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 And Beautiful 06

( Steve Rogers, Bucky Barnes X Tony Stark )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뻗어 있는 비포장 도로를 차는 달렸다. 뚜껑이 열린 자리에 새파란 여름 하늘이 이를 대신 했고 따가운 볕이 내리 쬐는 것을 가려 주는 청량한 녹음이 시원한 바람을 타고 흔들거렸다. 그 바람 결을 따라 풀벌레 우는 소리와 새들의 지저귐, 그리고 곡조를 알 수 없는 콧노래 소리가 섞였다. 조금은 무료한 표정을 한 스티브가 턱을 괸 채 차 밖 풍경을 보다가 흘끗 곁눈질로 백미러를 보았다. 


거울에 비추는 뒷좌석에 쭉 뻗은 종아리 하나가 보였다. 반대쪽 다리 무릎 위에 올려진 종아리 끝 얇은 발목, 그 아래 작은 발이 일정한 박자로 까닥거리고 있었다. 그것에 시선을 빼앗기는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버키의 허벅지를 베고 나른하게 누운 토니는 입 안에 막대 사탕을 혀로 깔짝거리며 연신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런 토니의 얼굴 위에 작은 그늘이 있다. 편안하게 등을 기대고앉은 버키는 무심하게 한 손으로는 책을 들고 읽으면서도 빛이 토니의 눈을 괴롭히지 않도록 손바닥으로 그 위를 가려 주었다. 마치 볕 좋은 날 일광욕을 하는 고양이 두 마리가 엉겨 있는 것 같았다. 스티브는 자신이 했던 다짐을 되세기면서 뒷좌석에 타지 않았음에 안도하는 반면 묘하게 자꾸 시선이 돌아가는 것까지는 결국 참지 못했다.


롱아일랜드의 아름다운 정원 풍경을 지나 저 멀리 높은 빌딩들이 보인다. 가로수가 사라지고 이제는 너른 평지를 달리는 자동차 위 뜨거운 여름 볕을 가려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눈이 부셔 스티브는 인상을 찡그렸고 저도 모르게 빛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하얗게 점멸 되던 시야가 다시 돌아오고 그는 습관처럼 백미러 너머를 보았다. 빛이 비추거나 말거나 여전히 무심하게 책을 읽고 있는 친구와 그 친구의 그늘에서 평안하게 놀고 있는 토니의 모습이 보였다.


스티브는 그 순간이 우연인지 아니면 그가 의도한 일이었는지 분간할수가 없었다. 토니가 고개를 돌렸다. 손바닥만한 거울을 두고 눈이 마주쳤다. 당황하여 시선을 돌리지도 못한 스티브를 향해 조금 놀란 듯 눈썹을 으쓱한 토니가 이내 사르르 눈을 접으며 웃었다. 유연하게 휘는 눈가와 말리는 입꼬리, 그 사이로 보이는 하얀 치아와 빨간 사탕, 그리고 그 사탕만큼 새빨간 혀가 아이처럼 천진하고 어여쁘면서 색정적인 웃음을 만들어냈다. 햇살 같다. 누군가 말했던 해를 닮은 웃음은 저런 것 같았다. 그늘에서도 빛날 수 있고 온 세상과 마음의 어둠을 쫓아 낼 것만 같은...


어물쩍거리며 스티브는 시선을 뗐다. 그리고 따가운 빛을 가리기 위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렷다.하지만 그를 유린하듯 빛은 손가락 사이사이로 스미어 떨어졌고 이내 온통 그를 물들여 놓았다. 그건 불가항력이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태양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저항하기엔 스티브는 너무나도 작았다.




***




아침으로 돌아가서 이 외출의 원인은 모두 하워드로부터 시작되었다. 토니가 생각하기에 제 아버지의 가장 큰 단점이 있다면 남의 사정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결정을 내려 통보한다는 것이다.



"참, 자네들 옷 좀 사야겠어."



모처럼만에 모두가 모인 아침이었다. 아침잠에 취한 토니도 자비스의 손에 끌려와 식탁에 앉았다. 이 연극은 언제까지 해야하는 거야? 라고 작게 투덜 댔지만, 마리아가 달래듯이 입에 넣어 주는 샐러드에 다시 얌전해졌다. 눈가에 머무는 잠의 요정은 좀처럼 떠나질 않고 입에 씹히는 것이 양상추인지 베이컨인지 모를 정도로 몸이 노곤노곤해서 얼른 이 시간이 끝나고 방에 들어가서 좀 더 자야겠다 하고 있는데 하워드가 뜬금없이 그렇게 말했다. 토니는 아침부터 무슨 개똥 같은 소리를 하냐는 듯 의아한 눈으로 제 아버지를 바라보았고, 그것은 스티브와 버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하워드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병원 신세를 진 것 까지 합치면 스티브와 버키가 깨어난지 한 달이 넘었고, 이미 캡틴 아메리카와 그의 동료 버키 반즈가 부활했다는 것이 공론화된 이 시점에서 대외적으로 얼굴 정도는 내비추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였다. 때마침 군 관련 인사들이 모이는 사교 파티가 맨하튼 모 호텔에서 열릴 예정이었고 거기에 하워드 역시 초청 받았으니 같이 동행을 하면 여러 모로 좋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확실히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없었다. 언제가 될 지 모르는 이 재활훈련이 끝나고 나면 둘은 다시 군에 배치될 것이었다. 하워드가 소속된 쉴드의 일원이 되는 것 역시 포함되어 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어쨌든 걸프전이 끝난 지금 이 조용한 시기를 틈타 군 내 주요 인사들과 안면을 터 놓는 것이 도움이 되는 것은 맞는 말이었다. 문제는 그 사교 파티가 당장 이틀 뒤에 있다는 것이었고 둘에게는 당연하겠지만 연미복 따위 없었다는 것이었다.


하워드의 장황한 설명을 듣던 토니는 심드렁한 얼굴로 접시에 다시 시선을 돌렸다. 저 영양가 없는 이야기는 어차피 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얘기었다. 하워드가 참석하는 파티니 저도 가게 되겠지만 지루하기 짝이 없을게 뻔한 그 자리에는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연미복이라면 집에 썩어날 정도로 많았으니 외출로부터 그는 자유로울 수 있었다. 아무도 없는 틈을 타 부족한 잠을 늘어지게 자고 아직 완성하지 못한 회로판이나 좀 더 들여다봐야겠다, 하고 토니는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이틀만에 맞춤 정장이 나와요?"

"급한대로 왓슨씨에게 미리 언질 해놨으니 치수 맞춰서 피팅만 하면 될거야."

"그거 돈 많은 사람 횡포인 건 알고 계시죠?"



마리아가 걱정스럽게 하는 말에 하워드가 답했고, 토니는 습관적으로 빈정거렸다. 하워드가 고개를 돌려 토니를 보았다. 그리고 불연듯 생각 났다는 듯 입을 열었고 그 입에서 나온 말은 토니를 화나게 하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그리고 토니, 너도 같이 가도록 해라."

"그리고 그거야 말로 아버지의 횡포네요. 내가 왜?!"



아침잠을 방해 받은 것도 신경질이 나는데 제멋대로 명령을 하는 하워드의 말에 토니가 급격한 짜증을 참지 못하고 포크를 식탁 위에 던져버렸다. 토니!! 마리아가 다그치듯 말했지만 잔득 찡그려진 얼굴은 풀어질 줄을 몰랐다. 순순히 따라줄거라고 하워드 역시 생각하지 않았는지 미간을 찌푸린 채 제 아들을 보았다. 



"버릇 없게 이게 뭐하는 짓이야? 그리고 둘은 아직 적응 단계니까 어린 네가 도와줘야지."

"자비스 보내요. 나 오늘 바쁘니까. 그리고 그렇게 말하기 전에 내 시간이 어떤지는 먼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거야말로 예의 아닌가?"

"자비스는 오늘 나랑 일이 있으니까 그렇지. 그리고 네가 바쁘면 얼마나 바쁘다고? 네 하찮은 놀음질에 비하면 그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 자린지 너도 알잖아! 사교계에 첫 진입이 순조로워야 추후 일도 순탄하게 흘러간다는 거!!"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내 사교계 데뷔날은 콧빼기도 안보였어요??!!"



기어이 발악을 낸다. 화가 잔득 난 토니의 얼굴은 빨갛게 달았고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식당 안은 정적이 흘렀다. 하워드는 그를 외면하며 한숨을 쉬었고, 마리아는 아들의 손을 잡으며 어떻게든 진정 시켜 보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토니는 쏟아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애써 꾹꾹 참으려 이를 앙 물었다.



"난 오늘 찰스네 갈거에요. 그 일은 아버지 멋대로 정한 거니까 아버지가 알아서 하세요."



목을 가다듬고 말해 봐도 목소리에 묻어 나오는 울음기를 감출 수는 없었다. 토니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뒤에서 마리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쾅- 소리가 나게 방 문을 닫고 들어와 그는 그대로 제 침대 위에 쓰러졌다. 결국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고 울음 소리를 참기 위해 잇새로 끅끅거렸다. 침상이 금새 눈물로 젖어들었다. 문득 자기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 포기했다고 생각한 것에 대한 욕심, 그 욕심 때문에 악을 쓰며 여기에 머물러 있는 자신도 우스웠다. 다 집어 치우고 다시 돌아가야겠다 생각하고 있는데 뒤에서 끼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의 정체를 토니는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이순간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토니는 베개를 잡아 문 쪽으로 던졌다.



"나가, 나 당신이랑 농담 할 기분 아냐."

"좀만 참지 그랬어. 지금 밑에 얼마나 재밌는 일이 벌어지는 줄 알아?"

"나가라고!!"

"스티브가 너희 아빠 혼내고 있어."



그제야 토니는 침상에 쳐박은 얼굴을 빼꼼히 돌려 버키를 돌아보았다. 빨갛게 충혈된 눈과 짓무른 눈가, 삐죽거리는 입술이 꽤 귀여워 버키는 웃었다. 그리고 침대로 다가가 가상자리에 앉아 그의 뒷 머리를 쓰다듬었다.



"진짜..?"

"어. 캡틴이 이야기 하는데 꼼짝도 못하지. 그런식으로 아들을 대하면 안된다고 엄청 뭐라고 하더라. 누가 보면 스티브가 네 아빠인 줄 알거야."

"...당신은 왜 여깄어."

"나야 너 걱정되서 왔지."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목덜미를 쓸었다. 동그란 어깨를 잡고 돌리자 토니가 못이긴 척 몸을 돌렸다. 눈물로 축축히 젖은 얼굴을 보자 안쓰러움이 밀려왔다. 버키는 고개를 허리를 숙여 토니의 눈가 위에 키스를 했다. 그리고 혀를 내어 빨갛게 부은 여린 살을 핥았다. 하지 마, 라고 토니가 칭얼거렸지만 애써 그를 밀어내지도 않았다. 귓가로 킬킬거리는 버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너 진짜 찰스네 갈거야?"

"어. 집에 있기도 싫고... 걔 당신 때문에 못 본지 꽤 됐어. 자꾸 이러다 삐지면 어떡해."

"거기 가면 내가 삐질건데?"

"당신 삐지는 건 별로 안 무서워."

"허- 요게 진짜."



기어이 맹랑한 소리를 하자 버키가 손으로 토니의 코를 잡았다. 아팡! 하고 콧 소리를 내는게 귀여워서 버키는 또 낄낄거렸다. 버키의 강한 두 팔이 토니를 한대 끌어 안았다. 그리고 침대 위에서 뒹굴었다. 졸지에 버키 위에 눕게 된 토니가 뭐하는 짓이냐며 툴툴 거렸지만 놔줄 생각이 없는 듯 꼭 끌어 안고 목이며 귓가며 쪽쪽 거리는 키스를 퍼부었다. 결국 간지러움에 울상이던 얼굴에 웃음이 번지고 나서야 버키가 입술세례를 멈추었다. 그리고 목덜미에 코를 묻고 크게 숨을 쉬었다. 콧김이 간지러운지 토니가 진저리를 쳤다.



"가지 마. 부탁할게. 나랑 같이 가자."

"뭐래. 미쳤나봐. 그렇게 성질 내놓고서 같이 나간다고 하면 내가 뭐가 돼? 그리고 아저씨, 그 쪽이랑 나랑 아무 사이도 아니거든요? 누누히 말하지만 불편하면 나가라니까."

"솔직히, 생각해 봐. 우리가 있는게 그렇게 나쁘지는 않잖아? 나는 이렇게 너랑 놀아주고 스티브는 니네 아빠 혼내주고. 얼마나 좋아."

"그거랑 이거랑은 별개야. 찰스는 내 친구라니까."

"난 니가 나랑 하는 거 걔랑도 하는 거 싫어."

"걔랑은 당신이랑 한 그 짓까진..!!"

"아님 너 내가 있는 거 싫어?"



와- 씨 이 치사한 인간 좀 봐라. 고개를 들어 보니 제 아래 있는 얼굴이 잔득 시무룩하다. 아까까지 저를 달래는 듯 하더니 이제는 자기가 원하는 말을 해주지 않으면 삐져서 얼굴도 안 볼 기세다. 버키의 말이 하나도 틀린 것 없다는 건 안다. 아무 사이가 아니라고 했지만 그 날 이후 그들이 제법 특별해졌다는 사실도 알고 있고, 그래서 버키가 더욱 찰스를 경계하는 것도 알고 있다. 그렇다고 오랜 친구인 찰스를 포기할 수도 없었으니, 여러모로 토니는 마음이 복잡했다. 버키가 하는 말은 너무나 달아서 조금만 긴장을 늦추면 찰스를 잊은채 홀라당 그에게 넘어갈 것 같았다. 그러면 왠지 버키와의 싸움을 떠나서, 그토록 싫어하던 아버지의 일부를 따라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영 꺼림직했다. 옹졸한 자존심과 고집, 그리고 버키의 유혹적인 말들이 토니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꼬인 실타래처럼 만들고 있었다. 말 못 하고 머뭇거리는 토니를 아는지 버키는 애써 대답을 종용하지 않았다. 이 어린 머리로 할 의미없는 계산들을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대신 브루클린 멋쟁이 시절의 매력적인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아저씨가 사탕 줄게. 같이 놀자."



결국 항복을 선언하는 것은 토니의 몫이었다. 단언컨데 이렇게 달달한 사탕발림에 넘어가지 않을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거였다.






***






뉴욕 맨하튼 한 복판에 위치하고 있는 고급 양복집을 운영하는 왓슨씨는 뛰어난 솜씨를 가진 장인으로 유명했다. 그는 제 앞에 있는 두 모델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하워드의 전갈을 받고 내심 고대를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 캡틴 아메리카와 버키 반즈라니. 어릴 적 캡틴 아메리카 트레이드 카드를 모으던 시절이 있던 그에게는 참으로 영광스러웠기에 하워드가 말했던 '이틀만에 맞춤양복'이라는 불가능한 미션을 수행하기로 마음 먹은 것도 다 그 탓이었다.


선망의 눈을 하고 치수를 재고 있는 왓슨씨의 시원한 뒷통수를 물끄러미 보던 토니는 남은 사탕을 아그작 씹다가 무료함에 하품을 쩌억 했다. 잘 빠진 몸은 볼만 했지만 내동 그것만 보기에는 지루했다. 그는 다 먹은 사탕 막대기를 아무렇게나 놓은 채 앉아있는 쇼파에 길게 누웠다. 아침부터 잠도 못자고 한바탕 했더니 졸음이 밀려 왔다. 어차피 치수를 재고 피팅하고 하다 보면 좀 오래 걸릴 것이다. 깜빡거리던 눈꺼풀이 스르르 내려 앉았고 토니는 금새 잠에 빠져 들었다.



"토니."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토니는 눈을 떴다. 얼마 안 잔 것 같은 느낌인데 꽤 깊게 잠을 잤는지 좀처럼 피곤함이 가시질 않았다. 일어나야지, 하는 목소리가 귀에 웅웅 울렸다. 어깨를 잡아 흔드는 커다란 손이 따뜻해서 잠시 물러났던 잠이 발걸음을 돌렸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지만 눅눅한 시야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고 흐릿한 형상만을 비출 뿐이었다. 보나마나 버키겠지, 라고 생각한 토니는 편하게 잠투정을 했다. 살짝 열렸던 눈이 다시 스르르 감겼다. 토니는 제 어깨에 얹혀진 커다란 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제 가슴 쪽에 꼬옥 안았다.



"아저씨, 나아 좀만 더어..."



그리고 다시 고른 숨을 쉬며 자는 토니를 보며 스티브는 어쩔 줄 모르고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먼저 피팅이 끝나서 버키가 들어간 사이에 아이를 깨워 나갈 준비를 하려고 했는데 그 계획은 토니의 잠꼬대에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아이가 안고 있는 팔을 차마 빼내지 못해서 결국 스티브는 쇼파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곤히 자고 있는 그의 얼굴을 관찰했다. 유리알 같은 눈동자를 숨기고 있는 눈꺼풀 아래 길게 말린 속눈썹은 풍성했고 인상을 더 아이처럼 보이게 하는 끝이 동그란 콧망울이 뻗어 있었다. 연한 분홍색 입술과 꽃이 핀 듯 발그스름한 볼은 마쉬멜로우처럼 만지면 말랑말랑 할 것 같았다.


개구진 웃음을 만들어 내는 얼굴을 떠올리다가 스티브는 못내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아이는 사랑스럽다는 걸, 누구라도 사랑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 역시 이 아이가 어여뻐서 어쩔 줄 몰라 한다는 것을. 그 사실이 너무나도 위협적이라 입가에 짓는 웃음 하나로 자신이 했던 모든 다짐들을 와르르 무너뜨려 버렸다. 스티브는 잡힌 손 아래 말랑한 손바닥을 문질렀다. 상상했던 것만큼 말랑말랑한 촉감이 손가락을 타고 온 몸을 전율케 했다. 으응- 자신이 장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끙끙거리다가 다시 스르르 인상을 푼다. 아기같이 구는 모습에 큭- 하고 터지는 웃음을 참고 나서야 스티브는 자신이 내동 웃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해?"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피팅룸에서 나오는 버키가 보였다. 그는 미묘한 얼굴로 스티브와 자고 있는 토니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스티브는 실실 거리던 웃음을 애써 지웠다.



"깨웠는데 너무 곤히 자길래."

"그렇다고 계속 여기 있을 거야?"



별 시답지 않은 걸로 그런다는 냥 버키가 킬킬거렸다. 뒤따라 나오는 왓슨씨가 이틀 뒤 오전에 오라고 언질을 해주었고 고개를 끄덕인 버키가 스티브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누워있는 토니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토니, 잠깐만 일어나 봐. 토니의 눈꺼풀이 스르르 열렸고 몽롱한 눈이 버키를 올려다보았다. 자연스럽게 가슴에 품었던 스티브의 손이 빠져나왔다. 졸려어- 하고 끝을 늘이며 칭얼거리는 토니에게 고개를 숙인 버키가 이리와, 라고 말하자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그의 목을 꼭 껴안았다. 읏쌰- 하고 일어나며 버키는 토니의 두 허벅지를 잡아 들어올렸다. 자연히 토니의 두 다리가 버키의 몸이 감겼다. 고목나무 매미처럼 매달린 아이의 엉덩이를 버키가 받쳐 안았다.



"꼬맹아, 너 좀 많이 먹어야 겠다. 너무 가벼워."

"...시끄러어... 돼지야..."



잠결에도 따박따박 말대답을 하는 토니를 보며 버키가 크게 웃었다. 그리고 스티브를 향해 나가자는 듯 고갯짓을 했다. 버키가 하는 냥을 옆에서 지켜보던 스티브는 토니에게 잡혔던 손바닥을 한 번 내려다 보고 다시 토니를 안고 있는 버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속이 답답해졌다. 숨통에 뭐가 꽉 막혀서 내려가지 않는 것 같은 느낌에 스티브는 주먹으로 제 가슴을 두어번 쳤지만 그 느낌은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거북했다. 무엇이? 라고 묻는 다면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그냥 자꾸 눈이 간다. 아이의 두 손이 끌어 안은 저 어깨가, 아이의 몸을 끌어 안은 저 두 팔이, 아이의 두 다리가 감겨있는 허리와 붙어있는 두 몸뚱이에 자꾸 시선이 갈 뿐이었다.


그것이 질투라는 것을 스티브는 인정할 수 없었다. 브루클린 애송이 시절, 군에 입대하는 버키를 보면서도 가져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가장 사랑하는 친구이고 가장 아끼는 이였으며 전우애로 뭉친 동료에게 그런식의 감정을 갖는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저 아이가 사랑스러울 뿐이다. 그것은 너무나도 절대적이라 버키가 저리도 어리광을 받아주는 것은 당연했다. 적어도 버키는 하워드가 가진 집착의 피해자가 아니었으니 그를 더 편해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니 이것은 부러움도 질투도 아니어야 했다. 스티브는 이성적으로 자기 자신을 설득했지만 돌아오는 길 백미러 너머 뒷좌석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얇고 작은 등을 끌어안고 버키는 자장가 같은 느린 노래를 흥얼거렸다. 여름의 햇볕이 내리는 그 모습이 지극히 평화롭고 사랑스러워서 감히 누구라도 끼어들 수 없을 것 같았다.


돌아오는 길 서점에 들려 책을 샀다. 토니가 읽고 있었던 '롤/리타'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물에 흠뻑젖어 망쳐버린 것을 대신해 토니에게 돌려줄 생각으로 샀던 그 책을 스티브는 돌아오는 길 내내 읽었다. 어린 아이에 대한 성적 갈망을 드러내는 중년 남성의 감정이 역겨우면서도 매혹적이었다. 감각적이고 동시에 자극적인 그 소설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그때부터였을까, 내 인생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그 아득한 여름의 빛 속이었을까.'



스티브는 하늘을 보았다. 본격적인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듯 피부에 닿는 볕이 너무 뜨거웠다. 그리고 눈이 부셨다. 눈이 멀 것 같았다. 아니 기어이 눈을 멀게 했다. 여름 태양을 닮은 아이의 웃음이 그를 애정 어린 마음으로 온통 물들여 놓았다. 금이 가고 있었다. 스티브의 완고한 마음에 균열이 일고 있었다. 이내 그가 가진 단단한 모든 것들을 녹여내 흐물흐물 풀어지게 만들었다. 이미 아이는 그 순진한 얼굴로 그가 한 때 사랑했던 여자, 여전히 믿음직한 친구, 오로지 자신을 숭배하는 동료, 스티브 안에 규정 되어있는 모든 관계와 그 감정들을 엉망으로 휘저어 놓았다. 


스티브는 두려웠다. 불복종을 허하지 않는 아이의 사랑스러움이 자신을 온통 망쳐놓을 것 같아서, 아무것도 모른 채 자고 있는 아이를 향해 자꾸만 생기는 제 도덕적이지 못한 음험함이 롤리타를 향한 험버트의 갈망을 닮은 듯 해서 그는 결국 책의 결말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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