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여우 Prologue

( James T. Kirk X Montgomery Scott X Khan Noonien Singh )








 

 

 

헥토르(Hector)

 

아직 해가 오르지 않은 새파란 사막의 새벽이었다. 올림포스 국경지역이자 마르스에 인접한 작은 마을 헥토르에는 이 이른 시간에도 불구하고 온 집에 불이 들어와 있다. 나무로 만들어진 크고 작은 집의 창가를 환하게 하는 가스등의 빛에 어스름한 사막 풍경에 마을은 마치 새벽 별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마을 가장 가장자리에 놓인 작은 판자 집에 유독 사람들이 몰려있다. 그 집은 한 달 전 이 동네로 이사 온 한 목수 부부의 집이었다. 키가 커다란 남자는 자신을 조지라고 소개했다. 어스의 에우리디케 숲 근방에서 나무를 하고 살던 그는 여제가 내린 벌목 금지령 탓에 생계를 잃고 이곳까지 밀려왔다고 했다. 그의 옆에 있던 아내, 위노나는 만삭이었다. 곧 산달을 앞두고 있는 부인과 건장한 체격의 남자를 마을 사람들 모두가 반겼다. 애초에 국경 마을이라 이방인이 많은 곳이었기에 타지 인에 대한 배척은 적은 편이었다. 무엇보다 싹싹하게 마을 일손을 돕고 나서는 조지의 행동에 모두가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너나 할 것 없이 그들 부부가 이곳에 정착하는 것을 십분 도와주었다.

 

작은 집에서 위노나의 비명 소리가 났다. 그 마을 제일 고령인 할매가 땀을 뻘뻘 흘리는 그녀의 이마를 젖은 천으로 닦아 주었다. 조금만 더 힘을 줘요! 부인의 다리 사이에 있던 여인이 외쳤다.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이의 뺨을 할매가 몇 번이나 내치고 나서야 위노나는 조금 정신이 드는지 손아귀에 천을 부여잡고 아랫배에 힘을 준다. 다시 한 번 비명 소리가 울렸다. 아이고, 이러다 줄초상을 치르게 생겼다. 불룩 나온 배 윗부분을 밀어 주며 할매가 탄식했다. 옆에서 피 뭍은 천을 갈아 주던 여인이 위노나의 손을 꼭 잡았다. 정신 차려요, 저 바깥양반은 어쩌려고 이러세요, 하는 말에 그녀가 눈을 부릅뜬다. 조금만 더! 하는 외침에 기어이 비명을 크게 지르면서 아랫배에 다시 힘을 준다. 그녀의 비명소리에 놀라 저 멀리 도망가는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길어짐에 조지는 초조한 듯 다리를 가만두지 못하고 연신 바닥을 긁어댔다. 신발 밑창에 밀린 흙 때문에 땅 위 자국이 남았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무능함을 저주하는 중이었다. 첫 아이다. 아이를 가졌다 했을 땐 좋았는데 저리 죽을 동 살 동 힘들어 하는 것을 보면 두 번 할 짓도 못 된다, 싶어 아이의 형제를 만들어주기로 한 약속은 스스로 물려버리고 만다. 그는 이 순간이 어서 끝나 제 두 팔에 아내와 아이를 안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염없이 아직은 검은 저 하늘과 유독 밝은 별 빛들을 바라보며 그는 그를 위로하는 동네 남자들과 함께 어서 빨리 이 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응애- 하고 아이 우는 소리가 났다. 안에서 허겁지겁 나온 한 여인이 조지에게 이른다. 아들이에요! 그 말에 흙빛이었던 이의 낯에 혈색이 돌았다. 그는 허겁지겁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온통 난장판이었다. 피 묻은 천 뭉치가 여기저기 늘어져 있었고 탯줄과 태반이 담긴 시뻘건 대야가 저만치 치워져 있다. 하지만 조지의 걸음은 흔들림 없이 올곧게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아내에게로 향한다. 위노나는 실신 직전의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옅은 숨만 할딱이고 있었다. 늘어진 그 손을 조지가 잡았다. 손바닥에 손톱 박힌 자국을 보며 그는 안쓰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그녀가 남편의 어울리지 않는 여린 얼굴을 보고는 없는 기운에도 웃음이 나는지 입술 끝을 살짝 비틀어 올렸다.

 


"나 괜찮아요."

"수고 했어."

 


간단하고 단정한 말이지만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물씬 담겨져 있다. 이마를 맞대고 이 순간을 만끽하는 부부를 향해 여인이 속싸개에 쌓인 아이를 부인에게 건네준다. 갓 태어난 아이는 빨그스름한 피부에 눈도 뜨지 못한 채로 칭얼거리다가 제 어미 품에 안기니 또 조용해진다. 품에 어르고 보니 고생해서 낳은 것치고는 너무 작아서 좀만 힘을 주면 부스러져 버릴 것만 같았다. 부인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남편 역시도 아이가 여간 신기한 게 아닌지 낯설기도 하고 마냥 감격스럽기도 한 표정으로 그를 세심하게 쳐다본다. 아빠가 되었네. 그는 제법 감격스러운 듯 그렇게 혼자 중얼거렸다. 

 


"이름은 뭐로 하지?" 

 


아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위노나가 답했다. 

 


"당신 아버님 이름은 어때요?" 

"티베리우스? 너무 거창해. 너무 눈에 띄는 이름은 아니었으면 하는데..." 

 


그녀가 말한 이름이 꽤나 우스운 모양인지 조지가 헛웃음을 쳤다. 티베리우스. 그의 아버지 이름이기도 하지만 어느 왕의 이름이기도 했다. 사랑하던 오메가에게 버림받고 전쟁을 일으켰던 고대 왕의 이름, 그 이름 탓인지 제 아비도 그리 좋은 삶을 살았던 것 같지 않아 그는 그 이름을 물렸다. 조지는 고심하는 듯 한참 인상을 찡그리다가 이름 하나를 중얼거린다. 제임스- 하고.

 


"제임스, 제임스가 좋겠어. 당신 아버지 이름."

"응, 그게 좋겠다. 제임스, 짐, 우리 아가."

 


밋밋한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위노나가 아이의 이름을 노래하듯이 불렀다. 아기는 어미의 말에 답하듯 옹알거리며 아직 여물지도 않은 두 작은 손을 허공으로 쭈욱 폈다. 그리고 첫 울음을 했던 것이 곤했는지 이내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옷깃을 풀어헤쳐 볼록하게 오른 젖을 아이의 입에 물리자 배가 고팠는지 작은 입을 오물거리면서 힘차게 젖을 빨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른 것 같아 위노나는 아이의 젖 빠는 말캉한 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조지도 그런 제 아들이 마냥 기특하기만 한지 어느새 위노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녀와 아이를 두 팔로 한데 안아 품에 가둬 두었다. 참 예쁘기도 하지. 옆에서 뒷정리를 하던 할매가 허허 웃음을 터뜨리며 그 말에 그 예쁜 가족이 또 어여쁘게 웃는다. 좀만 더 커 봐요, 말도 안 되게 힘들어질걸? 차라리 말 모를 때가 편하지.. 우리 애는 말이에요, 하며 하나 둘 입을 여는 여인들의 수다가 이어진다. 그러다 막 핏물이 가득한 대야를 옮기던 여인이 문득 창가를 보다가 저 먼 하늘을 보았다.

 


"어머 저기 봐요." 

 


그 말에 모두가 창밖의 새파란 하늘을 바라본다. 동쪽에서 해가 올라 밝아지는 어둠 속에서도 유독 밝게 빛나는 별 하나가 보였다. 낮의 태양빛보다 더 밝게 지상을 비추는 별이 하늘의 어둠과 빛에 경계에서 영롱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어어- 이거 왜 이래? 밖에 작은 소란이 일었다. 남자들이 저희 집 마구간에 말들을 진정시키느라 정신이 없다. 말들은 발굽을 땅에 구르며 울음소리를 냈다. 그 경쾌한 리듬이 마치 노랫소리 같기도 하다. 낭만적인 새벽이었다. 별은 밝았고 아침은 오고 있었으며 하늘의 새들은 노래를 부르고 땅 위를 딛는 말들이 춤을 추었다. 어머나, 아름다워라. 모두가 탄식을 하며 그 샛별을 보았다. 할매가 껄껄 웃으며 부모의 품에 안긴 아이를 보았다. 

 


"크고 밝은 별이 뜨는 새벽에 태어난 아이는 크게 될 인물이라고 하던데, 아무래도 장군감을 낳은 모양이구려." 

 


그 말에 조지가 못내 기분이 좋은지 호탕하게 웃었다. 위노나는 젖을 빨다 말고 이제는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기를 보았다. 발그스름한 볼가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그녀는 말했다.

 


"장군이 되지 않아도 좋으니 건강하게만 자랐으면 좋겠어요."

 


그녀의 소원에 응답하듯 새벽별은 더욱 더 그 빛을 밝게 빛내고 있었다. 아직 아침이 오기까진 멀었는데 어디선가 소란스럽게 새 지저귀는 소리가 났다. 새 생명의 탄생을 새들도 축복하는 모양이라고 떠드는 사람들과 따뜻한 부모의 웃음소리 속에서 아이는 아무 것도 모른 채 곤히 잠이 들어있다. 앞으로의 제 운명이 어찌될 지도 모른 채 이 새벽, 태양보다 더 밝게 빛나는 별 빛을 내려 받으며 아기는 사막의 매서운 바람도 막아줄 수 있을 것 같은 부모님의 품에 안락하게 안겨 있었다. 영롱한 태양이 샛별을 먹고 곧 파란 하늘이 드리운다. 그렇게 아기는 처음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앙그르보다(Angrboda)

 

안 돼, 안 돼. 여인은 미친 사람처럼 마른 입술 사이로 중얼거렸다. 바삐 다리를 움직여 보지만 이 추위에 그게 쉬울 리 없다. 몸에 비해 지나치게 앙상한 발목이 꺾이며 그녀는 자리에서 그만 주저 앉아버리고 말았다. 순간 아랫배를 잡아당기는 듯한 강한 통증을 느끼며 억 소리를 냈다. 안 돼, 안 돼, 다시 초점 풀린 눈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두 손에 주먹을 꾹 쥔다. 하지만 그녀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부른 배아래 두 다리 사이는 붉은 피로 척척하게 젖어가고 있었다. 핏물이 하얀 눈 위를 적셨다. 기어이 네 발 걸음을 하는 그녀의 몸 뒤로 붉은 길이 생긴다. 어디선가 새벽을 가르는 짐승 우는 소리가 났다.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둘러 보지만 눈이 가득한 검은 산에 무엇이 보일 리 만무했다. 그녀는 배를 아리는 통증을 이겨내며 억지로 몸을 일으켜 언 발을 움직였다. 피 냄새를 맡고 몰려온 짐승들이 언제 그녀를 위협할지 모를 일이었다. 

 

다행이 들짐승의 표적이 되기 전 그녀는 무사히 몸 숨길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산 중턱 후미진 곳의 작은 동굴은 안락하다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매서운 칼바람을 피하기엔 적합해 보였다. 그녀는 이제 눈이 밟히지 않는 동굴의 딱딱한 바닥 위에 고꾸라져 버렸다. 오기로 잊고 있던 고통이 밀려오며 허리 아래가 빠질 것만 같았다. 안쓰러운 두 다리가 발버둥을 쳤고 뾰족한 돌에 긁힌 그녀의 바지가 찢어져 나가며 그 사이로 드러난 피부 위 생체기가 올라왔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억억거리며 바닥을 긁고 발버둥을 쳤다. 다리 사이 비집고 나오는 핏물들이 균일하지 못한 바닥에 웅덩이를 만들었다. 그녀의 몸이 저 밖 눈보다 새하얗게 질려갔다. 아파, 아파, 추위도 잊게 할 만큼 강렬한 아픔에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아랫배에 계속해서 힘을 주었다. 아랫도리가 찢어진 것 같았다. 하지만 살이 찢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내장 안을 휘저으며 안에서 밀려나오는 것에 비하면. 꿈틀거리며 겨우 겨우 동굴 벽에 몸을 기대었다. 고운 손 끝이 찢김에도 바닥을 바득바득 긁었다. 엇나간 손톱이 꺾이고 떨어져 나갔다.

 

새파란 눈에서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왜 이 순간 주마등처럼 머리에서 온갖 기억들이 지나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에게 삶이란 고통과 불행의 연속이었다. 귀족가의 영애로 태어났으나 위로 형제누이들이 많아 그닥 많은 관심을 받을 수 없었다. 거기에 오메가로서 발현을 하고 나자 그녀의 인생은 바닥으로 추락했다. 노르드들에게 오메가는 귀했고 그랬기에 초경에 발현하는 모든 오메가들은 성으로 불러 모여졌다. 그녀는 왕의 첩 중 하나가 되었다. 시집가는 날까지 그럴 듯한 걱정을 해주는 가족 하나 없이 왕과 독대를 했다. 현왕인 이반 4세는 폭군이었다. 첫 왕비가 지병으로 죽은 이후로는 무엇에 홀린 가람마냥 폭정을 일삼았고 부인이며 자식 할 것 없이 함부로 다뤘다. 첩의 입장으로 들어간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투박한 에시르의 인테리어 양식에도 불구하고 궁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방에 있었지만 그녀의 모습은 늘상 처량 맞기만 했다. 폭력과 폭언에 익숙해질 때 쯤 아이를 갖게 되었다. 순간 겁이 났다. 왕은 이미 자신의 아이를 제 손으로 죽인 경험이 있는 자였다. 그녀의 아이도 그리 되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다. 차마 임신을 했다는 사실도 알리지 못한 채 시름시름 앓아갈 때, 그녀를 도와준 것은 존 해리슨 공작이었다.

 

훤칠한 키에 노르드족 특유의 검은 머리와 푸른 눈동자를 가진 그는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있게 성에서 꺼내 주겠다고 했다. 조건 없이 주어지는 친절에 의심을 풀자 그가 말했다. 예전부터 당신을 지켜 봐왔습니다, 나와 함께 도망가요. 그 말을 차마 그녀는 거절할 수 없었다. 아마도 그녀가 조금만 더 절박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와 사랑에 빠졌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때는 그의 절절한 마음보다 오메가로서 본능적으로 느끼는 뱃속에 있을 아이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았다. 지금 생각하니 그녀가 자신이 가진 생에 유일했던 행운이 아마 그였던 모양이다. 성을 빠져나와 도망을 가는 중에도 왕실군경들의 추격대는 계속해서 쫓아왔다. 기어이 따라 잡은 그들이 공작을 잡아챘을 때, 총에 머리가 뚫리기 직전까지도 어서 도망가라고 외치던 그의 말에 그녀는 달렸다. 만삭인 몸을 이끌고 삼엄한 눈밭을 미친 듯이 뛰었다. 왕실 군경들은 그녀를 잡지 못했다. 잡지 못한 것인지 놔준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렇게 여기가지 왔다. 비지땀을 흘리는 눈 아래로 눈물이 맺히고 떨어진다. 마지막 힘을 다해서 배에 힘을 준다. 기어이 참아 왔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배 아래가 비는 것 같더니 밑으로 무언가가 쑥 빠지는 느낌이 났다. 마지막 기운마저 사라져 버린다. 꺼져가는 숨으로 다리 아래를 본다. 핏덩이가 가득한 다리 아래 피 묻은 살덩이가 있다. 울음조차 내뱉지 않은 채 미동 없이 움직이질 않았다. 손을 뻗어 만지고 싶은데 손가락 하나 들어 올릴 힘이 없었다. 그녀는 흐느껴 울었다. 차가운 돌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저 살덩이, 그녀의 아이가 죽었는지, 아님 살았는지, 하다못해 숨이 끊겼더라도 안아주고픈 데 그럴 힘이 없어 그녀는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르렁 거리는 날짐승의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옆으로 떨구자 동굴 입구 앞 소복이 쌓인 눈밭을 밟고 있는 늑대 한 마리가 보인다. 회검색 털을 휘날리며 금빛 고고한 눈으로 가만히 여자와 바닥에 버려진 아이를 보고 있었다. 그 애를 보는데 이상하게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이 안 든다. 그게 이 어둠에도 빛나는 저 금색 고요한 눈 때문인지, 아니면 그 늑대를 비춰주는 하늘 위 어떠한 존재보다 밝게 빛나는 별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늑대가 다가왔다. 늑대는 여자를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녀의 다리 사이 아기에게 다가간다. 킁킁 하고 코를 들썩이더니 혀를 내어 아기의 몸을 핥는다. 까끌한 혀에 피부 위에 올라와 있던 이물질들이 씻겨져 나갔다. 그제야 아이는 답을 한다. 옹알거리듯 칭얼거리는 소리를 내면서도, 갓난 애 답지 않게 울음을 터뜨리진 않았다.

 

 

"존, 존 해리슨. 내 아이란다."

 

 

다 꺼져가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주마등을 타고 찾아왔던 고마운 이를 떠올렸다. 자신과 아이를 위해 목숨을 던졌던 이의 이름을 달고 아기는 그의 몫만큼 더 오랜 시간을 살아갈 것이다. 그것이 그녀가 그에게 은혜를 갚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늑대가 고요한 눈으로 자신을 본다. 늑대가 사람 말을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마치 그렇기라도 하는 듯 늑대는 한참 그녀를 가만히 보다가 다시 아기에게 시선을 돌린다. 살짝 뒤로 물러선다. 하지만 발을 빼는 것은 아니었다. 마치 절을 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인다. 별빛이 드리는 곳에 막 태어난 조용한 아기와 그 앞에 절을 하는 늑대의 모습은 감히 성스럽기까지 하다. 그녀는 웃었다. 비록 미물이긴 하나 마지막 눈 감는 순간에 제 아기의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못내 안심이 되는 것이었다. 그녀의 고개가 힘없이 떨구어진다. 돌바닥에 무너져 내리는 신체는 미동이 없었다. 숨소리조차 나질 않는다. 

 

뿌우- 어디선가 뿔피리 소리가 났다. 왕가의 군경들이 부는 소리였다. 늑대가 고개를 쳐들었다. 뾰족한 귀가 쫑긋거리며 눈 숲을 헤치고 오는 이들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아까까지 평온하던 짐승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목 긁는 소리를 내고 황금색 눈에 살기를 띠웠다. 목을 울리며 늑대가 울었다. 산 전체를 울리는 울음에 응대하듯 곳곳에서부터 산발적인 늑대 소리가 들려왔다. 저들의 영역에 감히 침범한 침입자를 경계하는 소리에 올라오던 이들의 발걸음이 불안한 듯 부산스러워진다. 폭풍전야와 같은 고요함이 잠시간 머문다. 그르렁 소리는 짐승 소리가 나더니 비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동굴 안에 있던 늑대도 잇새로 으르렁 거리더니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음박질을 했다. 회검색 몸뚱이가 순식간에 어두운 새벽 숲 사이로 사라져 버린다.


동굴에 누군가가 들어오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왕가의 문양이 달린 제복을 입은 남자는 얼굴에 덕지덕지 묻은 피를 소매로 닦아 냈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던 털 뭉치를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늑대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져 대굴대굴 굴러갔다. 남자의 뒤에 쫒아오는 병사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 그들은 무엇에 홀린 것 같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바튼 숨을 연신 내쉬었다. 선두에 있던 제복의 남자가 동굴 안에 있는 여자와 핏덩이를 무심한 눈으로 내려 보았다. 이봐, 남자가 짧은 말로 뒤에 있는 병사를 부렸다. 병사 하나가 허겁지겁 여자에게 다가간다. 늘어진 그녀의 신체를 여기저기 살피고 손가락을 목 아래에 가져갔다가 고개를 젓는다. 



"아무래도 죽은 것 같습니다."

"제길, 오메가 계집 하나 때문에 이딴 고생을 하다니."



아까 덤벼들며 제 부하들의 목을 물어뜯던 늑대들이 떠올랐는지 남자는 치를 떨며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그는 구둣발로 여자의 시신을 밀어버렸다. 시신이 힘없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 사이 바닥에 핏덩이를 보던 병사가 아기의 벌름거리는 코를 보고 얼른 제 몸에 걸쳐진 외투를 벗어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아이는 산 것 같은데요?"

"왕가의 핏줄이다. 고이 모시고 가야지. 왕이 제 자식들을 도륙하고 있는데 하나라도 더 남겨야하지 않겠나."

"이 추위에 살아남다니 기적입니다. 게다가 여기 앙그르보다 숲은 늑대들의 영역인데, 피 냄새를 맡고 온 짐승 하나 없으니 말입니다. 샛별이 밝다 했더니 이런 일도 있군요."

"좆같은 전설 얘기나 할 거면 어서 나와. 늑대 놈들이 다시 오기 전에 얼른 여길 빠져 나가야해."



고작 샛별 하나에 꽤나 낭만적인 표현을 쓰는 부하를 보며 남자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주눅이 든 병사가 시선을 내려 아이를 보았다. 아기는 순한 건지 무딘 건지 지금 상황이 어떤지도 모른 채 곤히 자고 있었다. 여길 오면서 스물이 죽었다. 그 중 열다섯은 아까 덤벼오는 늑대들에게 사지가 찢겨져 죽었다. 그보다 많은 수의 늑대를 죽이긴 했지만 덕분에 샛별의 축복을 얻고도 아기는 태어나는 날부터 수많은 망자의 업을 이고 오게 되었다. 안쓰러운 것. 부하는 품에 있던 단도로 아기의 탯줄을 끊어내며 그리 중얼거렸다. 그리고 탯줄이 이어지는 자리 이제는 파리하게 질려있는 시체를 본다.



"시신은 어쩔까요?"

"뭘 어째? 내비 둬. 제 주제를 모르고 설치던 년이야. 여기 내버려 두면 짐승들이 뜯어 먹겠지. 서둘러 가자. 왕께서 기다리신다."



등을 돌려 나가는 상관을 보며 부하는 찜찜한 듯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내 걸음을 바삐 하여 숲 속으로 사라진다. 북의 아침은 쉽사리 빨리 오지 않았다. 볕도 잘 들지 않는 어두운 동굴에 몸을 잃은 늑대의 머리와 여자의 시신 한 구가 그렇게 버려졌다. 시간이 지나면 시체는 썩어 없어져 그 아래 뼈만 남을 것이고, 그녀를 기억하는 이 역시도 사라질 것이다. 그녀는 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몰랐을 것이다. 제 이름이 역사에 한 구절에 남게 될 것이며, 자신이 차가운 동굴 바닥에 낳은 아이가 장성하여 어미가 붙여준 이름을 기억하고 어미의 원통함을 가슴에 담아 두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두운 그녀의 삶에 유일하게 볕드는 순간은, 아마도 아이를 낳은 오늘 이 새벽이었을 것이다.


북의 아침은 쉽게 오지 않지만 그래도 태양은 반드시 뜨기 마련이었다.




볼룬드 (Volund)


아직 아침이 오지 않은 마을은 한산했다. 아니 애초에 이 마을에 기찻길이 들어서면서 이주민이 늘어나 주민이 줄어드는 탓에 빈집이 한 가득했다. 마르스 사막에 포함된 에시르의 국경지역은 그닥 살만한 곳이 못됐다. 땅이 말라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가축을 기르기도 힘들었다. 산악지라면 탄광이라도 캐고 나설 텐데, 그것도 아닌지라 그곳은 그저 아무 것도 없는 평야지대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마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게다가 현왕이 정신을 놓고 광기를 부리기 시작한 이후로는 국경 경비도 허술해져 에덴에서 넘어오는 침입자들에게 습격을 당하기 일쑤였다. 때문에 이곳은 예전부터 도망자들의 성지였다. 주목 받지 않고 쉽게 드나들 수 있으며 국경이 근처라 여차하면 법이 적용되지 않는 자유의 땅으로 도망갈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나무로 되어 있는 건물 벽 곳곳에서 현상금이 붙은 전단지를 쉽게 볼 수 있었다. 


끼익- 하고 소리 없는 정적을 깨치고 한 집의 마굿간 문이 열렸다. 열리는 문틈 사이로 아이 하나가 얼굴을 내민다. 열 살 내외쯤 되어 보이는 아이는 아무도 없는 거리를 살피다가 밖으로 나왔다. 둘러싸고 있는 모포에 지푸라기를 털어내고 아이는 살금 거리는 걸음으로 골목을 가로지른다. 그리고 그 길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제가 나왔던 문 쪽을 향해 손을 휘적거렸다. 



"킨저! 어서 나와. 시간 없어!!"



소리를 낮춰 부르는 말에 마구간 안쪽에서 작은 아이 하나가 튀어나와 그의 옆에 선다. 후드로 얼굴을 완벽히 은폐한 아이의 얼굴은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두 아이는 벽에 찰싹 붙어 건물 옆으로 쭉 뻗은 길을 흘끔 보았다. 그 길은 역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길의 끝에 마을 이름이 전각으로 새겨진 표지판을 단 기차역이 보였고 그 앞에 총을 차고 움직이는 보안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니미럴. 아이는 어린애답지 않은 욕지기를 하며 입술을 잘근거렸다. 그는 역 위쪽에 달린 시계를 보았다. 조금 있으면 기차가 당도할 것이다. 마을에 서는 기차가 그리 많지 않아 이번 기차를 놓친다면 일주일을 꼬박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아이에겐 그 기다림을 견딜만한 돈도, 시간도 부족했다. 때문에 오늘 새벽 기차를 반드시 타야만 했다. 아이가 어떻게 저 보안관을 따돌릴까 고민 하는 사이 킨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벽에 있는 전단지 하나를 보았다. 손을 들어 옆에 있는 아이의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아 좀 가만히 있어봐, 하고 귀찮은 듯 쳐내는 것에도 아랑곳이 없었다. 그러자 아이는 기어이 성질을 와락 내고야 말았다. 



"아, 왜!! 뭐!!"

"이거나 봐라."



갉작거리는 딱딱한 목소리였다. 킨저의 손이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아이는 굳어버리고 만다. 벽에 붙어있는 전단지 안에 그려진 것은 아이의 얼굴이었다. 그 밑에 이름과 현상금이 쓰여 있었다. 몽고메리 스콧, 현상금 100만유니언. 어린 애에게 걸린 숫자 치고는 지나치게 많은 양이었다. 그 말은 쉬운 사냥감을 노리는 현상금 사냥꾼들이 아이를 향해 눈을 부라리고 있다는 것이기도 했다. 스콧은 신경질적으로 전단지를 떼어내 아무렇게나 찢어버렸다.


염병할 아처, 탐욕스런 아귀 같은 놈, 스콧은 연신 잇새로 욕지기를 씹어 뱉는다. 반역자, 배신자, 매국노, 그의 아버지 앞에 붙은 수식어는 그랬다. 대대로 공학자 집안이었고 그의 위대한 조상은 빅토리아 시대에 증기기관을 개발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것은 단순히 학자로서의 열정과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그들은 대대로 조국을 위해서 일했다. 대의를 위해서라면 그곳이 에시르든 산지가 험난한 산맥 어귀든 상관하지 않고 움직여 그 기술을 배우고 또 연구하여 새로운 것을 창출해냈다. 연금술사에 버금가는 대장장이, 스콧이라는 가문이 가지고 있는 칭호는 그것이었다. 어쩌면 그들의 손이 금을 낳는 거위보다 더 값어치가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순수하게 공학을 연구하는 그들에게 정치란 불필요한 기 싸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당연히 권력싸움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스콧이란 가문이 가지고 있는 명예와 그들이 일구어낸 업적을 생각한다면 그깟 힘 싸움에 구지 끼어들지 않아도 권력이라는 것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고, 그 세력 중 한 가운데 있는 사람 중 하나가 조나단 아처 백작이었다. 그는 교활했고 욕심이 많은 자였다. 자연스럽게 스콧의 아버지에게 접근한 그는 온갖 찬양과 칭찬을 입에 담으며 뒤로는 작당을 모의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아버지는 에시르에 기술을 팔아넘겼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증거랍시고 제시된 아처의 손에 나온 문서들은 하나 같이 모르는 것들이었고 심지어 아버지의 글자도 아니었지만, 능구렁이 같은 힘 있는 자들이 깔고 뭉개는 틈에서 뭣 모르는 학자가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은 적었다.


너는 결코 누구의 것도 되어선 안 되며 어디에도 속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운명을 같이하게 된 어머니는 저를 붙잡고 그렇게 말했다. 스콧은 그 뜻을 몰라 되물었지만 어머니는 수척한 얼굴로 그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그 말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은 여왕이 직접 그를 찾아왔을 때였다. 패리스 여제는 어질고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대신들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나는 사안에 대해서 자신의 뜻을 밀어붙일 정도로 강하지는 않았다. 네 아버지가 누명을 썼다는 걸 알고 있다. 침착한 눈을 하고 저를 성 밖으로 내보내며 여제는 착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구나, 무능한 나를 절대로 용서하지 마렴. 여제의 전언을 마지막으로 스콧은 그녀가 함께 딸려 보낸 이름 모를 군인와 함께 수도를 빠져나가야 했다. 


부모님의 목이 잘린 것은 그로부터 3일 후였다. 본보기를 보이겠다며 성벽 위에 두 사람의 머리를 매달아 놨다는 말을 듣고 스콧은 그 자리에서 혼절하고 말았다. 강해져야 한다. 저를 국경 너머로 달리는 기차역까지 데려다 준 소령이 그렇게 말했다. 무엇을 위해서요? 스콧은 그렇게 묻고 싶었다. 가문이 받들어 모시던 국가는 자신을 버렸고, 이제는 가문이 가지고 있는 명예마저 잃어 남은 것이라고는 열한 살의 몽고메리 스콧, 그 이름을 가진 몸뚱이 하나가 다였다.


살고 싶어. 중간계의 가장 자유로운 도시 모닝스타에 와서 킨저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그렇게 말했다. 바위굴족, 높은 산 속 깊은 골짜기에 산다던 그의 종족들은 석탄을 체취하기에 좋은 신체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에덴에서 비싼 값에 노예로 팔리곤 했다. 킨저의 마을도 습격을 당했다고 했다. 부모님은 사라졌고 자신 역시 궐패들의 손에 이끌려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살고 싶어. 그 강렬한 열망을 듣는 순간 스콧은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쇠창살의 자물쇠를 끊어내어 그를 몰래 빼돌리고 말았다. 삶에 대한 열망, 그것이야말로 지금 스콧에게 필요했던 단 한 가지였기에.



"좋아, 킨저. 방법이 없어. 저 보안관을 따돌리고 달리는 수밖에는... 하지만 오늘 기차를 타지 않으면 그 망할 것들이 날 잡으러 올지도 몰라."

"좋지 않다."

"그래, 좋지 않지. 너도 노예로 팔릴 거니까 말야."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려는지 점차 하늘이 밝아져오고 있었고 기차가 올 시간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차피 기차를 못타면 저 보안관에게 총으로 맞아 죽는 것보다 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뜀박질을 할 타이밍을 보며 준비를 한다. 잠시간 두 아이에게는 비장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 때였다. 하늘 위에 커다란 별이 반짝하고 빛이 났다. 그 빛이 얼마나 밝은지 하얀색 빛은 마치 붉은기 없는 태양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뭐야? 하고 역 앞 보안관이 고개를 쳐들기 무섭게 갑자기 땅이 진동을 했다. 아니, 그것은 진동이 아니었다. 보안관의 옆에 가만히 휴식을 취하던 말이 갑자기 크게 울부짖으며 바닥을 따닥따닥 내리 친다. 그것은 그 말 뿐만이 아니라 온 마을의 말들이 다 그랬다. 그 소리에 놀라기도 무섭게 개들이 하나 같이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다. 긴 울음소리에 맞춰 새들이 마을 안을 빙글빙글 돌며 지저귄다. 대게는 까마귀가 많이 사는 동네였기에 떼를 지어 불길한 소리를 내는 검은 새의 행렬이 그리 썩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이 미친 말 새끼가 왜이래?!! 말을 진정시키느라, 하늘의 새를 보랴 보안관은 정신이 없었다. 지금이야!! 스콧이 신호를 했고 아이들은 골목 어귀에서 나와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뜀박질을 했다. 역으로 향하는 그 길이 짧은데도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시간이 느리게 가는 듯 스콧은 정신없이 달리는 와중에도 황망한 얼굴을 하고 있는 보안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보안관을 지나 기차 역 안으로 들어갔다. 애당초 그리 큰 역이 아니라 작은 홀을 지나면 바로 탑승구가 나왔다. 운 좋게도 기차는 막 도착했는지 희뿌연 연기를 내뿜으며 역 플랫폼에 멈춰 섰다. 내리고 오르는 사람들 틈에 스콧과 킨저는 끼어들어 검표원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여자들의 치마 사이사이를 누비어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사람이 좀처럼 오가지 않는 화물칸으로 급히 이동을 했다.



"흐우.. 운이 좋았어, 아이고... 죽는 줄 알았네."



겨우 어두운 화물칸에 다다르고 나서야 스콧은 쓰러지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직도 진정이 안되는지 심장이 벌렁벌렁 거렸는데, 얄밉게도 킨저는 제 종족 특유의 얼굴 때문인지 연신 무표정이다. 후드로 가렸던 얼굴은 바닷가 바위에서나 볼법한 굴 껍질을 닮아 있었고 초롱초롱한 검은 눈이 예쁘게 빛이 났지만 좀처럼 감정을 읽기란 어려운 편이었다. 이런 것에 이미 익숙한 스콧은 킨저의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는지, 품 안에서 커다란 양초 하나와 성냥곽을 꺼냈다. 성냥 하나를 켜서 초의 밑동을 녹인 후 바닥에 붙였다. 그리고 다른 성냥으로 심지에 불을 붙이자 어두웠던 창고 칸이 촛불의 테두리 안에서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제야 안심이 된 듯 촛불 하나를 두고 두 아이가 모여 앉았다. 스콧은 품에서 마른 빵 하나를 꺼내 반쪽을 킨저에게 넘겨주었다. 킨저는 이를 물렸다.



"난 배 안고프다."



그 말에 스콧이 코웃음을 쳤다.



"너 어제부터 아무 것도 안 먹었잖아. 거짓말 말고 이거 먹어."

"정말이다."

"....솔직히 말해. 부족할까봐 그래?"

"난 몸이 작다. 식량을 많이 필요로 하지 않아."

"작은 건 마찬가지야."

"넌 클 거야."

"이거 더 먹는다고 더 크는 거 아냐. 그러니까 얼른 먹어. 그리고 식량 떨어질 건 걱정 하지 마. 객실 가서 뭐라도 훔쳐오면 되니까."



부득불 빵을 입 안으로 넘기는 걸 눈으로 봐야지 직성이 풀리는 것처럼 끝끝내 고집을 부리는 스콧 때문에 결국 킨저는 빵조각을 받아 들었다. 빵은 그닥 맛있지는 않았다. 밋밋한 맛에 식감은 까끌거려 입천장이 다 까질 것 같았다. 하지만 시장을 반찬으로 삼아 먹으니 빵 하나가 두 사람 입에서 금방 사라지고 말았다. 배 안 고프다더니 게 눈 감추듯 해치우는 킨저를 보며 그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그래서 어디 갈 거냐."



모닝스타에서 구해진 이후로 스콧은 자신을 친구라고 했지만, 킨저는 아니었다. 킨저가 느끼는 감정에는 그 이상의 것이 있다. 킨저에게 스콧은 구원자였다. 어느 변태 놈팽이나, 돈 좋아 하는 페렝기족 같은 것들을 모시고 살 뻔한 운명을 지게 된 그를 그곳에서 꺼내준 것은 분명 스콧이었다. 그 이후로 킨저는 스콧의 속사정이 어떤지, 어디를 가는 것인지 먼저 물어본 적이 없었다. 물론 털어놓을 곳이 필요했던 듯 그는 미주알고주알 겪었던 모든 일에서 말해주었지만 킨저가 달리 조언을 해주거나 맞장구를 쳐준 적도 없다. 하지만 스콧 역시 그런 킨저를 나무란 적 없었다. 그저 고맙다고만 했다. 아무에게도 말 못했던 내 억울한 한을 쏟아낼 수 있게 해줘서, 지루한 내 열 살 인생을 꾹 참고 들어줘서 고맙다는 말들이 함축 되어있는 짧은 인사였다. 그 순간 킨저는 왠지 자신의 종족들이 가지고 있는 긴 수명기간 중 아주 오랫동안 스콧과 함께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킨저가 그런 질문을 했을 때 스콧은 짐짓 놀란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것이 불쾌하다거나, 킨저 같은 소수 민족을 다루는 오만한 귀족들이 짓곤 하는 꼿꼿한 표정을 보이지도 않았다. 어느 곳을 말해도 그는 자신을 따라 올 것이었다. 이곳까지 함께 왔던 것처럼. 그것을 알고 있기에 스콧은 숨김없이 목적지를 입에 담았다.



"델타베가."

"....거기 춥다."

"알아. 수도로 갔다가 거기서 한참을 또 이동해야 할 거야. 플루토에서 가까운 곳이니까 당연히 춥겠지. 걱정 마. 허드렛일이라도 해서 우리 둘이 입을 수 있는 짐승 털 하나는 구할 테니까."

"....."

"아버지 연구 자료가 거기 있어. 그걸 찾으러 가야해."



그의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까지, 대대로 스콧의 가문은 철로 점검을 위해 에시르를 자주 오가곤 했다. 그 중 델타베가는 플루토에 가까운 산악지대로 예부터 그의 조상들은 그곳에서 연구를 이어가곤 했다. 대게는 석탄 지와 가깝고 아무런 방해를 받을 수 없다는 이점 때문이었지만, 다른 이유는 보안 때문이기도 했다. 그들이 연구하는 것들은 조금만 비틀면 금방 무기가 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스콧의 가문은 평화와 양 국가 간의 안정을 위해 증기기관을 개발한 만큼 그것들이 악용되길 원하지 않았다. 때문에 델타베가에 연구실이 있다는 사실은 올림포스와 에시르 어느 고위층도 알지 못했다. 오로지 그의 가문 중 가장 뛰어난 가주들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이 아버지의 연구 자료를 찾아야 했다.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가 완성시키지 못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것을 왜 아처를 포함한 귀족들이 눈을 빛내며 탐했는지, 알아야만 했다. 아직 열한 살, 가문의 치욕과 추락한 명예를 짊어지기엔 너무 어린 나이었다. 하지만 스콧은 자신 있었다. 그의 여정이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이미 남에서 이만큼 온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기에 앞으로의 일이 두렵지 않았다.


트렉을 다라 기차는 달린다. 문득 스콧은 화물칸의 문을 살짝 열어 밖을 바라보았다. 아침은 오려는지 저 멀리서 태양이 오를 것처럼 지평선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고즈넉한 사막, 붉은 모래와 돌덩이들만 가득한 그곳 위 하늘은 낮의 빛과 밤의 어둠으로 혼합되어 오묘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그 위에 샛별 하나가 떠있다. 


고고한 자태로 지상을 내려다보는 그 별을 보며 스콧은 어머니가 남긴 유언을 떠올렸다. 너는 결코 누구의 것도 되어선 안 되며 어디에도 속해서는 안 된다. 그 말은 아마 조국을 위했다가 누명을 쓰게 된 아버지를 생각해 했던 말일 것이다. 도망자인 스콧은 올림포스의 국민도, 에시르의 국민도 될 수 없었다. 완벽한 로만인의 얼굴을 하고서는 저 차가운 노르드의 땅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가 얼마나 핍박을 받을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국적마저 없는 그를 지켜줄 수 있는 방패는 아무 것도 없었다. 홀로 싸워야 했다.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은 채로.


스콧은 어쩐지 저 샛별이 저와 닮은 것 같았다. 어둠에도 빛에도 속하지 않은 하늘 에서 홀로 묵묵히 빛을 뿜고 있는 저 별을 보며 그는 괜히 울적해져 코를 훌쩍거렸다. 옆에서 멀뚱하게 앉아 있던 킨저가 다가와 그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별다른 위로의 말없이 옆에 딱 붙어 맞붙는 어깨 너머로 체온을 전달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게 못내 위로가 되어 스콧은 가만히 그가 그러도록 내버려 두었다. 갈 길은 멀었다. 목적지인 델타베가까지 가는 여정처럼 열한 살의 그가 살아가야할 인생의 트렉 역시 한참은 남아있었다. 하지만 다행이도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비록 만난 지는 오래 안 되었지만 자신의 뜻에 묵묵히 따라주고 함께 해주는 친구가 있었다. 그러니 독하게 마음먹고 걷는 이 길이 마냥 외롭지도 않았다.


태양이 뜨고 있다. 그는 묵혔던 잠을 자기 위해 스르르 눈을 감았다. 곧 머리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목이 꺾이고 고개는 자연스럽게 킨저에게로 기대어진다. 킨저는 묵묵히 그 무게감을 견디며 해가 뜨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붉은 태양이 회색빛 그의 얼굴을 물들여간다. 그는 여전히 표정이 없다. 하지만 어쩐지 그 주름진 돌 같은 얼굴에는 앞날을 향한 걱정보다는 밝은 미래를 기대하는 희망이 가득 차있는 것처럼만 보였다. 이제는 아무 것도 걱정할 것이 없는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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