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ert Flower 6 (完)

( James T. Kirk X Montgomery Scott )












메마른 땅에도 꽃은 핀다.


 

***



삐익- 삐익- 가장 먼저 돌아온 것은 또 다시 청력이었다. 귓가에 울리는 소리가 경고음인지 아니면 또 다른 기계음인지 스콧은 가늠할 수 없었다. 본드를 짜놓은 것처럼 붙어 있는 눈꺼풀을 힘겹게 떼어내며 눈을 떴다. 빛이다. 희게 시야를 점멸 시키는 것은 빛이었지만 차원 너머에서 제 눈을 멀게 만들 정도로 발광하는 것들은 아니었다. 깜빡일 때마다 빛은 서서히 가라앉는다. 스코티?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깜빡일 때마다 눈을 멀게 하는 빛은 사그라지고 이내 흰 천장과 빛나는 형광등 그리고 누군가의 얼굴이 보인다.



"....닥터..."

"오냐, 나다."



입이 말라서 그런지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본즈는 그가 깨어났다는 것이 기쁘기도 하면서 몇 십 년 치의 잔소리를 참은 듯 무어라 말을 쏟으려다가 입을 꾹 닫는다. 그래도 예전이었음 성가셨을 그 말들이 그리웠던 터라 스콧은 그걸 보며 실없이 웃었다.



"늙었네요."

"넌 그대로고."

"몇 년이나..."

"6년 7개월."

"...."

"하고도 22일. 이젠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주름이 늘었다. 차원 너머로 보긴 했지만 막상 실물을 마주하니 좀 낯설었다. 그만큼 지났으면 머리스타일이라도 바꾸지. 실없는 농담을 하려는데 말 대신 나오는 것은 마른기침이다. 본즈가 얼른 옆에 있는 물 컵에 빨대를 입가에 대준다. 빨대를 빨아들이자 차가운 물이 입 안을 적신다. 순간 사막에서 말라 비틀어져 가던 것이 생각났다. 그 때의 목마름과 외로움도. 다시 눈가에 눈물이 핑 돈다. 옆에서 이를 내려다보고 있던 본즈가 혀를 찼다. 눈 뜨자마자 탈수증이 오겠다며 한 참을 궁시렁 거렸다.

 

몸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제 맘 같지가 않았다. 본즈는 스콧의 몸 상태에 대해서 약간의 과장을 섞어 설명해 주었다. 과장을 뺀다고 해도 썩 좋지는 않았지만. 사막의 모래로 인해 피부 위 자잘하게 남은 생체기는 별 것도 아니었다. 우선적으로 뼈가 부러진 곳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도 없었다. 깁스를 할 정도는 아니지만 금 간 곳이 많아 제대로 붙을 때까지는 꼼짝없이 침대 신세를 져야 한다고 했다. 내장기관은 말할 것도 없다. 그가 있던 시간이 짧다고는 하나 어쨌든 계산상으로는 약 3일 동안 물 한 모금 먹지 않은 상태였고, 이곳에 돌아와서 보름 넘는 시간을 꼬박 기절해 있었으니 영양실조, 탈수증 같은 것이 뒤에 붙는 것은 당연했다. 무엇보다도 시공간의 왜곡을 아무런 방어벽 없이 맨 몸으로 맞아야 했기 때문에 뇌가 공간감과 균형감을 찾는데도 꽤 시간이 걸릴 거라고 했다.



"그래도 너 기절한 사이에 뼈는 많이 붙었어. 이틀정도 더 누워 있으면 움직이는 덴 무리 없을 거야. 근육이 제대로 작동 한다면 말이지. 재활 치료도 꽤 오래 해야 할 거고. 덕분에 넌 나랑 한동안 붙어 다녀야겠다."

"....끔찍하네."

"내 말이. 그래도 간간히 면회 오는 애들 만나게는 해줄게. 술루가 아쉬워하더라. 너 기절한 사이에 데모라 졸업식이 있었는데, 같이 보지 못했다고."

"미들스쿨 입학식은 꼭 갈 거라고 해줘요. 의사양반, 나 좀 피곤한데..."

"이건 듣고 자. 짐 얘기야."



만약 살아남게 된다면, 제일 먼저 마주해야할 것이 그와 관련된 것이라는 걸 스콧 역시 알고 있었다. 아마 과거였다면 다음에 듣겠다는 말로 이를 회피했을 테지만 그는 자꾸 내려앉는 눈꺼풀을 억지로 고정시킨 채 가만히 본즈가 다음 말을 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본즈는 스콧이 들을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채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걘 한 동안 못 올 거야. 그렇다고 너무 섭섭해 하진 마라. 스타플릿에서 난리가 났거든. 너 구하겠다고 한 짓이... 뭐 과정에 대해서는 체콥이나 다른 사람이 말해주겠지만, 어쨌든 그게 좀 문제가 됐거든. 크루 전체가 징계를 먹을 뻔 했는데 그거 와해 시켜놓고도 이러 저리 불려다니느라 정신없어. 그러니까 며칠만 참..."

"괜찮수."

"..."

"그쪽은 6년 넘게 기다렸는데 며칠이 대수라고. 의사양반도 피곤할 텐데 이만 가 봐요. 난 좀 잘게."



아주 예상하지 못한 상황은 아니라 스콧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하품을 쩍 했다. 보름을 자고도 잠이 모자란 지 자꾸 눈이 감긴다. 그런 스콧을 보며 본즈는 픽 하고 웃더니 이불을 꼼꼼히 덮어주고 형광등의 조도를 낮춰주었다. 본즈가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병실 안 그의 몸에 얽혀있는 의료 기계로부터 나는 규칙적인 신호음만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삐익- 삐익- 그 규칙적인 소음을 들으며 스콧은 눈을 느리게 꿈쩍거린다. 가늘게 뜬 시야가 점점 어두워지고 이내, 다시 또 무의식의 세계가 찾아왔다. 수면에 잠기는 의식 속에서도 그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 돌아왔다.




***




본즈가 말한 며칠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들었던 것보다 상황이 심각한가 싶어 걱정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가 불려 다니는 이유는 마냥 징계에 관련된 것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커크에게 내려진 징계는 약 3개월간의 직위해제와 지상직 처분이 내려졌다. 맘대로 함선을 끌어다가 블랙홀에 꼴아 박은 것치고는 굉장히 유한 처분이라고 본즈는 설명했다. 커크를 제외한 모든 크루들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직위해제 명령이 떨어졌다고 해서 엔터프라이즈 팀이 해체가 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함장의 공석으로 크루들은 반쯤 강제적으로 3개월 휴가를 떠안게 되었다. 어쨌든 규칙을 어긴 것에 대한 보여주기 식의 징계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새로운 기술을 만들고 또 도전했다는 것에 대한 일종의 포상인 셈도 되는 것이었다.

 

반면 커크는 사방팔방을 뛰어다니며 온갖 회의와 협약 자리에 끼어 있어야 했다. 이유는 아문족의 데이터를 이용해 새로 만든 기술이 과거 스콧의 트랜스워프 공식처럼 다른 곳에 남용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의도가 어찌 되었든 시간과 공간을 역행하는 것은 충분히 평화를 헤칠 수 있는 위협적 요소가 되는 것이었고, 이미 그걸 겪어본 커크로서는 누구보다 그 위험성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콧의 경우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잠으로 보냈는데, 다행이도 3일 정도 시간이 지나자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어 자는 시간도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몸을 움직일 수 있다고 해서 완전히 회복이 된 것은 아니었다. 뼈마디는 삐걱거렸고 근육은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아 걷는 것은커녕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까지도 애를 먹었다. 게다가 블랙홀의 영향을 받았다는 말이 맞기는 한지 몸을 일으키자마자 시야가 핑그르 돌면서 급격한 어지럼증이 그를 덮쳐왔다. 다행이 먹은 게 없어 구토를 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진 않았지만, 몇 번 고꾸라지고 나서야 재활훈련에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할 거라는 본즈의 말이 틀린 게 없다는 사실을 자연히 깨닫게 되었다.

 

어느 정도 몸을 가눌 수 있게 되자 하나 둘 병문안을 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제일 처음에 그를 찾은 것은 꽃을 한 아름 들고 찾아온 우후라와 스팍이었다. 그들은 그가 실종되고 다시 찾아내기까지의 여정에 대해 상세하게 말해주었다. 사실 차원 너머로 대부분의 과정을 봤었기에 구지 설명을 들을 필요는 없었지만, 모처럼 눈을 빛내며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는 두 사람을 보니 영 입이 안 떨어져 스콧은 그냥 그들이 계속해서 떠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우후라는 기어이 눈물을 보였다. 훌쩍이는 그녀를 보며 스콧은 괜히 미안해져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다시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그러게나 말이요. 난 내가 살아서 당신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안했는데..."

"왜 그런 말을 하세요, 우리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알아요. 노력한 거. 근데 내가 죽고 살고의 문제는 모르는 거잖수. 게다가 성공률도 낮았다며..."

"37.8%였습니다. 미스터 스콧이 블랙홀을 빠져나가지 못할 확률이 높았죠."

"거봐요. 내가 살아서 당신들 만난 것 자체가 기적이라니까. 그러니까 아문 족이니 웜홀이니 이런 말은 이제 그만 하고, 어차피 지금 상태로는 그걸 다 이해 할 만큼 머리가 돌아갈 것 같지도 않수. 당신들 얘기나 해봐요. 난 거기 혼자 있는 동안 엄청나게 그쪽들이 보고 싶었는데 와서 하는 말이 공식이니 뭐니 이런 딱딱하고 뻔 한 얘기만 하고 간다면 좀 섭할 것 같수."



스콧의 말에 우후라는 그제야 눈가에 아려있는 눈물을 씻어내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왼쪽 손을 들어 올렸고 네 번째 손가락 위 파란색 보석이 박혀있는 반지를 내보였다. 나 결혼해요. 그 말에 스콧이 입을 쩍 벌리고 우후라와 스팍을 번갈아 보았다. 스팍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귓바퀴는 어느새 초록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스콧을 찾자마자 그 자리에서 받았다고 기뻐하는 우후라를 보며 오히려 눈물을 보인 것은 스콧이었다. 잘 됐다, 잘 됐어 하며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엉엉 울다가 이내 표정을 바꿔서 저 매정한 뾰족 귀 외계인 같으니라고, 아무리 나 찾는 게 중요하지만 사귄 게 몇 년인데 이제야 프로포즈를 했다며 표독스럽게 쏘아 붙이는 것을 우후라가 억지로 말려냈다. 아마 일찍 프로포즈 받았다고 해도 내가 싫었을 거예요. 그리 말하는 게 또 미련맞다고 핀잔을 주면서도 고마워서 축사를 부탁하는 말에는 못이긴 척 승낙 할 수 밖에 없었다.

 

스팍과 우후라가 온 다음 날 제이라와 킨저가 찾아왔다. 제이라는 스콧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주먹을 날리려고 했는데, 옆에 본즈가 없었다면 스콧은 다시 또 일주일간 기절해 있어야 할 뻔 했다. 

 

 

"이거 놔, 닥터! 몽고메리 스코티, 넌 정말 나쁜 개새끼다!!!"

"라씨, 오랜만에 만나는데 너무 격정적인 거 아뇨?"

 

 

처음 만날 때만해도 말이나 모든 것에 서투르던 제이라는 저 없는 동안 스타플릿을 다니며 지나치게 많은 것을 배운 모양인지 어디서 듣도 보도 못 한 온갖 욕설을 쏟아내며 스콧의 정신을 쏙 빼놓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참아줄 그도 아니라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웠냐며 그녀가 했던 것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욕설이 가득한 잔소리를 퍼부어 댔고 기어이 둘은 한바탕 크게 말싸움을 벌이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게 서로 퍼붓고 나서는 진하게 포옹을 한 채로 울고불고 난리를 피운 통에 결국 스콧은 열이 올라 그 자리에서 졸도해버리고 말았다. 물론 이 모든 난장판의 책임자가 되어야 했던 본즈는 제이라에게 일주일간 면회 금지 처분을 내렸다.

 

킨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킨저는 제이라와 싸운 날을 포함해 거의 매일 스콧의 병실에 찾았다. 나 이거 싫다. 엔터프라이즈 CEO 자리를 도로 넘겨준다며 킨저는 표정 없이 그렇게 말했다. 그래, 뭔 일이 나도 말없이 굴처럼 앉아있는데 애들이 얼마나 답답했겠냐. 스콧은 퉁명스레 그리 답했지만 그가 충분히 잘해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별다른 대화 없이 둘은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스콧은 잠자다 눈을 떴을 때 옆에 있는 킨저가 퍽 고마웠고, 가끔 그가 제 손을 꽉 잡아 올 때마다 다시 마주 잡아 주는 것으로 이젠 사라지지 않겠다는 약속을 대신하곤 했다.

 

킨저 다음으로 자주 오는 사람을 꼽으라면 체콥이었다. 아이는 예전보다 키가 커졌고 몸이 다부져 제법 남자 테가 났다. 하지만 스콧의 눈에 체콥은 여전히 덜 자란 아이 같았다. 처음에는 선물이랍시고 그가 없는 동안 탐사했던 곳에서 제가 생각날 때마다 산 물건들을 가져오는 기특함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기술서와 전공서, 그리고 온갖 논문을 한 아름 안고 들어와 스콧을 질리게 만들었다. 이러다 뇌혈관이 터질 거라며 본즈가 만류했지만 체콥은 꿋꿋했다.



"6년은 갱장히 긴 시간임니다! 빨리 따라 잡찌 아느면 다음 미쎤때 함께 할 쑤 업짜나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미스터 스콧이 없는 엔티는 이제 그만 타고 싶다며 고집을 부리는 통에 결국 스콧도 본즈도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야 말았다. 넌 어떻게 6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애냐. 스콧이 그렇게 투덜거렸지만 그럼에도 그가 제 고집을 들어주는 이유가 저를 마냥 애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체콥은 그 말에 반박하지 않고 헤헤- 웃고 말았다. 결국 킨저와 체콥까지 세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있는 날이 잦아졌다. 물론 체력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하려던 '공부'는 과거 워커홀릭의 기질을 보였던 스콧이 놀라운 집중력을 보인 탓에 점점 길어졌고, 기어이 코피가 터지며 잠시 휴식기간에 들어갔다. 본즈가 두 사람에게 3일간 면회 금지 처분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기계 공학쪽은 6년이 지나서도 변한 게 별로 없어요?!! 망할 대가리들에 뭘 들고 다니는 거야?!!"



코에서 피가 콸콸 터지는 와중에도 흥분해서 말하는 스콧에게 본즈는 질린 듯한 표정을 했다. 그는 가차 없이 스콧의 코에 거즈를 쑤셔 넣었다.



"뭐, 침대라도 날아다닐 줄 알았냐? 너야 말로 죽을 고비 넘겼으면 깨닫는 게 있어야지, 왜 여전히 지 몸 하나 관리를 못하는 거야?! 잔 말 말고 밥 먹고 잠이나 자!!"

"의사가 환자한테 이렇게 막대해도 되는 거요??"

"씁- 형 말 들어, 임마."



나이가 역전된 이후로는 툭하면 형 소리를 하는 게 얄미워 스콧은 눈을 흘겼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오히려 뻔뻔하게 턱을 쳐드는 본즈를 보며 할 말을 잃고 만다. 결국 손에 쥐고 있던 전공서는 모조리 압수당했고 스콧은 3일간 강제 요양 신세를 져야 했다.

 

술루는 가족들과 함께 병문안을 왔다. 시간이 지났는데도 나이 든 티가 제일 나지 않는 것은 술루였는데 안타깝게도 스콧이 이를 놀려먹을만한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앞뒤 인사도 자르고 스콧을 와락 껴안았다. 나도 반가워요. 그가 고개를 묻은 어깨가 젖어오고 잦은 떨림이 느껴지자 스콧은 웃으며 그런 그의 등을 살짝 쓰다듬어주었다. 하지만 약 3분 동안 미동 없이 안겨있으려니 영 어색해 어쩔 줄을 몰라 했지만 안타깝게도 뒤에 선 벤은 그런 둘을 흐뭇하게 바라보느라 스콧의 SOS신호를 감지하지 못했다. 실컷 소리 없이 울고 난 후 개운한 얼굴로 술루가 고개를 들었을 땐, 스콧의 오른쪽 어깨는 비라도 맞은 것처럼 흠씬 젖어있었다.

 

 

"우후라한테 말 다 들었수. 나 때문에 가족 못 보게 됐으면 어쩌려고 그런 무모한 생각을 한 거요?"

 

 

스콧이 조심스레 그렇게 묻고 나서야 술루는 웃었다.

 

 

"확신이 있었어요. 돌아올 수 있다는."

 

 

도대체 그게 어디에서 나오는 자신감인지는 모르겠지만 스콧은 묻지 않았다. 어쨌든 그런 그의 확신이 없었다면 자신은 이 자리에 없었을 테니 말이다. 화제는 일상적인 것들로 돌아갔다. 데모라는 키가 훌쩍 컸다. 이제는 아가씨가 다 되었다며 스콧이 칭찬을 하자 아이는 훌륭한 함장이 되려면 이 정도는 커야한다며 당당하게 주장했다. 성격이 히카루를 닮았어요. 벤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하는 말에 스콧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나 집에 가기 싫다고 고집을 부리면서 아저씨도 나 가는 거 싫지? 라고 태연하게 물어볼 때 얼굴 색 하나 안 바뀌는 게 똑 닮았다.

 

가장 나중에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캐롤이었다. 지금 크루들 중 커크만큼 바쁜 사람을 꼽으라면 아마 그녀일 것이다. 스콧을 구출하자마자 그녀는 다시 제네시스 프로젝트의 마무리 작업에 복귀해야했고 더불어 웜홀 공식의 개발자 중 하나에 이름을 올렸기 때문에 때때로 부가 설명을 위해 커크가 가는 회의 이곳저곳에 불려 다녔다. 

 

 

"사실 부함장님이 가는 게 맞는데 요즘 결혼 준비 하느라 바빠서요. 그 분한테는 아누비스 중력 방정식 푸는 것보다 결혼식 케이크 고르는 게 더 힘든 일일걸요??"

 

 

오만색의 케이크 조각을 앞에 두고 쩔쩔 매고 있을 스팍을 생각하며 둘은 낄낄거렸다. 캐롤은 연인이 생겼다고 했다. 제네시스 프로젝트 진행 중 같이 일하는 동료였는데 스타플릿 소속은 아니고 협력업체 쪽 사람이었다. 이름은 로날드고 성실하고 착한데다 잘생기기까지 하다며 캐롤은 일장 연설을 하 듯 자랑을 한껏 늘어놓았다. 그리고는 한참 자랑한 게 민망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럽게 커크 이야기를 꺼냈다. 가뜩이나 제 앞에서 하나 같이 커크가 제 아킬레스건이라도 되는 냥 말을 돌리는 게 이상하다 싶어 뭘 어디서부터 어떻게 아는 거냐고 묻자 캐롤은 그럴 줄 알았다면서 깔깔깔 웃어버렸다.



"솔직히 기관실장님이 살아 돌아와서 하는 말인데, 지금 두 사람 러브 스토리로 스타플릿이 얼마나 떠들썩한지 알아요? 로미오와 줄리엣도 이만큼 애틋하진 않을 거라면서..."

"아니 도대체 어떻게 다들 알게 된 거래요? 설마 메세지가 공개된 건..."

"그건 아니에요. 이건 진짜 말하지 말라고 함장님이 당부 했었는데... 에잇, 몰라. 물론 6년 넘게 스타플릿 상부에다가 기관실장님을 구해야한다고 끊임없이 탄원서를 넣은 것은 말할 것도 없죠. 결정 적이었던 것은 그거였어요. 다시 웜홀을 타고 돌아오자마자 함장님이 실장님을 봐야겠다며 바로 메이데이로 가더라고요. 우리는 그랬거든요. 6년 넘게 혼자였는데 설마 아직도 그런 마음이 남아 있을까, 하고... 근데 그 의심이 그날 완전 깨졌지 뭐에요."

"도대체 뭐길래 그래요? 이쯤 되니 무섭기까지 하구만..."



아직도 그 날 일이 떠오르는지 캐롤은 웃음을 참지 못하며 한참을 끅끅거리다가 겨우겨우 다시 입을 열었다.



"엄청 울더라고요. 메이데이가 떠나가는 줄 알았다니까요! 누가 보면 기관실장님이 죽은 줄 알았을 정도로 침대를 잡고 엉엉 우는데, 그 때 했던 말들이 너무 절절해서 옆에 있는 저도 눈물이 핑 돌더라구요. 사랑한다는 말부터 시작해서 그간 한 번도 잊은 적 없다고, 이젠 싫다고 해도 옆에 붙어 있을 거라면서..."

"그만, 그만 해요. 아이고, 남사스러워라..."



캐롤의 말이 이어질수록 스콧의 얼굴이 빨갛게 달았다. 두 손에 얼굴을 폭 파묻고 있는 그를 보며 그녀는 다시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두 분 너무 귀여운 것 같아요. 그래서 언제 사귈 거예요? 하고 계속해서 말을 붙이며 놀리는 통에 결국 스콧은 바쁜데 얼른 가보라며 그녀의 등을 떠밀어 병실 밖으로 내보내야 했다.


시간은 흘러갔고 평온한 일상은 계속되었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식사를 하고 재활훈련을 했다. 몸은 점차 나아졌고 뛸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걸을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나머지 시간에는 주로 킨저, 체콥과 함께 논문과 전공서를 읽었다. 그래도 머리가 녹슨 건 아닌지 스콧은 스펀지처럼 지식을 흡수했고, 체콥은 다음에는 같이 함선을 둘러보자며 새로운 시스템에 대해서 설명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둘이 나가고 나면 평온한 저녁 시간이 왔고 상태를 보러 왔다는 본즈와 적당한 잡담을 한 후 자리에 눕는다. 그리고 어두운 밤이 주는 고요한 평화를 만끽했다. 스콧은 때때로 커뮤니케이터를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끝끝내 버튼을 누르는 일은 없었다.


그가 깨어난 지 45일이 지났다. 그 시간 동안 스콧은 커크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




칠레 아타카마 사막은 연간 강수량 0%로 죽음의 사막이라고 불려왔다. 어느 누구도 그 메마른 땅에 생명이 움트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날씨가 변덕을 부려 몇 백 년 만에 한 번 정도 그 땅에 비를 뿌리는 날이 있다. 그러면 그 곳에 새로운 풍경이 생겨난다. 몇 백 년을 땅 아래 잠들어 있던 씨앗들이 빗물을 맞고 싹을 틘다. 그 오랜 기다림을 보상하듯 단단한 땅을 헤치고 싹을 틘 후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없이 넓은 땅 위를 오색의 꽃으로 물들여 커다란 화원을 만든다. 사람들은 이를 '기적의 화원'이라고 불렀다. 척박한 사막과 어울리지 않는 꽃밭이라고는 하나 그 순간의 아름다움을 '기적'이라는 단어 외에 어떠한 말로 표현하긴 어려울 것이었다.




***




스콧은 긴장한 듯 손가락 끝을 자꾸 매만졌다. 심호흡을 몇 번하면서 그는 초조하게 다리를 떨었다. 때마침 바지 안쪽 커뮤니케이터가 진동했다. 꺼내보자 화면에 본즈의 이름이 떠오른다. 아마도 병실에서 말없이 사라진 것 때문에 연락을 한 것 같았다. 걱정시키려는 의도는 아니었는데 여길 온다고 하면 뜯어 말릴게 뻔해 몰래 병원을 빠져 나왔다. 일 더 커지기 전에 말해야겠다 싶어 스콧은 플립을 열려다가 문 열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전원을 꺼버렸다. 양 옆에 두 간수들을 끼고 들어오는 아처를 보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다리에 밀린 의자가 바닥을 긁으며 기이한 소리를 냈다.


가해자와 피해자. 이제는 달라진 신분으로 책상 하나를 사이로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한참을 서로 말이 없다. 스콧은 아처를 보았고 아처는 책상의 모서리쯤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아처는 많이 늙어있었다. 시간이 지나서 그만큼 나이가 든 것도 있지만 볼에 살이 내리고 눈 밑에 거뭇할 정도로 수척해져 있었다. 총명했던 눈빛은 흐렸고, 핏발이 서서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제 기억 속에 그 모습과는 너무 달라져 있어 스콧은 할 말을 잊었다. 면회시간이 반쯤 지났을까, 먼저 입을 뗀 것은 스콧이었다.



".... 왜 그랬어요?"



입 밖으로 나오는 제 목소리가 어색했다. 그렇게 묻고 나자 아처가 드디어 저를 보았다. 힘없는 눈동자로 아처는 한참 그를 보았다. 나오는 답이 없어 스콧은 조금 초조했지만 그래도 답을 재촉하진 않았다. 한참 그렇게 침묵을 지키던 그가 마르고 갈라진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넌 나의 죄악감이었으니까."

"...."

"애니가 날 비난하더군. 널 그런 식으로 취급했다고 말이야. 델타베가에서 네가 돌아오는 것보다 그녀가 이혼 도장을 찍는 게 더 빨랐지. 난 혼자 남았고, 너에겐 동료가 생겼어. 너로 인해 내가 잃은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 봤다. 내 가족, 내 기회와 명예, 그리고... 나 자신."

"...난..."

"그럴 의도가 없었겠지. 그건 나 역시 그랬으니까. 널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데려왔던 건 아니었어. 그저 적응하지 못하는 생도 하나 구한다는 생각이었을 뿐... 만약 네가 천재가 아니었다면, 내 목적에 부합할 만큼 영민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나도 그런 욕심을 가지진 않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결국 내 불행의 모든 원인은 너에게 있더군. 네가 없었다면, 네가 내 앞에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그런 생각이 드니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었다. 스콧은 손으로 바지자락을 움켜쥐었다. 건조하기 짝이 없는 말들이 가시처럼 스콧의 심장을 난도질했다. 마치 제 존재 자체가 잘못이라고 말하는 듯한 말에 분노가 올라왔다. 스콧의 온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아처를 향하는 그의 시선에 날이 섰다.



"그래서, 이 모든 게 다 내 탓이다? 고작 한다는 변명이 그거요?! 그렇게 말하면 당신이 했던 그 추악한 짓이 다 합리화가 됩니까? 그럼 나는요? 나는- 씨발, 그 델타베가에서 6개월, 그 블랙홀 너머에서 6년을 당신 때문에 썩어갔는데!! 차라리,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이건..."

"네 말따마 차라리 죽었다면 편했을 거야. 차라리 그렇게 널 쏴버리고 후련해졌다면 나았을 거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어. 넌 살아남았고 나는 괴로웠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요?!! 난 적어도 여기서 당신을 만나면...!!"

"그럼 넌, 여기까지 와서 사과라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냐? 넌 여전해. 여전히 무르고 어리석지. 그래서 그렇게 여기저기 이용당하면서 사는 거야. 기계의 부속품처럼."



어조 없이 평이한 그 냉정한 말에 스콧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침묵하자 아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 옆에 간수들이 따라붙는다. 스콧의 분노는 갈피를 잃었다. 딱히 사과를 받고 싶어서 온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유를 알고 싶었다. 왜 그래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안다고 해서 지난 시간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도 아니었고, 마음에 위안을 얻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듣고 싶었던 것은, 그의 말따마 자신이 무르고 어리석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직도 그 어수룩한 자신을 거두어 주었던 기억이, 그 잔정이 남아 그 죽을 고비를 넘고 나서도 그를 이해하고 싶었던 것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처는 어떠한 것도 보상해주지 않았다. 매몰찬 말로 그를 내쳐낼 뿐이었다.



"그 사람은 달라요."



막 나가려는 그를 잡아채며 스콧이 말했다.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있다. 당신이 버린 자신을 델타베가에서 구해주고, 올바른 자리에 앉혀주고, 사랑해주고,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 그 마음으로 저를 아껴주는 이가 있다. 변해버린 당신과는 달라.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는지 아처는 뒤를 돌아보며 입가에 옅은 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값비싼 보석이라고 해도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겐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게지. 그에게 넌 보석이겠지만, 나에겐 아니다. 내게 넌 이제 아무 것도 아니야. 그저 과거의 잔재이고 죄악감이지."

"...."

"다신 오지 마라."



그렇게 하는 마지막 말이 마냥 매몰차지 않다. 다신 오지 말라는 그 말 맺음이 이젠 내 그늘에서 그만 벗어나라고 하는 것처럼 들려왔다. 스콧은 그의 쓸쓸한 옆얼굴에서 과거 자신에게 다가왔던 남자의 잔상을 보았다. 정말 나는 당신의 죄악감이고 과거의 과실이기만 한가요? 스콧은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시 올게요. 스콧은 사라지는 그를 향해 작게나마 그리 말했다.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하지만 왠지 다시 온다고 해서 그를 거부할 것 같지는 않았다.




***




도시의 사람들은 분주하게 지나가고 있었고 그 한 가운데 스콧은 멍하니 앉아 있었다. 병원으로 돌아가려고 나왔는데 기력이 다했는지 머리가 어지러워 잠시 주저앉았다. 깨어난 이후로 이렇게 오래 움직인 적이 없기도 했고, 아처와의 대화를 하고 나니 가슴 안에 무언가가 뻥 뚫린 것 같은 기분이 들며 힘이 쭉 빠져버렸다. 제대로 된 사과를 들은 것도 아니었고 그저 상처만 남은 대화였다. 아직 그와 남은 갈등이 완벽하게 해소된 것도 아니었는데 막상 만나고 나니 그가 제게 가지고 있는 감정이, 과거에 나를 거둬주었던 것이 그저 허상이었던 것은 아니었구나 싶어 왠지 모르게 후련해졌다. 마치 과거에 그가 만들어 놓은 그림자에서 완벽히 벗어난 것 같은...


그는 벤치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파란 하늘을 보니 지평선의 경계가 없던 그 별이 떠올랐다. 파란색 안에 담겨져 있던 자신의 모습이. 급작스럽게 그리움이 밀려나와 코끝이 시큰해졌다. 과거의 잔재로부터 벗어나자 단연 떠오르는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었다. 그러자 괜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저를 구원했으면 얼굴은 못 보더라도 연락은 한 번 주지. 괜히 저 파란 하늘 탓인가 싶어 스콧은 눈을 감았다. 아- 커뮤니케이터 켜야 하는데, 보나마나 본즈의 부재중 연락이 수두룩할 것을 알면서도 좀처럼 눈이 떠지질 않았다. 이대로 자면 꿈에서나 그를 볼 수 있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닫힌 눈꺼풀 위로 내리던 빛에 그늘이 진다. 스콧은 뭔가 싶어 다시 눈을 떴다. 파르르 떨리던 속눈썹 사이로 하늘을 가리는 그림자가 보였다. 누군가의 실루엣이 빛을 등진 채 위에서 아래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역광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스콧은 그 안에서 유독 푸른 두 눈동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토록 그리웠던 자신의 구원자.



"제정신이야?"



커크가 그의 팔을 잡아끌어 일으키며 날 선 목소리로 나무랬다. 어지간히 화가 난 듯 팔을 잡는 아귀힘이 거셌다. 몸을 일으키자 빛에 가려졌던 그의 얼굴이 보였다. 고생한 탓인지 볼에 살이 내렸다. 마지막 헤어질 때보다 잔주름도 좀 는 것 같았고. 그래도 잘생긴 얼굴 어디 안 간다고 여전히 근사하기만 했다. 뛰어 다녔는지 헉헉거리는 숨은 고르지 못했고 이마에는 땀이 흥건했다. 제복차림 그대로인 걸보면 제가 없어졌다는 말을 듣고 하던 일제치고 온 것이 분명했다. 괜한 걱정 시켜서 일을 방해한 것 같아 미안한데,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파란 눈이 스콧의 온 몸을 훑어본다. 어디 다치기라도 하지 않았는지 샅샅이 살피는 것을 스콧은 말없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몸에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 하고 나서야 크게 한 숨을 쉰 그는 다시 스콧과 눈을 마주했다.



"어디 간다면 어딜 간다고 말을 해야지. 커뮤니케이터는 왜 꺼놨어? 아직 무리하면 안 된다는데 너는...!! 게다가 고작 보러 온다는 게 저...!!! 너는 진짜, 내가 얼마나...!!"

"사랑해요."

".. 넌... 진짜...읏..."

"...사랑해요, 짐."



머릿속에 단연 떠오르는 말, 돌아온다면 꼭 해줘야지 했던 말은 입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져 나왔다. 차마 더 화를 내지 못하고 커크는 이를 악 물고 입술을 떨었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스콧은 고장 난 인형처럼 그 말을 반복했다. 차원의 벽 너머에서 닿지 않았던 그 말이 이제는 같은 공간 안에서 같은 시간을 공유는 이 순간 그의 귀에 닿는다. 스콧은 커크의 새파란 눈에 물기가 차는 것을 보았다. 눈가에 머물다가 볼 위로 떨어지는 그 눈물을 보며 스콧은 탄성했다. 그의 눈에 담긴 파란 사막에 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촉촉이 젖어들며 지난 긴 시간동안 메마른 땅 아래 숨죽이고 있던 수많은 감정들을 트이고 있었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 사랑해요. 사랑해요, 짐. 사랑...!!"



반복하던 말이 입술 사이에 먹힌다. 커크의 손이 그의 뒷덜미를 잡아끌었고 곧이어 입술이 닿는다. 축축하게 젖은 살 위에선 짭짤한 내음이 났다. 스콧은 눈을 감고 제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그를 느꼈다. 그의 숨결에 섞여 있는 애틋함과 입 안을 휘젓는 살덩이로부터 느껴지는 애욕, 그리고 흐느낌 사이에 간간히 섞여 흐르는 말, 사랑한다, 속삭이는 그의 뜨거운 애정을 집어 삼켰다. 짐, 짐. 속삭이듯 스콧이 그의 이름을 부른다. 숨이 버거워질 때 쯤 서로 엉키던 입술이 떨어진다. 축축하게 젖은 볼을 서로 부빈다. 코끝으로 서로의 향기를 맡고 두 팔로 서로를 품에 가두며 틈 없이 붙는다. 온 감각으로 서로를 느낀다. 지난 떨어진 시간의 보상을 받기라도 하는 것처럼. 볼과 귓가 턱 선에 입술을 쪼아대다가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채 커크는 두 팔에 꽉 힘을 주어 스콧을 한껏 안았다.



"다신.... 다신, 떨어지지 마."



웅얼거리는 발음으로 커크가 명령을 했다. 답답할 정도로 끌어 안겨졌지만 스콧은 평안함을 느꼈다. 서로에게 닿지 않던 고차원의 공간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했다. 스콧에게 필요한 것은 중력이었다. 자신을 끌어당겨줄 수 있는, 머물게 할 수 있는 힘. 그리고 커크의 애정은 그를 이 땅에 발 딛게 만들어 주었다. 이젠 원하지 않아도 떨어질 수가 없었다.



"그래요."



답을 하면서도 이상하게 웃음이 나 스콧은 흐흐- 하고 웃음을 흘린다. 이젠 내가 싫어요. 너른 어깨에 볼을 부비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답은 그것으로 충분했지만, 두 사람은 한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들을 흘끗거리며 쳐다보았다. 이 맑은 하늘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두 사람의 모습은 애틋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런 시선은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이품에 있다면 이젠 그 푸른 사막 한 가운데 떨어진다해도 두려울 것 같지 않았다. 서로 묻었던 고개를 들고 서로의 눈물 젖은 얼굴을 보며 웃는다. 엉망으로 퉁퉁 부은 얼굴이 우습고 이렇게 함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해서, 이마를 붙인 채 한참을 미소 짓는다. 그리고 다시 코끝이 비벼지고 다시 커크의 입술이 스콧의 입술 위로 겹쳐진다. 그렇게 서로 같은 숨을 나눈다. 스콧은 그의 눈을 감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 이제야 닿았다.




***




칠레 기상청이 새로운 발표를 했다. 아타카마 사막에 이상 기후가 포착되었다. 빠르면 이번 주 안으로 그 땅 위에 비가 내릴 거라는 예보가 떴다. 무려 백 이십 년만의 비였다. 기상청의 발표 이후 아타카마 사막 근처 마을로 관광객이 몰렸다. 사람들 모두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비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비가 온 후 땅 위를 덮고 있을 꽃에 대해서 상상했다. 어떤 꽃이 어떻게 필지는 알 수 없다. 바람을 타고 저 먼 땅에서 이 땅으로 옮겨진 씨앗의 종류를 알 수 없었기에 그 우연히 맞물려 만드는 꽃밭의 형상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에겐 그 설레는 기다림마저도 행복이 된다. 그건 백 이십 년 동안 이 비를 기다려 왔을 씨앗 역시 그러할 것이다.


모두가 기적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모두가 사막의 꽃을 꿈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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