그럴 듯한 시나리오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건 엄연히 지금 부딪치고 있는 현실이니까요.”
철 갑옷보다 더 딱딱한 기자들의 얼굴과 하얗게 시야를 바래게 하는 따가운 플래시 너머 시계를 본다. 앞으로 10분. 40년이 넘게 단련된 다리를 고정시키고 허리를 꼿꼿이 편다. 기계적이지만 자연스러운, 다분히 인간적인 웃음을 짓는다. 하나 같이 이를 드러낸 살쾡이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같은 짐승이 되기 보다 잘 빚어낸 도자기 같은 아름다운 무기물이 되어야 한다. 이빨 한 조각 파고들 틈새를 만들지 않는 완벽함 만이 보이지 않고 빠르게 달리는 ‘말들’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인류의 역사는 수천년 동안 지속되어 왔지만 여전이 ‘예방’에는 취약합니다. 누군가의 피가 흐르고 나서야 뒷수습을 하기 급급할 뿐이죠. 때문에 이해합니다. 최초에 정부가 영웅들을 사대로 ‘소코비아 협정’을 내놓고 어벤져스를 UN산하의 기관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도 다 그런 뒷수습에 일환일 겁니다. 뉴욕, 워싱턴, 소코비아 그리고 라고스까지, 영웅이란 이름 아래 일반 시민들의 피해를 그들 역시 모른 척 할 수는 없고, 우리 역시 그 책임을 회피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니까요. 이 자리는 그러기 위해 마련된 것이 아닙니다.”
말이라는 체계는 복잡하면서도 오묘한 구석이 있다. 자비스를 처음 설계했을 때도 가장 신경 썼던 것은 역시 언어 체계였다. 나에게 말은 무기이고, 그것은 무언가를 내포하여 듣는 이에게 전달하기도 좋지만 그만큼 속내를 숨기기도 좋은 도구였다. 나는 내 언어 체계를 그대로 그 애에게 옮겨놓았다. 그리고 똑똑한 그 녀석은 나로부터 물려받은 언어적 DNA에 스스로 터득한 지식들을 합쳐 자기만의 어투와 억양을 만들었다. 다정한 듯 시니컬 한. 나는 문득 지금 말한 ‘책임’이라는 것에 대해서 자비스에게 물었을 때, 돌아올 대답을 떠올렸다. 있는 그대로의 사전적 의미를 읊을 만큼 위트 없는 아이도 아니지만 암만 생각해도 좋은 해석을 내놓을 것 같지도 않았다. 내 앞에 있는 기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책임이라는 단어의 뜻은 분명 무겁겠지만 그 안에 거짓이 있다면 한없이 가벼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생각하는, 내가 말 한 책임의 무게는 얼마나 나갈까? 영웅이 되어서도 수많은 사고를 쳤던 내 행적으로 보건데 그건 아마 과거 내 아랫도리만큼 가벼울 것이다. 한 마디로 믿지 않겠지.
만약 이 자리에 파란색 쫄쫄이를 입은 듬직한 남자가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어느 누구보다도 믿음이 가고 진중한 사람이… 멍청한 생각을 하다 보니 순간 입에서 나오려던 말이 길을 살짝 벗어나려는 것을 깨닫는다. 다시 입을 닫고, 집중, 집중.
“현재 정부가 요구하는 것들은 이미 최초의 협정에서 적용되던 의의와 상당히 멀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눈 앞에서 그들의 부패와 무능을 보았고, 이런 정부 아래에 묶여있는 기관이 제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했습니다. 이미 두 건의 폭발이 있었고, 20명이라는 사상자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그 때까지도 정부에서는 그렇다 할 조치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만약 협정에 동의하지 않은 일부 영웅들, 즉 현재 정부가 수배자라는 이름을 붙여 국제 범죄자로 만들어 놓은 이들이 없었다면 그 두 건의 폭발이 ‘하이드라’라는 조직에서 계획한 연쇄 폭발이라는 것 조차도 알아내지 못했을 겁니다. 앞서 참고 영상으로 보여드린 VCR의 내용처럼, 그들이 폭발을 수습하고 민간인을 대피하는 순간에도 정부는 탁상공론을 하며 과연 UN산하에 남아있는 영웅들을 파견하는 것이 특정 국가들에게 이익이 되는지 여부를 따지고 있었으니까요. 언제부터 UN이 이익집단이 되었던 거죠? 언제부터요?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협정의 초기 취지는 충분히 이해했지만, 이미 그 의미를 퇴색했다면 그 협정은 깨진 것이나 다름 없다는 판단에 있습니다.”
시간은 아까로부터 5분이 지나있었다. 말을 느리게 한다고 했는데 또 습관처럼 속사포처럼 말을 뱉어 댄 모양이다. 혓바닥이 뻣뻣해졌다. 숨을 한 번 고른다. 말을 하는 동안 눈을 깜빡이지 않으려고 노력한 탓에 눈자위 끝이 따끔거렸다. 혹여나 눈물을 흘리는 대참사가 날까 시선을 살짝 내려 뻑뻑한 눈을 다듬고 다시 정면을 본다. 오랜만에 이성적이고 논리에 입각한 기자회견을 하면서 괜히 감정에 호소하는 듯한 연출을 내보이긴 싫었다.
“우리 어벤져스는 어느 한 개인이나 집단, 그리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평화를 수호하고 시민들을 위협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조직입니다. 따라서 지금 이 시점부터 우리는 어떠한 기관 및 정부의 영향력과 상관 없이 활동을 진행할 예정이며 현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움직일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소코비아 협정’은 이행 과정에서 정부의 규정위반으로 결렬되었음을 알립니다. 그러니까 제발 부탁하건데, 어설프게 지금 이 상황을 수습하겠답시고 정부에서 나서서 우리를 국제 범죄자로 몰아넣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멍청하지 않다면 그게 우리를 돕기보단 방해한다는 걸 알고 있을테니까요.”
마지막 말은 감정이 섞이긴 했지만, 아무렴 어때. 어쨌든 하려던 말은 다 했음으로 이정도는 괜찮겠지 싶었다. 단상 아래 페퍼의 얼굴에도 불만이 없어 보였으니 도를 넘은 것 같지도 않았고. 마지막 말을 끝내자 여기저기 기자들의 질문 세례가 퍼부어진다. 예상된 반응이었지만 ‘상황이 시급한 만큼 질문은 받지 않겠습니다.’라는 말로 마무리를 지으며 단상을 내려온다. 미련이 남은 기자들이 계속 쫓아오며 플래시를 터뜨려 대고 반복적인 질문을 퍼부었지만 무시하는 것으로 일관한다.
어차피 지금 발표한 성명으로 모든 의구심을 대변할 수는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눈 앞에 공포를 두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안정된 방호벽을 원했을 것이고, 앞서 공개된 영상으로 정부의 신뢰는 바닥을 치고 있으니 즉, 그들은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신뢰 하진 못하겠지만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라도 우리의 입장을 이해하려 노력할 것이다.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도한 대로 이 상황이 수습되고 나면, 과거 부정적이었던 여론은 잠잠해질 것이고 오늘 내가 했던 ‘말’은 곧 힘을 얻게 된다. ‘말’을 뱉고 ‘행동’으로 그 의의를 얻는다. 모든 이치가 다 그런 법이었다. 특히나 정치판에서는.
경호원들이 기자들을 막아 세우고 회견장 문이 닫히자 소음이 멎었다. 손목 시계를 한 번 본다. 돌아가는 초침이 괜한 조바심을 내게 만들어 의도치 않게 걸음이 빨라진다. 걷는 시간 몇 분 단축한다고 해서 딱히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옆에서 같이 걷는 페퍼의 또각이는 구두 소리도 내 걸음만큼 빨라진다.
“다음 스케줄은?”
“두 시간 뒤에 회의가 잡혀 있어요. 현지 파견된 멤버들도 복귀할 예정이고요.”
“십 분 정도는 눈 붙일 시간은 있겠네. 회의실 의자는 넉넉하게 준비 했대? 인원이 늘어서 꽉 찰 텐데.”
“그건 걱정 안 해도 돼요. 그것보다 로스 장군한테 부재중 전화가 열다섯통이나 왔어요. 통화 하실 거에요?”
“아쉬운 사람이 먼저 전화하는 건데 난 아쉬울 게 없어서 말야. 또 오면 받겠지만 썩 내키진 않네. 벼랑 끝에 몰린 노인네가 무슨 욕을 퍼부을 지 모르겠지만 괜히 귀를 오염시켜 지금 좋은 기분을 망치고 싶진 않거든.”
“좋아요. 난 그럼 돌아가서 날뛰는 회견장 정리하고, 언론 반응 좀 살펴보고 있을게요.”
옆을 따라오던 페퍼가 뒤돌아 왔던 길을 다시 걷는다. 전면에 서는 것은 항상 나였지만 내 지나간 자리를 닦아 내는 것은 항상 페퍼의 몫이었다. 고마워! 뒤통수에 대고 늘상 하는 말이지만 항상 진심인 인사를 던지자 살짝 돌아 웃는다. 그리고는 누구보다도 당당한 걸음걸이로 회견장으로 들어간다. 필시 그것은 전쟁터에 나가는 장수와 다를 바가 없다. 나와는 다른 싸움이지만 그 강도는 내 것과 다르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시 시계를 본다. 회의시간까지 앞으로 1시간 하고도 57분의 여유가 남아있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숙제들을 생각한다면 1분 1초가 아까운 상황이었지만 해결책이 영 보이지 않아서 인지, 아니면 드디어 뇌에 과부화가 걸린 건지 선뜻 그게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았다. 문득 ‘목욕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다. 기자회견 용 화장은 답답했고 아까부터 와이셔츠 아래 자꾸 식은 땀이 차는 것 같아 찝찝했다. 기어이 두 다리는 의지를 배반한 채 본능을 따라 욕실로 향했다. 모처럼 재회하는 사람들 앞에서 꾀죄죄한 모습 보이기 싫다는 변명은 덤이었다.
욕실로 가기 전 서랍에서 구식 핸드폰을 꺼냈다. 처음 손에 쥔 이후로 2년만에 다시 잡는 것이었다. 폴더를 열고 하나 뿐인 단축 버튼을 눌렀다. 연결 음은 짧았다. 수화기 너머 숨소리가 들렸고 ‘여보세요.’라는 말을 듣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끝났어.”
그리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상대방이 보낸 의도가 어찌되었건, 처음 받을 때부터 이 순간만을 위해 존재했던 물건이었다. 의미를 퇴색한 핸드폰을 반으로 접자 폴더의 이음새가 부숴지며 그 기능을 상실했다. 애초에 우리가 다퉈야만 했던 그 ‘협정’이 오늘로서 종결되었던 것처럼.
사실 답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린 것은 오기에 가까웠다. 지금껏 저 수화기 너머 들려올 수많은 말들을 예상해 보았지만 어느 것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것이 만약 높은 확률로 ‘미안해.’라는 사과의 말이라면, 더욱이 그 의미가 ‘용서’가 아닌 ‘이해’를 요구하는 거라면 나는 절대로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할 나 자신을 견딜 수가 없었다.
당신은 왜 나를 항상 나쁘게만 만들까?
[썬더볼트 장군의 전화입니다. 연결할까요?]
메시지와 다를 바 없이 일방적이었던 통화를 끝으로 다시 걸려온 전화가 욕심 많은 노인네라는 사실이 내심 다행스럽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암만 그렇다고 해도 썩 달가운 대화 상대는 아니었다. 이제 독기 밖에 남지 않은 노인이 이번 전화를 건너 뛴다고 해서 연락을 포기할 위인은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싫어도 피할 길이 없었다. ‘연결해.’라고 짧게 명령하자 곧 중후하고 무거운 목소리가 스피커 너머로 울린다.
[스무 명의 목숨 값과 자유를 맞바꾼 소감이 어떤가?]
욕조 벽에 부딪혀 왕왕 울리는 목소리가 권위적이다. 누가 들으면 신이라도 되는 줄 알겠네. 욕실에서 전화를 받은 건 좋은 판단이 아니었다는 걸 실감하면서 몸을 일으킨다. 몸 표면에서 떨어져 나가는 물방울들이 욕조 물에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냈다. 이런 시국에 물놀이라니, 팔자도 좋군. 스피커 너머 작게 궁시렁 거리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딱히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은 그와 내 위치가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협정 때문에 나를 아랫사람 부리듯 하던 인간이 이제 내 발 밑에 기고 있다. 순간 소름이 돋아 몸이 부르르 떨렸다. 썩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사람 목숨에 값을 매길 정도로 떨어지진 않아서요. 누군가의 죽음은 의도한 게 아니었지만 때마침 타이밍이 맞았던 것 뿐이니까… 뭐, 운이 좋았다고 해두죠.”
[일이 아니었어도 영상은 터뜨렸을 거라는 말로 들리는데. 도대체 언제…]
“로스, 나 같은 천재를 밑에 두려면 적어도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정도는 알아뒀어야죠. 설마 내가 당신 밑에 내 사람 하나 안 심어 놓았을까.”
[이 일은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
“자리 보존도 어려우실 텐데 제 신경까지 쓰실 수 있으시겠어요? 아, 청문회 날짜 잡혔다면서요? 이번 일 수습만 잘 되면 잊지 않고 꼭 갈게요. 이렇게 한 순간에 떨어질 줄 모르고 열심히 오른 자리일 텐데, 그렇게 되신 거에 제 책임이 없는 건 아니니까 가서 삼삼한 위로 말씀이라도 드리는게 도리일 것 같아서요.”
그동안 입술 아래까지 차오르다가도 밀어 넣었던 감정들이 말을 타고 혀끝에서 와다다다 쏟아져 나왔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것처럼 스피커 너머로 온갖 욕설이 흘러나왔다. 더 들을 가치가 느껴지지 않아 통화를 끊어버렸다. 한동안 이쪽 전화는 연결 하지마, 라는 짧은 명령에 내 똑똑한 딸은 이미 수신거부를 해 놓았다는 간결한 답을 돌려주었다. Good girl. 몸을 닦은 수건을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고 시간을 본다. 생각보다 오래 씻었다. 회의 시간까지 42분의 시간만이 남아 있었다. 십 분이나마 눈을 붙여보겠다는 계획이 산산조각 나버렸다. 전신 거울 속 나를 본다. 볼품 없이 마른 몸을 옷으로 감싸고 푸석한 머리를 빗어 넘기고 푹 패인 눈 주변에 화장을 하고 나면 42분이란 시간도 빠듯할 것이다. 아, 이제 41분.
시간을 잡아 두고 싶다. 배 안에서 소리가 났다. 배가 고팠다. 기자 회견 한답시고 만 하루를 꼬박 굶었다. 이대로 회의를 간다면 보나마나 또 하루 내지는 이틀 동안 배를 주릴 것이다. 그냥 눈 딱 감고 10분 정도 늦어볼까, 식사라도 하면서… 라는 쓸데 없는 생각을 하다가 접었다. 버석거리는 웃음이 났다. 사실 옷 치장이 중요한 것도 아니고, 당장 식사를 하지 않으면 죽을 정도로 배가 고픈 것도 아니다. 그저 나는 비겁하게 도망가고 싶을 뿐인 거다. 앞으로 40분 후 일어날 어색한 재회와 삼류 신파에서도 나오지 않을 법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 거다.
옷장으로 가서 옷을 고른다. 빳빳한 흰색 와이셔츠, 검정색 정장 베스트와 색이 같은 바지, 그리고 적당히 튀는 붉은 색 넥타이를 맸다. 넥타이가 목을 꽉 조인다. 손에 자꾸 힘이 들어간다. 이대로 죽어버린다면, 남은 시간을 괴롭게 견디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재회라는 허울 좋은 인사치레를 겪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왜 폭탄은 우리 집에서 터지지 않았지? 만약 내가 죽었다면 무고한 ‘스무 명의 목숨 값’을 한 사람으로 대신 할 수 있었을 테고, 지금처럼 절망스런 기분이 들지 않았을 텐데.
메마른 진창 위에 허우적거리고 있다, 난. 마르고 말라서 이제는 없어진 줄 알았던 기억과 감정들이 시간의 틈을 타고 솟아 올라 나를 좀먹고 있다. 바닥 아래로 가라앉고 있다. 눈물이 채운 늪에 잠긴다.
숨이 찼다.
나를 가장 절망케 했던 건, 당신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내 무능 때문이었다.
내 아버지 세대의 사고를 가지고 있는 20대 남자와 현 시대의 빠른 문명에 구를 대로 굴러본 40대 남자의 연애는 쉽지 않다. 첫만남부터 삐그덕거렸기에 솔직히 말하면 우리 둘이 연애를 하게 된 것 자체가 아이러니 했다. 우린 사랑을 대하는 태도부터 달랐다. 자기 목숨이라도 내어 줄 수 있을 것만큼 절절하게 심취하는 어린 당신의 사랑과는 달리 나는 이미 그런 단계를 지나 내가 손해볼 것과 상처 받을 것을 따져가며 마음을 보여야 하는 교활한 연애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당신은 내게 끊임 없이 사랑을 속삭였지만, 나는 그 쉬운 말 한 마디를 해주지 못했다. 그래서 아마 더 뭐라도 더 해주려고 했었는지도 모른다. 말을 대신한 현실적인 지원, 무조건적인 헌신, 그것들이 내 마음의 표현이었다. 그런 내게, 당신은 늘 고마워했다.
차라리 내가 말로 당신에게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 나았을까. 차라리 그랬다면, 내가 이만큼 낙담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지. 적어도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영원히 모른 채 무지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 지도 모르니.
그걸 깨닫게 된 순간이 있다. 워싱턴 사건을 기점으로 우리가 만나는 횟수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당신은 일 때문이라고 했고, 나는 당신이 한 노인 병원과 세계의 온 도시들을 들쑤시고 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했다. 그 목적에 페기 카터와 제임스 반즈가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은 내게 그 일에 대한 말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숨기는 일이 있으니 대화는 줄어들었고, 대화가 줄어든 만큼 당신은 내게 점점 소홀해 졌다. 사실 섭섭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이해하기로 했다. 원인이 나라는 걸 알아서 더 그래야 했다.
연애 초기, 당신은 우리의 접점이 되는 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꺼냈고, 거기엔 빛 바랜 오랜 사진 같은 옛날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그건 내게 별로 유쾌한 주제의 대화는 아니었다. 몇 번은 주제를 바꾸고, 회피하다가 기어이 화를 내 싸움을 하고 난 후로는 당신은 내게 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나는 그 때 처음으로 내 치부를 보였다. 진절머리 날 정도로 생생한 과거의 이야기들을 끄집어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내 환부를 보이며 악을 쓰 듯 내 아버지를 욕보였다. 그 날의 싸움 끝에 당신으로부터 미안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승자는 내가 아니었다. 곤죽이 되어 걸레처럼 너덜너덜 해진 상태를 승리라 보긴 어려웠다. 그래서 였을 것이다. 내게 말하지 않았던 것이, 그것들은 내게 괴로운 기억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아마도 나를 위해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이해했다. 이해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했으니까, 그래야지 견딜 수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내 이해의 범주는 이 때다 싶어 교활하게 머리를 드는 의심을 이기지 못했다. 기어이 뒤를 밟아 병동에서 페기 카터와 이야기 하는 당신의 말들을, 옛 추억들과 지난 날들을 이야기하며 즐거워하는 당신의 웃음 소리를 들으며 어쩌면 당신이 말하지 않은 이유는 단순히 내가 싫어해서가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부정적인 생각들이 마음 깊은 곳에 깔리는 데도 나는 애써 억누르며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 날 저녁, 우리는 거의 한 달 만에 마주 앉아 식사를 했다. 자주 보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당신은 말했고, 나는 요즘 많이 바쁜 거 안다고 답했다. 그 말의 의미를 모르지 않을 텐데도, 당신은 나를 흘끗 보며 눈치를 살필 뿐 끝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자 어느 순간 내 안에서 뻥- 하고 폭발음이 울렸다. 갑자기 억누르던 의심들이 터져 올라왔고, 수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왜 내게 말해주지 않지? 내가 못미더워서? 아니면 내가 그 시대를 이해하지 못하니까? 차라리 여기 있는 게 페기 카터였다면 더 나았을까? 아니면 버키 반즈라면? 당신은 조금이라도 나에게 의지해줬을까? 나는 당신을 위해 무엇이라도 다 해줬는데, 이젠 원하지 않는 걸까? 나는 이미 내 모든 걸 다 보여줬는데, 내 제일 추한 부분까지 다 드러냈는데, 당신은 내게 아무것도 보여주지도, 또 원하지도 않아. 당신은 비겁해. 당신이 원하는 건 여기에 내가 아니잖아. 내가 그 세월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어느 순간 내 앞에 있는 당신의 얼굴이 당황스러움으로 굳어 있었다. 아, 나는 그제야 내가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의지와 상관 없이 눈에서 흐르는 눈물들이 볼을 한껏 적시고 턱 아래로 뚝뚝 흐르고 있었다. 타이밍 좋게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던 당신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게 누구로부터 온 전화인지는 뻔했다. 당신은 전화기와 나 사이에 눈치를 보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하다 못해 왜 그러냐고 묻지도 못했다. 그런 당신이 보기 싫어져 나는 자리를 떴다.
나는 그 날 먹은 음식을 다 토해냈고, 당신은 내 곁에 머물러주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비참해졌다.
“이봐, 스타크, 스타크!!”
“그만 흔들어. 골 울리니까.”
흐려져 있던 시야가 잡혀가고 눈 앞에 스트레인지의 얼굴이 보였다. 몇 번 일 때문에 만난 것 외에는 아직 친하다고 할 만한 사람은 아니라 지금 이 상황이 난 퍽 불편했다. 그러니까 드레스 룸 구석에서 나는 과호흡에 경련하며 넥타이로 내 목을 조르고 있었고 그런 나를 낯선 그가 안아 들고 있는 상황이 말이다. 나는 그 손을 쳐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려 잠시 휘청거렸지만 다시 꼿꼿하게 허리를 편다. 목을 죄고 있던 넥타이를 풀어 던졌다. 젠장,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야.
“회의시간은 벌써 10분이나 지났어.”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사람처럼 그가 말했다. 오늘 따라 내 예상대로 되어 주는 일이 하나도 없다. 급한 대로 안에 입은 와이셔츠만 갈아입었다. 땀에 젖은 꼴로 회의에 갈 수는 없으니까. 화장대에 놓인 손수건으로 이마와 턱을 대충 문지르고 긴급 방편으로 놔둔 컨실러와 파우더를 들었다. 지금 급히 화장을 해봐야 뜰 게 분명했지만 파리한 안색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보단 나을 것 같았다.
“당신 정말 괜찮은 거야?”
뒤에서 말 없이 분을 칠하는 내 꼴을 보던 스트레인지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잠 못 자고 밥 못 먹은 거 빼면 괜찮아.”
잠 못 자고 밥 못 먹은 게 그의 탓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말이 뾰족하게 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후회했다. 하필이면 그딴 기억이 떠올라선… 아마 그가 덜 현명 했다면 여기서 한 마디를 더 얹어 싸움으로 몰고 가겠지만 그는 침착하게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나를 가만히 보는 것으로 그 답을 했다. 적당히 하라는 듯이. 한 숨 한 번으로 곤두선 신경을 조금 내려놓고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한다. 그래봐야 듣는 사람의 기분이나 입장을 생각하는 말이 나갈 정도로 무딘 상태도 아니었지만.
“그래서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여기 들어올 수 있는 권한은 해피랑 페퍼 밖에 없는데.”
“그게 누군진 모르겠지만 내가 들어가지 못하는 곳은 없어.”
“그 마법인가 뭐시깽인가로? 젠장, 비전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사람들은 왜 프라이버시를 존중할 줄 모르는 거야?”
“어쨌든 내가 들어온 덕분에 살았잖아? 고맙다는 인사는 아직 못 들은 것 같은데.”
“과호흡으로 죽는 사람은 없어.”
“내가 마법사라는 이유로 가끔 잊는 거 같은데, 나 의사였어.”
“시끄러워, 몰라서 하는 말 아니니까.”
얼추 얼굴이 정리되었다. 시계를 본다. 약속된 회의시간에서 20분이 지나 있었다. 어차피 10분 늦으나 20분 늦으나 늦은 건 마찬가지니 아무래도 좋았다. 게다가 같이 지각한 공범도 있고. 의미 없는 소모전이나 다름없는 대화를 그만 두고 자리를 뜬다. 발을 옮기기 전 볼품 없이 떨어져 있는 넥타이를 본다. 늘어나고 구겨진 넥타이는 처음의 화려함을 잊은 듯 초라하다. 아마도 못 쓸 듯 싶다, 나처럼- 생각하다 문득 가만히 스트레인지를 올려보자, 그는 눈썹을 이상하게 구부리더니 내 의중을 알아차리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거리며 위트 있게 두 손을 올려 항복을 말했다.
“쓰러졌단 얘긴 안 할게.”
새로 생긴 동료는 눈치가 빨라서 편리했다.
아르님 조라 박사는 학계에서도 꽤 유명한 사람이었다. 유명인이라는 말이 위인을 대변 하진 않지만 어쨌든 그에게는 업적이 있었다. 전쟁은 기술 발전을 불러 일으키기 마련이다. 내 아버지가 무기로 벌어먹고 살았던 것처럼 그는 하이드라를 등에 업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뽐내었다. 그게 주로 무기에 관련된 것이었고 그 중의 하나가 윈터솔져 프로잭트라는 것은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물론 그것을 업적이라고 말하기에는 어불성설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가 그 시대에 보기 드문 천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기 뇌를 시스템화 시키는 미치광이라고는 말 안 했잖아.”
나는 회의에 늦은 만큼 내용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했다. 어쨌든 지금 협정을 무마시켜가면서까지 집중해야 할 사안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20분 넘게 지각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들어선 회의장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기껏해야 이제 살겠다는 얼굴을 한 피터가 손을 크게 들어 내게 인사를 건네는 것뿐이었다. 나는 과연 내가 없는 그 짧은 몇 분 동안 서로 안부는 물어 본 건지 문득 궁금해졌다.
어쨌든 지금 당장 서로 2년의 시간 동안 있었던 일들을 노닥거리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일이 일이니만큼 회의의 주체는 내가 될 수 밖에 없었기에 나는 ‘오랜만이네, 그간 잘들 지냈어?’라는 성의 없는 인사말만 던지고 바로 브리핑을 진행했다. 사실 딱히 떠오르는 인사말이 없어서이기도 했다.
이틀 전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커다란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폭발 장소는 키예프 인근 공장 단지였고 다행이 폐쇄된 지 오래된 곳이라 사상자는 없었다. 그 직후 인터넷에는 동영상 하나가 급속도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수배령이 내렸던 일부 영웅들의 위치를 알리고 있는 영상이었다. 정부에서는 즉시 와칸다로 요원들을 파견하겠다는 의사를 비췄고, 와칸다의 국왕 티찰라는 강경하게 이를 거부하며 동영상에 나와있는 사실을 부정했다. 언론이며 여론이며 시끄러웠고 당연히 그 동영상과 일계 공장 폭발 사고의 연관성을 짓지는 못했다.
두 번째 폭발은 그로부터 정확히 24시간 뒤에 일어났다. 이번엔 에디오피아 아디스아바바 인근 마을이었다. 이번엔 마을의 일부가 폭발에 휩싸이면서 스무 명의 사망자와 서른 네 명의 부상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인터넷에는 동영상이 퍼졌다. 이번엔 처음처럼 연관을 짓기 어렵지 않은 내용의 영상이었다. 동영상 전면에 나온 프로그램화된 조라 박사는 프로젝트 수어사이드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 내용인 즉슨 자신이 전 세계에 백업해 놓은 수많은 자신들이 일정 시간에 폭발할 것이고 그 때마다 새로운 기밀 정보들이 외부에 유출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카운트를 띄웠다. 그가 지정한 시간은 앞선 시간보다 2시간 빠른 20시간에서 수를 줄여나가고 있었다.
“나타샤, 당신이 예전에 봤다던 그건 극히 일부였던 거야. 그게 몇 개가 퍼져 있는지도 모르고,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르는 상황이지.”
시간은 13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현장 확인을 위해 와칸다에서 캡틴을 포함한 팀원들이 아디스아바바로 향하는 동안 나는 아직 팀의 일원이 아니라 협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스트레인지를 키예프로 보내 상황을 확인했다. 그 동안 나는 기자회견을 준비했다. 때마침 정부에서 비공식적인 회의 녹취록이 정보통을 통해 나에게 들어왔고 사람 목숨이 달린 위기를 당장의 기회로 본다면 조금 속물적이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런 상황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까지 심어 놓았던 거니 타이밍에 맞게 쓰는 것도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와중에 시간은 점점 가고 있었고 지금 이 시점에 카운트는 12시간 58분이 남았다며 깜빡거리고 있었다.
“그럼 아무런 대책 없이 상황을 지켜봐야 하는 건가?”
퓨리는 그 이름만큼 성질이 불 같은 인간이다. 그는 과정보다 당장의 결과를 중시하는 사람이었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는 그 초조함을 역력하게 드러내곤 했다.
“없다는 건 아니죠. 두 곳의 폭발 지역에 과거 하이드라 기지가 있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니 있는 기록을 뒤져서 있는 기지를 모조리 찾아내야죠. 그 동안 비전이 프라이데이랑 협업해 스톡홀름에서 네트워크를 감시할 겁니다. 잔재에서 남은 흔적들로 분석한 결과 네트워크 상에서 폭발 명령을 내리는 건 아니라는 판단이지만 어쨌든 조그만 단서라도 잡힐지 모르니까요.”
“그리고 당신은 그 사이에 King을 잡을 생각인가요?”
“역시 박사, 말이 통해서 편하네요. 맞아요. 어쨌든 백업이 있다는 건 명령을 내리는 메인 서버가 있다는 말이죠. 메인 서버를 멈추면 무차별적인 폭발도 막을 수 있을 거에요.”
체크메이트를 날리는 거죠! 모처럼 추임새를 붙여주는 배너 박사 때문에 괜히 과장된 제스쳐를 하며 말하자 굳었던 회의실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진다. 나타샤가 여전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로디가 적당히 하라는 듯 미간을 좁힌다. 모든 이의 반응이 비슷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어느 한 쪽으론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그 잘난 면상에 어떤 표정을 그리고 있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선뜻 보기가 어려웠다. 세상에 폭탄이 깔린 것만으로도 벅찬데 마주친 그 순간 쏟아져 나올 내 감정적인 폭발마저 감내하긴 어려울 것 같았다. 여기서 죽는 한이 있어도 남들 앞에서 추태를 보이는 꼴을 하고 싶진 않았다. 다행이 피터가 손을 번쩍 들어 질문하면서 못난 호기심에 시선이 거기까지 닿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메인 서버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거 아닌가요? 네트워크 흔적이 없으면 역추적을 할 수도 없잖아요.”
“피터, 학교에서 배웠지? 인터넷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사람들은 연락하기 위해 뭘 썼는지- 그래, 바로 전화야. 물론 활성화된 조라 박사의 서버가 인터넷을 통해서 정보를 끌어 모은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자폭 장치가 그가 살아있을 때 설계되었다고 가설한다면 멀리 떨어진 폭발 물에게 지시를 내릴만한 방법은, 그 때 당시 기술로는 전화 밖에 없어.”
“그럼 이미 알아낸 건가요?”
“폭발 지역 두 곳에 전화 회선을 분석해보니까 폭발 직전 어느 한 곳에서 신호가 걸려 왔다는 걸 발견했어. 위성을 통한 데다가 여기저기 회선을 돌려 쓴 탓에 추적이 어려웠지만 어쨌든 확인 해보니 위치가 나오더라고.”
그 지역을 혀에 올리려고 하니 목 뒤가 뻣뻣해진다. 혀를 빼다가 다시 입 안에 넣고 입을 닫아 밭아 오르는 숨을 집어 삼키며 아까 드레스룸에서 같이 꼴불견으로 쓰러지지 않도록 노력했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허리를 곧추 세운다. 조금 심호흡을 하고 난 뒤에야 나는 당신을 향해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오로지 이 회의장에서 당신과 당신 친구만이 그 장소의 의미를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비로소 당신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봐야만 했다. 당신의 반응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새겨야 했다. 당신이 나만큼 괴로웠으면 했다.
“시베리아야.”
등에 칼이 박힌 내 믿음이, 배신으로 얼룩진 내 사랑이, 같잖은 사람들 밑에 고개를 숙였던 굴욕 뿐인 내 지난 2년이라는 시간이 그러지 않으면 억울해 가슴이 미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당신은 말이 없다. 그저 조금 놀란 눈으로 나를 보다가 못내 피하듯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 긴 공백을 두고도 당신은 여전히 비겁했다.
차가운 시베리아 바닥에서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말은 거짓의 수단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그동안 내게 속삭였던 ‘사랑’은 정말 있기나 한 것이었을까?
그리고 나는 아직까지 그 해답을 찾지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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