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순간에 대해서 上

( James T. Kirk X Montgomery Scott )











모든 사건에는 기승전결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 이야기는 제임스 T 커크가 엔터프라이즈의 복도 한 구석에서 오래된 다이어리를 주우면서 시작된다.




***




발끝에 무언가가 채인다. 커크는 취기로 가물거리는 눈가를 비비며 초점을 찾는다. 바닥을 보자 책 한 권이 보인다. 아니다, 그건 책이 아니라 낡은 다이어리였다. 고개를 숙여 다이어리를 집으려다가 중심을 잃어 허우적거리며 그걸 낚아챘다. 하지만 바닥에 머리를 박는 것까지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쿵- 하고 커다란 소리를 내며 꽤 타격을 받은 머리를 문지르며 그는 이 고통의 원인을 야기한 손 안에 다이어리를 보았다. 빨간색 가죽으로 되어 귀퉁이가 검게 떼가 타있는 그것은 그 안에 속지마저 너덜너덜한 꽤 오래된 것이었다. 뭐야, 이게. 그는 고통과 술기운으로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으며 다이어리를 대충 훑다가 주변을 둘러본다. 복도는 적막뿐이었고, 다이어리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술기운이 그의 뇌를 눅진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 분명했다. 어지러운 시선 안에 다이어리는 두 개가 되고 네 개가 되었다. 두어 번 고개를 휘저은 그는 그대로 다이어리를 집은 채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주인을 찾아 줄 생각도, 그렇다고 그 다이어리에 그렇다할 흥미가 있던 것도 아니라 자신의 행동을 뒷받침할 그럴싸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구지 그의 행동에 이유를 대자면, 그래, 술 때문이다. 취해서였다.


그리고 다이어리는 그렇게 커크의 어지러운 책상 한 구석에 아무렇게나 놓여졌다. 그는 입고 있는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침대에서 내리 여섯 시간을 잤고, 다음 날 자신을 부르는 호출 소리에 눈을 떴다. 어제 복도에서 주웠던 다이어리는 새까맣게 잊은 채 대충 몸을 씻고 옷장에서 어제와 똑같은 디자인의 옷을 꿰어 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평소와 다르지 않은 하루가 시작되었고, 다이어리는 그렇게 잊혀졌다. 그가 다른 서류를 찾기 위해 책상 위를 뒤지다가 그 다이어리를 다시금 발견되기까지는 약 일주일이 걸렸다.




***




사랑의 시작에 대해서, 인간이 살아오는 오랜 세월동안 많은 이론들이 있었지만 그것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이 세상에 존재할까. 심장이 빠르게 뛰고, 온 몸의 피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눈 안에 그 사람만이 담겨지는 그 몇 초의 시간을 어떤 유연하고 섬세한 언어도 완벽하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 밤톨 같은 짧은 머리를 한 동그란 뒤통수와 옆에 앉아있는 자신의 친구를 향해 돌아보며 웃고 있던 옆모습을 기억한다. 여름을 말하는 태양의 뜨거움이 대지를 내리쬐고 있었고, 그는 살짝 눈썹 끝을 찡그려 하늘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금색 긴 속눈썹 아래로 그늘이 져있었다. 그가 앉아있는 자리는 분수대의 가장자리였고, 공중에 분사되는 물방울들이 작은 무지개를 만들어 그를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여 놓았다. 어느 순간, 그는 나를 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 쳤다는 것이 조금 놀란 듯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눈가를 접어 그의 친구에게 했던 것처럼 웃는다. 안녕, 하고 말한다. 나는 그가 H를 발음을 할 때 이사이로 빠져나가는 듯 한 숨소리가 좋았다.


아마 어느 순간, 살아있는 감각이 무뎌지는 때가 온다면 그저 아무렇지 않은 기억 중 하나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 순간의 나에겐 그랬다. 내 지루한 인생 중 가장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은 날일 것이라고. 그 때 알게 된 것이다. 나는 그를 만나기 위해 이 세상을 살아왔다고.




***




계산이 맞는다면 일주일 뒤에는 마더쉽에 도착할 것이고, 그 후엔 지구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홈 Home. 5년 탐사의 종지부를 찍는 동시에 모두가 그토록 그리던 집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덕분에 모두가 약간은 붕 뜬 상태였음은 틀림이 없었다. 그나마 이성적인 스팍 마저도 두 눈에 반짝이는 약간의 흥분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귀환을 기뻐하는 사람들 중에도 그렇지 않은 무리들은 늘 존재하기 마련이고, 제임스 커크 역시 그 리스트 중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돌아가면 해야 할 페이퍼 워크나 함장 회의라든지, 아카데미 생도들을 위한 강연 따위 때문이 아니었다. 시간을 쪼개는 바쁜 스케줄은 차라리 잡다한 상념들을 지워주는 도구였다. 커크는 마지막으로 했던 어머니와의 통신을 떠올렸다. 5년 전 떠나올 때보다 훨씬 나이 들고 힘이 없는 그의 어머니는 그가 몸집이 커지면서부터 간혹 부르던 호칭인 '조지'를 연신 외쳐댔다. 어서 거기서 나와요, 조지. 제발 거기서 도망쳐요. 나와 함께 해줘요. 통화는 길지 못했다. 커크는 제 손으로 가여운 어머니와의 통신을 끊어버렸다. 


하지만 통신을 끊는다고 해서 잔상이 남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귓가에 맴도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그의 잠을 괴롭혔다. 결국 술을 마시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밤은 계속되었다. 지구로 돌아가 어머니를 마주할 것이 커크는 두려워졌다. 그는 자신의 비참한 진실을 외면하고 싶었다. 커크에겐 돌아갈 집이 없었다. USS엔터프라이즈의 최연소 함장, 대단한 업적들을 남긴 영웅, 그런 호칭들은 그의 고향집에선 빛바랜 훈장이나 다름없다. 그 곳에 남은 것은 아버지의 흔적들 뿐, 자신의 자리는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흔적들은 너무나도 위대하고 크기만 해서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절대로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게 불면과 트라우마와 싸우던 그 때, 그는 다이어리를 읽었다. 탐사 일지를 작성하기 위해 서류를 찾던 와중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지는 그것을 보았다. 커크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취했던 어느 밤에 그것을 주웠던 기억을 어렵사리 끄집어냈다. 그는 막 찾으려던 서류를 잊은 채 의자에 앉아 붉은색 가죽으로 된 다이어리를 겉표지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니셜이나 이름조차 새겨져 있지 않은, 하지만 누군가가 몇 번이나 읽어본 듯 거뭇한 손때가 묻어있는 그것은 따뜻한 색을 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열자 끝이 우그러진 오래된 속지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가장 첫 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사랑의 순간에 대해서.'


'조지 프랭클린'




***




우리가 사는 동네는 에든버러 도심에서 살짝 떨어진 작은 마을이었다. 그의 집은 따뜻한 회색빛의 돌로 만들어진 작은 집이었다. 쌓아 올린 불규칙한 돌들 사이에는 푸른색 이끼가 끼어 있었고, 일 년 중 날씨가 가장 좋은 7월이면 그 푸릇하게 올라온 이끼들에 윤기가 흐르는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작은 돌담 밑에 깔린 잔디들은 정원이라 하기엔 훌륭하진 않았지만, 그가 맨 발로 그 위를 딛고 있을 때면 그 곳은 어느 지상 낙원보다 더 생기로운 색을 띄곤 했다. 아마 어느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집이 작은 만큼 그의 방은 작고 초라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다 떨어진 벽과 낡은 가구뿐인 습기 가득한 방이었지만 그와 함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스프링이 나가 삐그덕 거리는 침대에 나란히 누워 나는 그가 하는 많은 말들을 듣는다. 유독 독특한 억양으로 읊어대는 말의 반 이상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나는 그가 말 할 때 짓는 입 모양이 좋았다. 무언가를 묘사하기 위해 허공에 휘젓는 손가락 끝이 동그란 게 좋았다. 어느 무엇이라도 좋지 않을 수  없을까. 나는 확실히, 깊게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찬란했던 나날들 동안 사랑은 내 곁에 머물렀다. 난 그의 작은 두 손에 내 온 삶을 쥐고 있게 내버려 두었다. 그의 말, 몸짓, 손가락 끝 하나로 나를 천국에 머물게도, 지옥으로 떨어트릴 수도 있었다. 자애롭게도 그는 대부분 나를 행복 안에 머무르게 했지만 나는 마냥 행복할 수만은 없었다. 천국이 그의 두 손에 있다면, 지옥은 내 안에 있었다. 현실 이면에 깔려있는 불안감을 벗어날 수 없었다. 내 핏줄이 만들어 놓은 책임감과 의무, 삶을 무겁게 하는 모든 것들이 언젠가 그와의 헤어짐을 야기하진 않을까 싶어서 두려웠다. 나는 시간이 흘러감을 두려워했다. 오롯이 그의 손 안에 묶여 있길 바랬다. 그것만이, 나의 유일한 소망이었다.




***




커크가 몽롱한 눈을 들어 올렸을 땐, 이미 하루가 지나가 있었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다이어리가 쥐어져 있었고, 눈앞에는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몽롱한 잠기운을 몰아내고 기억을 더듬는다. 다이어리를 읽다가 거기에 푹 빠져 침대에 아예 자리를 잡고 누웠다. 읽다보니 어느 순간 기억이 끊겼는데 아무래도 잠이 든 것 같았다. 커크는 시간을 본다. 족히 여덟 시간은 잔 것 같다. 꿈도 꾸지 않은 깊은 잠이었다. 그는 쥐고 있던 다이어리 페이지 끝을 살짝 접어 표시를 한 뒤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켰다. 술도 마시지 않은 채 이렇게 깊게 잠을 잔 것은 이 근래 처음이었다. 커크는 다이어리의 표지를 보았다. 부드러운 그 위를 손으로 한 번 쓸어내린 뒤 그는 웃었다.


다이어리는 누군가가 다른 이를 사랑했던 흔적이었다. 풋풋하고 싱그러운 감정을 생기 있는 말들로 솔직하게 표현해 놓았다. 그 글귀들을 읽으면서 그는 어쩐지 코끝에서 7월의 잔디 냄새를 떠올릴 수 있었고, 한 번도 가지 않은 스코틀랜드의 시골에 작은 집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었다. 글쓴이의 시선에 비춰지는 상대가 자신에게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만들어낼 수는 없지만 햇살 아래 노니는 맨 다리와 허공에 휘저어지는 동그란 손 끝 같은 것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것들이 메마른 화초처럼 죽어있던 커크의 마음을 적셨던 모양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토록 편안한 밤을 선사할 수는 없었을 테니.


통신기에는 세 번의 부재중 메세지가 떠있었다. 두 개는 스팍에게 온 것이었고 하나는 본즈에게 온 것이었지만 별로 특별할 것은 없었다. 서둘러 정리를 하고 다이어리를 배게 밑에다 밀어 넣은 커크는 방을 나섰다. 그리고 복도를 지나가다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여상한 풍경 중에서 묘하게 다른 점을 발견했다. 항상 같은 자리에 있는 물건이 다른 곳에 놓여있는 것처럼, 늘 자리를 지키던 누군가가 여느 때와는 달리 약간은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고 복도를 서성이는 것을.



"스카티?"

"아, 짐."



작은 토끼처럼 몸을 크게 떨며 고개를 드는 스콧은 동그란 눈으로 커크를 올려다보았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 입술을 파르르 떠는 것을 커크는 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뭐 하고 있어?"

"그게, 아니요. 뭘 흘렸던 것 같은데..."

"뭘?"

"아니, 아니에요. 여기가 아닌가 보네. 실례했어요. 아, 아까부터 스팍이 계속 찾던데 얼른 가보는 게 좋을 걸요? 잔소리 폭탄을 듣고 싶은 게 아니라면. 젠장, 그것보다 킨저 이 자식은 또 어딜 간 거야? Fucking! 어쨌든, 일 보쇼."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던 스콧은 커크가 무어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재빠르게 등을 돌렸다. 그런 그의 행동이 수상쩍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캐묻는다고 해서 알려줄 것 같지도 않아 커크는 그저 그의 잘생긴 눈썹 끝을 살짝 들어 올려 미묘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다. 손을 들어 어색한 인사를 하는 스콧을 따라 엉겁결에 저도 뻣뻣한 인사를 하고 등을 돌렸다. 기시감에 몇 번 고개를 돌릴 때마다 시선이 마주쳤지만 몇 번의 똑같은 인사만이 더 오갔을 뿐이었다.


그가 지나왔던 그 복도가 자신이 다이어리를 주운 곳이라는 것을 떠올린 건 브릿지에 도착하고 나서였다. 약간은 까칠한 목소리로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보고를 하는 스팍을 앞에 두고, 커크는 빨간 다이어리와 스콧에 대해서 떠올렸다. 다이어리에 적혀있는 스코틀랜드라는 지리적 특성과 지금 그의 행동으로 봤을 때, 어쩌면 아닐 수도 있지만 꽤 높은 가능성을 두고 명백하게 스콧은 자신이 집어든 그 다이어리를 찾고 있는 듯 했다.


커크는 책상 앞에 앉아 그 다이어리를 손에 쥐고 글귀를 써내려 갔을 조금 더 젊은 스콧에 대해서 떠올려 보았지만 좀처럼 연상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조지'라는 이름을 떠올렸는데 그는 그 이름에서 처음으로 아버지가 아닌 다른 사람을 떠올리게 되었다. 다이어리 가장 앞에 쓰여 있던 이름 '조지 프랭클린'. 다이어리가 그 '조지'의 것이라고 한다면 스콧은 왜 그것을 그토록 찾았던 것일까. 그러다가 문득 그가 썼던 글귀들을 떠올린다. 동그란 뒤통수와 미소 짓는 분홍색 입술, 허공에 휘저어지는 동그란 손끝과 잔디를 밟는 맨 발 같은 것들.


그러고 나자 모든 것은 명확하게 퍼즐이 맞춰졌고 커크는 제 앞에 스팍이 있음을 잊고 경악 어린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보고가 잘못된 줄 안 스팍이 의아한 표정으로 커크를 불렀을 때도 그는 자신이 인지한 사실을 되새기느라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그래, 그것은 기록이다. 조지 프랭클린이 몽고메리 스콧을 사랑 했던 어느 한 날의 흔적들이었다.




***




시간을 달리는 그에게 나는 과거일 뿐이다. 남겨진 것들은 우리가 지나왔던 장소들에 남은 잔상들 뿐 어느 것도 나의 사랑이 있었다는 증거가 되어주진 못한다. 그게 내가 이 글을 남기는 이유다. 화려하게 타오르는 불꽃 아래 남는 재처럼, 그를 향한 나의 사랑도 이 글로서 흔적으로 남을 테니.




***




다이어리를 본 주인에게 돌려줄 기회는 많았지만 커크는 그러지 못했다. 결국 다이어리는 여전히 그의 침대 배게 밑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따금 엔지니어 실에 가게 되면, 또는 갑자기 통신이 온다던가, 복도에서 스콧을 마주칠 때면 그는 말을 하려다가도 이내 다시 입을 닫아버리고 만다. 그 내용이 아주 사적인 것들이고 자신이 읽었다는 사실을 알면 스콧이 과연 이를 반겨할까, 자신을 경멸하진 않을까 싶어 커크는 감히 말을 꺼낼 자신이 없었다. 그 생각은 상당히 모순적이었다. 그가 스콧의 개인실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고 몰래 다이어리를 그 문 앞에 두고 오면 그만인 일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거기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밤마다 다이어리를 손에서 놓지 않고 글귀들을 읽고 다시 또 읽으며 단 잠에 빠져들곤 했다. 편안한 잠은 불면으로 고통 받던 그로 하여금 뿌리치지 못하는 달콤함이었고, 이런 모순된 행동의 원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풋사랑에 대해서, 절절한 마음을 유려한 말들로 표현한 '조지'의 글귀들은 커크를 중독 시켰다. 그것이 무엇 때문에 이토록 매혹적인지 설명할 길은 없었지만, 그랬다. 7월의 스코틀랜드, 작은 시골 마을에 있는 작은 집, 그 안에 아주 어린 스콧이 그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가끔씩 꿈결에 찾아와 그를 그 생기로운 기억 한 가운데에 머물게 하였다.


중독은 기어이 커크의 마음을 충동으로 물들여 놓았다. 마더쉽에 선박을 안착하고 지구로 향하는 셔틀을 탈 때, 예정대로라면 커크는 샌프란시스코의 스타플릿 지부로 향해 5년 탐사에 대한 보고를 마치고 아이오와에 있는 어머님을 보러 가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막 셔틀에 올라타려는 순간 커크는 떠올렸다. '사랑의 순간에 대해서'. 



"짐, 짐!!! 어딜 가는 거야?!!"

"갑자기 일이 생겼어! 스팍! 나대신 보고 좀 부탁할게!!"

"캡틴!! 캡틴!!! 짐!!!!"



얼른 안타고 뭐하냐며 자신의 어깨를 잡는 본즈의 손을 부리치고 커크는 방향을 틀어 달렸다. 등 뒤로 자신을 부르는 본즈와 스팍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커크는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고 다시 등을 돌렸다. 그는 자신을 향해 인사하는 수많은 크루들을 제치고 눈으로 연신 동그란 뒤통수를 찾아 헤맸다. 다행이 멀지 않은 곳에 그를 발견 했고, 커크는 그를 따라 셔틀에 올랐다. 뒤에서 울리는 요란스러움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내 놀란 듯 동그랗게 눈을 뜨고 커크를 올려다보았다. 그 때 그 복도에서 마주했던 것처럼.



"짐?"

"...스카티."



그리고 의뭉스러운 얼굴을 하고 스콧이 자신을 불렀을 때, 커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의 양 어깨를 잡았다. 커크는 그를 쥔 손에 힘을 주어 자리에 밀어 넣듯이 앉혔고 자신 역시 그 옆 자리에 앉았다. 목 끝까지 차오르는 밭은 숨을 고르고,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스콧의 얼굴을 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영문을 모른 채 자신을 향이 눈을 꿈뻑이는 그의 파란 눈과 금색 속눈썹을 보았다. 커크는 어색하게 웃으며 아랫입술을 씹었다.


뭐라 말을 해야 할까. 그러니까 이렇게 충동적으로 그를 따라 나선 이유에 대해서, 커크는 마땅한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단지 다이어리에 적힌 글들에 감명을 받아서? 꿈결에 나왔던 그 천국 같은 곳을 두 눈으로 보고 싶어서? 아니면 어머니를 피하려는 핑계거리?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커크 스스로에게도 충분히 납득되는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향해 의뭉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스콧의 이름을 시답지 않게 불러댔다.



"스콧, 스캇, 스카티."

"왜 그렇게 불러요? 불안하게. 혹시 셔틀 잘 못 탄 거예요? 내가 알기로는 본부로 가야 한다고 알고 있는데."

"아... 일정이 좀 틀어졌어. 그것보다 넌 어디로 가는데?"

"저야..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고향 집에 가는데..."

"잘 됐네. 같이 가자."

"뭐요?! Fucking! 짐, 제정신이에요? 아니 왜 우리 집엘 가겠.. 아니 이봐요, 캡틴. 나한테도 사생활이라는 게 있거든요? 왜 내가 직장 상사랑 그걸 공유해야하는 지..."

"직장 상사 이전에 친구 아니었어? Please, 스콧. 나 좀 숨겨 줘. 이유는 나중에 설명할게."



자신의 의견을 십분 피력해 스콧을 설득하는 일은 커크가 할 줄 아는 일 중에서 가장 잘하는 열 가지 안에 드는 일이었다. 사실 더 파고들어 이야기 한다면 자신의 집에 그가 숨어야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을 눈치 챌 테지만 스콧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들을 수 없는 몇 가지 단어를 내뱉었는데 대충 들어도 욕 같은 것이었다. 커크는 이를 모르는 척 도착하면 깨우라는 무책임한 말을 남기고 자는 척 눈을 감았다. 셔틀이 공중에 붕 뜨는 느낌이 들었고 욕지기를 하던 스콧 역시 잠잠해졌다. 그는 고르게 숨을 쉬다가 이따금 한 숨을 내쉬었다. 커크는 어쩌면 자신이 너무나도 이기적인 선택을 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이내 자신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는 손길을 느끼며 이 결정이 꽤 나쁘지 않은 것 같다며 스스로 안도했다.




***




내가 땅을 사랑하듯 그는 하늘을 갈망했다. 에든버러 홀리로드 파크에 위치한 아서트 씨트에 오를 때면 우리는 너른 풀밭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나는 등 뒤에 축축하게 젖은 풀들과 숨결에 들어오는 땅의 냄새를 맡았고, 그는 찬란한 창공을 물들이는 새파란 빛과 뭉치고 흐트러지는 구름들이 흘러가는 것을 보곤 했다. 


하지만 그 언덕에서 무엇보다 장관을 이루는 것은 밤의 하늘이었을 것이다. 그는 밤하늘 너머에 있는 별들과 무한한 우주의 세계를 꿈꾸곤 했다. 언젠가는 저 어둠 속을 유영하겠노라 말할 때면, 나는 홀로 어둠에 갇혀 있는 것처럼 숨이 턱턱 막혀 왔다. 그럴 때면 나는 질 좋은 흙처럼 부드러운 그의 손바닥을 손끝으로 간질였고, 그는 그런 내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얽고 고개를 돌려 나를 돌아봐 주었다. 그러면 에메랄드색 청량한 바다 같은 눈동자에 내가 담기곤 했다. 그럼 그의 세상엔 오롯이 나만이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고, 그제야 나는 그가 이 땅을, 나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져버릴 수 있었다.




***




런던 스타플릿 지부에 셔틀이 서고 다시 워털루 역에서 기차로 꼬박 세 시간을 달려 둘은 에든버러 피카달리 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기서 다시 택시를 잡아탔고 30분을 달리자 어느새 건물들은 사라진 푸른 초원과 돌로 울타리를 만든 작은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전 날 비가 왔는지 땅이 질척거렸지만 다행이 스콧의 집은 그리 먼 곳에 위치하고 있지는 않았다. 구두 밑이 더러워지는 것을 상관하지 않은 채 커크는 군말 없이 스콧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보았다. 다이어리에서 묘사한 것처럼 따뜻한 회색 빛 돌들로 만들어져 곳곳에 푸른 이끼가 껴있는 작은 집을.


기차 안에서 몇 번이나 당부했던 것처럼 스콧은 다시금 집이 꽤 오래되었고 지저분하니 불평하지 말라고 충고했고, 커크는 지퍼로 입을 닫는 시늉을 하며 긍정을 표현했다. 작은 돌담에 낡은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대문을 밀어 열고 스콧은 젖은 잔디를 밟고 안으로 들어갔다. 스콧이 문 옆에 작은 돌 틈 사이로 열쇠를 꺼내어 여는 동안 커크는 돌담과 집 사이 작은 마당을 보았다. 고르지 않은 잔디와 움푹 패여 있는 흙더미 같은 것들이 확실히 정원이라고 칭하기에는 부적절해 보였지만, 커크는 그 모습이 꽤나 일상적이라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삐걱 이는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작지만 아늑한 집안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괜찮은데?"

"뭐,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부모님 돌아가신 진 오래고, 동생들이야 시집 장가 가다보니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요. 나야 거의 지구 밖에 있거나, 있어도 거의 본부 연구실에 있는 편이니까... 푸우- 내일은 청소 좀 해야겠네. 아, 침실은 위쪽에 있어요."



가구 위에 올려둔 천들을 치우자 공중에 먼지가 날렸다. 콜록거리며 스콧은 사방에 창문을 열어 두었고 덕분에 북쪽 차가운 바람이 집 안으로 들이쳤다. 바람은 뿌옇게 올라온 먼지를 걷어냈고 선명한 시야 안에 집안 풍경을 보여주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가구들과 칠이 벗겨진 프라이팬이 걸려 있는 주방의 모습 같은 것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밟을 때마다 각기 다른 소리로 삐그덕 거렸고 커크는 그게 꽤 재밌게 느껴져 한 계단을 세 번씩 밟아대는 탓에 스콧이 기어이 짜증을 내게 만들었다. 


좁은 2층 복도에서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문을 향해 갔다. 문고리를 돌려 열자 작은 방이 보였다. 좁지만 아늑한 방이었다. 커크는 우선 문 정면에 작은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가구에 덮여 있는 누런빛의 천을 하나하나 거둬내었다. 창 아래 사람 하나가 겨우 누일 수 있을 만큼 작은 침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옆으로 작은 탁자 위에는 스탠드 외에도 작은 몇 가지 공구들이 있었는데, 이는 곧 이 방이 스콧의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지표이기도 했다. 책상 위로 공학에 관련된 몇 가지 오래된 책들이 놓여 있었고, 그 외에는 한 번 청소를 했던 모양인지 깔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작은 옷장도 있었지만 텅 비어있었다. 커크는 그 안에다 제 짐을 풀었다. 습기 때문인지 약간의 곰팡내가 났지만 그리 참기 어려운 정도는 아니었고 다행히 휴대하고 있던 옷 보관용 습기제거제가 있어 문제될 것도 없었다. 



"여기 쓰게요?"



한참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뒤에서 조금 당황한 듯 한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스콧이 문가에 짐을 들고 서있다. 아무래도 자기가 쓰던 방을 남이 쓰는 것이 당황스러울 법 했다. 하지만 커크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어.. 왜? 여긴 안 돼?"

"아니, 그건 아니고. 원래 제 방이였어서."

"아, 미안. 다른 데로 옮길까?"

"아냐, 아녜요. 짐도 풀었는데 뭘, 귀찮게. 그냥 제가 동생들 방 쓰면 되요. 신경 쓰지 마요."

"어, 미안, 스콧."

"됐어요. 짐 다 풀면 나와요. 장도 봐야 하고, 근처 펍 가서 한 잔 하게. 그것보다 괜찮은 거요?"

"뭐가?"

"본부 말이에요. 연락은 했어요? 함장이 무단으로 보고 거르면 징계감 아니에요?"

"스팍 대신 보냈어.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이미 런던에 도착하면서부터 그의 통신기는 불난 것처럼 울려댔고 커크는 스콧의 눈치를 보며 기어이 전원을 꺼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아까 확인한 바로는 총 서른 건의 메세지가 남겨져 있었는데 그 중 반은 본즈로부터 온 것이었고, 나머지 반의반은 스팍이었으며, 그 나머지 중 일부는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일을 떠맡겨 분노하고 있는 우후라로부터 온 메세지였다. 스콧이 방 밖으로 나가자마자 커크는 문을 닫고 본즈에게 통신을 걸었다. 몇 번 신호음이 울리지도 않았는데 본즈가 곧장 이를 받았고 동시에 스피커 너머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Damn it! 짐, 너 이 새끼 어디야?!]

"진정해, 본즈. 잠깐 일이 있어서 영국에 왔어. 일 끝나면 바로 복귀할게."

[너 사고치는 탓에 몇 명이 죽어나는 지 알고나 있어? 스팍은 당장 일 더미에 파묻힌데다가 덕분에 우후라는 온갖 히스테릭을 다 부리고 있질 않나, 체콥 그 꼬맹이가 도와줘서 다행이지. 게다가 난 네 거짓 진단서까지 만들어야 했단 말이야! 그거 아니었으면 넌 징계감이었다고!!]

"진단서? 진단서는 왜?"

[니가 외계 식물 독에 중독되어 요양 중이라고 둘러댔으니까 그렇지!]

"하하! 괜찮은 변명이네."

[너 그 홉고블린이 거짓말은 쥐뿔도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 빨리 복귀하는 게 좋을 거야.]

"일주일만 버텨줘. 일 끝나면 바로 갈게."

[일주일? 일주일?!! 야!!]

"본즈, 끊어. 나중에 얘기 해."



문이 열리는 것을 보며 커크는 다급하게 통신기 플릿을 닫았다. 타이밍 좋게 문틈 사이로 빼꼼히 스콧이 고개를 들이민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동자를 도로록 한 바퀴 굴려 방 안을 둘러보더니 커크를 본다. 준비 다했수? 나갑시다. 그렇게 말하는 데 그게 왠지 경계심 많은 소동물인 것 같아 왠지 가슴이 간질간질 거렸다. 그 간지러운 느낌이 커크는 불쾌했다. 남의 다이어리 좀 읽었다고 사랑에 빠진 냥 구는 자신이 우스웠다. 이래서야 자신에게서 '조지'를 찾는 어머니와 다를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서 커크는 그냥 웃었다. 그것 말고는 애초에 이곳으로 도망을 와야 했던 현실감을 떨쳐낼 방법이 없었다.




***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나의 사랑도...




***




둘은 동네에 있는 작은 채소가게와 식료품점에서 장을 보았다. 여느 시골동네가 더러 그렇듯 스콧이 집을 비운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주인들은 그를 알아보았다. 저쪽 회색집 몬티 아니니? 제법 정겹게 물어보는 할머니의 말에 스콧은 조금 어색하게 웃었었다. 네 안녕하세요, 답을 하면서도 좀처럼 시선을 맞추지 못하는 것을 할머니가 두 손을 잡아주며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고 부러 묻는 것을 보았다. 그건 식료품 점 아저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몬티형? 그는 스콧을 그렇게 반갑게 불렀고, 스콧은 그런 그의 눈을 피해 쓰게 웃었다. 그래서 커크는 스콧이 이곳을 떠나게 된 것에는, 그리고 오랜 시간동안 이곳을 찾지 않은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을 어귀에 있는 펍은 도심에 있는 것과는 달리 초라하고 아날로그적이었지만 나름의 분위기가 있었다. 어두침침한 펍의 한 구석에 자리 잡고 둘은 맥주 파인트를 하나씩 시켰다. 누군가가 오래된 주크박스에 오래된 노래를 틀었고 다른 쪽 테이블의 어느 노인이 그것을 따라 부르고 있었다. 글라스가 부딪히고 잔을 반 이상 비울 때까지 둘은 말이 없었다. 평소라면 무슨 말이라도 떠들어 댔을 그들이었지만, 서로가 말이 없음에도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커크는 아까 떠오른 상념을 지우지 못해 우울감에 빠져 있었고, 스콧은 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멍한 시선으로 주크박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맥주가 거의 바닥을 보일 때쯤 그는 입을 열었다.



"여긴 변하는 게 없어요."


 

쿵짝쿵짝 울리는 드럼의 비트 사이로 들리는 스콧의 목소리는 꺼질 듯이 아스러졌고, 커크는 용케도 그 사이에서 그 말을 찾아 듣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청회색 눈동자는 여전히 주크박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이 이렇게 많이 변했는데도, 심지어 행성에서 행성을 오갈 수 있는 트랜스포트 기술을 만든 장본인이 나인데, 내가 태어난 이곳은 여전히 저 고물 같은 동전 주크박스를 쓰고 있네요. 나오는 노래는 맨날 똑같아서 이제는 언제 적 노래인지 그 시대조차 찾기가 힘든데..."

"정겹잖아. 내가 난 곳도 시골이었어. 물론 저런 주크박스를 쓰진 않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있기 마련이지."

"발목이 묶인 기분이에요."

"...."

"여기에 있으면, 나는 여전히 스코틀랜드 촌동네 어린 남자애가 된 기분이에요. fucking, 그게 얼마나 엿 같은지 알아요?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그 때 그... 비린내 나는 어린 애로 생각 하는데, 여기 있는 나는 때가 탈 만큼 탄 어른이거든. 그러고 나면 하나씩 떠오르는 거죠. 달았던 어린 시절을 버리고 떠나온 내 비참했던 심정이 어땠었는지, 되새기고 또 되새기다 보면... 결국 찌꺼기처럼 남는 건 후회랑 미련 밖에 없어요. 그리고 나는 또 그걸 다시 외면하고..."



11시 30분, 바텐더가 라스트 오더를 외친다. 저만치 노래를 부르던 노인이 비척이며 일어나 다리를 질질 끌며 밖으로 나간다. 그러다가 제 쪽을 보더니 손을 흔든다. 오랜만에 봐서 좋구나, 몬티. 그러자 스콧은 흐린 눈을 돌려 노인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러다가 이마 그대로 탁자 위에 박아 버리고 만다. 술에 취한 것 같진 않았지만, 어쩌면 맨 정신이라 더 안 좋을지도 모른다. 커크는 스콧에게 어떤 위로를 건네야할지 말을 고르지 못했다. 코로 들이키는 것이 숨인지 아님 눈물인지 모를 정도로 펍 안이 온통 우울함으로 가득 찼다. 어설픈 위로 대신 손을 건넨다. 커다란 손바닥으로 동그란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커크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간음 할 수 없었다. 다행이 저를 올려다 본 스콧은 별 말 없이 다시 눈을 감고 자신의 손길을 느낀다. 아까와 같은 흐려지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장례식에 가질 못했어요."



주어는 없지만, 커크는 그것이 누군지 묻지 않았다.



"그래서 온 거에요."



'사랑의 순간에 대해서'. 그것은 스콧의 '조지'에 대한 환영이었다. 그래서 그걸 여지껏 가지고 다니면서 몇 번이나 읽어가며 상기를 시키다가도, 멋대로 잃어버릴 만큼 소홀이 하다가 다시 찾을 만큼 떼어 놓지 못하는 것이다. 그걸 털어버리고 싶어서 안간힘을 써보지만 '조지'가 남긴 다이어리와 변하지 않는 마을은 그를 그런 과거에서 쉬이 놓아주지 않는 듯 했다. 변하지 않는 것.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지금까지 쭉 한 사람만을 그리던 어머니를 떠올린다. 어머니의 '조지'. 지척의 어머니에게 어린 자신이 무어라고 했었던가? 어서 버리라고 했던가, 아님 지워버리라고 했던가. 그러자 커크는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말을 했었는지 새삼 깨닫는다.


버린다고 버려지는 것이 아닌데. 지운다고 지워지는 것도 아닌데.


자정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바텐더가 문을 닫을 준비를 하는지 잘그락 소리를 내며 잔을 치운다. 하지만 둘은 쉬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커크는 어머니의 머리를 쓰다듬듯이 스콧의 머리를 계속해서 쓰다듬었고, 스콧은 자는 건지 아니면 그냥 고개를 들 타이밍을 놓쳤을 뿐인지 이마를 탁자에 붙인 채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 신청곡이 남아 있었는지 주크박스가 다른 노래를 울려댔다. 장송곡처럼 느리고 우울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몇 세대를 거쳐서 다른 가수들이 제 개성에 맞게 불러오던 노래였다. Gloomy Sunday. 그리고 공교롭게도 자정을 넘긴 지금은 우울한 일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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