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 And Beautiful 01
(Steve Rogers, Bucky Barnes X Tony Stark)
If. 버키가 열차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둘이서 레드스컬을 뿌셔뿌셔 하다가 냉동된 후 1991년 여름에 깨어났다면.
1991년 그 해 봄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스티브와 버키는 알지 못했다.
그들이 긴 잠에서 깨어난 것은 1991년 6월, 봄이 지나고 이제 막 여름이 다가오는 그 즈음이었다. 포기를 모르는 하워드의 고집과, 유전 탐사를 나섰던 사람들의 우연한 발견으로 그들은 딱딱한 얼음 밑에서 구조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40여년의 세월을 거슬러 현재에 도달하였다. 눈을 감기 전 보았던 풍경과 사뭇 다른 도시의 전경들, 그리고 무엇보다 늙어버린 동료들을 마주하기란 그들에게도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많은 것들이 변화되었고, 그 중에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있었다. 이제는 자식들과 남편을 대동하고 있는 머리가 희끗한 페기를 마주했을 때 스티브는 벅차오르는 눈물을 삼키려 노력해야했다. 그는 앵무새처럼 말했다. 잘 됐다, 잘 됐어. 그는 혼란스러웠지만 적어도 홀로 남아있지 않은 그녀의 모습에 안도감을 느꼈다. 버키와 스티브가 살던 브루클린의 골목길은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살던 집도, 풍경도 모든 것이 바뀌어 버린 자리를 보며 둘은 한탄을 했다. 그들은 돌아왔지만, 돌아와야 할 자리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외견은 이십대 청년이었지만 시대를 잃어버린 미아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만한 것은 그들에게 하워드 스타크라는 친구가 있다는 점이었다. 하워드는 특유의 천재성을 내세워 군수 업체인 스타크 인더스트리를 만들었고, 충분히 두 남자의 생활을 지원할 만큼의 부유함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희대의 바람둥이라고 불리던 그가 이제는 안정된 가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을 충분히 놀라게 했다. 그는 친구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원하는 만큼 머무르면서 적응하라는 친구의 기쁜 얼굴을 보며 둘은 딱히 거절할 명분을 만들지 못했다. 사실 오갈데 없는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한적한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하워드가 보내준 자동차 뒷좌석에 탄 채 둘은 복잡한 뉴욕 도시에서 벗어나 한적한 햄튼의 풍경으로 바뀌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살았던 40년대보다 더 정신없고 어지러운 도시를 벗어나니 스티브는 답답했던 숨통이 조금이나마 트이는 듯 했다. 그건 버키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차창 밖으로 햇살을 머금은 녹음이 보이기 시작하자 버키는 운전기사를 종용해 자동차 뚜껑을 열고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알 수 없는 노래들이 바람에 실려 흩어졌고 버키는 그 알지도 못하는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이건 맘에 들어."
비스듬히 기대 손으로 노래의 박자에 맞춰 차체를 두드리던 버키가 말했다.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던 스티브가 고개를 돌려 친우를 보았다. 얼음에서 깨어난 이후로 약간의 우울감이 비췄던 친구의 표정은 모처럼 좋아보였다.
"뭐가?"
"차가 빠른 거. 모양은 솔직히 예전게 더 좋지만.."
"동감이야."
"얼마나 더 가야해?"
"거의 다 온 것 같아. 저기 봐."
스티브가 손가락을 가르킨 길의 끝에 바다와 맞닿아 있는 커다란 저택이 보였다. 휘유~ 돈 좀 벌었다더니 아주 긁어 모았나 보네. 버키가 콧노래를 부르며 감탄했다. 거대한 저택은 프랑스 귀족이나 살 것처럼 웅장했다. 사람의 키 세 배는 되어보이는 철제 대문이 열리고 달려온 길만큼 넓은 정원 부지를 지나서야 차는 부드럽게 저택 앞에 멈춰섰다. 제일 먼저 그들을 맞이하는 것은 키가 훤칠한 집사였다. 희끗한 머리를 단정하게 넘긴 남자는 젠틀한 영국 발음으로 자신을 에드윈 자비스라 소개했다. 그는 능숙하게 고용인들을 부리며 실려있는 짐을 정리했다. 그 다음으로 느긋하게 나온 하워드 부부가 그들을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처음으로 본 마리아 스타크는 생각보다 차분하고 고아한 이미지였고, 이는 한 때 천방지축이었던 하워드를 생각한다면 제법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 둘은 생각했다.
"오는 길이 불편하지는 않았나? 자네들 방은 미리 준비 해놓았네. 조금 시간은 걸렸지만... 사실 요 며칠 집이 좀 어수선 했어. 유학 갔던 아들 놈이 돌아왔거든."
"아- 이름이 앤써니라고 했나?"
"편하게 토니라고 부르면 되네. 시간 맞춰서 내려오라고 했는데 도통 말을 들어야지.. 이쪽으로 오게."
하워들은 그들을 끌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 안은 겉에서 보는 것 만큼 화려하면서도 90년대 부유층다운 모던한 깔끔함이 있었다. 커다란 홀 옆으로 주방과 식당, 하워드의 서재, 그리고 스타크 부부의 침실이 있었다. 룸의 위치와 용도를 설명해 준 그는 집 고용인인 자비스를 포함한 하녀 르네와 낸시를 소개해 주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부탁하게, 라고 이야기 했지만 한 번도 고용인을 부려본 적 없는 그들이 무언가를 부탁할 일은 아마 희박할 것이었다. 스티브와 버키가 쓸 방은 2층에 있었다. 홀 중앙 계단을 올라가자 복도를 두고 몇 개의 방이 늘어져 있었다. 스티브와 버키는 바로 옆 방을 안내 받았고 그 옆으로는 아들인 토니의 공구실, 그리고 제일 끝 쪽에 토니의 방이 있었다. 유학갔다가 돌아왔다던 탕아의 방은 굳게 닫혀있었고, 하워드는 스티브와 버키에게 미리 그를 소개시키기 위해 가감없이 방 문을 열었다.
아마도 90년대 깨어나면서 둘이 보았던 풍경 중 그 방만큼 오묘한 풍경도 없을 것이었다. 저택의 모습과 맞게 심플한 인테리어와는 달리 정리되지 않은 캐리어와 바닥에 널려 있는 옷가지들은 문제될 것도 아니었다. 바닥이며 탁자며 올라와 있는 공구들과 기계들도 하워드의 아들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었다. 문제는 열어 놓은 방의 모든 창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흐트러지는 흰색 커튼들과 그 커튼과 같이 춤추고 있는 수 많은 비눗방울들 때문이었다. 둥실둥실 떠오르는 비눗방울은 공기 중을 배회하다가 터지고 바닥이나 벽에 붙기도 했다. 그 오묘한 모습을 보며 버키는 재미 있다는 듯 실소를 했고, 스티브는 떠다니는 방울 몇 개를 손가락으로 터뜨렸다. 다만 원인 재공자를 아는 하워드만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졌다. 그는 대뜸 크게 소리를 질렀다.
"자비스!!! 와서 이것 좀 치우게!!!!"
주인의 고함 소리에 1층에 있던 자비스가 달려왔다. 그는 방 안을 보더니 마치 이 사태를 예상했던 사람인냥 차분하게 욕실에서 커다란 수건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사방에 열려있는 창문들을 닫기 시작했다. 그제야 공중에 떠다니던 커튼들이 가라 앉았고 이제 남은 것은 테라스로 나가는 가장 큰 창 하나 뿐이었다. 시야를 가리던 것들이 사라지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창 앞에 흰 욕조였다. 대리석으로 된 하얀색 작은 욕조로부터 비눗방울이 솟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욕조에 있는 한 남자가 만들어 냈다는 것이 정확했다. 아니, 그것은 남자라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욕조 끝에 올린 다리를 달랑거리며 후우- 하고 비눗방울을 불고 있는 동글동글한 인상은 남자라기보단 소년에 가까운 듯 보였다. 천진하고 개구져 보였다. 그는 자신의 시간을 방해한 이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제 아버지의 대노한 얼굴을 보자 싱긋 웃었다.
"어쩐 일이에요? 내 방은 한 번을 안오시더니."
"토니, 이게 무슨 짓이야?!"
"보시다시피 목욕하고 있잖아요. 오늘 제 스케줄엔 그렇게 써있는데, 자비스가 말 안 해줬어요?"
"도련님."
"알았어, 미안. 맞아요, 자비스 혼내지 마요. 사실 얘기 안했으니까. 말해도 별 관심도 없잖아요, 어차피."
"오늘 손님 오신다고 하시지 않았냐.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야?"
"손님이 아니라 객식구겠죠. 어차피 여름 내내 마주칠텐데 뭐. 근데 그거 아세요? 내가 지난주에 겨우 몇 년만에 집에 왔을 땐 아버지 어디 계셨더라? 아니지 대학교 때도 그랬었고, 기숙학교 때도..."
"토니!!!!"
"아이구 무서워라."
과장되게 몸을 떨며 토니가 미끄러지듯 욕조 아래로 꼬르르 잠겼다. 한 마디를 지지 않는 아들을 보며 하워드는 머리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짚었다. 반면 버키는 한 창의 하워드보다 더 한 비꼬는 신랄한 말투에 터지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고개를 돌렸고, 스티브는 그런 그의 옆구리를 살짝 찌르며 면박을 주었다.
푸하- 하고 크게 손을 내쉬며 토니가 욕조에서 나왔고 자비스는 기다렸다는 듯 커다란 수건을 펼쳐 그의 몸을 감쌌다. 아마도 더이상 주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몸을 가리려는 요량이었을 테지만 이런 그의 노력은 헛수고로 돌아갔다. 토니는 대충 몸을 닦은 수건을 바닥으로 던져버리고 카페트가 젖거나 말거나 알몸인 채 욕조 밖으로 나왔다. 갓 성인이 된 앳된 몸은 동글동글하고 말랑말랑해 보였다. 아직 채 자라지 않은 몸이었고 근육이라고는 볼 수 없는 작은 체구였음에도 스티브는 이상하게 시선이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아직 채 닦이지 않은 물방울들이 굴곡진 몸을 따라 흐르고 있었고 그것이 토실한 엉덩이에 닿았을 때쯤 퍼득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바로 옆에 저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친우를 보며 남자와 소년 중간에 있는 아이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매력에 대해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토니는 바닥에 늘어진 옷가지들을 주섬주섬 집어 껴입기 시작했다. 하지만 뒤따라 붙는 시선이 신경 쓰이기는 했는지 결국 옷을 다 입고 나서야 어후- 하고 한 숨을 쉰 뒤 고개를 돌렸다.
"지금이라도 인사 하면 되잖아요. 그럼 되는 거죠?"
"사춘기 어린 애처럼 굴지 말고, 좀 진지하게 굴어라."
"알았어요. 안녕하세요, 아저씨들. 전 앤서니 에드워드 스타크, 그냥 토니라고 부르면 되요. 그쪽에 계신 하워드 스타크의 하나 뿐인 아들이죠. 요즘 치매가 오셨는지 잘 기억을 못하시는 것 같지만.."
"토니!!"
"아, 반가워. 난 제임스 뷰케넌 반즈. 그냥 버키라고 부르면 돼. 이 쪽은 스티브 로저스."
"반갑다, 토니."
악수를 하기 위해 내밀어진 손은 토니의 손에 닿지 않았다. 이름을 들은 토니가 손을 빼고 정색을 하며 스티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 스티이이브으으? 스티브 로저스? 그 스티브 로저스? 캡틴 아메리카??"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저를 노려보는 탓에 스티브는 당황하여 차마 그렇다고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무리 봐도 그것은 전쟁 영웅을 대하는 존경이나 어린아이들의 선망이 아닌 말 그대로의 적대감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답은 충분했는지 토니는 크게 헛웃음을 쳤다. 하! 하고 기가 막히다는 듯 크게 웃으며 제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어쩐지 유난을 떨더라니. 그렇게 투덜거린 그는 뭐라 한 마디 하려는 아버지를 쌩 하니 외면하고 웃으며 스티브의 어깨를 두어번 두드렸다.
"축하해요, 당신 방금 날 완벽히 투명인간으로 만들었거든."
뭐? 라고 되묻는 말은 토니가 잽싸게 방을 빠져나가면서 묵살되었다. 토니!!! 하고 하워드가 뒤늦게 아이를 불렀지만 혀를 쏙 한 번 내민 그는 그대로 1층으로 내려가 버렸다.
"아가, 어디가니?"
"전 오늘부터 없는 사람이니까 신경쓰지 마세요. 그리고 제 스케줄은 자비스한테 물어보세요."
"토니..!!! 제기랄, 자비스!!"
"도련님이 저한테 스케줄 언급하신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이런 토니, 이 망할 자식이...!!!"
조용했던 집안이 금새 엉망으로 변해버렸다. 마리아의 물음에도 톡하니 쏘아 붙인 토니는 제 아버지가 욕을 하든 말든 상관 하지 않고 대기되어있던 차에 올라탔다. 아이의 명령에 따라 차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달리던 차안에서 그는 문득 자신의 방 테라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과감하게 손을 쭉 펴서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테라스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지켜보던 스티브는 그 모욕적인 행동에 어안이 벙벙한 듯 입을 다물지 못했고, 버키는 기어이 참지 못하고 박장 대소를 터뜨렸다. 그리고 스티브의 등을 두어번 두드리며 어깨를 으쓱 했다. 한참이나 어린 아이에게 욕을 들었는데도 그는 제법 이 상황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는 뽀얀 비누 거품이 올라온 아이의 빈 욕조를 돌아보며 모처럼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뭐, 적어도 지루하진 않겠네."
스티브는 버키의 태도가 제법 어이가 없는지 허- 하니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저 멀리 꽁무니를 빼고 있는 자동차를 보았다. 그는 눈썹을 까딱하며 애써 관심 없는 척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지루하진 않을 것 같았다. 그게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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