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짐에 관한 짧은 단상
( Loki Asgard X Tony Stark )
T의 어느 평범한 아침.
사랑에 리미트가 있다면, 한껏 달아올라 상한선에 달하는 강렬한 감정들을 내 의지대로 조절할 수 있다면, 서로가 가졌던 단편적인 열정을 버리고 식어버리지 않도록 적정선을 유지하며 마르지 않는 애정을 평생이라는 고리에 속박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흘러가는 시간을 잡지 못해 어느 것 하나 통제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지난 여름에 내리쬐던 작렬하는 태양만큼이나 뜨거운 열정을 나누고 다시 차갑게 식어버린 새벽을 맞이해야 하는 날들이 있었다. 주체하지 못하는 감정들이 심장 안에 차곡차곡 쌓이다 어느 계기로 터져버리면 그 감정들은 이내 세어나가 흘러내려 버리고 밑바닥에 남은 것은 결국 서로의 몸에 남은 익숙한 습관들뿐이었다.
우리가 사랑했던 5년이란 시간은 그가 이 지구에 익숙해지는 만큼 자연스럽게 내 생활에 섞여 들어가는 시간이었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을 공유하면서 우리는 어느새 피부 껍질을 제외하면 누가 토니가 누가 로키인지 구분해내기 힘들 정도로 물들어있었다.
그는 어느 아침과 똑같이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고 따뜻한 모닝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보고 있었고 나는 그런 그의 잘생긴 옆 모습을 훔쳐보고 있었다. 내가 머리를 베고 있는 그의 단단한 허벅지는 지난 밤 내게 쏟았던 뜨거웠던 욕정을 잊은 채 차갑게 식어있었다. 5년째,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매일 그의 허벅지에 머리를 베고 여유 있는 아침을 즐겼다. 나의 바쁜 생활 중 유일한 나태하게 흘려 보내는 시간 이었다. 게으르게 돌아가는 시계를 바라보며 이 시간들의 끝은 어드메 있는지 재어봐야 했다. 마치 길고 긴 아스팔트 도로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시간들을.
생물학적으로 사람이 사랑할 수 있는 기간은 900일이라는 거 알고 있어? 서로 호감을 가질 때 이 작은 머릿속에서는 도파민, 페닐에텔아민, 옥시토신이 생성되어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하는 거야. 그리고 2년 정도가 지나면 자연스럽게 항체가 생기고 면역력이 생기면서 서로에게 무심하게 되고...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연인이 멀어지는 건 마치 여름이 지나고 겨울이 오는 것처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거지. 그게 지나가면 결국 밑바닥에 남는 건 정, 습관, 추억, 그리고 지루한 일상들뿐일 테고...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900일이라는 시간을 넘어 또 다시 900일 정도의 시간을 함께했다. 내가 조절할 수도 없는 감정들을 어느 특정된 기간과 이론으로 정의할 수는 없었지만, 우리는 대게 서로에게 무심해졌다. 내가 7시에 저녁 먹자, 라고 말하지 않아도 7시가 되면 작은 식탁에 둘이 마주보고 앉아있을 정도로. 우리는 그런 작은 대화들 마저 잊어가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이론들을 줄줄 늘어 놓을 때까지도 그는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떤 나라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어떤 지역에서 다람쥐가 물구나무 따위를 섰던 그런 기사들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가끔 그가 정말 이 세상 사는 얘기가 궁금해서 신문을 읽는 것일까? 아님, 단지 내게 허벅지를 빌려줄 작은 여유를 만들기 위해서일까? 궁금해 지기도 했다.
나와의 생활이 지루하다고 생각하나?
그럼 당신은?
내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그가 조금이라도 이 지나치게 길고 나태한 시간을 종결시켜줄 방법을 제시해주길 바랬다. 매일 아침 그가 신문을 보고 내가 그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아침을 보내는 시간들을 말이다. 하지만 그는 대신 신문을 반으로 접어 내려 놓고 내게서 벗어났다. 햇빛 아래 매끈한 나신이 드러났다. 힘조차 들어가지 않는 무력한 몸을 침대 위에 늘어뜨려 그 뒷모습을 보다가 차마 그가 입 밖으로 내놓지 않은 말을 내뱉었다.
헤어지자.
그리고 그는..
그래.
그는 마치 내가 오늘은 피크닉에 갈까? 라고 물었던 것처럼 담담하게 이 끝을 받아들였다. 3 주년 기념일에 내가 사준 멋진 청바지를 꿰어 입으며 그는, 짐을 정리해야겠네, 라며 부설을 붙였다.
아스가르드로 돌아갈 거야?
네가 아니라면 여기 있을 이유가 없겠지.
그렇구나. 나는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결말 없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평온한 이별이었다. TV에서 봤던 애틋하고 질질 짜는 이별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그와 나는 항상 그런 이별들을 보면서 추하다고 떠들어 댔으니 말이다. 그리고 나는 이 끝을 배드앤딩으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어느새 단정하게 옷을 입었고, 나는 여전히 무기력하게 침대 위에 있었다. 그는 그제야 나를 돌아봐 주었다.
너는?
라고 물었을 때, 나는 5년 전의 그가 없던 나를 떠올렸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할거야. 네가 없다는 걸 제외하면.
쓸쓸한가?
한 일주일 정도는?
그마저도 쓸쓸하지 않다면 우리가 지나온 긴 시간들이 서운해 할 것 같았다. 아마 난 일주일 혹은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그가 없다는 사실에 적응해야 할 것이다. 아침마다 이 평화로운 시간을 깨트리고, 연구를 하다가 맞춰진 시간에 식사를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것들에 말이다. 야속한 시간들에 밀려 얼음이 물에 녹듯 그렇게 변화된 생활에 익숙해지고 처절할 정도로 격렬하게 나눴던 감정들은 오래된 사진첩에 끼워진 어린 추억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서서히 잊혀질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아마 그가 조금이라도 섭섭해한다던가 이 단조로운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나는 다시 이 평화롭고 지루한 길을 다시 걷기로 마음먹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사랑하던 입술을 호선으로 그리며 담담한 미소를 짓고 마지막 인사를 할 뿐이었다.
안녕, 토니.
그의 몸이 빛에 휩싸이고 가벼운 폭발음을 내며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듯 하늘 저 편으로 사라졌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마지막으로 그가 쉬었던 작은 한 줌의 숨. 마치 이곳에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그는 떠났다.
안녕, 로키.
나는 마른 하늘 위로 차마 건네지 못한 짧은 인사를 했다.
평범하고 평화로운 어느 날 아침,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이별 과정에서의 T
습관이 무서운 건 그것들이 내 몸 구석구석에 숨어 나를 멋대로 조종하고 종국에는 머릿속을 점령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리움으로 변모해 내 목 위까지 차올라 나를 숨막히게 만든다.
우리가 사랑했던 기억들은 대게 평범했다. 평범함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그와 나의 상황을 고려하면 신기할 뿐이었다. 여름의 열기만큼이나 뜨겁게 사랑하고 겨울의 시린 바람처럼 격렬하게 싸웠던 나날들. 길게 늘어진 필름처럼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방영되는 긴 영화 같은 기억들은 내게 사고를 빼앗았다. 대화를 하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부품을 조립하다가도 멍청하게 그것들을 떠올리는 시간들이 늘어나면서 나는 그를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그가 떠나면 내가 5년 전 그를 만나기 전의 나로 돌아갈 줄 알았다. 모든 것이 화려하기만 했고, 거만하면서도 속박되지 않은 자유로운 완벽한 나로 말이다. 하지만 5년동안 그는 나를 열심히 물들여 놓았고, 나는 이미 내가 아니게 되어버렸다. 단단한 고치 안에서 보호를 받다가 부화한 나비처럼 나는 자유로웠지만 동시에 위태로웠다. 변태의 기간을 거쳐 나는 새로운 나를 맞이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이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와 헤어진 직후에 산 올드한 클래식 차는 많이 낡고 허름해서 내 컬렉션 사이에 있으면 폐차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초라했다. 내가 그걸 끌고 쉴드 회의에 갔을 때 맴버들의 경악스런 얼굴은 꽤 봐줄 만 했다. 그들은 아마 헤어짐으로 내가 반쯤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나를 대하는 투가 조심스러웠고 혹여 라도 그의 이름이 튀어나올 까봐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실상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단지 변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가 없는 내 일상을 완벽하게 채워줄 수 있는 새로운 것이 필요했다.
베네치아에 갔다 올까 봐. 휴가 좀 줘.
회의 중간 나는 그렇게 뜬금없이 말을 던졌다. 뉴욕 몇 번가에서 일어난 대형 폭발 테러 사건의 주모자를 얘기 하던 퓨리도 그걸 경청하고 있던 맴버들도 일제히 나를 바라보았다. 아마 난 꽤 지루한 표정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대게 말이 많은 편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제에 벗어난 말을 하진 않았다. 하지만 난 이별을 핑계로 어리광을 한 번 부려보기로 했다. 집중 안 한다고 혼내야 할 타이밍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내게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퓨리는 마지못해 그에 승인했고 나는 기쁘게 웃으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 내 올드한 클래식 차에 몸을 실었다. 페퍼에게 내 비행기 준비하라는 말도 해놓고 말이다.
나는 끝없는 평원을 달렸다. 끝이 보이지 않는 비포장 도로 위 차가 덜컹거리면서 비명을 질렀다. 내 비명인 듯 했다. 낡고 썩어버린 황홀한 이별의 비명. 차창 밖을 지나가는 수많은 풍경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를 떠올렸다. 이 차만큼이나 낡아빠지고 흔해빠진 우리의 추억들은 내 머릿속을 점령하고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그리고 쉼 없이 끝 없는 길을 달리고 있었다.
나는 처음 그에게 고백하던 날을 기억한다. 대게 육체적이고 깔끔한 관계를 선호하는 나에게 연애 그리고 사랑이라는 것은 입에 담는 것 조차도 너무 어색하고 낯선 것이었다. 그에게 호감을 보이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조차도 모른다. 그냥 계속 눈에 밟히고 말을 섞으면서 서서히 그를 알아가고 그러면서 관심이 갔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초조할 정도로. 나는 그게 그저 내 육체적 욕망에 관련된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나는 내 안에서 그에 대한 감정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그에게 섹스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때는 추운 겨울이었고, 그는 그의 형을 따라 이 곳으로 와서 함께 술을 마시던 그런 날이었다. 그러니까 모두 함께 말이다.
내 언행은 대게 타이밍을 못 맞추는 편이었고 그에 따른 반응들은 꽤 가관이었다. 나타샤는 다짜고짜 내 주둥이를 틀어 막았고, 바튼은 인상을 쓰면서 술을 마셨다. 토르는 자기가 뭘 들었는지 모르는 눈치로 멍하니 나를 보고 있었고, 스티브는 술을 뿜었다. 베너 박사는 그냥 웃었다. 대게 내가 두서없이 늘어 놓는 이야기 상대자로서 그는 완벽하리만큼 눈치가 빠른 남자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로키는, 그는.
좋아.
그는 짧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이차적으로 벌어졌던 상황은 더 말할 것도 없었고 말이다.
그래서 우린 잤다. 그날 밤 모임이 해산된 후 그는 내 침실로 찾아왔다. 밤손님처럼 살금살금 다가온 그는 내 머리맡에 앉아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이불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상냥했다. 과거의 일로 나는 그가 가끔 신이라던가 왕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했는데, 생각해보니 그 다정하고 상냥한 몸짓에는 어딘가 기품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날 나는 세 번을 울었다. 처음은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느끼게 만드는 손길이 부끄러워서 울었고, 두 번째는 그가 내 안으로 치고 들어올 때의 생경한 감각에 아파서 울었고, 세 번째는 그가 너무 좋아서 울었다. 나는 그 때 처음으로 내 마음을 자각했던 것 같다.
그가 내 안에 들어오던 그 감각을 나는 지금도 떠올릴 수 있다. 누군가의 신체 일부를 받아들이는 감각은 끔찍할 정도로 무서웠다. 내 피부 위로 균열이 일어나고 그 안에 그가 억지로 자신을 밀어 넣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는 끊임없이 나를 달래주었다. 그 길고 예쁜 손으로 내 몸을 어루만져 주면서 입술이 낮게 웃었다. 나는 어린 짐승처럼 그에게 매달려 엉엉 울었다. 커다랗고 뜨거운 그의 성기가 내 안에 밀려올 때 마다 내 안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몸이 발가벗겨진 것 보다 지나치게 솔직해 지는 내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한 번도 드러나지 않았던 내 치부, 꽁꽁 숨겨 놓은 내 본심이 확연하게 노출되었다. 터져 올라오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한껏 매달리는 날 그는 그저 보듬어주기만 했다. 나는 그것조차도 부끄러웠다.
행위가 끝난 뒤 그는 좋았어? 따위의 진부한 말보다는 따뜻한 입맞춤을 해주었다. 나는 축 쳐진 몸을 그에게로 엉겼다. 젖은 피부가 맞닿아 뜨겁게 달아올랐다.
내가 좋아?
아마 그건 그가 했어야 할 질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먼저 자자고 한 것은 나였는데, 그 질문을 하는 것도 나였다. 신체의 일부를 담으면서 스스로 자각한 마음은 쉽게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것이었다. 내게 솔직함은 조금 먼 단어였다. 그렇기에 아마 그 때 응, 좋아 라거나 아님 싫어 따위의 대답을 했다면 우리의 관계는 그다지 진전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 나는 그 대답을 듣고도 또 끙끙 앓으며 내 마음을 전하지 못했을 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신 다운 현명함으로 대답 대신 나를 보듬어 안고 정중하게 손등 위로 입맞추어 주었다. 그리고 항상 내 말에 잘도 받아 치는 신날 한 입담을 과시하듯 낮은 목소리로 속삭여 주었다.
내 눈에 너만 보이고 내 코가 네 향기만 맡고 내 입술이 네 이름만 불렀어. 내 머리 안에 너만 가득 차있어서 그걸 꺼내면 내 심장이 크게 뛰고 숨이 차올라. 이걸 뭐라고 하는 지 알아?
너는 뭐든 다 알고 있잖아, 토니. 나는 모르겠거든. 그러니까 네가 대답해봐. 라며 그는 내 얼굴이며 어깨며 목 위로 입 맞춰주며 꽤 짓궂게 나를 몰아붙였던 것 같다. 나는 갑작스런 그의 질문에 미쳐 방어하지 못하고 내 머릿속을 빙글빙글 도는 단어를 무심결에 내뱉었다.
Love.
And?
...You.
뱉고 나니 지나치게 허무해서 힘이 쭉 빠져버린 나와는 달리 그는 내가 봤던 것 중에 가장 기쁘게 웃었다. 순한 눈이 아래로 휘어지고 깨끗한 이가 드러나 입가가 위로 쭉 올라오는 그런 예쁜 미소 말이었다.
나도 사랑해.
우리는 그날 부로 연인이 되었다. 사람들은 우리가 사귀게 된 계기를 궁금해 했지만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 맛봤던 생크림처럼 내 생에 가장 달콤했던 순간을 누구와도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토니, 이제 다 왔어요.
표독스러운 새파란 하늘을 건너 이제는 익숙하지 않은 땅으로 향해간다. 하늘 상공 위로 우리의 달콤하고 씁쓸한 추억들이 흐트러졌다. 하늘 저 편으로 사라지던 그를 떠올렸다. 나는 문득 늘 그랬듯이 그에게 묻고 싶었다.
난 널 지워낼 수 있을까?
L의 짧은 회상.
연필로 쓰고 지우개로 지우는 것처럼 우리들의 기억도 그럴 수 있었다면, 아마 우리는 늘 같았던 하루들을 지워내고 항상 새로운 하루를 맞이할 것이다.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끝없이 사랑하고 이별하지 않으며 내 안에 오로지 너만 담고 평안 안에 매일을 숨쉴 테다.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옆에 누워있는 그를 바라본다. 한 번도 질린다고 생각했었던 적 없던 얼굴이 익숙하게 들어온다. 짙고 어두운 체모와 검게 그을린 피부, 땀이 말라붙은 살결과 잘게 진 주름들까지. 이제는 눈을 감아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는 얼굴이 되어버렸다.
나는 항상 그가 깨어날 시간 즈음이면 신문을 펼쳤다. 항상 찍어낸 것처럼 같은 생각을 하는 신들의 이상 사이에서 살던 내게 수많은 인간들이 일으키는 사건들은 재미난 동화책 같았다. 무엇보다 내가 그 시간을 사랑했던 것은, 내 허벅지를 배고 누운 그의 나른한 얼굴이 온전히 내게만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나는 그의 그늘이 되어 주었다. 편하게 쉴 수 있는 작은 나무의 그늘이 되어 그의 온 몸 구석구석을 점령한 시간을 물렸다. 그 때만큼은 시계가 게으름을 피웠다.
잉여로운 하루를 보내는 나와는 달리, 그는 이 곳에선 꽤 바빴다. 내가 그걸 깨치는 데는 좀 시간이 걸렸다. 신들은 일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키는 것이 일이기 때문에 누군가 날카로운 창으로 꿰뚫지 않는 이상 방패를 내거는 것 외에는 대게 게을렀다. 무엇보다 영생으로 인해 남고 남는 시간들이 그들을 나태하게 만든다. 그 중에서도 나는 열등감 해소를 위해 꽤 바지런한 편이었지만, 그는 내가 했던 일의 배 이상 정신이 없었다.
연애 초 우리는 그걸로 열정적으로 싸웠다. 그는 바쁜 스케줄에 얼굴 보기 힘들다는 것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날 비난했고, 나는 모래처럼 손에 잡히다가도 흩어지는 것 같은 그를 내 안에 온전히 담지 못해 화를 냈다. 나는 그 과정에서 아스가르드로 세 번이나 떠나버렸고, 발광하듯 열을 내는 그의 앞에서 다섯 번을 무릎 꿇었다. 그리고 그 과정들을 겪으면서 여느 연인들처럼 작은 퍼즐들을 맞추듯이 우리도 서로를 배려하는 방법을 찾아갔다. 나는 자존심을 접는 법을 배웠고, 그는 조금 더 내게만큼은 솔직해지는 법을 배웠다. 그가 바쁠 때면 나는 그가 찾아오지 않아도 내 발로 그를 찾으러 갔고, 그는 내가 보고 싶었다면서 내게 안겨주는 그런 것들 말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물드는 법을 알아갔다.
로키 마이너스 토니는 뭐지?
이제 막 섹스를 마치고 마른 숨을 헐떡이던 그가 입술에 입을 맞추며 그리 말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그 날도 열렬히 싸웠었다. 이유는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사소하고 유치한 것이었다. 꽁하니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던 그를 억지로 끌어내 말싸움을 하다가 어느새 입술은 서로 맞닿아 있었고, 그는 내게, 나는 그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었다. 딱딱한 바닥에서 사랑을 나누고 오르락 내리락 숨을 쉬는 가슴 위에 그의 턱이 올라왔다. 말해봐, 너에게서 날 빼면 뭐야? 젖은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면서 그게 중요해? 라고 묻자 그는 빙글거리면서 웃기만 한다. 영롱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흔들림이 없었다.
나는 가끔 내가 아닌 것 같거든.
그렇다면 나를 빼면 뭐가 남겠어?
아무것도. 그게 문제야. 나는 내가 너무 좋은데, 내게 아무것도 없게 되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말랑한 볼을 내 가슴에 비비며 아이처럼 굴었다.
우린 닮았지만 너무 달라. 그래서 더 쉽게 같아지는 것 같아. 그게 무서워. 언젠간 내가 없어져 버릴 것 같거든.
내가 그를 사랑함은, 그리고 그가 나를 사랑함은 우리의 모습이 닮아있음에 있었다. 그것은 외적인 요소를 떠나 살아온 환경이나 가지고 있는 가치관, 그리고 성격 따위의 것들이었다. 그것들이 관심을 부르고 호감을 일으켜 사랑을 가져왔다.
우린 많이 닮았기 때문에 사랑했고 그는 더 닮기가 두렵다고 했다. 네가 사랑하는 나는 사라지는 걸까? 그가 내게 그렇게 물었을 때, 나는 그 문제에 해답을 명쾌하게 내놓을 수 있었다. 깊게 고민하지 않아도 쉽게 내릴 수 있는 답. 그가 모른다는 것이 괜히 섭섭해질 정도로 당연한 답. 처음부터 내 안에 담아 놓은 것은 오로지 너뿐이었어.
네가 사랑하는 너는 여기 있잖아.
나는 그의 손을 내 가슴에 올려 놓고 그리 말했었다. 뛰는 심장 위 피부를 손에 둔 그의 표정은 잘 기억할 수가 없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부끄러운 그 말의 끝에 열정적으로 입맞추던 그의 귓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는 것뿐이었다.
사랑에는 절대적 희생이 필요하다. 우리는 서로 자신을 잊는 방법으로 희생하고 그 대가로 서로에게 충실했다. 더 이상 '너'와 '나'는 없었고 단지 '우리'만이 존재했다. 시간은 흐른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천천히, 그리고 빠르게. 우리는 계속해서 사랑했다. 행복했다 정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서로에게 빠져있었고, 그 시간들이 우리를 배부르게 했다. 포만감이 넘치는 너무나도 충만한 시간들. 그리고 그 시간들이 꼭 영원하리라고 믿었다.
이별 앞에서의 L
헤어짐을 말하는 너의 입술을 막았다면, 우리는 끝없는 영생을 가진 광활한 우주처럼 모든 것을 포용하고 사랑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결국 사랑은 촛불처럼 뜨겁게 타오르다가 쉽게 식어버리기도 한다. 자신을 희생해 그 심지를 다 태우고, 그렇게 모든 것을 다 태우고 나면 남는 것은 그게 존재했다는 차갑게 식은 흔적들뿐, 그것들은 모두 변질되어버린다. 우리에게는 더 태울 초가 남아있지 않았다. 이젠 그 초가 다 타고 남은 촛농들과 한 때 타올랐던 불씨의 흔적인 그을음만 남아있었다. 그가 말했던 정, 습관, 추억, 그리고 지루한 일상들이 식고 굳어져 지저분하게 눈에 걸릴 뿐이다.
건조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이별 앞에 현실은 잔인했다. 아스가르드는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 동안 살아왔던 세월이 무색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머리맡에 있던 신문이 없어지고 옆을 채우던 온기 역시 없다. 무력하게 시간을 흘려 보내다 보면 나는 어느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에만 앉아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다시 잠에 든다. 나는 요즘 꿈조차 꾸지 않았다.
나는 그 날 그가 사랑하던 손으로 그를 밀어내고, 그가 사랑하던 발로 그에게서 벗어나, 그가 사랑하던 입술로 이별을 긍정했다. 누군가가 정의했을 생물학적 사랑의 시간 900일을 지나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그렇다면 그 동안 우리는 무엇을 한 것이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단순한 집착과 오기였을지도 모른다. 항상 행복했던 시간을 잡고만 싶었던 그런 오기.
다시 나는 예전 내가 그랬던 것처럼 서고에서 책을 보거나 가끔 산책을 하며 한가로운 시간을 흘려 보냈다. 이제는 그런 것들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익숙하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한가롭고 때로는 지나치게 지루하고. 나는 내가 매일 아침 보던 신문을 떠올렸다. 매일 새로웠던 세상. 우린 그 세상 안에서 쳇바퀴 돌 듯 똑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는 한가로웠고 때로는 지나치게 지루해했다.
토르가 찾아온 것은 그때쯤이었다. 형은 내 눈치를 봤다. 나는 그게 좀 짜증났다. 사람들은 왜 남의 아픈 구석을 건들면서 자신의 궁금증을 채우지 못해 안달 내는 걸까? 이별에 대처하는 자세는 그렇다. 아프지 않은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누군가 내게 그 이별을 물으면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변명을 뱉어내야 하는 것. 토르도 물었다. 왜 헤어진 거야? 나는 비겁하게 변명을 뱉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우리가 영생을 산다고 해서 감정의 영원을 바랄 수는 없는 거야, 토르.
나는 언젠가 어머니의 발치에 앉아 아버지를 만났던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를 하면서 어머니의 얼굴에 잦게 홍조가 지어졌다. 그들은 사랑했다. 지금도 그러하다고 했고. 그래서 나는 내가 나중에 사랑을 하게 되면 그게 영원히 식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완벽한 착각이었다. 그의 품 안에서 내가 느꼈던 더할 나위 없이 포근한 안식은 곧 나태함으로 변모했다. 오만한 나의 안식은 그의 사랑 안에서 이별이라는 이름으로 죽었다.
모든 길에는 끝은 있어. 형이 제인이랑 지금껏 잘 사귀어왔다고, 그 예를 우리에게 적용하지 마, 우린 끝났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로키, 너희는 항상 좋았잖아.
좋았어, 사랑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게 아냐. 단지 사랑이 변했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나는.
열정은 사그라지고 욕정이 잠잠해지고 그저 습관이 이끄는 데로 움직이던 우리의 끝은 이미 정해져 있었을 뿐이었다. 우린 그걸 수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을 뿐이고. 끝내 내 입으로 말하지 못한 이별을 그가 내뱉기도 전에 나는 이미 내 짐을 꾸리고 있었다. 마치 폭풍이 오기 전 이는 바람처럼 우리는 익숙해가는 과정을 겪고 서서히 헤어지는 방법을 배워갔다.
토르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했다. 토니의 안부 따위도 말하지 않았다. 궁금하긴 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구질구질해지고 싶지 않았다. 이내 토르가 나갔고, 나는 다시 온전히 혼자가 되었다.
책을 읽다 문득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하늘에 놓인 수많은 별들 중 그가 있는 별을 그려냈다. 그 안에서 행복했던 우리의 시간들과 별것 아닌 정말 평범한 일상 따위의 것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와의 이별을 정당케 했던 이유들, 아니 정당하게 하기 위한 내 머릿속에서 열심히 만들어 냈던 변명들이 서서히 녹아 흘러 심장 안으로 다시 차오른다. 가슴이 답답해 졌다. 그리고 다시 텅 빈 머릿속은 다른 의문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내 답답한 가슴을 부여 쥐며 묻는다.
내 심장 안에 살던 너는 안녕하니?
낯선 곳에서의 T.
End, And?
더 이어지지 않는 막다른 길목 앞에는 물이 흘렀다. 뱃사공들은 노래를 부르고 곤돌라는 천천히 물살을 타고 흘러갔다. 베네치아는 하나의 커다란 미로 같다. 큰 길 옆으로 작은 수 많은 골목들이 줄지어져 있고, 그걸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나는 내가 어디 있는지 잊어버리곤 한다. 뒤를 돌아 내가 다시 돌아가야 할 까마득한 길을 보다가 포기하고 주저 앉았다. 찰박거리는 물이 요동을 쳤다. 아무 것도 잡지 못하고 비어있는 내 두 손을 바라보았다. 한 때 나를 이끌어 주던 손은 내 손에 더 이상 없다. 그래서 나는 길을 잃었다.
베네치아는 내가 좋아하는 도시들 중 하나였다. 나는 항상 내가 길을 잃었다고 생각할 때쯤 이 곳을 찾는다. 그리고 지도도 없이 무작정 길을 걷는다. 꽤 많이 왔던 도시임에도 골목들은 항상 새로이 나를 맞이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이곳에서 정말 길을 잃어버린다. 한참을 돌고 돌아 내 멋대로 발걸음을 옮겨 다시 길을 찾다 보면 어느새 내 머릿속에서는 새로운 해답을 찾아내기도 했다. 그게 내가 베네치아를 사랑하는 이유였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름답고 기괴한 가면들과 예쁘고 깨지기 쉬운 유리 공예품 사이를 지나가다가 검은색과 금색이 화려한 가면 하나를 집어 들었다. 무표정한 얼굴. 향락과 쾌락을 위장하기 위한 작은 속임수. 나는 문득 내가 너무 솔직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에게 솔직해지는 법을 배웠다. 그 방법에 조금 문제가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나와 많이 닮아있었지만, 간교한 술수를 위해 거짓말을 할지언정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인색하지 않았다. 연애 초 그는 괴랄 할 만큼의 집착을 보이기도 했었다.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지 안심하는 못된 심보 때문이었다. 그는 대게 젠틀했고, 가끔은 화를 냈다. 그 화의 원인은 항상 내 솔직하지 못한 성격 때문이었다. 나는 그와의 연애를 인정하기는 했지만 표현하는 것에는 정말 많이 서툴렀고, 그 서투름을 대부분 입 발린 변명으로 그를 비난하는데 썼다. 그가 화를 내는 것도 당연했다.
옷 벗기는 것처럼 쉬움 얼마나 좋아.
짧게 만세, 라는 소리에 손을 올리자 단숨에 윗도리가 벗겨졌다. 그는 내 티셔츠를 구겨 던지면서 꽤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는데, 이런 투정질은 거의 내 몫이었기 때문에 꽤 신선해 보였다. 내 심장께에 달린 아크리액터를 단정한 손톱 끝이 톡톡 쳤다.
네 심장은 이렇게 밖으로 빛나지 못해 안달인데, 왜 이 안에 있는 건 좀처럼 나올 생각을 하질 않지? 미드가르드 인들의 특징으로 보이진 않던데.
나처럼 가정 학대 당한 인간들의 특징이지. 너도 알잖아? 무관심, 냉대, 고립, 외로움... 불쌍하고 딱하지 않아? 이게 니가 사랑하는 토니 스타크야, 어쩔 수 없다고.
원래 이따위로 생겨먹었다는 뻔뻔한 이기심은 내가 자주 쓰는 래파토리였다. 암녹색 눈동자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부러 거드름을 피우는 나를 잠시 노려 보는가 싶더니 느슨하게 입은 내 하의를 훌렁 벗겨버렸다. 그의 캘빈 클라인 V넥 티 끝을 살짝 끌어내면서 너는 왜 안 벗어? 라고 내가 물었을 때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신으로서 너에게 벌을 주는 거야. 내가 어떤 기분인지 알게 될걸?
신의 말대로 난 정말 그날 뼈저리게 그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혼자 홀랑 벗겨져 누군가 볼지도 모르는 창가에 기대어 불은 환하게 킨 채 옷을 완벽하게 입은 그에게 범해졌다. 정말 끔찍한 기분이었다. 첫 섹스보다도 더한 부끄러움이었다. 아니 그것은 부끄러움이라기 보단 수치라고 하는 게 어울릴 정도였다.
결국 혼자 발가벗겨진 기분이 얼마나 더러운 기분인지 인정한 나는 드물게 솔직해져 그에게 제발 이 환한 불이라도 꺼달라고 애원했고, 그는 불을 끄는 대신 자기도 옷을 벗는 것으로 내 수치감을 조금은 해소시켜 주었다. 난 따뜻하게 덮쳐오는 그 체온을 받으며 조금은 안도했다.
그 때 이후로 나는 최대한 그의 앞에서 솔직 하려 노력했다. 지금껏 살아온 세월 동안 고고하게 지켜오던 버릇들이 그로 인해 천천히 허물어지는 것을 보면서 그게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내가 똑같이 옷가지를 벗은 그의 몸으로부터 안도를 느꼈던 것처럼 우리의 관계도 서서히 안정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정감은 내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것이라서 더욱더 애틋했다.
그래서 나는 내 안에 베네치아를 지웠다. 미로처럼 복잡하게 꼬이고 언제나 낯선 도시를 무너뜨렸다. 대신 넓은 들판에 울타리가 없는 집을 지었다. 견고하고 단단한 집 안에는 우리만이 있었다. 오직 우리만이...
그리고 나는 다시 베네치아로 왔다. 솔직한 게 잘못이었을까? 그 안정감이 우리가 너무 서로에게 익숙하게 만들었던 이유였을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왜 그 애틋함을 버리고 이 혼란 안으로 돌아온 것일까? 왜 난 다시 이 먼 베네치아까지 와 겹겹의 골목들을 헤치고 다니면서 너의 흔적을 찾고 있었던 것일까? 우리가 헤어진 이유가 익숙함이라면, 왜 떨어진 지금은 그런 것들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일까?
손에 쥐고 있던 가면을 내려 놓았다. 이번에야말로 나는 새로운 나를 진정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가 멋대로 발가벗긴 나를. 그래서 나는 내게 솔직해지기로 했다.
난 눈을 감고 내 안에 세워 놓았던 울타리가 없던 작은 집을 떠올렸다. 아침 햇살이 들어오고 바삭 하게 말라 뽀송뽀송한 침대 시트에서 눈을 뜨면 언제나 코 끝에서는 커피냄새가 났다. 햇볕을 쬐면서 아기처럼 그의 차갑게 식은 허벅지에 매달리면 그는 늘 한 손엔 신문을 쥐고 다른 손으론 내 머리를 쓸어주었다. 더할 나위 없이 평안함을 느끼던 그런 시간들. 시계가 느리게 돌아가고 지겹고도 지루하지만 익숙하기 때문에 더욱더 그리울 수 밖에 없는 시간들을.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비춰지는 어지러운 베네치아의 풍경. 해답은 나왔다. 정답은 어차피 하나였는데...
골목길을 헤집던 것을 그만두고 조금 큰 길로 나와 물을 따라 걸으니 처음 발걸음을 시작했던 리알토 다리가 나타났다. 저 멀리서 카페에 앉아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페퍼와 해피가 보였다. 그들은 조금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대했다. 하지만 나는 대신 방긋 웃어주었다.
돌아갈래.
그리고 다시 L.
흘려 보낸 시간들에 집착하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바다 위를 표류하는 작은 돛단배처럼 우리가 향해야 할 길은 어디인지,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지 방향을 잃어버리고는 한다. 우리가 다시 그 날 처음 사랑을 나눴던 그 때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시간은 너무 빠르게 모든 것을 변화시켰고, 해는 또 다시 떠올라 우리는 또 한 번 다시는 맞고 싶지 않았던 지루한 아침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헤어지던 날 아침은 평소와 같았다. 나는 어느 아침과 똑같이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고 따뜻한 모닝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보고 있었고 그는 나른하게 누워 이런 나의 옆 모습을 훔쳐보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그 때 신문을 읽는 것 대신 라디오를 듣거나 그의 온 몸에 입맞추며 모닝 섹스를 즐기는 방법으로 또 다른 변화를 줄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우린 헤어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익숙한 것들을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이별로 인해 깨어진 그 익숙한 일상의 조각들을 모으다 보면 어느새 나는 그를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그가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작은 몸짓으로 내 허벅지에 그의 갈색 머리카락을 비비는 사랑스러운 것들을, 그와 함께 했던 한가로운 아침을 난 사랑했다. 그를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내겐 소중하고 애틋한 시간이었다.
해가 뜨기까지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실체가 없는 그의 비서는 나를 위해 문을 열어주었다. 공기 안 가득 숨을 쉬자 익숙한 향기가 코를 통해 흘러 들어온다. 눈 앞에 펼쳐지는 풍경들은 나를 환대해 주었다. 손 끝에 걸리는 차가운 새벽의 공기가 기분 좋았다. 이번으로 네 번째 나는 결국 그리움을 못 이겨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는 나를 기다려 주었다. 그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안녕, 로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가 공기 중으로 노출되어 있었다. 통통한 엉덩이가 침대 위에 걸터앉아있었다. 그는 내가 떠나기 전 보다는 조금 말라있었지만, 나빠 보이진 않았다.
안녕, 토니.
나도 짧게 재회의 인사를 했다.
이젠 내 벗은 몸도 익숙할 거야, 넌. 내 등 어딘가에 점이 있고 내 얼굴에 새로운 주름이 생겨났다는 것도 금방 알아챌 정도로. 더 이상 내 벌거벗은 몸을 보고 가슴 떨려 하지도 않을 테지. 나도 마찬가지거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냐.
그는 나에게로 왔다. 사뿐히 나비가 앉는 것처럼 내 심장 가까이 귀를 데고 안겨왔다. 그가 뱉은 말과는 달리 이상하게 그가 닿아 있는 가슴으로부터 따뜻함이 샘솟았다. 영영 타오르지 않을 것 같았던 감정들이 왈칵 쏟아져 흘러내린다. 내 심장 안에 죽어있던 그가 날갯짓을 했다. 팔랑거리는 날갯짓에 내 정신이 아찔해졌다. 익숙함, 그것은 또 다른 설렘이란 이름을 가지고 나에게로 왔다.
잘 들어, 로키. 아마 난 평생을 통틀어 다시는 이만큼 솔직하진 않을 거야.
그의 입술이 짧게 내 가슴 위로 내려 앉았다가 떨어졌다.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우리가 지내온 지난 5년간의 시간은 내게 너무나도 소중한 시간이었어. 너에게도 그랬겠지. 그래서 너는 그 많은 짐을 정리해 놓고도 이별의 말은 결국 내가 하게 만들었잖아. 헤어지자는 말에 단숨에 긍정을 했던 당신을 비난하고 싶지 않아. 단지 나는 지난 5년의 시간들이 너무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고 말해주길 바랬어. 안녕이라는 단순한 인사보다는... 그렇지 않으면 이 며칠 내가 방황했던 시간들이 허무하게 느껴질 테니까.
앞으로 우리가 10년, 20년 어쩌면 내 숨이 끊어질 때까지 같이 할지도 모르겠지. 내 얼굴엔 주름이 늘어나고 당신은 어쩌면 지금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 것에 연연해 하지는 말기로 해. 우리는 벌써 5번씩 반복되는 계절들을 지나왔고, 우리는 또 수많은 계절들을 맞이해야 할 테니까. 그리고 지금처럼 지긋지긋한 또 다른 아침들을 맞이하겠지. 당신은 커피를 마시면서 신문을 읽고, 나는 당신의 허벅지 누워 있는 순간들을 말이야.
로키, My Dear. 내 입으로 뱉은 이별의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는 너를 찾아 다녔어. 너와 함께했던 익숙한 일상들이 내 눈에 아른거렸어. 나는 정말 당신이 그리웠거든. 당신은 그렇지 않아? 이렇게 당신을 만지지 못해서 애가 탔는데, 우리 사랑이 정말 식어버렸다고 생각해?
네가 없는 난 길 잃은 꼬마 애 같았어.
네가 그리웠어.
내 눈에 너만 보였어.
네가 그리웠어.
내 코가 네 향기만 맡았어.
네가 그리웠어.
내 입술이 네 이름만 불렀어.
네가 그리웠어.
내 머리 안에 너만 가득 차있어서 그걸 꺼내면 내 심장이 크게 뛰고 숨이 차올라.
네가 그리웠어.
이걸 뭐라고 하는 지 알아?
동그랗고 뜨여 총명하게 빛나는 눈이 휘어지고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그가 그렇게 물었을 때. 나는…
사랑해.
뜨겁게 끌어안은 포옹. 태양이 다시 떠올랐다. 우리의 새로운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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