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 And Beautiful 08
( Steve Rogers, Bucky Barnes X Tony Stark )
스티브는 난감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코 끝에 닿는 향수 냄새가 향기로우면서도 불쾌했다. 나랑 같이 나가지 않을래요? 은근한 말로 하는 유혹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탐스러운 꽃이었지만 자신에겐 맞지 않았다. 정중하게 거절을 하는 스티브를 향해 아쉬운 시선을 남긴 그녀는 마지막까지도 드레스 끝자락을 휘날리며 돌아섰다. 하늘거리며 날개짓을 하는 나비 같은 모습이었지만 지금 그에게 화려한 드레스는 그저 천쪼가리에 불과했다. 그녀가 떠난 자리 다른 이들이 들어온다. 그는 좀 곤란한 듯 웃었다.
캡틴 아메리카. 사람들은 그를 그렇게 칭송했고 스티브는 그러한 그들의 찬사가 불편했다. 단순히 인기를 끌기 위해서 전쟁에 참여 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자신을 대하는 것이 낯설고 어색할 따름이었다. 하워드는 이것이 사회 생활의 일환이라고 했지만 사람들에게 과시하듯 자신을 소개하는 그를 보며 과연 그러한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스티브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응당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을 버키를 찾았지만 아까까지만 해도 옆에 있던 그는 보이지 않았다. 스티브의 시선은 다시 홀을 배회한다. 그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이 또 있었다. 토니, 그 사랑스러운 아이의 모습이 사라졌다.
토니, 입 안에 굴리면 달콤함이 퍼지는 동글동글한 이름이었다. 아까 친구로 보이는 한 남자와 왈츠를 추며 웃던 아이의 천진한 모습을 떠올리다가 스티브는 문득 그와 춤을 추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언젠가 페기와 춤 출 것을 상상했던 그 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리며 설레였다. 남자, 그것도 친구의 아들과 춤추는 것을 상상하며 설레하는 자신이라니! 헛웃음이 나오는 생각이었지만 그럼에도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또 초조해졌다. 어디 있을까? 그 동글동글한 정수리가 보이는 감색 뒷통수와 토끼처럼 통통 튀는 걸음이 보고 싶었다. 괜한 갈증이 일어 스티브는 마른 침을 삼켰다.
"하워드. 혹시 버키 못 봤나?"
"아- 버키는 피곤하다고 먼저 집에 간다고 하더군. 브루클린 멋쟁이가 파티를 마다 하다니. 그 친구도 이제 한 물 갔지."
"그래? 그건 그렇고 자네 아들, 토니도 보이질 않는데.."
"걔야 이런 파티라면 질색을 하니까 어딘가 또 도망 갔겠지. 너무 신경쓰지 말게."
심드렁하니 하는 말에 스티브는 금새 시무룩해졌다. 반짝반짝한 그 애의 빛나는 모습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자 갑작스럽게 이 모든 일들이 귀찮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급격한 피로감을 느낀 그는 하워드에게 이만 쉬고 싶다고 말을 했다.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간곡한 요청에 호텔 방을 잡아 두었으니 더 있으라고 권유하던 하워드도 결국 아쉬움을 접고 그가 원하는 데로 리무진을 빌려 주었다. 롱아일랜드로 돌아가는 동안 스티브는 답지 않게 다리를 달달 떨었다. 여유가 없는 사람처럼 아랫 입술을 씹고 손가락을 딱딱거리는 통에 앞에서 운전하던 기사가 자꾸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인고의 시간이 지나 드디어 저택에 도착했을 때, 토니가 집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불안감으로 가득했던 얼굴이 금새 밝아졌다.
"반즈씨와 도련님은 서재에 계십니다. 공부를 도와주신다고 하시더군요."
"공부?"
자비스의 말에 스티브는 의아한듯 고개를 갸웃했다. 파티에서 돌아오자 마자 공부를 한다고? 버키가 학구열이 높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스티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럼 쉬십시오. 하고 인사를 남긴 채 돌아가는 자비스를 뒤로하고 그의 걸음은 자연스럽게 서재로 향했다. 아까 파티장에서부터 생겼던 갈망을 채우고 싶었다. 공부에 방해가 될까하는 불안감이 들었지만 잠깐 얼굴을 보는 정도야 괜찮겠지, 하고 그는 안이하게 생각했다. 제 눈에 아이의 모습을 잠시만이라도 담는다면 이 이유 없는 목마름이 해결 될 것 같았다. 버키? 하고 짧게 친구를 부른 그가 손잡이를 돌렸다. 끼익- 문이 열렸다. 아.. 안돼엣!! 버키!! 하고 절망적인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의 눈에 보인 것은...
흰 종아리가 달랑거렸다. 발목에 걸린 양복 바지가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절대로 끊어지지 않을 것처럼 깍지를 끼고 있는 다른 손과 숨을 거칠게 내쉬고 있는 들썩이는 커다란 등, 그리고 그 등을 부여잡은 작은 손이 보였다. 버키.. 하고 그는 탄식했지만 친구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속삭이듯 울먹이는 소리가 고장난 테이프처럼 반복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알아들을 수 없는 울음 소리로 변질되었다. 아이를 온 몸으로 가린채 등을 내보인 그가 고개를 돌렸다. 스티브. 그 입술에서 나오는 자신의 이름이, 그 원망 섞인 목소리가 낯설었다. 스티브는 열린 문을 닫았다. 거실의 빛이 사라지며 서재는 완전한 어둠으로 가득해졌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아아- 스티브는 차라리 눈이 멀고 싶었다.
***
토니는 발작을 하는 것처럼 울었다. 쉬이- 괜찮아. 버키는 그렇게 속삭이며 빨갛게 달은 얼굴에 자꾸 번지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제 몸에 매달린 채 토니는 수치스러움 때문인지 떨어질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버키는 입고 있던 자켓을 벗어 그의 허리 아래를 감쌌다. 그리고 그대로 그를 안아올렸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토니의 바지와 속옷을 다른 한 손으로 주워 들고는 뒤를 돌아 스티브를 보았다. 굳어 있는 얼굴로 그들을 보던 스티브는 차마 더 보시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그 모습에 버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제 품에 있는 작은 등을 토닥이며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눕히고 네 방으로 갈게"
"..."
"이따 얘기하자."
담담하게 떨어지는 말에 스티브는 머뭇거리다가 아이의 들썩이는 등을 한 번 보고 문에서 비켜섰다. 버키는 성큼거리는 걸음으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어깨가 축축했다. 토니는 흐느끼듯 소리를 죽여 울었고 버키는 혹여나 자비스나 다른 고용인들이 듣기라도 할까봐 빠른 걸음으로 2층에 올라왔다. 방으로 들어가자 토니는 잦아졌던 울음을 다시금 터뜨렸고 버키는 그런 그를 연신 달래며 침대에 눕히려고 했다. 하지만 토니는 막무가내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악을 쓰며 그의 어깨와 팔을 잡고 놔주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를 진정 시키려 버키는 그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토니, 나 봐. 그렇게 말을 하자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버키를 올려다보았다. 조금은 진정이 되는지 울음 소리는 잦아졌고 이내 히끅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또 귀엽기만 해 버키는 살짝 웃음을 보였다.
"토니, 토니. 괜찮아. 착하지."
"끕.. 흐윽.. 이제 끝나써어.. 흐어엉.."
"안 끝났어. 괜찮아. 내가 잘 처리할게."
"흐으...이제 아버지가 알게 될거야... 분명해...끅, 내가, 멍청했어. 급하다고, 흡, 문도, 안 잠그고..."
"그건 내가 잘 못 한거야. 내가 잘 못 했네. 응? 그러니까 울지 말고."
"나 밉지? 킁, 어? 싫어 죽겠지?"
"아냐, 아직도 너 예뻐. 세상에서 제일 이쁘고 사랑스러워. 그러니까 그만 울자 이쁜아. 응? 눈 다 짓무르겠다."
빨갛게 부어오른 눈가에 입술을 가져가며 가슴 위를 토닥이자 완전히 울음이 가시는지 이제는 훌쩍이는 소리만 들려왔다. 착하다. 올망졸망 눈을 뜨고 저를 보는 토니의 머리를 쓸어주며 버키가 말했다. 세 살배기 아이 다루 듯 하는 그의 행동이 토니는 마냥 싫지만도 않아 얌전히 있었다. 기이하게도 이런 불안감 속에서도 버키의 말을 들으니 안도감이 퍼지고 잠이 몰려왔다. 파티의 소란스러움과 급격한 정/사, 그리고 불안함에 터진 울음 탓에 몸은 이미 피곤함으로 한계까지 몰려 있었다. 점점 눈을 깜빡이는 속도가 느려지자 버키는 토니의 볼에 손을 대고 느린 콧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완전히 토니의 눈꺼풀이 닫히고 나서야 손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방을 나오는 버키의 얼굴이 아까와는 달리 비장함이 가득했다.
버키는 망설임없이 스티브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방 안을 서성이고 있던 스티브가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은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한채 침묵했다. 어색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겨우겨우 먼저 말을 뗀 것은 스티브였다. 토니는? 마지막까지 울던 것이 마음에 걸려 하는 말에 버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고 있어. 그렇게 말을 하고 나자 또 다시 침묵이다. 머릿속이 복잡한 듯 스티브는 마른 세수를 했고 기어이 한탄하듯 말했다.
"무슨 생각이야."
"모른 척 해줘. 하워드나 마리아가 알게 되면 나나 너나 그 애나 별로 좋을 거 없을거야."
"무슨 생각이냐고 묻잖아! 좋을 것 없다고? 지금도 좋을 건 하나도 없어!! 걘 하워드의 아들이야!!"
"뒷일 생각하고 벌인 일 아냐. 계산하고 고민해서 이러는 것도 아니고."
"그럼 생각 없이 이랬다는 거야?!!"
"걜 사랑하니까."
"....뭐?"
한 대 얻어 맞은 것 같은 충격에 스티브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반면 버키는 제가 했던 일에 대해서 전혀 부끄러움이 없는 듯 당당하게 그와 눈을 맞추고 다시 한 번 말했다.
"사랑한다고, 토니를."
쏟아내던 비난 어린 말들을 멈춘 스티브는 그대로 입을 닫았다. 버키의 얼굴에는 진심이 묻어나오고 있었고 그보다 더 솔직할 순 없어 보였다. 스티브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단정지어 말하는 버키의 태도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기억 속에서 버키는 한 번도 지금껏 여자를 만나면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뱉은 적 없었다. 그저 즐기는 거였고 괜찮은 사람을 만난다고만 이야기 했을 뿐 스치듯이 지나간 여자들 중 그가 '사랑'이라는 단어를 붙인 이는 어느 누구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사랑을 말했다. 어느 누구도 감히 거절하지 못할 것 같은 사랑스러움을 가진 아이를 사랑한다고 했다. 그 단어 앞에서 하워드의 아들이니 어린 아이 같은 수식어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듯 했다.
"하지만 넌 이해 못하겠지."
비꼬듯 하는 말에 스티브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버키와는 연애와 사랑은 스티브에게서 먼 이야기였다. 세럼을 맞기 전까지 그는 여자들에게 그리 매력적인 대상이 아니었으며, 이후에는 페기를 사랑하게 되었지만 제대로 된 데이트 한 번 할 수가 없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 사랑했던 그녀는 이미 남편과 가족이 있었고, 하워드의 집에 있으면서 어떤 매력적인 여자를 만나지도 않았다. 단 한 사람만이 스티브의 관심을 받았다. 토니, 이름마저 예쁜 그 아이에 대한 관심을 '사랑'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냐고 하면 그럴 수가 없었다. 아이의 잔망스러움에 그저 눈이 갈 뿐이라고 스티브는 그 마음을 외면했다. 하지만 버키의 말은 그 생각을 통째로 뒤흔들어 놓았다. 스티브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정작 이걸 털어 놓을 수 있는 친구에게도 이 말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나도 그를 사랑하는지도 몰라.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침묵을 지키는 스티브를 보며 버키는 씁쓸하게 웃었다. 달달한 단어를 뱉어 놓고도 씁쓸함을 느끼는 것은 단연 이 상황 때문만은 아니었다. 버키는 스티브를 잘 알았다. 너무 잘 알아서 지금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빤히 보일 정도였다. 그의 시선이 걸리는 곳, 그 눈이 담고 있는 것, 가슴 안에 품고 있는 마음, 그것이 드러나는 얼굴까지 모든 것이 자신과 닮아서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는 신념이 강한 만큼 거짓말을 못했고 그 사실은 언제나 버키로 하여금 존경심을 불러 일으켰지만, 지금만큼은 그러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사실을 스티브는 모르는 것 같았다. 아니면 외면하는지도 몰랐다. 사랑이라는 달콤한 단어에 대한 무지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그는 서투를 뿐이었다.
하지만 버키는 친절하게 스티브의 마음을 일깨워줄 생각은 없었다. 만약 스티브가 이 게임에 끼어 든다면 버키는 찰스 때처럼 그를 경계하고 배제할 수 있을 자신이 없었다. 어쨌거나 스티브는 그가 이 낯선 시대에서 유일하게 곁을 지켜주는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토니를 버릴 수도 없었다. 막 이제야 알게된 사랑을 이렇게 손에서 놓아버리고 싶진 않았다.
"생각해 봐."
버키가 할 수 있는 말은 그 것 뿐이었다. 깨우치고 알아가는 것은 온전히 스티브의 몫이 되었다. 그가 나가고 텅 빈 방에 홀로 남은 스티브는 침대에 앉아 아픈 머리를 부여잡았다. 자꾸만 스치는 장면들이 있다. 버키의 허벅지에 누운 토니, 품에 안겨 잠투정을 하는 토니, 버키의 등에 숨어서 우는 토니의 맨 다리, 허벅지와 종아리, 작은 발이. 이 순간 스티브가 정말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친구의 사랑이 잘 못되었다고 비난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였다. 사랑하지 않는다, 이것이 사랑일리 없다, 주문 처럼 외워봐도 자꾸만 그의 목을 마르게 하는 갈망이 발목을 잡아온다. 고작 단어 하나가 가지고 있는 무게가 이렇게 버거웠던가. 스티브는 도무지 이젠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어져 버렸다.
***
컵에 가득 담겨 있는 아슬아슬한 물의 표면처럼 위태로운 날들은 계속되었다. 다음 날 퉁퉁 부은 눈으로 일어난 토니는 불안감에 초조하게 부모님이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의 걱정과는 다르게 부모님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그를 대했다. 내가 말했지? 잘 될거라고. 버키는 으쓱 어깨를 올리며 말했지만 토니의 불안감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스티브와 시선이 마주치자 마자 그가 고개를 돌려 토니를 외면했기 때문이었다. 분명 민망해서 저러는 거겠지, 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자신을 달랬던 것이 무색하게 그의 외면은 시간이 지나도 계속 되었다. 그리고 그 것이 하루, 이틀, 삼일이 지나자 결국 토니는 비틀린 생각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버키와의 정/사를 들킨 것은 사실이었지만 토니는 그것이 특별히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남자랑 섹/스해서는 안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아버지의 친구라는 배덕감이 있기는 하지만 딱히 이런 상황을 생각하고 그를 꾀인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스티브의 외면은 마치 더러운 것을 피하기라도 하는 것 같이 느껴져 불쾌하기 짝이없었다. 나한테 욕정 했던 주제에. 분수대에서의 그 뜨거웠던 시선을 떠올렸던 토니는 약이 올라 일부로 그의 앞에서는 버키에게 찰싹 달라 붙어 있었다. 나를 봐, 그렇게 아니꼬우면 날 보고 차라리 뭐라 말이라도 해보란 말이야. 그 무언의 시위는 먹히지 않았다. 끝끝내 스티브는 그를 보지 않았다. 조용히 자리를 피할 뿐이었다.
"내가 그렇게 미운가?"
정원 구석의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제 허벅지를 베고 누운 버키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토니는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정원을 계속해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스티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지치지도 않는지 이 더운 여름에 뻘뻘 땀을 흘려가며 뛰고 있는 그 모습을 뚫어져라 봤지만 그들이 있음을 알고 있는데도 스티브는 끝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괜히 약이 올라 토니는 언제까지 그러는지 보자, 싶은 생각으로 계속해서 그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걸 올려다본 버키가 그의 손을 잡아 손바닥에 입을 맞추며 달래듯이 말했다.
"너 예쁘다니까."
"여자도 아닌데 그런 말 듣는다고 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아? 당신 친구 진짜 이상해.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대놓고 피하면 기분 나쁘단 말이야. 내가 뭘 잘 못 했다고?"
"넌 예쁜게 죄지."
"진지하게 좀 들어. 불편하단 말이야. 괜히 기분 나쁘다고 아버지한테 이르면 어떡해? 당신 나 안 보고 살 수 있어? 그리고 언제까지 내가 내 집에서 눈치 보면서 살아야 하는 거야? 차라리 고문을 해라."
"쟤한테도 고문일 거야."
"뭐가? 우리 꼬락서니가?"
"니가 너무 예뻐서."
베시시 웃으면서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버키를 토니가 기어이 꼬집고 말았다. 볼을 꼬집어 쭈욱 늘리면서도 버키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고 토니 역시 마냥 기분이 나쁘지만도 않은지 그만 웃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찝찝한 기분이 가시는 것은 아니었다. 버키의 고백에 답하진 않았지만 토니는 자신이 가진 버키를 향한 감정이 특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라고 묻는다면 토니는 답을 할 수 없을 것이었다. 사랑 받는 것만 익숙한 그에게 그런 감정은 낯설기만 했다. 이 감정은 찰스에게 가진 것보단 무겁고 버키가 제게 주는 것이 비하면 가벼워서 토니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다만 그가 알고 있는 것은 만약 스티브로 인해 버키를 잃는 다면 자신은 견딜 수 없을 것 같다는 것 뿐이었다. 상상만으로도 피가 식고 눈 앞이 아찔해져서 숨이 막혀왔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토니는 자신을 바라보는 새파란 눈을 볼 수 있었다. 그 눈은 서재에서 형형하게 빛나던 그것을 떠올리게 했다. 자신을 심판하는 것만 같은 불쾌한 눈이었다. 흥- 토니는 코웃음을 치며 손으로 버키의 얼굴을 가렸다. 그 날 온 몸으로 자신을 가려주었던 버키처럼 스티브의 시선으로부터 그를 보호했다. 절대로 빼앗기지 않을 거야. 손아귀에 쥔 장난감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욕심 많은 꼬마처럼 생각했다. 어디 우리 아버지한테 말해 보시지, 나는 당신 따위한테 지지 않을 거니까. 두 눈을 부라리며 앙칼진 얼굴을 한 토니를 스티브는 한 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저택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한 참 보다가 토니는 눈을 뗐다. 그리고 제 팔 안에 버키를 보았다. 눈을 감았다가 느리게 뜨고는 토니를 올려다보는 그의 얼굴에 웃음이 걸려있다. 얼굴을 가린 손을 치우지 않은 채로 토니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술 위에 작게 입을 맞추며 웃었다. 이번엔 내가 당신을 지켜줄게. 어린 토니는 아무 것도 모른채 그렇게 다짐했다.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도 달고 황홀하기만 해, 거기에 눈이 멀어 보지 못했던 것들로 인한 오해와 판단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줄도 모르고...
***
부욱- 벌써 열 장째 스케치북이 그의 손에 찢어졌다. 스케치북 위에는 온통 똑같은 얼굴 뿐이었지만 채 완성되기 전에 스티브의 손에 처참하게 찢어지길 반복했다. 무의식적으로 그리다가도 이성을 찾으면 다시 뜯어내길 반복한 결과였다. 결국 손에 쥔 연필까지 두 동강이 나 바닥에 던져진다. 고뇌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는 깨질 듯한 두통을 야기했고 스티브는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 잡았다. 머릿속에는 아직도 계속해서 같은 장면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자신을 적대하는 아이의 얼굴과 행복감에 젖어 아이의 손 안에 있는 버키의 모습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고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잦아들거라 생각했다. 조금만 이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은 괜찮아질 테고 그 때가 되면 진심으로 버키를 축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때마다 도발적으로 저 보란 듯 버키에게 들러 붙는 아이의 모습에 오히려 갈망은 더 커져만 갔다. 그 손이 나를 잡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누워 살냄새를 맡고 싶다고 생각했다. 예쁜 눈을 접어 웃어주는 것이 나였으면 했다. 시기와 질투가 머리를 슬금슬금 내밀어 스티브의 가슴을 데워 놓았고 그 뜨거운 것들은 이내 하나로 뭉쳐 또 다른 열정을 불러 일으켰다. 허리 아래가 뜨거워졌고 발/기를 하는 제 성/기를 느낄 때마다 스티브는 혀를 깨물고 싶었다. 일부러 몸을 움직이고 다른 일에 집중을 하며 해소를 해보려 하지만 갈증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한계였다. 곧 터질 시한 폭탄처럼 이성의 끈은 곧 끊어질 것 같이 아슬아슬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자 스티브는 머리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네, 하고 답을 했다. 하지만 문 너무 답은 들리지 않았다. 버키나 하워드일거라 생각하고 문을 열자 뜻 밖의 손님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토니."
너무 오랜만에 불러보는 것 같은 혀에 단 이름이 굴려진다. 토니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스티브를 한 번 올려다 보더니 손을 뻗어 무언가를 건냈다. 언젠가 자신이 그에게 신겨 주었던 제 운동화였다.
"돌려주려고요."
통통 튀는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어느 노래보다 더 귀에 박히는 음성이 귀를 타고 가슴을 간질였다. 하지만 잠시나마 해소될 줄 알았던 갈증은 더 커져 그를 목마르게 했다.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하필이면 그의 생각을 하며 흥분하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에 빠져 있을 때, 막상 그 대상의 등장은 스티브를 더 괴롭게 할 뿐이었다. 남아 있는 이성으로 스티브는 애써 고개를 돌렸다. 손이 닿지 않게 운동화를 받은 후 고맙다, 라고 짧은 인사를 했다. 그리고 빨리 그를 돌려보내기 위해 문을 닫으려고 했지만 이는 토니의 손에 막혀버리고 말았다.
"왜 날 안봐요?"
고개를 돌려 다시 그를 보았다. 토니의 얼굴은 분노로 빨갛게 달아 있었고 두 손은 주먹을 꽉 쥔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스티브는 차라리 그 손으로 저를 때려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저를 조금이나마 이성적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토니는 그러지 않았다. 자비를 베풀지 않는 매정한 토니는 오히려 그 커다란 두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보이며 스티브의 충동을 더 가중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난, 토니.. 시간이 늦었으니.."
"내가 뭘 잘 못 했어요? 왜 피해요? 일부러 그러는 거죠? 약점 쥐고 나를 괴롭히려고. 아버지한테 언제 얘기할까 재는 거잖아요, 지금!"
"그런 거 아냐."
"그런 거 아니면 뭔데요. 설마..."
이를 악 물고 억지로 울음을 참던 토니가 불연듯 무언가를 생각했는 지 헉,하고 헛숨을 쉰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흔들리는 시선으로 스티브를 올려다 보았다.
"내가 더러워요?"
또르르- 자세히 들어보면 그런 소리가 날 것 같았다. 이슬처럼 맺혀있던 눈물 한 방울이 토니의 볼을 타고 흘렀다. 동시에 무언가 스티브의 머릿속에서 뚝- 하고 끊기는 소리가 났다. 강한 손이 토니의 손목을 잡아 방으로 끌고 들어온다. 순식 간에 일어난 일에 그는 반항 한 번 하지 못했고 등 뒤로 문이 닫히고 잠기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이번엔 분노가 아닌 공포로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거친 숨을 내쉬며 스티브가 그를 보았다. 두터운 손이 토니의 볼에 닿았다. 팔을 타고 온 몸에 전율이 일었다. 손가락 끝으로 눈물을 닦으며 스티브는 쓰게 웃었다.
"아니야, 넌 더럽지 않아, 토니."
언제나 깨끗하게 빛나기만 하는 네가 더러울 리 없었다. 오히려 그건...
토니의 두 볼을 잡은 손이 당겨지고 순식간에 뜨거운 입김이 닿아왔다. 입술이 겹쳐졌고 토니는 놀란 듯 그를 밀어내지도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혀 끝에 말랑한 입술이 닿았고 그 순간 스티브는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릴 뻔 했다. 제 혀에 닿는 아이의 살이 너무 달아서, 처음 맛본 사탕처럼 자꾸 욕심이 생기고, 그것이 가장 소중한 친구들의 것임을 알면서도, 그래서 더 빼앗길까봐 두려워져서, 그래서 울고 싶어졌다. 그런 주제에 여지껏 고결한 척 모든 것을 부정했던 자신이 가증스러웠다. 혐오감이 밀려왔지만 이미 이제는 돌아킬 수가 없었다. 스티브는 이제 토니를 제게서 놓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더러운 건 나야."
더러움은 오롯이 나의 것이려니.
나의 빛,
너는 그저 아름답기만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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