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여우 01
( James T. Kirk X Montgomery Scott X Khan Noonien Singh )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온통 얼어있는 새하얀 대지였다. 제임스는 당황했다. 그는 눈 감기 전의 상황을 되짚어 보았다. 뭣 모르는 열병에 걸려 제 침대에서 끙끙거리고 누워 있다가 겨우겨우 잠이 든 것이 기억이 마지막이다. 그렇다면 이곳은 어디인가? 애초에 그는 이런 눈밭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의 집이 있는 마을 헥토르는 사막이었고, 게다가 그는 한 번도 그 마을을 떠나 본 적이 없었다. 북쪽으로 올라간 적이 없었기에 태어나서 지금껏 눈을 본 적도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눈'이라는 것은 어머니가 머리맡에서 읽어준 <우리의 땅:코스모스>라는 책에서 나오는 지식이 전부였다. 플루토에 쌓이고 있고 우라노스의 온도를 낮게 하는 하늘에서 내리는 무엇. 제임스는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색깔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하늘에서 흰 눈발이 매섭게 내려오고 있었다. 손을 뻗자 손바닥 위에 올라온 눈송이가 체온에 녹아버렸다. 그게 퍽 신기해 손을 마냥 뻗고 있으니 한기가 느껴진다. 사선으로 떨어지는 눈의 방향을 보아서는 바람이 거센 것 같은데 이상하게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게다가 제임스는 지금 잠옷을 입고 있다. 열 때문에 그나마도 가지고 있는 잠옷 중 가장 얇은 천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왜 춥지 않을까? 그는 스스로 물음을 던졌지만 애초에 왜 여기 왔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 답을 알 리 없었다.
우웅- 하고 커다란 울림이 들려왔다. 눈발로 좀처럼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눈을 가늘게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흰 눈으로 덮인 평야 저 편에 균열이 일고 있었다. 쩌적쩌적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무언가 긴 막대기 같은 것이 튀어나왔다. 아니 그것은 막대기가 아니다. 꾸물거리며 접혀진 그것이 하나에서 두 개, 그리고 네 개로 늘어나더니 바닥을 짚고 구덩이 안쪽에 있던 커다란 몸을 꺼냈다. 그것은 제임스가 지금까지 읽었던 책의 어느 곳에서도 나오지 않는 기이한 생물체였다. 털이 북슬거리는 거대한 거미 같기도 했고, 어떤 맹수들을 합쳐 놓은 것 같기도 했다. 밖으로 나온 그것이 포효한다. 얼굴이 네 갈래로 갈라지더니 그 안에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네 개의 눈이 하늘을 보다가 저 편에 있는 제임스를 똑바로 쳐다본다. 그제야 추위를 모르던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단언컨대 지금껏 그렇게 필사적으로 뛰어본 적은 없었다. 제임스는 눈밭을 달렸다. 짧은 다리가 눈에 푹푹 빠져 속도가 좀처럼 나지 않았고, 도망가는 곳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저 짐승의 식사거리가 되지 않겠다는 일념 하나로 뜀박질을 했다. 헉헉거리며 숨이 차오르고 눈이 채여 넘어졌다가도 공포감에 네발로 기었다가 다시 몸을 일으켜 달리기를 한다. 아무 것도 없을 줄 알았던 저 너머에 회색 암벽이 보였다. 막다른 길이니 이제 끝났구나 싶었는데 그 벽에 작은 문이 보인다. 앞뒤 젤 것 없이 그는 그곳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차가운 철문을 미친 듯이 두드리며 외쳤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짐승은 길게 뻗은 네 개의 다리로 커다란 몸을 지탱하며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고, 거리는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그 때였다. 굳게 닫혔던 철문이 열리고 안에서 사람이 나오는 것이.
그는 젊은 남자였다. 적갈색 머리카락을 늘어트리고 홍조가 지는 붉은 볼, 청회색 눈을 한 그는 이 눈에 어울리지 않는 분명한 로만 인이었다. 하지만 제임스에게 지금 그가 로만 인인지, 노르드 인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살려주세요, 저기 괴물이...!!! 하고 뒤쪽으로 손을 뻗었다. 남자가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시선을 던진다. 하지만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가만히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임스는 남자가 반응이 없자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분명 징그러운 괴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더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눈밭 위에 쓰러져 버둥거리고 있었다. 제임스는 그 짐승 위에 올라탄 또 다른 검은 짐승을 보았다. 검은 짐승은 몸집이 작았지만 날렵했다. 이빨을 드러내 으르렁 거리던 그것이 짐승의 목덜미를 물었다. 괴로움에 발버둥치는 짐승 탓에 검은 것은 저만치 또 밀려났다. 하지만 다시 일어나 그것이 휘두르는 다리를 피해 다시 목을 물었다. 네 다리를 허우적거리던 짐승이 기어이 숨이 끊어진 듯 끈 없는 인형처럼 눈 위에 쓰러지고 만다.
그제야 검은 것은 입을 떼고 그 위에 위풍당당하게 서서 주변을 살피었다. 그 검은 털에 가려졌던 금색 눈이 커크를 향한다. 하지만 다가오지 않고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임스는 저도 모르게 넋이 나가 그 짐승과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손길을 느낀 것은 그 때였다. 뒤에서 가만히 있던 남자가 그의 어깨를 잡는다. 부드럽게 쓰다듬는 그 손에 제임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의 손이 제임스의 말랑한 볼에 올라왔다. 추위를 느끼지 못했던 그의 몸에 갑자기 훅- 하고 열이 올라왔다. 갈비뼈 아래 뛰는 심장 박동이 손끝까지 전해졌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분홍색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는 것을 그는 몽롱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미 보이."
어머니가 자신을 부르는 것처럼 달달한 애칭을 담는다. 그 익숙한 말이 체온에 녹는 눈꽃처럼 귀 안에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일어나."
헉- 소리를 내며 제임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꿈에서 채 나오지 못했는지 헐떡이는 숨을 내쉬며 멍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눈에 보이는 것은 익숙한 자신의 방과 병간호를 하던 어머니의 놀란 얼굴이었다.
"왜 그러니? 내가 괜히 깨웠나봐. 너무 심하게 앓길래 악몽을 꾸는 것 같아서..."
"아... 아니에요. 이젠 괜찮아요."
종일 작은 몸으로 열과 씨름하던 아들이 안쓰러운지 위노나는 제임스의 젖은 머리카락을 살살 넘겨주었다. 악몽, 이라고 하자 제임스의 머릿속에 아까 그 꿈결에 나왔던 장면들이 생생하게 재생되었다. 흰 눈 밭과 검은 짐승, 그리고 청회색 눈의 남자. 그저 지나가는 꿈이라고 하기에는 본 적 없는 눈과 알 수 없는 짐승, 모르는 남자, 어느 것도 그의 머리에서 무의식적으로 나왔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왜 그런 꿈을 꾸었을까? 거긴 어디고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다시 꿈속을 헤매는 제임스의 눈이 몽롱해졌다. 그곳에서 추위를 느낄 수 없었지만 남자의 따뜻한 손은 아직도 그 감각이 남아 있었다. 그건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피부 위로 닿은 부위를 중심으로 온 몸에 피가 빠르게 돌고 정신이 몽롱해지고 다리가 풀릴 것 같은 기분은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봐야 고작 열두 살이 된 그의 짧은 인생에서 견줄만한 경험이 많은 것도 아니었지만. 적색 머리카락이 얇아서 눈발에 흐느적거렸다. 뽀얀 피부에 지는 홍조가 추워서였을까 아니면 원래 그런 복숭아 색을 띠는 것일까. 청회색 눈동자가 북의 차가운 눈과 너무 잘 어울렸다. 그림으로 그리라면 당장 그릴 수 있을 것처럼 또렷하게 남은 잔상을 더듬는다. 기어이 짐, 하고 위노나가 다시 그를 부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다.
"열은 내렸어?"
때마침 조지가 방으로 들어오며 넌지시 물었다.
"응, 다행이야. 이 시기엔... 당신도 알잖아."
"그래, 천만 다행이지."
".... 뭐가요??"
한시름 덜었다는 듯 말하는 위노나의 말에 동의하는 조지의 목소리는 묵직했다. 자신은 모르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궁금증이 일어 제임스가 그렇게 묻자, 둘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아기는 어떻게 생기냐고 물었던 질문에 난감해하던 그 때의 얼굴이었다. 그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소리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조지는 어릴 때부터의 교육이 중요하다며 위노나에게 양해를 구했다. 어차피 알아야 할 이야기라면 되도록 숨기지 않고 말해야 나중에 뒤탈이 없다는 것을 조지는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위노나는 딱히 그 의견에 동의하진 않았지만, 말해주지 않는 다면 천덕꾸러기인 제 아들이 저를 얼마나 괴롭힐지 알기 때문에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부자간에 오붓한 시간을 허락해 주었다. 그녀가 방을 나가자 조지는 제임스의 침대 맡에 앉아 어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제 너도 다 컸구나."
"아뇨. 아직 크려면 한참 멀었는걸요."
"내 말은, 네가 알파로서 각성을 했다는 걸 얘기 하는 거야."
조지의 말에 제임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알파와 오메가, 그리고 베타의 상성에 대해서 책으로는 접한 적 있지만 자신이 알파일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도 그럴게 알파들은 대부분 귀족의 혈통에서 나오는 것인데, 자신이 사는 집은 모로 보나 평범한 가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들의 궁금증을 아는지 조지가 말갛게 미소 지었다.
"형질각성을 하는 시기에 모두가 너처럼 열병을 앓는단다. 신체가 변화되기 때문이거든. 특히 우성일수록 더 어린 나이에 각성을 하고 그래서 그 시기에 죽어나는 아이들도 많단다. 하지만 넌 잘 견뎌냈어. 네가 자랑스럽구나."
"그게 왜 자랑이 될 만한 부분인지 모르겠어요. 우성이라고 해도 다른 알파들처럼 신분이 높은 것도 아니잖아요."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상당히 많겠지만, 언젠가 너도 네가 가진 특권에 대해서 알게 될 날이 올 거란다. 걱정하지 마렴. 차근차근 알아 가면 되니까. 아빠가 도와줄게."
"알파에 대해선 알아요. 오메가와 베타에 대해서도요. 책에서... 그러니까 <종種>이라는 책에서요."
"델라 그린웨이, 아주 똑똑한 여자였지. 베타지만 가장 밑바닥에 있는 오메가를 돌보던 인권운동가였어. 꽤나 괄괄한 성격이었지만 그만큼 좌중을 휘어잡는 힘도 있었단다."
"아는 분이세요?"
"어릴 적에 몇 번 뵀었지. 5년 전에 세상을 떴다고 들었는데, 그 제자들이 여전히 그녀의 뜻을 알리고 있다고 들었단다."
헤에- 하고 입을 벌린 채 제임스는 눈을 반짝이며 제 아버지를 존경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평민의 신분임에도 아버지의 서재에는 책이 가득했다. 학교조차 없는 이 작은 마을에서의 시간을 제임스는 아버지의 서재의 책을 읽으며 보냈다. 책을 통해 글을 익히고 이 마을 밖 세상을 알아갔다. 그래서인지 그에게는 항상 저 바깥 세상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꿈에서 나왔던 북쪽 얼음 지대를 가보고 싶었고, 엔셀라두스의 평원에서 하늘로 치솟는다는 간헐천을 보고 싶었다. 여러 자유 민족들이 산다는 모닝스타와 요정들이 산다는 알세아스 숲과 곡식이 여문다는 비너스의 거대한 평야와 귀족들의 호화로운 성이 있다는 수도 유피테르까지, 제임스는 늘상 모험을 꿈꾸었다. 무엇보다 올림포스의 수도 유피테르와 에시르의 수도 보탄을 잇는 긴 철로 '스타트렉'을 달리는 증기기관열차를 타고 싶었다. 최초의 증기기관 개발자가 만들어 이름을 붙였다는 그 단일철로는 사방 각 도시에 뻗어있는 철로가 한 기점이 모여 에덴을 지나 에시르로 향해 그곳의 각 도시로 퍼져나간다. 애초에 상업 교류를 위해 만들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나치게 낭만적인 이름이다. '별을 걷는다니!' 어린 아이의 꿈을 구상하기에는 충분한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런 제임스의 아버지 조지는 한 때 여러 곳을 다녀온 경험을 머리맡에서 읊어주곤 했다. 그런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제임스는 아버지를 자연히 존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때때로 신문에 실리는 귀족들의 이름을 보며 마치 오래 알았던 사람인 것 마냥 이야기를 할 때가 있었다. 그래서 제임스는 아버지가 혹시 수도에서 도망쳐 나온 귀족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보곤 했다. 매일 후즐근한 옷을 입고 있는 아버지가 각진 정장을 입고 있다고 생각하니 영 간지럽고 이상해서 그만 두었지만.
"저도 언젠가 만날 수 있을까요?"
제임스가 희망에 찬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누굴?"
"그 사람들이요. 인권운동가, 법에 얽히지 않는 자유 민족, 에덴 땅에는 피부가 검은 사람들이 있다고 했어요. 보그 족은 신체의 절반이 태엽으로 되어 있다는 데 정말인가요?"
책에 보았던 모든 내용들을 쏟아내는 아들을 보며 조지는 못 말리겠다는 듯 껄껄 웃었다. 그리고 제임스의 부슬거리는 지푸라기 같은 머리카락을 큰 손으로 아무렇게나 헝클어 버렸다.
"네가 다 크면, 네가 보고 싶은 거, 가고 싶은 곳 마음껏 갈 수 있을 거야."
"그게 언제인데요? 제 키는 영 크는 것 같지 않아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금방. 시간은 아주 순식간에 흐르거든. 하지만 너무 조급해 하진 말아. 아버지는 그래도 네가 조금은 어린 아이로 있어 주었으면 좋겠구나."
".... 그건 아빠 생각이구요.."
입술을 삐죽거리며 제임스가 투덜거렸다. 조지는 그런 제임스의 옆에 자리를 잡고 누워 아들을 품 안에 꼭 넣었다. 얼른 자야지 키가 크지, 라고 달래듯 말했지만 오히려 잠이 오는 것은 자신인 듯 눈 깜빡이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요즘 이반 4세의 폭정을 피해 내려오는 이종족들 때문에 국경 경비가 강화돼 일이 많아진 탓이었다. 아들이 걱정되어 왔지만 그는 몇 시간 뒤에 다시 일터로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버지의 고됨을 아는지 모르는지, 밤새 열병으로 잘 만큼 잔 제임스는 더 자고 싶지 않은지 조지의 품 안에서 꿈지럭거렸다. 그리고 어젯밤 꾸었던 기이한 꿈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어제 꿈에서 눈을 봤어요. 그 말을 시작으로 조근조근 하는 말에 잠이 낀 목소리로 조지가 맞장구를 쳐준다. 아버지가 저에게 해주었듯이 이번엔 아들이 아버지에게 작은 이야깃거리를 읊어준다. 조곤조곤 작은 목소리로 꿈 이야기를 하는 제임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조지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꿈의 요정조차 감히 그의 눈 밑으로 침범하지 못할 정도로 깊은 잠에 빠졌다.
***
에시르의 수도 보탄, 왕의 성 궁니르의 홀은 그 투박한 내부 수 많은 방들 중 가장 호화롭게 꾸며진 곳이었다. 궁니르는 타티아나 산의 돌을 깎아 그 위에 얹어진 모양으로 지어놓은 성이었다. 홀은 거대한 바위에 구멍을 뚫어 만든 것처럼 전면이 거대한 돌산을 깎아낸 모습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마냥 심심해 보이지 않는 것은 바위에 박혀있는 온갖 광물들이 빛을 받아 반짝이는 탓이었다. 게다가 홀 위에 높은 천장이 있고 그 곳에는 솜씨 좋은 석공들이 깎아 놓은 조각들이 새겨져 있었다. 건국 신화에 나오는 거인 이미르와 그의 오른팔에서 나온 검은 늑대 펜리르, 왼팔에서 나온 흰 뱀 요르문간드였는데 이는 고대 유명한 예술가 비겔란이 12년에 걸쳐 완성한 것이었다. 정면으로는 마찬가지로 돌산의 일부를 깎아 만든 거대한 의자가 있었다. 천장에 닿을 듯한 높이의 등받이를 한 의자는 왕의 의자였고 그 양 옆으로 왕가의 문장이 그려진 깃발과 국기가 늘어져 있었다.
왕 이반 4세는 왕좌에 앉아 거만한 눈을 아래로 내리 깔고 제 아래 있는 이들을 보았다. 아래에 한쪽 무릎을 꿇고 일는 올림포스의 대신은 참을성 있게 왕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주름진 피부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반지가 끼워진 손으로 돈을 세는 것처럼 손가락 끝을 비벼댔다. 그는 잠시간 더 침묵을 지키다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짐의 땅에서 나간 이들이 우리의 책임이 될 수는 없지."
왕의 목소리는 뱀의 속삭임처럼 가늘고 쉭쉭 거렸다. 그 속에는 노련한 교활함과 수를 셈하는 탐욕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혀끝을 반으로 갈라놓는다고 해도 그런 소리가 나올 것 같지 않다고 파이크 대공은 생각했다.
"하지만 에시르에서 빠져 나온 로뮬란들이 죄 없는 우리의 백성을 약탈하고 있으니 이를 헤아려 주심이 옳은 줄 압니다."
"올림포스 국경의 방비까지 우리가 신경 쓸 이유는 없다. 야만인들로 백성들이 죽어 나간다면 그건 무능한 그대들의 여제 탓이겠지."
거리낌 없이 저들의 여제를 낮춰 말하는 것을 보며 올림포스의 대신들이 하나 같이 이를 즈려물었다. 그나마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파이크가 웃는 낯으로 왕을 올려다보았다. 참 기고만장한 이다. 이미 이반 4세의 폭정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백성들은 착취당하고 세금으로 온갖 진귀한 보석들을 몸에 걸치며 거리낌 없이 오메가들을 탐했다. 친자식이라고 밝혀진 것만 열이 넘었고 사생아는 넘쳐 난다고 했다. 그마저도 왕이 미쳐 날 뛸 때 마다 하나씩 목이 나가떨어지길 일쑤였다. 그런 소문들을 알고 있기에 그들 역시 딱히 대단한 대답을 기대하고 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돌아오는 답을 막상 들으니 불쾌함이 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찌 여제께서 그런 문제를 고려하시지 않으셨겠습니까. 다만, 국정사가 많아 눈여겨보며 늘 신경 쓰시진 못하시니 저에게 모든 일을 일임하셨습니다. 때문에 국경 방비가 그렇게 된 탓은 저에게 있지요."
"그렇다면 여제는 무능한 자네를 그냥 내버려 둔단 말인가? 만약 내가 자네의 왕이었으면 벌써 목이 날아가고도 남았을 것이다."
콧대를 치켜들며 왕이 말하자 파이크 대공 옆을 지키고 있던 두한이 분을 이기지 못해 무어라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파이크는 그를 제지했다. 여기서 섣불리 입을 놀렸다가 정말로 저 왕이 제 목을 날릴만한 구실을 주는 것 밖에는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달리 불쾌함을 나타내지 않으며 포커페이스를 지키려 노력했다.
"네, 이게 다 제 부덕이니 그렇게 말씀하셔도 반박 할 수 없습니다. 하여 이렇게 도움을 요청 드리니 왕께서 왕다운 아량을 베풀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비단 옆에서 듣기에는 단 말 같지만 안에 굵직한 뼈가 담겨 있었다. 왕답게 굴어라. 그렇게 말하는 뜻을 왕 역시도 눈치 챈 모양이었지만 달리 불쾌함을 표시하지 않은 것은 옹졸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임이 분명했다. 왕은 노련한 혀를 내두르는 파이크 대공을 유심히 보았다. 포커페이스를 지키고 있는 그의 속내를 알기란 쉽지 않았다. 고작 군사를 요청하려고 이 먼 곳까지 오지도 않았을 테고, 대단한 대답을 기대한 것 같지도 않았다. 손가락 끝을 문지르는 속도가 빨라졌다. 한참을 침묵한 왕이 느긋한 목소리로 답했다.
"군사를 움직이는 건 짐이 온전히 결정할 문제는 아니네. 대신들과 상의해서 답을 주겠네."
"감사드립니다."
시선을 내려 고개를 숙이며 파이크 대공이 예를 취했다. 그리고 같이 온 일행들과 몸을 일으켜 다시 한 번 목례를 하고 홀을 등지고 나왔다. 커다란 홀에 그들의 발소리만이 왕왕 울렸다.
"이건 완전히 시간 낭비였어요."
홀 문을 열고 나와 복도를 걸으며 아까까지 화를 참고 있던 두한이 기어이 불만을 토로했다. 파이크는 그저 웃으며 애 같은 그의 투정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니모이. 자네 생각은 어떤가?"
"두한 공의 말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왕이 요청에 대해서 고사할 것은 예상했던 사실이지만 먼 길을 온 것에 비해 얻은 정보가 별로 없습니다. 충성심인지, 아니면 벌을 받을 것이 두려워서인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으니 말입니다."
"흠, 켈리가 별로 좋아하지 않겠는 걸."
먼 여정은 질색이라며 처음부터 따라오길 거부했던 주치의 켈리를 떠올리며 파이크는 못내 웃었다. 지금쯤 이렇게 억지로 끌려온 것에 대한 무언가의 수확이 있길 바라며 숙소에서 저들을 기다릴 그에게 무어라 설명해야할지 꽤나 난감했다. 어차피 다친 곳 없이 무사히 돌아온 것에 만족하며 결과에는 별 신경 쓰지 않을 테지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던 파이크의 걸음이 갑자기 뚝 멈춘다. 그 걸음에 맞춰 걷던 두한과 니모이 역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은 길게 뻗은 복도 정면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긴 복도 가운데에 있는 검은 짐승을 보고 있었다.
검은색 털을 하고 금색 눈을 빛내는 그것은 분명 늑대였다. 하지만 보통 늑대라고 하기에는 그 키가 성인 남자의 허리까지 오는 것이 지나치게 거대하다. 올림포스의 어스 숲 등지에서도 늑대들을 볼 수 있었지만 이만한 크기를 가진 것은 없었다. 게다가 저런 늑대가 왜 이 성 안에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북쪽에는 거신 이미르의 영향으로 플루토 너머로부터 오는 여러 괴물들이 산다고 했는데 이 늑대도 그 중 하나인지도 몰랐다. 그도 그럴게 그 외관응 보면 태양을 물고 뛴다던 신화 속 늑대 펜리르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왕이 방심한 저들을 헤치기 위해 일부러 풀어 놨는가. 파이크는 아까 왕과 했던 대화들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품 안에 있는 총을 꺼내었다. 옆에 니모이와 두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총을 장전하는 덜거덕거리는 소리에 늑대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을 노려본다. 닫힌 입이 벌어지고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나며 그 사이에서 그르렁거리는 위협적인 소리가 났다. 파이크는 과연 자신이 총을 쏘는 것이 늑대가 제 숨통을 씹어 삼키는 것보다 빠를지 의문이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자신은 없었다.
"베르겔미르."
어디선가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늑대는 이방인들을 향한 위협을 멈추고 고개를 쳐들었다. 늑대가 있는 복도 뒤쪽 문에서 한 아이가 나왔다. 열 두엇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는 회색이 섞인 늑대 털로 만들어진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아이는 새파란 눈으로 늑대와 그리고 그와 대적하고 있는 남자들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더니 손을 뻗어 손가락 끝을 까닥거린다. 이리 와. 그러자 아까까지 이빨을 드러내던 늑대가 순한 개가 된 듯 꼬리를 흔들며 아이의 손에 젖은 코를 비벼댔다. 아이는 만족스러운 듯 창백한 얼굴에 미소를 띄며 코를 문지르고 턱 아래를 간질여 주었다. 파이크와 두한, 니모이는 그제야 손에 쥐고 있던 총의 장전을 풀고 품에 다시 집어넣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아이에게 다가갔다. 늑대는 이제 그들은 안중에도 없는지 주인의 뒤쪽으로 걸어가 얌전히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세 사람은 아이 앞에서 고개를 굽히며 예를 차렸다.
"제 짐작이 맞다면 제 8왕자 되시는 칸 누니엔 왕자 되시겠군요."
"말씀 낮추시지요. 소문으로 많이 들었습니다, 파이크 대공."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아이 답지 않은 어른스러움으로 칸은 파이크의 인사를 받았다. 파이크는 아까까지 형식적으로 짓던 미소를 거두고 진심으로 입 꼬리를 들어올렸다. 이반 4세가 역사에 길이 남을 폭군임에는 분명 하지만 유일하게 잘 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칸 누니엔 싱을 생산했다는 점일 것이다. 왕의 자식들은 하나 같이 아비를 닮아 얼간이들만 가득했다. 사치를 부리고 권력을 휘두르는 이가 있는가 하면 목숨이 빼앗길까 눈치를 보면서 기어다니는 베포 없는 이도 있었다. 그 중 왕세자인 표도르는 정치에 관련된 어떠한 것에도 관심이 없으며, 오히려 주목 받길 두려워하고 사람 앞에 나서길 무서워하는 그릇이 작은 이였다.
그에 반에 칸 누니엔은 계승 순위 8위에, 열두 살의 적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대외적으로 평판이 좋은 편이었다. 아이 답지 않게 철없이 떠들 줄 몰랐고 이곳의 왕족들 중 유일하게 예의라는 것을 알았다. 아이는 일찍이 글을 떼고 책을 읽으며 수많은 지식을 습득해왔고 그것을 대화에 적절히 사용하는 방법을 알았다. 별달리 사치를 부리지 않았고, 오히려 수도에 있는 날보다 외부에 있으며 백성들을 돌보는 시간이 많다고 했다. 때문에 에시르의 백성들 대부분이 현 왕세자보다는 칸이 왕위에 오르기를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를 입에 함부로 담지는 않았는데 혹여나 이 이야기가 이반 4세의 귀에 들어갔을 때, 왕자가 입을 해를 알기 때문이었다. 백성들이 그리 생각하는 왕자라면 능히 나라를 다스릴 줄 아는 어진 왕이 될 만한 재목이었다.
"이 애 때문에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저랑 워낙 바깥 생활을 많이 하다 보니 궁에 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질 않아서요."
"아닙니다. 저희야말로 이 아이에게 위협을 주었던 것 같군요. 미안하구나."
사과를 하며 파이크가 손을 뻗자 왕자 뒤에 있던 늑대가 코를 가져대 냄새를 맡고는 그가 제 콧잔등을 살살 쓰다듬도록 내버려두었다. 마치 그 사과를 알아들은 것처럼. 영민한 동물이었다.
"그나저나 늘 성을 비우신다고 들었는데 모처럼 돌아오셨나 봅니다."
늑대와 놀고 있는 파이크 대신 두한이 사람 좋은 웃음을 띠며 물었다.
"플루토에 눈 폭풍이 심해 그 경계지역에 있는 마을들로 눈이 범람한다고 들어 상황이 어떤지 돌아보고 오는 길입니다. 오는 길에 지금은 사람이 없는 유령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우연치 않게 값비싼 보석을 발견 했거든요."
"그렇습니까?"
"네. 알아보니 올림포스에서 여기까지 건너온 보석이더군요."
"그런 보석이 있었습니까? 이런. 저희로서는 안타깝게 되었군요."
"원래 보석이란 세공하기 전까지는 그 값어치를 모르는 법이죠."
"그래서 그 보석을 가지고 돌아오신 거군요."
"비싼 만큼 다루기가 어려워 안전하게 보관하려고 성으로 가져 왔습니다."
칸은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차분하게 답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는 파이크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갔다. 대공? 옆에서 이상함을 느낀 니모이가 그를 부르자, 그는 늑대의 콧잔등을 쓸어주던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여전히 웃는 낯을 하고 있는 어린 왕자를 보더니 이내 답하듯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다만 그 미소는 아까와는 달리 다분히 지어진 웃음인 것처럼 어딘지 일그러져 있었다. 그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저희가 왕자님의 시간을 너무 오래 잡아 두었던 것 같군요. 이만 저희는 가보겠습니다. 하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칸이 고개를 까닥하며 이에 답하자 셋은 다시 그들을 지나쳐 가던 길로 걸었다. 지나가던 걸음을 다시 잡은 것은 왕자였다.
"요즘 체스를 배우고 있습니다, 대공."
"... 그렇습니까?"
"네, 이게 참 재미있는 게임이더군요. 말 하나 움직이는 데도 몇 수를 내려다 봐야 하니까 말입니다. 특히 폰은 그냥 버리기 쉬운 가장 약한 말이지만 가장 첫 수를 두는 말이기도 하죠. 제 스승이 그러덥니다. 진정한 고수는 폰만으로도 왕을 잡을 수 있다고. 가장 적의 경계 앞에 서있고 수가 많기 때문이죠."
"왕자께서 영민하시니 충분히 그러실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아직 멀었습니다. 한 번도 스승에게 이긴 적이 없으니 말입니다."
늑대 턱 아래를 긁으며 칸이 조근조근한 말로 말했다. 기분이 좋은지 늑대가 그르릉거리는 목 울림을 울렸다.
"결국에는 폰을 움직이는 것은 왕이지 않겠습니까."
"...."
"모쪼록 살펴 가십시오. 조만간 올림포스로 찾아 가겠습니다. 그 때는 한 수 가르쳐 주세요."
"...그러지요."
"그럼."
고개를 꾸벅이며 목례를 하고 칸은 제가 나왔던 방으로 들어갔다. 늑대 역시 주인을 따라 걸었다. 살랑 살랑 흔들리는 늑대의 꼬리가 사라지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힌다. 잠시간 침묵이 머문다. 파이크가 먼저 발을 떼자 두 사람이 뒤따라 움직였다. 파이크의 느긋하던 걸음이 점점 빨라지며 종내에는 뛰기 시작했다. 얼굴은 굳어있고 입술이 아까의 미소를 지운 채 일자로 꾹 닫혀있다. 그 뒤를 따르는 니모이 역시도 그랬다. 유일하게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지 두한 만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허둥지둥 그를 따른다.
"대공,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아까 왕자가 하는 말을 듣지 못했나? 하찮은 폰을 움직이는 건 결국 왕이라고 했네."
사치가 많은 왕이 자국민을 국경 밖으로 함부로 내보낼 리 없다. 세금을 거둬드릴 사람이 많아야 국고가 빌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뮬란은 그 땅을 나갈 수 있었다. 아주 오랜 시간부터 왕을 수호하는 군인이었던 부족이었다. 그들은 충성스러웠고 자신의 명예를 아는 작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국경을 넘어 남하를 하고 있다. 미친 왕의 횡포에 견디지 못한다는 정당한 이유가 있기는 하나 애초에 그런 힘 있는 부족을 왕이 함부로 다뤄야 할 이유는 없다. 폰은 왕의 명령으로 움직인다. 칸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들이 움직이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셋은 빠르게 성을 빠져나갔다. 성 근방 숙소로 들어가자마자 서성이고 있던 켈리가 그들을 맞이한다. 하지만 인사는 짧았다. 그들은 빠르게 군장을 챙기고 짐을 쌌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켈리가 덩달아 짐을 싸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고 파이크는 큰 소리로 하수인을 불렀다. 그는 탁자에 있는 종이에 깃펜으로 빠르게 무언가를 적어내리더니 실링왁스를 녹여 마감을 하고 끼고 있던 반지로 찍어 눌렀다. 그리고 그것을 막 방으로 들어오는 하수인의 손에 넘겨주었다. 그리고 그의 가까이 다가가 거의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장 빠른 전령을 불러 이것을 국경 경비대에 전해주게. 로뮬란은 탈주자가 아니다. 그들은 군대야. 이반 4세의 명령에 움직이는 군대. 그러니 조심하게. 절대로 이 말이 다른 곳으로 세어 나가면 안 될 테니."
그 말에 하수인이 잔뜩 긴장한 듯 마른 침을 삼기고 쪽지를 제 품에 숨겨 허겁지겁 방을 나섰다.
"우리도 지금 당장 출발한다. 여제에게 알려야 해."
하수인이 나가자마자 제복의 매무새를 정리하며 짐을 빠르게 챙긴다. 무슨 일입니까? 로뮬런에 대한 내용만을 이해하고 있던 니모이가 파이크에게 물었다. 그 궁금증을 가진 것은 니모이 뿐만 아니다. 켈리와 두한 역시 파이크를 바라보며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을 열어 재낀 파이크가 곧 달려 나갈 것처럼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외쳤다.
"여제가 찾던 아이, 그 아이가 살아있어!"
***
가끔 사막에는 변덕스러운 바람이 부는 일이 있다. 바닥의 모래를 하늘로 띄워 공중에 모든 것들을 섞어 놓고 하늘의 태양을 가려버린다. 그런 날이면 한치 앞을 볼 수가 없었고, 코와 입으로 들어오는 모래 때문에 제대로 숨을 쉬기가 힘들어진다. 사막의 폭풍이었지만 다른 이름이 있다. 황색 지옥, 모든 것을 집어삼켜 죽음을 연상케 하는 그것을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그 황색 지옥 한 가운데에 조지는 우두커니 서있었다. 날리는 모래가 그의 볼을 때렸다. 하지만 고통이 느껴지진 않았다. 황금색 긴 머리카락이 공중에 흩날렸고 조지는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바람은 거세게 불고 있었고 저 앞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황색 모래 먼지만이 가득 차있을 뿐이었다. 조지는 눈 옆을 가려 눈을 따갑게 하는 모래 바람을 막아냈다. 흐린 저 너머에 불빛이 보인다. 덜그덕 거리는 소음이 들렸고 발 아래가 흔들렸다. 조지는 고개를 숙여 제 밑을 보았다. 발 밑에 깔려 있는 것은 철로였다. 그것이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저 앞에서부터 제 뒤쪽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조지는 이번엔 등 뒤를 보았다. 흐린 시야 너머로 국경을 표시하는 거대한 장벽과 그 아래 철로가 지나갈 수 있는 거대한 문이 있다. 열차가 지나가는 시간이 아니라 그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조지는 다시 앞을 보았다. 철로 너머 불빛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흔들리는 불빛이 하나에서 둘, 그리고 여러 개로 늘어났다. 소음이 점점 커져가고 발 아래 철로의 진동이 점점 거세진다. 모래와 바람이 서로 부딪히며 만드는 소음 속에서 증기를 내뿜는 소리가 들린다. 저것은 증기기관차다. 열차가 올 시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저 멀리서부터 이 사막의 폭풍을 뚫고 열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빠아아앙- 긴 경적을 낸다. 그것이 제법 위협적이다. 조지는 한 번의 눈 깜빡임도 없이 정면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장막처럼 가려진 모래 바람에 섞인 것들을 뚫고 그것이 모습을 드러낸다. 검은 강철로 만들어진, 앞이 뾰족한 열차의 주둥이는 늑대를 연상시킨다. 저것은 분명 앞에 장애물을 치워버리기 위한 것이다. 거기에 타고 있는 이들이 밖으로 몸을 내밀어 모습을 드러낸다. 너저분하게 얼룩진 제복과 그 위에 마스크로 가려진 얼굴이 있다. 그 사이로 보이는 매서운 눈과 살갗 위에 그려진 문신과 뾰족한 귀,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열차가 빠른 속도로 조지에게 가까워진다. 조지는 저를 덮쳐오는 열차를 보면서도 피하지 못했다. 온 몸이 가위에 눌린 것처럼 억눌려있다. 열차에 타고 있던 이들이 손에 든 무기를 흔들며 서로 자축을 한다. 새로운 피를 제복 위에 덧씌울 것임을 알리는 그들의 웃음소리와 열차의 경적 소리가 뒤섞여 이 황색 지옥과 어우러진다. 열차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조지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마지막 순간 조지는 입을 열어 비명을 질렀다. 그의 비명이 황색 어둠 속에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허억- 소리를 내며 조지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아직 꿈속에서 깨어나지 못한 듯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곳은 그가 잠들었던 아들의 침실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빠. 자신의 비명 소리에 깬 건지 제임스가 눈을 부비며 그의 옆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런 아들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조지는 서둘러 창문을 열어 저 멀리를 본다. 밤이 찾아온 사막의 어둠은 지나치게 검다. 사람들도 다 잠든 모양인지 마을 어느 한 집에도 가스등을 켜놓은 사람이 없다. 하지만 저 먼 지평선 너머로는 불길이 일고 있었다. 그곳은 헥토르보다 국경에 더 가까운 국경 경비대가 기거하는 곳이기도 했다. 일부로 불을 붙인 것이 아니다. 그 곳의 건물들이 통째로 불에 타고 있고 어둠의 침묵 사이로 사람들의 비명소리 같은 것들이 간간히 들려온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열린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바람 역시 심상치가 않다. 조지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코끝에서 건조한 모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사막이라면 응당 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바람이 섞였을 때 더욱 텁텁한 향이 났다. 벌컥- 하고 문이 열린다. 돌아보자 위노나가 다급한 듯 숨을 헐떡이며 조지와 제임스를 바라보았다. 엄마? 제임스가 어리둥절한 눈을 하며 그녀를 부르자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머니의 손에 끌려 침대 밖으로 나온 제임스는 여전히 상황 판단이 되지 않는 불안한 눈으로 제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조지는 제임스와 제 아내를 번갈아서 보더니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마을을 빠져 나가. 시간이 없어. 결국 그녀가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어.”
“당신은...”
“금방 따라갈게.”
기어이 눈물을 쏟아낸 위노나가 조지의 목을 한 번 끌어안고 그의 목 아래 입맞춤을 했다. 그들은 다시 만나겠다는 약속을 입에 담으면서도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처럼 애틋하게 서로를 끌어안았다. 조지가 그녀를 제 몸에서 떼어내자 위노나는 제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고 제임스와 함께 방 밖으로 뛰어 나갔다. 무슨 일이에요? 엄마, 아빠는? 아빠가 왜 저러는 거예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제임스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조지는 제임스의 방을 나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옷장 속에 있는 단단한 가죽 자켓을 걸쳐 입고 침대 아래 장총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창문을 열어젖힌 뒤 허공에 총을 쏴댔다. 탕탕- 하고 울리는 소리에 어두웠던 마을에 하나 둘 불이 들어왔다. 조지는 입을 열어 꿈에서 비명을 질렀던 것처럼 목청을 높여 소리를 질렀다.
"침입자다!!! 침입자가 오고 있다!!!! 로뮬란들이 오고 있다!!!!!"
그는 저 멀리 모래를 뚫고 달려오는 열차를 보았다. 황색 지옥을 몰고 있는 지옥불이 약탈자를 실은 채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에게 죽음을 선사하기 위해서.
'Peggster > Star Trek' 카테고리의 다른 글
[커크스코티] 기억을 걷는 시간 上 (0) | 2017.08.02 |
---|---|
[커크스코티칸] 불의 여우 Prologue (0) | 2016.12.12 |
[커크스코티칸] 불의 여우 Intro (0) | 2016.12.11 |
[커크스코티] Gravity (Desert Flower 외전) (0) | 2016.12.07 |
[커크스코티] Desert Flower 6 (完) (0) | 2016.1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