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새하얀 설원 위 아스팔트 길은 순백 도화지에 검은 선을 그려 넣은 듯 했다. 간간히 지나다니는 차들이 길 위를 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탓이었다. 때마침 드물게 날씨가 맑아 드라이브 하기에는 퍽 좋은 날씨였다. 새파란 하늘에 쨍하니 뜬 햇볕에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이 눈부신 풍경을 뒤로 한 채 검은 차는 조금 여유 없게 달리고 있었다. 바퀴에 갈린 눈이 질척이는 소리를 냈다. 차의 하면은 지나 왔던 먼 길을 보여주듯 온통 진흙으로 뒤덮여 있었다. 달리는 차의 속도는 빨랐다. 암만 체인을 끼웠다고 해도 미끄러운 눈길을 빠른 속도로 달리는 것은 위험할 법 한데도 차는 조금의 덜컹거림은 있을지언정 흔들림 없이 속도를 유지하며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달리고 또 달렸다.
신호를 잃은 라디오는 꺼진 지 오래 였기에 차체에서 나는 소리를 제외하면 차 안은 정적으로 가득 했다. 남자의 시선이 차의 계기판으로 향했다. 휘발유 양을 나타내는 바늘이 거의 끝을 향해 달아 있었다. 꽤 먼 거리를 가시네요. 목적지를 묻던 렌터카 직원이 차 키를 건네주며 그렇게 말했었다. 남자는 친절하게도 길 중간에 있는 주유소와 숙박업소를 알려 주었다. 남자의 말에 따르면 다음 주유소는 한 시간 반 정도를 더 가야 했다. 참 무모한 짓을 했다 싶어 남자는 스스로도 어이 없는지 입꼬리를 올리고 말았다. 예비 기름통을 싣고 와서 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꼼짝 없이 허허 벌판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을 지도 몰랐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차를 갓길에 세웠다. 속도를 줄이던 차가 서서히 숨을 죽이고 멈췄다.
문을 열자 언 공기가 순식간에 차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남자가 숨을 뱉을 때 마다 뿌연 입김이 공중에 흩날렸다. 진창 위를 밟으며 남자는 트렁크로 가 기름 통을 꺼냈다. 주유구를 열고 휘발유를 부을 때가 돼서야 주변을 살필 여유가 생겼다. 새파란 하늘을 한 번, 생명의 흔적조차 없이 하얗기만 한 대지 위를 한 번, 높은 설산까지 한 번 훑고 남자는 잠시 사색에 잠겼다. 겨울만이 머무는 곳이 있다고 했다. 짧은 여름이 잠깐 머물다 가고 나면 북쪽에서 오는 찬 기운이 대지 위를 다스리는 땅이라며 둥근 지구본 끄트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곤 했다. 이쯤 가면 자기는 무용지물일 것이라며,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면서 드물게 웃는 낯으로 농을 치곤 했다.
남자는 회상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달려야 할 길을 보았다. 길은 끝이 없는 듯 했다. 지평선 너머까지 이어진 길은 표지판 하나 없었지만 목적지는 분명했다. 남자는 시간을 셌다. 계산대로라면 앞으로도 내리 세 시간을 끊임 없이 달려야만 해 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합리적이지 않네. 한 숨처럼 뱉은 혼잣말이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일본에서부터 이 곳까지 20시간이 넘는 비행도 모자라 이 먼 길을 달려왔다. 기억 한 자락 붙잡고 온 길에 꽤나 멀었다. 무모하기 짝이 없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남자의 눈에는 결의가 가득했다. 설령 그 끝에 얻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지라도 반드시 도달하고 말 것이라는 악이 서려 있었다.
기름을 가득 채운 남자는 지체 없이 차체에 올라 탔다. 길은 멀었지만 남자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시동이 걸린 차가 서서히 길을 타고 움직였다. 그리고 아까와 같은 빠른 속도로 달렸다. 마치 멈추지 못해 달리는 것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쉼 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피에타
누구든지 사람의 피를 흘리는 자는 사람에 의해 자기 피를 흘리니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었기 때문이니라.
- 창세기 9장 6절
1.
장례를 치르기엔 퍽 안 좋은 날씨였다. 궂은 하늘이 아침부터 우중충하게 어둠을 드리우더니 식 시작 전부터 하나 둘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저 흐리기만 할 거라는 일기예보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우산을 꺼내는게 좋을까요? 옆으로 살그머니 온 야오요로즈가 물었다. 이런 자리가 익숙하지 않을 나이니 작은 것에도 조심스러운 모양이었다. 원한다면 그러도록 해, 라고 답하면서 부러 내 것을 받아 들지 못한 것은 행렬 제일 앞에서 이미 온 비를 다 맞은 아이의 작은 등이 눈에 밟힌 탓이다.
입은 양복이 품에 맞지 않았다. 애초에 예상 했던 일도 아니었으니 상복을 맞출 틈도 없었을 터다. 분명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정장 중 하나를 골라 입었을 게다. 그걸 홀로 차례로 꿰어 입고 넥타이를 반듯이 매고 있었을 아이의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 울기나 했을까. 더러 제 감정에 솔직한 편인 아이를 생각하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만, 정작 중요한 건 속에 꽁하니 묵혀두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 창백한 얼굴에 넋을 빼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믿기지 않았을 테지. 고작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일상을 살아오던 아이가 아버지의 옷을 입고 제 부모의 영정사진을 들게 될 일이 생길 줄 그 누군들 예상이나 했을까.
두 개의 관이 차례로 화장터로 들어갔다. 가족 묘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아이는 부모의 시신을 화장하기로 결정했다. 조문객들이 마지막 인사도 올리지 못할 만큼 새까맣게 타버렸으니 차라리 그 편이 나을 수도 있을 터다. 화장터에 연기가 올라오자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던 이들도 하나 둘 걸음을 돌리기 시작했다. 행렬 내내 들려오던 통곡 소리는 얕은 흐느낌으로 잦아 들은 지 오래였다. 그 공간에 쑥덕이는 말들이 자리했다. 아이 혼자 남았다죠? 아직 어린데 어쩌려고 그러나. 그러고보니 재산 처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친족도 없다는데. 아이가 웅영고에 다닌데요. 세상에 이런 일을 겪고도 영웅이니 뭐니 하고 싶을까.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하는 말들이 무지하기 그지 없다. 차라리 비가 내려서 다행이다. 빗소리에 씻겨 나갈 쓰레기 같은 말들을 아이가 듣지 않아도 될 테니.
끝까지 자리를 지키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학우 아이들을 야마다에게 부탁해 귀가 시킨 후 결국 시신이 잿가루가 될 때까지 남은 사람은 아이와 나, 둘 뿐이었다. 아이는 멍한 눈으로 서서 연소실에서 화장터 직원들이 잿더미 사이 뼛조각을 골라 내는 것을 보고 있었다. 검게 그을린 조각들은 인간의 일부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작고 초라했다.
“즉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다 꺼져가는 목소리로 아이가 입을 열었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한 마디 하지 않던 아이가 했던 첫 말은 대화를 걸어온다기보단 혼잣말과 비슷했다. 듣는 이가 있건 없건 상관 없는 재와 같이 흩어지는 말.
“고통의 역치가 가장 높은 게 화상이라는 거 아니까, 그래서…”
말은 더 끝을 맺지 못하고 끊겨버리고 말았다. 목이 메이는 건지 잦아드는 목소리를 끝으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러면서도 끝끝내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담담하게 제 부모가 담긴 작은 단지를 받아 들고 걸음을 돌릴 뿐이었다. 비는 계속 내렸다. 아이가 흘리지 못한 눈물을 대신해서 하늘이 우는 듯 그침 없이 쏟아졌다.
2.
일요일의 단잠을 깨우던 뉴스는 나에겐 아직도 밤새 꾸었던 악몽인 듯 몽롱하기만 했다. 티브이 가득 뜨는 문구들은 정신을 차리고 봐도 제대로 인식하기 힘들었다. 공중에서 땅 아래를 비추는 화면이 무너진 건물 잔해와 검뿌연 연기를 비추고 몇몇의 낯 익은 히어로들이 화재를 막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쇼핑몰에서 일어난 가스폭발사고. 냉랭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빠르면서도 제법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꽤 커다란 사고였고 많은 부상자가 속출했다. 화재 진압 후 한 시간 뒤 사망자 두 명의 명단이 떴다. 아들의 생일을 맞아 쇼핑을 나왔던 한 부부의 이름은 지나치게 익숙했다. 안타까움을 표하는 아나운서의 말을 뒤로 한채 기숙사로 향했다. 거실 앞 티브이 앞에 모여 있는 아이들과 그 가운데 창백한 얼굴을 한 아이는 차마 믿기지 않는 상황에 얼이 나가 있었다. 뻣뻣한 아이의 고개가 나를 향했다. 티브이의 소음과 아이들의 엇갈리는 시선 속에서 아이는 마지막 간절함으로 내가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기다리는 것 같았다. 이거 꿈이지? 아이의 눈은 그렇게 묻는 듯 했다. 차마 확인 사살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아 나는 질끈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고.
아이와 동행한 영안실에서 나는 그 언젠가 보았던 단란한 부부의 모습을 좀처럼 떠올릴 수가 없었다. 생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까맣게 탄 사체는 두 구가 엉겨 붙어 팔다리 구분조차 어려웠다. 그 잿더미 사이에서 찾은 소지품은 어머니의 손바닥에 박혀 있던 아이의 선물이 전부였다. 까맣게 그을린 금색 반지의 테두리에 식별이 어려운 글씨로 새겨진 글씨는 이러했다. 우리의 영웅, 카츠키에게.
검시관으로부터 받은 반지는 금은방에서 세척 과정을 거쳐 내게 안착했다. 그리고 그 반지는 다시 내 책상의 서랍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한시라도 빨리 아이에게 전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사실 장례식 이후 아이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볼 수가 없다는 게 맞는 말이겠지만.
아이는 당분간 학교를 쉬며 제가 당장 처리 해야할 일에 몰입했다. 대게는 부모가 남긴 재산에 관련된 법적 문제였다. 다행히도 생전 부모가 남긴 유언장이 전담 변호사를 통해 전달되었고 상속되는 재산에 대한 세부사항들은 아이와 변호사가 의논하여 처리 중에 있었다. 변호사로부터 전해 들은 말로는 살던 집을 팔기로 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자랐던 집이었지만 당장 주거할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아이는 미련 없이 그 집을 제 손에서 놓아 버렸다. 집 안 가구나 유품들은 일부 아이가 챙겨야 할 것을 제외하면 기부를 하기로 했고, 현금화 된 재산들은 아이 명의의 계좌로 입금 되지만 당장 필요한 돈을 제외하고는 예금 통장에서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묵혀 둘 예정이라고 했다. 아이가 부모님을 닮아서 똑똑하네요. 업계에서 냉정하기로 유명한 변호사는 칭찬 아닌 칭찬을 하며 못내 혀를 찼다.
제 또래에 비해 영민한 아이였다. 그 날, 사건 소식을 받고 신원 파악을 위해 서로 갔을 때 조차 처참한 제 부모의 시신을 앞에 두고도 아이는 검시관에게 언제쯤 장례를 치를 수 있냐고 물었다. 이미 치아 식별을 마쳤기에 가족의 신원확인은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다는 걸 사전에 설명했던 검시관은 아이의 태도에 조금 놀란 기색을 비췄다. 뭐, 대게는 아니라고 고집을 부려대서요. 매너리즘에 절어 참혹한 시신을 두고도 하품을 쩍쩍 하던 남자는 자신의 수고를 덜었다는 듯 안도하는 모양새였다.
이래서야 누가 어른이라고 해야할지. 나를 포함해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주변 사람들보다 아이는 빠르게 현실로 돌아왔다. 이 각박한 세상에 홀로 남아졌다는 것이 감정보다 이성을 요구했기 때문일까 아이는 더이상 ‘아이’라고 부르기 어색할 정도로 커버린 듯 했다. 열흘 정도가 되어 찾아온 아이는 조금 수척해진 것을 제외하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냥 멀끔해 보였다. 이거. 안부를 묻기도 전에 손에 쥐어진 것은 전학계 서류였다.
“개성을 못 쓰겠어.”
왜냐고 묻기 어려워져 말을 고르던 찰나에 아이가 먼저 답을 꺼냈다. 덤덤한 목소리가 평소와는 달리 차분했다. 덧붙이는 설명은 없었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폭발이 개성인 아이가 폭발로 부모를 잃었다. 개성 못 쓰는 것도 당연하지. 때문에 이런 상황이 벌어질 거라는 예상을 하지 못했던 것도 아니건만 막상 눈 앞에 닥치고 나니 백치처럼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계획은 있니?”
“일반고에 진학해서 앞으로 뭐 할지 천천히 알아보려고. 실업계로 가긴 하겠지만 아직 2학년이라 전공 찾을 시간이 부족하진 않을 거야.”
“집은?”
“변호사님 통해서 학교 근처 오피스텔 알아보는 중. 알아보는 대로 말해줄게. 기숙사도 빨리 나오는 게 맞는 것 같으니까.”
겨우 꺼낸 질문에 아이의 답은 막힘이 없었다. 마치 오랫동안 정해 놓은 것처럼.
“서두르지 말고 한 번만 더 생각해 보자. 전학을 가지 않아도 여기서 찾을 수 있는 일들도 있고, 나도 네가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있는지 좀 더 알아볼 테니까.”
비참하게도 선생이란 자가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이것 뿐이었다. 반듯이 접은 종이 위 정갈한 글씨는 확고한 아이의 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설령 설득을 한다고 해도 먹히지 않을 것이고 이런 상황에야말로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 맞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머릿속 이성이 이끄는 이해의 범주를 가슴이 따라가질 못했다. 대못이 심장에 박힌 것처럼 숨이 턱턱 막혀왔다. 스승이라는 빈깡통이나 다름 없는 직책이 가지고 있는 허울 뿐인 책임감과 그만큼 무겁게 나를 짓누르는 죄책감 탓일까. 고작 며칠도 되지 않는 날들 동안 견고하게 쌓았을 아이의 다짐과는 달리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 많은 아이들을 가능성이 없다는 말로 제적시킨 주제에 아이의 비극에 대한 책임을 지지 못한 내 이기를 채우기 위해 아이에게 의미 없는 시간 벌이를 요구 했다.
아이는 말이 없이 가만히 나를 내려다 보았다. 원래 성격대로 시간 낭비인 거 아냐며 빈정거리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이는 군말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결정되는 대로 알려줘. 내 속을 읽은 듯 아이는 그렇게 인사를 하고 교무실을 나갔다. 결국 내 의사의 문제일 뿐 제 결단은 번복되지 않을 거라는 속뜻을 모르는 척 했다. 아이가 쓴 전학계가 책상 서랍에 반지와 함께 안착 됐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얼마나 비겁한 겁쟁이인지. 덜컥 겁이 났다. 문득 내 시야에서 아이가 벗어났을 때 흐르는 시간과 함께 무능함이 불러온 죄책감마저 사라져 결국 내가 지금껏 걸어왔던 선생이라는 이름의 가치관이 그렇게 가벼웠다는 걸 실감하게 될 까봐. 인생에서 처음으로 길을 잃은 기분이 들었다. 현실은 아이를 달콤한 꿈에서 깨우고 나를 지독한 악몽에서 헤매게 만들었다. 그 악몽이 내 뒤를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거 같아 그래서 무서웠다.
3.
의무적인 주당 10시간의 상담시간이 주어지는 것으로 아이의 전학 문제는 조금 더 미뤄지고 말았다. PTSD 케어를 위해 공안에서 학교로 내려진 명령이었다. 상담이 진행되는 한 아이는 웅영고에 남아야 했다. 그 편이 관리가 편하다는 것이 공안 직원의 설명이었다.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아이의 의사는 가볍게 묵살되었다. 꽤나 부당한 처리였지만 아이는 언제까지? 라고만 물었다. 상담 결과에 따라 추후 결정된다는 답에 가타부타 말이 없다. 어차피 바뀔 게 없다는 걸 아는 게다.
덕분에 나만 조금 맘 편한 처지가 됐다. 치졸하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아이에게 내 무능을 보답할 수 있은 시간을 벌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어진 기회가 있을 때 뭐라도 해야겠다는 조급한 강박관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닥치는 대로 서적이며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는 자료들을 읽어 나갔다. 트라우마 극복, PTSD 증상, 비슷한 사건의 피해자 일화까지.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명확한 답변을 얻기는 힘들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는 수 밖에는. 때문에 상담에 동행할 아이의 보호자로 담임인 내가 지목되었을 때 학교 커리큘럼으로 스케줄이 안 맞는 걸 억지로 조정하여 어떻게든 시간을 냈다. 바쿠고군 일은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그게 네 잘못이 아니니까 무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카야마가 제법 단호하게 충고했지만 괜찮다고 하며 흘겨 듣고 말았다. 의무적인 책임을 져야할 명목이 없다라는 건 알지만, 그냥 이건 내 욕심이다. 아이가 괜찮아질 때까지 곁에서 지켜보기라도 하며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은 내 이기심.
“그다지 협조적이진 않아요.”
처음 상담을 갔던 날 상담 선생은 나를 따로 불러 냈다. 비밀 의무 조항을 위반하는 상담의의 결단은 아이에게 주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했다. 나는 그녀가 퍽 고마웠다. 나로서는 아이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아내기 어려웠다. 아이는 마치 말을 잊은 사람처럼 침묵을 고수했다. 한 해를 함께 동고동락하던 A반 아이들조차도 함부로 말을 걸지 못하는 눈치였다. 교정 안에서 어떤 누구보다 눈에 띄던 아이였다. 어느 부분 하나 친근함을 찾아보기 어려운 성격과 외모였지만 아이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인력이 있었다. 그렇게 괴롭힘만 당했던 소꿉친구 조차도 미워하지 못하게 하는. 그랬던 아이가 스스로 제 모습을 지워버리는 것을 보며 가슴 속에 돌덩이 하나가 들어 앉은 냥 묵직해졌다. 차라리 분에 못 이겨 전처럼 표출해 버리면 낫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얼마나 처참하면 저를 그리 쉽게 놓아버렸을까 해서.
“의무적으로 해야할 일이니까 한다는 느낌이지 치료를 원한다는 느낌은 아니에요.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 같은. 그래도 몇 가지 테스트를 하긴 했는데 결과가 썩 좋진 않아요.”
무늬 없는 책상 위에 여러 장의 종이가 올라온다. 여러가지 질문들이 수 놓아진 프린트지에 체크된 표시들과 간혹 답지 않게 정갈한 아이의 글씨를 볼 수 있었다.
“보통 PTSD 환자들 원인이 되는 사건이 대해 회피를 하면서 현실자각능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바쿠고군은 정확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어떤 일인지 인지하고 있어요. 철저하게 이성적이려 노력한다고 해야겠네요. 심리적으로 극단적인 통제 상태에 있어요, 바쿠고군은. 평소에도 크게 눈에 띄는 점은 없었나요?”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본 건 아니지만 확실히 전보다 말이 많이 없어졌습니다.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일도 없어졌고요. 그 일로 많이 지쳐버린 상태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말이 없어진다는 건 그만큼 억누르고 있다는 말이기도 해요. 미술 테스트 결과를 보면 바쿠고 군이 느끼고 있는 여러 증세들을 볼 수 있어요. 우울증, 자기비하, 죄책감 같은 것들. 이런 것들은 오히려 좋은 반응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적어도 원인을 알면 고칠 수 있는 것들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바쿠고군 스스로 의지가 없다는 거에요.”
내어진 종이 위에는 단색으로 그려진 그림이 있었다. 집과 나무 그리고 사람. 손에 집히는 색으로 아무렇게나 그려낸 것 같은 개성 없고 단순한 그림. 심리적인 것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확연하게 느낄 수 있는 건 그림이 아이를 닮지 않았다는 거였다. 명확하지 않은 모양과 흐릿한 선들은 요 근래의 아이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덧없는 눈빛으로 그저 시간을 때우기 위해 교실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아이의 무표정.
넌 누구보다 반짝여야 할 터였는데. 누구보다도 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삶에 대한 목적이 안보여요.”
그 날 장례를 치르며 태워버린 것은 부모의 육신만이 아니었다. 미래를 바라보며 꿈을 좇던 열여섯의 바쿠고도 재가 되었다. 남은 것은 살아 있기 때문에 숨을 쉴 뿐인 껍데기.
웃음이 나왔다. 스스로가 가소로워서. 도대체 뭘 위해 누구에게 뭘 해주겠다고 나선 건 지 싶어서 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어찌 하지 못하는 심정인 거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럴 수록 주변 사람들이 더 굳건해 져야 해요. 강인함으로 아이를 이끌어야 한다는 듯 상담사가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하지만 신이 아니고서야 나 따위가 죽어버린 아이이게 다시 숨을 불어 넣는 기적이 과연 일어나기나 할까. 이제는 나아갈 방향조차 잃은 내가 과연 아이를 이끌 자격이 되기나 할까.
나는 자신이 없었다.
4.
“어디라도 갈까.”
일생을 통틀어 충동적으로 뭔가를 행했던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상담실을 나오자마자 복도에 앉아 있던 아이를 보니 생각을 거치지 않은 말이 툭 튀어나왔다. 아이는 내 말에 조금 놀란 표정을 잠깐 지었다가 이내 외면하 듯 고개를 숙였다.
“어딜 가. 갈 데도 없는데.”
돌아갈 집이 없다는 말을 아이는 완곡하게 에둘러 표현했다. 하기사 목표만 바라보고 정진하던, 의외로 모범생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아이였으니 집 외에 따로 갈 곳이 있을 리가 없었다. 성격상 누군가에 기대기 위해 친구를 찾지 않을 터고 유흥을 즐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금 상황에선 더욱이 그럴 기분도 아니겠지. 하지만 어쩐지 나는 아이를 이대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기숙사 방 안에서 홀로 있을 모습이 머릿속에 아른거린다. 사방이 차단된 사각형의 방 안에 홀로 옹송그린 채 그 날의 일을 곱씹으며 조용히 스스로를 죽이고 있을 아이를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럴 필요 없어.”
내 생각을 읽은 듯 아이는 그렇게 말했다.
“교무실에서 선생들이 하는 얘기 들었어. 그 사람들 말이 맞아. 무리해서 스케줄까지 조정해가면서 이러는 거 불합리 하지 않아? 귀찮기도 할 테고. 상담 정도야 혼자서도 할 수 있고 여기 오는 버스가 없는 것도 아니니까. 그러니까 억지로 뭘 하려고 하지 마. 선생님은 선생님으로서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마음 쓰고 있잖아. 그거면 됐지. 무리해서 노력할 필요 뭐 있어. 어차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인데.”
지난 며칠간의 내 생각을 꾸짖기라도 하는 듯 아이는 그리 말했다. 목소리에 섞인 한숨 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그제야 상담 선생이 했던 말의 의미를 실감할 수 있었다. 의지가 없다는 것은 애초에 모든 희망조차 다 체념해버리고 만 거라는 걸. 본디 아이가 아이 다울 수 있게 하는 것들 제 손으로 버리고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향해 대뇌이고 있는 게다. 자신은 오롯이 혼자라는 것을.
“배고프다.”
멋있는 위로의 말 같은 것, 아이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수 많은 조언들을 책으로 읽고 또 읽었었는데 막상 나오는 건 그게 다였다. 아이는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처음으로 표정 없는 얼굴에 무언가가 그려졌다. 상담실을 나오며 온갖 걱정과 무거운 생각들로 얼룩진 긴장감이 사라졌다. 괜히 몸에 힘이 쭉 빠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그냥 했던 말이었는데 정말 배가 고픈 것 같기도 했다.
“그런 게 아니라 정말 배고파서 그래. 혼자 밥 먹기 싫으니까 너도 동행해라.”
“…명령이야?”
“부탁이야.”
그간 했던 수많은 고민들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나는 아이에게 무엇으로 비춰지고 싶었던 걸까. 뭘 해주겠다는 것, 결국 선생이고 어른으로써 아이를 돌보겠다는 의무감일 뿐, 그런 것이 과연 아이의 말 따마 무슨 필요가 있을까. 아이가 모든 것을 체념했듯이 나도 모든 것을 내려 놓았다. 내가 안고 있건 의무와 책임, 그리고 그게 빚어낸 죄책감도. 지금은 그냥 밥이 먹고 싶었다. 함께 식사를 하고 싶었다. 혼자 내버려두고 싶지 않으니까 같이 있어주고 싶은 것, 그것이 내가 지금 당장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것이었다.
고개를 들어 아이를 올려다 보았다. 아이의 새빨간 눈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이 들지 않았다. 그건 아이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지금 뭐 하자는 거냐는 듯 아이는 내 의도를 전혀 모르겠다는 듯 유심히 나를 훑어보았다. 지금까지 어른스럽게 재단된 모습만 보다가 주저 앉아 애처럼 때를 쓰는 꼴을 보는 것은 처음이니 그럴 만도 했다. 시선을 먼저 거둔 것은 아이가 먼저였다. 혼자서 밥도 못 먹어, 애도 아니고… 마치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며 아이는 씨근거렸지만 그래도 이내 손을 내민다.
“뭐해. 어서 안가고.”
하하- 나도 모르게 안도가 되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작고 다부진 손을 잡자 힘 있게 날 끌어 당긴다. 길을 잃은 나를 이끌어주는 이정표처럼. 잡은 손이 어색하게 붙어 있었다. 힘을 잃고 떨어지려는 손을 다시 그러쥐었다. 가자. 담담하게 말하면서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나보다 작지만 여리지 않은 굳은 손의 온기를 어쩐지 손아귀 안에서 내려 놓고 싶지 않았다. 이번엔 내가 이끄는 대로 아이가 따라왔다. 손을 마주잡아 주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뿌리 치지도 않은 채로 타박타박 내 뒤를 걷는다. 간혹 뒤를 돌아보면 왜? 라며 퉁명스러운 모습을 한다. 나는 그저 웃었다. 아이가 비로소 표정을 보이는 게 처음 보는 냥 신기해서, 그 표정에서 빛을 잃은 아이의 일면이 조금이나마 보이는 것 같아, 그게 안도가 되고, 그냥 좋아서, 그래서 웃었다.
5.
상담은 일주일에 세 번 월, 수, 금으로 고정되었다. 특별하게 내 스케줄이나 상담사의 스케줄에 변동이 없는 한은 그랬다. 하루 세 번은 외식할 수 있겠다. 조촐한 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후 상담 일정에 대해서 말하며 그렇게 언질을 하자 아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쥐꼬리만한 교사 봉급으로 그게 가당키나 해? 그러면서도 내가 저를 꼬박꼬박 바래다 주는 것에는 변동이 없다는 속뜻에는 부러 토를 달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날 이후에도 아이는 특별하게 달라진 게 없었다. 아이를 데려다 주고 난 다음날, 나는 전날의 표정은 지워버린 텅 빈 아이를 다시 마주해야만 했다. 간 밤에 누가 리셋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어제의 작은 표정들은 온데간데 사라진 듯 했다. 혼자 두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굳힌 것은 그 때부터였다. 상담이 없는 날에도 아이는 나를 마주해야만 했다. 거기에는 온갖 핑계가 따라왔다. 업무가 밀렸다는 이유로 서류 작성을 시키기도 했고 어질러진 책상 정리를 부탁하기도 했다. 기어이 신소의 훈련에 참여시켜 초 시계를 들고 반응 속도를 측정하라는 말에 아이는 바락 짜증을 내고 말았다.
“아 진짜, 내가 무슨 개야? 허구한 날 불러 제끼더니 이젠 뭐 이런 거 까지 시켜!”
쨍한 아이의 목소리가 왕왕 울렸다. 그렇게 소리를 내는 모습을 보는 것은 너무 오랜만이라 꾸짖음 보다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이거 끝내야 내일 상담 가는데 차질이 없어, 미안하지만 도와주라, 하며 머리를 한 번 쓰다듬자 저리 치우라며 고양이처럼 날을 세워 손을 쳐낸다. 자기 좋자고 가는 거 내가 모르는 줄 아나, 투덜거리면서도 아이는 착실하게 손에 초시계와 기록판을 들고 자리를 잡았다. 귀여운 자식. 그리 곱씹으며 몸을 돌리자 얼굴에 물음표를 가득 띄운 신소가 나를 보고 있었다. 왜? 라고 묻자 신소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답을 했다. 선생님 그렇게 웃는 거 처음 봐서요.
“나 그래도 꽤 자주 웃었던 거 같은데.”
“아뇨, 뭐라고 해야하나. 평소답지 않게 애처럼 웃는다 싶어서요.”
그런가. 애처럼 웃지 않으면 어른처럼 웃기라도 했던 걸까. 아이 앞에서 유독 웃음이 좀 헤퍼진 것 같긴 한데 의식하지 않던 일이니 영 모르겠다. 거울이 없어서 확인도 못하겠고 그냥 그런가 보다 넘겼다. 훈련이 끝나고 나서야 기록판을 건네는 아이를 보며 물었다. 내가 웃는 게 이상하냐? 그러자 아이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더니 답했다. 정신과 상담이 필요한 건 내가 아니라 선생님 같네. 졸지에 정신병자 취급만 당한 멋쩍음에 뒷머리만 긁적거렸다.
때마침 상담사에게 문자가 왔다. 금요일 상담을 일요일로 미뤄도 좋겠냐는 물음이었다. 모처럼 주말을 틈타 어디로든 갈 수 있겠다 싶어 덥석 좋다고 답해 놓고 아이에게 물었다.
“상담 일요일로 바뀌었는데 어디라도 갈래?”
전처럼 갈 데가 없다고 할지도 모르겠다는 예상과는 달리 아이는 조금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렇게 말했다.
“등산.”
“등산? 뭐 특별히 가고 싶은 산이라도 있어?”
“아니 그냥. 물어보길래.”
딱히 뭘 떠올리고 한 대답은 아닌 듯 어물쩍거린다. 그러고보니 취미가 등산이라고 적어 놓았던 생활 기록부 내용이 떠올랐다. 취미 생활을 이야기하는 건 그래도 긍정적이지 않을까. 미세하지만 차도가 있다는 상담사의 말이 불연 듯 떠올랐다. 어느 산 갈지는 네가 정해라. 이렇게 말하자 아이는 시선을 들어 나를 한 번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 말도 없고 표정도 없었지만 일요일이 다가오는 시간 동안 틈틈이 인터넷이나 잡지를 보며 갈 곳을 알아보는 아이의 모습이 어쩐지 들떠 보였다. 덩달아 나도 답지 않게 신이 났다. 체력 단련이 아니고서야 몸을 움직이는 건 대게 귀찮게만 느껴졌고 시간을 쪼개고 쪼개도 모자를 직장 일에 취미 같은 건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말하던 게 나였다. 그런 내가 좀처럼 시간이 느리게 간다고 문득 생각이 들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와 아이가 공유하는 시간은 비단 아이에게만 영향을 주는 게 아니라는 걸. 거울을 앞에 두고 웃어보았다. 웃는 얼굴이 남의 것인냥 어색했다.
6.
가정 방문을 갔던 날이 왜 문득 떠올랐을까.
생각보다 평범하고 단란한 가족이었다. 상대적으로 부드럽고 조용한 아버지와 당차고 똑 부러지는 어머니 밑에서 아이는 그 흔한 외동이 보일만한 외로움을 볼 수 없었다. 제 부모에게 하는 말투 같은 것들이 꽤나 버릇없으면서도 차를 내올 때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쟁반을 대신 받아 드는 태도에서 아이가 얼마나 안정된 애정을 받고 자라났는지 알 수 있었다. 납치 건으로 호된 꾸중을 들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호쾌하게 믿고 맡기겠다는 미즈키상의 말이 안심이 되었던 것은 아이가 아닌 바로 나였을 것이다. 내 책임 안에서 일어난 사고를 비난 받으리라는 불안을 아무렇지도 않게 씻어주었던 그녀의 말이 지금 머릿속을 왕왕 울리고 있었다.
“이거 참 합리적인 결정이네요.”
그 때 차라리 무릎을 꿇고 사죄를 했어야 했다. 하다 못해 장례식때라도 그랬다면 이제 와서 미즈키상의 그 말이 새삼 비수처럼 꽂히 진 않았을 텐데. 아이 하나 챙기지 못한 내 무능은 당신의 믿음에 응할 수가 없다고, 그 때나 지금이나 발전이 없다고.
내팽개친 서류는 찻잔을 건드리고 말았다. 위태하게 흔들리는 잔에서 찻물이 흘러 서류를 적셨지만 경찰서장은 부러 말이 없다. 아니 감히 말을 꺼낼 수 없는 거겠지. 침울하게 꺾인 고개가 그의 처참함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이미 너덜너덜한 걸레짝이 된 내 기분은 이를 헤아려줄 만큼의 관대함이 부족했다.
“그래서 원하시는 게 뭡니까.”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감기 걸렸어? 오전 중 만났던 아이는 그렇게 물었었다. 주말인데도 실습으로 바쁜 학우들과는 달리 모든 학교의 커리큘럼에서 제외된 아이는 비는 시간이 많았다. 습관적으로 매번 이유를 붙어 부르던 나를 이제는 안다는 듯 아이는 영특하게도 제 발로 교무실을 찾아왔었다. 서류 정리를 부탁하는 내 목소리를 듣고는 한참 뒤에야 지나가는 말로 툭 던진다. 감기 걸렸냐고. 중얼거림에 가까운 목소리엔 갈무리 되지 않은 걱정이 살짝 비치는 듯 했다. 목이 좀 깔깔해서 그래. 내일 외출하는 데는 문제 없다. 혹여 내일 등산 가기로 한 거 취소될까 봐 그러나 싶어 답하자, 누가 그거 때문에 그러는 줄 아냐며 툴툴거린다. 그리고 마지막 헤어지기 전 오늘은 잔업 하지 말고 일찍 자라며 하는 걸 보면 정말 내가 걱정됐던 거 같긴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혼자인 지 오래라 그런 걱정을 들어본 적이 근래에 없어서 그런가 싶었다. 기분을 들뜨게 하면서도 생소한 것들이 가슴 속에 채워졌다. 소풍 가기 전 초등학생이라도 된 것처럼 내일이 그렇게 기다려질 수가 없었다.
단 꿈이라도 꾸는 것 같았다. 이제는 자연스러워진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마치 내가 남들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것 같은 착각에 들게 했다. 히어로와 선생이라는 명찰을 단 이후로는 감히 넘보지도 못했던 고요한 평온. 그래서 더 내일이 기다려지던 그런 오늘이였어야 했는데.
교장의 호출을 받고 간 곳에서 경찰서장의 굳은 얼굴을 본 순간 깨달았다.
이제 꿈에서 깨야 할 시간이라는 걸.
“혼란을 야기 시킬만한 진실은 덮어두자라는 게 정부측의 입장이야. 이미 공안은 미디어 장악부터 들어가기 시작했네. 얼마전 터진 톱스타 연예인 열애설이나 모 히어로 비리설 같은 것만 봐도 그래. 우리 경찰 쪽에도 그 사건 관련해서는 불문에 부치라는 명령이 떨어졌네.”
“그런 것 치곤 입이 가벼우시네요. 친히 여기까지 와서 저에게 언질을 다 주시고.”
“이건 내 결정이야. 적어도 자네에게는 말해주는 게 맞다고 판단했네.”
“위에서 알면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자네가 함부로 이 일을 떠들고 다닐 거란 생각은 하지 않네만 혹여 그런다고 한들 그 책임은 내 몫이겠지.”
서장은 내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내 머릿속에 아이의 부모님의 모습이 고장 난 필름처럼 반복해서 재생되었다. 침울한 표정으로 내 판단을 기다리는 서장의 얼굴에 그 날의 내가 오버랩 되었다.
이해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서장의 잘못은 아니었으니까. 본인이 아이의 부모를 죽인 것도 아니었고 이를 덮으려는 것도 그의 입장이 아니다.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에 절대 복종을 해야하는 공무원으로서는 내게 이렇게 찾아온 것만으로도 최선의 선택을 한 샘이다. 나름의 양심적인 판단이었다.
“아이에게 뭐라고 설명하는 게 맞겠습니까? 지금처럼 그냥 우연한 사고인 것마냥 넘어갈까요? 아니면 사실대로 말할까요? 이름 없는 히어로가 언론의 주목이 필요해서 작당을 하고 일을 꾸미다가 실수로 가스관을 폭발했다고? 아무것도 모르고 휘말린 네 부모님의 죽음은 개죽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그렇다고 납득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서류를 읽어가며 쌓여 왔던 분노는 의미 없는 방향으로 향해갔다. 화의 대상은 서장이 아닌 그 이름 없는 히어로와 이를 덮고 보려는 정부에게 있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그러지 못했다. 절제되지 않는 감정들이 멋대로 혀를 잡고 놀리는 것 같았다. 진정해, 아이자와군. 옆에 있던 교장이 나를 억누르려는 듯 어깨를 잡아 챘지만 쏟아져 나오는 말들까지 주워담지는 못했다.
“야마자키 히데오, 레이저 건. 압니다. 들어본 적 있어요. 도지사 야마자키 도쿠로의 아들. 별 특출 난 재능도 없는데 제 아버지 이름을 등에 업고 히어로가 됐다고요.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어서 눈에 띄게 언론 몰이를 하려고 애를 썼었죠. 그것도 그저 히어로들 사이에서 조롱거리로 언급되고 마는 그 정도였습니다. 왜 아무도 말리지 않은 거죠? 그런 히어로야말로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다는 걸 왜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던 겁니까? 이런 사태가 일어나기까지 도대체 공안은 뭘... 왜 아무도... 왜 나는...!!!”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었다. 가십지에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나오는 히어로야 내 안중에도 없는 사안이었다. 잘난 아버지 둬서 운이 좋았네. 야마다가 떠드는 소리에 알 게 뭐냐며 그렇게 폄하하고 잊었다. 그게 부메랑처럼 돌고 돌아 내 주변에까지 미치리라곤 생각치도 못했었다.
“자네의 잘못이 아니야.”
“아뇨 우리 모두의 잘못입니다.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 갈 알면서도 방관한, 아니 우리가 만들어 놓은 이 빌어먹을 사회 시스템부터가 잘못이었죠.”
모두가 가해자다. 히어로는 돈을 위해 정의를 팔고 그 이득은 항상 있는 자들을 향해 손을 들어준다. 공안은 히어로들을 이용해 정부를 향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고 그러한 것들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이를 엔터테인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소비한다. 개성 사회에서 빌런은 계속돼서 생성될 것이고 히어로들은 이에 맞서 싸우며 사람들은 이들을 선망한다. 한 편의 잘 짜여진 쇼처럼. 이 물고 물리는 관계를 이용해 치안을 지키면서 동시에 배를 불리는 것은 결국 정부인 샘이다. 치안이라는 이름 하에 법률을 만들고 사람들이 한 눈을 파는 사이에 제 입맛대로 맞춰 쥐도 새도 모르게 이를 통과시킨다. 세금을 올리거나, 공안 사업을 확장한다거나, 그렇게 저들이 저지른 일을 무지한 시민들이 모르게 덮어버리도록. 그것이 지금의 사회 시스템이다.
그렇기에 정부는 여론의 영향을 항상 염두하고 있다. 아무리 가린다고 해도 사람들의 눈과 귀가 있다는 것을 아주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스테인, 히어로 살해자로 인해 빌런 연합이 배를 키우고 올마이트가 은퇴한 이후 여론은 더욱이 불안정했다. 아무리 엔데버가 정점을 지키고 있는다 한들 언제고 뒤집힐 수 있는 것이 사람 마음이라는 걸 감안 했을 때 정부 입장에선 히어로들에 대한 불안감을 키우는 이런 일을 공표해 좋을 것이 없을 것이다. 더욱이 상대는 도지사 아들이니 그 쪽에서도 입김을 넣었을 테지. 곧 선거철이니 괜한 일로 귀찮을 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은 게다. 결국 이 모든 이해관계를 모르는 채 부당함을 받아 들어야하는 건 피해자, 아이 하나뿐이었다. 정부 입장에서는 고작 작은 아이 하나 때문에 일을 크게 벌리는 수고 따윈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제야 모든 것이 들어 맞았다. 왜 공안이 나서서 아이의 전학까지 막고 나섰는지. 피해자 케어라는 명목 아래에 숨어 관리를 하고 있는 거다. 혹시라도 일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아이에겐 제가 직접 말하겠습니다. 덮어 놓는다고 해도 진실은 언젠가 수면 위로 올라오기 마련이고 그 때가서 더 상처 받을 아이를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으니까요.”
서장은 내 판단을 존중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이미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합리성만 따지고 보는 나라고 한들 이런 일에 입을 다물고 있지는 않을 거란 걸.
“그건 자네의 몫이니까 왈가왈부하진 않겠네. 하지만 아이가 섣부른 행동은 하지 않도록 잘 다독여 주게. 자네 말대로 이 일은 언젠가 수면 위로 드러날 거야. 지금 아이가 괜한 객기로 나서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 때를 기다리는 게 좋겠지. 그 때가 되면 나 역시 아이에게 사죄를 하겠네.”
결국 서장이 기어이 위험을 무릅쓰고 내게 진실을 밝히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감시와 감독. 꽤 자주 이런저런 사건에 휘말려 미디어에 얼굴을 드러냈던 아이의 단면만 보고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겠지. 결국 이 일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입장에서만 판단하고 있는 거다. 그 시꺼먼 어른들 잇속에 놀아날 아이는 생각도 못한 채.
과연 알기나 할까. 다혈질처럼 비춰지는 이면 아래 얼마나 많은 고뇌가 쌓여 있는지. 제 개성만큼 강렬한 인상이나 언행들과는 달리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냉정해 항상 부족하다는 불안한 조바심에 시달린다는 걸. 그래서 개성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 순간 지체 없이 제 오래 간의 꿈을 단칼에 잘라내 버린 아이를 안다면 감히 사죄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모든 이가 배가 부른 후에야 미루고 미뤄진 그깟 가벼운 사과를 한들 인생의 목표를 잃어버린 아이에게 무슨 보상이 되어줄 수 있다고. 재가 되어버린 아이의 부모도, 길을 잃은 아이의 미래도, 아무 것도 돌이킬 수도 없는데.
하지만 부러 입을 열진 못했다. 말한다 한들 이해하지 않을 거고 헤아리지 못할 거다. 침묵을 지키는 나를 본 서장은 자신의 의사가 정확히 전달되었다고 판단했는지 다시 한 번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서류를 챙겨 자리를 떴다.
“우리가 추구하던 정의는 뭘 위해서 였을까요.”
신념을 위해 악과 싸우고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영웅이 되었다. 남들처럼 이름을 알리지 않은 건 이런 시스템 아래 사람들의 오락거리가 되고 싶지 않아서였다. 언더그라운드에서 다른 히어로를 돕고 그런 그들을 꿈꾸는 아이들을 돕기 위해 선생이 되었다. 이 비틀린 사회의 시스템이 불합리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럴 수록 더 올마이트 같은 영웅다운 영웅들이 늘어난다면 세상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달라지는 거 없이 이 지경에 왔다. 생각뿐인 이상을 끌어 안은 채 권력자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날 뿐이었다, 나는.
“그치. 세상은 참 불합리해.”
한참 침묵이 길었던 교장은 한탄하 듯 그리 말했다.
“강자들에게 약자들이 희생되는 게 당연하게 되어 버렸어. 아이들이 이상만 꿈꾸며 히어로가 되기엔 힘든 세상이야. 하지만 그럴 수록 우리는 더욱이 신념을 가져야해. 이 사회가 더 나아질 수 있을 거라는 믿음. 아이자와군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
“그러니까 믿는 대로 행동하도록 해. 바쿠고군도 네게 배운 바가 있다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거야.”
물론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릴 수도 있고 그만큼 힘들 거라며 교장은 덧붙였다. 확신 없는 말이라는 걸 교장 역시 알고 있을 터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았지만 그래도 당장 해야할 바를 알려주듯 정신이 번쩍 들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못 볼 꼴을 보였네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짧은 인사에 교장은 고개만 끄덕이며 차를 더 들이킬 뿐이었다.
가야할 곳이 명확해 지자 걸음은 지체 없이 빨라졌다. 숨가쁘게 달려간 학생 기숙사 로비는 한산했다. 실습을 간 아이들이 자리를 비운 텅 빈 건물은 고요했다.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웅성거리며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아이들에게 답해줄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 벽면에 붙은 거울 너머로 좀처럼 끓어오르는 감정과 조바심을 숨기지 못하는 낯선 내가 있었다. 거짓말을 해서 상황을 둘러 대 봤자 금새 표가 나겠구나 싶어, 더욱이 지난 일 이후로 바쿠고의 일이라면 두발 벗고 나설 순진한 아이들을 알기에 그런 아이들 앞에서 이 얼굴을 보이지 않은 것은 정말 천운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감출 여력이 없었다.
바쿠고 카즈키, 프린트 된 글씨로 적혀 있는 문 앞 명패를 보고 심호흡을 했다.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해야할 말이 있는 것은 알지만 좀처럼 정리가 되지 않았다. 감정에 치우쳐 말을 뱉는 것은 분명 나 다운 일은 아니었다. 차라리 시간을 두고 마음이 가라 앉은 뒤에 말을 꺼내볼까 싶다가도 괜히 당장의 일을 지체해서 나아질 게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아니 그보다는 지금 이 끓고 있는 분노가 과연 시간이 지나도 가라 앉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이를 반증하듯 생각을 거치지 않은 채 내 손은 이미 아이의 방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네, 라고 짧은 답이 들려왔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방 문이 열렸다. 문틈 사이로 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 오기도 전에 밀치 듯 몸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갔다. 채 다 열리지 못한 방 문이 등 뒤로 닫혔다. 아이는 편안한 차림이었다. 내가 급하게 들이 닥친 것에 놀란 눈치인 것 같았지만 멀끔한 얼굴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어리둥절한 채 아이가 물었다. 하지만 다른 무엇들보다 내 신경을 끄는 것은 내 앞에 아이도, 언제라도 나갈 수 있게 가방 안에 고이 들어가 있는 아이의 소지품 같은 것들도, 내일을 위해 챙겨 놓았을 등산 용품 같은 것들도 아니었다.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하얀 단지. 화장터에서 오는 내내 제 손에 소중하게 꼭 쥐고 있던 작은 단지였다.
일찍 자라니까 왜 왔… 까지 말하다가 내 시선이 그 쪽으로 가는 것을 느꼈는지 아이는 제 등 뒤를 힐끔 보았다.
“아, 아직 어디다 둘 지 못 정해서 그래. 그럴 시간도 없었고.”
“….”
“아빠가 산을 좋아해서 같이 갔던 산에 뿌릴까 했는데, 할망구가 높은 데를 싫어하거든. 어릴 때 같이 갔던 바닷가는 너무 멀어서 내가 싫고… 그렇다고 납골당 같은데 놓자니 둘 다 싸돌아 다니는 걸 좋아했어서 갇혀 있는 거 보기가 좀 그래. 그래서 일단 보류 중이라 저기 둔거야. 신경 쓰지 마.”
아무렇지도 않을 걸까, 아니면 그런 척을 하는 걸까. 담담하게 설명을 하는 목소리는 건조했다. 극단적 통제 상태에 있어요, 바쿠고군은. 스스로를 억누르고 있다는 상담 선생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 했다. 왜 너만이 참아내야 하는 걸까. 사람의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덮어 둔 이들은 평안하게 제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왜 너만이 이렇게 악착같이 인고하며 스스로를 향한 원망과 비탄을 견뎌내야만 하는 걸까.
“왜 그래.”
왜 유약한 너에게는 슬퍼할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는 걸까.
“왜 울어.”
아이의 손가락이 볼에 닿았다. 닿는 손가락 아래로 물기가 느껴지고 나서야 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볼에 닿는 아이의 손을 잡았다. 단단하면서도 아직 여물지 않은 아이 같은 손이었다. 잡힌 손이 멈칫 하다가 망설임 없이 볼 께에 닿아온다. 손바닥의 열기가 볼 전체를 감싸자 터지듯 목 안쪽까지 밀려오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무지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볼 낯이 없어져 눈을 감아버렸다. 나도 모르게 고여있던 눈물이 눈꺼풀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네가 울지 않으니까.”
“….”
“네가 울지 않아서, 그래서 내가 대신 우는 거다.”
그렇게 입을 떼고 나니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심장 밖으로 터져 오를 듯 들끓던 분노들이 슬픔으로 얼룩져 주체 없이 눈물로 쏟아져 나왔다. 아팠다. 누가 손으로 심장을 쥐어 짜기라도 하는 것처럼 통증이 밀려왔다. 잡은 손에 자꾸 힘이 들어갔다. 참아 보려고 안간힘을 써도 도통 통제가 되지 않은 감정들이 밖으로 흘러나왔다. 나조차도 이렇게 힘든데 이를 참아 냈을 아이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 지 감히 상상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더 아팠다. 미안하다. 흐느낌 사이로 나는 끊임 없이 그렇게 중얼거렸던 것 같다. 미안하다. 의미 없는 사과가 무슨 소용이 있냐며 서장을 비꼬던 내가 흐려진 이성을 뒤로 한 채 진심으로 할 수 있는 말은 그것 뿐이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병신 같아, 진짜.”
하하- 하고 아이는 웃었다. 볼에 닿은 손이 목 뒤를 감싸고는 나를 끌어 안았다. 괜찮아, 그러니까 울지 마. 그 작은 몸으로 내 커다란 몸을 온통 가리듯이 붙들어 매며 아이는 그리 나를 달랬다. 나를 품는 아이의 몸은 따스했다. 실로 자애롭기 그지없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주제에 다짜고짜 찾아와 울분을 터뜨리는 나를 아무렇지도 않게 품어 주는 아이의 넓은 포용력이, 평온한 공기와 닮은 낮은 아이의 음성이, 내 등 뒤를 토닥이는 아이의 손과 맞닿은 가슴으로부터 전해지는 얕은 박동이,
“고마워.”
그런 네가.
“고마워, 대신 울어줘서.”
안쓰럽고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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