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 And Beautiful 12
( Steve Rogers, Bucky Barnes X Tony Stark )
버그도프 굿맨, 뉴욕 맨하튼 5번가의 가장 거대하고 웅장한 백화점에 토니 스타크가 떴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아버지가 벌어놓은 것만큼 천재적인 머리로 자기 재산을 불리고 있는 데다가, 결정적으로 손 크기로 유명한 이 어린 재벌의 등장으로 백화점 매니저는 득달 같이 달려나와 그를 보필하려 나섰다. 잘만 건수를 문다면 백화점 하루 매출을 한 번에 올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호들갑을 떨며 떠드는 매니저를 물리고 친구와 함께 여유롭게 쇼핑을 했다. 그의 옆에는 늘상 붙어다니던 찰스를 대신한 학교 동문인 제임스 로드가 붙어있었다. 사관학교를 들어간 이후 연락이 뜸하던 로드가 잠시 짬을 내 뉴욕에 왔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토니는 다짜고짜 쇼핑을 가자고 졸랐다. 이미 이런 일에 익숙한 로드는 친구의 황당한 요구에 흔쾌히 어울려 주었다.
사실 로드는 내심 그의 집에 기거하고 있을 캡틴 아메리카와 버키 반즈의 실물을 보는 것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토니와 같은 MIT출신의 공학자라고는 하나 그의 신분은 어디까지나 군인이었고, 군인에게 그 전설적인 인물들은 신격화 비슷하게 추앙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멋드러진 차를 끌고 등장한 토니는 혼자였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가 반갑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내심 기대했던 마음이 꺾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혼자 왔다는 사실에 실망한 것은 로드 뿐만이 아닌 듯 했다. 토니는 백화점을 돌면서 내동 불만스러운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그 슈퍼솔져들의 행방에 대해서 말했다.
"아버지가 워싱턴에 데려갔어. 쉴든지 뭐시긴지 알게 뭐야."
그래, 그는 아주 잔득 골이 나있었다. 모처럼 완벽한 여름 계획을 짜고 있는데 아버지에게 가로 채갈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더 짜증이 났던 건 그 모든 일들이 그가 자고 있는 아침 시간에 이루어졌다는 것이었다. 느즈막하게 아침잠을 자고 일어난 토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스티브가 급하게 휘갈겨 쓴 듯한 쪽지 한 장이 다였다. '일이 있어서 워싱턴에 갈 것 같아. 연락 할게.' 그 일에 관한 것도 자비스에게 전해 들었으니 토니가 골이 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타이밍 좋게 로드가 와서 다행이었지, 만약 아니었으면 혼자서 도피성 여행이라도 떠날 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화가 났음에도 토니는 여전히 그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온갖 매장을 돌면서 자신보다 큰 사이즈의 건장한 남자가 입을 법한 셔츠와 티셔츠, 바지를 쓸어 담고 있었다. 양복점 왓슨씨에게 전해 들은 사이즈를 바탕으로 그는 프라다 셔츠와 아르마니 정장, 입생로랑 가죽자켓, 발망 청바지를 종류 별로 골랐고, 심지어 넥타이, 신발, 심지어 커프스까지 온 브랜드를 돌며 사들였다. 이제는 불가리 매장에서 선그라스를 고르고 있는 친구를 보며 로드는 한숨을 푸욱 쉬었다. 토니 스타크의 재력과 거리낌 없는 돈지랄은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기 것도 아닌 남의 것에 이렇게 쓰는 걸 보니 좀처럼 적응이 되질 않았다.
"토니, 너 캡틴 아메리카라고 하면 치를 떨고 싫어했지 않았어? 아무리 정이 들었다고 해도 그렇지, 너무 많이 사는 거 아냐?"
"그 할배들 옷장을 못 봐서 그래. 가관이야, 아주. 트레이닝복이랑 청바지, 티가 다라니까? 그 꼴을 하고 워싱턴까지 갔으니... 그리고 상식적으로 샤넬을 모른다는 건 좀 말이 안되지 않아?"
"관심이 없으면 그럴 수도 있지."
"이건 관심 문제가 아냐. 젠장, 아버지는 무슨 공부를 시킨거야, 도대체? 뭐, 됐어. 그래서 어때? 이게 나아? 아님 아까 구찌가 더 나아?"
"어차피 두 개 다 살 거잖아."
우문현답이었다. 로드의 말에 고개를 갸웃 한 토니는 쉽게 수긍하며 불가리 선그라스를 구매했다. 기어이 아까 봐두었던 구찌 선글라스와 페라가모 구두 두 켤레를 사고 나서야 토니의 장황한 쇼핑은 끝이 났다. 양 손 가득 쇼핑백을 든 장정 네 명이 토니와 로드의 뒤를 따랐다. 그 수 많은 쇼핑백들을 차 뒷좌석에 밀어 넣고 그래도 조금은 마음이 풀렸는지 운전대를 잡았을 때쯤 토니의 기분은 꽤 좋아진듯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식사를 하자는 토니의 일방적인 계획에 따라 둘은 얼마 전 뉴욕타임즈에 실리며 최근 유명해진 소호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여기 꽤 괜찮아. 호언장담처럼 하는 토니의 말처럼 음식은 훌륭했다. 셰프 추천 메뉴에 비싼 와인까지 시켜놓고 둘은 그동안의 근황을 이야기 했다. 토니는 잠시 로드에게 무얼 어디까지 말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적당히 잘 지낸다는 말로 둘러댔다. 하지만 이미 그의 차 안에 가득한 쇼핑백의 주인들을 생각했을 때 '적당히'라는 수식어가 맞지 않다는 것 정도는 로드도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도 얼굴은 좋아 보인다?"
"그래?"
"어. 우리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언제였더라? 그래, 2년 전 런던에서."
"내가 어땠는데?"
"하루하루가 지루해서 견딜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생기가 넘친다고 해야하나."
"무슨... 헛소리야. 취했어?"
그렇게 핀잔을 주듯이 말하면서도 쑥쓰러워 하는 것 같은 모습에 로드는 웃었다. 그는 2년 전 아버지에 의해 런던으로 온 직후의 토니를 떠올렸다. 밝은 척 하며 놀잇거리를 찾으러 다니고, 술을 진탕 마시고, 밥도 굶은채 연구에 매진했지만 그는 늘상 어딘가 비어있는 것 같았다. 다 가진 듯 했지만 아무 것도 없는 듯 해 보이기도 했다. 그 빈 자리를 메워보려 찰스를 찾는 듯 했지만, 그마저도 완벽하진 않아보였다. 로드는 찰스와는 그다지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다. 토니를 가운데 두고 만나기는 했지만, 그는 어딘가 찰스가 불편했다. 그가 보기엔 찰스는 간을 보는 것처럼 약간의 여지를 남겨두고 토니가 저에게 매달리는 것을 즐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없으면 정말 텅빈 껍데기만 남아버릴까봐 제지를 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지금의 토니는 확실히 뭔가 달랐다. 빈 곳 없이 충만해 보였다. 늘 자기 중심적이고 고집 있어 보이지만 로드는 토니가 자기 울타리 안의 사람을 끔찍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차 안 가득한 쇼핑백을 봐도 그랬고, 안 그런척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그랬다. 아마도 지금의 토니를 만들어 놓은 것은 집에 들인 '문제의 객식구들' 덕분일 것이다. 토니의 아버지 하워드의 친구라고는 해도 실질적인 나이를 따지고 보면 그들도 그리 많은 나이는 아니었다. 좋은 친구가 생겼구나, 로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중에 만나면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식사를 마치고 로드와 헤어진 후 토니는 술도 마셨으니 타운에서 자고 가겠다고 마리아에게 연락을 했다. 사고 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그녀를 안심시키고 토니는 가장 가까운 5성급 호텔을 찾았다. 쇼핑 때문인지 아니면 와인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인지 몸이 노곤노곤 했다. 스위트룸까지 짐을 올려준 벨보이에게 팁을 건내고 토니는 늘어지는 걸음으로 킹사이즈 침대로 가서 그대로 엎어졌다. 옷도 벗고 해야하는데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었다. 그러자 문득 스티브와 버키가 떠올랐다. 그들이라면 그가 구지 부탁하지 않아도 망설임 없이 그를 안아 들어 머리 끝에서부터 발 끝까지 손수 씻겨 주었을 것이다.
좋아보인다는 로드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충직한 친구였고, 토니가 믿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이기도 했다. 늘 솔직하고 충고를 아끼지 않는 로드가 모처럼 토니의 얼굴을 보고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으니 얼굴에서부터 티가 나는 모양이었다. 고맙기도 하고 한 편으로 미안하기도 했다. 자신은 아무 것도 줄 수 없어서, 아마도 쇼핑은 그런 마음의 표출일지도 몰랐다. 돌아오면 저거나 입혀보며 놀아야겠다 생각하며 눈을 감는데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세요?"
낑낑거리며 몸을 일으켜 현관 쪽으로 갔다. 잠 때문인지 다리가 너무 무거웠다. 룸 서비스를 시킨 기억은 없는데. 하품을 쩌억 하며 잠으로 몽롱한 기억을 더듬다가 이내 포기를 하고 문을 열었다. 현관문이 열리고 보이는 것에 토니는 아까까지 몰려오던 잠이 싹 달아나는 것을 느껴야 했다.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언제부터인가 그의 의식 속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린.
"토니."
답지 않게 흐트러지고 지쳐 보이는 너.
"찰스."
빛 바랜 왕자님.
***
"전쟁이 끝나면 모든 게 다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심각한 얼굴로 서류들을 보며 스티브가 한탄했다. 서류 빼곡히 적혀있는 하이드라 잔당들의 활동 내역들은 그들의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머리 하나를 자르면 자른 만큼 다시 머리가 돋아나는 전설 속 히드라처럼 그들은 물 밑에서 꾸준히 세력을 넓혀 나가고 있었다. 지금은 당장 눈에 보이지 않을 지 몰라도 언젠가는 물 밖으로 들어나게 될 것이었다. 함께 내용을 보고 있는 버키 역시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런 둘을 보며 곁에 있던 페기가 한숨을 쉬었다.
"맞아요, 캡틴. 아직 전쟁은 끝난게 아니죠. 아주 조용히 움직이고 있다고는 하지만, 정황상 드러나는 것으로 보아선 모든 분쟁지역에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그들은 연관되어 있어요. 심지어는 국가기관과 기밀 첩보 기관까지 숨어들어 있죠. 차라리 나치 밑에 있었을 때가 더 구분하기 쉬웠었죠. 군복은 눈으로 구별이 가능 하잖아요."
"그렇다고 보고만 있을 수는 없네."
"그래서 쉴드가 있는 거에요."
페기는 제법 자신에 차서 얘기 했다. 흰머리와 눈가의 주름이 져 세월의 흐름을 탔다고는 하나 그 당당함 만큼은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새삼 추억에 빠진 스티브가 못내 웃었다. 한 때 서로를 위했던 그 때가 떠오른 페기는 괜히 쑥쓰러움에 헛기침을 하면서 늘어진 서류들을 정리했다.
"자세한 건 나중에 브리핑 하기로 해요. 어쨌든 캡, 돌아와줘서 고마워요. 버키, 당신도요. 행크마저 사라진 지금 같은 때엔 당신들이 꼭 필요 하거든요. 일찍 발견되어 다행이에요."
"뭐, 저야말로 바로 들어갈 직장이 생겨서 다행이죠. 하워드가 나가라고 했을 때, 길바닥에 나앉을 위험은 덜었잖아요?"
"오, 제가 장담하는데 하워드는 그러지 않을 거에요. 평생 끼고 살면 모를까."
버키의 위트있는 말에 재치 있게 받아친 페기가 어깨를 으쓱 했다. 때마침 대화 내용의 주인공인 하워드가 회의실로 들어왔다. 그는 상당히 들떠 보였는데, 그도 그럴것이 자신이 지금까지 했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쉴드에 자랑스러운 친구들이 찾아왔으니 내심 뿌듯할만 했다. 그는 멋드러진 콧수염 끝을 살짝 매만지며 거드름을 피웠다. 그런 친구의 모습에 익숙한 듯 스티브는 그의 어깨를 두어번 두드려주며 수고했다고 진심 어린 칭찬을 남겼다.
신이난 하워드는 그들을 데리고 연구실과 자료실 등 이곳저곳을 오가면서 많은 것들을 보여주었다. 지금 연구하고 있는 신무기라든지, 하이드라의 추적을 위해 만든 시스템과 혹시 모를 때를 위해 양성된 요원들의 훈련 모습 등이었다. 그것들을 보면서 버키는 지난 물놀이 때를 떠올렸다. 그 때의 평화로움이 그저 표면적이었나. 그렇게 생각하니 슬퍼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야 조금 사람 답게 평범한 삶을 살아보려 했는데 그들의 전쟁은 끝난 적이 없었으니 말이었다. 동시에 사명감도 밀려 왔다. 그것은 귀속된 국가를 위함이나 보편적인 충성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는 사랑스러운 토니를 떠올렸다. 하워드의 아들로 태어나 천재적인 머리를 가졌고 누구라도 눈을 돌리게 하는 독특한 매력 탓에 그 애는 항상 사람들의 눈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는 심심해서 읽었던 지난 신문들에서 토니 스타크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떠드는 가쉽지 기사를 보았었다. 하나 같이 허구성이 가득한 말들 뿐이었지만 그만큼 유명하다는 걸 말하는 지표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하워드의 자리를 물려받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이 살벌한 전쟁터에 연류될 수 밖에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버키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았다. 언제나 햇살 속에서 웃어야 할 아이였다. 그리고 이런 제 생각은 스티브 역시도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뭐 부터 하면 되는 거지?"
굳건하게 마음을 다지고 주먹을 쥔다. 하지만 전과는 다를 것이다. 전쟁의 고됨과 혹독함을 아는 것은 그들만으로 족했다. 그걸 위해서 그들은 기꺼이 다시 한 번 총을 들고 전쟁터로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지켜야 할 것을 위해서. 신념이나 사상, 국가를 위함이 아닌, 정말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
가장 사랑하는 그들의 아름다운 태양을 위해.
***
사람이라는 게 참 간사하다. 넘칠 만큼 원했던 것을 받고 나면 정작 지금껏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이 하찮게 느껴지는 것이. 토니는 와인바에 있는 와인을 잔에 따라 찰스에게 건네며 그렇게 생각했다. 한 때 반짝반짝 빛나던 그의 도피처이자 저를 보듬어주던 용감한 기사였던 찰스는 어느 때보다 힘들고 지쳐보였다. 그의 우울을 야기시킨 원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토니는 모르지 않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늦은 시간에 호텔에 있는 자신을 찾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처럼 와인을 들이키는 찰스를 보며 토니는 와인잔 끝을 매만졌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집에 전화했었어. 마리아가 말해주더라. 알잖아? 그녀와 나 사이엔 꽤 긴밀한 유대관계가 있다는거."
은현 중에 찰스는 유학시절 그녀를 돌봐 주었던 것을 상기시키는 듯이 말을 했다. 불편한 듯 토니는 마시지 않은 와인잔을 내려 놓고 머리를 짚었다. 어느새 비워진 잔을 탁자에 내려 놓으며 찰스는 쇼파에 앉아 토니를 가만히 보았다.
"말했지? 너 날 너무 방치했다고."
"사정이 있었어."
"사정? 무슨 사정? 토니, 네가 나한테 말 안 한적 있어?"
"상황이 그렇게 됐어. 그리고 연락은 너도 안 했잖아. 그렇게 날 원했으면 네가 먼저 연락 했어야지! 찰스, 너야말로 내가 먼저 찾기 전까진 연락 안하잖아. 힘들고 지쳐서 무너질대로 무너져 널 찾으면 그제야 인심쓰듯이 나를 받아 주는걸 즐기고 있었던 거, 몰랐을 것 같아? 내가?? 너야말로 나를 네 입맛대로 굴린 주제에 나만 잘못한 것처럼 말하지 마."
신경질적으로 취조하듯 쏟아내는 질문에 토니가 기어이 속에 가둬놨던 말들을 뱉어냈다. 찰스의 속내를 모르는 척 했던 것은 간절히 그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지옥 같은 집으로부터 벗어나 그가 안식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찰스의 품은. 그가 그런 상황을 즐기고 있었고, 결코 자신에게 전부를 내어주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그의 감정을 이용하는 것은 저도 마찬가지였기에 그의 오만을 눈감아 주었다. 곁에서보면 토니가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관계처럼 보일 지 모르겠지만 실상은 공생관계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자신을, 찰스는 몰랐다. 지금만봐도 그는 얼빠진 표정으로 토니를 보고 있었으니까. 그러자 입이 썼다. 어리광을 부리고 마냥 어린 아이처럼 있는 모습이 그는 전부라고 믿고 있었고, 결론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인 그가 저를 있는 그대로 봐주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했다. 그래, 토니는 어린 아이였다. 고집 많고 욕심 많고 철없고 사랑 받길 원하는 그런 어린 아이가 맞았다. 단지 영악하고 샘을 잘하는 비상한 머리를 지니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늘 변하기 마련이었다.
"....너 변했어."
"사람은 누구나 변해."
산도 들도 나무도 시간이 지나면 자라고 변하기 마련인데 사람이라고 그러지 않을까. 하지만 그 외에도 고작 몇 주 되지 않은 그 짧은 시간동안 그는 아주 천천히 조금씩 변했다. 가감없이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사랑을 받았고 자신의 편이 되어주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거기엔 조건도 계산도 없었다. 처음으로 가족 구성원이 아닌 타인으로 부터 받은 무조건적인 믿음은 토니를 성장시키고 있었다. 그것을 단지 몰랐을 뿐이다. 여전히 자신을 피터팬으로 생각하는 불쌍한 찰스는 오만한 나머지 토니가 바뀔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담담하고 단호한 말에 찰스는 허무한 듯 웃었다. 이 상황이 끝나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올 테고, 자연히 토니는 다시 제 곁으로 오리라는 확신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것이었다. 무엇이 그를 바뀌게 했나, 왜 자신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었나, 자신이 생각했던 것들이 왜 이렇게 변해버리고 말았나, 그렇게 생각하자 더없이 절망적이게 되었다.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찰스가 마지막 희망처럼 짧게 물었다.
"잤어?"
그것이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토니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금 맘을 다잡고 답을 했다.
"응."
그 말이 너무 잔인해서 숨통을 쥐고 비트는 것 같았다. 하지만 토니는 멈추지 않았다. 병아리를 손에 쥐고 사지를 짓눌러 죽이는 천진한 어린 아이처럼 죄책감 하나 없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보다 더한 것도 할거야. 그리고 이젠 너랑은 키스 안해."
"왜... 그 사람이 하지 말래서?"
"아니, 내가 하기 싫어, 이젠. 니 손 위에서 놀려주는거 질렸어."
기어이 난폭하게 토니를 밀어붙이고야 만다. 점잖았던 찰스의 얼굴에 날카로운 광기가 서렸다. 그는 서있는 토니에게 뛰어들었다. 그리고 커다란 손으로 토니의 뺨을 내리쳤다.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토니가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 졌다. 머리카락을 한줌에 쥐고 이끌자 작은 몸이 발버둥을 쳤다. 끌고 온 몸을 침대로 던지자 표독스러운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그 눈빛이 찰스 안에 억누르던 잔인한 폭력성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다시 한 번 토니의 뺨을 내리쳤다. 침대에 고꾸라지는 그에게 손을 뻗었다. 힘을 주어 발버둥치는 손 다리를 잡아 누른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하지만 몰아 붙여진 주제에 토니는 울지 않고 끝까지 그를 노려보았다. 어디 한 번 더 해보라고 도발하는 것 같은 눈빛에 찰스는 기어이 악에 받친 괴성을 질렀다.
"왜 그런 말을해? 난 너한테 최선을 다했어!! 네가 원하는 건 다 해줬잖아!!"
"널 주지 않았잖아!!!"
"....뭐?"
"나를 너에게 바쳐주길 바라기만 했지!! 넌 언제나 네가 우위에 있는 것처럼 굴었잖아!!! 내가 원하면 들어주긴 했지. 하지만 내가 뭘 원하는지 바라는지 물어보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았어, 넌!!!"
"넌 뭐든지 금방 질려하니까, 여지를 남겨야 내 곁에 있을 수 있으니까!! 그래야지 니가 나한테 올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넌 니가 보고 싶은 대로 나를 봤으니까! 미안한데, 틀렸어. 니가 이자리에서 나를 안는다고 해도, 난 절대로 너한테 안 줘, 나."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하는 말에 찰스는 허망한듯 토니를 짓누르던 팔에 힘을 풀었다. 분노가 가라 앉고 서서히 그는 절망하는 듯 우울하고 울음에 찬 얼굴을 했다. 엉망이 되어버린 이 관계의 끝을 보며 토니 역시 울고 싶었지만 억지로 참아 냈다. 끝내야 했다. 찰스가 저에게 얼마나 잘 해주었는지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관계는 끊어내지 않으면 더 나아갈 곳이 없었다. 언제까지고 발전이 없는 관계로 그를 묶어 놓을 수는 없었다. 이젠 제 손을 놓아야 했고, 그것이 찰스에게 할 수 있는 제 마지막 호의일 것이었다.
"널 사랑했어."
속죄하듯 찰스가 말했다. 흐느낌이 묻어나오는 그 고백에 토니는 이제는 지쳐버린 얼굴로 담담하게 답했다. 알아. 하지만..
누가 그러길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했다. 토니는 그것에 찰스가 처음으로 제 자존심을 내려놓고 하는 진심 어린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감흥이 없었다. 벌써 세 번째였으니까. 하지만 앞서 들었던 고백들처럼 마음이 설레이지도, 행복이 차오르지도, 심지어 동정심이나 측은함이 들지도 않았다. 그가 두 사람을 제치고 제일 먼저 저 얘기를 했다면 상황은 바뀌었을까?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만큼 안정된 충만감을 느끼진 못했을 것이다.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버키가 될 수 없고, 스티브가 될 수 없는 것처럼 결국 자신은 온전하게 그의 것이 되어줄 수 없었을 것이다.
"너무 늦었어."
그래서 미안하지도 않아. 죄책감도 안 느껴져. 결국 어떤 경우의 수가 있더라도 나는 나를 절대로 너에게 주지 않을 셈이었으니까. 그리고 넌 네가 감히 나를 가지고 했던 계산에 네가 빠지게 된 꼴이잖아. 그래서 토니는 마지막까지 축 쳐진 모습으로 방을 나가는 찰스의 뒷 모습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작별 인사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
어두운 새벽 저택의 문이 열렸다. 자고 있던 자비스는 문 열리는 소리에 놀라 잠옷 차림인채 거실로 나왔다. 어두운 탓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집으로 들어온 이는 다름아닌 그의 도련님, 토니였다. 타운에서 자고 온다고 하더니 왜 왔나 싶어서 불을 키려는 자비스를 토니가 손을 저어 제지했다. 그리고 검지 손가락을 입에 대고 쉿- 하며 속삭였다. 집안 사람을 깨우고 싶지 않다는 의도를 알아챈 자비스는 이만 올라가서 주무시라며 가볍게 목례를 하고 방 안으로 돌아갔다.
안도의 한숨을 쉰 토니는 조심스럽게 2층으로 올라갔다. 하마터면 얻어맞아 부어오른 볼과 터진 입술을 그대로 보일 뻔 했다. 찰스가 돌아간 이후 무언가 홀가분한 기분이 들면서도 괜히 허무해졌다. 호텔 로비 바로 가서 더 술을 마실까 하다가 더이상 이 곳에 있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우선적으로 들었다. 다시 찰스가 찾아오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자 처음 마주했던 그의 폭력성이 떠올랐고 어쩔 수 없는 공포가 밀려 왔다. 그즉시 프론트에 차를 대기시켜 놓고 그대로 새벽 어두운 거리를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집에 오니 좀 낫다. 토니는 제 방문 앞에서 심호흡을 하면서 생각했다. 사실 지금 당장 스티브와 버키가 간절하게 생각났지만, 워싱턴에 있는 그들을 억지를 부려가며 오게 할 수는 없었다. 그냥 오늘은 자고 내일은 선심써서 예쁘게 전화라도 해줄까 생각하며 방문을 열었다.
"이제 와?"
어둠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침대에서 부스스 일어나는 인형에 토니는 놀라 몸을 굳혔다. 뭘 그렇게 놀래? 하며 실 없는 소리를 하고 나자 그것이 버키라는 것을 알고 내심 안심했다. 그는 목을 가다듬는 척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입을 열었다.
"며칠 있다 오는 거 아니었어?"
"너 집에 안들어온다길래 왔다, 왜."
"와... 그거 병인거 알아? 의처증? 의부증?"
"사실은 지루하길래 스티브만 거기다 미끼로 던져놓고 왔어. 스티브 오거든 예쁜척 애교라도 피워줘. 걔 완전 골 났으니까."
차마 쉴드에서 봤던 자료들 때문에 괜히 마음이 쓰여 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괜히 그런 말들을 했다가 토니가 불안해 할 것 같아서 버키는 일부 진심을 생략했다. 자기만 놓고 혼자 간다고 스티브가 골이 난 것은 사실이긴 하지만. 속엣말들을 삼키며 버키는 일어나 토니의 얼굴을 보기 위해 침대 옆 보조 등을 켰다. 키지 마!! 토니가 뒤늦게 소리쳐봤지만 이미 불은 들어왔고 토니를 본 버키의 눈은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너, 얼굴이 왜 그래?"
버키의 커다란 손이 토니의 얼굴을 감싼다. 부어오른 곳을 누르는 탓에 토니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손을 쳐냈지만 소용이 없었다. 맞은 직후부터 시간이 지난 탓에 눈 옆까지 부어 오르고 입술은 뜯겨져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경악으로 찼던 눈이 금새 분노로 변질되었다. 당장이라도 이렇게 만든 이를 찾아다 주먹질이라도 할 기새였다. 토니는 고개를 저었다. 나 괜찮아. 하지만 그 말이 먹힐 리 없었다.
"누가 이랬어?"
"가다 맞았어, 그냥."
"거짓말 하지 마. 니가 잘도 맞고 다닐 성격이겠다. 말해, 누구야? 오늘 만났다던 로드라는 놈이야? 아니면..."
"버키, 제발."
얼굴을 잡은 손을 치우며 토니가 절박하게 버키의 품에 안겨들었다. 제 등에 두른 팔에는 힘이 없었다. 어딘지 지쳐보이기도 했고, 힘들어 보이기도 했다. 아마도 끝내 말해주지 않겠지. 그렇게 생각한 버키는 그를 추궁하기 보다는 그 작은 몸을 마주 앉아주었다. 어차피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중에 따로 알아보면 그만이었다. 그를 그대로 들어 안아 침대에 앉혔다. 입고 있는 옷을 벗겨 이불 안으로 밀어 넣은 뒤 버키는 다시 그 몸을 끌어 안았다. 아마도 혼자서 무서웠을 토니가 조금이라도 안정될 수 있도록.
안정된 숨소리와 익숙판 품 안에 있자 더 없이 마음이 가라 앉은 토니는 피곤함으로 느리게 눈을 꿈뻑거리다가 버키를 올려다보았다. 평소와 같았지만 화가 나는 것을 억누르는 것 같은 얼굴에 이내 웃어버렸다. 말하지 않아도 묻지 말아달라는 제 맘을 알면서도 저를 위해 화를 내는 것이 확실히 제 편처럼 느껴져서 귀엽기도 했고, 만약 스티브가 있었다면 똑같은 표정을 지었을 것 같아 그것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이 즐겁기도 헀다. 한편으로는 찰스가 자신에게는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다는 것을 떠올리자 또 침울해졌다. 결국 나는 지금껏 허울 좋은 껍데기만 가지고 있었구나 싶어서, 이제라도 이사람들을 만난 것이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해서.
"스티브 오면 어디 놀러가자."
"어디?"
"그냥, 아무도 없는데에서 이틀정도 놀다 오자."
"그래. 그러니까 오늘은 이만 자자."
"가면..."
"응."
"이제 어린애 안하려고."
그래서 당신들한테 다 주고 싶어. 그 뉘앙스를 알아차린 버키가 조금 놀란 눈으로 제 품에 토니를 내려다본다. 품 안의 아이는 어느때처럼 변덕을 부리는 것 같지도, 계산을 하며 저를 놀려먹으려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굳은 다짐을 한 것처럼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보며 버키는 이것이 토니의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 가져."
나를.
뒷 말은 뱉어지지 않았다. 버키는 뜨거운 입맞춤으로 그 대답을 대신했다. 어느때보다 부드러웠고 정열적이라서, 그것이 그가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려 왔는지, 얼마나 감격했는지 그대로 느껴지는 것 같아서 토니는 조금 웃었다. 안기겠다는 말이 단순한 잠자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버키와 스티브가 온전히 자신의 것인 것처럼 이제 자신은 그들의 것이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기 자신을 걸고서 하는 말이었는데 처음으로 손해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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