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

( Loki Asgard X Tony Stark X Steve Rogers )











0.

 

기다리고 있었어요.

 

 

숨을 쉴 때 마다 시리고 찬 공기가 폐를 채우고 구멍 난 살갗사이로 빠져나왔다. 처덕거리는 핏물이 비루한 몸뚱이의 반을 적시고도 야금야금 나를 먹어간다. 반쯤은 나의 것이었고, 나머지 반은 내가 무너뜨린 그의 병정들 것이었다. 나는 핏구덩이 안으로 무너졌다. 자세를 낮춰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그를 찬미한다. 이 모든 것은 그를 위한 것이었다. 오로지 그에게로 닿는 것, 그것뿐이었다.

보고 싶었어요.

 

더듬더듬 내 수줍은 마음을 내뱉을 때 마다 뜨거운 내 애정처럼이나 검붉은 생명들이 쏟아져 나왔다. 뭉그러진 시야 사이로 그가 내게 다가왔다. 코끝으로 내가 좋아하는 그의 향수 냄새와 은은한 담배 냄새가 났다. 도톰한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우고 자랑할 만한 예쁜 입술로 담배를 피우고 있을 것이다. 붓고 터진 눈가 때문에 그의 얼굴을 잘 볼 수 없었다. 그게 너무 아쉬웠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내가 뱉어낸 새빨간 생명을 그가 짓밟았다. 고운 발이, 볼록한 복숭아뼈가, 잘록한 발목이 스펀지처럼 그것들을 흡수하여 물들어간다. 발갛게 젖은 발이 내가 아는 아름다운 어떤 것들을 비교해도 모자를 정도로 아름다워서 짓이겨지고 터져 피떡이 된 내 몰골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그의 손길이 나에게로 닿았다. 뜨겁고 다정한 손길이 내 귀 뒤를 목덜미를 쓸어주었다. 불쌍한 체리보이. 한 없이 다정한 동정의 말. 그의 입술이 잔혹하게 웃었다.

 

 

이제 다 끝났어.

 

 

종국을 선언하며 나를 달래듯 그가 내게 속삭였다. 내 시야 앞으로 누군가 커다란 검은 몸뚱이를 던졌다. 긁히고 망가졌지만 익숙한 얼굴, 햇살을 받으면 반짝이던 금발머리가 피로 떡져 그 빛을 잃었다. 부릅뜬 눈이 나를 원망한다. 죄책감이 나를 눌렀다. 하지만, 나는... 나는...

 

버둥거리며 핏물 위를 헤엄쳐 그에게로 닿았다. 내가 사랑하는 발등에 입을 맞추고 나는 까맣게 발려 썩어버린 내 마음을 뱉어냈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나는 그 순간 울었던가, 아니었던가. 나를 위로하던 따뜻한 손길이 떨어지고 차가운 금속이 내 관자놀이에 닿아온다. 모든 것은 끝이었다. 나는 이카로스처럼 추락한다. 절망의 어둠으로 추락하는 그 순간, 나는 울지 않았다. 태양이 나를 비추었다. 그가 처음으로 나를 곧바로 바라봐 주었다. 그 빛에 눈이 멀어 추락할지언정 그 찰나의 관심을 받을 수 있다면 난 황홀한 이 끝을 경애롭게 맞이할 테다.

나는 눈을 감는다.

 

 

타앙-

 

 

잔혹한 내 사랑이 죽었다.

 

 

 

 

 

 

1.

 

그 해 뉴욕의 겨울은 지독하게 추웠다. 뼈 속을 애이는 것 같은 날카로운 바람이 브루클린의 더러운 골목길을 훑고 지나갔다. 남자는 찬 공기에 얼어버린 손끝을 비비며 입김을 불어 넣었다. 허옇게 일어나던 공기가 작은 온기를 남기고 흩어졌다. 검붉은 색으로 물든 손가락이 바닥에 널브러진 머릿수를 센다. 하나, 둘, 셋- 뒤로부터 고기 덩어리가 던져진다. 아, 넷. 이제야 머릿수가 맞는다.

 

꼭 도망가는 것들이 말썽이에요. 던져 넣은 고깃덩이로부터 뭍은 혈액을 양복에 대충 닦아낸 바튼이 투덜거리면서 담배를 꺼냈다. 나도 줘. 젖은 손 위로 담배 한 개비가 올라왔다. 둘은 시체를 처리할 다른 동료들을 기다리며 벽에 기대 담배를 피웠다.

 

스티브 로저스는 그 번져가는 핏물이 자기 구두코를 점령해가는 것을 유심히 보았다. 담배를 피워도 구두 코 끝으로부터 풍겨오는 비리고 썩은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어릴 때부터 맡아오는 냄새는 지나치게 익숙하다. 더러운 것, 시궁창처럼 밑바닥 인생을 사는 그에겐 그저 생활의 일부인 것들이었다.

 

브루클린을 점령한 토르의 충견. 그것이 그가 가진 이름표였다. 어릴 때 부모로부터 버려져 뒷골목을 전전하고 다니던 스티브를 주운 건 토르의 아버지 오딘이었다. 그는 스티브의 강한 생명력과 강직함을 높이 샀다. 오딘은 스티브를 토르 옆에 앉혔다. 그들은 함께 자랐다. 같이 전장을 누비고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길을 함께 걸었다. 그 때 이후로 스티브에게는 철칙이 생겼다. 절대로 토르를 배신하지 않는다. 그 철칙은 지금껏 어겨진 적이 없었다.

 

 

알고 있었어요?

뭘?

보스 동생의 귀환.

어... 뭐...

 

 

번지는 붉은 것들이 스며들어 한쪽 다리를 점령했다. 스티브는 애매한 대답 뿐 침묵했다. 바튼은 그런 스티브를 못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골목 안은 비리고 썩은 냄새, 메케한 담배연기, 침묵으로 틈새 없이 가득 찼다.

 

토르의 동생 로키가 돌아온다. 가족의 귀환을 기뻐하는 토르는 모르지만 스티브는 그게 달갑지 않았다. 토르가 보스자리를 이어받고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동정심과 무름, 얍삽함을 모르는 정공법만 아는 그런 심성은 토르가 보스에 오를 때 반발심을 일으키는 요인들이었다. 조직은 혼란에 빠졌다. 곳곳에서 쿠테타가 일어나고 토르를 제거하기 위한 뒷거래가 이루어졌다. 덕분에 바빠진 것은 토르의 최측근인 스티브와 바튼이었다. 이런 시기에 오딘의 또 다른 자식의 귀환이 그리 곱게 보일 리 없었다. 하지만 스티브가 그를 불편해 하는 것은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스티브와 토르가 더러운 시궁창을 누빌 때 로키는 빛이 들어오는 따뜻한 곳에 있었다. 오딘이 사랑했던 여인, 그녀는 이 세계와는 다른 아주 평범한 여자였기에 로키 역시 그렇게 길러졌다. 로키는 영국으로 보내졌다. 본가의 더러운 세계에서 멀어져 영국의 유명 사립학교와 대학을 나와 로스쿨을 졸업했다.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그는 흔히 뭍사람들이 말하는 성공한 삶을 살고 있었고, 런던에서 제일 유명한 로펌 회사에 취직까지 했다. 그가 본가로 돌아오는 때는 방학 때나 휴가 때 뿐이었다. 스티브는 그 때마다 모든 것을 로키의 비위에 맞춰주려 애쓰는 집안사람들의 모습을 봐야했다. 하지만 그는 그게 그리 좋아보이진 않았다. 로키는 대게 무뚝뚝한 건지 새침한 건지 그런 것들에 즐거워하는 기색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그가 유일하게 진심으로 웃을 때는 방학이 끝나 런던으로 돌아갈 때뿐이었다.

 

로키가 돌아오면 대체적으로 로키 중심으로 모든 일이 돌아가기 때문에 스티브가 본가에 갈 일도 없었고 자연스럽게 로키와 마주칠 일 역시 없었다. 스티브는 로키와 딱 한 번 마주쳤다. 그 날의 기억은 너무 생경해서 잊히질 않았다.

 

그 날은 처음으로 스티브가 살인을 한 날이었다. 급작스런 사건으로 오딘이 배신자를 처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날, 손에든 나이프가 배신자의 내장을 쑤시고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포를 떴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처리한 그런 날이었다. 오딘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 그는 본가에 갖고 마당으로 들어서며 개와 놀고 있는 로키를 보았다.

 

하얀 남방을 단정하게 입고 베이지색 가디건을 느슨하게 걸치고 아래로는 핏감 있는 청바지, 옥스퍼드 슈즈, 멋지게 털을 날리는 골든 리트리버를 쓰다듬는 그의 모습은 스티브에게 마치 다른 세계의 일처럼이나 생소한 장면이었다. 스티브는 그 때 처음으로 자기 모습을 보았다. 어려서 품이 남는 낡은 양복에서는 악취가 났고, 뛰느라 땀에 젖은 몸은 추래했다. 흰 와이셔츠는 군데군데 얼룩과 때가 타선 제 색을 찾기 힘들었다. 로키가 그를 보았을 때 스티브는 처음으로 부끄러움이라는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어떤 행동도 못하고 굳어있는 스티브를 위 아래로 훑어본 로키는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무언가를 던졌다. 스티브의 가슴에 맞고 떨어진 그것은 개껌이었다. 명백한 조롱. 스티브는 얼굴이 뜨끈해져 도망치듯 그 곳을 빠져나왔다.

 

지저분한 자신의 아파트로 가서 스티브는 옷가지를 벗어 던지고 다섯 번을 씻었다. 머릿속에는 온통 로키의 모습에 자신을 대입하는 상상이 끊이질 않았다. 단정한 옷을 입고 개를 키우는 스티브, 학교를 다니고 친구를 만나는 스티브, 부모님에게 하루 일과를 이야기하는 스티브... 하지만 그가 욕실을 나왔을 때 반기는 것은 지독한 현실. 꿉꿉한 공기로 가득 찬 아파트와 식어버린 정크 푸드, 혼자뿐인 자신. 스티브는 자신이 그저 살아있다는 사실 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던 삶에서 서러움을 느꼈다. 그는 그날 밤새 울었다. 보고를 올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딘에게 꾸지람을 당할 테지만 그런 것은 떠올리지 않았다.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끝에 자신의 이상향이 그를 비웃고 있었다.

 

핏물은 어느새 스티브의 구두 밑바닥을 모두 점령했다. 바닥에 담배를 비벼 껐다. 저 멀리서 동료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형님! 고개를 숙이는 치들에게 스티브가 고갯짓을 하자 우르르 골목을 정리한다. 그 모습을 보다가 바닥에 침을 뱉었다. 여러 가지 머리를 복잡하게 맴돌던 감정들이 왈칵 뱉어진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 스티브의 옷깃을 스치고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하지만 스티브는 몸을 움츠리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꼿꼿하게 그리고 위태롭게 그 자리에 서있을 뿐이었다. 마치 금방 꺾일 것처럼.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흔들어내는 시린 바람이 분다.

 

그 해 뉴욕의 겨울은 지독하게 추웠다.

 

 

 

 

 

2.

 

로키가 돌아왔다. 오딘의 둘째 아들, 엘리트 변호사 로키가 돌아왔다. 그는 이번에 집을 리모델링하면서 한 달 정도 휴가를 냈다고 했다. 무엇보다 그가 본가로 오게 된 결정적 이유는 올해 올린 그의 결혼식 때문이었다. 그는 같은 직장 동료와 런던에서 조촐하게 식을 올렸다. 상대가 남자였지만 그건 문제될 것은 없었다. 오히려 오딘은 로키를 대견해했다. 보통의 삶에 완벽하게 적응하여 성공한 삶을 살고 가정을 꾸리는 아들의 모습 그것 하나로 족했다. 그 상대가 어떤 사람이던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집안은 둘째 아들과 그 반려를 맞을 준비로 시끄러웠다. 사랑하는 아들이 돌아온다는 소식에 병상에 있던 아버지는 일어났고, 우울함에 젖어있던 어머니의 얼굴엔 미소가 걸리고, 겉치레에는 아무 관심도 없던 형은 양복을 세 번이나 갈아입었다.

 

로키가 집으로 돌아오자 토르는 반가움에 그를 얼싸 안았다. 형, 아파. 그는 투덜거리면서도 가볍게 미소 지을 줄 아는 여유가 있었다. 그의 ‘부인’은 뉴욕 지사에 일이 있어서 한 시간 정도 늦을 것이라고 했다. 그 동안 그들은 차를 마셨다. 거실에 앉아 보스의 가족들이 차를 마시는 것을 보면서 스티브와 바튼은 멀뚱하니 그 자리에 서있었다. 로키는 보좌관을 원했고 토르는 흔쾌히 한 달 동안 로키에게 스티브를 내어주었다. 스티브에게는 썩 내키는 제안은 아니었지만, 달리 거절할 방법도 없었다. 로키의 녹색 눈이 무심하게 스티브를 바라보았을 때 스티브는 인사를 하는 것으로 그 시선을 피했다. 그 때의 부끄러운 자신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행이도 그 어색함은 로키의 부인이 오면서 흐트러졌다. 그걸 신호로 스티브는 바튼과 뒤도 안 돌아보고 거실을 나섰다. 그들은 가족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복도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웠다. 이런 자리에 까지 정승마냥 서있어야 하는 게 못내 불편한지 바튼은 투덜거렸고, 스티브는 그에 간간히 맞장구 쳐주었다.

 

 

난 뭐, 바비인형 같은 여자라도 데려 올 줄 알았는데. 왜 그 잡지에 나오는 모델 같은 애들이요.

봤어?

안 봐도 뻔 하죠. 같은 사내새끼라는데...

 

 

바튼이 로키의 부인을 칭하며 툴툴거렸다. 스티브는 그 모양새가 문득 궁금해지긴 했지만 어차피 내일부터 마주쳐야 할 상대이니 궁금함을 접었다. 그리고 바튼을 보았을 때, 그가 조용히 어느 한 곳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 시선을 따라가자 캐주얼한 고급 정장을 입고 있는 사내가 보였다. 동그란 눈매 다듬은 콧수염 작은 키 선명한 인상. 그게 스티브가 그를 보았던 첫 느낌이었다. 남자는 흥미로운 눈으로 그들을 보더니 다가왔다. 갑작스런 등장에 스티브도 바튼도 긴장했다.

 

그는 조용히 다가와 스티브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리고 자신에게 가져와 손가락 사이에 물린 담배를 빨았다. 뜨거운 입술이 손가락에 달라붙었다. 화들짝 놀라 스티브가 손을 떼었지만 이미 한 모금 크게 빨아올린 그는 여유 있게 연기를 뱉어냈다.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은 스티브를 보며 킬킬거리며 장난스럽게 웃기까지 한다.

 

 

누구야? 당신.

나? 바비인형.

 

 

그는 얄궂게 웃으면서 잡지에도 나온 적 있어, 라고 부러 부설을 붙인 뒤에 꽁무니를 뺐다. 저 멀리 복도 끝에서 로키의 목소리가 들렸다. Honey! 그리고는 저 멀리서 팔을 벌린 로키의 품으로 가볍게 안겼다. 바비인형. 스티브는 그제야 그의 말을 이해했다. 바튼의 얼굴은 목까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스티브는 웃지 못했다. 그들이 서로 껴안은 채 다시 거실로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스티브는 담배를 빨았다. 손가락으로 입을 맞추듯 입술을 데어본다. 그리고 어색하게 엄지로 문질렀다. 입술이 닿았던 손가락이 타들어갈 것 같았다.

강렬했던 열기, 토니 스타크와의 첫 만남이었다.

 

 

 

 

 

 

3.

 

스티브는 그 다음 날부터 로키의 보좌를 섰다. 그것은 단순한 보좌는 아니었다. 아무리 그가 이 세계와 전혀 관련 없는 사람일지라도 시기가 시기인 만큼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스티브의 태도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로키의 생활은 단조로웠다.

 

그는 아침에 일정하게 일어나 늦잠 자는 부인을 위해 아침을 침실까지 가져갔다. 그들은 느긋하게 아침을 즐겼다. 점심때쯤 서재에서 각자 일을 하기도 했고 햇살 좋은 날은 산책을 하기도 했고, 침실에서 조금 오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저녁에는 가족들이 모여 식사를 한다.

 

특별한 건 없어. 업무용 메일을 보내는 것 같던데, 신경쓸만한 건 아닐 거야. 스티브는 바튼에게 간간히 로키의 행적에 대해 연락을 주었다. 단조로운 생활에서 건질 것이라고는 없었다. 덕분에 스티브가 하루 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그들을 관찰하는 것이 다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로키의 부인, 토니 스타크는 스티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관심을 끌어냈다.

 

토니 스타크는 재치 있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이 집에서는 늘 어두운 로키의 얼굴에도 웃음이 피어날 정도였다. 그는 대게 로키와 시간을 보내거나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했다. 프리가와 차를 마시고 스티브에게도 두서없이 말을 꺼냈다. 그가 하는 말은 자신의 소송 건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들이었다. 스티브는 그런 그의 말에 재대로 대답할 줄 몰랐다. 그가 아는 한에서는 그런 것들을 대답할 만한 이야기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토니는 스티브를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놀렸다.

 

그는 나른하게 방 안 쇼파에 누워 있었다. 로키는 업무를 보기 위해 뉴욕 지사에 출근을 했고 따라가려던 스티브를 심심하다는 이유로 잡은 것은 그였다. 스티브가 보기에 토니는 어린 아이 같았다.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하고, 끊임없이 조잘거리고, 호기심도 많다. 토니는 이미 스티브에게 여러 가지 것들을 물어봤다. 언제부터 이 일 했어? 나이는 몇 살? 부모님은 있어? 애인은? 하긴, 당신 같이 재미없는 남자가 애인을 만들 리가 있나.. 총도 쏘겠네? 칼은? 사람은 죽여 봤어? 천진한 물음은 대게 불쾌할 정도로 무례한 것들이었지만, 어린아이 호기심이라고 생각하면 그리 신경쓸만한 것들은 아니었다.

 

 

사랑 해본 적 있어?

 

 

그 날 토니는 스티브에게 그렇게 물었다. 스티브는 이번만큼은 정확히 대답할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토니는 막 입으로 넣은 딸기의 꼭지를 던졌다. 오물오물 턱을 움직일 때마다 잘 익은 빨간 딸기가 터져나갔다. 달콤한 냄새가 스티브의 코끝까지 닿았다. 그건 착각이 아니었다. 토니가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꿀꺽- 딸기가 삼켜졌다. 잔뜩 과즙이 묻은 그의 손이 스티브이 머리를 톡톡 쳤다. 갈색 깊은 눈이 그의 얼굴을 유심하게 보다가 가볍게 휘어진다.

 

 

당신 불쌍한 사람이구나, 사랑 한 번 못 해보고.

 

 

팔랑 팔랑이란 소리가 맞을 정도로 토니가 가볍게 걸음을 옮겨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스티브의 얼굴이 딸기만큼이나 빨개졌다. 마치 그 때처럼. 로키가 그에게 개껌을 던졌을 때처럼 부끄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그 때의 부러움과는 조금 달랐다. 처음으로 그를 바로 바라봐준 사람. 스티브는 그의 앞에서 온통 까발려져 헐벗은 느낌이 들었다. 스티브의 시선이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처럼 늘어진 토니의 뒤태를 쫓았다.

 

그 날 이후로 토니는 스티브를 체리보이라고 불렀다. 스티브는 그게 싫지 않았다.

 

 

 

 

 

 

4.

 

스티브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토니에게 빠져들었다. 그는 그 감정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몸은 자연스럽게 토니에게 붙어 그의 향기를 맡고, 그의 말을 귀에 담고, 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스티브는 토니에게서 나는 묘한 담배냄새와 향수냄새를 좋아했다. 동그랗게 그를 올려보는 그 눈도, 체리보이라며 자신을 부르는 도톰한 입술이, 웃을 때 눈 옆으로 지는 작은 주름들이 좋았다. 자신의 어깨에 닿는 작은 키도 좋았고, 못생긴 손발이 좋았고, 짓궂은 농담을 하면서 뱉는 웃음이 좋았다.

 

스티브가 그 감정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단순히 감정의 자각을 넘어서 지신의 비참함을 다시 한 번 느끼는 순간으로 변모했다. 그건 어느 아침, 토니로부터 샴페인을 부탁 받았을 때의 일이었다. 스티브는 쟁반에 샴페인과 얼음 크리스털 잔을 옮기면서 아침부터 웬 샴페인을 마시나 싶었다. 그 부부의 취향이 꽤나 고풍스러운 것을 생각하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었지만. 스티브가 그들의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스티브가 토니를 찾자 욕실 안에서 소리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가 욕실로 들어갔을 때.

 

모든 것이 슬로우 모션, 혹은 한 폭의 그림처럼 느리게 재생되었다. 거품이 잔뜩 들어가 있는 욕조에 마주본 채로 들어가 있는 두 사람. 욕조 끝에 기대어 나른하게 눈을 감고 있는 토니와 그런 토니의 발을 잡고 있는 로키. 앙증맞은 발가락이 로키의 입 안으로 삼켜졌다. 토니가 킬킬거렸다. 더럽게. 핀잔에도 로키는 그저 웃으며 발가락을 빨아주고 종국에는 혀를 내어 발바닥 아래를 핥아주었다. 뱀 같은 혀가 발바닥을 휘저을 때 마다 토니의 입에서 탄성이 흘렀다. 욕실에 있는 커다란 창으로 햇살이 비추어 그 모습이 마치 스티브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공간에 있는 느낌이었다. 그들은 스티브 따위 안중에도 없이 서로를 사랑하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스티브는 마치 뭐에도 얻어맞은 사람마냥 멍하니 그 장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스티브는 그의 윤기 있는 머리카락이 물에 젖어 피부 위로 흐트러지는 것을, 동그랗게 말려 올라간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촉촉이 젖은 입술이 한숨처럼 나른하게 신음하는 것을, 구릿빛 피부 위로 물방울들이 멍울지다 흐르는 것을, 그 가지런한 손이 욕조를 세게 움켜쥐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녹색 어두운 눈동자가 스티브를 보았을 때, 그는 화들짝 놀랐지만 어떻게든 태연한 척 하려 애를 써야 했다. 샴페인 쟁반을 욕조 옆 탁자에 올려두고 딱딱한 걸음으로 욕실을 나섰다. 고마워. 뒤에서 들려오는 토니의 인사에도 대꾸할 여력조차 없었다. 그렇게 스티브는 두 번째로 도망쳤다. 욕조에서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스티브의 뒤를 쫒아왔다.

 

스티브는 그 날 꿈을 꾸었다. 거품 사이로 그의 사랑스런 연인이 보였다. 연인은 스티브를 향해 상냥하게 웃었다. 좋은 아침이야. 그가 인사했다. 스티브는 목마른 짐승처럼 그에게 달려들었다. 연인의 싱그러운 입술을 한 입에 삼키고 보드라운 피부를 쓸어내렸다. 갈증이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파괴욕처럼 스티브의 피를 들끓게 했다. 배를 가르고 뼈를 발라 내장 안을 헤집어 그 안에 모두 입맞춤을 하고 싶었다. 스티브는 대신 곧추선 성기를 그에게로 밀어 넣었다. 나른하게 풀린 눈동자가 환희에 차고, 사랑에 마지않는 손이 자신을 감싸 안고, 귓가에 사랑을 지저귄다. 욕실 가득 색스런 신음이 울렸다. 쾌락의 고조, 절정의 순간, 연인은 그를 찬미하듯 속삭였다.

 

 

사랑해, 로키.

 

 

욕조를 비추는 거울을 보았을 때 그곳에 스티브는 없었다. 낯선 이의 품에 안겨 쾌락을 짖는 연인. 낯선이가 거울 너머 스티브를 보았다. 암녹색 눈동자가 휘어지며 비웃음을 지었다. 너에겐 자격이 없어. 너는 개. 더러운 내를 풍기며 기어이 인간 행세를 할 셈인가? 공명처럼 잔인한 목소리가 울렸다.

 

허억-!!!! 스티브는 헛숨을 쉬면서 튕겨 오르듯 일어났다. 햇빛이 비치는 욕실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시야에 비추는 것은 더럽고 꿉꿉한 아파트. 해는 아직 뜨지 않았고 푸르스름한 새벽 공기는 차가웠다. 스티브는 찝찝함에 이불을 들췄다. 사춘기에나 있을 법한 일. 스티브는 쓰게 웃었다.

 

젖은 속옷을 벗어 욕실로 향했다. 침침한 형광등에 비치는 것은 녹슬고 곰팡내 나는 욕조여서 꿈과의 괴리감을 가져왔다. 세면대에 속옷을 던져 넣고 비누를 묻히고 손으로 비비던 스티브는...

 

 

제길...

 

 

젖은 속옷이 바닥으로 내팽겨 쳐진다. 스티브는 주저앉아 무릎을 모으고 그사이에 고개를 묻었다. 마치 스스로를 위로하듯 감싸 안는다. 스티브의 견고하던 벽이 무너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스티브를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배덕감, 외로움, 부러움, 질투, 그리고 사랑.

 

 

사랑 해본 적 있어?

 

 

이명처럼 울리는 목소리.

 

 

당신 불쌍한 사람이구나, 사랑 한 번 못 해보고.

 

 

이제 스티브는 더 이상 불쌍한 체리보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스티브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5.

 

토니와 로키가 싸웠다. 덕분에 집 안이 침묵으로 고요했다. 대게 떠들던 토니는 잠잠했고 로키는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토니는 으레 여유 있는 표정으로 1년에 한 번 거하게 치르는 행사라고 했지만 이내 그는 어딘가 우울해 보였다. 토니는 스티브를 보지 않았다. 천장만 보면서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이건 그냥 누가 더 상대를 사랑하는가의 문제야. 우린 매번 이런 쓸데없는 소모적인 경쟁을 해. 로키는 지가 날 더 사랑하니까 그만큼 많이 져준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지 생각이고. 내가 한 그 세 배 정도를 더 사랑할 걸? 그렇지 않고서야 이 희대의 플레이보이인 내가 끝나주는 미녀들을 걷어차고 평생의 족쇄 따윌 찰 이유가 없잖아.

 

그는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걸려 있는 백금 다이아몬드 반지를 빙그르르 걸렸다. 스티브는 몇 번 입을 열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런 애정 싸움에 대한 위로는 해본 적이 없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져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만 빠끔거리자 그제야 토니가 그를 바라본다.

 

 

Hey, 체리보이. 뭐라고 대꾸 좀 해주던가. 대화는 쌍방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거 몰라?

 

 

우물쭈물 스티브가 당황해하자 토니는 이내 깔깔 웃어버린다. 귀엽긴, 옆에 술이나 갖다 줘. 토니의 요구에 허겁지겁 찬장에 술과 잔을 꺼냈다. 쨍그랑-!! 손에서 미끄러진 잔이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바닥에서 부서진다. 그게 스티브를 더 당황케 한다. 실수하지 않는 완벽한 스티브에게 균열이 일었다. 허겁지겁 치우던 손을 날카롭게 쳐낸 것은 토니였다.

 

 

미쳤어? 유리 깨진 거 맨 손으로 만지면 안 되는 거 몰라? 이봐, 피나잖아.

아... 이런 것쯤은.. 괜찮..

괜찮긴 뭐가 괜찮아?

 

 

손가락 끝에 몽글몽글 솟아나는 핏방울은 스티브에겐 별거 아닌 상처였다. 칼에 배가 쑤셔진 적도 있었고 팔에 총을 맞아 구멍이 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처가 스티브에게는 다 쓰리게 느껴졌다. 좋아하는 사람의 아픔을 대동할 수 없는 한심할 정도로 무식한 자신에 대한 실망감, 그의 앞에서 멍청한 모습을 보인 부끄러움이 상처를 타고 불거져 나왔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에게 삼켜졌다.

 

선정적인 붉은 입 안은 데일 정도로 뜨거워 스티브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쭈욱 피를 빨아 들이는 압력에 머리끝까지 피가 몰렸다. 피를 빨아들인 토니가 바닥으로 피를 뱉어냈다. 그리고 다시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용광로에 손을 집어넣는 다면 이런 느낌일까? 심장은 제 멋대로 미친 듯이 뛰고 손가락과 발가락 끝까지 힘이 들어가고, 온 몸에 열이 오르는 이런 느낌일까? 토니의 입 속에서 빠져 나온 손가락에는 미세한 균열만 있었다. 아니 이미 스티브의 모든 것에 균열이 일어나 위태하게 그 형상만 유지할 뿐이었다.

 

자기야. 문 밖으로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스티브는 그제야 토니 손에 잡혀있던 제 손을 잡아 뺐다. 로키는 토니를 한 번 보고 바닥에 깨진 유리잔을 한 번 보고 한 숨을 쉬었다. 토니는 울상이었다. 마치 잔뜩 투정을 부리는 어린애 같이 사랑스러운 얼굴로 로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리와. 다정하게 벌린 팔에 토니는 미련 없이 돌아서 로키의 품에 안겼다. 훨씬 연상임에도 토니는 마치 애정을 갈구하는 아이처럼 어리광을 피우며 로키의 품 안을 노닐었다. 내가 한 그 세 배 정도 더 사랑할걸? 그건 허튼소리가 아니었다.

 

스티브는 그 모습을 보다가 로키의 시선이 닿기 전에 얼른 유리를 치울 것을 가지러 방을 나갔다. 갈라진 손가락 끝을 매만졌다. 피는 더 이상 나지 않았다. 대신 뭔가 고장이 난 것처럼 속이 이상했다. 스티브는 괜스레 심장께를 긁었다. 속이 간질간질했다. 복도를 걷는 발이 유난히 경쾌하다. 내일은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 와야겠다. 문득 스티브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생각보다 그를 즐겁게 했다.

 

 

 

 

 

 

6.

 

서재 안은 오래된 책들의 눅눅한 냄새와 은은한 잉크 냄새가 났다. 고생 하나 한 적 없는 것처럼 길고 고운 손이 펜으로 글씨를 써 내릴 때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스티브는 멍청하게 서서 상처투성이인 자신의 손을 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로키는 어떤 변덕이 불었는지 일을 하는 동안 스티브가 동행할 것을 요구했다. 스티브는 군말 없이 조용히 따랐지만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마냥 축 쳐진 어깨를 감출 수는 없었다. 스티브는 어제 생전 안 보던 TV를 봤다. 토니와 대화를 하고 싶었다. 토니는 아는 것이 참 많았지만 스티브는 글씨 읽는 법조차 몰라 책을 읽을 수 없는 남자였다. 대신 스티브는 TV를 보며 얘깃거리를 만들었다. 욕실 세면대의 뿌연 거울 앞에 서서 연습도 했다. 그 모든 게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렸으니 아쉬울 법 했다.

 

로키는 책상 옆에 스티브를 세워놓고 어떤 것도 시키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자기 일을 할 뿐이었다. 벌을 받는 기분이었다. 스티브는 이 방 공기가 불편했다. 마치 날카로운 독기가 공기 중을 유영하면서 그를 찌르는 것 같았다.

 

 

개는 말이야, 정말이지 주인을 잘 따르는 동물이거든. 꼬리를 흔들고 배를 까고 아양을 떨고... 근데 발정기만 되면 앞뒤 분간 못 하고 아무에게나 더러운 걸 들이댄단 말이지.

 

 

두 시간 만에 로키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것이었다. 페이퍼 워크 때문에 피곤하고 뻑뻑한 눈을 비비며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기대는 로키는 힘든 기색이 역력했다. 뱀 같이 쏟아진 말이 스티브의 가슴을 강타했다. 그 때의 개껌처럼... 허리를 숙인 로키가 손깍지를 끼고 턱을 괴어 스티브를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 단 한 번을 스티브 앞에서 웃지 않았으니 이 얼굴이 익숙한데도 그 밑에 드리워진 지독한 어둠과 예리한 칼날이 스티브를 떨게 했다.

 

 

토니가 그러더군. 넌 한 번도 사랑을 모른다고 했지.

 

 

스티브의 머릿속에 필름이 꼬였다. 어제 봤던 TV에서는 다큐멘터리가 했다. 암 사마귀가 교미를 마치고 숫 사마귀를 뜯어 먹었다. 괴로움에도 숫 사마귀는 거리낌 없이 몸을 내어주었다. 코미디 프로도 했다. 꿈도 꾸지 마세요! 우스꽝스러운 남자가 원색적인 비난을 뱉었다. 스티브는 그걸 거울 앞에서 몇 번이고 따라했다. 꿈도 꾸지 마세요! 뉴스도 했다. 지구 반대편 어디선가 비행기가 고도를 맞추지 못해 추락했다. 생존자는 없었다. 스티브는 그것들을 조합해 말하면서 브라운관 위로 토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색한 농담에 웃는 아름다운 얼굴이...

 

 

정말이야?

 

 

화면 위로 떠오르는 의뭉스런 로키의 표정. 필름이 끊어졌다. TV 화면이 곧 회색 어지러운 화면으로 바뀌었다. 스티브는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7.

 

새벽 공기를 가르고 스티브가 질주한다. 잘 갖춰지지 못하고 흐트러진 의복이 바람결에 거세게 휘날렸다. 달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골목을 지나친다. 잠결에 받은 전화는 그를 잔혹한 현실로 인도했다. 핸드폰 너머로 들리건 다급한 바튼의 목소리. 형, 형!! 우리가 속았어요, 배신당했다고요! 어서 본가로... 통화는 거기까지였다. 뚝 끊긴 신호 너머로는 침묵뿐이었다.

 

새벽녘 스티브의 달콤한 꿈이 거짓처럼 깨졌다. 햇볕이 내리쬐는 테라스에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는 꿈. 그의 품에서 어리광을 부리는 토니를 어루만지고 이야기를 나누는 꿈. 꿈에서 스티브는 달변가였다. 그는 채 현실에서 말하지 못 한 TV에서 본 다큐멘터리, 유머, 뉴스를 적절히 섞어 재밌게 떠들어댔다. 꺄르르 그가 맑게 웃었다. 그 간지러움을 품에 안고 스티브도 웃었다. 그 곳에는 토니의 향기만 났다. 더러운 시궁창 냄새도 시큼하고 비린 피냄새도 어느 것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문을 박차고 들어갔을 때 보이는 풍경들은...

 

피를 토하며 바튼이 쓰러졌다 허리의 반쯤이 베여 내장과 피가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는 괴로움에 바르작거리다가 스티브를 보고는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 안간힘을 썼다. 탕- 누군가의 손에서 발포된 총알이 그의 머리를 꿰뚫었다. 왈칵 뇌수가 쏟아지고 눈이 뒤집히고 이내 고요하다. 로키이-!! 원망의 굉음을 내던 토르의 왼쪽 어깨에 칼날이 박혔다. 그가 울부짖었다. 온 몸이 속박되어 저항하지 못하고 그는 미련 맞게 울기만 했다. 벌겋게 달아오른 눈가로 피가 섞인 눈물이 후드득 쏟아져 얼굴을 덮었다. 오딘과 프리가는 이미 숨이 끊어졌다. 대부분의 동료들처럼 처참하게 발려져 버려진 쓰레기 자루 같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토르의 어깨에서 장도를 빼낸 로키가 그제야 스티브를 보았다. 자신의 혈육을 도살하고도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감흥 없는 얼굴이 피칠갑을 해 반쯤 붉게 물들어 있었다.

 

스티브는 분노치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그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졌던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렸다. 허망함. 뱃속이 텅 빈 것 같았다. 그것 앞에 스티브는 무릎을 꿇었다. 절망. 그의 오롯하게 지켜오던 삶이 균열을 틈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누군가 스티브에게 총을 겨눴고 그는 반사적으로 품 안에 총을 꺼내 로키에게 겨누었다. 총구가 자신을 향하자 로키가 표정이란 걸 만들어 냈다. 스티브에겐 너무 생소한 웃음이 날카롭게 울렸다.

 

 

구석에 몰리면 짐승도 사람을 문다더니....

 

 

짐승. 알고 있었다. 자신이 살아가는 이 어둡고 습한 뒷골목 세계는 사람만도 못한 짐승들의 삶이라는 것을. 하지만 스티브는 살고 싶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던 그의 마음에 돌멩이가 던져져 큰 파문이 일었다. 균열이 일어나고 형체만 잡고 있던 위태로운 것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미 스티브는 브루클린을 점령한 토르의 개가 아니었다. 그저 숨을 쉬는 것이 전부인 삶을 사는 꼿꼿한 자신이 아닌 순수한 바램이 있게 된 유동적인 개체로 변모했다.

 

그가 가지고 있던 곧은 철칙이 깨어지고 커다란 갈망이 그를 덮쳤다. 스티브를 살게 하는 주체는 더 이상 토르에 대한 충성이 아니었다. 새벽에 꾸는 꿈이 그저 꿈일지언정 스티브는 그의 곁에 살고 싶었다. 닿지 않아도, 잡을 수 없어도, 항상 그를 볼 수 있는 그런 반짝반짝 빛나는 그의 삶에 작게 이는 어두운 그림자처럼.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삶에 대한 강렬한 집착이 일며 생각나는 단 한 사람, 사랑하는 그.

 

시선을 돌리자 그가 보였다. 구석 계단 끝에서 지루한 TV 프로를 보는 것처럼 뚱한 표정. 금방이라도 심심하니까 놀아달라며 투장을 부릴거 같은 얼굴이었다. 스티브는 망설임 없이 그에게로 달렸다. 당황한 그들의 총알이 스티브를 맞추지 못하고 허벅지와 어깨를 스쳤다. 미처 피하지 못한 토니가 스티브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스티브의 총구가 토니를 겨누었다. 쏘지 마!! 로키가 발악하듯 외쳤다. 그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졌다. 로키가 그를 중재했다. 그를 놔줘, 목숨은 살려줄게. 하지만 그런 회유는 스티브에게 닿지 않았다. 사랑에 마지않는 간절히 원하던 그 향기가 그의 손에 있었다. 스티브는 더 두려울 게 없었다.

 

 

 

 

 

 

8.

 

스티브가 토니를 인질로 잡아온 지 일주일이 흘렀다. 그는 지저분한 모텔을 전전하며 도망 다녔다. 어둡고 지린내가 풍기는 방은 그의 꿈에 나오는 풍경들과 사뭇 달랐다. 지저분한 침대 위에 지쳐 잠든 토니를 바라보았다. 뒤로 묶인 손목이 묶인 줄을 따라 붉게 물들어 있었다. 토니는 이틀을 화내고 이틀을 애원하고 삼일을 앓았다. 미친 새끼. 넌 재정신이 아냐. 로키가... 그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너 같은 개자식은 총알 한 방으로 안 끝나!!! 아니, 아냐 너 같은 새끼는 갈가리 찢어버려 야해. 짐승 같은 자식... 아아, 제발. 체리보이, 제발 날 그이에게 보내줘, 난 그 사람 없이 못 살아... 제발... 토니는 정신이 들면 끔찍할 정도의 저주를 퍼붓고 간절히 애원하고 두서없이 말을 쏟아냈다. 스티브는 그런 그에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꿈과 같지 않는 현실을 외면할 뿐이었다.

 

외부와 유일하게 연결 되어 있는 핸드폰은 분리된 채 구석에 박힌 지 오래다. 도주 이후 다섯 번 로키로부터 연락이 왔다. 첫 번째 통화에서 그는 당장 토니를 놔주지 않으면 토르를 고문해서 잔인하게 죽일 것이라고 화를 냈다. 두 번째 통화에서는 토르와 교환하는 조건을 내뱉으며 거의 신경질적으로 토니를 찾았다. 세 번째 통화에서 둘이 평범하게 살 수 있게 조취해 주겠다는 조건을 냈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 많이 지쳐 보였다. 네 번째 통화에서 로키는 완벽하게 자신을 잃었다. 그는 애원했다. 제발 그를 돌려달라고. 다섯 번째 통화에서 로키는 거의 체념한 듯 토니와 이야기 하고 싶다고 했다. 스티브는 짧게나마 토니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원하는 바를 생각할 테니 그땐 자신이 연락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핸드폰을 분리했다. 그 때 토니가 냈던 울부짖음은 거의 고막을 끊어낼 것 같은 것이었다.

 

스티브는 햇살이 얕게나마 들어오는 침대로 다가갔다. 열이 올라 밤새 앓은 그는 산새처럼 작은 몸을 웅크린 채 잠이 들었다. 스티브는 토니의 몸에 손조차 대지 못하고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것만이 토니가 자신의 곁에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했다. 스티브의 눈이 서글퍼졌다. 당신은 여기 있는데 왜 가질 수가 없죠? 묻고 싶었지만 스티브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상처 난 손목에 연고를 바르는 것 뿐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9.

 

차라리 우리 멀리 도망가자.

 

 

토니의 건강이 회복되었다. 그는 처음으로 로키를 찾거나 스티브를 저주하는 말이 아닌 다른 말을 꺼냈다. 배고파, 과일이 먹고 싶어. 그 말에 스티브는 신이 나서 부랴부랴 근처 슈퍼에서 사과를 샀다. 그가 좋아하는 딸기는 없었지만 그만큼이나 붉은 사과였다. 먹기 좋게 썰어 껍질을 벗기고 있을 때 그는 조금은 엉뚱한 소리를 했다.

 

여길 벗어나서 차를 타고 미친 듯이 달리는 거야. 산맥을 타고 사막을 지나 라스베이거스에 가서 도박도 하고 바닷가에서 해수욕을 하고 나는 로키를 잊고 너는 여기를 잊고 그냥 평범하게 살까? 넌 몸 쓰는 일은 잘 하니까 누군가 경호를 해줘도 되고 난 집에서 저녁 해놓고 널 기다릴 거야. 그런 지루하고 평범한 생활... 그러다가 정 미치겠거든 국경을 넘자. 넘다가 총 맞고 멋지게 죽어버리던지....

...... 왜 그런 말을 해요?

너 나 좋아하잖아.

......

그래서 끌고 온 거 아냐?

 

 

암갈색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바라본다. 스티브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깎던 사과와 과도를 침대 옆 탁자에 두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코끝이 닿고 서로의 숨결이 섞일 때에도 토니는 그를 밀어내거나 피하지 않았다. 메마르고 찢겨진 입술 위로 꾸욱 도장을 찍듯 눌러본다. 그리고 다시 꾸욱.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축축한 입 안은 손가락을 넣을 때처럼 뜨거웠다. 스티브의 혀가 좀더 깊숙이 파고들어 토니의 작은 혀를 건드렸다. 어색하게 눌러보자 말랑하고 달콤한 것이 혀끝에 닿았다. 스티브의 안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욕망에 젖은 그가 무섭게 파고들자 토니가 작게 속삭였다. 아파. 말 잘 듣는 개처럼 스티브가 떨어져 나갔다. 귀를 잔뜩 내리고 상을 받고 싶어하는 강아지 같은 얼굴에 토니가 웃었다.

 

토니가 고개를 숙여 말랑한 볼을 은밀하게 스티브의 고간 사이로 가져갔다. 스티브는 화들짝 놀랐지만 그를 떼어내지 못했다. 바지 위로 터져 나올 것처럼 흥분한 그것이 민망스럽게도 토니의 볼 위에 닿아왔다. 토니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도망가지 않을게. 손 풀어줘. 만질 수가 없잖아.

 

 

불만스럽게 투덜거리는 모습은 스티브가 알던 그 모습 그대로라, 그는 망설임 없이 손을 풀어주었다. 뻐근한 팔을 몇 번 털어낸 그가 왼손으로 스티브를 껴안았다. 허덕이며 흥분에 젖어있는 숨이 어깨로 쏟아졌다. 오른 손이 스티브의 바지와 속옷을 걷어내고 바짝 솟은 성기를 꺼내었다. 끝이 살짝 젖은 그것을 손으로 문질러 전체적으로 휘어 감았다. 스티브가 짐승처럼 으르렁 거렸다. 쉬이- 달래듯 차분한 목소리가 스티브를 안정시킨다. 손은 가볍게 스티브의 발기된 물건을 위 아래로 흔들었다. 검지로는 귀두를 은근하게 애무하고 뿌리부터 미끈거리는 피부를 흔들어 주었다. 질척이는 소리가 아래에서부터 나왔다. 흥분을 주체 못 한 스티브의 허리가 들썩였다. 그는 낮게 신음했다. 어쩔 줄을 몰라 두 손은 토니를 껴안지도 못하고 그저 그의 어깨에 의지해 몸을 늘어뜨릴 뿐이었다. 흔들리는 속도가 빠르고 강해졌다. 눈앞에서 스파크가 튀고 스티브는 금세 사정했다. 선단으로 부터 비린 액체가 쏟아져 토니의 손을 적셨다. 스티브는 격렬한 절정과 함께 닥쳐온 나른한 졸음에 토니의 목덜미를 개처럼 핥았다. 오늘은 이야기 할 수 있을까? TV에서 봤던 것들 토르와 함께 했던 어린 기행들... 귓가에 짧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간지러운 목소리가 울린다.

 

 

사랑해, 스티브.

 

 

스티브는 차마 자기가 잘 못 들은 것은 아닌가 귀를 의심했다. 온 세상이 빛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스티브는 그를 꼭 껴안았다. 보드라운 피부에 입을 맞추고 귓가를 핥았다. 그리고 스티브의 손이 토니의 가운을 헤치고 다리 사이에 닿았을 때.

 

 

푸욱-

 

 

손에 닿은 성기는 발기되어 있지 않았다. 뭔가 알아차리기 전에 날카로운 금속이 옆구리를 파고든다. 우드드득- 칼날이 살 속에서 돌아가며 뼈를 가르고 근육을 끊어냈다. 쑥 빠지면서 왈칵 비린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건 정말 사과처럼이나 빨겠다. 바동거리는 몸을 토니가 다시 꼭 안아 주었다. 쉬이- 달래는 것 같은 속삭임.

 

 

푸욱-

 

 

다시 칼날이 박힌다. 격침하는 고통에 스티브가 쓰러졌다. 절정의 노곤함과 고통으로 점멸하는 시야 사이에 사랑스런 그의 얼굴은 기쁘게 웃고 있었다.

 

 

미안, 거짓말이야.

 

 

무엇이? 함께 떠나자는 말? 도망가지 않겠다던 말? 사랑한다는 말?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는 스티브를 찌른 과도를 대충 바닥에 던져두고 상쾌하게 기지개를 켠다. 더럽다는 듯 손에 묻은 정액과 피를 시트에 닦아냈다. 그러곤 구석의 핸드폰을 찾아 배터리를 연결하고 전화를 건다. 자기야, 미안. 이제 끝났어. 그 짧은 과정 동안 토니의 시선은 스티브에게 닿지 않았다. 그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스티브는 눈을 감았다.

 

 

 

 

 

 

10.

 

그리고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 곳은 다시 어둡고 더러운 곳이었다. 창고 안은 시리게 추웠다. 찔린 옆구리에서 피는 멎지 않았다. 하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아픈 건 오히려 쏟아져 내리는 피만큼이나 주체하지 못하고 흘러내리는 그를 사랑한 내 절절한 마음뿐이었다.

 

열 명 정도 되어 보이는 치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었다. 나는 무작정 주먹을 휘드르고 그들에게서 칼을 빼앗아 쑤셔 넣었다.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코끝이 시큰했다. 자꾸 잠이 오고, 나는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 영원의 꿈을 꾸기 전 마지막 한 번 만이라도...

 

내가 마지막 치의 뱃속을 갈가리 찢어 놓을 때쯤 창고의 거대한 문이 열렸다. 어두움 안으로 빛이 들어왔다. 그 곳에 있는 여러 사람들 중 나는 그 만을 식별해내는 신기한 능력이 있었다. 남편의 품에 안겨 조금은 무심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날 태어나서 정말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숨을 쉴 때 마다 시리고 찬 공기가 폐를 채우고 구멍 난 살갗사이로 빠져나왔다. 처덕거리는 핏물이 비루한 몸뚱이의 반을 적시고도 야금야금 나를 먹어간다. 반쯤은 나의 것이었고, 나머지 반은 내가 무너뜨린 그의 병정들 것이었다. 나는 핏구덩이 안으로 무너졌다. 자세를 낮춰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그를 찬미한다. 이 모든 것은 그를 위한 것이었다. 오로지 그에게로 닿는 것, 그것뿐이었다.

 

 

보고 싶었어요.

 

 

더듬더듬 내 수줍은 마음을 내뱉을 때 마다 뜨거운 내 애정처럼이나 검붉은 생명들이 쏟아져 나왔다. 뭉그러진 시야 사이로 그가 내게 다가왔다. 코끝으로 내가 좋아하는 그의 향수 냄새와 은은한 담배 냄새가 났다. 도톰한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우고 자랑할 만한 예쁜 입술로 담배를 피우고 있을 것이다. 붓고 터진 눈가 때문에 그의 얼굴을 잘 볼 수 없었다. 그게 너무 아쉬웠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내가 뱉어낸 새빨간 생명을 그가 짓밟았다. 고운 발이, 볼록한 복숭아뼈가, 잘록한 발목이 스펀지처럼 그것들을 흡수하여 물들어간다. 발갛게 젖은 발이 내가 아는 아름다운 어떤 것들을 비교해도 모자를 정도로 아름다워서 짓이겨지고 터져 피떡이 된 내 몰골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그의 손길이 나에게로 닿았다. 뜨겁고 다정한 손길이 내 귀 뒤를 목덜미를 쓸어주었다. 불쌍한 체리보이. 한 없이 다정한 동정의 말. 그의 입술이 잔혹하게 웃었다.

 

 

이제 다 끝났어.

 

 

종국을 선언하며 나를 달래듯 그가 내게 속삭였다. 내 시야 앞으로 누군가 커다란 검은 몸뚱이를 던졌다. 긁히고 망가졌지만 익숙한 얼굴, 햇살을 받으면 반짝이던 금발머리가 피로 떡져 그 빛을 잃었다. 부릅뜬 눈이 나를 원망한다. 죄책감이 나를 눌렀다. 하지만, 나는... 나는...

 

버둥거리며 핏물 위를 헤엄쳐 그에게로 닿았다. 내가 사랑하는 발등에 입을 맞추고 나는 까맣게 발려 썩어버린 내 마음을 뱉어냈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나는 그 순간 울었던가, 아니었던가. 나를 위로하던 따뜻한 손길이 떨어지고 차가운 금속이 내 관자놀이에 닿아온다. 모든 것은 끝이었다. 나는 이카로스처럼 추락한다. 절망의 어둠으로 추락하는 그 순간, 나는 울지 않았다. 태양이 나를 비추었다. 그가 처음으로 나를 곧바로 바라봐 주었다. 그 빛에 눈이 멀어 추락할지언정 그 찰나의 관심을 받을 수 있다면 난 황홀한 이 끝을 경애롭게 맞이할 테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아마 난 당신의 찬란한 행복에 오점처럼 남아있겠죠. 얼룩처럼 남은 나를 당신은 거들떠도 보지 않을 테지만 당신은 나에게 빛이었어요. 어두운 내 삶에 반짝반짝 광을 내 자랑할 만큼 예쁘게 빛나는 작은 트로피 같은 거 있잖아요. 내가 갖기엔 너무 과분했지만 고마워요. 나는 이로서 나의 짧은 삶에 유일하게 살아있던 날을 선물로 받았네요.

 

있잖아요, 다음번에는 꿈에서가 아니라 정말 현실에서 나를 받아줄래요? 당신이 어디에 있든 내가 달려갈게요. 나는 개니까 당신 향기를 따라 당신에게 닿을래요. 미로 같은 이곳을 지나 당신 옆에 당당히 서고 싶어요. 그 때까지만 기다려 주세요. 누구에게도 속하지 말고, 그냥 당신 순수했던 그 웃음만 가지고 오롯이 날 기다려 줘요. 오래 걸리지 않을 게요.

 

있잖아요, 그 때 만약 나를 만나게 된다면,

 

그 땐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나요?

 

나는 눈을 감는다.

 

 

타앙-

 

 

잔혹한 내 사랑이 죽었다.

 

 

 

 

 

0. 


지워지지 않는 그의 잔상.

 

그 해 뉴욕의 겨울은 지독하게 추웠다. 항상 런던의 고만고만한 기후에 익숙한 나에게 뉴욕은 저주 받은 동네였다. 그래서 나는 부러 침대 밖으로 나가길 거부했다. 로키는 내 정수리에 입을 맞추고 방 밖으로 나갔다. 일주일 후면 런던으로 돌아가니 그에겐 할일이 태산이다.

 

그는 자신의 얼룩과도 같은 집안을 지워버리고 한 결 가벼운 얼굴이었다. 늘 그림자처럼 그의 인생에 오점의 꼬리표로 달려있던 것이 떨어져 나갔으니 그럴 만 했다. 그는 조직을 쪼개 그에게 충성한 개들에게 던져주었다. 멍청하게도 그들은 좋아했지만 우두머리를 잃은 조직은 금세 사라질 것이다. 그게 가장 바라는 바이기도 했고.

 

필터를 깊게 빨아들이자 쌉싸름한 담배연기가 입 안을 가득 채우고 목구멍을 간질인다. 공기 중에 퍼져나가는 연기. 그 연기사이로 파란 눈동자가 보였다. 포르말린 안에서 유영하는 구체는 제 주인을 닮아서인지 미련 맞게도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내 사랑하는 남자는 산타클로스 같은 남자였다. 모든 일이 끝난 후, 그는 뉴욕에서 가장 야경이 예쁜 레스토랑에서 프로포즈를 할 때처럼 멋지게 그걸 건넸다. 덕분에 서빙을 하던 순진한 웨이터가 기겁을 하며 엉덩방아를 쪘다. 그는 그것을 '충견의 눈' 이라 했다. 나는 나머지 부분이 어디에 버려졌는지 묻지 않았다. 알고 싶지도 않았고. 마지막 보았던 잘생겼던 얼굴이 꽤 망가져 있었는데, 흠집 하나 없는 완벽한 결정체는 꽤 예쁘게 보존돼 마음에 들었다. 우린 그 날 침대 협탁에 그걸 놓고 밤새도록 섹스했다. 나는 그 날 무려 여덟 번이나 갔다.

 

처음은 그의 개. 그가 태어나서 유일하게 가족이라고 생각하던 개였다. 금색 털이 매끄럽던 개는 발정기에 내 다리에 매달렸다가 그의 손에 목이 꺾였다. 불쌍한 개는 순진하게도 주인의 손에 담긴 설탕을 먹으러 달려왔다가 달콤함을 채 잊기도 전에 그 손에 목이 비틀렸다. 개는 숨이 끊어질 때 까지 꼬리를 흔들었다. 그는 그 날 개 가죽으로 만든 장신구를 내게 주었다. 창문에 걸면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그것이 꽤 마음에 들었다. 나는 그래서 그 답례로 내 백버진을 주었다. 그는 이런 내 순종적인 모습을 꽤 흡족해했다. 그 이후로 나는 그가 까마귀처럼 내게 반짝거리는 기념품을 물어다 주면 나는 그날만큼은 바짝 선 꼬리를 내려주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 날 그에게 홀딱 반해버렸다. 악취미라 하겠지만, 나는 그이의 단호함과 나를 위해서라면 가족도 버릴 수 있는 그런 독기어린 집착을 사랑했다. 부모에게 학대 경력이 있는 나에게는 오로지 내게로만 쏠리는 절대적 관심이 필요했다. 박력 있는 잔혹한 독재자는 내가 미처 방어하기도 전에 날 점령했다. 그리고 일 년 뒤 그가 내게 프러포즈를 했을 때 나는 흔쾌히 그의 영원한 족쇄를 짊어지었다. 언젠가 나는 우리가 이혼하게 되면 꽤 볼만한 법정 공방이 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알고 있다. 그가 나를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것임을. 그게 애정을 빙자한 지독한 독기 혹은 집착이라고 해도, 나는 황홀한 마음으로 이 영원한 속박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진저리를 치는 그의 가족을 청산하러 갈때 나는 군말 없이 그를 따랐다. 조직에 혼란이 오자 그의 형을 못미더워 하는 사람들이 그에게 컨택을 해왔다. 괴로워하며 고민하던 그는 이를 다 없애지 않는 이상 그 것들이 평생 그를 쫓아다닌 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일은 그동안 그가 오랜 시간을 고생하던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너무 쉽게 끝났다.

 

파란 눈동자. 유리병을 흔들자 데구르르 굴러가던 것이 다시 나를 보았다. 나는 다섯 번 정도 그걸 굴리다 그만 두었다. 파란 눈동자는 고집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이 전리품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마치 그가 자기 개를 죽였던 것처럼 나도 나를 따라다니던 개 한 마리를 죽였다. 뒷골목 떠돌이 개는 자신의 리더를 따르는 충성심 있는 놈이었지만 그래봤자 개였다. 손길을 타지 못한 개는 약간의 관심을 주는 사람이 생기면 금세 그 사나운 이를 집어넣고는 꼬리를 치고 배를 까고 아양을 부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처음 온 날 부터 그의 관심을 끌었다. 로키가 '일'을 보는 동안 감시의 눈을 피하기 위한 과정이었고, 어린애 투정은 그이도 뿌리치지 못하는 내 특기 중에 하나였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내게 보이는 개의 순수한 호감을 눈치 챘다. 그리고 나는 그런 호감들을 잘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순진한 녀석은 금새 내 손 안에서 놀아났다. 물론 로키는 내가 그러는 것을 싫어했다. 그는 욕실로 '우연하게' 들어온 개를 보고 그 안에 깔린 개의 연심을 꿰뚫었다. 덕분에 우리는 간만에 대판 싸웠다. 미물조차 내게 닿아있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그는 내 이런 노고를 '쓸 데 없는 짓'이라 폄하했고, 나는 그의 일을 좀 더 수월하게 하기 위한 일종의 감수해야할 희생의 과정이라고 말했다. 결과적으론 언제나 그랬듯 내 승리였다. 그는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대미를 장식할 날에 대한 지시를 내리고 돌아와 내가 의도적으로 벌려놓은 함정에 걸려든 개를 보고 내 멋진 공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날 그는 나를 품에 안고 그 개의 마지막은 내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며 그 이후엔 불온하게 날 담은 그 개의 눈을 도려낼 거라 했다. 나는 그 다음날 그이가 개를 끌고 가는 것을 묵인함으로서 내게 그 개에 대한 일말의 미련도 없으니 그 말에 동의하겠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보냈다. 개의 감시에서 벗어난 나는 그 푸른 눈을 떠올리며 그 멋진 전리품을 받을 생각에 소녀처럼 설레어 했다.

 

그러니까 이건... 나는 신경질적으로 병을 집어 들고 욕실로 향했다.

 

소녀의 설레임? 아니 그건 내게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었다. 소녀처럼 군 건 그의 개였다.

 

마지막 피날래는 내가 생각 했던 것만큼 재미있진 않았다. 로키의 가족들은 배신을 당할 때까지도 그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 멍청함에 일은 너무 쉽게 끝났다.

 

하지만 납치는 내가 원한 옵션은 아니었다. 내가 진저리를 친 건 당연했다. 나는 내가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개의 삶에 포함되어야했다. 더러운 침대, 눅눅한 공기, 꿉꿉한 냄새. 하지만 개는 정말 소녀처럼 기뻐했다. 개는 멍청하게도 나를 잡아 놓고 손 하나 건들이지도 못했다. 어쩔 줄을 모르며 꼬리를 바짝 숙이고 풀이 죽은 표정으로 내 주위를 맴돌 뿐이었다.

 

나는 변기 뚜껑을 열었다. 용기의 뚜껑을 따는 손은 망설임이 없다. 와르르- 안에 있던 시고 비린 액체와 구 덩어리가 변기통 안으로 쏟아졌다.

 

차라리 멀리 도망가자. 그건 체념에서 나온 내 진심이었다. 이렇게 묶어만 놓고 있지 말고 차라리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버리면 좀 더 상황이 나아질까 하는 변덕이었다. 어차피 로키는 그 곳에 없었고 난 이 절망적인 상황을 어떻게든 희망적으로 바라보고 싶었다. 개는 기뻐했다. 밑바닥이 아닌 뭍으로 올라와 평범한 인간의 삶을 제안하는 내게 개는 스스럼없이 저를 내어주었다. 그리고 방심했다. 개의 욕정을 풀어주는 과정은 그리 불쾌하진 않았지만 마지막 순간 몽롱한 성적 흥분에서 벗어난 나는 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더러운 시트, 눅눅한 공기, 꿉꿉한 냄새. 나도 모르게 발기했던 성기가 순식간에 식기엔 충분히 비참한 광경. 아마 이곳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똑같이 눈 앞에 펼쳐질 풍경들, 그 안에 포함될 개와 나의 단상. 그건 나를 냉정하게 만들었다. 그 냉정한 현실감이 그의 성기를 쥐었던 손으로 과도를 집게 했다.

 

변기통에 파란 눈동자는 나를 바라본다. 그의 마지막처럼 원망 하나 없이 순수하게 나를 담는다. 마지막까지 꼬리를 치며 죽은 로키의 개와 피떡이 되어서도 내게 웃던 그 모습이 오버렙되어 나를 괴롭혔다.

 

그가 내 발등에 입 맞추고 나를 숭배하며 사랑한다며 우짖던 날, 나는 내 몸에 뭍은 그의 피를 다 닦아내고도 꺼져가던 온기가 닿았던 발등의 흔적만은 지우지 못했다. 슬펐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에게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은 선물을 간직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절대적인 애정에 대가로 나는 그에게 달콤한 죽음을 주었다.

 

만약.

만약에.

 

담배 끝이 다 타들어가 재로 바닥에 떨어졌다. 손가락 사이에 작은 화상이 생겼다. 흉지지 않겠지만 오래 남을 흔적처럼 그 자리에서 아리며 그 존재감을 표명한다.

 

만약 네가 개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조금은 다르게 만났더라면, 나는 너를 사랑했을까?

 

난 네 순수한 애정에 답해줄 어떠한 감정도 없었다. 네가 내 이야기에 대답해주지 못한 것처럼 나도 그러하지 못했다. 그건 내가 로키를 사랑해서가 아니었다. 마지막까지 네게 대답할 줄 몰랐던 나의 어리석음이었다.

 

다음에는 조금 더 밝은 곳 아래에서 만나자. 내가 당연하게 너를 선택할 수 있게 너는 개가 아닌 사람이 되어 나를 찾아야 한다. 네 마음에 품은 곧은 연심을 품고 내게로 와서 오롯이 나만을 바라보고 나만을 사랑해야 한다. 나는 여기서 묵묵히 너를 기다릴 테니. 조금은 지루하지 않게 빨리 와주었음 하지만...

 

있잖아, 만약 그때 네가 날 찾아온다면,

 

그 땐 네게 못 한 그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망설임 없이 레버를 눌렀다. 소용돌이치는 물길 사이로 휩싸이듯 그 눈동자가 맴돌다 이내 사라진다. 나는 차마 움직이지 못하고 데인 손가락을 매만졌다. 촉감에 따라 아리다가 이네 가라앉는다.

 

여린 그의 사랑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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