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
( James T. Kirk, Leonard Bones McCoy X Montgomery Scott )
(Crank In)
S#1. (Flash Back)
가을 하늘이다. 끝이 없이 파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뒷산에 나무들은 노랗고 빨갛게 예쁜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이들이 하교한 교정 안은 한산했다.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아이들의 외침과 뒤늦게 퇴근하는 선생님들을 향한 인사소리가 간간히 울릴 뿐이었다. 옥상 위 한 쌍의 다리가 너풀너풀 춤을 추었다. 허벅지 위로 올라간 체육복 바지 아래로 곧게 뻗은 다리는 사춘기 나잇대 아이들 치고는 희고 말랑해 또래 소녀들과 별 다를 것이 없었다. 쭉 뻗은 종아리 아래 얇은 발목, 그리고 아무것도 신겨져 있지 않은 맨발이 꼼지락 거렸다. 가을이라 제법 거세게 부는 바람에도 아이는 무서운 줄 모르는 듯 난간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어폰을 꽂은 채 제멋대로 음이 들쭉날쭉한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간간히 입 안 말랑한 분홍빛 혀가 빨간 막대 사탕을 굴렸다. 피가 오른 여린 꽃잎 같은 입술 사이로 이와 사탕이 부딪히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삐그덕 거리면서 옥상의 철제문이 열린다. 키가 제법 큰 아이 두 명이 옥상으로 들어왔지만 난간에 앉은 아이는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둘 중 한 아이가 와다다 달려가 난간 위 아이의 허리를 냉큼 끌어안았다. 으악- 소리를 내며 아이가 자지러지자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은 아이가 파하하- 하고 높은 하늘만큼 시원하게 웃어 재꼈다. 파닥파닥 손을 내저으며 아이는 진저리를 친다. 나 떨어지면 책임질 거냐는 둥 병아리처럼 빽빽 거리는 아이를 난간에서 내려 대롱대롱 안아 든 다른 아이는 안 떨어지게 제가 꼭 잡고 있잖아요, 라며 허리를 잡은 두 팔에 힘을 꽉 주었다. 뒤에서 이를 보고 있던 다른 아이가 혀를 차며 다가온다. 그리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흰 운동화를 집어 들어 자리에 쭈그리고 앉는다. 선배, 이러다 감기 들어요. 핀잔에 가까운 잔소리를 하면서 벗은 발에 동화를 끼워 주고 말랑한 종아리를 커다란 손으로 주물렀다. 그러자 아이는 이내 개구지게 웃으면서 발을 휘둘러 기껏 신겨준 운동화를 저 멀리 벗어 던져 버린 채 허리에 둘러진 팔의 왼쪽 약지를 냅다 꼬집고 안긴 품에서 저만치 달아나 버린다.
하얀 발이 회색 시멘트 바닥에 통통 튀었다. 아이의 동그란 뒤통수를 덮은 컬이진 붉은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휘날린다. 가을볕에 익어 금색으로 반짝반짝 빛이 난다. 나비처럼 팔랑거리며 아이는 난간 위를 훌쩍 올라와 그 더 위에 옥상 지붕 위로 뽀르르 올라가 버렸다. 마치 술래잡기를 하는 것처럼. 적 빛 지붕 위 흰 아이의 피부가 유독 눈에 튄다. 학교에서 가장 높은 지붕의 꼭대기에 올라 그 위를 두 발로 아슬아슬 걷는다. 허공에 뻗은 두 팔이 잠자리 날개처럼 이리저리 흔들린다. 곧 날아오를 것 같은 가벼운 아이의 몸짓을 보는 두 아이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그 자리에서 오도카니 서서 움직이지 않고 머리카락에 이는 빛과 노니는 발끝을 눈에 담은 채 가만히 그 모양에 넋을 놓고 있다. 아이가 아래를 내려다본다. 입을 열면 꺄르르 어린애 같은 소리가 날 것처럼 빨간 웃음을 지었다. 이리 올라와봐! 그리 외치는 아이를 보는 두 아이의 교복 소매 아래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는다. 꾸욱- 주먹을 쥐었다. 깃털처럼 가벼운 두 발목과 날갯짓을 하듯 허공을 유영하는 두 팔목을 금방이라도 움켜 쥘 것처럼.
S#2. (Main Title)
눈길
S#3. (Monologue)
낙원에서 자라던, 유혹자가 이용한 하와의 먹이와 마찬가지로 좋은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있다. 기이한 그 광경을 눈여겨 바라보며 그들은 생각한다, 한그루 금단의 나무 대신 이제는 많은 나무가 솟아나 한층 재난과 수치를 더하려는 것인가 하고. 그러나 목을 태우는 갈증과 격심한 허기를 견디지 못해 고통을 늘리기 위한 열매임을 알면서도 그들은 마음을 억제할 수 없어 무더기로 굴러가서 나무에 올라가 메가이라에 얽힌 뱀의 머리채보다 더 빽빽하게 몰려 있다. 소돔이 불탄 역청의 바닷가에 자라던 능금처럼 아름다운 그 열매를 그들은 탐욕스럽게 따 먹었다. 이것은 촉각뿐 아니라 미각까지 속였으니 더욱 기만적이다. 그들은 어리석게도 단맛으로 식욕을 진정시키고자 하여 과실이 아닌 쓰디쓴 재를 씹으면, 싫증난 미각은 침 소리를 내며 그것을 뱉어낸다. 허기와 갈증에 휘몰려 연거푸 먹어봤지만, 번번이 토해졌고 매우 불쾌한 맛으로 해서 비뚤어진 턱에는 재와 그을음이 찼다.
- 존 밀턴 作 <실낙원> 제 10편 中.
S#4.
눈이 소복이 회색빛 시멘트 바닥을 덮어가고 있었다. 어두운 골목길에는 침침한 가로등 하나가 유일한 빛이었다. 그 아래 검은 우산을 쓴 소년은 바닥에 쌓여가는 눈송이들과 젖어가는 지저분한 운동화 끝을 바라본다. 다리를 휘적휘적 바닥을 치자 직직 끄는 운동화 밑창 다는 소리가 났다. 발에 채인 눈이 밀려 작은 산이 되었다. 소년은 저만치 멀리 어두운 골목의 끝을 보았다. 어둠 속에 아무런 기척이 없자 우산을 들고 있는 반대편 손에 쥐고 있는 커다란 짐 가방을 고쳐 잡았다. 천으로 된 짐 가방은 이미 반쯤 젖은 채 눈으로 덮여져 얼어 있었다. 하지만 소년은 안에 젖어있을 제 물건들보다야 당장 오지 않는 이를 기다리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멀리서 차 소리가 들린다. 어둠을 뚫고 한 쌍의 헤드라이트가 보이더니 좁은 골목사이로 슬금슬금 차가 기어 들어온다.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골목 안, 바닥에 늘어진 쓰레기와 전단지가 붙어 있는 시멘트 벽, 그리고 추레한 차림의 소년과는 달리 매끈하고 세련된 검은색 고급 세단이었다. 차는 소년의 앞에 멈춰 섰다. 앞좌석에 앉아 있던 검은 정장 차림의 운전기사가 문을 열고 나왔다. 제법 큰 눈송이에 어깨가 젖는 것이 신경 쓰이지 않는지 우산도 없이 성큼성큼 소년에게 다가와 들고 있던 짐 가방을 낚아챈다. 그리고 소년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뒤 트렁크를 열더니 짐을 던지듯이 밀어 넣었다. 뻐끔뻐끔 입을 벌린 채 소리 없는 말을 못 마치고 운전기사가 하는 냥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차창 문이 열린다. 안에 앉아있던 반듯한 차림의 동양인 남자가 그를 보며 묻는다. 안 타? 그제야 소년은 주섬주섬 우산에 쌓인 눈을 털어내고 차에 올라탔다.
"안 오실 줄 알았어요. 사실 꿈인가 싶어서..."
"설마. 딘, 돌아가기 전에 식료품점에 들려야 해요."
부슬거리는 머리카락에 맺힌 눈송이를 털어내며 소년이 주눅 든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남자는 쥐고 있는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짤막한 답을 했다. 그리고 뒤이어 탄 기사에게 간단한 지시를 내린다. 말 없는 기사는 고개를 끄덕 하더니 차를 몰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엔진음과 함께 차체가 움직였다. 어두운 골목길을 슬금슬금 기어 돌아 나와 다시 혼잡한 큰 길로 진입했다. 소년은 유리에 얇게 깔린 얼음 위로 일그러지는 창밖의 풍경을 본다. 짙은 회색으로 어둠이 낀 하늘 때문인지 일찌감치 네온사인 조명을 올린 가게들이 몇 보였다. 그 화려한 불빛이 녹은 눈이 만든 물방울에 맺혀 창 밖 풍경은 마치 인상파 화가가 그려놓은 그림 같기도 했다. 어지러운 밖의 모습과는 달리 차 안은 정적뿐이다. 기사는 말이 없고, 옆에 앉은 남자는 여전히 핸드폰 액정을 들여다보며 손가락을 놀리기 바빴다. 괜한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소년이 크흠- 목을 가다듬어 보지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젖은 컨버스를 신은 소년의 다리가 달달달 떨렸다.
"그... 제가 가서 할 일이 뭔가요?"
차에 올라탄 지 십 분쯤 지나서야 소년은 겨우겨우 어렵게 말을 꺼냈다. 질문을 받은 남자는 흘끔 소년을 보더니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무심하게 묻는다.
"공장장한테 듣지 않았나?"
"어... 거동이 불편하신 분을 도우면 된다고..."
"거주 고용인들이 하는 일이 똑같아. 식사 준비, 청소, 기타 잡다한 심부름. 어렵고 힘든 일은 아니야. 다만 지켜줘야 할 규칙이 있긴 하지."
"그게 뭔데요?"
"세부적인 건 가서 듣겠지만 제일 중요한 거 하나만 말해주지. 입 조심. 그게 제일 중요해."
자신의 입술 앞에 검지를 대며 남자가 말했다.
"고용주가 먼저 말을 걸기 전까지는 입 열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먼저 궁금해 하지 않는다. 고용주가 묻는 말에는 꼬박꼬박 대답한다. 대답은 길지 않게 예, 아니오, 또는 짧은 문장을 써서 답한다. 그리고 절대로 집 안에서 있었던 일들을 외부에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게 사소한 것이라고 해도."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규칙들에 대해서 소년은 다 담아 듣지 못하고 두 눈만 말똥말똥 뜬 채 남자를 보았다. 어.. 하고 말을 더듬거리는 것을 들은 남자는 바람 빠지는 웃음 같지 않은 웃음을 지으며 내가 말 안 해도 알게 될 거야, 하고 짧게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차가 슬금슬금 다시 멈췄다. 갓길에 차가 멈추자마자 남자는 제 발 밑에 우산을 꺼내 들고 차 밖으로 나갔다. 남자가 나가자 다시 어색한 정적이 계속 되었다. 소년은 남자가 했던 말을 되새기듯 입으로 중얼거렸다. 말 걸지 않는다, 궁금해 하지 않는다, 짧게 대답한다,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렇게 몇 번을 되새기고 있자 다시 차 문이 열리고 남자가 들어온다. 아까 나갈 때와는 달리 남자의 손에는 종이봉투가 들려 있었다. 그 안에는 와인 두 병이 들어가 있었다. 출발해, 짧은 남자의 명령에 기사가 다시 차를 몰았다. 눈발을 가르며 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S#5.
감옥처럼 높은 철제 담장과 눈으로 덮인 흰 넓은 정원을 지나 거대한 저택 앞에 검은 차가 서서히 멈춰 섰다. 운전기사가 뒷 트렁크에 짐을 빼는 사이 뒷좌석에 앉아있던 남자와 소년은 빠른 걸음으로 저택 문에 다가갔다. 기사에게 짐을 받아 든 소년은 이런 거대한 저택이 어색한 듯 시골에서 갓 상경한 사람마냥 연신 고개를 돌려가며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넓은 정원에 걸맞을 정도로 큰 집의 외관은 밝은 색 벽돌에 그림을 그린 듯 창틀과 대문이 온통 검정이었다. 눈 오는 회색 하늘에 어울러져 우울하고 냉랭해 보이는 집의 전경에 소년은 긴장한 듯 마른 침을 삼켰다. 현관문으로 향하는 계단 위 처마 아래에서 한 남자가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입김을 닮은 희고 뿌연 연기를 후욱- 내뿜는 남자는 단정한 차림의 다른 이들과는 달리 춥지도 않은지 흰 와이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접어 올리고 목 아래 단추도 두어 개 풀어 놓은 흐트러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필터 끝을 쭈욱 빨아들이며 담배 끝을 빨갛게 태운 남자가 계단 아래에 있는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들고 있던 꽁초를 아무렇게나 바닥에 비벼 꺼버렸다.
"본즈씨, 왜 나와 계세요?"
"보면 몰라? 담배 피우잖아. 손에 든 건 뭐야?"
"와인이요."
"집에 쌓인 게 와인인데 또?"
"변덕 심하신 거 아시잖아요."
"그 새끼는 하여간... 술루, 너도 똑같아. 해달라고 하는 대로 다 해주니까 걔가 저모양인 거잖아."
"저야 시키는 대로 해야죠."
여상한 듯 어깨를 으쓱 하며 술루가 능청스럽게 받아 쳤다. 그가 안고 있는 종이 백에 와인을 흘끔 본 본즈가 술루 너머에 쭈뼛거리고 있는 소년에게 시선을 돌린다. 눈이 마주친다. 소년은 조금 놀란 눈으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오른쪽 게암색 눈동자와는 달리 까맣게 색이 죽어있는 왼쪽 눈에 초점이 없다. 누가 봐도 의안이라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반질반질한 눈자위에 그는 무례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내 찡그려지는 인상을 보고는 화들짝 놀란 소년이 대뜸 허리를 반으로 접어 꾸벅 인사를 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파벨 체코프라고 합니다."
더듬더듬 깍듯이 인사를 하는 모양을 본 본즈가 입술 사이로 피식 웃음을 흘렸다. 씨발, 누가 보면 조폭인 줄 알겠네. 그는 혼잣말처럼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체콥은 무시한 채 술루에게 묻는다. 쟤야? 제법 껄렁하게 턱으로 가리키는 모양새가 그가 말했던 조폭의 행세와 썩 다르지 않았다. 술루는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뒤돌아 체콥에게 더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한다. 아까보다 훨씬 더 주눅이 바짝 들어 어깨를 좁힌 채 주섬주섬 본즈의 앞에 서자 그의 날카로운 눈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천천히 훑어보는 것이 느껴졌다. 체콥은 저도 모르게 손바닥에 자꾸 땀이 차는 것 같아 티셔츠 끝자락에 손바닥을 문질렀다.
"뭘 그렇게 긴장 하냐? 몇 살이야?"
"열일곱 입니다."
"야, 암만 그래도 너무 어리지 않아?"
"물류 공장에서 빼왔는데, 힘도 제법 쓸 줄 알고 빠릿빠릿하다고 하더라고요. 게다가 고아이기도 하고."
"얘 부모님 있고 없고가 무슨 상관이야?"
"적당히 약점 하나 정돈 있어야 저희 쪽에서도 다루기 쉬어요. 여러 가지로 뭐..."
종이봉투를 쥐지 않은 술루의 한 쪽 손이 턱-하니 체콥의 뒷덜미를 쥐었다. 안마를 하는 것처럼 주무르는 손아귀 힘이 세서 체콥은 긴장으로 뻣뻣해진 채 마른 침을 삼켰다. 술루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지 본즈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네가 뽑은 사람이니 어련히 잘 할까. 그리고 귀찮은 걸 쫓아내버리는 것처럼 들어가 보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그제야 술루는 가볍게 목례를 한 뒤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쭙잖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체콥 역시 본즈에게 다시 한 번 꾸벅 인사를 하고 술루의 뒤를 쫓았다. 들어가기 전 흘끔 뒤를 돌아보자 본즈는 그들에게 더 관심이 없는지 담배를 피웠던 그 자리에 서서 눈 덮인 정원을 보고 있었다. 뭐 하는 사람일까, 괜한 궁금증이 이는지 술루를 향해 저 분은 뭐하는...하고 입을 열었다가 자신을 압도하는 집안 풍경 때문에 뒷말을 잊고 말았다.
문 앞에 보이는 커다란 홀은 집 외관과 다를 바 없이 흑백의 모노톤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마냥 단조롭지 않았던 것은 아마 홀 위쪽을 비추고 있는 화려한 크리스탈 샹들리에 때문이었을 것이다. 홀 정면에 거실처럼 꾸며 놓은 공간은 회색 러그와 고급 가죽 쇼파가 전기 벽난로 옆으로 보기 좋게 배치되어 있었고, 옆으로 이어지는 방은 서재인지 벽을 꽉 채운 검은 나무 책장 속 책들이 빼곡히 들어가 있었다. 서재의 한 쪽에는 주인이 치는 것 같은 그랜드 피아노가 창가 옆에서 빗물이 만드는 빛의 일그러짐을 제 몸 위에 그려내고 있었다.
"이쪽으로."
술루는 서재 반대편 문으로 그를 이끌었다. 문으로 들어가자 식당이 나온다. 식탁은 크지 않았지만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묵직한 느낌을 주었고 식탁 가운데에는 양초를 태운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식당을 지나 더 들어가자 부엌이 나왔다. 때마침 저녁을 준비하는지 아일랜드 식탁 위 신선한 식재료들이 한 가득이다. 부엌일을 하는 아주머니가 바쁘게 손을 놀리다 말고 제법 반갑게 술루와 체콥을 맞이한다.
"또 와인?"
"네."
"어이구, 안 그래도 많은데. 술 좀 적당히 드시지..."
"오늘은 어때요?"
"알잖아. 눈 오는 날이면 영 컨디션이 안 좋으신 거. 하루 종일 묽은 스프 한 접시만 드셨어. 그마저도 게워내셨다고 하시더라고. 가뜩이나 앙상한데 날이 갈수록 마르시는 것 같아서 걱정이야. 나야 괜찮은데 맥코이씨만 불려다니기 바쁘지."
퍽 걱정스러운 듯 한 얼굴을 하는 아주머니를 보며 술루는 얕게 웃었다. 그리고 품에 있는 와인 한 병을 꺼내어 건넨다. 오늘 저녁엔 이걸로 내주세요, 하는 말에 아주머니는 웃는 낯으로 그걸 받다가 뒤에 있는 체콥을 보았다. 새로 온 아이? 라고 묻는 그녀를 향해 체콥이 꾸벅 인사를 했다. 아까보단 조금 편하게 자기소개를 하자, 아이고 싹싹하기도 하지, 하며 웃는 낯을 한다. 조금 편한 이가 생긴 것 같아 얼굴이 풀어지는 체콥을 술루가 다시 끌어당긴다. 부엌 옆 쪽문으로 나가자 사용인들이 쓰는 듯한 방들이 줄지어 있었다. 술루는 가장 마지막 방을 가리켰다.
"저기가 네가 사용할 방이야. 들어가서 씻고 옷장 안에 옷이랑 실내화 있으니까 갈아입고 나와. 여기 주인은 6시쯤에 돌아 올 거야. 그 전에 안주인이랑 먼저 인사 해야해. 네가 돌봐야 할 분이니까."
"아, 네."
"30분 줄게. 얼른 정리하고 나와."
손목시계를 보며 술루가 지시하듯 말했다. 체콥은 얼른 고개를 주억거리며 제 방으로 향했다. 3평 남짓한 작은 방은 밖의 화려함과는 달리 단조롭고 협소했다. 몸을 누일 수 있는 싱글침대와 작은 옷장, 그리고 간소한 책상 하나가 다였다. 하지만 차라리 이편이 더 마음에 놓여 체콥은 밀렸던 한 숨을 푹 쉬고 들고 있던 짐 가방을 내려놓았다. 옷장을 열자 똑같은 흰 와이셔츠와 검은 정장 바지가 각 다섯 벌씩 일정 간격을 유지한 채 놓여 있었다. 와이셔츠 한 벌, 정장 바지 한 벌을 꺼내 놓고 가만히 이를 보다가 씻을 생각 없이 침대로 엎어져 버렸다. 한 건 아무 것도 없는데 어째 피곤한 기분이 들는지 자꾸 내려앉는 눈꺼풀 위를 비빈다. 그러다 퍼득 놀라 아, 이러다 자겠다, 하고 혼잣말을 하며 제 볼을 손바닥으로 짝짝 내려친다. 그리고 얼른 고개를 털고 일어나 서둘러 욕실로 들어간다. 문이 닫히고 곧이어 쏴아아- 물소리가 들려왔다.
S#6.
눈이 좀처럼 그치질 않았다. 검은 창틀, 투명한 유리창을 밖 비치는 정원 풍경위 작은 티끌마저 지워버리며 흰색 도화지를 만들고 있었다. 체콥은 저도 모르게 멍하니 그걸 바라보다가 퍼득 정신을 차리고 어두운 방안에 어울리는 짙은 남색 침대 위를 본다. 두터운 이불에 폭 싸인 채 한 남자가 잠을 자고 있었다. 침구와 방 안의 어둠에 비해서 남자는 지나치게 희다. 이불 사이로 드러난 어깨나 볼께가 홍조를 띄고 있음에도 생기가 없어 빈약해보이기까지 했다. 배게에 파묻힌 옆얼굴은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둥그스름한 눈매와 오똑한 코, 얇은 입술, 둥근 턱선 같은 것들이 눈 옆에 진 주름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앳돼 보였기 때문이었다.
체콥은 5분 전 술루가 자신에게 지시했던 내용을 떠올렸다. 2층에 안주인 모시고 내려와. 식사 해야 하니까. 본래 먼저 인사를 시키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늦어지는 저녁식사 준비에 결국 아주머니를 도와 팔을 걷어 부친 그는 체콥을 혼자 올려보냈다. 홀 양 옆으로 둥글게 뻗어있는 계단을 올라 양 계단이 만나는 중간으로부터 이어지는 복도를 중심으로 마주보고 있는 방과 정면에 방, 총 세 개의 방이 있었다. 양 옆에 방은 모두 정면의 방과 이어져 있었다. 세 방을 모두 뒤진 결과 중간 방 침대에 누워있는 남자가 분명 이 집에 안주인일 것이 분명했지만 체콥은 차마 그를 깨울 수가 없었다. 숨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남자가 너무 곤히 자고 있는 탓이었다. 그래서 맘 약한 그는 이 어두운 방에 조명도 켜지 못한 채 자는 이의 모습을 멀뚱히 내려다 볼 수밖에 없었다.
"뭐해? 안 깨우고."
정적을 깨고 문이 벌컥 열렸다. 화들짝 놀란 체콥이 뒤를 돌아보자 방으로 들어오는 본즈의 모습이 보였다.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보며 체콥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해 했다. 그는 그런 체콥과 자고 있는 이를 번갈아 보더니 한 숨을 푸욱 쉬고 성큼 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침대 옆으로 선 그는 이불을 살짝 들춰 제 몸을 집어넣고 남자의 등 뒤로부터 끌어안듯이 바짝 다가갔다. 커다란 손이 여린 어깨를 쥔다. 본즈의 입술이 남자의 귓가에 닿았다.
"스코티."
본즈가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속삭임과 다를 바 없는 나직한 목소리였는데 깊게 자고 있는 듯 했던 그가 마법에서 풀린 것처럼 스르르 닫힌 눈꺼풀을 열었다. 반쯤 뜬 눈을 깜빡깜빡 거리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 제 뒤에 있는 본즈를 본다. 어깨에 올라와 있던 본즈의 손이 스콧의 쇄골을 따라 가슴팍으로 미끄러졌다. 손이 가슴 위를 밀고 그 힘에 스콧의 몸이 자연스럽게 돌아간다. 본즈가 반대쪽 팔을 뻗어 팔베개를 해주자 그 위에 머리를 대고 돌아누운 그는 이내 그 널찍한 품에 쏙 안겨 버렸다. 이불 밑에서 멍투성이의 앙상한 팔이 나와 본즈의 겨드랑이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넓은 등 뒤로 둘러진다. 흐음- 하고 스콧이 나른한 숨을 쉬었다.
"...몇 시요?"
"여섯시 다 되가. 좀 있으면 짐 올 거야."
"..씻고 싶은데..."
"밥 먹고 나면. 너 오늘 하루 종일 먹은 것도 없잖아. 자꾸 안 먹으니까 기운 빠져서 잠만 자지."
"다리병신이 할 일이 무어 있다고..."
"스코티."
"...알았어요."
체념 섞인 한숨 같은 답을 하며 스콧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덮고 있던 이불이 밀려 내려가고 이불 아래 숨어 있던 마른 몸이 드러난다. 둥그스름한 뒤통수로부터 이어지는 뒷 목선과 그 양 옆으로 뻗은 앙상한 어깨, 뼈가 드러나는 날개 뼈와 그 아래로 움푹 페인 척추선, 남는 지방도 단단한 근육도 없어 보이는 말랑한 허리가 공기 중으로 노출 된다. 누운 자리에서 가만히 그런 스콧의 나신을 올려다보는 본즈의 오른쪽 눈의 색이 짙어진다. 자석에 이끌리듯 본즈가 몸을 일으켰다. 스콧의 일으킨 상체 가슴 언저리에 얼굴을 대고 숨을 들이키다가 입술을 벌리고 혀를 내어 그 위를 핥는다. 입술과 코끝이 분내 날 것 같은 흰 피부를 노닌다. 비벼지고 붙었다 떨어지며 살결을 음미하다가 목선으로 올라와 잘게 입을 맞췄다.
그 색정적인 모습에 체콥은 차마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본즈와 눈이 마주쳐 퍼득 시선을 돌린다. 하지만 그런다고 귀가 완전히 차단되는 것은 아니라 쪽쪽 거리며 입술이 살 위에 붙는 소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 마요, 하고 다 쉬어 빠진 힘없는 목소리로 스콧이 말하고 나서야 그 소리가 멈춘다. 후욱- 하고 본즈의 짙은 숨소리가 내린다.
"너 너무 달아."
"내가 사탕이요? 밥 먹어야 한다고 했잖수. 애도 보는데... 이봐요."
"네... 네?"
"놀라기는. 이리 와서 나 좀 일으켜 주쇼."
부르는 소리에 다시 돌아보자 스콧이 손을 뻗는다. 허둥지둥 그 손을 잡아 양 겨드랑이를 받쳐주자 힘겹게 몸을 일으킨다. 그의 몸을 가리고 있던 이불이 그에게서 완전 떨어져 나갔고 마른 다리가 허공에 허우적거리는 것이 보인다. 살 없는 허벅지 둥그스름한 무릎 그 아래 곧게 뻗은 종아, 얇상한 발목 아래로 발이 없다. 마치 끊어져 나간 것 마냥 비어 있었다. 뭉특하게 아물어 있는 절단면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체콥은 그가 침대의 가장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저기, 저거 가져 와요. 스콧이 손을 뻗어 옷걸이에 걸린 옷가지를 가리킨다.
건네준 제법 품이 큰 아이보리 색 스웨터와 검은색 면바지를 익숙한 듯 꿰어 입고 다시 안아달라는 듯 손을 뻗는다. 허리를 숙여 그 손을 목에 두르게 하고 무릎 아래 손을 넣어 그를 번쩍 들어올렸다. 작은 키도 아니었는데 들리는 몸은 남자치고는 지나치게 가볍다. 체콥은 그를 안아들고 여전히 침대 위에 앉아 있는 본즈를 보았다. 그는 체콥의 품에 안긴 스콧을 가만히 보더니 저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체콥은 마치 없는 사람인 냥 스콧에게 바짝 다가가 흐트러진 앞머리를 정돈해주고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가자, 하고 운을 떼며 본즈가 몸을 돌린다. 먼저 앞장 서는 그의 뒤를 따라 체콥이 졸졸 그를 쫓아간다. 흘끗 제 품에 안주인을 내려다본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지나치게 고요한 얼굴이 잠을 자는 것인지 깨어 있는 것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어두운 2층 복도를 지나 나오자 환한 홀이 나왔다. 홀 정면 현관문이 열려 있다. 딱딱한 얼굴의 두 경호원이 문 양 옆으로 서있었고 막 들어온 듯 어깨에 걸친 베이지색 코트를 벗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더티 블론드 짧은 머리를 단정하게 넘긴 남자는 새파란 눈으로 흘끔 계단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영롱한 눈 색이 어울릴 정도로 수려한 외모를 가진 남자는 벗은 코트를 옆으로 건넸고 비서인 듯한 흑인 여성이 이를 받아 들었다. 네이비 정장 앞 단추를 편하게 푸르고 남자는 손에 걸린 검은색 가죽 장갑을 벗어냈다. 손가락 끝을 잡아 당겨 밑동을 잡아 벗기자 얼굴만큼 단정한 손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손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이질적인 금속 물체가 보인다. 왼쪽 네 번째 손가락이 있어야 할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손가락 깍지가 끼워져 있었다.
"새로 온 사람?"
"네. 오늘부터 안주인님 거동을 도와줄 아이입니다."
언제 부엌에서 나왔는지 옆에 선 술루가 체콥의 인사를 대신해 소개를 했다. 그는 슬쩍 체콥을 올려다 본 뒤 흥미가 없는 듯 벗은 장갑을 마저 비서에게 건네주었다. 2층에 올려다 놓고 퇴근해요. 수고했어, 우후라. 짧게 미소 지으며 그렇게 말하자 비서가 목례를 하고 단정한 걸음으로 계단을 오른다. 주인은 하루가 고된 듯 지친 얼굴을 하고 본즈에게 다가갔다. 둘은 손을 교차시켜 가볍게 포옹을 했다.
"고생했다."
"너야 말로. 식사 아직이지? 얼른 먹자."
제법 친근하게 인사를 나눈다. 남자의 얼굴은 아까보다 훨씬 더 풀어져 있었다. 고용인을 대할 때와는 달리 다채로운 얼굴을 하고 덩치에 답지 않은 어리광을 부린다. 그것은 본즈 역시 마찬가지인 듯, 약간 신경질 적이었던 그의 표증은 한껏 풀어져 있었다. 포옹을 풀고 은은한 미소를 띈 채 남자는 층계를 더 올라와 체콥의 앞에 섰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안고 있는 스콧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여 관자놀이쯤에 코끝을 문지르고 입술을 부볐다. 체콥의 목에 둘러졌던 손 중 하나가 그런 남자의 턱 선을 따라 흐르다가 목과 이어지는 턱 아래쯤을 간질이듯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종일 뭐했어?"
"눈 오면 몸 안 좋은 거 알면서 물어요. 계속 잤지."
"또 굶었지, 너."
"안 넘어 가는 걸 어쩌란 말이요? 의사 양반이나 당신이나..."
"미안해. 맘 같아선 계속 있어주고 싶은데 요즘 일이 너무 바빠. 그래도 일찍 퇴근 한 거니까 좀 봐줘."
"...알아요."
"착하다. 이리 줘요. 내가 데려갈게."
선뜻 팔을 내미는 모습을 보며 체콥이 그런 그의 품에 스콧을 넘겨주었다. 목에 둘러졌던 팔이 남자의 목 위로 옮겨갔고 남자는 제법 능숙하게 그를 안아 받는다. 스콧의 동그란 머리가 그의 목덜미에 안착한다. 팔을 바짝 끌어 넓은 어깨에 볼을 대고 평안한 얼굴로 눈을 감는다. 남자가 흡족한 듯 웃는다. 그리고 그런 스콧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숨을 크게 한 번 쉰다. 그리고 계단을 뚜벅뚜벅 내려가며 아까 본즈가 입술을 댔던 자리 반대편 목 께에 잘잘한 입맞춤을 남긴다. 식사 전 에피타이저를 즐기듯 자국이 남을 정도로 꽤 진한 행위였지만 그것을 나무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체콥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대리석을 밟는 남자의 걸음걸음마다 아래 있는 본즈의 시선이 닿는 것을 본다. 그가 웃으며 둘이 내려오는 것을 반긴다. 그의 손이 남자의 어깨를 쓸고 둘러진 스콧의 손에 닿는다. 스콧의 손이 자연스럽게 깍지를 낀다. 얽히는 손가락을 스콧은 쳐내지 않았고, 남자는 옆에서 나란히 걷는 본즈를 향해 여상한 듯 미소를 짓는다. 그 모습이 지나치게 자연스러워 체콥은 기괴한 이질감을 느낀 듯 시선을 떼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뭐해? 안 내려오고. 술루가 핀잔을 주고 나서야 그는 정신을 차리고 허겁지겁 계단에서 내려왔다. 사용인들이 각자 제 위치로 향한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들이 밖으로 나갔다. 쾅- 하고 현관문이 닫혔다.
S#7.
"제임스 커크요? 그 제임스 커크?"
"너 진짜 아무 것도 모르고 여길 왔어?"
넉넉하게 해놓은 식사는 산더미처럼 남았다. 그 남은 음식들은 결국 사용인들의 저녁 만찬이 되었다. 아일랜드 식탁에 걸터앉아 디저트로 나온 아이스크림을 퍼먹고 있던 술루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는 체콥을 향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연어 샐러드를 씹고 있던 체콥은 입술에 양상추 끝이 붙은 것도 눈치 채지 못한 채 입을 헤- 하니 벌리고 있었고, 술루 옆에서 고기를 썰어 입에 넣고 있던 우후라는 낮게 웃었다. 그녀는 고기를 씹으며 옆에 따라 놓은 레드 와인을 들이켰다.
"그래, 그 제임스 커크. 열 살 때부터 피아노 신동으로 불리면서 각종 콩클을 휩쓸다가 지금으로부터 십년 전, 그러니까 스물다섯 살에 불의의 사고로 손가락을 잃어버리면서 은퇴. 이듬해 돌아가신 아버지의 회사를 물려받아 네가 다니던 그 물류 회사의 원청업체 E그룹의 회장 제임스 커크가 맞아."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는 우후라의 말에 헤에- 하고 흥미로운 듯 체콥이 추임새를 넣는다. 포크로 연어를 푹 찍어 입에 넣는다. 채소와 함께 연어가 아삭아삭 씹혔고 그는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의 그를 떠올리는 지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제임스 커크. 사실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더 드물었고, 이름이 유명한 만큼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수두룩했다. 높은 기업가들이 달고 다닌다는 스캔들 한 번 없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회사를 탄탄하게 쌓아올리고 있는 젊은 남자는 완벽함의 표본이었고 경외의 대상이기도 했다. 뉴스에서 봤던 칭찬이 가득한 내용들을 떠올리며 체콥은 가만히 있다가 다시 입을 연다.
"그럼 안주인님은..."
"회장직 오르자마자 식 없이 대뜸 혼인신고부터 한 그 와이프 맞아. 한동안 미디어 관심이 장난 아니었는데, 돈을 풀어서 순식간에 조용하게 만들었어. 외부로 얼굴 한 번 알려진 적도 없고, 집에서 가둬 기른다고 이래저래 뒷소문으로 유명하지만 실상은 움직일 수가 없어서 밖을 못 나가는 거나 마찬가지야. 회장님이 데리고 나가긴 하지만 왕이 행차하는 것보다 보안에 더 신경 쓰면서 움직이니까. 거기 관해서는 철저하시거든."
"내가 말했지? 여기선 입 조심이 중요하다고."
거의 들이키듯 바닥에 녹아있는 아이스크림을 입에 털어 넣고 싱크대에 식기를 내려놓으며 술루가 날카로운 눈으로 체콥을 보았다. 체콥은 약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린다. 신입이라고 너무 군기 잡는 거 아냐? 우후라가 웃는 낯으로 술루에게 핀잔을 주었다. 첫 날에 교육 잘 시켜 놔야 실수가 없지, 술루가 냉정하게 답했다. 그 중간에서 발목 아래 발이 없는, 앙상하게 말라있던 스콧을 체콥은 눈으로 그려보았다. 그런 장애 때문에 그를 가둬놓는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커크가 스콧을 보는 눈은 사랑스러움이 뚝뚝 떨어질 정도였다. 그는 그러다가 또 다른 이를 떠올렸다. 안주인의 목에 입술을 부비던 또 다른 이를. 식사가 끝나고 부부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가던 그를.
"본즈 씨는 그럼 뭐 하시는 분이세요?"
"명목상으로는 이집 주치의긴 한데..."
"우후라."
"어차피 얘도 알 일이야. 나중에 당황시키느니 지금 말하는 게 낫지."
남아있는 와인을 들이켜 와인 잔에 바닥을 보인 우후라가 술루의 핀잔 어린 말에 딱 잘라 냉정하게 답했다. 못마땅하지만 우후라 말이 아주 틀리지는 않은 듯 체콥을 유심히 보다가 술루가 입을 닫는다. 그러자 우후라가 살짝 미소를 띠며 다시 체콥을 돌아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2층에 방이 세 개가 있는 건 너도 봤지? 가운데는 안주인님 방이고 양 옆 오른쪽이 회장님, 왼쪽이 본즈씨 방이야. 세 사람 십 대 때부터 친했고 중, 고등학교 동창이야. 본즈씨는 여기 들어오기 전까지 E그룹 계열사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일했었어. 안주인님, 본즈씨, 회장님 이 순으로 일 년 걸쳐 선후배 사이고. 문제는 그게 비정상적으로 친밀하다는 거야. 그러니까 이건 여러가지 의미로... 뭐, 너도 아주 눈치가 없지 않은 이상 어느정도 눈치는 챘겠지만."
"대충은 알겠지만, 혹시 여러가지 의미라는 게..."
"말 그대로 여러 가지 의미야. 그 이상으로는 나도 말 못해줘. 설명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밖에 내색하면 안 되는 거 알지? 회장님 눈치가 빨라서 그런 거 금방 알아채셔."
"...명심하겠습니다."
"그것보다 궁금하진 않아?"
"뭘요?"
"네가 왜 여길 오게 되었는지 말이야."
우후라의 말에 체콥은 오히려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술루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술루가 슬핏 시선을 피했다.
"저는 공장장님이 오라고 하셔서... 술루씨가 저를 뽑아주신 게 아닌가요?"
"엄밀히 말하면 안주인이 뽑은 거야. 지난번 고용인이 그만 두고 나서 네 이름 대면서 데려오라고 했다고 하더라고."
"안주인님이요? 저를요?"
"나도 거기까지밖에는 몰라. 술루가 통 알려줘야 말이지."
"나 보지 마라. 난 말 못 하니까. 솔직히 나도 잘 몰라. 그냥 데려오라니까 데려 온거지."
눈을 가늘게 뜨고 저를 보는 우후라를 향해 술루는 손사래를 쳤다. 안주인이? 체콥은 저를 보던 스콧의 눈을 떠올린다. 달리 저를 아는 눈치는 아니었다. 저의 무엇을 알고, 그것도 주인의 하청업체 공장에서 일하는 직원을 데려오라고 했을까? 하지만 물어봐도 답해줄 사람은 없으니 머릿속에 물음표만 둥둥 떠다닐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온통 비밀이고 의문이고 투성이다. 손가락이 없는 천재 피아니스트, 비밀 속에 가려진 발이 없는 안주인, 그리고 한 쪽 눈이 없는 주치의, 안주인을 향한 두 남자의 애정 어린 눈과 그것과는 별게로 둘 사이에 이루어지는 단단한 신뢰감 같은 것들이 그들의 관계를 좀 더 복잡한 궁금증을 가지게 만든다.
"이상해."
슬핏 웃으며 체콥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나직한 목소리가 섹섹 거리는 숨소리 같이 작다. 닿지 않는 목소리가 우후라와 술루의 설전 사이로 파묻혀버렸다.
S#8. (Flash Back)
괜찮아, 괜찮을 거야.
파묻힌다. ??의 목소리는 섹섹 거리는 숨소리 같이 작았다. 바닥에 계속해서 쌓여가는 거센 눈보라에 먹히는 목소리였지만 아이의 귀에는 선명하게 들려왔다. 아이는 바닥에 푹푹 빠지는 ??의 다리를 물끄러미 본다. 아이와 ??를 한데 감싸는 웃옷에 비해 바지 밑단은 형편없이 얼고 젖어 있었다.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이쯤 되니 괜찮다, 괜찮다, 하는 말이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함인지 저 자신을 위한 말인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는 끝이 보이지 않는 설원을 가로 지르는 두 다리를 멈추지 못했고, ??의 품에서 추위를 피하는 아이의 얼굴은 이 위험한 상황을 모르는 듯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오히려 의아한 듯 아이의 눈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 등지고 있는 어깨 너머 눈발로 흐려진 저 먼 곳을.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이 ??의 어깨를 몇 번이나 쥐었다가 펴지길 반복했다.
S#9. (Flash Back)
나 기억해 줘야 돼. 알았지?
S#10.
눈은 그쳤지만 하늘은 여전히 우중충했다. 새벽부터 커크가 출근을 하는 것을 배웅하고, 안주인이 늦은 잠을 잘 때까지 체콥의 할 일은 그닥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냥 놀 수도 없는 일이라 체콥은 마당에 쌓인 눈을 쓸고 부엌 아주머니를 도와 식기를 닦으며 시간을 보냈다. 하품을 쩌억 한다.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지 간 밤 꽤 잠을 설친 탓이었다. 가물가물한 눈을 부비며 식기를 정리하고 사용인들끼리 늦은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술루와 함께 주인의 서재를 청소하고 있을 때 쯤 집으로 손님이 찾아왔다. 단정한 얼굴에 표정이 없는 남자는 서재로 들어와 쇼파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체콥을 불렀다. 먼지를 털고 있던 체콥이 술루의 눈치를 보았고 술루는 가보라는 듯 턱짓을 했다. 쭈뼛거리며 맞은편 자리에 앉자 남자가 체콥을 훑어보고 인사 없이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네준다. 흰 종이 윗면에 계약서라고 타이핑이 되어 있었다.
"E그룹 전담 변호사 스팍입니다. 고용 계약서를 작성해야 해서 잠시 들렸습니다. 내용 확인하시고 싸인 해주시면 됩니다."
무미건조한 말로 상황을 설명한 스팍을 보고 체콥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계약서를 읽어 나갔다. 계약서는 별다를 내용은 없었다. 연봉이나 고용 조건 같은 것들이 나와 있었고 술루의 언질처럼 비밀 보장에 대한 내용들이 세세한 조항으로 첨언이 되어있을 뿐이었다. 그걸 읽어나가던 체콥이 한 조항에서 멈춰 섰다.
"저... 이건 뭔가요? 을은 갑에게 과거와 관련된 내용은 일절 발설하지 않는다는 건...."
"말 그대로입니다. 개인적인 말을 삼가달라는 조항입니다."
"아, 그렇군요."
개인적인 내용을 구지 '과거'에 치부하는 것이 무언가 석연치 않았지만 체콥은 별 의심 없이 계약서에 싸인을 했다. 몇 가지 추가적인 서류들에 싸인을 마치자 스팍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로 종종 보게 될 겁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딱딱하기 그지없는 형식적인 인사를 하고 스팍이 나갔다. 그럴싸한 대답을 하지 못한 채 휑하니 나가버리는 스팍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던 그는 괜히 민망해져 머리를 긁적거렸다. 때마침 1층에 작은 차임벨이 울렸다. 안주인이 부르는 거야. 가 봐. 깔끔한 책상 위를 몇 번이나 걸레로 문지르며 술루가 말했다. 체콥은 허겁지겁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 올라가 정면의 방으로 들어가자 막 일어난 듯 몸을 일으키고 있는 스콧의 모습이 보였다. 체콥이 얼른 다가와 도와주려 하자 손사래를 친다. 난 됐고, 커튼이나 열어줘요. 잠이 낀 쉰 목소리로 내려진 지시에 그는 얼른 침대 옆 커튼을 걷어냈다. 비록 회색빛 구름 낀 하늘이라고는 하나 낮이라고 어두운 방 안을 비추는 빛이 들어온다. 퀴퀴하게 껴있던 장막 같은 어둠이 구석으로 도망을 가고 침상에 누워있던 스콧은 눈가를 가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머리가 아픈 듯, 아니면 빛이 적응이 되지 않는지 고개를 숙였다. 자기 전까지 뭘 만들고 있었는지 손에는 색색이 천으로 엮어 놓은 긴 줄이 걸려 있다. 그걸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손을 뻗어 이리 오라는 듯 살랑살랑 손짓을 한다. 체콥이 다가와 그 팔을 잡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제 목에 걸게 하자 두 손을 꽉 잡으며 안겨온다. 무릎 아래 손을 넣어 그를 번쩍 들어 올리자, 그가 작게 말했다. 씻고 싶수. 체콥은 군말 없이 욕실로 향했다.
거대한 욕실의 욕조에 그를 앉혀 놓고 적당히 미적지근한 물을 틀었다. 절단된 면이 예민해 너무 뜨거운 물을 틀면 안 된다는 술루의 조언을 들은 터라 체콥은 간간히 그에게 온도가 괜찮은지 물었다. 다행히 그는 괜찮은 듯 힘없는 목을 욕조 벽면에 기대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이 그의 가슴께까지 차오르자 체콥은 제 소매를 걷어 올리고 샤워기를 틀어 뒤로 젖혀진 그의 머리를 감겨 주었다. 향 좋은 샴푸를 짜서 손으로 조물조물 머리를 만져주자 그는 기운 없이 또 눈을 감아 버렸다. 하지만 자는 건 아닌지 손가락으로 욕조 가장자리를 톡톡 치며 손장난을 했다. 별 생각 없이 체콥은 그 짧고 가는 손가락을 보다가 문득 손목 아래 길게 그어진 흉터를 본다. 누가 봐도 그 의도가 분명한 흉에 놀라 그는 얼른 시선을 떼고 머리를 헹구는 것에 집중했다. 제 눈 아래 스콧이 피식- 하고 웃는 것이 들려왔다.
"여기서 일하려면 시선 갈무리부터 잘 하는 게 좋을 거요."
".... 죄송합니다."
"무얼 또 죄송해. 됐어요. 당신 전임은 더 심했어요. 그것 때문에 잘렸지만."
눈을 뜨고 체콥을 위로 올려다보며 스콧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체콥은 그 말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자 스콧은 그런 어수룩한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드는 듯 살풋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가 제법 온화하다. 어제 저녁 바깥사람에게도 본즈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선한 미소였다. 체콥은 머릿속에 문득 우후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널 뽑은 거 안주인이야.
"다리는 어쩌다가 그러신 거예요?"
뇌를 거치지 못한 말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고 그 소리가 욕조 벽에 부딪혀 제 귀로 들어오자 체콥은 합- 하고 소리를 내서 입을 다물고 만다. 손에 들려있던 샤워기가 덜그렁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스콧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체콥을 올려다보았다. 절대로 먼저 묻지 마. 술루의 경고가 떠오르자 체콥의 얼굴이 울상이 된다. 떨어진 샤워기로부터 뿜어져 나온 물줄기가 체콥의 덜덜 떨리는 다리 밑 바짓단을 적시고 있었다. 하수구로 추락하는 물줄기들처럼 이미 뱉어진 말을 다시 주울 수는 없었다. 사과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덜덜 떨고만 있자 욕조에 앉아있던 스콧의 동그랬던 눈이 반으로 휘어진다. 그러더니 온 욕실이 다 울릴 정도로 웃음을 터뜨리고야 만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크게 울리자 닫혀있던 욕실 문이 벌컥 열렸다. 고개를 돌아보자 본즈가 놀란 눈을 하고 상반된 얼굴을 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뭐야? 무슨 일이야?!!"
"아뇨, 푸흡.. 아니, 아냐... 너무 생각했던 것보다 아직 순진한 것 같아서... 흐흐... 의사양반, 나 좀 일으켜 줘요."
손을 뻗는 스콧을 보며 본즈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체콥을 한 번 훑어보더니 군말 없이 그를 욕조에서 꺼냈다. 가볍게 그를 품에 안아 욕실 밖으로 나가며 체콥에게 여기 치우고 나오라는 말을 놓치지 않았다. 허둥지둥 샤워기를 꺼 제 자리에 놓고 욕조에 찬 물을 빼낸다. 멍청이, 바보, 천치, 체콥은 당장이라도 제 머리를 쥐어박을 것처럼 스스로를 타박했다. 재빨리 욕조를 정리한 그는 젖은 바짓단을 대충 짜내고 얼른 욕실 밖으로 나왔다. 침대에 앉아 있는 스콧과 그런 그의 물기를 닦아주던 본즈의 시선이 그에게로 닿는다. 체콥은 쭈뼛거리며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게..."
"아뇨. 나도 웃기긴 했지. 여기 있는 사람 중에 그거 물어보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거든. 궁금하지도 않은 건지, 아니면 돈만주면 그만이고 나는 관심도 없는 건지..."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리고 무슨..."
"10년 전, 동상. 이정도면 궁금증이 해결 되겠수?"
이불을 걷어 내고 제 다리를 질질 끌어 그 안으로 들어가며 스콧이 담담하게 답을 했다. 그 말에 체콥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눈을 마주한 스콧은 무뎌진 상처만큼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불 안에 자리를 잡고 앉아 저만치 있는 옷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체콥은 마땅히 답도 하지 못한 채 허둥거리며 옷을 건네주었고 그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시선을 둘 곳이 없어 눈을 굴리다가 침대 아래 무릎을 꿇고 앉은 본즈를 본다. 스콧의 몸을 닦고 있던 수건을 꾹 쥔 채 저는 아랑곳없이 스콧을 보고 있는 그의 멀쩡한 개암색 오른쪽 눈이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 서재에서 책 한 권만 가져다 줘요. 의사양반도 나가보고... 옷을 다 꿰어 입은 스콧이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본즈는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 나가는 체콥의 뒤를 따라 본즈 역시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고 나자 본즈는 아무말없이 그 자리에 서있었다. 저한테 한 소리라도 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해서 가만히 옆에 있던 체콥은 본즈가 별 말이 없자 서둘러 안주인의 지시를 따르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2층 복도를 막 빠져 나오려는데 뒤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린다.
"야, 너."
뒤를 돌아보자 자신이 있는 밝은 홀 쪽과는 달리 어둡기 그지없는 복도의 반대편에 서서 저를 노려보고 있는 본즈가 보인다. 두 눈동자가 어둠을 머금어 어느 것이 의안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새까맣게 가라앉아 있다. 그 눈만큼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건 어제의 신경질 적인 모습이라기보다는 분노와 당황, 여러 가지 감정들이 혼합되어 어지럽게 그의 얼굴을 구성하고 있었다. 마른 침을 삼키며 체콥이 가만히 그를 보고 있자 본즈가 씨근거렸다.
"조심해."
그렇게 언질을 하고 제 방인 왼쪽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쾅- 하고 문이 닫힌다. 체콥은 졸였던 숨을 파하- 하고 내쉰다. 그는 아무도 없는 복도를 한참이나 보다가 1층으로 내려왔다. 체콥은 제 머리를 홀로 쥐어박으며 말을 조심해야지 하고 혼자 다짐처럼 중얼거렸다. 1층 서재로 내려와 제법 두꺼운 책 한 권을 가지고 막 나가려는데 서재의 창밖으로 하나 둘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서재의 창밖은 현관 앞의 커다란 정원과는 달리 아무 것도 없는 작은 공터와 철창으로 된 담장 너머 또 넓은 공터뿐이었다. 지긋지긋한 눈, 그리 중얼거리던 체콥의 눈이 저 먼 공터 뒤 쪽을 물끄러미 본다.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 눈을 가늘게 뜨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온다. 이게 다 잠자리가 뒤숭숭 했던 탓이라고 체콥은 생각했다.
S#11.
묵직한 피아노 음이 서재 가득 울렸다. 어색하게 선 체콥은 가만히 주인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것을 보았다. 손가락 하나가 없다고는 하나 천재는 천재인지 다채로운 음을 매끄럽게 이어나간다. 저 정도면 왜 피아니스트를 그만뒀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의 실력이었다. 피아노를 치던 커크가 슬핏 곁눈질로 체콥을 보았다. 긴장을 잔뜩 한 체콥의 두 손이 꿈지락거리는 것을 보더니 피식 웃는다. 하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만큼 체콥에겐 여유가 없었다. 파란 눈과 마주치자 이상하게 몸이 바짝 굳는다. 왠지 그 눈이 자신의 모두 꿰뚫어 보는 것 같아서 조마조마했다. 체콥은 땀차는 손으로 무릎 위 바지 천을 구겼다.
"너무 긴장하지 마요. 뭘 어쩌자고 부른 것도 아닌데."
마지막 음을 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커크가 웃는 낯을 했다. 그는 느긋하고 여유로운 걸음으로 쇼파에 앉아 반대편 자리를 가리켰다. 앉아요. 그 말에 체콥이 눈치를 보며 자리에 앉는다. 꼿꼿하게 핀 체콥의 허리와는 다르게 커크는 여유롭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한껏 늘어진 자세를 하고 있었다. 그의 파란색 눈동자가 가만히 체콥을 바라보았다.
"그냥, 우리 집사람 돌봐주는 분이니까 한 번 개인적으로 인사라도 드려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편하게 말해요."
"아, 네..."
"낮에 스팍 왔다 갔죠? 워낙 사교성이라곤 없는 놈이라 아마 불편했을 텐데..."
"아, 아닙니다."
"그래서, 듣기로는 고아라던데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에요?"
거리낌 없이 커크는 체콥의 치부를 입에 담는다. 조심성을 요구하는 사용인들의 조약과는 상반된 태도였지만 달리 반박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체콥은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 사고로 부모님을 잃게 되어서..."
"저런..."
"사실 잘 기억도 안나요, 그 때 일은. 어쨌든 운 좋게 시설에 안 넘어가고 한 후원자가 지원해줘서 어느 가정집에 얹혀살게 되었어요. 그러다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고, 지금 여기에 오게 된 거에요."
"그렇군요. 많이 힘들었겠네."
안쓰러운 듯 어조를 내리는 커크의 말은 그 의미와는 달리 무미건조하게 느껴졌다. 체콥은 그것이 그저 안 좋은 과거 일을 이야기 하는 것에 대해 주인이 조금 당황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나 그랬다. 체콥의 처지를 듣게 된 사람들의 대부분은 침묵하거나, 놀라거나, 회피하기 일쑤였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스팍이 제시했던 계약서를 떠올린다. 을은 갑에게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일절 발설하지 않는다, 라는 조항을 떠올리자 체콥은 다시금 자신이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닫고 사색이 되어 버렸다.
"아, 그, 죄송합니다. 계약서에..."
"아, 괜찮아요. 계약서야, 뭐. 그리고 그런 건 형식적인 거잖아요. 안 그래요?"
싱긋 웃으며 손사래를 치는 커크를 보며 체콥은 한시름 놓았다는 듯, 낮은 한숨을 폭- 쉬었다. 이만 나가봐요. 들을 말은 다 들었다는 듯 손을 휘젓는 커크를 보며 체콥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를 하고 서재 밖으로 나왔다. 닫히는 문의 유리 너머 심각하게 굳어있는 커크의 얼굴을 흘끗 보고 그는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이만한 게 다행이라 생각하며 제 입술 위를 손으로 몇 번이나 내리치며 쪼르르 반대편 식당으로 갔다. 무슨 일이야? 하고 묻는 술루를 향해 체콥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휘저었다. 앞으로는 입도 뻥끗 할 생각조차 안하는 듯 입술을 꾹 닫고 제 자리로 돌아가 닦다 만 그릇을 마저 닦았다. 의뭉스러운 시선으로 체콥을 보던 술루 역시 흥미를 잃은 듯 다시 제 일에 열중한다. 넓은 부엌에 달그락 거리는 그릇 소리만 가득하다.
S#12. (Flash Back)
쉿- 어둠 속 검은 괴물이 이죽 웃으며 검지를 입술 위에 대고 속삭인다. 쉿- 조용히 해. 그 숨소리가 마치 뱀의 것처럼 소름끼쳐서 오도독 돋는 소름을 어쩌지 못해 체콥은 제 몸을 웅크리고 가만히 저 멀리 괴물을 바라본다. 괴물은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는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가만히 그를 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체콥이 입을 열라 하면 또 다시 뱀 같은 소리를 낸다. 쉿- 그러면 체콥은 다시 입을 닫는다. 끝끝내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했다.
S#13.
호출 소리가 울리는 탓에 체콥은 눈을 떴다. 아직 꿈이 젖은 듯 몽롱한 얼굴로 허우적 거리며 옷을 껴입는다. 흘끗 본 시계는 아직 새벽 두 시였다. 으으- 앓는 소리를 내면서 대충 옷매무세를 정돈하고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난다. 불을 켰다가는 집안사람들이 모두 깰 수도 있었기 때문에 서랍에 구비된 손전등 하나를 킨 채 체콥은 달렸다. 어두운 홀의 계단을 올라 까맣게 보이지도 않는 2층 복도를 지나서 문을 열자 고요한 방이 보인다. 창가 옆 침상을 본다.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는 침대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체콥은 덜컥 겁을 먹고 침대로 가까이 다가갔다. 두꺼운 이불 속 사람이 몸을 뉘었던 흔적은 있었지만 정작 있어야 할 사람은 없었다.
"여기야."
발도 없는 사람이 도대체 어딜 갔을까, 경찰에 신고 해야 하나, 그보다 주인에게 먼저 알려야 하나, 이런 생각을 빠르게 하고 있는데 침대 아래쪽에서 작은 숨소리 같은 목소리가 들리더니 침대 아래에서 새하얀 손이 뻗어 나와 체콥의 발등을 톡톡 쳤다. 기겁을 하며 소리를 지를 뻔 한 제 입을 막으며 체콥이 뒷걸음질을 친다. 하마터면 뒤에 있는 유리창과 부딪히며 큰 소리를 낼 뻔해서 체콥은 제 뒤를 한 번 쳐다보고 다시 아래를 본다. 천천히 몸을 숙이고 바닥에 납짝 엎드렸다. 그리고 덮은 침대보를 걷어내자 침대에 눅눅한 어둠 속 실루엣이 보인다. 체콥이 손전등으로 아래를 비추자 뻗은 손 너머 몸뚱이와 얼굴이 보였다.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며 체콥은 가만히 그를 보았다. 눈가가 빨갛고 주변에 눈물 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운 것이 분명했다.
"왜 여기 누워 계세요. 악몽이라도 꾸셨어요?"
"눈 뜬 현실이 악몽보다 더 해, 가끔 두 사람 없으면 여기에 있수. 아무 것도 안 보이면 이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좀 벗어나 있는 것 같거든. 내가 여기에 이러고 있는 거 아무도 몰라."
"...."
"얘기 할 거요?"
조심스럽게 묻는 말에 체콥은 고개를 젓는다. 모든 것을 통제 당한 채 집에만 있다면 침대 아래 어둠 속으로부터 위안을 찾는 것이 아주 이해되지 않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체콥의 속내를 아는 듯 스콧은 웃었다. 나가게 도와줘요. 하는 말에 뻗은 팔을 잡아당겨 그를 꺼냈다. 조금 다 밝은 곳으로 그의 몸뚱이가 드러난다. 흰 피부 위 주사 자국으로 가득한 멍들, 그 위로 울긋불긋한 울혈이 보였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고 순진한 체콥이라고는 하나 그 자국이 무엇인지 모르진 않아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스콧 역시 이를 의식 했는지 헐벗은 몸 위로 팔을 교차해 어떻게든 제 몸을 숨기려 한다. 어두운 달빛에 비추는 그의 귓가가 발갛게 달았다. 체콥은 그런 그가 너무 작고 가여워 모르는 척 그의 몸을 안아다 침대 위에 올려 준다. 침구 아래 몸을 누이고 스콧은 물끄러미 체콥을 올려다본다.
"미안하우, 귀찮게 해서..."
"아닙니다. 잠들 때까지 곁에 있을까요?"
"착하네..."
여전히. 그렇게 말하는 끝에 말은 들릴 듯 말 듯 흐리기만 했다. 체콥은 저를 알고 있냐고 묻고 싶은 충동을 꾹 참아 냈다. 대신 침대 옆으로 의자 하나를 끌고 와 앉았다. 제 옆을 지키는 체콥을 보며 스콧은 살풋 웃는다. 천천히 감기고 다시 떠지는 눈이 그 간격을 좁혀갔다.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내 고른 숨소리를 내며 깊은 잠에 빠진다. 잠에 빠진 안주인을 보며 체콥은 어깨 밑으로 내려간 이불을 올려주고 한참 자는 모양새를 보다가 저도 그 자리에 고개를 떨구고 잠이 들었다. 두 사람의 숨소리가 방 안을 고요히 채워갔다. 아슬아슬한 평화가 깃드는 새벽이 지나간다.
S#14.
"피곤하지 않수?"
손이 심심해서 붙인 취미인지 늘상 엮고 있는 긴 천 끈을 꼬며 스콧이 옆에 앉아있는 체콥을 향해 넌지시 물었다. 옆에 의자에 앉아 스콧이 건네준 단어 퍼즐에 집중하고 있던 체콥이 화들짝 놀라 옆을 보았다. 네? 하고 얼빠진 답을 하는 그를 향해 스콧이 웃으며 말했다.
"피곤하지 않냐고, 이렇게 지루하게 옆에 있는 거."
"아, 뭐... 전 오히려 좋아요. 밑에 있으면 잡일이 많아서..."
"농땡이 치기 좋다?"
"꼭 그런 건 아닌데..."
"것보다 그거 틀렸수."
콕 집어 막 쓴 단어를 가리키자 체콥은 또 끙- 하고 앓는 소리를 하며 들고 있던 연필 뒷부분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 모양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스콧이 옆 탁자의 서랍을 열어 무언가를 꺼낸다. 꽤 오래 되어 보이는 듯한 카세트 플레이어가 나온다. 이어진 이어폰 한 쪽을 체콥의 귀에 끼워준다. 이거 내가 좋아하는 노래인데, 들으면 좀 덜 지루할거요. 그리고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귓구멍을 통해 잡음 섞인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뚱땅거리는 피아노 소리가 들리고 떠드는 소리가 잠시 나더니 곧 어떤 남자아이의 느릿하고 무거운 음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묵직한 음과 경쾌하고 밝은 피아노 소리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또 어울어진다. 눅눅한 어둠이 깔려있는 무겁기만 한 이 집에 어울리지 않는 캐롤이 흘러나온다.
"중학교 때, 성탄절이면 전교생이 모여 합창대회를 하곤 했는데... 나 고등학교 1학년인가, 그 때 그 대회 연습한다고 저 양반이 반주를 하고 의사 양반이 노래를 불렀었거든. 하자고, 하자고 조르면 싫다, 싫다 하면서도 또 하면 잘하니까. 몰래 중학교에 숨어 들어가서 옆에서 둘이 연습하는 걸 듣고 있다가 몰래 녹음을 했수. 빈대처럼 찰싹 붙어 있는 게 일상이 되어서 그런가, 그때는 없으면 또 허전하고 그래서 이걸 끼고 다니면서 들으면 또 같이 있는 기분이 들고 그러더라고..."
그의 나이를 가늠했을 때 그 과거가 그리 멀지만도 않을 텐데, 스콧은 영 돌아오지 않을 시간들을 되새기는 듯 저 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리운 듯 처지는 그의 목소리와 이어폰으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가 한데 섞인다. 선배, 뭐해요? 학교 이렇게 빠져도 되는 거예요? 본즈, 왜 그런 말을 해? 선배 여기 있음 더 좋지. 선배, 내가 선배 좋아하는 노래 더 쳐줄테니까 여기 있어요. 네? 얌마, 선배가 너야? 너 그리고 선배한텐 꼬박꼬박 선배라고 하면서 왜 나한테는..!! 한 살 차이로 쪼잔 하게 그런다, 아하하- 그만해, 그만. 니들은 질리지도 않냐. 아직은 앳된 어린애 같은 남자 아이들의 소리가 섞였다. 곧이어 또 다시 경쾌한 피아노 치는 소리가 들리고 목 나간다고 투덜거리는 아이가 다시 노래를 불렀다. 이리저리 긁힌 자국이 있는 오래된 카세트테이프처럼 잡음이 섞인 낡은 소리들이 시간의 벽에 부딪혀 건조한 스콧의 목소리로 변모해 바스라 지는 것 같았다. 괜한 슬픈 기분이 들어 울적하게 쳐진 체콥을 보며 그는 들고 있던 끈을 내려놓고 웃으며 말했다.
"산책가요."
S#15.
갑자기 산책을 간다는 말에 부엌 아주머니는 퍼득 놀랐다. 눈 오는 날에는 좀처럼 안 나가시는데, 하는 말에 두꺼운 패딩을 챙겨 입고 온 체콥은 괜히 기분이 들떴다. 제가 한 건 별 것 없지만 어쩐지 안주인이 좀 밝아진 것 같아서였다. 2층으로 올라가 그를 안아들었다. 그 흔한 휠체어 하나가 없어서 산책 때면 늘 고용인들이 들어 날라야 한다면서 스콧은 투덜거렸다. 옆으로 안으려는 것을 스콧이 제지한다. 그렇게 안으면 금방 힘들어질 거요, 하더니 목에 두른 팔처럼 제 두 다리를 체콥의 허리에 감았다. 허리 아래를 받쳐 안자 금세 안정적인 자세가 되었다. 고목나무 매미 같다고 작게 중얼거리는 안주인의 말에 체콥은 웃으며 제 패딩으로 스콧의 몸을 폭 덮었다.
산책이라고 해봐야 눈 덮인 정원을 가로질러 걷는 것이 다였다. 지나는 사람이 없어 발자국 하나 없이 깨끗한 설원에 두 사람이 지나가고 한 사람의 발자국이 줄을 지어 생긴다. 발 아래로 눈 죽는 소리가 났다. 뽀드득 뽀드득 일정하게 나는 소리를 들으며 체콥은 품 안에 스콧이 떨지는 않는지 눈치를 살폈다. 다행이 그는 떨지도 않았고 오히려 고요한 숨소리만 내고 있었다. 숨이 닿는 목덜미가 간지러워 머리 안이 곰실거린다. 자요? 라고 물으니 그건 아닌 듯 아니- 하고 답하는 느린 대답이 들려온다.
"이러고 걷고 있으니까 어릴 때 생각나네요."
"...."
"너무 어릴 때라 기억은 안나는데, 부모님 살아 계실 때 한 번 있는 돈을 털어서 눈 많은 곳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거든요. 산 위에 산장이 있고, 그런 데였는데, 처음으로 제트스키라는 것도 타보고, 옆 산장에 다른 사람들도 놀러와서 같이 놀고 그래서 재밌게 놀았었거든요. 그랬는데 그 날 하필이면 눈보라가 와서... 기억은 잘 안나는데 아마 내가 길을 잃었었나봐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엄마가 절 찾긴 했는데, 그 눈발을 뚫고 가겠다고 이렇게 절 안고 걸었었어요."
"어머니는..."
"그 날 돌아가셨어요. 사실 그 이후 기억은 잘 안나요. 너무 충격을 받아서 잊어버린 건지..."
과거에 대해 언급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체콥은 그 날 내리던 눈보라처럼 흐린 과거를 이야기 했다. 아마 먼저 제 옛이야기를 꺼낸 스콧 때문일 것이다. 스콧은 그렇다할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았다. 다만 목에 두른 팔에 힘을 주어 그를 더욱 꼭 끌어 안아줄 뿐이었다. 기억에도 없는 엄마는 이랬을까 싶어 체콥 역시 웃으며 그런 그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눈 위로 제법 굵은 눈송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잦아든 줄 알았던 눈이 점차 더 많은 눈송이로 불어난다. 이만 돌아가요. 체콥은 그리 말하고 다시 발길을 돌린다. 소복이 쌓인 눈에 한 사람의 발자국이 찍혔다. 그 위로 새로이 눈송이가 올라온다. 그 흔적을 지우는 것처럼 그 위에 쌓여 또 다시 같은 모양의 정원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들이 그 길을 걸었던 것을 모르도록...
현관문에 가까워진다. 문 앞에는 담배를 태우고 있는 본즈가 보였다. 그는 가만히 서서 그들이 걸어오는 모양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층계로 올라오는 체콥 품에 안긴 그를 넘겨받을 듯 장초를 바닥에 끄고 두 팔을 벌렸다. 체콥이 품에 스콧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품 안의 스콧을 받아 안은 본즈가 제 손으로 체온이 내린 그의 몸을 녹이듯 문질렀다.
"추운 날 갑자기 왠 산책이야? 가뜩이나 면역력 약해져서 골골 앓으면서."
"그냥, 집에만 있으니까 답답해서 그랬수. 얘 나무라지 마요. 산책하는 내내 제 옛날 얘기를 해줘서 간만에 웃었으니까."
"옛날 얘기?"
현관문 안으로 들어 가면서 본즈가 제법 다정하게 묻는다. 체콥은 머리 위에 눈을 털어내고 2층 계단으로 오르는 두 사람을 본다. 본즈의 어깨에 기댄 채 스콧은 얇게 뜬 눈으로 체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표정이 아까와는 달리 묘하게 냉정했다. 체콥은 저도 모르게 그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입술이 열리고 혀가 굴려지면서 딱딱한 얼음만큼 차가운 말을 뱉는 것을 본다.
"같은 경험을 한 사람끼리 만나는 걸 보면 그래도 인연이란 게 있긴 있나보오. 길을 잃은 적 있데. 눈보라 치는 산장에서."
"....그래?"
"응, 저 애 일곱 살 때."
멈칫- 계단을 오르는 본즈의 발이 살짝 멈춘다. 딱딱하게 굳은 본즈의 등이 크게 요동치는 것을 체콥은 보았다. 그리고 가늘게 눈을 뜬 스콧이 가만히 시선을 돌려 본즈 하는 냥을 숨죽이고 본다. 마치 먹이를 앞에 두고 이를 세우는 독사 같이. 잠시 멈췄던 걸음이 다시 움직인다. 본즈는 스콧의 말에 여상한 듯 답을 한다. 그래, 어린데 고생했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본즈의 목소리 끝이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계단 끝에 올라온 그가 설핏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평소처럼 오래 마주하지 못한 채 피하듯 시선을 돌려 다시 걷는다. 체콥은 가만히 그들이 2층 복도로 사라지는 것을 보다가 발을 돌린다. 그러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문득 뒤를 돌아 이젠 아무도 보이지 않는 2층 위를 바라본다.
"일곱 살이라고 한 적은 없었는데."
왜냐면 제 기억에도 없는 나이였기 때문에.
S#16.
"너 제정신이야??!!!"
서재 쪽에서 큰 소리가 났다.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나자 부엌에서 접시를 정리하던 사용인 모두가 크게 몸을 움찔하며 부엌 너머로 시선을 주었다. 와락 소리를 지르는 본즈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달리 신경질 적이고 날이 서있었다. 저렇게 큰 소리가 나는 것을 보면 보통 일은 아닌가보다 싶어, 부엌에 있는 모두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넌 무슨 생각으로 쟤를 이 집에 끌어들여??!!!"
"본즈, 진정해. 다 듣겠어!!"
한층 차분한 커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고함을 지르던 본즈의 목소리는 누그러졌다. 둘 사이에 대화가 오가는 듯 했지만 부엌까지 닿는 것은 없었다. 체콥은 당장이라도 그 근처에 다가가 듣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누르며 한껏 귀를 열어 작은 단어 하나라도 들어보려 애를 썼다. 하지만 이런 노력이 무색하게 술루는 그에게 커다란 쟁반 하나를 넘겨주었다. 몸이 아프다며 저녁을 거른 안주인을 위한 간단한 요깃거리가 담겨져 있었다. 쟁반을 들고 부엌을 나와 건너편 서재를 물끄러미 보다가 결국 건진 것 하나 없이 체콥은 한숨만 쉬고 2층으로 올라갔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반쯤 몸을 일으킨 채 눈 내리는 창밖을 보고 있는 스콧의 모습이 보였다. 스콧은 문이 열리자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가 이내 안심한 듯 몸에 긴장을 풀었다. 아마도 밑에서 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두 분이 싸우시나 봐요."
쟁반을 탁자에 올려놓고 스프가 든 머그컵을 그에게 건네주며 체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다리 이 모양 되기 전까지는 기계공학과를 다녔수."
스프를 호로록 들이키며 스콧이 엉뚱한 답을 했다. 체콥은 가만히 서서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있었다.
"작은 피스들이 맞춰져서 하나의 움직이는 형태가 되고 그런 게 재미있었거든. 기계를 만지고 있으면 하루가 어떻게 가는 지도 몰랐을 정도로 푹 빠져 있었지. 나 이래봬도 촉망받는 학생이었소. 만약 다리가 이렇게 되지 않았으면 한 3년 정도 외부랑 차단된 연구기관에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게 얼마나 꿈같은 일일까 상상이나 돼요? 뭐, 어쨌든 못 하게 됐지만. 그래서 그런지 나는 여기 앉아서도 게임을 하면 퍼즐만 했수. 낱말 퍼즐이건, 그림 퍼즐이건... 그게 다 맞춰져서 하나의 그림을 만드는 게 기계 만지는 거랑 비슷해서 퍽 재밌거든."
"요즘은 안하세요? 여기 와선 본 적이 없는데..."
"지금은 새로운 퍼즐을 시작했는데, 그림도 낱말도 아닌데 이게 꽤 재미가 있어. 왜 모퉁이 퍼즐 하나를 딱 가져다 대면 나머지가 술술 맞춰지는 거 있잖수. 지금 그런 느낌이거든, 내가. 이제 거의 고지야. 거의 다 끝나가요."
하지만 스콧의 표정은 별로 기뻐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금방이라도 부스러져 허공에 사라져 버릴 눈가루처럼 아슬아슬하기만 했다. 그는 몇 모금 입에 대지 않은 스프 물리며 거의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이게 완성되면 별로 기쁠 것 같지가 않수."
그 말엔 어쩐지 확신이 담겨 있었다. 아래를 내려 보는 그의 얼굴에 슬픔이 가득해서 체콥은 그가 말하는 퍼즐이 다 완성 된다면 그가 울어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S#17.
새벽녘 울리는 차임벨에 체콥은 익숙한 듯 침대에서 벗어났다. 손을 더듬거려 옆에 개어 둔 옷을 집는다. 단정하게 챙겨 입고 하품을 쩌억 하며 방 밖으로 나왔다. 이제는 일상인 냥 부엌을 지나 2층층계를 올랐다. 어두운 2층 복도를 지나 정면에 문을 향한다. 막 문을 열려고 하는데 안쪽에서 벌컥 문이 열린다. 문 너머 보이는 것은 익숙한 방 안도 아니었고 보이는 이 역시 응당 보여야 할 사람도 아니었다. 제일 먼 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벗은 가슴팍이었다. 시선을 든다. 단단한 몸 위에 가운 하나만 걸친 주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체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새파란 눈과 마주치자 본의 아니게 놀란 체콥이 그런 시선을 피해 주인이 서있는 어깨 너머 방 안을 본다.
어두운 방 안 익숙한 침대에는 스콧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발 없는 다리가 허공에 힘없이 흔들렸고, 그 위로 자리 잡은 본즈의 두터운 몸이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허리가 움직일 때마다 허공에 다리가 퍼득거렸다. 살이 쩍쩍 붙는 소리와 거친 숨소리, 그리고 간혹 그 사이에 흐린 숨소리 같은 것들이 났다. 체콥은 놀란 눈으로 이를 보다가 저를 부르는 커크의 목소리에 퍼득 고개를 들어올렸다. 어둠 속에서 유독 빛나는 파란 눈에 이명이 진다. 입술이 웃고 있는데 눈이 웃지 않아 영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그 눈길에 이상하게 몸이 떨려 체콥은 시선을 내렸다. 그러다가 그의 단단한 가슴 위에 길게 그어진 손톱자국들을 보았다. 아직 피가 맺혀 여물지 않은 상처들이 땀과 섞여 울긋불긋 빛나고 있었다.
"새벽인데 미안해요. 와인 한 병만 가져다줄래요?"
"네? 아, 네."
제법 신사적으로 하는 말이었지만 체콥은 그 말이 지금껏 들은 어떤 말보다 차갑게만 느껴졌다. 서둘러 그 자리를 도망가듯 벗어나 1층으로 내려온다. 숨이 가쁘고 아까 봤던 충격적인 장면들이 자꾸 머리속을 스치며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와인을 가져다 달라고 했지만 주인이 좋아하는 와인이 무엇인지 체콥은 몰랐다. 그의 와인담당이 술루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를 불렀어야 함이 옳았는데 구지 자신을 부른 것은 어떤 이유였을까, 하는 의문을 떠올리다 제 볼을 두어 번 손바닥으로 내리치고 고개를 젓는다. 지금 와서 그런 것을 떠올려봐야 답이 나올 리 없었다. 그는 아무 와인이나 꺼내 서둘러 2층으로 올라갔다. 이번에는 그 앞에 서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체콥은 문 앞에서 조금 초조하게 발을 동동 구르다가 나무문을 한 번 두드렸다. 들어와요. 안에서 주인의 웃음 섞인 답이 돌아왔다. 체콥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마른침을 한 번 삼킨 후 문고리를 조심스럽게 돌렸다. 지옥문인 듯 평소보다 더 묵직한 나무문이 서서히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노골적인 소리들이 더 선명하게 체콥의 귀에 닿는다. 침대가 끼익끼익 들썩이는 소리와 처덕처덕 살이 붙는 소리들이 그의 귀를 괴롭게 만들었다. 남색 침상 위에 하얀 몸이 인형처럼 유린당하고 있었다. 다리 사이에는 본즈를 끼고 머리 위에 커크를 낀 채 스콧은 힘없이 흔들리다가 다가오는 체콥을 보며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발버둥을 친다. 그래봐야 썩 위협적이지가 않다. 두 다리는 본즈의 커다란 손에 붙들리고 두 팔이 커크의 팔에 깍지가 끼워져 아래로 짓눌린다. 쉬이, 스코티. 가만히 있어, 그래야 안 아프지. 그렇게 말하는 커크는 웃는 낯을 했다. 그리고 턱짓으로 본즈에게 체콥을 가리켰고 한참 추삽질을 하던 그는 뒤를 돌아 체콥을 보았다. 그리고 손을 내민다. 줘. 짧게 내려진 명령에 체콥이 어영부영 탁자 위에 와인을 올려놓고 코르크를 제거한다. 그리고 다시 뒤 돌아 본즈에게 이를 들려주었다.
병에 입을 대고 본즈가 술을 들이켰다. 격한 움직임 탓에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못한 와인이 입술 사이로 흐르고 그게 목선을 따라 내려와 단단한 가슴팍을 지난다. 그리고 양 옆에 끼고 있는 스콧의 무릎으로 흐른다. 와인이 무릎에서 종아리를 타고 흘렀다. 그리고 발목 아래 단면에서 뚝뚝 아래로 떨어졌다. 검붉은 빛이 마치 피인 냥 그 자리에서 떨어져 바닥을 물들였다.
입에 대고 있던 와인 병을 떼어내 본즈가 와인을 스콧의 가슴 위로 부어버린다. 심장께를 중심으로 붉은 빛이 완연하게 흰 몸 위로 퍼져 이불 위를 더 어두운 색으로 물들여 놓았다. 머리맡에 있던 커크가 고개를 숙여 그 위를 눅진하게 핥았다. 뭉근한 혀가 가슴께 위를 핥고 입술을 부벼 빨아들인다. 그리고 마킹을 하듯 이로 씹었다. 그의 이에 씹힌 하얀 몸 위로 빨간 자국들이 가득 남는다. 그의 아래 있는 스콧이 힘겨운 듯 흐느끼며 허리를 들었다. 그만해, 하지 마, 울음 섞인 웅얼거리는 발음으로 그가 애원하듯 말했지만 두 사람은 멈출 생각이 없어보였다. 오히려 커크는 제 손깍지가 껴있는 왼손 약지를 그의 입 안에 밀어 넣어 더 이상 발음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가슴께에서 입을 떼고 고개를 든 커크가 뒤에 있는 체콥을 향해 이죽거리며 웃었다. 하얀색 이가 인광에 비치는 파란 눈과 대비되어 소름이 돋을 만큼 무서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체콥은 더 견디지 못하고 인사를 꾸벅 한 채 그 자리를 벗어나 버렸다. 2층 어두운 복도를 지나 층계를 내려가는 그의 숨이 가빴다. 허덕허덕 거리며 그는 부엌을 지나 자신의 방으로 빠르게 들어간다.
제 방문을 등진 채 체콥은 한 참 동안 심호흡을 한다. 숨을 헐떡일 때 마다 아까의 장면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문 사이로 보였던 장면들 억눌린 하얀 몸과 앞뒤로 그를 짓누르는 두 남자, 푸른 색 수술대에 발버둥치는 흰 두 다리, 파란색 눈을 한 하얀 이의 괴물, 이 사이에 밀어 넣어진 손가락, 어두침침한 병원 복도를 가로지르던 제 작은 다리, 괜찮아, 괜찮아, 노래 부르듯 눈발에 묻히던 목소리, 흰 눈발 위에 길게 늘어지는 발자국, 저를 안고 걷던 엄마가 아닌 다른 이의 모습이-
우욱- 하고 토악질을 하며 체콥은 화장실로 들어가 변기를 부여잡고 안에 있던 것을 모조리 쏟아냈다. 머리에 피가 몰리며 어지럼증이 났다.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잊었던 기억들로 머리 안이 온통 꽉 차서 현재와 뒤섞인다. 극심한 두통에 머리를 붙잡고 체콥은 그대로 욕실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쿵- 하고 떨어지는 제 몸뚱이와 바닥으로부터 나는 소리에 지진이 난 것처럼 온 몸이 요동을 친다. 스르르 눈이 감긴다. 가물거리는 시야 너머로 들어오는 술루가 보인다. 체콥, 체콥!! 정신 차려!! 하고 저를 뒤흔드는 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체콥은 정신을 놓고 말았다.
S#18. (Flash Back)
아가, 너 혼자 왔니?
소복이 눈이 쌓인 산 위 나무로 된 산장 앞에서 아이는 손으로 눈 장난을 했다. 옆 산장에 놀러온 대학생으로 보이는 세 명의 남자 중 중 작은이가 아이에게 다가왔다. 혼자 놀고 있는 아이가 퍽 귀여운 듯 남자의 입가에 함박웃음이 지어진다.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아이가 손으로 눈을 조물거리며 뭉치고 있는 것을 본다. 아이는 남자의 질문에 등 뒤 산장을 가리킨다. 산장의 유리창 안쪽으로 식사를 준비하는 여인이 보인다. 아이의 어머니인 듯 아이를 향해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드는 모양을 보고 남자가 살풋 눈꽃처럼 웃었다. 그리고 가볍게 목례를 했다.
엄마랑 왔어? 아빠는?
쩨뜨스끼 타고 쩌어기 갔어.
말 잘하네. 몇 살이야?
일곱 짤.
형은 스코티라고 하는데 우리 꼬마는 이름이 뭘까?
파벨 쩨코프!
아이가 목소리를 높여서 제 이름을 말했다. 하하- 하고 남자는 아이가 귀엽다는 듯 소리 높여 웃는다. 뒤에서 그의 일행인 듯한 두 남자가 그를 부른다. 선배!! 거기서 뭐해요?!! 하고 묻는 말에 휘적휘적 손을 젓더니 무릎을 피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형은 저기 놀러왔으니까 심심하면 놀러와 알았지? 라고 말하며 아이의 곱실거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헝클어 놓았다. 저만치 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아이는 물끄러미 보았다. 먼 치에서 기다리고 있는 두 남자가 남자를 가운데 두고 서로 어깨동무를 한다. 뭉치는 눈덩이처럼 틈 없이 서로 붙는다. 산장으로 들어가는 세 남자 중 오른쪽에 있는 남자가 문득 아이를 돌아본다. 파란 눈동자가 아이를 한참 보다가 이내 웃는다. 입은 웃는데 눈은 접히지 않아서 괴기스러운 모양이 이상해 아이는 빽 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엄마를 찾는다. 식사를 준비하던 어머니가 놀라 나와 아이를 달랜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엉엉 울던 아이가 게슴츠레 눈을 뜨고 남자들이 들어간 산장을 본다. 아까 저를 보던 남자가 없자 그제야 안도를 하고 훌쩍이는 눈을 어머니의 어깨에 아무렇게나 비벼버렸다.
S#19. (Flash Back)
안녕, 하는 소리에 아이가 눈을 들었다가 파란색 유리알 같은 눈동자를 보였다. 깜짝 놀라 아이는 딸꾹질을 했다. 그러자 하하- 하고 소리 내어 사람 좋게 웃는다. 남자가 웃는 모습에도 아이는 경계를 풀지 않고 입을 꾹 닿는다. 저렇게 웃고 있는데 어느 순간 또 그런 괴기스러운 웃음을 지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이의 경계는 무시한 채 싱긋 웃은 남자가 저 멀리를 가리킨다. 손가락이 설원 너머 나무가 우거진 곳을 가리킨다.
아까 너랑 놀던 그 형이 보물 찾으러 간다고 저기로 갔는데 좀 불러 올래?
말똥거리는 눈으로 남자가 가리키는 곳을 본다. 설원을 넓었고 나무가 우거진 숲은 너무 멀어보였다. 하지만 하얀 도화지 같은 눈밭은 아이의 흥미를 돋우기엔 충분했다. 당장이라도 눈 위에 발자국을 찍고 싶은 마음에 설레는 아이의 볼이 빨갛게 달았다. 아이는 뒤를 돌아 부모님이 있을 산장을 본다. 부모님은 무얼 하는지 창가에서 보이질 않는다. 아이는 고개를 돌려 다시 저 너머를 보았고 파란 눈을 한 남자를 보았다. 저녁 먹어야 하는데 안 오잖아. 그 형도 네가 오면 좋아할 거야. 형 오면 너네 엄마 아빠랑 다 같이 밥 먹자. 형들 맛있는 거 많이 사왔어. 그렇게 하는 말이 참 간사하다. 남자의 말에 아이는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파닥거리는 걸음으로 눈을 밟고 뛴다. 저만치 가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자 남자는 얼른 가라는 듯 손짓을 한다. 그걸 보고 다시 아이는 눈을 밟는다. 아무도 밟은 자국이 없는 하얀 눈 위로 아이의 작은 발자국 하나만이 오롯이 담긴다.
S#20. (Flash Back)
검은 숲에 어둠이 내렸고 아이는 홀로 남아 나무 아래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눈은 점점 거세게 오고 있었고 눈발에 가려져 제가 온 길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춥고 다리가 아프고 어둠이 무서워 엉엉 울었다. 엄마- 아빠- 하고 불러보지만 공허한 아이의 외침은 숲을 떠돌 뿐이었다. 훌쩍이며 나무 밑동에 자리를 잡고 아이는 덜덜 떨었다. 자꾸 졸음이 와서 조금만 자고 일어나면 엄마랑 아빠가 저를 찾지 않을까 하는 짧은 생각을 했다. 그러고 있는데 저만치서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체콥!! 체콥!! 하고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어떤 사람이 보인다. 엄마아- 하고 크게 울며 소리 지르자 그 그림자 진 실루엣이 저를 향해 다가온다. 눈물로 흐려지는 시야에 아까 제가 찾던 형이 보이기 시작했다. 엄마아- 하고 아이는 크게 울었고 남자는 아이를 끌어안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괜찮아, 괜찮아, 하고 아이를 달레는 남자의 목소리는 많이 지쳐있었고, 아이는 그저 그 품에 안겨 엄마- 엄마- 부르며 엉엉 울기만 했다.
S#21. (Flash Back)
괜찮아, 괜찮을 거야.
파묻힌다. 남자의 목소리는 섹섹 거리는 숨소리 같이 작았다. 바닥에 계속해서 쌓여가는 거센 눈보라에 먹히는 목소리였지만 아이의 귀에는 선명하게 들려왔다. 아이는 바닥에 푹푹 빠지는 남자의 다리를 물끄러미 본다. 아이와 남자를 한데 감싸는 웃옷에 비해 바지 밑단은 형편없이 얼고 젖어 있었다.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이쯤 되니 괜찮다, 괜찮다, 하는 말이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함인지 저 자신을 위한 말인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남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설원을 가로 지르는 두 다리를 멈추지 못했고, 남자의 품에서 추위를 피하는 아이의 얼굴은 이 위험한 상황을 모르는 듯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오히려 의아한 듯 아이의 눈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가 등지고 있는 어깨 너머 눈발로 흐려진 저 먼 곳을.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이 남자의 어깨를 몇 번이나 쥐었다가 펴지길 반복했다.
저 어깨너머 멀리 파란 눈의 괴물이 보인다. 아무래도 남자에게 말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러질 못한다.
쉿- 어둠 속 검은 괴물이 이죽 웃으며 검지를 입술 위에 대고 속삭인다. 쉿- 조용히 해. 그 숨소리가 마치 뱀의 것처럼 소름끼쳐서 오도독 돋는 소름을 어쩌지 못해 아이는 제 몸을 웅크리고 가만히 저 멀리 괴물을 바라본다. 괴물은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는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가만히 그를 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아이가 입을 열라 하면 또 다시 뱀 같은 소리를 낸다. 쉿- 그러면 아이는 다시 입을 닫는다. 끝끝내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했다.
S#22. (Flash Back)
괜찮을 거야.
파란 눈을 한 괴물이 눈발에 묻혀가는 남자를 안아들며 아이를 향해 이죽거리고 웃었다. 아이는 덜덜 떨면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한 말을 머릿속으로 생각한다. 거짓말. 제 아버지가 타고 온 제트스키를 몰고 있는 다른 남자와 그 옆에 올라탄 괴물은 아까부터 저들이 쓰러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기어이 남자가 정신을 잃고 나서야 슬금슬금 다가와 그들을 뒤에 태운다. 괜찮을 거야. 그렇게 말하는 괴물을 향해 아이는 묻고 싶었다. 이걸 몰고 산장에 갔던 제 부모님은 집어 삼켜 버린 거냐고. 그러며 저 멀리 시선을 돌린다. 눈발이 날리는 설원 너머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었던 어느 쯔음을 계속해서 바라보았지만, 부모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S#23. (Flash Back)
병원 안이 분주하다. 앰뷸런스에서 내리자마자 아까 제트스키를 운전하던 남자가 다가오는 간호사에게 긴급하게 소리를 지른다. 동상환자야. 당장 수술 방 잡아, 다리 달린 침대에 실려 가는 남자는 조금 정신이 들은 듯 가물거리는 눈을 떴다 감았다 반복한다. 형아- 형아아- 아이는 울면서 그 뒤를 쫓아간다. 간호사가 아이를 말려보지만 부모 없는 아이가 메달릴 곳이라고는 실려 가는 남자 하나뿐이었다. 고개를 떨군 남자의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다. 남자는 그 입술을 하고도 입 꼬리 끝을 올려 웃는 낯을 한다. 하지만 그 미소와는 달리 상황은 심각했다. 발을 검사하던 의사 하나가 다급하게 말했다.
발이 괴사하고 있어요. 오른쪽을 절단 해야 합니다.
동의를 구하듯 의사가 남자를 향해 상황을 설명했다. 하지만 제 다리를 절단한다는 데도 남자는 이 상황이 좀처럼 인식이 되지 않는지, 아니면 이런 상황에서 울고 있는 아이가 더 걱정인지 자꾸 아이에게 뻣뻣한 손을 뻗는다. 차가운 손이 아이의 고사리 같은 작은 손에 쥐어진다. 아이의 손바닥에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가락 끝이 닿는다. 그것이 동아줄인 냥 아이는 그 손가락을 꽉 잡았다.
아가. 괜찮아.
힘없이 쳐져가는 목소리로 남자가 아이를 부른다. 그리고 한참 제 귀에 중얼거리던 그 주문 같은 말을 했다. 괜찮아, 괜찮아 하고.
나 기억해 줘야 돼. 알았지?
마지막 유언처럼 그 말을 남기고 남자는 아이에게서 멀어져간다. 잡혔던 손이 놓아지며 힘없이 떨구어진다. 침대가 저만치 수술 방 너머로 굴러가고 이내 수술방 안으로 먹혀 들어갔다. 흔들리는 수술방의 문 너머로 밀려들어가는 초록색 의사들을 행렬이 이어진다. 아이는 그 자리에 서서 남자가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쩐지 설산으로 사라진 부모님처럼 남자가 영영 돌아오지 못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 아이는 한참동안 그 자리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S#24. (Flash Back)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들어갔던 의사들이 하나 둘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마스크 아래 가려진 입으로 수근거리겨 저들끼리 속삭이는 의사들의 표정은 좀처럼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의사들이 사라지고 한 의사가 다른 의사가 나갔던 그 길을 돌아 들어간다. 아이는 엉엉 울며 의사의 발을 잡고 늘어진다. 선생님, 선생님 하고 우는 눈으로 위를 올려다보자 수술 마스크를 쓰고 있는 의사가 개암색 눈으로 아이를 내려다본다. 형아 살려주세요, 형아 살려주세요. 아이는 고장 난 인형처럼 우는 입술 사이로 그 말만 웅얼웅얼 거렸다. 아이를 보는 개암색 눈동자가 불안한 듯 사정없이 흔들린다. 꼭 잡은 아이의 손을 뿌리치지도 못한 채 의사가 한참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뒤에서 손이 불쑥 들어와 아이를 잡아챈다. 형들 방해하면 안 돼. 뒤를 돌아보자 파란색 눈의 괴물이 이죽거리면서 웃고 있다. 괴물은 의사를 향해 손을 저었고 의사는 머뭇거리다가 수술방 안으로 들어갔다.
괴물은 아이를 복도 의자에 앉혔다. 착하지, 하고 아이를 달래는 괴물의 얼굴에 기쁨이 만연했다. 입 꼬리는 좀처럼 내려올 줄을 모르고 눈은 반으로 접혀 있었다. 네 덕분에 일이 쉽게 되었어. 진짜 고마워. 내가 너 어려울 일 없이 잘 자라게 해줄게. 그 때 못 찾았던 보물 많이 안겨 줄게. 그렇게 말하며 아이의 곱실거리는 머리카락을 커다란 앞발로 쓰다듬었다. 아이는 울음소리를 내지도 못한 채 덜덜 떨었다. 가시지 않는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웃고 있는 괴물의 얼굴이 기괴하고 흉측해서 무서웠다. 아이의 시선이 남자가 사라진 수술실로 향한다. 왠지 저 안으로 들어간 남자에게 무슨 일이 생길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득 들어 아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괴물의 괴성이 들려왔지만 아이는 멈추지 않았다.
수술실 문이 열린다. 수술실 테이블 위에 하얀 몸이 보인다. 쭉 뻗은 두 개의 다리 중 발목 아래 발이 없는 오른쪽 다리가 보였다. 하지만 의사는 이상하게 왼쪽 다리 앞에 자리를 잡고 서있다. 이미 왼쪽 발목의 살이 반쯤이 잘려나가 있었고 뼈를 자르려는 듯 의료용 톱을 들고 있던 의사는 당황한 듯 수술실에 들어온 아이를 본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형아!! 형아!!! 아이는 수술실 테이블로 다가가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아까 잡았던 손을 잡아 흔들자 누워있던 남자의 손가락이 움찔 거린다. 운이 나쁘다고 해야 할지 좋다고 해야 할지, 마취가 풀린 듯 돌아갔던 고개가 올라오고 남자의 손이 아이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그건 순간일 뿐이었다. 뒤이어 들어온 괴물이 아이의 뒷덜미를 낚아채 저만치 던져버린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려는 남자를 억누른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는지 남자가 마취로 어지러운 정신에도 몸부림을 친다. 하지만 마취가 풀리지 않은 몸은 움직이지 못했고 힘없이 허우적거리는 손을 들어 입을 막고 있는 호흡기를 떼어 냈다. 버둥거리는 팔에 꽂힌 주사바늘을 뽑혀졌다. 남자의 손에서 튀는 핏방울이 헐벗은 하얀 가슴 위를 물들였다. 제 손을 잡으려는 괴물의 손을 피해 옆 테이블을 더듬어 잡히는 것을 모조리 허공으로 던져 버렸다. 날카로운 메스와 수술 기기들 같은 것들이 튄다. 아악!!! 괴물을 도우려 위로 올라오던 의사가 제 눈을 쥐고 비명을 질렀다. 의사의 왼쪽 눈에 작은 메스가 꽂혀 있다. 씨발, 하고 욕지기를 한 괴물이 남자의 두 손을 내리 누른다. 쉬이, 선배. 가만히 있어요, 그래야 안 아프지. 억눌린 남자가 어눌한 혀로 계속 중얼거린다. 싫어, 하지 마, 그만해, 같은 말들이 두서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게 듣기 싫은 듯 괴물이 제 손가락을 남자의 입 안에 밀어 넣었다. 혀를 누른 채 새파란 인광을 빛내며 괴물이 바닥을 구르는 의사를 향해 말했다.
잘라, 빨리 잘라!!!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르는 괴물을 보고 피 바닥을 기던 의사가 톱을 집어 든다. 의료용 톱이 위잉 소리를 내며 기괴한 소리를 냈다. 의사가 망설임 없이 반쯤 잘린 살 부위 아래로 톱날을 집어넣었다. 피로 검붉게 물든 초록색 수술대 위에 몸이 경련한다. 아이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부들부들 떨리는 남자의 새하얀 손을 보았다.
발목이 끊어졌다.
와드득- 이에 갈린 손가락 잘리는 소리가 났다.
S#25. (Flash Back)
온 몸에 피를 묻힌 채 병원의 로비에 서성이는 아이를 보며 얼굴 모르는 어른들이 다가와 묻는다. 얘, 너 부모님 어디 있니? 하지만 아이는 넋을 놓은 듯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멍하니 바닥만을 보고 있다. 아이의 부모를 찾는 듯 어른들끼리 수근 거리는 목소리는 아이의 귀에 닿지 않았다. 아이는 가만히 제 손을 보고 있다. 빨간 피로 물들어 살색을 알아보기 힘든 제 손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로비에 있는 TV를 보았다. TV에서 아나운서가 무심한 말로 오늘의 지역 뉴스를 말해주고 있었다. 지난 밤 몰아친 눈사태로 인해 실종되었던 시신 두 구가 발견되었다. 부부로 보이는 남녀의 신원은 불분명했다. 조사 결과 타고 올라갔다던 제트스키의 행방도, 함께 있었다던 아이의 행방도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걸 마지막으로 아이는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아이는 그 날에 대한 기억은 까맣게 잃어 버리고 말았다.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한 외상증후군이라고 말하는 의사의 옆에서 파란 눈의 남자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괜찮아, 부모님 없어도 형이 알아서 잘 처리 해줄게. 남자의 손이 아이의 곱실거리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머리를 쓰다듬는 남자의 왼쪽 네 번째 손가락은 온데간데없었다.
S#26.
눈을 뜨자 낯익은 천장이 보였다. 빛이 들어오다가 다시 멀어졌다 다시 가까워지고 흐린 시야가 점점 또렷해진다. 정신이 들어? 점점 현실로 돌아오는 체콥의 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뻣뻣한 고개를 돌리자 옆에 앉아서 핸드폰을 두드리고 있던 술루가 힐끔 체콥을 보았다. 체콥은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일으키자 아담한 제 방의 풍경이 보였다.
"저 얼마나 잤어요?"
"하루 종일. 걱정 마, 하루 정도는 나 혼자 처리할 수 있어. 지혜열이래. 어린놈이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아서..."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술루는 말끝을 흐렸다. 어정쩡하게 하는 그 말이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외면해야하는 제 처지를 대변하는 듯 했다. 술루는 핸드폰을 제 포켓 주머니에 밀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당히 오늘까지 쉬고 내일부터는 일 해, 라고 말을 하고 돌아 서려다가 멈칫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다. 모처럼 늘 무표정이기만 했던 술루의 얼굴에 약간의 미안함과 또 속상함이 섞여 있는 애매한 표정이 담겨 있었다.
"경고하는 거야, 그거. 더 가까워지지 말라고, 짐승새끼들 마냥 영역표시 하는 거지. 네 전임도 그거 보고서 도망갔어. 근데 도망간다고 끝나는 거 아냐. 지금쯤 그 사람 어디 땅 밑에 묻혀 있을지 모를 일이고... 미리 말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미안하다."
"...괜찮아요."
씁쓸한 사과를 남기고 술루가 나갔다. 문이 열리고 닫힌다. 곧 정적이 인다. 체콥은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고 앉아 가만히 제가 꿈처럼 꾸었던 지난 기억들을 되새긴다. 그것이 제가 정말 기억하는 것들인지, 아니면 그 충격적인 장면을 보고 제 머리가 멋대로 상상해 만든 허구의 기억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아까까지 졸음과 꿈결로 눅진하던 머리 안이 기이하게 또렷해지고 이 집에 들어오며 의문뿐이었던 모든 일들에 답이 달리며 확신이 생겼다. 그리고 이제는 확인하는 일만 남아있다.
망설임 없이 체콥은 이불을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나처럼 흰 와이셔츠와 바지를 껴입었지만 평소와는 달리 매무새는 별로 단정치 못했다. 방을 벗어나 부엌을 가로질러 2층 계단을 오른다. 시간을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온통 어두침침한 것을 보면 한 밤인 것이 분명했다. 그는 어두운 2층 복도를 지나 정면의 문을 열었다. 그 안에 무엇이 펼쳐질지 두려우면서도 문을 여는 손에는 망설임이 없다. 다행이 제가 봤던 충격적인 장면이 반복되지는 않았다. 고요한 방 안 모처럼 창가에 비추는 달빛이 들이는 침대 위 스콧이 앉아있다. 늘상 엮던 천으로 엮은 끈의 가장 마지막 매듭을 짓고 고개를 들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마도 평소라면 아직까지 안 주무셨냐는 둥, 또 악몽을 꾼 거냐며 물었겠지만 체콥의 입은 본능적으로 아까 꿈에서부터 입가를 맴돌던 말을 뱉어냈다.
"분명 오른 쪽 다리를 자른다고 했었어요."
그 말에 스콧이 가만히 그를 보다가 웃는다. 그 웃음이 울음처럼 일그러지고 점점 흐릿한 회갈색 눈동자에서 물기가 넘친다. 눈물이 방울방울 끊임없이 샘솟으며 볼 위를 가로질러 턱 아래로 흘러내린다. 흐으흐- 하고 우는 듯 웃는 듯 스콧이 들릴 듯 말 듯한 흐느낌을 뱉는다. 이게 완성되면 별로 기쁠 것 같지가 않수, 그렇게 했던 그의 말처럼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애매한 표정을 하고 그는 제 손바닥 위에 얼굴을 묻는다. 알아요, 알고 있었어, 나도 알고 있었어, 하고 손바닥에 덧없는 진실을 고백하며 그는 서럽게 울고 또 웃었다.
S#27.
저 새끼 잡아!!! 저 멀리 등 뒤에서 괴물 같은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체콥은 뒤를 돌아보았다가 눈에 푹푹 빠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제법 큰 눈송이가 계속해서 내려 발을 붙잡고 품에 안고 있는 무게 때문인지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질 못했다. 그러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끙끙거리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을 거야, 스스로 그런 주문을 중얼거리며 발에 박차를 가하고 팔에 힘을 주었다. 체콥의 머릿속에 아까 스콧이 했던 말들이 스쳐지나갔다. 아직 동이 트기 전까지 흐느끼던 그는 새벽녘 건조한 침실의 공기처럼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 순간 팍- 하고 기억이 떠올랐을 때, 나는 내가 꿈을 꾼 줄 알았수. 그 때 내가 믿었던 것은 내가 눈길에 사고를 당해 길을 잃었고 동상으로 두 다리를 잃었다는 것뿐이었지. 나는 기억나지도 않는 이야기를 해주면서 저 둘이 말하더이다. 책임지겠다고, 알아서 처리 해주겠다고. 피아니스트라는 놈이 한 손가락이 없어지고 의사라는 양반이 눈 한 쪽이 없어졌는데 그 때 아무생각 없던 십 대 때처럼 웃으면서 그러더라고. 근데 또 그게 다친 게 알고 보니 내 탓이라, 그게 아주 틀린 말이 아니기는 했지. 기억은 나는데 물을 수가 없었어. 여기에 갇혀만 살다보니 내가 노망이 난게 아닌가 싶어서, 괜히 내가 신세진 두 사람한테 못할 의심을 하는 건 아닌가 싶었거든. 그래서 몰래 당신을 찾았지. 저 애 성격에 널 아주 내치진 않았을 테고 어딘가 눈 닿는 곳에 놔두었겠다 싶어서 찾아보니까 있더라고. 파벨 체코프라고 내가 기억하던 그 어린애 이름이. 그래서 불러들였는데, 말했잖수. 하나가 맞혀지면 줄줄이 따라오는 퍼즐처럼 모든 게 다...
나한테 미안해하지 마요. 그래도 살아 주어 고맙다 생각 하니까. 내 다리 이렇게 된 건 네 탓이 아니고, 네가 아니어도 결국에는... 그래도 정이 미안하면 내 부탁 좀 들어줘요. 딱 한 번이면 돼. 나중에 알게 되면 모지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죽는 사람 소원이라 생각하고 꼭 한 번만 내 부탁 들어줘요.]
그 목소리가 지나치게 간절해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체콥은 아직도 새파랗게 여명이 지는 새벽녘 눈발을 뚫고 걸음을 옮겼다.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서 다가오는 무리들이 보였다. 흰색 도화지에 점을 찍어 놓은 것처럼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다시 걷는다. 제 품에 안은 걸 고쳐 안고 그는 정처 없는 걸음을 옮긴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을 거야. 그렇게 주문처럼 중얼거리면서.
S#28.
"병신 같은 새끼."
저를 꿇어앉힌 술루의 얼굴은 울상이었다. 그렇게 말했는데 왜 그랬냐는 듯 책망하며 그러면서도 도망가는 그를 잡아야 하는 제 입장 때문에 그런 거라 체콥은 괜히 기분이 좋아져 저도 모르게 입 꼬리를 올려 웃어버리고 말았다. 저만치 다가오는 검은 양복의 사람들 사이로 두 명의 실루엣이 점점 가까워진다. 파란 눈을 한 괴물과 한쪽 눈이 없는 의사가 이 시린 겨울만큼 단단히 얼어버린 표정을 하고 체콥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술루를 옆으로 밀치며 체콥의 몸에 매달려 있는 것을 떼어 낸다. 파카로 꽁꽁 둘러싸인 커다란 것이 체콥의 몸에서 떨어졌다. 그것은 배낭이었다. 검은 남자가 배낭을 뒤집어 안에 내용물을 탈탈 털었다. 처음 떨어지는 것은 낡은 카세트 플레이어였다. 그 위로 종이로 뭉쳐 놓은 쓰레기가 한가득 떨어진다. 쓰레기들이 눈 위로 난자하는 것을 본 커크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그의 손이 체콥의 멱살을 잡아 올린다.
"어디 있어?"
"..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네가 데려 갔잖아. 집 어딜 찾아봐도 아무 데도 없던데!!!"
"무슨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다니까요!!"
"짐, 나와."
발악을 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체콥을 보며 뒤에 있던 본즈가 커크의 어깨를 잡아챈다. 그리고 잡고 있는 체콥의 멱살을 빼앗아 주먹을 날렸다. 퍽- 소리와 함께 아구를 얻어맞은 체콥이 눈 위로 몸을 굴리며 나가 떨어졌다. 체콥은 헉헉거리며 숨을 골랐다. 입 안이 터진 듯 비린 맛이 나는데 이상하게 추위 탓인지 아프질 않았다. 아니지, 이 정도에 아파할 것도 아니다. 생살이 뜯기고 눈앞에서 뼈가 갈린 사람도 있는데 고작 주먹 한 대 얻어맞은 것이 무어 대수겠는가. 체콥은 흐흐흐-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을 흘렸다. 미친 새끼, 입 안에 욕설을 씨근거리며 본즈가 다시금 멱살을 잡아 올렸다. 조폭 아니라고 하더니... 체콥이 중얼거리자 본즈가 다시 주먹을 날렸다. 다시 체콥의 몸이 바닥에 나가 떨어졌다.
"...침대 밑은 봤어요?"
"뭐?"
"삶이 좆같아서, 자기가 기억하는 게 꿈인가 싶어서, 당신들이 너무 악몽 같아서!!! 밤이면 둘 모르게 거기로 숨어 계시곤 했는데 봤냐고요. 침대 밑에 말이에요, 당신들이 그 분을 아무렇게나 모욕하고 유린하던 그 침대 아래...!!!"
악 쓰듯 뱉는 그 말에 두 사람의 표정이 멍해지더니 곧 뒤를 돌아본다. 저만치 먼 집으로부터 아주머니의 비명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됐다, 됐어. 체콥은 피가 흐르는 입술을 닦아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제 됐어, 하는 그 말을 들은 본즈가 체콥을 한 번 보더니 몸을 돌려 재빨리 달렸다. 아니 달리려고 했다. 어딜 가, 씨근거리며 체콥이 본즈의 바지 밑단을 잡았다. 본즈가 뒤를 돌아 입을 열려고 하다가 체콥과 눈이 마주치자 차마 내치지 못하고 할 말을 잊은 듯 멍하니 그를 보고 있었다. 개암색 오른 쪽 눈이 혼란스러운 듯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 날 수술실 앞에 아이의 망령이라도 본 듯 하얗게 질려버린다. 못 가, 어딜 가, 하고 중얼거리는 체콥에게 발이 날라든다. 커크의 발이 그의 복부를 가격했다. 그 발길질에 체콥의 몸이 떨어져 나갔다. 저를 둘러싸던 사람들이 다급히 집으로 다시 향한다. 푹푹 빠지는 눈밭을 뛰어 멀어지는 사람들을 보던 체콥이 입에 고인 피를 뱉어내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짚고 일어났다. 옆에 누군가의 팔이 끼워진다. 술루였다. 그는 말없이 체콥을 부축했다. 몸 사리는 거 아니었어요? 피식 피식 웃으며 묻는 말에 답이 없다. 그저 체콥이 발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웅장한 그림 같은 집은 처음 왔을 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체콥의 눈앞에 우뚝 서있었다. 현관 앞 계단을 밟고 올라와 현관문을 지나자 거대한 홀이 나왔다. 사람들이 하나 같이 천장 위를 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2층 난간에 앉아있는 스콧을 향해 있다. 마치 이 집에서 곧 날아오를 것처럼 가장 높은 곳에 군림한 채 모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를 올려다보는 모든 이가 올라가지도 그렇다고 어쩌지도 못한 상태로 밑에서 그를 올려다보고 있다. 거기까지 기어왔는지 헉헉거리는 숨을 내리 쉬며 그는 소매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냈다. 그렇게 힘겨워 하면서도 어쩐지 그는 어느 때보다 생기로워 보였다.
"힘들어도 운동 좀 더 할 걸 그랬수. 여기까지 기어오는 게 이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그렇게 독백을 하듯 혼자 중얼거리며 스콧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것을 꺼낸다. 색색의 천으로 엮었던 끈이었다. 고리모양으로 묶인 끝을 던지자 그것이 샹들리에에 걸렸다. 쭉 잡아당기자 절대 끊어지지 않을 것처럼 단단하게 고정되어 팽팽하게 묶인다. 똑같은 고리 모양으로 묶인 반대편 끝을 제 목에 걸고 조인다. 울긋불긋 울혈이 가득한 얊은 목에 색색이 수가 놓였다. 스콧은 끈을 잡아 당겼다. 허공에 샹들리에가 스콧의 쪽으로 가까워졌다.
"스코티, 선배, 제발..."
거의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절절하게 커크가 외쳤다. 그걸 내려다보는 스콧이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가까워진 샹들리에를 두 손으로 잡았다. 이제 난간에 매달린 엉덩이를 뗀다면 샹들리에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될 것이다. 본즈가 계단 위를 오르려 발을 뗀다. 그러자 스콧이 씁- 하고 경고성 소리를 낸다. 그리고는 십 대 어린 아이처럼 개구지게 웃었다. 마치 그 때로 돌아간 것처럼.
"내 유언도 안 듣고 싶어? 당장 여기서 떨어지길 바라면 올라오던지."
"선배, 제발, 왜 이러는 거예요, 왜...!!!! 우리 셋이 지금껏 잘 지내 왔잖아요!!!"
"남에 생 다리 잘라놓고서 할 말이 그것 밖에 없어? 그래, 우리 잘 지내긴 했수. 그 일이 기억나기 전까지 너희 둘이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었으니까. 나 때문에 희생하는 니들이 내 몸뚱이로 위안을 받는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랬는데, 흐으... 흐흐... 그렇게 날 속일 줄 알았으면... 이런 생각이 자꾸 드는 거야. 다리 잃고 죽겠다며 손을 긋던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고. 내 꿈 포기하고 손가락이나 빨던 나를 위로하면서 정말 안타깝긴 했는지. 이제 와서 고민을 해보니까 참 가소롭지. 근데 참 기만적이야. 눈 가리고 모른 척 하면 내가 진짜 모를 줄 알았수? 어차피 다리도 없고 휠체어도 없이 다른 사람 없이는 거동도 못하게 만들어 놨으니 절대로 도망가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는 거요? 어쩜 그렇게 네 맘대로 될 거라고 생각 했는지..."
체념처럼 넋두리를 늘어놓고 스콧은 엉덩이를 뗐다. 흔들리는 샹들리에를 따라 발 없는 몸이 이리 저리 흔들린다. 샹들리에를 붙잡고 있는 두 손은 너무 가늘어서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았다. 안 돼!!! 안 돼!!! 거의 절규처럼 커크가 울부짖었고 그 자리에 고목처럼 서있던 본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하자고. 있지, 나는 됐소. 다 됐어. 이제 그만 할래. 악몽인지 현실이니 모를 거 끝내고 싶수."
"미안해요, 선배."
끙끙거리며 가까스로 매달려서 체념의 말을 뱉는 그를 보며 본즈는 덜덜 떨리는 입술로 중얼거린다. 붉어진 눈 끝에 눈물이 주룩주룩 흐른다. 허공을 유영하는 스콧의 두 다리를 보며 계속해서 중얼중얼 의미 없는 사과를 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선배, 미안해요. 그렇게 고장 난 인형처럼 반복되는 말을 들으며 스콧이 웃었다. 하하- 하고 소리를 높여서 정말 즐거운 듯 웃는 그 웃음이 커다란 홀의 벽에 부딪혀 쩌렁쩌렁 울린다. 신의 심판의 소리인 듯이. 안 돼, 이렇게 끝내면 안 돼. 절규하던 커크가 바닥을 기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바닥을 짚고 일어나 계단 위로 오른다. 홀의 왼쪽으로 오르는 커크를 따라 본즈 역시 오른쪽 계단을 타고 오른다. 기던 움직임이 점차 빨라지고 대리석을 밟는 두 사람의 발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웃음소리만큼 크게 울린다. 체콥은 제 심장소리가 그 소리에 맞춰 뛰는 것을 느꼈다. 쿵쿵 가슴이 아프도록 뛰는 크게 심장소리와 눈앞에 벌어지는 이 촌극 같은 상황이 슬로우 모션으로 돌아간다.
"아가. 괜찮아."
하고 달랜다. 지난 기억과 다르지 않은 다정한 목소리로 제 밑에서 저를 보고 있는 아이를 부른다. 아이는 이번에는 도망가지 않았다. 그 두 눈으로 샹들리에에 매달려 있는 스콧을 보았고 이제는 됐다, 라는 익숙한 안도의 얼굴을, 기쁨의 눈물을 머금고 있는 그 미소를 보았다.
"나 기억해 줘야 돼, 알았지?"
그 물음에 체콥은 고개를 끄덕였다. 스콧이 눈을 감았다. 샹들리에에 걸려있던 손가락이 펴지고 팔이 떨어진다. 얇은 몸이 추락한다. 이 흑백뿐인 모노톤의 홀에 어울리지 않는 색색의 끈이 흐느적거리다 일자로 펴진다. 안 돼에!!!! 괴물의 울부짖음이 홀 가득 울렸다. 개암색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어 그 눈자위 위에 날개 짓을 하듯 펼쳐진 흰 몸을 담는다. 허공에 휘저어 지는 두 팔이 잠자리의 날개처럼 팔락거렸고 발 없는 두 다리는 깃털을 단 듯 가볍기만 하다. 공중에 잠시 뜬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그리고 그 몸은 곧 아래로 추락한다. 동시에 끈이 당겨졌다. 얇은 목에 걸린 매듭이 바짝 조여진다.
공중에 줄이 튀긴다.
와드득- 끈에 걸린 목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계단을 오르던 두 몸이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덜덜 떨며 그 자리에 허망하게 주저앉는다. 샹들리에를 따라 흔들리는 몸에는 미동이 없다. 발 없는 두 다리가 몇 번 경련을 하다 이내 끈 없는 인형처럼 축 쳐져 있다. 부엌 아주머니가 혼절을 했지만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모두가 미동 없이 그의 숨 끊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다. 체콥은 저를 부축하는 술루의 팔을 빼어 내고 가까이 그에게 다가갔다. 목이 나가 비정상적으로 꺾여있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어째 생전 지었던 어떤 표정보다 평온해 보였다. 그 얼굴을 보자 빠르게 뛰던 심장은 어느새 숨을 죽이고 체콥은 저도 모르게 이제 괜찮아요, 라는 말을 했다. 그의 눈가에 걸려있다 볼을 가로질러 아래로 떨어지는 눈물이 체콥의 손등에 떨어졌다. 떨어진 자리를 중심으로 온기가 퍼져 나간다. 이제 겨울은 끝난 듯 그 자리에 따스한 봄비가 내려온다. 이제 괜찮아요, 괜찮아, 그렇게 중얼거리며 체콥은 젖은 자리 위 멈추지 않는 눈물의 비를 쏟아내며 웃으며 또 울었다.
(Fade Out)
S#29.
(Fade In)
산 중턱 들녘에 꽃이 피었다.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난다. 산등성이를 덮은 흰 눈이 녹아 작은 개울을 만들며 흐른다. 그 물이 흙에 스미어 젖은 땅의 냄새가 났다. 땅위로 이끼가 끼었고 푸른 이끼 사이로 듬성듬성 싹이 돋아 있다. 일찌감치 봄을 알리듯 서둘러 꽃을 피운 이름 모를 야생화가 간간히 눈에 띄었다. 동장군이 저 멀리 도망간 자리 위로 남쪽에서부터 따스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산들 바람에 키작은 풀들이 살랑살랑 유혹하듯 끝을 흔든다. 그렇게 봄은 오고 있었다.
그 들녘을 등산화 하나가 길을 만들며 지나간다. 체콥은 굽은 허리를 한 번 피고 파랗게 물든 하늘을 한 번 올려다 보았다. 하늘 위 흰 구름이 둥둥 떠다니는 것과 따스한 햇살이 내리는 것을 눈에 들어온다. 으쌰- 하고 기합을 한 번 넣고, 봄 같은 미소를 띠며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배낭을 고쳐 매고 얼음이 녹은 젖은 흙을 밟아가며 그렇게 위로, 위로 올라갔다. 그가 밟는 자리에 길이 생긴다. 흔적이 남는다. 밟은 자리 햇볕이 흙을 말려 오래간 이 발자국들을 보존할 것이고 그 위를 또 다른 이들이 밟아 새로운 길이 생겨날 것이다.
그는 저 들녘 위 쪽 나무 산장으로 향한다. 그것을 산장이라고 하기엔 애메하긴 했다. 지붕의 일부는 뚫려 있었고, 내부가 다 보일 정도로 심하게 훼손된 곳이었다. 하지만 이미 자연에 일부가 되어버린 듯 그 위로 핀 푸른 이끼와 덩쿨들이 이 풍경과 제법 잘 어울러졌다. 체콥은 그 앞에서 한 참을 서있다가 푸른 잔디 위에 엉덩이를 대고 주저 앉았다. 그는 앉은 자리에서 옆에 똑같은 모양으로 있는 나무 산장을 한참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풀들에 먹힌 그곳에는 사람의 흔적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저만치 들녘 너머 나무가 우거진 검은 숲을 한참 보았다. 그러다가 혼자 픽 웃으며 고개를 떨군다.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낡은 카세트 플레이어를 꺼낸다. 플레이어의 이어폰을 양쪽 귀에 꽂고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플레이어 안 오래된 카세트가 다락다락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귀에는 지저분한 잡음이 들려오더니 이내 경쾌한 피아노 음이 들린다. 하나 둘 셋 넷- 소리와 함께 이어지는 음에 다른 아이의 노랫소리가 섞인다. 철 지난 캐롤이 귓가에 낮고 청량한 음으로 들려온다. 체콥은 가만히 그 노래를 듣다가 저도 모르게 흥얼흥얼 그 음을 따라 불렀다. 이 봄의 풍경에 어울리지 않는 그 경쾌한 캐롤음이 푸른 들녘 위로 가득 퍼진다. 그 노래에 맞춰 춤추는 풀들과 허공에 흩날리는 꽃잎들을 바라보며 체콥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제는 저 바람과 함께 허공을 자유롭게 유영하고 있을 누군가를 떠올린다. 어쩐지 저만치 멀리에서 그가 예쁜 다리로 저 잔디 밭 위를 뛰어 다니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체콥은 조용히 들릴듯 말듯 그런 그에게 속삭였다.
"눈이 그쳤어요."
이제 추운 날은 없을 거라고.
(Fade Out)
S#30. (Flash Back)
합창 실 가득 가을 햇볕이 들어왔다. 그 빛이 줄지어 늘어 선 일렬의 나무 의자의 반을 덮었다. 무대 위에는 검은색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가 있다. 밖을 비추는 그 청량하고 맑은 가을볕처럼 검은색 피아노로부터 아름다운 선율이 울려 퍼진다. 아 빨리 불러!! 건반 위에 연신 손을 놀리는 아이가 짜증스럽게 말을 한다. 나 안 한다고 했잖아! 손에 악보를 꾹 쥐고 다른 아이가 씨근거렸다. 몇 번쯤 반복되었던 반주를 다시 치며 피아노 치는 아이게 셈을 한다. 하나 둘 셋 넷! 그러자 쑥쓰러운지 머리를 긁적이던 아이는 기어이 입을 열었다. 변성기가 막 지난 굵직하고 나직한 아이의 목소리가 음계 사이로 춤을 추며 노닌다. 경쾌한 음을 따라가는 그리 밝지만은 않은 목소리가 이상할정도로 서로 어울려 합창 실 가득 울린다. 그 소리를 듣자 피아노 앞에 아이도 신이 났는지 많은 음을 만들어 내며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였다.
줄지어 있는 의자들 사이로 불청객 하나가 껴있다. 아이들과 교복 색이 다른 다리가 올라와 그 발끝을 음에 맞춰 까닥거린다. 일자 의자에 길게 누운 아이가 카세트 플레이어를 녹음으로 올려놓고 가만히 그 장난 같은 음들을 즐기고 있었다. 다락다락 돌아가는 테이프에 음이 새겨진다. 눈을 감고 아이는 노래가 진행될 따마다 허공을 휘젓는 두 다리가 지휘관의 지휘봉처럼 움직였다. 팔랑팔랑 자유롭게 춤을 췄다. 한창 연주하고 노래하던 음이 뚝 끊긴다. 누워있던 아이가 무슨일인가 싶어 눈을 번쩍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기 무섭게 아까까지 무대 위에 있던 아이 둘이 그 아이를 와락 덮친다. 으악- 하고 덮쳐진 아이가 허우적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선배, 뭐해요? 학교 이렇게 빠져도 되는 거예요? 점잖게 얌전을 빼며 노래를 부르던 아이가 그 애의 손을 잡아 깍지를 끼며 묻는다. 본즈, 왜 그런 말을 해? 선배 여기 있음 더 좋지. 반대편 손에 깍지를 끼며 다른 아이가 퉁명스럽게 투덜거린다. 그리고 이내 해맑은 얼굴을 하고 선배, 내가 선배 좋아하는 노래 더 쳐줄테니까 여기 있어요. 네? 하고 아이에게 매달린다. 얌마, 선배가 너야? 너 그리고 선배한텐 꼬박꼬박 선배라고 하면서 왜 나한테는..!! 한 살 차이로 쪼잔 하게 그런다, 두 아이는 한 아이를 사이에 두고 투닥투닥 말싸움을 한다. 가운데 껴있던 아이가 못 말리겠다는 듯 웃는다. 아하하- 그만해, 그만. 니들은 질리지도 않냐. 그렇게 핀잔을 주면서도 마냥 싫지만은 않은 듯 아이의 표정은 한껏 풀어져 있다.
다락다락 카세트 플레이어가 돌아간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의 아름다운 미소를 테이프 안에 담겨져 돌아간다. 테이프 안에 멈춰진 시간이 영원히 같은 박자로 이어진다. 달칵- 하고 카세트테이프가 A면에서 B면으로 넘어갔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끊이지 않는다. 한 아이가 피아노를 쳤고 다른 아이가 노래를 부르고 또 다른 아이가 그 음에 맞춰 의자 위를 껑충껑충 뛰어 다닌다. 카세트 테이프는 멈추지 않았다. 경쾌한 노랫소리를 담으며 A면에서 B면으로 B면에서 A면으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돌아간다.
언제까지고 영원할 것처럼.
(Fade Out)
(Crank 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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