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메이징 스파이더맨 피터x해리
약스토니 오스본가설정 有
여기에 내가 있다. 버려진 쓰레기처럼 검푸른 수면 위에 표류하는 비루한 몸뚱이가 있다. 정지 버튼이 눌린 채 꺼져버린 내 생명처럼 소란스러웠던 삶이 고요한 침묵으로 잦아들고 있었다. 눈부시리만큼 푸른 하늘은 찬란하기만 했고 내리는 햇볕은 마냥 따사롭기만 했다. 늘상 우중충하던 회색빛 겨울 하늘이 내 속도 모른 채 모처럼 화창하게 피었다.
경이롭도록 찬란하다.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고, 그래서 나는 슬펐다. 이만큼 아름다웠던 여름 날, 어느 꽃보다 아름답게 피었던 너를 보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나날들이 저 태양처럼 너무 눈부셔서, 저 하늘처럼 말갛게 웃던 네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래서 이렇게 비참한 결말을 맞고 보니 그 날들이 너무 그립고 붉게 물들었던 네가 가슴이 사무쳐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우리는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설령 운명이 장난질을 한다 해도 너와 내가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면 처음부터 아예 마주치질 말았어야 한다. 그랬다면 네가 햄릿에게 미쳐 죽어버린 오필리아와 같은 꼴이 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내 독을 마시고 지는 나의 아네모네, 진창에서도 마지막까지 아름다웠던 나의 춘희, 내 영원한 연인, 내 사랑아. 너만이 나의 죄다. 잉태된 그 순간부터 배신감과 증오를 먹고 자라 연민 사이에서 태어난 나는 태생부터가 글러먹은 놈이라 널 사랑해서는 안됐다. 사랑에 목메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내 아버지를 통해서 배웠고, 그것이 저주가 되어 내 목을 조를 걸 알면서도 네게 눈이 멀어 널 사랑하고야 만 것이, 그것이 나의 죄다. 내 인생에서 내가 마지막까지 지고 가야할 단 하나의 죄책감.
결국 이건 내가 만든 비극이다.
나, 피터 스타크 인생이 곧 처절한 막장극인 것이다.
재 1
나는 내 스스로에 대한 존재를 중요히 여기는 편이었다. 자신의 가치라는 것은 이를 높게 만듦으로써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을 만든다고 난 생각했다. 그 결정 요인은 엉뚱한 제 3자와 비교해서가 아닌,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평가로 인해 매겨지는 것이었다. 그 덕분일까, 나는 세상 무서운 줄 몰랐다. 오만이 아니라 순진한 당돌함이다. 그리고 내 높은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 요인은 내 아버지에게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기적'이라고 불렀다. 그도 그럴게 수정 단계서부터 남달리 애를 먹인 탓이었다. 한 개의 공난자와 두 개의 정자를 결합시켜 만든 경이로운 유전자 조작품, 세계에서 유일한 성공작, 그것이 바로 나였다. 고작 그 작은 수정란 하나를 만들기 위해들인 돈과 시간, 물질적 자원을 생각한다면 아버지에게 내가 얼마나 절박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여자도 아닌 남자의 몸으로 열 달을 품아 낳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그 이후의 과정이 순탄했냐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내가 그의 뱃속에서 자라나고 있을 때, 나의 또 다른 생물학적 아버지는 우리를 버린 채 떠나간 상태였다. 당시 아버지의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나를 품으며 몸이 망가진 건 말할 것도 없었고 가벼운 우울증에다 대외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로 인해 오만가지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유산하지 않은 게 기적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아버지는 독하게도 나를 품었다. 그리고 막달 즈음에는 커질 데로 커진 나 때문에 갈비뼈가 나갔는데도 진통제도 거부한 채 악착같이 버텨가며 기어이 나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냈다. 조금만 출산이 늦었다면 요단강을 건널지도 모른다는 의사 소견을 무시한 채 말이다. 이정도면 내가 아버지에게 기적인지 아니면 독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태어난 난 어둠을 모르고 자랐다. 나는 그 흔한 편부모 가정이 가질법한 결핍 하나 없이 컸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부와 명성 때문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내게 베푸는 무조건적인 헌신 때문이었다. 전 세계에 토니 스타크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아버지는 유명인이었다. 백만장자, 천재, 영웅이라는 타이틀은 항상 그의 이름 옆에 항상 꼬리표처럼 쫓아다니곤 했다. 유명한 만큼 원하는 곳도 많았지만 그는 이를 모두 뿌리친 채 내 곁에서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남아 주었다. 페퍼이모가 오죽하면 그가 지금껏 한 일중에 가장 잘 한 일이 나를 낳은 거라고 칭찬할 정도였으니, 영웅 일을 하면서 일은 뒷전이고 허구한 날 이리저리 다쳐오던 그가 나를 낳자마자 그 짓을 때려치우고 정착한 게 그 때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음은 분명했다.
물론 그 과정은 결코 매끄럽게 이뤄진 것 같진 않았다. 지금도 간혹 TV에서는 책임을 버린 아이언맨이라는 주제로 아버지에 대한 특집 기사를 올리기도 했고 간혹 퓨리라는 영웅 단체의 수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찾아와 아버지를 설득하려 하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세상은 당신이 필요해, 그렇게 말하는 남자 앞에서 아버지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똑같은 답을 했다. 당신들이 세상을 지키는 것처럼, 나도 이제는 나 스스로를 지키고 싶어. 그 말에 남자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늘 빈 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아버지는 그 고결한 핑계에 나를 갖다 붙이진 않았다. 변명 거리가 될 수 없었다는 게 정확할 거다. 대외적으로 아버지는 여전히 싱글이고 가정이 없었다. 나는 물 밑에 숨겨진 존재였다. 부끄러워서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나를 평범하게 키우길 원했다. 스타크라는 이름 때문에 남들의 시선이나 위험에 노출되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포기하게 되길 원하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파커라는 성으로 더 많이 불렸다. 페퍼 이모의 남편 성이 파커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의 육촌 쯤 되는 친척으로 소개되었고. 그렇게 아버지 주변 몇 사람을 제외하곤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없었다.
난 그걸 섭섭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되레 아버지가 먼저 속상한 기색을 보인 적은 있었다. 어느 자리에서도 날 자랑스럽게 아들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기에, 난 괜찮다고 하자 못내 미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 멋쩍은 듯 말했다. 넌 내 애 답지 않게 착하단 말이야. 사실 그건 착하다기보단 합리적인 이해였다. 아버지는 이유 없이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친절한 첨언과 사전 설명을 건너뛸 뿐 결과물을 보면 항상 거기엔 어떤 정당한 뜻이 숨겨져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더욱이 어릴 적 난 눈앞에서 아버지가 계란 세례를 맞는 걸 본 이후로 스타크라는 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짐을 얹어가는 것인지 알게 되었기에 그가 무엇으로부터 나를 지키려고 하는 건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그가 자신의 불편을 감수하고 내 편의를 우선으로 하는 것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 행동들이 아버지가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에게 받았던 무관심과 언론으로부터 받았던 학대를 의식해서 그런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는 더더욱 그랬다. 간혹 아버지가 날 숨기려 드는 것이 온전히 내 편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었지만 별로 개의치는 않았다. 그게 무엇이든 아버지가 나에게 감추는 것이라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설령 그게 남들로부터 힐난을 받을 만한 것이라고 해도 그가 내게 좋은 사람이고 유일한 가족이란 점은 변하지 않았다. 듬직한 아버지고 다정한 어머니였고 또 허물없는 형제였다. 내게 아버지, 토니 스타크는 그런 존재였다.
그러므로 내 존재 가치는 아버지에게 귀결되어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가장 빛나고 값 비싼 보석이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좋은 아들이고자 했다. 착하진 않을지언정 아버지에게만큼은 한 없이 좋기 만한 아들이고 싶었다.
◇◆◇
어릴 때부터 나는 유독 여름을 좋아했다. 청량한 녹음 아래에서 뜨거운 햇볕을 피해 즐기는 피크닉이나 탁 트인 해변에서 즐기는 물놀이와 일광욕, 에어컨을 틀어 놓고 거실 쇼파에 누워 배부른 낮잠을 자던 평온한 일상들이 수많은 추억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길어진 낮시간 동안 땅 위로 나온 매미들이 길게 울고 해질녘이면 아직 푸르스름한 하늘 위에 별과 달을 볼 수 있었다. 밤이면 자장가처럼 들려오는 풀벌레의 울음소리가 있는 계절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내가 이토록 여름을 찬양하는 이유엔 아버지의 영향이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추위라면 질색을 하는 아버지는 겨울이면 나를 데리고 적도 반대편 호주나 아르헨티나로 향하곤 했다. 그럼 나는 일 년에 두 번씩 이 게으른 여름을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보낸 수많은 여름들 중 그 해의 여름만큼 특별했던 적은 없었다. 나는 아직도 그 때의 매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내 생에 가장 찬란했던 열일곱의 여름을.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아버지와 나는 매년 그랬던 것처럼 복잡한 뉴욕 도심을 벗어나 뉴올리언즈의 별장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유독 그곳을 좋아했다. 사유지가 넓어 파파라치 같은 파리들이 붙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기도 했지만 내가 태어나기 전 무너진 말리부 저택을 본 따 만들어 더 애착이 간다고 했다. 절벽에 있던 그 집과는 달리 별장은 거대한 평원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지만 그 주변으로 아버지의 취향껏 꾸민 커다란 정원은 바닷가의 높은 절벽만큼 충분히 운치 있었다. 그곳은 아버지와 나의 쉼터이자 낙원이었다. 그곳에는 작은 호수도 있었고, 커다란 잔디밭도 있었고 작은 숲도 있었다. 물론 별장 지하에 최첨단으로 꾸며놓은 연구실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였다.
그곳에서 보내는 두 달간의 하루는 단조롭기 그지없었다. 거의 정오가 될 때까지 늘어져라 늦잠을 잤고 별장 관리인인 메이 아주머니가 만들어주는 브런치를 먹었다. 그리고 한가로운 오후 시간을 보낸다. 아버지는 대게 일 때문에 마무리 짓지 못했던 연구들을 그곳에서 끝내는 편이었고, 나는 그런 아버지를 돕거나 서재에 책을 읽기도 했다. 할아버지 때부터 모아 두었던 책들과 영상 자료들은 꽤 흥미로운 것들이 많았기에 읽다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그러다 지루해지면 정원의 커다란 호숫가에서 물놀이를 하거나 근처 해변으로 드라이브를 가기도 했다. 간혹 아버지의 변덕이 들끓을 때면 손님들을 초대해 바베큐 파티를 하기도 했다. 그래봐야 우리 부자 관계를 아는 사람 한도 내에서였기 때문에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페퍼이모나 로디삼촌, 해피삼촌, 그리고 드물게 얼굴을 비추는 배너 박사님과 비전이 다였다.
그래서 그 애는 내 예상 밖이었다. 한 여름에 내리는 눈인 듯 갑작스럽게 내게로 찾아왔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아침, 손님이 왔다며 부산을 떠는 메이 아주머니의 발소리에 평소보다 이른 잠을 깼다. 깊은 숙면을 방해받은 것이 못마땅했지만 원채 말이 많은 그녀가 이 넓은 부지에 고립되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외부인에 저리도 호들갑을 떠는 걸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좀처럼 떠나지 않는 잠기운에 기지개를 켜고 잠옷 아래 손을 넣어 배를 벅벅 긁으며 하품을 쩌억 했다. 어휴, 도련님 옷 좀 갖춰 입으세요, 하고 아주머니가 핀잔을 준다. 그런 그녀에게 씨익 웃음만 지어주고 방을 나서 1층 거실로 내려갔다. 좋은 아침이에요, 느린 인사를 하고 있는데 잘 잤어? 라고 돌아와야 할 아버지의 답 대신 가벼운 여름 공기와 어울리지 않는 느리고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피터구나?"
나보다 더 늦은 잠을 자는 아버지가 웬일로 옷을 갖춰 입고 있다 했더니 건너편에 보이는 뒤통수가 낯설다. 내 기척을 듣고 돌아보는 얼굴은 더 그랬다. 당황스러움에 눈을 꿈쩍이며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닫은 채 굳어있자 아버진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웃음보를 터뜨렸다. 피터, 괜찮아, 이리와. 그렇게 부르고 나서야 계단을 마저 내려와 그의 곁으로 향했다. 자꾸 따라 붙는 시선이 느껴져서 괜히 손을 바지에 닦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옷은 둘째 치고 얼굴이라도 씻고 내려올 걸 그랬다, 하는 부질없는 후회를 하면서.
마주 보고 앉자 자연스럽게 눈이 간다. 캐주얼하지만 고가임이 분명한 단정한 차림과 서글서글한 웃음을 짓고 있지만 어딘지 날카로운 얼굴을 훔쳐보다가 눈이 마주친다. 이 여름과 어울리지 않는 찬 겨울 같은 파란 눈이었다. 마주치는 눈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보고 있자 옆에 앉은 아버지가 으하하- 웃어버린다.
"피터, 그러다 애 뚫어지겠다. 해리, 내 아들 피터. 알지?"
"네, 보고서로만 봤지만... 그 세포가 이렇게 잘 컸을 줄은 몰랐네요."
"아무렴. 날 닮았거든. 피터, 얜... 너 오스코프사 알지? 거기에 아주 명성 높은 자제 분이지."
"아저씨가 그렇게 말하면 비행기를 태우는 건지, 비꼬는 건지 모르겠네요. 안녕, 난 해리 오스본. 반갑다."
뻣뻣한 나무동이 같은 나에게 해리는 제법 친근하게 손을 내민다. 병든 나뭇가지처럼 하얗고 가는 그 애의 손가락을 보다가 그 손을 겹쳐 잡는다. 차갑다. 이 여름에 어울리지 않는 시린 기운에 귀 뒤가 쭈뼛 선다. 안녕, 하고 마주 인사를 했다. 그 애는 웃었다. 눈꽃으로 만들어져 열기를 주면 금세 부스러질 것 같은 웃음이었다.
아버지는 동갑내기 친구들끼리 놀라며 자리를 피해주었다. 네 방 어디야? 내가 내려 왔던 계단을 제 멋대로 오르며 그 애가 그리 물었을 때 나는 아직 치우지 않은 이부자리가 떠올라 헐레벌떡 뛰어 올라갔다. 구겨진 침대를 정리하고 바닥에 아무렇게 떨어진 옷가지를 정리하는 동안 느린 걸음으로 뒤따라온 그 애는 그 새파란 눈으로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기껏 정리해 놓은 침대 위에 두 다리를 쭉 뻗고 거의 눕다시피 앉았다. 그리고 손 안 탄 고양이처럼 탁자 위 물건을 손가락 끝으로 툭툭 건들이더니 정리를 마치고 머쓱하게 방 한 가운데 서있는 나를 본다. 웃음을 지운 그 애의 얼굴은 영 딴판이다. 초겨울 서릿발처럼 차다.
"그래서, 너는 날 어떻게 아는 거야?"
"나 네 아버지 꽤 좋아하거든."
허-, 하고 헛웃음을 치고 만다. 아까 아버지 앞에서와 태도가 영 딴판이었다. 유독 늘어지는 발음과 단어를 뱉는 입매의 모양이 상냥함을 벗어 던진 채 도도한 오만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게 마득찮다기보단 어쩐지 귀엽게 느껴졌다. 낯선 사람 앞에서 털을 세우는 아기 고양이 같기도 하고.
"아버지 애인이 내 또래인 건 좀..."
"그런 말이 아냐, 이 멍청아."
습관처럼 농지거리를 하자 그제야 어이가 없다는 듯 웃는다. 아까 같진 않지만 훨씬 자연스러운 웃음이었다. 휘는 눈꼬리가 곱다. 거기에 홀려서 어느 순간부터는 나 역시 그 애를 향해 마주 웃고 있었다.
"처음 사교계 데뷔할 때 파티 장에서 만났어. 가뜩이나 예민해서 형이 개복치라고 놀리는 판에 그런 사람 많은 자리를 내가 좋아할 리가 없잖아, 뭐, 지금도 그렇지만. 오스본이라는 이름 때문인지 몰리는 사람은 많고 질문이랍시고 하는 말은 하나 같이 병신 같고 당장 엎어버리고 집에 갈까 고민하고 있는데 네 아버지가 나타났어."
"알만 하네."
"그리고 능청스럽게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면서 그러는 거야. 오스본 자제분의 데뷔탕트야 물론 커다란 흥밋거리겠지만 숨 쉴 공간도 안줘서야 이 비실한 청년이 곧 쓰러지게 생겼다고 하면서 그 자리에서 날 데리고 나가더라고. 무슨 참견인가 싶었는데 금방 익숙해질 거라고, 자기도 돌보는 애가 하나 있다 보니까 괜히 오지랖 좀 부렸다고 하시더라. 그게 넌 줄은 나중에 알았지만. 어쨌든 사람 하나 없어진 건 티도 안날 정도로 자기가 신나게 떠들어댈 테니 먼저 들어가라면서 차까지 태워 보내줬었어."
"아버지답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가 멋지게 데리고 나가서... 뭐 반했다거나... 물론 너 같은 사람이 흔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그냥, 신경 쓰여서. 어쨌든 우리 아버지니까?"
"말했잖아, 그런 거 아니라고. 그냥, 난 그런 챙김 받는데 익숙하질 않았거든. 형이 있긴 하지만 그런 자리에서 날 신경 쓸 정도 한가하진 않고, 동생은 아직 어리니까."
"어... 부모님은?"
"어머니는 어릴 때 돌아가셨어."
"아, 미안.."
"아냐. 아버지는 계셔. 살아 계시긴 한데. 그 노인네 자기 실속 챙기기 바쁘지 싸지른 애들이야 어찌되든 상관 안하는 인간이니까."
저음의 고운 목소리는 가늘지 않았지만 쉽게 무너질 것처럼 끝이 흐려졌다. 금새 침울해진 그 애를 보며 난 괜히 애꿎은 주먹만 꾹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왜 이렇게 가슴이 울렁거리는지 섣불리 입을 열었다간 괜한 헛소리가 나올까봐 그 흔한 위로도 내뱉을 수 없었다. 게다가 속 빈 인사치례 같은 말을 해봐야 그 애의 자존심만 긁어 놓을 터였다. 다행이도 난 아버지를 닮아 말주변이 없는 편은 아니었다. 적절한 위로를 해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우울하게 변해가는 얼굴에 미소를 짓게 만들 수는 있었다. 근데 너 머리 니가 직접 드라이 한 거야? 뻔뻔하게 생뚱맞은 말을 하자 내리깐 시선을 들어 올려 나를 보더니 입 꼬리를 크게 올리고 소리 내어 웃는다. 하하하- 하고.
"혓바닥 놀리는 거 보니 아저씨 아들이 맞긴 맞구나?"
웃음과 가벼운 이야기가 여름 더위가 머무는 방 안에 가득 찬다. 반짝반짝했다. 창에서 내리는 여름 햇볕이, 그 애의 얼굴이, 그 웃는 모습이 예뻤다. 한 겨울 회색빛 구름 낀 하늘에 숨어있던 해가 도도하게 고개를 내미는 것처럼 귀하고 그만큼 아름다운 미소였다.
◇◆◇
"딱한 애야."
아버지는 섣불리 남에 대한 평가를 하는 편은 아니었다. 대외적으로 만나는 사람이 많은 탓에 스치면 그만인 인연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친근하게 인사를 하다가도 뒤돌아서 누구냐고 물으면 무슨 회사 아무개 정도의 명함에나 올라올 짤막한 소개를 덧붙이는 정도가 다였다. 하지만 그만큼 한 번 누군가에 대해 말할 때만큼은 극명한 호불호를 보였다. 득과 실을 계산한다기 보단,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는지 적의를 보이는지를 따져보곤 했다. 그런 의미에서 해리 오스본은 아버지의 기준에서 호에 가까웠다. 흔히 부자 또는 유명인이라고 불리는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봤을 때 극히 드문 일이었다.
서재에서 아버지는 페퍼 이모가 준 산더미 같은 서류들을 처리하고 있었고 나는 쇼파에 퍼져 책을 읽었다. 사실 오전 나절 봤던 그 애 얼굴을 떠올리느라 같은 문장을 다섯 번이나 읽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게 과연 책을 읽는 거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그 순간 던지는 아버지의 말에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다 읽지도 않은 책장을 넘기며 넌지시 왜요? 라고 물었다. 아마도 아버지가 그 순간 날 봤다면 내 어설픈 연기를 눈치 챘을 테지만 다행히 서류에 코를 박고 연신 사인을 휘갈기느라 정신이 없는 듯 했다.
"그 애 아버지를 알거든. 노만 오스본. 얼굴에 욕심이 덕지덕지 붙어선... 상종할 만한 사람은 아냐."
"오스코프 현 회장 말하는 거죠? TV에서 봤을 땐 인상 좋아 보이던데..."
"TV이미지 너무 믿지 않는 게 좋다는 건 나 통해서 많이 배우지 않았니?"
"아, 예, 뭐, 충분히요."
수긍하듯 고개를 주억거리자 그제야 고개를 들어 날 본 아버지가 기가 막힌다는 듯 웃는다. 뭐야? 그 떨떠름한 반응은? 라고 하는 말에 어깨를 으쓱 하며 대충 대답을 넘겼다. 차마 다른 건 몰라도 소싯적 플레이보이에 파티광 이미지는 '만들어진 이미지' 같아 보이진 않는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그 양반 애가 셋인데 낳은 여자가 다 달라. 그 애가 둘째야. 위로 형이랑 아래로 동생이 있어."
"아아- 얼핏 들었어요. 형제 있다고... 의외였어요. 하는 말이나 행동은 외동처럼 보이는데."
"본처한테 낳은 자식이라 그래. 나머지 둘은 출처도 모르는 애들이고. 그 애만 여섯 살 때까지 외가에서 따로 떨어져 살았다고 하더라고. 그래도 형제 사이는 좋아. 아주 끔찍하지. 막내는 모르겠고 첫째 레오는 몇 번 본 적 있어. 오스코프 홍보팀 이사로 있다가 그만두고 몇 년 전부터 한량처럼 지낸다길래 어떤 놈인가 했더니 능글맞고 속 모르겠는 게 지 아빠 꼭 닮았더라. 뭐, 대화 좀 나눠보니까 다행이 뿌리까지 닮진 않은 것 같았어. 뭘 버리고 뭘 지켜야하는 지 알더라고. 똑똑해, 현명하고. 실제로 하버드 경영대 수석 출신이기도 하지만."
"그런 사람이 백수라니... 능력 썩히는 게 아깝네요. 스카우트라도 하지 그러셨어요?"
"페퍼가 우리 쪽으로 불러들이려고 몇 번 제안한 적은 있어. 물론 거절당했지만. 사실 처음부터 그럴 거 예상하고는 있었어. 걔가 지 동생 후계자 승계할 때 방해 안 되려고 시기 맞춰 구설수 올려가며 쇼 하는 거,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거든. 형제라는 게 그렇잖아. 한 쪽이 너무 잘하면 다른 한 쪽이 비교 당하는 거."
처첩관계 복잡한 거야 이 바닥에서 흔하디흔해 빠진 일이었고, 그렇게 차별받아 태어난 자식들끼리 경영권 다툼으로 칼부림 나는 것 역시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런 곳에서 동생의 탄탄대로를 위해 스스로의 능력을 포기하는 사람은 흔하지 않았다. 형의 보호를 받는 오스코프의 황태자라니. 희멀건한 얼굴이나 마른 팔, 다리 같은 유약해 보이는 외형 탓일까, 그 모습을 어색하지 않게 그려낼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모든 것을 헌신해가면서 아껴주는 형제애는 어느 정도로 대단한지 나로서는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조차 없었다. 전 형제가 없어서 모르겠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동생 낳아달라고 할 걸 그랬나 봐요. 싱거운 농담에 아버지는 질색을 했다. 애 하나 더 갖느니 차라리 죽지. 툴툴거리듯이 하는 말은 반쯤 진심인 것 같았다.
"그런데 뭐였어요? 걔가 나보고 보고서 어쩌구 했던 말."
문득 날 세포라고 칭하던 게 떠올라 넌지시 묻자 아버지는 잠시 동작을 멈췄다. 나를 힐끔 보고 잠깐 뭘 고민하는 것 같다가 들고 있던 펜을 살짝 내려놓았다. 곤란한 질문이면 안 해도 돼요. 어차피 대충 짐작 가기도 했고 아주 궁금한 내용도 아니라 가볍게 말하자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어차피 알아야 할 내용이기도 하고.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는 꽤나 착찹해 보였다.
"너 가질 때 노만 오스본한테 좀..."
"아이고, 설마..."
"내가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생명공학 쪽으로 전문은 아니라... 배너 박사나 닥터 조도 있었지만 그 쪽으로 제일 유능한 건 오스코프였다니까! 물론 어디까지나 학문적 조언을 요청한 거라 돈을 주고받진 않았어. 비밀보장 계약서에 공증까지 썼으니까 회계나 법적으론 깔끔해. 단지... 그냥 뭐 결과적으론 그 노인네한테 약점 하나 잡힌 거야."
"그게 저고?"
"응, 너지. 니가 내 아들인 거 밝혀져 봐. 실험으로 낳은 아이라고 인륜적, 도덕적 잣대 들이대는 거야 수트 처음 만들었을 때도 그랬으니 넘어갈 수 있다 쳐. 까짓것 청문회 몇 번 들락날락 거리면 되지. 문제는 네가 위험해 진다는 거야. 그런 이슈 하나 터지면 하나 같이 들어 붙는 게 기자 놈들만이 아니라 어디서 이상한 놈팽이, 변태, 쓰레기들 같은 게..."
생각만 해도 끔찍한지 아버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에이- 너무 비약하는 거 아니에요? 평생 숨기고 살 것도 아니잖아요, 라고 하자 그건 나름의 시나리오를 짜놨을 때 얘기고, 게다가 넌 아직 미성년자라며 예전에 어떤 놈이- 로 시작된 아버지의 고달팠던 과거가 줄줄줄 새어 나온다. 유명해서, 머리가 비상해서, 돈이 많아서, 수많은 이유들로 본의 아니게 빌런을 양산했던 이야기들이야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나는 웃으며 잔소리에 가까운 걱정들을 흘려보냈다.
한바탕 한탄을 쏟아 놓은 아버지는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지쳤는지 내리 한 숨을 푹 쉬었다. 어쨌든 걔한테 잘 해줘. 배경이 좀 그래서 그러지 애는 착해. 아버지는 그 말을 끝으로 그 애에 대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아무렴요, 천연덕스럽게 대답을 하고 아버지가 다시 서류에 코를 묻는 동안 나는 글씨조차 들어오지 않는 책장을 보며 그 애를 떠올렸다. 내 여름에 겨울 햇살을 가져온 그 아이를.
아버지가 그 애를 좋아하면서 가엾이 여기는 이유를 어렴풋 알 것 같았다. 해리는 아버지의 거울이었다. 부실한 가정, 무관심을 가장한 아버지의 학대, 스포트라이트에 비춰진 노출된 삶 같은 것들이 어릴 적 아버지와 다를 게 없었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그 애 위로 드리운 자신과 같은 그늘을 보고도 그냥 지나칠 수 있을 만큼 아버지는 매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둘이 공유하고 있는 어둠은 빛 속에 그림자 같았다. 화려함 속에 초라함이고, 한 여름 속의 겨울이다. 빛만 보고 자라온 내가 모르는.
책을 머리 위로 덮는다. 눈앞에 어둠이 내려오고 그 위에 선연하게 그 애의 얼굴이 떠오른다. 나는 어쩐지 배 안쪽이 베베 꼬이는 것만 같은 기분에 발가락을 꼼지락 거렸다. 샘이 났다. 분에 넘칠 정도로 받아 놓고도 그 애의 그림자 한 자락을 몰라서, 그게 불효막심한 생각인 걸 알면서도 못난 마음을 갖는다. 한 번도 그런 적 없었는데 처음으로 내 삶이 그저 순탄하기만 한 것이 싫었다. 그냥 난 그게 그렇게 갖고 싶었다. 추운 고독과 그늘진 어둠을, 그리고 그 안에서도 빛나는 너를.
◇◆◇
모처럼만에 이른 아침이었다. 탁상 위 전자시계가 오전 7시를 알리고 있었다. 알람시계를 맞춰놓은 것도 아닌데 눈이 먼저 뜨였다. 왠지 눈이 뻑뻑했다. 푹 잔 것 같지가 않았다. 꿈결에 찾아온 그 애가 내 머리를 온통 엉망으로 헤집어 놓은 탓이었다. 꿈속의 그 애는 오만한 표정으로 앉아 나를 보고 있었을 뿐이었는데도, 자꾸 목 안쪽에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라 몇 번이나 몸을 일으켰는지 모른다. 그러고 나면 다시 잠에 들려고 꿈이 남긴 잔상들이 자꾸 떠올라 양을 오백 마리 샜는데도 좀처럼 깊게 잠들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그게 영 그 애 잘 못은 아니니 탓을 할 수도 없어 괜히 약이 올랐다. 이 밤을 설친 게 온전히 나뿐인가 싶어서.
아직 커튼을 걷어내지 않은 방 안은 아침저녁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웠다. 뻑뻑한 눈을 대충 비비고 시계 옆에 올려 두었던 안경을 꼈다. 찌뿌드드한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켰다. 잠을 덜 잔 것 치곤 몸이 이상하게 개운했다. 발코니로 이어지는 창에 커다란 암막 같은 커튼을 치웠다. 빛이 든다. 오늘도 이 대지 위를 뜨겁게 달궈낼 해가 기세등등한 채 아침부터 밝은 빛을 뽐내고 있었다. 발코니 문을 열자 한 낮 열기를 밤새 식혀 조금 가벼운 아침의 공기가 숨을 통해 느껴진다. 빛으로 어지러운 시야가 점점 색과 형태를 덧입히는 동안, 이른 아침부터 할 말이 많은 새들의 지저귐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저 멀리 가까워지는 차 소리도.
대문에서부터 별장까지 이어지는 긴 길목에 아버지는 이탈리아에서 공수해온 사이프러스 나무를 양 옆으로 길게 심어 두었다. 아스팔트가 깔려있지 않은 흙으로 빚어진 길과 양 옆의 커다란 나무들은 이 동네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이국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를 고풍스러운 모양의 세단 한 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멀리서 다가오는 그 윤곽만 봐도 나는 그게 그 애가 타고 있는 차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발코니로 나와 난간에 기대어 있자 어느새 별장 앞으로 다가온 차가서고 뒷좌석에서 그 애가 나왔다. 햇볕에 반짝반짝 거리는 금발을 흩날리며 새까만 선글라스를 낀 그 애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그리고 새초롬한 입술을 비틀어 씨익 웃어 보인다.
"광합성?"
답지 않는 실없는 소리였다. 절로 실실, 웃음이 터져 나온다.
"응, 뭐. 아버지 아직 안 일어났을 텐데."
"그래?"
"원래 늦게 일어나셔. 어제는 예외였고."
"그럼 넌 오늘이 예외겠네."
그게 다 네 탓이다 할 수가 없어서 나는 괜히 딴청을 부리며 답을 피했다. 내가 너무 일찍 방문했나 보네. 그 애는 조금 난감한 듯 고개를 숙이며 그렇게 말했다. 올라오지... 혹여나 그 애가 차를 돌려 가버리진 않을까, 불쑥 그렇게 말하자 그 애는 또 고개를 젓는다. 들어가면 네 아버지 깨시잖아, 민폐야 그거. 아닌 척 하더니 은근히 예의를 지키는 모양이 선망에 마지않는 아버지 때문일 게 뻔했지만, 괜히 나를 조급하게 만드는 것 같게 느껴졌다. 나는 바짝 마르는 입술을 핥았다. 그 애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다. 그게 눈을 찌르는 햇볕 때문인지, 아님 실망스러운 마음 때문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럼 거기 있어."
"어?"
"내가 내려갈게."
그깟 계단 몇 개 내려가는 수고가 뭐라고 그 애를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마저 대답을 듣기도 전에 방 안으로 들어가 잠옷을 벗어 던졌다. 욕실에서 대충 양치와 세수를 하고 옷장에서 적당한 청바지와 티를 꺼내 입고는 방 밖으로 나왔다. 에구머니나, 왠 일로 이렇게 일찍 일어나셨데요? 이제 막 거실 환기를 하려는지 메이 아주머니가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나를 보며 놀란 듯 토끼눈을 떴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요, 손을 한 번 휘적, 아침 인사치고는 다분히 성의 없는 태도를 보이고 서둘러 현관을 나서자 다행히 그 애는 아까 그 자리에서 가만히 선 채 막 나오는 나를 보았다. 그리고 아까처럼 씨익- 웃는다. 그 옆이 왠지 허전하다 했더니 타고 왔던 차가 어느새 저만치 대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애초에 갈 생각이 없었던 거다. 그런 줄 모르고 헐레벌떡 뛰어 내려온 스스로가 우스워 자리에 주저앉아 허탈한 웃음을 짓자 반질거리는 구둣발이 저벅저벅 느린 걸음으로 걸어와 내 앞에 선다. 나는 그런 그 애를 올려다보았다. 아까 내려다봤을 때랑 달리 내리쬐는 햇볕을 등지고 있는 그 애의 그림자 진 얼굴은 작은 비밀을 쥔 어린 아이처럼 천진하고도 교활해 보인다. 주머니에 꽂혀있던 하얀 손을 쓱 내민다. 분명 나를 일으키려는 의도였겠지만 나는 문득 이 손을 잡으면 영원히 놓지 못할 것 같다는 엉뚱한 예감을 느꼈다. 그런데도 망설임 없이 그 손을 잡은 것은 그 손이 마냥 예뻐서도 아니었고, 친하게 지내라는 아버지의 말씀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그 애의 존재가 내겐 너무 유혹적이었다.
서늘한 손이 손바닥에 닿자 눈가를 꿉꿉하게 하던 잠기운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몸을 일으켜 그 애를 내려다본다. 커다란 선글라스 아래 작은 얼굴에 온전히 빛이 드는 것을 본다. 아- 예쁘다.
"그래서, 날 어디로 데려갈 생각이야?"
내 손아귀 안에 잡힌 작은 손이 어린 새처럼 꿈지럭 거린다. 세게 잡으면 부서질 것 같고 허술하게 잡으면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그 애매한 경계를 유지한 채 마주 잡은 손을 이끈다. 길을 벗어나 푹신한 잔디밭을 밟고 정원을 가로지르는 동안에도 그 애는 가타부타 말이 없이 내게 의지한 채 순순히 끌려와 주었다. 우리가 이 낮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정원 한 가운데 솟아있는 커다란 아름드리나무 아래에 앉아 한적한 대화를 나누어도 좋았고, 호숫가의 선베드에 누워 일광욕을 하거나 물놀이를 해도 좋을 터였다. 아니면 이대로 정처 없이 이 커다란 정원을 누비며 걸어 다녀도 좋을 것 같았다. 그냥, 그래, 아무래도 좋았다.
"네가 원하는 데 어디든지."
뱉어 놓고도 낯부끄러운 소리라는 게 느껴져, 고개를 돌려 그 애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더위를 먹은 것도 아닌데 머리에 피가 몰려 귀가 화끈거렸다. 등 뒤가 조용했다. 잠시의 정적 후 피식피식- 바람 빠지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어이없어, 너. 투덜거리는 것 같은 말인데 웃음에 묻혀 그 의도가 뭉뚱그려진다. 그제야 뒤를 돌아보자 선글라스에 가려져 반도 보이지 않는 얼굴이 귀 끝까지 빨갛게 달아있다. 내 얼굴 역시 그 애와 같을 텐데도 빠알간 그 얼굴이 마냥 좋아져 그래서 웃었다. 웃지 말라며 어깨를 툭툭 치면서도 결국 우리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못해 새파란 하늘을 향해 폭소를 터뜨린다. 무지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순진 난만한 웃음소리가 고요에 잠겨있는 이 아침을 깨우고 온 세상을 울린다.
그 때부터였다. 우리는 매 순간 함께였다. 마른 가지 같은 네 손을 잡고 나는 어디든 걸었고, 너는 그런 나를 쫓았다. 우리의 두 다리가 닿는 곳이 길이 아닌 푸른 잔디 위든, 어둠이 낀 숲이든, 심지어 생명을 빨아들이는 늪의 한 가운데라고 해도 나는 네가 원하면 어디든 갔고, 너는 나무람 없이 그런 나를 따랐다. 마치 어미의 뱃속에서부터 신체의 어느 한 부분을 공유하고 있는 샴쌍둥이처럼 우리는 같은 모양으로 자라났다. 나는 네 어둠을 씹어 삼키고, 너는 내 빛을 받아 빛났다. 그렇게 완벽해졌다.
그래서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어떤 위협도 우리를 떨어뜨려 놓지 못할 것 같았다. 무지했고, 교만했고, 또 순진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함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세상 무서울 게 없었던, 그 때, 우린 고작 열일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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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