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 And Beautiful 14

( Steve Rogers, Bucky Barnes X Tony Stark )











아침잠이 많아 늘 늘어져라 자는 생활패턴을 생각한다면, 토니가 새벽녘에 눈을 뜬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그는 눈을 부비고 일어나 제 양옆을 지키고 있는 버키와 스티브를 보았다. 자신이 일어났는데도 기척조차 내지 않는 것을 보면 깊게 잠이 든 것 같았다. 세상모르고 잠든 얼굴을 보며 토니는 웃었다. 자신의 옆에서 가장 마음을 놓고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뿌듯하게 했다. 


그는 자신의 헐벗은 배 위로 올라온 두 개의 손을 살짝 내리고 침대를 조심스럽게 벗어났다. 잠든 사이에 씻겨 놓은 모양인지 몸은 개운했지만 어제 정사의 여파인지 피부 아래 근육들이 뻐근하고 등허리가 아픈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끙끙대는 신음을 입안으로 삼키며 가방 안에서 속옷과 티셔츠를 꺼내 입었다. 하필 꺼낸 티셔츠가 스티브의 것이었는지 품이 많이 남았지만 골반을 덮는 기장이 편해 굳이 다른 옷을 꺼내 입지는 않았다. 나갈 생각으로 신발을 찾았지만 어제 어디에 벗어 놓았는지 보이질 않아 결국 버키의 것을 신었다. 가죽 워커가 제 발 크기에 비하면 많이 남았지만 걷기에 불편하진 않았다. 


새벽의 산은 쌀쌀했다. 문 밖으로 나온 토니는 팔뚝을 쓸어내리며 위에 걸칠 것을 가져올 걸 그랬나 싶었지만 돌아가기 귀찮아 그만두었다. 모처럼 새벽에 정신이 온전한 만큼 산책을 하고 싶었다. 어제는 도착하자마자 잠이 들어서 이 근방을 제대로 보지 못 했다. 새벽의 여명이 내리는 새파란 풍경은 서늘하고 고요해서 기분이 좋았다. 토니는 천천히 집 근처를 걸었다. 계곡이 흐르는 길을 따라 걷다가 작은 언덕 아래 있는 작은 나무들 사이로 멈춰 섰다. 그리고 바람에 느리게 움직이는 나뭇가지들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움직이 않는, 하지만 그 아래 아침을 맞이한 작은 생명들이 깨어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러니까 이건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인간은 자신이 태어나는 그 순간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설령 가지고 있다고 해도 어릴 때 대부분 소멸되기 마련이었다. 토니 역시 그 순간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아마 그 순간을 상상한다면 지금과 같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제 살을 비집고 들어오는 타인의 살덩이를 느꼈을 때의 희열과 누군가에게 안겨 있음으로 전해지는 체온, 그로부터의 안식, 안도, 안정,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이 거쳐간 이후 약간의 허망함과 공허함까지. 과정은 격렬했고 눈에 보이는 특별한 변화는 없었지만 토니는 제 안에 무언가가 바뀌어 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을 만났을 때부터 서서히 움직이다 비로소 지금 꽃을 움트게 되는 것이다. 아침 햇살을 받아 움직이는 저 작은 생명들처럼. 하지만 그것이 정말 어른이 되었다는 신호일까? 라고 되물으면 알 수가 없어져 버린다. 나는 여전히 다 자라지 않은 것 같은데. 



"추워." 



등 뒤로 따뜻한 담요가 덮어지고 자신을 끌어안는 단단한 손에 토니는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스티브의 얼굴이 보였다. 버키는? 탁하게 갈라지는 목소리로 토니가 묻자 스티브는 토니의 발을 가리켰다. 오, 하고 토니가 탄식했다. 자기가 신발을 신고 나왔으니 버키가 신을 신발은 아마 없을 것이었다. 스티브는 토니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고 가만히 토니가 보던 풍경을 바라보았다. 



"잠이 안 왔어? 

"아니, 그냥. 호기롭게 어른이 되겠다고 말한 것치고는 좀 허무해서. 싫었다는 건 아닌데... 그냥. 여자처럼 처녀막이라도 터졌어야 좀 달라졌을까 싶기도 하고." 

"난 좋았어, 토니. 버키도 그럴 거야." 

"알아. 어땠어? 있지, 처음으로 어른이 됐다고 느꼈을 때 말이야. 첫 경험이라도 치르면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냥, 잘 모르겠거든." 



자신을 끌어안은 단단한 팔뚝을 쓸어내리며 토니가 물었다. 스티브는 꽤 오래전 과거를 떠올리는 듯 잠시 말이 없었다. 어른이 되었다는 말은 단순히 나이를 먹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누군가에겐 첫 경험의 순간일 수도 있고 술이나 담배를 처음 했을 때, 아니면 처음으로 사랑을 느꼈을 때 또는 철이 들었다고 느꼈을 때 일수도 있다. 스티브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스무 살이 막 됐을 땐 어른이 되고 안되고를 결정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롭진 않았어. 열다섯 살 어린 애도 얼마든지 어른이 될 수 있었지. 2차 대전이 일어났고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하고 모든 게 혼란스러웠을 때였으니까. 

"흐응-."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군에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약하고 왜소했던 내가 슈퍼 솔져가 되던 날, 캡슐에서 꺼내졌을 때 몸뿐만이 아니라 모든 게 변해버린 느낌이었지. 뭐, 가장 먼저 시야가 높아졌으니까." 



시간으로 따지면 아주 오래전 일인 데도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그토록 염원하던 일이 일어났고 깨어나기 무섭게 총격 사고로 은인과도 같은 어스킨 박사를 잃었으니. 처음으로 적과 마주하게 되었고, 그 이후의 채권팔이 삶이 그리 좋다고 할 순 없었지만, 결정적으로 전선에 뛰어들 수 있는 시발점이 되어 주었던 일이었다. 적진에 잡혀있던 버키를 구할 수 있었고, 브루클린 애송이는 캡틴 아메리카가 되었다. 애벌레가 고치가 되고 화려한 나비가 되는 극적인 변화였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스티브의 외견은 변할지 몰라도 그 안에는 여전히 브루클린 애송이가 자리 잡고 있었다. 단지 조금 더 자신감이 붙었을 뿐이다. 정의롭고 신념에 차있지만 외골수적이고 고집스러운 모습은 그가 대장으로서 팀원들을 이끌 수 있게 해주었고 얼음에서 다시 깨어났을 때도 그건 바뀌지 않았다. 지금의 모습으로 변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어른스럽고 단단한 모습에서 다시 예전의 청년으로 퇴행한 것만 같다. 언제부터 스티브 로저스가 그토록 말랑한 사람이 되었는가. 스티브는 토니의 동그란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그 계기는 아마 토니일 것이다. 이 아이 일 수밖에 없었다. 


스티브가 페기를 사랑했다. 오로지 남자들뿐인 군 안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항상 당당했던 그녀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 강함 내면에 부드러움까지, 페기는 스티브가 아직 덜 여문 어린 자신을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를 닮아서, 처음 토니에게 관심이 갔던 것을 스티브는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 그녀와 토니는 달랐다. 아버지에게 말대꾸를 하고 제멋대로 구는 모습이 강해 보이게 느껴질 뿐, 그 안은 너무 여리고 예민해서 쉽게 상처받고 그것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표정과 몸짓, 신경질에 고질병을 앓는 몸 상태 같은 것들로, 누구라도 그를 보면 보듬어 안을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일종의 생존 본능이었다. 관심을 주지 않아서 어떠한 울타리도 되어주지 못하는 가족을 대신해 타인으로부터 그걸 얻으려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스티브는 일종의 피해자인 샘이다. 악랄한 토니의 생존본능에 걸려든 가련한 불나방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스티브는 그것이 싫지 않았다. 친구의 아들, 한참이나 어린아이, 같은 동성이라는 조건들은 이전 딱딱한 스티브 로저스라면 절대로 허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 그런 덫이 있다고 해도 절대로 뛰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한 것은 토니라는 존재, 그 의의 하나 때문이었다. 스티브는 토니를 사랑한다. 그를 보듬어 안아주고 싶고, 사랑해 주고 싶고, 지켜주고 싶었다. 그 사실 하나로 그는 도덕적인 책임과 꼿꼿하기만 한 어른의 모습을 접어버렸다. 토니 앞에서 그는 스티브 로저스일 뿐 캡틴 아메리카가 아니었다. 존경받는 위대한 어른 캡틴 아메리카가 아닌 여전히 덜 자란 브루클린 애송이, 그런 청년일 뿐이었다. 



"토니." 

"응." 

"토니, 토니, 토니." 

"응." 

"사랑해." 



답지 않게 몸을 치대며 어리광을 부리듯 사랑을 말하는 스티브를 향해 토니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손을 뻗어 스티브의 목을 끌어안는다. 작은 몸을 마주 안아 올린 스티브가 토니의 콧잔등과 볼에 쪽쪽 입을 맞췄다. 좋긴 한데 너무 티 내기는 싫은지 아님 마냥 부끄러운지 토니가 미묘하게 웃는 얼굴을 찡그리며 툴툴 거렸다. 덩치만 크면 뭐 해, 이럴 땐 애처럼 굴면서. 그 말에 스티브가 웃었다. 그래, 토니 난 네 앞에서는 아이 같기만 할 거야. 바보같이 사랑에 목메는 어른 아이가 될 거야. 그것으로 네가 행복할 수 있다면 난 절대 네 앞에서 철들지 않을 거야.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상식'들이 우리의 관계를 나무란다면,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손가락질을 한다고 해도 그것들에게서 등을 돌릴 테야. 



"사랑한다." 



비로소 나는 너를 만나 숨 쉬는 것 같으니. 

영원히 철들지 않더라도 너를 사랑하는 걸 멈추지 않을 거야. 






*** 






"포인트를 보면서 찌를 던지는 거야. 고기가 잘 물 수 있도록." 



흐르는 계곡에 발을 담그고 토니는 제 등을 받쳐 주는 버키의 설명을 들으며 낚싯대를 휘둘렀다. 찌가 달린 비늘이 저 멀리 날아갔다가 다시 휘감기고 다시 던져지고 휘감기길 반복했다. 가만히 앉아서 하는 보통 낚시와는 달리 계속 움직여야 했기에 힘이 들었지만 뒤에서 잡아주는 커다란 손이 지탱을 해줘서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이러면 잡히는 거 맞아?" 

"운이 좋으면." 

"많이 해봤나 봐? 

"아버지가 낚시 광이었어." 



다시 낚싯대를 휘둘러 던지며 버키가 말했다. 



"세간살이가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공장이 쉬는 날이면 나랑 스티브를 데리고 낚시를 다녔어. 왜 그런 거 있잖아. 아버지가 아들에게 꼭 물려주고 싶은 것들. 아버지한텐 그게 낚시였나 봐. 낚시를 알면 인생을 배우는 거라고 하더라고. 인내하고 타이밍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거야. 기회를 보고 낚아채는 거지, 이렇게!" 



저만치 흘러간 낚싯줄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버키가 낚싯대를 힘껏 당기며 줄을 감았다. 내려가는 물을 거슬러 동그란 윤곽이 드러났다. 손바닥만 한 작은 민물고기였다. 아가미에 낚싯바늘이 끼어 파닥거릴 때마다 물고기의 비늘에 무지개가 올랐다. 아픈가 봐. 꿰인 부분에 흐르는 피를 보며 토니가 작게 중얼거렸다. 버키는 손쉽게 바늘을 빼내어 고기를 도로 던졌다. 물에 빠진 고기가 활개를 치며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너무 어려. 왜 놔주냐는 듯 동그랗게 눈을 뜨고 올려다보는 시선에 버키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낚싯대를 휘두른다. 그 무심한 말에 토니가 황당한 듯 말했다. 



"어이 없어. 어린 나는 꿰어 놓고 물고기는 안된다는 거야?" 

"누가 채갈 것 같아 불안해서 놔줄 수가 있어야지.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예쁜 네 탓이라고. 이상한 억지 부리지 말고 이리 와. 발 시리겠다." 



여름이라고 해도 물이 차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소매 아래 살결에 오돌토돌 소름이 돋는 것을 본 버키가 토니를 끌어안아 올렸다. 자연스럽게 목에 손을 감아 안긴 토니가 버키의 어깨에 머리를 부볐다. 졸졸졸 흐르는 계곡의 물 소리와 낚싯대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 안겨있는 품에서 나는 단조로운 심장소리가 토니를 안정시킨다. 아- 너무 평화롭다. 아침 새벽부터 지금까지 스티브와 산책을 하고 아침을 먹고 버키와 낚시를 온 게 전부인 별거 없는 하루인데도 지루하지 않았다. 생에 이만큼 여유로워 본 적이 있나 생각해 보면 없던 것 같다.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컸고, 파티란 파티는 다 불려 다녔으며, 심지어 집에서도 아버지와의 다툼으로 조금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나마 정적인 시간은 연구실에 박혀 있을 때가 전부였지만 그마저도 머릿속에서 피어오르는 수많은 아이디어와 생각들로 인해 시끄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집에 가기 싫다." 



시간이 딱 여기서만 멈추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그토록 미쳐하는 기계나 공구 따위 없었음에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꿈같은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올 것이고 남은 학기를 마치러 다시 유학지로 돌아가야 할 것이었다. 그럼 잠시간 헤어짐이 있을 것이고 토니는 그것을 견딜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졌다. 예전에는 혼자가 낫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같이 있어보니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의존적이고 나약해졌나 싶지만, 그게 또 마냥 싫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그냥 이렇게 내동 같이 있고만 싶다. 가을이 오지 않고 끝나지 않는 이 멋진 여름이 계속되었으면 싶었다. 아이 같은 투정에 버키가 웃었다. 그 역시 다르지 않은 마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깨에 기댄 토니의 머리에 제 머리를 기대고 장난스럽게 부볐다. 



"너 유학 끝나면 셋이 같이 살까?" 

"그 때까지 어떻게 기다려? 그냥 런던으로 오면 안 돼?" 

"하워드한텐 뭐라고 설명하려고. 

"애완견 두 마리만 데려간다고 하지 뭐." 



푸하하- 토니의 재치 있는 대답에 버키가 박장대소를 했다. 으이구, 귀여워, 하면서 아프지 않게 토니의 어깨를 앙 물었다.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그냥, 네 곁에 살면서 아무것도 모른 채 그렇게 일상을 보내면 참 좋겠다. 현실이 제 맘처럼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을 토니도, 버키도 알고 있었기에 더 간절했다. 조였던 팔을 풀어 버키의 얼굴을 마주 보며 토니가 제법 진지하게 묻는다. 



"나 없는 동안 나 잊어버리는 거 아냐? 여기 어디다가 써놔야 할 것 같아. 내 꺼라고, 버키는 토니 스타크 꺼라고 써놔야지 안심할 수 있겠어." 



아아- 사랑스럽다. 버키는 그렇게 생각했다. 정제되지 않은 불안정한 토니를, 버키는 사랑했다. 처음 손에 쥔 제 애정을 두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도 좋았고, 어른이 되겠다고 호기롭게 말해 놓고도 여전히 아이 같은 고집을 피우는 그가 사랑스러웠다. 시야에 두어야만 만족할 것 같은 이기적인 아이의 마음만큼 제 안에도 자꾸 욕심이 커져서 큰일이다. 이러다 영 품에서 빼내기 싫어질 것 같아서, 다른 사람들은 나 몰라라 우리 셋만 영원히 살아지고 싶을까 봐 그게 또 두렵고 설렜다. 그런 까맣게 발린 속을 꺼내지 못 해서 버키는 토니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혀를 섞지 않는 입술을 더듬는 듯한 부드러운 키스 후 이마를 맞대며 버키는 새삼 모든 것이 감사하게만 느껴졌다. 인고의 시간 끝에 낚아채는 고기처럼 그 오랜 시간 얼려져 있음으로 시간을 건너 토니를 만나게 한 이 순간이, 자신이 낚아챈 가장 큰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My beautiful." 



너를 통해 세상은 아름다워지고, 내 삶이 영롱해진다. 스치는 바람 한 줌, 풀 한 포기마저 사랑스럽고, 너를 마주함으로 느끼는 모든 것들이 반짝반짝 빛나기만 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준 너는 이제 나의 숨이고, 내 삶이고, 나의 빛, 나의 모든 것이 되어버렸는데, 그런 내가 널... 



"내가 널 어떻게 잊을 수 있어." 



이미 내 안에 사는 너인데 어떻게 놓을 수가 있겠니. 






*** 






동그란 와인 잔에 와인이 가득 담기고 그걸 입에 머금은 토니가 꺄르르 웃었다. 식탁 아래 바닥에 닿지 않는 두 다리가 달랑달랑 거렸다. 그 움직임에 따라 촛불들이 흔들거렸다. 온 방 안을 예쁘고 따뜻한 색으로 물들인 촛불들이 와인잔에 비춰졌다. 식탁 의자에 앉은 스티브와 버키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오래된 노래들을 들으며 이 로맨틱한 순간을 즐겼다. 라디오에서 느린 재즈풍 노래가 흘러나왔고 스티브는 자리에서 일어나 토니에게 손을 내밀었다. 춤출래? 그 제안에 토니가 선듯 잔을 놓고 자리에서 내려와 스티브의 커다란 발 위에 제 발을 올려놓고 허리를 안았다. 아장아장걸음을 걷는 것처럼 스티브가 스텝을 밟는 대로 토니는 흔들렸고 그게 재미난지 낄낄 거리며 술로 달은 빨간 얼굴을 스티브의 가슴에 부볐다. 그걸 보며 버키는 꽤 아쉬운 듯 잔을 비웠다. 



"카메라 가져올 걸 그랬다." 

"응- 그러게. 다음에 셋이 사진이라도 찍어 놔야지." 

"뭐, 다음에. 천천히 해. 시간은 많아." 

"없어, 부족해. 하루가 48시간이어도 모자라. 날 사랑하는데 그 정도 시간은 들여야 하는 거 아냐?" 



스티브의 발에서 내려와 팔랑팔랑 걸어 버키의 무릎 위에 안착한 토니가 말했다. 토니의 볼에 입을 맞추고 버키가 낄낄 거렸다. 



"넌 예쁜 게 말도 이렇게 이쁘게 하냐." 

"누누이 말하지만 자꾸 예쁘다고 하지 마, 내가 여잔 줄 알아?" 

"스티비, 들었어?" 

"예쁜걸 예쁘다고 하는 건데 예쁘다고 하지 말라 하면..." 

"또, 또. 둘이 또 나 놀리지." 

"토니 네가 예뻐서 그래." 



토니의 앉은 자리로 다가와 고개를 숙여 콧잔등을 부비고 입술에 쪽 하고 키스를 남긴 스티브가 제법 재치 있게 말하자 투덜거리면서도 싫지 않은 듯 귀를 빨갛게 물들인다. 그리고는 등 뒤의 버키를 돌아보고 다시 스티브를 보며 셀죽하게 눈을 흘기다가 으으- 하고 몸부림을 친다. 그러더니 두 사람의 목을 한대 끌어안고 견딜 수 없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다 내꺼야. 맞지?" 

"그래, 다 네가 가져. 우린 다 네꺼야." 

"아, 행복해. 행복해서 죽을 수도 있어? 이러다 벌받을 것 같아. 너무 욕심내서 행복한 것 같다고 하늘에서 화나면 어쩌지?" 

"왜 그런 생각을 해. 걱정하지 마. 우린 영원히 함께 할 거니까 아무것도 무서워할 필요 없어." 



절대 깨지지 않을 것 같은 다짐을 되새기며 영원을 지껄인다. 그 입술로 사랑스러운 그의 몸에 입을 맞추고 숭배하듯 연정을 읊는다. 아슬아슬 타고 있는 촛불 너머 세 개의 그림자가 겹쳐졌다. 식탁이 덜컹 움직이며 위에 있던 와인 잔이 흔들리다 바닥 아래로 추락했다. 쨍그랑- 소리가 나며 투명하던 와인잔이 깨지고 바닥이 붉은빛으로 물들었지만 그것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 사람이 맞닿아 있는 곳으로부터 주변은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 했다. 그것이 어떠한 법이고 누군가가 정해놓은 잣대이고 윤리를 논하는 상식일지라도. 


불안정한 견고함이었다. 온전히 한 사람만을 향하는 애정, 두 사람 간의 깊은 우정, 유착이라도 봐도 좋을 욕심 서린 감정은 어느 쪽으로 치우지지 않는 완벽한 삼각형을 만들며 절대로 깨지지 않을 듯 단단해지기만 했다. 설령 그것이 무엇이라고 해도, 이 행복을 뒤집고 신께서 노하여 벌을 내린다고 해도, 함께 이겨내고 이 행복을 지켜낼 것이었다. 그럴 자신이 있었다. 입에 담고 있는 행복이 너무 달아서 몸이 썩어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도 함께이고만 싶었다. 손안에 천국이요, 팔 안에 낙원이었다. 뱀이 혀를 낼름대며 선악과를 건넨다고 해도 그 유혹에 넘어갈 일 조차,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게 영원해야만 했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세계에 정해 놓은 유일한 법이고 잣대이고 상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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