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순간에 대해서 中

( James T. Kirk X Montgomery Scott )











비 오는 날엔 몸이 좋질 않았다. 내 고약한 지병에 대해서 이야기 하자면 이 다이어리를 꽉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나는 몸이 약한 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마을에서 나의 아버지가 가진 위치와 대를 물려 내려오는 부로 인해 값 비싼 약과 의사의 도움으로 목숨을 연명해 갈 수 있다는 점이었다. 때문에 아버지는 스코틀랜드를 썩 좋아하진 않았다. 좋은 공기를 찾아 온 선택지 치고는 하늘은 시도 때도 없이 우중충하고 일주일에 몇 번은 비를 뿌리는 변덕스러운 날씨는 런던의 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북녘 너머로 오는 차가운 공기까지 더해진다면 내 건강과 이곳은 상극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우리 집, 그러니까 고약한 아버지와 심약한 어머니, 그리고 나를 포함한 식솔들이 이 곳에 머무르는 이유는 온전히 내 고집 때문이었다. 나는 스코틀랜드가 좋았다. 너무 현대적이고 많은 것들이 바뀌어 있는 런던에 비하면 이곳은 거의 많은 것들이 예전과 다를바 없이 같은 모습으로 남아있다. 오래된 책에 올라와 있는 색 없는 사진과 비교해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어 보였다. 날씨도 꽤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일 년에 단 한 달만 좀 괜찮은 날씨를 보이는 땅이라고는 하나 비를 머금은 땅에서 올라오는 풀잎의 냄새와 투박한 돌들이 만드는 커다란 자연의 장관을 만들어내는 요소이기도 했다. 밀이 익어가는 금빛 평야, 그리고 앞머리가 있는 작은 소까지, 이 작은 땅에 있는 독특한 자연의 미학을 본다면 절대로 날씨만으로 이곳의 모든 것을 평가할 순 없을 것이다.

 

지루해, 라고 그는 종종 이야기 했던 것 같다. 우리는 이 북쪽 작은 땅의 많은 곳을 누비고 다녔다. 주로 내가 책에서 봤던 것에 대해서 침대 맡에서 이야기를 하는 타입이라고 한다면, 그는 그걸 듣고 짐을 챙겨 당장 나가자고 행동하는 타입이었다. 한 번은 그의 아버지가 일하는 양조장에 나를 데려간 적이 있었다. 우리는 거기서 발효를 위해 말리고 있는 밀들을 밟으며 시간을 보냈다. 이제 그들이 맛보게 될 것은 나의 고약한 발 냄새가 되겠지. 그는 꽤 짓궂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을 때, 그는 그렇게 말했다. 지루해, 라고.

 

그 날은 하필이면 비가 오는 날이었고, 나는 그의 침대에 반쯤 누워 잔기침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내게서 등을 보인 채 책상에 앉아 공구를 들고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그의 한 마디에 집 안에 침묵이 내렸고, 창을 때리는 빗소리만이 계속 울렸었다. 내가 그 말에 무슨 말을 했어야 했을까. 이 땅을 사랑해서 오롯이 이곳에만 갇혀있는 내가 여기가 아닌 다른 곳, 저 먼 우주의 어느 곳으로 떠나고 싶어 하는 그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내가 침묵하자 그는 이내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고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내 품에 안겨 주었지만, 나는 그 말을 도통 잊을 수가 없었다. 내 팔 안에 곤히 잠든 그를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사랑이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면 도대체 놓아주어야 하는 때는 언제인가에 대해서.

 

 

 

***

 

 

 

커크는 졸졸 흐르는 물소리에 눈을 떴다. 그는 제 몸 위에 드리워진 낯선 천장을 보고 나서야 자신이 어제 스콧의 집으로 왔따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눈에 낀 잠귀신들이 침대 밑으로 돌아가고 그는 뻐근한 몸을 일으켰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침대의 오래된 스프링이 위태롭게 삐걱거렸다. 침대 옆 창가에 드리운 커튼을 걷어내자 창문 너머 빗물에 일그러진 바깥 풍경이 보였다. 얕은 비가 오는지 빗방울들이 얇은 천장과 창문을 떼리는 소리가 고요한 아침 공기를 촉촉히 적시며 은은한 소음을 만들고 있었다. 

 

커크는 기지개를 한 번 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함선 내에서 그랬던 일련의 과정들처럼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깔끔해서 늘 새것과 같은 냄새가 나는 함선의 침구와는 달리 그가 잠들었던 오래된 침대에서는 아주 희미한 살 냄새와 마른 밀의 냄새, 그리고 젖은 천의 눅눅한 냄새가 났다. 그 냄새들은 자는 사이 커크의 잠옷과 살에 베어들었고 커크는 그게 영 싫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간단한 양치와 세수로 모든 일련의 과정을 생략해 버렸다. 잠옷 차림인 채로 방을 나섰다. 그리고 복도를 가로지르려다가 살짝 열려있는 옆방의 문을 보았다. 문틈 사이로 얕은 숨소리가 났다.

 

살짝 손끝으로 문을 밀자 삐걱 거리는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커크는 그 좁은 틈새로 고개를 들이 밀었고 제 것과 다르지 않은 낡은 침대에 누워있는 작은 등을 보았다. 옅은 숨에 따라 오르락내리락 거린다. 커크는 그 커다란 몸으로 문 틈 사이를 비집고 방 안으로 들어간다. 침대 곁에서 그는 스콧을 내려다보았다. 옆으로 몸을 옹송그리고 자고 있는 스콧의 옆모습은 어딘지 초췌해 보였다. 커크도 알고 있다. 그의 업무가 다른 이들에 비해 과중하다는 것을, 때문에 늘 피곤을 달고 산다는 것도. 그러고 보면 그걸 알면서도 수고했다는 한 마디 해준 적이 없었다. 익숙해지는 거다.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는 거고. 괜한 미안함과 안쓰러움에 커크는 저도 모르게 그런 그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닿지 않는다. 손가락 끝이 솜털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멈춘다. 닿지 않는 손이 움츠러들고 주먹을 꽉 쥐었다가 떨어져 나온다. 아, 뭐하는 거야, 나. 쓸 데 없이 감상적이 되선. 잇새로 씹는 욕지기를 삼키며 그는 몸을 돌렸다. 혹여나 스콧이 깨지나 않을까 발소리를 낮춰 방을 나선다.

 

1층으로 내려와 부엌으로 갔지만 어제 장을 봐온 간단한 식료품 외에는 달리 먹을 것이 없다. 찬장에 있는 홍차들은 몇 년 동안 방치되어 그 향을 잃은 지 오래였고, 커피는 보이질 않았다. 결국 목을 축일 따뜻한 물 한 잔을 머그 한 가득 담아 식탁 옆에 앉았다. 빗물이 계속해서 바깥의 흐린 풍경을 지우고 다시 그리길 반복하는 것을 보며 커크는 빗소리가 자신의 머릿속 잡념들을 지우고 다시 그리길 반복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의 머릿속 창 안에는 자신의 것이 아닌 기억의 단편들과 단어 하나하나 조합되는 조지의 문장들, 그리고 늘상 창가에 앉아 먼 곳을 바라보던 어머니의 모습이 그려지고 다시 지워졌다.

 

 

"일어났수?"

 

 

삐걱거리는 계단 소리에 돌아보자 잠에서 깬 스콧이 눈을 비비며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커크의 얼굴을 한 번 보았다가 식탁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직 잠이 채 달아나지 않았는지 눈을 반쯤 감은채로 멍하니 식탁 위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에 커크는 저도 모르게 바람 빠지듯 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비가 와선, 청소는 글렀네."

"그러게요..."

"자 물이라도 마셔."

 

 

머그를 건네주자 두 손으로 그걸 받아들고는 가만히 그 온기를 느끼듯 손에 쥐고만 있다. 그리고는 시선을 돌려 비가 오는 창 너머를 보다가 들릴 듯 말 듯한 옅은 한숨을 쉰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머그를 다시 커크의 손에 쥐어 준다. 손바닥에 닿는 동그란 손끝에서 짜릿함이 올라온다. 커크는 그 손끝을 보다가 상처가 많은 팔로 시선을 올리고 동그란 어깨를 지나 그의 얼굴에 시선을 둔다. 눈이 마주친다. 청회색 눈동자에 순간 자신의 얼굴이 오롯이 담겼다. 커크는 잠시 숨을 멈췄다. 몸의 무게 중심이 앞으로 쏠리고, 하마터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킬 뻔 했다. 그 청하한 눈동자 안의 자신이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져서, 마치 미지의 우주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했다. 하지만 이내 스콧이 고개를 돌리며 잠깐 일었던 묘한 긴장감은 비에 씻기는 풍경처럼 금방 사그라졌다.

 

 

"아침 먹읍시다."

 

 

부엌으로 걸음을 옮기며 그렇게 말하는 스콧의 목소리 끝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커크는 어렴풋이 눈치 챘지만 더러 말을 하지 않았다. 등 뒤에서 채소를 썰고 계란을 부치는 소리가 났다. 아침을 시작하는 소리. 커크는 그 평안한 일상 속에 혼란을 느끼며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 안에 머그가 아까보다 더 뜨거워진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

 

 

 

그의 취미는 의외로 독서였다. 독서 취향은 대체적으로 아주 오래된 고전 소설류였는데 그는 그것이 제 어머니의 잔재라고 했다. 사진으로 본 그의 어머니는 그와 닮은 얼굴의 온화한 미소가 어울리는 여인이었다. 햄스턴 출신의 그녀는 괄괄한 스코티쉬 발음이 아닌 런던의 차분한 억양으로 그에게 책을 읽어주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가 지병으로 세상을 뜬 이후, 그는 그녀를 대신해 잠들지 못하는 동생들을 무릎 위에 앉혀놓고 책을 읽어주곤 했다. 나는 그런 그의 무릎을 차지하기 보단 멀찍이서 그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그가 동생을 재우고 난 뒤 낮게 한 숨을 쉬고 스르르 눈을 감는 것이 한 폭의 그림 같아 멍하니 그것만 보고 있었다.

 

그것이 아마 그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차마 말로는 하지 못해 어머니의 행동을 따라하며 그 기억을 더듬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언젠가 그와 헤어지고 났을 때, 그가 나를 어떤 식으로 그리워할지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아예 기억조차 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책을 읽을 때면 그를 바라봐 주던 내 시선을 떠올려주지 않을까, 라는 비참한 생각을 하며...

 

 

 

***

 

 

 

아침을 먹고 나니 변덕스러운 하늘은 어느새 비가 아닌 햇볕을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스콧은 딱히 청소를 할 생각이 없는 듯 1층 암체어에 앉아 내동 책을 읽었다. 늘상 부산스럽게 엔진룸을 오가던 모습만 보던 커크에게 그의 그런 정적인 모습은 묘한 느낌을 주게 했다. 커크는 식탁에 서류들을 늘어놓고 스팍이 준 '숙제'를 하는 중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도망쳐 오긴 했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직위와 업무를 완전히 놓을 수는 없었다. PADD를 들여다보며 스팍이 작성한 보고서 초안을 검토하고 수정하며 커크는 입술 사이로 끙끙 거리는 소리를 내다가도 가끔씩 문득 고개를 들어 스콧을 바라보기도 했다.

 

 

"도와줘요?"

 

 

그렇게 보기를 세 번째가 되자 스콧도 시선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읽던 책을 덮고 그렇게 물었다. 커크는 멋쩍은 듯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오랜만에 서류 작업을 하려니까 지겹네. 뭐 읽고 있었어?"

"Nachzug Nach Lissabon."

"재밌어?"

"그럭저럭... 그보다 짐."

"응."

"왜 왔어요?"

 

 

아마도 처음 이 곳에 들어올 때부터 물어봤어야 할 질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스콧은 고개를 돌려 웃음기 없는 눈으로 커크를 쳐다보았고 커크 역시 입가에 맴돌던 웃음을 지웠다. 사실 스콧의 질문은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하고 싶은 물음이었다. 도대체 넌 어쩌자고 이곳으로 왔을까. 그 질문은 처음 충동적으로 셔틀을 탈 때부터 커크의 머릿속에 떠나지 않는 커다란 숙제가 되었다.

 

커크는 자신이 그닥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껏해야 제일 가까운 본즈에게나 술 몇 잔을 핑계로 까맣게 짓이겨진 속내 일부만을 토로하듯 뱉어내는 것이 다였다. 그나마도 어느 순간부터는 함장이라는 직위와 책임감으로 인해 불안감, 공포와 같은 자신의 약하고 어두운 부분을 목구멍 아래로 쑤셔 넣고 썩어 들어가게 내버려 두었다. 그러다보면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 것에 익숙해져 어느새 자신이 가지고 있던 약한 부분이 무엇이었는지 조차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심장 한 가운데가 까맣게 썩어 들어가 고통을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커크는 지금 이 순간 입을 여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심지어 자신이 무엇을 이야기 할 거라는 걸 머릿속에 그리지도 않았다. 요정들의 나라라고 하더니 목구멍 너머로 요정이 삼켜진 말들을 꺼내고 있는 건지, 아니면 제 집처럼 편해진 이곳에 그의 무언가를 솔직하게 바꾸어 놓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갈 곳이 없어서."

"...."

"그렇다고 내 의무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지구에서까지 '캡틴'으로 있고 싶은 건 아니거든. 그러니까 적어도 '집'에 와서 말이야. 근데 막상 가려니까 엔터프라이즈 함장 제임스 커크 말까는 진짜 내가 발붙일 곳이 없더라고. 어머니는, 흠, 어머니는 날 아버지라고 착각하니까, 집에 가도 내 이름 불러주는 사람도 없고... 물론 그렇다고 네 개인적인 시간을 빼앗은 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근데 딱히.. 누구한테 가겠어, 내가. 본즈는 호들갑 떨게 뻔하고, 스팍은 알다시피... 뭐, 다른 사람들도 많지만, 그냥 집에서 멀어지려고 했고 보이는 대로 널 따라온 거야."

"....짐."

"미안."

 

 

튀어나오는 대로 지껄이긴 했지만 마지막 사과는 진심이었다. 하지만 결국 다이어리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못했다. 조금 슬프고 다정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스콧의 눈을 보자 더욱이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 말을 꺼내고 나면 자신을 기만했다고 생각할 스콧이 차갑게 식은 눈으로 자신을 돌아볼 것이 두려워졌다. 커크는 목 끝까지 나오는 말들을 다시 삼키며 입술을 씹는다. 미안- 그래 사과는 진심이었다. 차마 다 하지 못하는 말들에 대한 사과.

 

 

"제임스."

"...어?"

"Shit, 당신 진짜 나쁜 거 알아요? 이 Handsome Bastard. 별 시답지 않은 이유였으면 내 쫓으려고 했는데... 그렇게 말하면 내쫓는 내가 나쁜 놈이 되는 거잖아요."

"어... 원한다면 나갈게. 지금이라도 당장."

"... 짐, 제임스. 그냥 좀 닥쳐요"

"..."

"이리와 봐요."

 

 

책을 쥐었던 손으로 자신을 부른다. 홀린 듯 커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무 바닥에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스콧이 앉아있는 암체어로 향했다. 무엇을 하고자 생각하고 움직인 것은 아니었는데 몸은 자연스럽게 암체어 옆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스콧이 자신의 허벅지를 손으로 쳤다. 고분고분 허벅지 위에 얼굴을 기댄다. 커크는 왠지 자신이 커다란 개가 된 기분이었지만 부러 말하진 않았다. 스콧이 입고 있는 잠옷 바지는 두껍고 부드러운 소재로 되어 있어서 커크의 볼을 기분 좋게 간질였다.

 

 

"어머니가... 내가 좀 우울할 땐 이렇게 날 옆에 두고 책을 읽어 줬어요. 난 그걸 들으면서 잤고.. 그러다 다시 일어나면 머리가 맑아지더라고요.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머리도 안 좋은 양반이 그거 붙잡고 끙끙거린다고 답이 나와요? 좀 자요. 자고 일어나서 해요. 도와줄 테니까."

 

 

귓가에 들리는 스콧의 목소리는 노랫소리마냥 잔잔했다. 꿈뻑이는 눈꺼풀이 점점 가라앉고 이내 감긴다. 스콧의 손이 커크의 눈가에 드리운 빛을 차단한다.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 피부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묘한 열기가 느껴졌다. 그것이 감질나다 생각될 때 쯤, 동그란 손끝이 닿았다. 커크의 짙은 눈썹 위쪽을 문지르고 흐트러진 옆머리를 정리해주다가 귀 뒤를 간질인다. 기분 좋은 소름이 돋아 커크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가 피길 반복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귓볼을 만지는 손길은 더없이 다정하기만 하다. 바스락거리는 책장 넘기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곧 독특한 억양의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영원한 젊음. 젊은 시절 우리는 우리가 불멸의 존재라고 생각하며 산다. 죽을 운명이라는 인식은 종이로 만든 느슨한 끈처럼 우리를 감싸고 있어 피부에 거의 닿지 않는다. 인생에서 이런 상황이 바뀔 때는? 이 끈이 우리를 점점 휘감아 오고 마지막에는 목을 조일 듯 하는 건 언제인가? 절대 느슨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부드러우면서도 굽히지 않는 압박을 느끼는 때는 언제인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서 이런 압박을 깨달을 수 있는 징후는 무엇인가?"

 

 

 

***

 

 

 

이른 새벽녘, 그것은 우리의 시작이었고.

 

우리의 이별은...

 

 

 

***

 

 

 

커크는 눈을 떴다. 몽롱한 정신을 붙잡으려 그는 두어 번 머리를 털고 몸을 일으켰다. 어제 보냈던 별 것 없는 하루의 일과를 떠올린다. 스콧의 무릎에서 잠이 들었다가 깼을 때, 다시 둘이 보고서를 쓰면서 아웅다웅 했고, 맥주를 곁들인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각자 방으로 들어가 커크는 늦게까지 다이어리를 읽다가 잠이 들었다. 똑같은 밤이었지만 그 날 밤은 꿈결에 들려오던 스콧의 목소리가 좀처럼 떠나지 않던, 그런 밤이었다.

 

어제 아침 비가 오던 창가는 이젠 새파란 새벽의 여명을 품고 있었다. 안개가 낀 뿌연 풍경 아래를 보다가 마당에 나와 있는 동그란 머리를 본다. 느린 발걸음으로 마당을 오가는 것을 보며 커크는 하품을 한 번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옆에 있던 작은 담요를 들고 내려간다. 현관문을 열자 바닥을 툭툭 차고 있는 스콧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가 고개를 돌려 커크를 보았고 커크는 담요를 가지고 그에게 다가갔다. 스콧의 볼은 새벽 공기를 받아 창백하게 질려있었고, 입고 있는 옷은 살결이 비칠 만큼 얇기 그지없었다. 커크는 왜 그가 이 새벽에 잠옷 차림으로 마당을 서성였는지 묻지 않았다. 대신 말없이 그의 어깨 위로 담요를 덮어줄 뿐이었다.

 

어디선가 새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은 오려고 하고 있었고, 커크는 왠지 이대로 영영 아침이 오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스콧이 눈을 들어 그를 보았고, 커크는 어제 아침에 느꼈던 묘한 충동을 다시금 느꼈다. 

 

그는 분위기라는 것을 알았다. 많은 사람들과 사귀어 봤고, 짧지만 간편한 인스턴트식 연애를 해왔다. 커크는 지금이 키스를 해야할 타이밍임을 알았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지금 키스를 한다면 이 관계는 또 다른 스치는 인연과 다르지 않을 것임을 알았고,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내기엔 다이어리를 읽으면서, 그리고 그와 생활하며 느꼈던 간지러운 감정들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처음이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랐기에 섣불리 서둘러 그것들을 마무리 짓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커크는 키스 대신 이마를 맞대었다. 차가운 공기로 조금 차갑게 식은 피부 위, 서로 느리게 흐르는 체온을 나누었다. 평소라면 이게 뭐하는 짓이냐며 경을 쳤을 스콧 역시 말이 없다. 그는 그저 눈을 감았다. 그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아래 지는 작은 음영을 보았고 커크도 역시 눈을 감았다.

 

키스보다 더 애틋한 스킨쉽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이마를 맞대고 있다가 아침 해가 올라오는 느낌에 다시 눈을 뜨고 커크는 스콧의 손을 잡아 집 안으로 이끌었다. 그러고 나서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담요를 두른 스콧은 암체어에 앉아 부족한 잠에 꾸벅꾸벅 졸았고, 커크는 간단한 아침으로 프랜치 토스트를 구웠다. 졸고 있는 스콧을 깨워 식탁에 앉아 아침을 먹는다. 느리게 눈을 꿈뻑이며 포크 끝으로 토스트 가장자리를 쿡쿡 찌르던 스콧이 잠이 낀 걸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늘 뭐 할 거요?"

"...뭐, 그냥 좀 쉬겠지. 청소할거면 도와주고."

"잠깐 나랑 어디 좀 가요."

"어디?"

"...그냥, 어디."

 

 

스콧은 말을 아꼈다. 커크는 더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 식사는 조용히 끝났다. 외출준비를 위해 침실로 올라갔다가 커크는 침대 위에 놓여 있는 다이어리를 보았다. 그는 잠시간 망설였다. 커크와 스콧의 관계는, 앞으로를 예상할 수 없다고는 하나 단순한 동료 이상의 무언가가 생겨나고 있었다. 이런 타이밍에 이걸 보여주는 것이 옳을까, 그의 옛 연인에 대한 흔적을. 차라리 아예 없었던 것처럼 숨겨버리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을까, 라는 안이한 생각을 했다. 자신이 모르는 스콧, 그 풋풋함에 대해 알려주어 자신으로 하여금 새로운 감정을 갖게 한 것에 대해선 감사했지만, 동시에 이유 모를 기시감이 들었다. 그것을 명확한 하나의 단어로 설명할 수 없지만 그래, 아마도 그건 질투일 것이다.

 

두 손에 다이어리를 든다. 커크는 그 손때 탄 붉은 가죽 커버를 노려보다가 입술을 한 번 물고 다시 그것을 배게 아래에 밀어 넣었다. 어느 것도 판단하지 못했을 때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답일 지도 모른다. 그렇게 또 커크는 진실을 뒤로 미뤘다. 곧 스콧이 부르는 소리가 났고 커크는 침구에서 등을 진채 방 밖으로 나갔다.

 

스콧은 그를 마을에서 좀 먼 곳으로 데리고 갔다. 돌이 채이는 좁은 오솔길을 따라 걷다가 나무 울타리를 넘어 초원을 가로질러 한참을 걸었다. 아침 안개가 채 가시지 않은데다가 비가 올 것처럼 하늘은 우중충하기 짝이 없어 풍경은 스산하기 그지없었지만, 이슬을 머금은 잔디들과 들녘 너머 흔들리는 뾰족한 나무들이 만든 작은 숲은 적막뿐인 이 분위기에 꽤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그렇게 풍경을 감상하며 걷기를 한참, 그들이 도착한 곳은 공동묘지였다. 이 근방 마을 사람들이 쓰는 듯한 묘지는 꽤 많은 묘비들이 줄지어 서있었고, 스콧은 잠깐 걸음을 멈춰 그 행렬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커크를 한 번 뒤돌아보다니 뭔가 굳은 다짐을 한 듯 두 손으로 꼭 주먹을 쥐고 걸었다. 묘지의 입구에서 조금 걸어 안쪽 한 묘비 앞에 멈춘다. 심플하기 그지없는 묘비는 좀처럼 관리하지 않았는지 이끼가 껴있었고 스콧은 그 위를 손으로 문질러 닦았다. 묘비 주인의 이름이 드러났다. '조지 프랭클린'

 

묘한 기시감이 들어 커크는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억지로 참아냈다. 그는 배게 밑에 두고온 다이어리를 떠올렸지만 이내 고개를 저어 지워냈다. 스콧은 그런 커크를 모른 채 묘비 앞에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습기가 있는 축축한 바닥이었지만 별 신경 쓰지 않는 듯 흙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가만히 묘비를 바라보고 있었고, 뒤에 멀찍이 서있던 커크도 다가와 스콧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코 끝에 젖은 흙냄새가 났다. 망자의 슬픔을 대변하듯 소금기 어린 짠내가 나는 것도 같았다.

 

 

"열 여덟에서 스물 둘, 그러니까 스타플릿 아카데미에 가기 전까지겠네. 만났던 사람이에요. 사랑했던 사람이고. 내가 좋다고 하길래 아무 생각 없이 만났었는데, 생각보다 오래 사겼죠. 다정한 사람이었어요. 처음 만날 때부터 마지막까지 변한 것 없이 늘 같은 마음으로 날 사랑해 주었으니까, 나한텐 뭐, 과분한 사람이었죠."

"....왜 헤어졌는데?"

"바보 같았던 거죠. 곁에 있을 땐 익숙하니까, 그게 당연한 줄로만 알았던 거죠. 난 있잖아요, 어릴 때부터 이 지긋지긋한 곳을 떠나는 게 내 소원이었거든요. 여기선 내 말을 제대로 알아 듣는 사람도 없고, 우주니 뭐니 떠들어 대는 내가 마치 괴짜인 냥 취급을 당했으니까. 여기 사람들은 하나 같이 그 해 밀 수확이 어떻게 되는지, 양조장에 얼마나 질 좋은 위스키가 생산되는지만 궁금해 하는 사람들뿐이라, 난 그게 멍청하게만 느껴졌거든요. 그래서 스타플릿 아카데미에 합격 되자마자 짐을 싸서 나왔어요. 아버지한텐 편지 한 장만 달랑 남겨놓고... 근데 이 사람이 나 떠날 거 어떻게 알고는 마중을 나온 거예요. 오늘처럼 안개 끼고 추운 새벽이었는데, 얇은 잠옷 바람으로, 몸도 약하면서..."

 

 

추운 공기 사이로 허망하게 퍼지는 목소리에는 잦은 떨림이 있었다. 잠깐씩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커크는 옆을 돌아볼 수 없었다. 우는 눈물을 닦아주고 그 어깨를 토닥여 주고 싶은데 그럴 수 없었다. 그가 하는 말들은 이미 다이어리를 통해서 읽었던 내용들이었고, 그럼에도 모르는 척 듣고 있는 자신에 대한 한심함과 그를 향한 죄책감에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스콧은 그런 걸 모르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연락 하라고 하더라고요. 기다리겠다고도 하고. 나는 좀 못되게 굴었어요.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마냥 기다리지 말라고, 다른 사람 만나라고, 나도 그럴 테니까, 그렇게 모진 말을 하고 떠나왔어요. 그러고 3년쯤 지났나. 처음 1년엔 연락이 오던 사람이 소식이 끊기니까 그냥 이제 마음 접었나보다 생각했는데, 기숙사로 소포가 하나 왔어요. 그 사람 일기장이었는데... 그거 받고서 집에 연락을 하니까 그러더라고요. 죽었다고. 지병이 있었는데 그게 악화돼서..."

"...."

"그 후로 몇 번 집에 오긴 했었는데, 여긴 못 왔었어요. 그냥, 현실감이 들지 않아서, 왜 내 방에 있으면 그 사람이 또 아무렇지도 않게 찾아오진 않을까 싶어서. 그러다가 마을을 떠날 때쯤이면 항상 뒤를 돌아보게 되는 거죠. 저만치 안개를 뚫고 그 사람이 올까? 하고. 하지만 오지 않으니까 늘 실망해 돌아가 미친 듯이 일을 하면서 잊으려고 했는데, 또 그렇게 잊어버리면 안될 것 같아 덜컥 겁이 나서 그 사람이 준 다이어리를 또 밤 새 읽고... 그래서 그 이후로는 진지하게 관계를 가져본 적이 없어요, 나. 미련인지, 아니면 겁이 나는 건지."

 

 

함선 내에 인간관계에 대해서 함장인 커크가 모르는 것은 거의 없었다. 누가 누구와 사귀고 관계를 가지고 또 헤어지고를 반복한다는 것을, 그 사이클 안에 자신 역시 끼어 있었기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중 스콧의 이야기로 들리는 것은 하나 같이 적당한 잠자리 파트너였을 뿐, 가볍게나마 즐기는 연애조차 보이질 않았다. 커크는 그것이 그저 스콧의 취향인 것이라 생각하며 내버려 두었다. 자신 역시 그런 관계들에 통달했기 때문에 그를 비난할 수 없었고, 사생활이 어쨌든 그는 충분히 좋은 동료였고 충실한 기관실장이었기 때문이었다.

 

과거의 그림자가 현재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을, 커크는 이미 어머니를 통해 겪어 왔다. 하지만 좀처럼 그곳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는 어머니와는 달리 스콧은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아마도, 그가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온 것도 그 일환일 것이다. 나아가기 위한, 새로운 관계를 위한 스콧 나름의 용기였을 것이다. 커크 안에서 묵직한 죄책감이 무게를 더해간다. 솔직하게 과거를 고백하는 스콧 앞에서 정작 자신은 완벽하게 솔직할 수 없다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아침나절 이것을 없었던 일로 취급하려고 했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에 대해서 다시금 깨닫게 했다. 

 

옆으로부터 시선이 느껴졌다. 커크가 돌아보지 못하고 입술만 깨무는 사이 망설임 없이 뻗어진 손이 귓가에 닿는다. 암체어에서 그를 재웠을 때처럼 손이 귓바퀴와 귓볼을 매만지고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커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스콧의 눈은 물기가 서려 촉촉하게 젖어 있었고 물기에 뭉친 속눈썹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짐, 고마워요. 아마 당신이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예요."

"아냐, 스코티, 난..."

"내 말, 먼저 들어요. 난 솔직히 모르겠어요. 여기 와서 오늘까지 이 짧은 시간동안 내가 느끼는 게 당신도 느끼고 있는게 맞는지. 그냥 분위기에 취해서 혼자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해서요. 그래서,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는 당신 앞에서 이런 말 꺼내지 않을게요."

"..."

"그렇지만, 만약에, 당신 역시 나와 느끼는 게 같다면, 그 새벽 이 사람을 등졌던 나의 어리석음을 만회할 기회를 주세요. 과거를 버릴 순 없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묶여있을 순 없으니까, 나아갈 수 있게 해주세요.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많이 없지만, 그래도.. 먼저 돌아서진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

"사랑해요, 제임스."

 

 

L발음을 할 때 드러나는 작은 윗니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한 자기 자신이 낯설고 당황스러워 커크는 헛숨을 쉴 뻔 했다. 대신 가슴에 강렬한 떨림과 동시에 고통이 느껴졌다. 처음으로 심장이 너무 세게 뛰면 아플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커크는 입 위로 떠오르는 많은 말들 중 어느 것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래서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옆머리를 헝클고 있는 스콧의 손을 잡았다. 겹쳐진 손은 차가웠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 손을 가져다가 손바닥에 입술을 부비고 커크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얼굴을 가져간다.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 스콧은 눈을 감았고, 그 감은 눈 아래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커크는 입술로 볼위에 그려진 눈물길을 더듬는다. 입술과 혀 끝에 닿는다. 그의 솔직한 감정들이 꾸밈없이 커크의 입 안으로 삼켜졌다. 그래서 커크는,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다.

 

 

"미안해."

 

 

사과가 거절의 의미인 줄 아는 스콧이 예상한 듯 체념하며 흐리게 숨을 트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커크는 그런 스콧의 턱을 손에 쥐고 입술 옆에 빗나간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거의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자신을 억누르는 죄책감의 원인을 토로했다.

 

 

"그 다이어리, 내가 가지고 있어."

"....뭐..."

"다 알고 있어. 그래서 미안해."

 

 

입술을 떼고 다시 마주한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곧 그 눈이 분노로 변모될 걸아는 커크는 차라리 눈을 감았다. 툭- 하고 어깨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툭- 툭- 하고 크기를 더해가는 물방울들이 쏟아져 내린다.

 

비가 오고 있었다.

 

 

 

***

 

 

 

그가 떠난 마당에 작은 씨앗을 뿌려 두었다. 그의 동생들은 이런 내가 미련하다고 했지만 나는 어쩐지 이것이 마냥 끝일 것 같지가 않았다. 그는 이별을 말했다. 새벽녘, 런던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택시를 잡아타려고 하는 그의 앞에 나타난 나를 보며 그는 기다리지 말라는 매몰찬 말로 날 밀어냈다. 하지만 나는 그게 완벽한 진심이 아님을 알았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턱은 사정없이 떨렸고,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으니, 어느 누구라도 그가 하는 말이 거짓임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저 그렇게 그를 마지막으로 보낸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사랑의 끝난 자리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그저 슬픔과 죄책감이라고 한다면 나는 슬프기만 할 것이다. 우리가 사랑한 자리에 추억이 남았고, 나는 그것이 마냥 그를 슬프게만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씨앗을 심어놓고 기다리는 거다. 이 땅에 싹이 트이면, 언젠가 그도 나를 거름삼아 우리가 처음 마주한 그 순간처럼 다시 사랑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나는 그저 그가 사랑을 하길 바랄 뿐이다.

 

 

 

***

 

 

 

쾅- 하고 눈앞에서 문이 닫힌다. 커크는 그 손잡이를 잡아 비틀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잠갔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과는 다르게 문은 쉽게 열렸다. 비는 거셌고 공동묘지에서 오는 동안 커크가 얼마나 스콧의 손을 잡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손을 뻗는 족족 스콧은 그것을 쳐냈다. 눈에는 분노와 배신감을 가득 담고, 볼 아래 흐르는 것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르는 상태로. 

 

그렇게 침묵과 억눌린 감정들을 갈무리 하지 못한채 둘은 집으로 돌아왔다. 커크는 비가 들이치는 현관문을 닫고 스콧을 바라보았다. 집 안은 둘의 밭은 숨소리와 빗방울이 집을 때리는 소리만 날 뿐 적막이 가득했다. 젖은 옷 아래로 빗물이 떨어져 마룻바닥을 얼룩덜룩 적셔 놓았지만 그는 별 상관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것과 마음을 들쑤시는 열화와 같은 감정들로 씩씩거리는 숨을 내쉬고 있었다. 커크는 그런 등을 보며 무슨 말을 하려고 하다가 입을 닫고 다시 한 숨을 쉬었다. 

 

 

"일단 씻고..."

"재밌었수?"

"..."

"내가 뭐라 지껄일지 알면서 들으니 재밌었냔 말이요."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돌린 스콧이 커크를 향해 쏘아 붙였다. 어디선가 쾅- 하고 번개 치는 소리가 났고 어두운 집안이 번쩍였지만 둘은 미동 없이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오해하지 마. 널 비웃으려고 그걸 가지고 있던 건 아니니까. 그냥, 돌려 줄 타이밍을 몰랐을 뿐이야."

"변명하지 마요! 돌려줄 수 있으면 얼마든지 돌려줄 수 있었잖아!! 함선 내에서도, 심지어 여기 와서도 당신이 나한테 말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어!!"

"변명하는 거 맞아. 하지만 제길, 스코티, 나는 무서웠어. 내가 그걸 돌려 줬을 때 네가 날 보는 게 달라질까봐..!!"

"그래서 그 때 말했어요?!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길 기다렸다가??! 하! 이것 잠 고맙네, 짐보. 기껏 어렵사리 꺼낸 사랑 고백에 돌아오는 대답이 그따위일 줄이야 내가 상상이나 했겠수?!!"

"네가 날 사랑하니까, 그래서 그렇게 말하는데 내가 어떻게 이걸 계속 숨길 수가 있어?!!"

"멍청한 소리 마요, 짐. 왜 내 탓을 해요?! 차라리 없는 척을 했어야지! 끝가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어야죠!!"

"그리고 니가 계속 그 과거 망령이랑 지내는 꼴을 나보고 보라고?!! 니가 날 통해서 그 자식을 떠올릴 걸 모르는 척 지켜만 보라고??!!"

"그게 아니라는 거 알잖아요!! 왜 그딴 생각을 하는데!!"

"내가 널 사랑하니까!!"

 

 

쾅- 하고 다시 번개가 쳤다. 스콧의 얼굴이 다른 의미로 경악에 물들었다. 하지만 놀란 것은 커크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번도 자신의 입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담아본 적 없었다. 저도 모르게 튀어 나온 말이었지만 이것이 온전히 홧김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사랑, 그 생소한 단어에 대해서 커크는 다이어리의 구절을 떠올렸다. 사랑의 시작에 대해서. 심장이 빠르게 뛰고, 온몸의 피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눈 안에 그 사람만이 담겨지는 그 몇 초의 시간을.

 

커크는 자신의 심장이 아플 만큼 뛰고 있는 것이 단순히 빗속을 뚫고 걸어와 이 지리한 싸움을 하는 것 때문이 아님을 알았다. 마음속에 확신이 일자 더 지체할 것 없이 커크는 스콧에게 다가갔다. 한 발 다가가면 스콧은 한 발 물러났다.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지나가는 자리에 물길을 만들었다. 발걸음이 내딛는 곳, 나무 바닥이 끼익끼익 울었다. 스콧의 몸이 식탁 끝에 닿았고 더 물러날 곳이 없자 그는 애꿎은 입술만 씹으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커크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고 이내 숨이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서 멈춰 섰다.

 

 

"위기를 모면하려고 한 거짓말이라면, 지금 당장 사과하는 게 나을 거예요. 아니라면 당신 함선에 다시는 탈 일 없을 테니까."

"미안한데 거짓말도 아니고, 난 유능한 선원을 잃을 생각도 없어."

"도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뜬금없이 다이어리에 대해서 얘기하질 않나, 갑자기 이런 말을 하면..."

"미안해, 그건 미안하다고 생각해. 그래, 네 말대로 줄 기회는 많았는데 못 준것도 맞고, 말한 타이밍이 나빴다는 것도 알아. 내가 멍청했어. 나도 이런 게 처음이라 그래. 그래서 미안해, 스코티."

"짐, 제발.. 나는... 사과를 계속 듣고 싶은 게 아니에요."

"사랑해."

"..나는..난, 짐..."

"사랑해, 정말. 진심으로. 왜 못 믿어? 내가 네 앞에서 심장이라도 파서 보여줘야 믿겠어? 아님 나도 다이어리라도 써서 보여줘야 믿을래? 아까 묘지에서만 해도 너도 확신하고 있었잖아. 내가, 너랑 같은 마음이라는 거. 근데 왜 빼는 거야. 화나서 그러는 거면 화 풀릴 때까지 기다릴게. 근데 거짓말 하는 거 아냐, 정말. 믿어줘."

 

 

커크의 두 손은 어느새 스콧이 기대어있는 식탁의 양 옆을 붙잡고 있었다. 팔 안에 갇힌 스콧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바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커크는 그런 그가 다시 자신을 올려다보길 조용히 기다렸다. 하지만 끝내 고개를 들지 못하자 그의 귓가와 볼, 그리고 목덜미에 잘게 입을 맞추며 그를 달랬다. 날 봐줘, 스코티. 나를 봐. 그는 빗소리에 묻힐 듯 거의 들리지 않은 작은 속삭임으로 그를 종용했다. 바닥을 보던 스콧의 고개가 서서히 올라간다. 투명한 눈물 막이 있는 청회색 눈동자가 커크를 담았다. 오롯이 자신만을 담았다. 커크는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전율에 몸을 살짝 떨었다.

 

숨이 섞였다. 얼굴이 가까워지고 이내 눈동자 안에는 서로의 눈동자가 남긴다. 코끝이 닿았다. 입술 사이로 아직 채 가시지 않은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커크를 바라보던 스콧이 마치 항복을 하는 것처럼 순종적으로 눈꺼풀을 내려 눈을 감았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아까와 같은 눈물인지 아님 빗물인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커크는 그 위에 입을 맞추기보단 그게 그렇게 볼 위에 길을 만들어 떨어져 내리도록 내버려 두었다. 마치 그가 가지고 있던 과거의 모든 미련들을 씻기우길 바라는 것처럼.

 

바르르 떨리는 분홍빛 입술이 열렸고, 커크는 아까 자신이 빠져들었던 그의 입모양을 본다. L을 발음할 것처럼 윗니에 닿는 혀끝을 보았다. 하지만 그의 말은 갈무리 되지 않았다. 숨과 함께 섞인다. 닿을 듯 말 듯 둘 사이에 있던 작은 공간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커크의 눈이 감겼다.

 

입술이.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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