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nt, Choco, Cappuccino!

 

 

 

 

 






Cut 1. Good Morning, New York!

 

도시의 아침은 분주하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빌딩들의 창 너머 태양이 뜨기도 전에 거리는 사람들로 이미 가득하다. 언제나처럼 긴 아스팔트 도로는 주차장으로 착각하게 할 만큼 꽉 찬 차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빠앙- 하고 어디선가 울리는 클락션 소리를 기점으로 너도 나도 빵빵- 거리며 차들은 출근길을 재촉한다. 지하라고 딱히 다르지 않다. 낡은 지하철이 소리를 내면서 달리고 있었고 그 안에는 잠이 덜깬 사람들이 지하철의 덜컹거림에 맞춰 고개를 끄덕끄덕 거린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밀려 나온다. 사람들이 나오는 지상 위 인도에는 또 다른 사람들이 지나간다. 지난밤의 흔적을 지우는 미화원들이 거리를 청소하고 있고, 곧은 정장을 입은 아가씨가 핸드폰을 손에 쥔 채 통화를 한다. 지하철 역 안으로, 그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넥타이 부대들과 아이의 손을 잡고 등교를 시키는 부모님의 모습,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건물 밑 노숙자, 그런 평온한 풍경들이 이 도시의 아침 속 한데 어우러진다. 

 

하루의 시작이었다.

 

 

 

 

 

Story 1. 꽃길 - James T. Kirk (Star Trek) And Montgomery Scott (Star Trek).

 

 

#1.

 

"안녕하세요, 스콧 소령님."

"안녕, 캐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여느 때와 같은 아침이다. 단지 출근을 배로 한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뉴욕의 함대 주간도 아닌 9월에 LPD 상륙함이 뉴욕 항에 머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샌 안토니오급 USS 샌 프란시스코는 마이애미를 출발해 북대서양 연합 훈련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다만 그 일정 사이 윗사람들의 융통성 없고 무조건적인, 가을이면 열리는 해병대 마라톤 대회를 위해 최연소 함장인 '제임스 커크'가 자리를 빛내줬으면 좋겠다는 뭣 같고 어이없는 명령이 떨어진 게 문제라면 문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어쩌겠는가. 아랫사람이야 시키는 대로 복종해야 하는 입장이었고 온갖 욕을 해대면서도 결국 항로를 틀어 뉴욕으로 들어올 수밖에.

 

덕분에 다음 스케줄을 맞추려면 무리해서라도 일주일 안에 모든 출항 준비를 마쳐야 했다. 결국 선원 모두가 철야를 불사하고 일에 매달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특히 기관실장인 그는 항해 전까지 배의 컨디션을 최상으로 만들어 놓아야 했기 때문에 며칠 동안 숙소에서 고양이 잠만 자고 일어나 배로 출근하는 생활에 익숙해져야 했다. 어제도 세 시간은 잤나, 하는 생각을 하며 그는 흐트러진 옷깃만큼 풀어진 얼굴을 하고 하품을 쩌억 했다. 자고 싶다. 그렇게 중얼 거리는 걸 들었는지 옆에 함께 걷던 캐롤이 못내 웃었다. 그녀는 스콧을 불러 세우더니 흐트러진 옷깃을 잡아 매주었다. 어차피 기관실 들어가면 다시 엉망으로 구겨질 테지만 스콧은 가만히 그녀가 그러도록 내버려 두었다.

 

 

"일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뭐, 어쩔 수 없지. 책임자가 되면 남들보다 덜 일할 줄 알았는데, 또 그렇지는 않은가 봐. 기술팀은 어때?"

"어제 장갑차 열 대를 죄다 다시 점검했던 거 알아요? 허리 부러지는 줄 알았어요. 부함장님이 혼자서 열 명 몫을 해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우리도 어제 밤샘이었을 거예요."

"좋겠수. 난.. 요 며칠 몇 시간 잤는지 기억도 안 나네."

"자, 됐다. 자, 그럼 전 올라가 보겠습니다. 오늘은 대공 미사일 점검해야 하거든요."

"그래, 힘내."

 

 

갑판 쪽으로 올라가는 캐롤에게 손을 휘적휘적 흔든 뒤 그는 함선의 아래층 기관실로 향했다. 이미 와 있었는지, 아님 여기서 밤을 꼴딱 샜는지 낯이 초췌한 그의 선원들이 인사를 했다. 피곤이 잔뜩 껴서도 친절하게 일일히 그 인사를 받아주며 그는 자신의 기관실 한 구석의 업무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어지러운 책상 위에 쌓여있는 서류들을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제 손에 체크된 서류보다 안 된 것들이 더 많기 때문이었다. 이는 즉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왜 해군이 되었는가, 이럴 줄 알았으면 NASA에서 부를 때 얼른 따라갈 걸 그랬네, 미친다고 배에 미치다니 이런 미친놈아, 라고 신세 한탄을 중얼중얼 거리며 채상 위 서류를 정리한다. 어차피 정리한다고 정리가 되는 것도 아니었지만 지금처럼 잠에 잠식되어 뇌가 멍할 때는 이런 단순 노동이 편했다. 

 

얼추 책상의 바닥이 보일 정도로 정리를 했는데 잠은 좀처럼 달아나질 않았다. 결국 그는 구석에 있는 모포를 꺼내다가 책상 아래에 폈다. 딱, 10분만, 10분만 자고 일 하자. 인간의 최소 수면시간도 못 지켰는데 10분 정도는 봐주겠지, 하며 저 편한 생각을 한다. 그는 책상 밑으로 들어가 모포가 깔린 바닥 위에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그리고 머리를 대기 무섭게 고요하고 평온한 숨소리가 나즉이 들려왔다. 우웅- 기관실의 기계 소음이 여기저기서 울렸지만 미동조차 없이 이를 자장가 삼아 스콧은 이른 아침잠에 빠져들었다.

 

 

 

#2.

 

제임스 커크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세 가지를 대라고 한다면 첫 번째는 닥터 맥코이가 들이대는 뾰족한 주사바늘이었고, 두 번째는 부함장 스팍의 날 선 잔소리였으며, 세 번째이자 온 우주에서 가장 싫은 한 가지는 허례허식 좋아하는 늙은 상관들이었다. 즉, 이 화창한 대낮부터 뉴욕에 꼽아 준다는 고급 호텔의 레스토랑 한 테이블을 잡고 앉아 나이가 지극한 상관들과 오찬을 즐기는 이 시간이 커크에게는 지옥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와인이 담긴 잔을 들어 올리며 건배를 하는 그의 가식적인 미소 아래에는, 얼른 퇴역이나 하시지, 늙은 말꼬랑내 같은 노인네들아, 하는 욕이 더러 섞여 있었다. 물론 이를 아는 것은 옆자리에 동석한 맥코이 하나였기 때문에, 웃는 얼굴 사이에 가시 돋친 말을 은근히 섞어 하는 커크의 말이 들리지 않도록 오버스럽게 기침을 하는 것 역시 그의 몫이 되었다. 결국 목이 까끌까끌해질 때쯤 되자 참지 못하고 맥코이는 커크의 옆구리를 꾹 눌렀다.

 

 

"Damn it, 짐. 작작해, 저러다 눈치 채면 너 바로 징계야."

"바쁜데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노인 공경 한 거지. 젠장, 본즈. 고작 이딴 늙은이들이랑 식사나 하자고 항로를 돌린 게 아니라고.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무시하는 거였는데. 하필이면 캐롤 아버지가 마커스 제독일건 또 뭐야?"

"그게 아니더라도 니가 만약 그랬다면 명령불복종에 함선 탈취죄까지 더해져 바로 니미츠급 CVN-77이 우리함선 옆에 떴을 거야. 넌 징계가 아니라 징역을 살 테고. 한... 100년 정도?"

"아, 빌어먹을."

 

 

이제 입술 끝은 어색하다 못해 경련이 날 지경이었다. 커크는 당장 이 불편한 자리를 벗어나 자신의 동료들이 있는 함선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이라크전 전쟁영웅으로 유명한 아버지 뒤를 따라 해병대에 들어온 것과는 별개로 커크는 제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물론 군 특성상 많은 부분에서 제약을 받는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나 그걸 감안해낼 정도로 그는 제 일에서 열심히 살아왔다. 그 덕분인지 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여 차근차근 쌓아온 여러 가지 공적으로 이례 없는 초고속 승진을 이뤄냈다. 그렇게 그는 신형 샌 안토니오급 LPD함선의 함장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다만, 영웅의 아들이자 군 내 젊은 다크호스라는 그의 별칭이 이런 불편한 자리를 야기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높은 곳에 오르려면 인맥이 중요하다면서 이런 자리에 나오는 게 좋을 거라고 하는 제독들의 뼈 있는 조언과는 달리 커크는 이제 승진은 됐으니까 평생 배나 타게 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물론 그렇게 말했다간 맥코이의 말처럼 군 징계감이니 가만히 입 다물고 있을 수밖엔 없었지만.

 

 

"그러고 보니 대령, 누구 만나는 사람은 없나요? 이렇게 멋진 사람을 아가씨들이 내버려둘 리 없을 텐데."

"따로 없으면, 우리 딸 한 번 만나보는 건 어때요?"

 

 

그리고 이런 자리에 항상 빠지지 않고 나오는 말들이 있었다. 눈에 욕심이 먼 상관들 옆자리를 꿰어 찬 채 앉아 있는 그네들의 사모님들은 그 우아한 얼굴 아래에 은근한 욕심을 내비치며 그를 대할 때가 있었다. 공식적으로 커크는 미혼이었고, 또 유능했으며, 잘 생기기까지 했으니 그만한 사윗감이 또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가족관계를 이용한 인맥 역시 군 내에서도 무시할 게 못되기 때문에 상관들은 그런 그녀들의 말을 애써 사생활이라 에둘러 제지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물론 그런 모든 이의 기대를 꺾어버리는 것이 커크가 제일 잘하는 일이긴 했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눈을 한 그녀들을 향해 커크는 정중하게 손을 내저었다.

 

 

"죄송합니다. 따로 만나는 사람은 없지만,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요."

"어머, 아쉬워라. 도대체 어떤 아가씨길래 커크 대령의 마음에 쏙 들었을까 궁금하네요."

 

 

진심으로 아쉬운 얼굴을 하는 사람들 앞에서 이번만큼은 표정을 숨기지 못한채 커크는 씁쓸하게 웃었다.

 

 

"귀엽고 솔직한 사람이에요. 자기 일에 열정이 있고, 그 분야에서는 천재 소리까지 듣는 유능한 사람이죠. 처음 만날 때부터 쭉 지금껏 마음에 담고 있는데 눈치가 느린지 좀처럼 알아주질 않네요."

"안쓰럽게도... 이야기는 해봤나요?"

"뭐.. 아시다시피 제가 바쁘기도 하고, 상황이나 이런 것들이 잘 도와주지 않네요."

"무슨 소리 하는 거에요. 짐. 잘난 줄 알았더니 연애에는 영 쥐약인가봐요?"

 

 

가만히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마커스 부인이 쾌활한 목소리로 날카롭게 쏘아 붙였다. 그녀는 캐롤과 똑같은 외모에 똑같은 성격을 가진 대장부 기질을 가진 여자였는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제독 역시 집에서는 그녀에게 꼼짝도 못한다는 말들이 있었다. 그 정도로 그녀는 당차고 솔직했으며 세월에 따라 쌓여진 현명함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따금 캐롤이나 제독을 통해 마주한 그녀는 스스럼없이 커크를 아들처럼 대했고 가감 없는 조언 역시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우아하게 고기 한 점을 썰어 입에 넣으며 새파란 눈동자로 커크를 바라보았다. 커크는 왠지 고향에 있는 어머니가 제 앞에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을 일으켜 입을 꾹 닫았다.

 

 

"말 안하면 누가 알아요? 사람 속은 천길 물갈래라는데, 당신이 아무리 행동으로 은근슬쩍 표현한다고 해도 상대방에 제대로 알아들을 확률이 얼마나 있겠어요?"

"사적인 감정을 우선시하기엔 제가 책임져야 할 것이 너무 많아서요."

"짐, 직위니 뭐니 사랑 앞에서 무슨 소용이에요? 어쩜, 우리 남편 총각 시절이랑 똑같은지. 승진을 한다, 시간이 없다, 멀리 떨어져 있을 지도 모른다, 블라블라블라... 무슨 변명이 그렇게 많은지... 그냥 용기가 없는 거겠죠, 짐. 설마 상대가 그거 하나 이해 못 할 것 같아서 그래요? 적어도 고백을 받는 입장에서는 그런 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아요. 뭐 차이면 어쩔 수 없겠지만, 적어도 속은 후련해지겠죠."

 

 

그녀는 혀를 끌끌 차면서 들고 있던 나이프로 커크를 정확하게 가리켰다. 그리고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멍청한 소리 말고 당장 고백해요."

 

 

 

#3.

 

오찬 후 돌아가는 택시 안은 조용했다. 다행히 러시아워 시간이 지난 도로는 막히진 않았고, 택시는 빠른 속도로 뉴욕 항을 향하고 있었다. 본즈는 아까부터 말이 없는 커크를 흘끔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에 빠졌는지 아까 마커스 부인이 했던 충고 이후로는 급작스럽게 말수가 줄어들었고 택시 타고 나서부터는 입 뻥끗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차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본즈는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속이 답답했다. 제 연애도 아닌데 더 마음이 쓰이는 것 같다. 커크가 품고 있는 마음의 무게와 이에 비례하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본즈는 모르지 않았다. 생각이 많아지면 용기도 사라진다고, 커크의 지금 상황이 딱 그랬다. 차라리 생도 때처럼 멋모르고 질러버렸음 좋겠는데, 제 생각만큼 그게 쉽지 않은 듯 했다. 결국 몇 분의 침묵이 더 흐른 뒤에 본즈는 넌지시 물었다.

 

 

"그래서, 말 할 거야? 스코티한테."

 

 

그 말을 들은 커크가 창 밖에 머물렀던 시선을 떼고 본즈를 돌아본다. 잘생긴 미간이 미묘하게 좁혀져 있었다.

 

 

"잠깐, 스코티인 줄 어떻게 알았어?"

"내가 바보냐? 그렇게 티를 내는데 모르게. 아마 선원 중에 걔 빼곤 다 알 거다."

"....스팍도?"

"그 홉고블린이 아무리 감정에 무디고 눈치가 없어 보여도 걔 여자친구가 우후라야. 그쪽 네트워크가 얼마나 빠른지 너 모르지? 너 스코티랑 쉬는 시간 맞춘다고 근무 스케줄 조정하는 거 보면서 이런 일로 사람 귀찮게 할거면 차라리 고백을 하라고 투덜거리더라."

"아.. 망할, 그렇게 티났어?"

 

 

그걸 말이라고 하냐?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치고 올라오는 걸 본즈는 억지로 삼켜냈다. 조금만 짬만 나면 온갖 핑계를 대서 기관실에 내려가고, 내려가서 또 달리 하는 일이 있는 게 아니라 구석에서 스코티 일하는 거 가만히 보고 있다가, 점심시간쯤 되면 먼저 같이 밥 먹자고 하는 것도 부지기수, 근무 스케줄 맞추는 건 둘째 치고, 저녁 때 다 같이 술이라도 마실라 치면 모르는 척 옆자리 꿰어 앉기까지 하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할 정도다. 심지어 지난 항해 때 스코티가 계급장이고 나발이고 기관실에 인원 보충 해달라고 안 해주면 당장 하선할거라고 떽떽 거렸을 때, 상관한테 예의는 밥 말아 먹었냐고 버럭 화를 내놓고 정작 화해할 때까지 어쩔 줄 몰라 하며 기관실 복도 앞을 왔다 갔다 한 이야기는 이미 선원 전체가 아는 유명한 일화였다. 아마 스코티도 말은 안 해도 알고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본즈는 애써 그 말을 꺼내진 않았다. 언젠가 적당히 자기가 말 하겠지, 라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이제 보니 이것도 기우였던 모양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무덤 안에 썩어 들어갈 때까지 말 한 마디 못할 것 같다. 본즈는 내리 한숨을 쉰다. 어차피 말 나온 김에 정리 해버려야지 모든 이가 편하겠다 싶어서 그는 그만 커크의 이 애처로운 삽질을 그만두게 만들기로 했다.

 

 

"너 그러다 누가 채간다. 걔 은근히 인기 많은 거 알지?"

"차라리 진작 그랬으면 마음 정리라도 편했을 거야..."

"그래? 그럼 캐롤한테 말해줘야겠네. 안 그래도 스콧한테 마음 있던 것 같은데."

"뭐???!!!"

"그러고보니 오늘 근무 시간도 겹치는 것 같던데... 가자마자 말해줘야 겠다. 아니다, 문자 보내놓으면 보겠지. 너도 빨리 마음 정리하고 좋지 않겠어?"

 

 

진짜 당장 문자라도 할 모양새로 본즈는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화면을 채 켜기도 전에 커크가 핸드폰을 낼름 채간다. 그의 얼굴은 온갖 배신감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본즈는 속으로 웃었다. 마음이 정리한다고 해서 되나, 멍청한 놈. 속으로 그런 말을 씨불이며 본즈는 애써 올라가는 입 꼬리를 내리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능청스럽게 표정 관리를 했다. 왜 그래? 라고 묻자 저도 혼란스러운 지 한참을 생각하다가 이내 단호한 얼굴을 하고 답한다.

 

 

"안 돼."

"짐, 넌 맘 정리 할 거라며. 걔한테 호감 있는 애들이 너 때문에 눈치 보여서 말도 못하고 있다고. 언제까지 걜 홀아비로 만들어 놓을 생각이야? 그리고 캐롤 정도면 스콧한테 차고 넘치지. 둘이 분야도 비슷해서 말도 잘 통하고, 아버지 빽도 있겠다, 걔 군생활도 좀 나아지지 않겠어?"

"내가 언제 걜 홀아비를 만든다고... 그리고 빽은 나도 있어."

"누구? 니 아버지? 아서라, 돌아가신 지가 언젠데..."

"나. 내가 걔 빽이지."

"그러니까 너 맘 정리 한다고..."

"아 말 하면 되잖아!!"

 

 

빼액 소리를 질러놓고 또 입을 꾹 다물었다가 이내 결심이 선 듯 다시 말한다.

 

 

"말 한다고. 그러니까 연락 하지 마."

 

 

그 말에 본즈는 어깨를 으쓱 했다. 그러던지. 그는 태연하게 커크의 손에서 제 핸드폰을 빼앗아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목적달성을 했다는 듯 후련한 얼굴을 하고 차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창밖을 보았다. 옆에 커크는 난리도 아니다. 다리를 달달달 떨면서 초조하게 손톱을 씹어대다가 결국 기사를 불렀다.

 

 

"저 앞 꽃 가게에서 잠깐만 세워주세요."

 

 

본즈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4.

 

말은 쉽지. 커크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홧김에 고백하겠다고 꽃까지 사들였지만, 막상 고지를 눈앞에 두니 떨리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기관실 문 앞에 우두커니 선 그는 흐트러진 앞머리를 빗어 올렸다. 들고 있는 한 다발 빨간 장미가 기관실 복도 침침한 불빛 아래에서도 아름다운 빛을 냈다. 하지만 정작 커크는 이를 감상할 여유가 전혀 없어보였다. 같이 저녁이나 먹을래? 아니지, 내가 널 좋아하는 것 같은데... 무슨 십대 어린 애들도 아니고. 술이나 한 잔? 바쁜데 무슨 술타령이냐고 성이나 안내면 다행이겠네, 젠장. 그는 입으로 계속 중얼중얼 혼잣말을 했다. 식상하기 짝이 없는 고백의 말들이 머릿속에 어지럽게 지나갈 때마다 손에 자꾸 땀이 찬다. 그는 큼큼 목을 가다듬고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한 후 그는 기관실 문을 열었다.

 

기관실 안은 혼잡 그 자체였다. 3교대로 밤샘작업을 해야 할 정도로 바쁘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긴 한 모양이었다. 그에게 경례를 하면서도 빠르게 움직이는 선원들을 보며 커크는 아까 먹었던 음식이 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움직이는 사람들 중 그가 찾는 단 한 사람은 보이질 않았다. 타이밍이 안 좋나 싶어 지나가는 선원 하나를 붙잡고 물어보자 제 생각과는 달리 선원은 그가 들고 있는 꽃을 슬쩍 보고는 웃는 낯으로 구석 기관실장 업무 실을 가리킨다.

 

 

"저 쪽에 계세요. 곤해 보이셔서 깨우진 않았는데..."

"자?"

"네, 깨울까요?"

"아냐, 괜찮아. 내가 갈게."

 

 

호의를 보이는 선원에게 손을 휘저으며 커크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구석 사무실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보자 저 바깥만큼 어지러운 사무실 풍경이 보인다. 바깥의 시끄러운 소음이 조용한 사무실 안을 채우자 커크는 얼른 다시 문을 닫았다. 조금이나마 차단되는 소리에 안도하며 그는 사무실 안을 살핀다. 스콧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스카티?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보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는 어슬렁어슬렁 거리다가 책상 아래로부터 삐죽 나온 발을 보았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바닥에 모포 하나를 깔아 놓은 채 자고 있는 스콧이 보였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에 추운지 몸을 바짝 웅크리고 있는 것이 작은 동물 같아서 커크는 순간적으로 아까까지 자신의 속을 헤집던 긴장감이 순식간에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픽- 하고 바람 빠지듯 웃어버리고 말았다.

 

달게 자는 모습을 보니 깨우기 미안해져 커크는 대신 스콧이 누워있는 옆자리에 똑같이 모로 누웠다. 그리고 제 시야에 담기는 스콧의 모습을 여기저기 훑어보았다. 피곤이 낀 감은 눈 옆에 작게 진 주름이나, 얇고 뽀송한 희고 얇은 피부에 진 빨간 홍조, 오똑한 코끝이 둥그스름한 것과 옅게 숨을 내쉬는 얇은 입술로 시선이 내려왔다. 기계의 소음과 거기에 섞이는 숨소리가 귓가를 메우고, 빛이 옅은 입술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충동적이었다. 커크의 얼굴이 가까이 붙는다. 설핏 감기는 눈,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고 닿을 듯 말듯 코앞에서 멈춘 입술이 조금 망설이다가 꾸욱- 하고 도장을 찍듯이 붙는다. 여린 살에 붙는 느낌이 부드러우면서도 찼다. 축축하지도 건조하지도 않은 말랑한 입술에 붙었다 떨어지는 느낌은 가볍고 푹신했다. 커크는 감았던 눈을 얇게 떠서 제 앞에 있는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분홍빛 혀가 아랫입술을 핥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입술 위 콧망울을 지나 시선을 올리자 여전히 감고 있는 눈꺼풀이 보인다. 속눈썹이 곧 열릴 것처럼 파르르 떨렸다.

 

 

"좋아해."

 

 

나직한 목소리가 흐르듯 그 말을 토해낸다. 사무실을 울리고 있는 작은 소음들과 겹쳐져 거의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고백이었다. 바르르 떨던 눈꺼풀이 서서히 열리고 회갈색 잠에 취한 흐린 눈동자가 커크를 바라보았다. 스콧의 손이 커크의 가슴팍을 움켜쥔다. 엉망으로 구겨지는 제복을 끌자 커크의 몸이 더 가까이 딸려 들어간다. 가까워지는 몸 사이에 제 몸을 끼워 넣는다. 바스락거리며 둘 사이에 껴있던 장미꽃들이 엉망으로 눌리고 부서진다. 하지만 그런 것에도 아랑 곳 없이 스콧은 커크의 팔베개를 하고 손을 등 뒤로 둘러 꼭 붙은 채 품에 오롯이 안긴다. 그러더니 다시 몽롱한 눈을 감는다.

 

 

"10분만.."

 

 

쉬고 갈라지는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다시 잠에 빠진다. 그것이 고백의 답인 건지, 아니면 잠결에 듣지 못한 것인지 구분이 되질 않았다. 하지만 커크는 웃었다. 안기는 몸을 팔로 꼭 안고 나자 스스럼없이 가슴팍에 얼굴을 부비며 등을 간질이는 손은 말로 뱉어내지 않아도 답이 되기에는 충분했다. 긴장했던 마음이 풀리자 이상하게 졸음이 밀려왔다. 깜빡이는 눈꺼풀이 서서히 느려지더니 이내 눈을 감는다. 두 사람의 단조로운 숨소리가 기계소음 속에 섞인다. 그것을 자장가 삼아 두 사람은 단 잠을 잔다. 차가운 바닥에 모포 하나 깔고 붙어 자는 데도 춥지가 않았다. 잠든 두 사람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5.

 

 

"절대 안 돼, 꿈도 꾸지 마."

 

 

코를 훌쩍거리며 자신에게 매서운 경고를 하고 지나가는 커크를 보며 캐롤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미사일 점검을 마치고 간단하게 저녁이나 먹을까 싶어 마침 근무가 겹치는 스콧과 나갈 생각으로 기관실에 내려 왔는데, 웬일인지 기관실장 사무실에서 나오는 것은 스콧이 아닌 커크였다. 쾌활하게 인사를 하기 무섭게 인상을 잔뜩 찡그리면서 대뜸 그렇게 경고를 하고 훌쩍 떠나버리는 상관을 보면서 그녀는 영 영문도 모르겠고 어처구니도 없어 황당한 얼굴로 저만치 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길마다 몸에 붙어있던 빨간 꽃잎이 떨어져 꽃길을 만들었다. 때마침 기관실 사람들의 건강을 체크하고 있던 본즈가 이 광경을 보고 혀를 끌끌 차더니 그녀에게 다가갔다.

 

 

"제가 뭐 실수 했어요?"

"아니, 니가 아니라, 내가 잘 못 한 거야. 하도 답답해서 네 이름 좀 썼다."

"제 이름이요? 아, 설마..."

"미안. 이렇게라도 안하면 아주 죽을 때까지 삽질할 기세라, 어쩔 수 없었어."

 

 

어깨를 으쓱 거리며 본즈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캐롤은 커크가 나왔던 사무실 문을 슬쩍 보았다. 드디어 짝사랑의 종지부를 찍은 건가? 캐롤 역시도 그의 오랜 마음을 알고 있었다. 사실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언젠가 같이 차를 마시다가 스콧이 했던 말이 떠올라서 그녀는 슬핏 웃었다. 그 정도로 티내는데 모르는 게 말이 되요? 내가 천치도 아니고. 그렇게 말하길래 왜 그럼 그냥 보고만 있냐고 물었더니 하는 말이 그랬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하게 말하려고 저렇게 애를 태우는지 궁금해서 그래요. 그리고... 내 앞에서 안절부절 하는 게 꽤 귀엽잖수. 찻잔에 코를 박고 그렇게 중얼거리는 스콧의 귀가 빨갛게 달아 있어서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던 것이 생각났다. 어쨌든 잘 되었으니까 좋네, 하다가 당분간은 함장한테 미움 좀 받겠구나, 하고 괜한 억울함이 밀려온다. 정작 마음에 품은 사람은 따로 있는데, 엉뚱한 곳에서 타박을 받게 생겼으니 말이다. 섭섭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해서 얄궂게 본즈를 살짝 노려보자 그가 미안한 듯 웃으며 두 손을 흔든다.

 

 

"진짜 미안. 그래서 말인데, 미안한 김에 밥이나 살까 하는데, 어때?"

".... 일하던 중 아니었어요?"

"식사할 시간도 없을까. 이 근처에 알아본 레스토랑 있어."

 

 

에스코트를 하듯 정중하게 손을 내미는 것을 보며 캐롤은 생각과는 다르게 자꾸 입에 번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았다.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부드럽게 그 손을 그러쥐었다.

 

 

"나 생각보다 많이 먹어요."

"나도 잘 먹는 사람이 보기 좋더라."

 

 

잡은 손을 자연스레 자신의 팔에 걸어 팔짱을 끼며 본즈가 넉살 좋게 받아 쳤다. 팔짱을 낀 두 사람이 꽃길을 따라 걷는다. 어지러운 기계 소음과 뿌연 증기와는 달리 발마다 밟히는 장미꽃잎은 꽤나 로맨틱 했다.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본즈는 생각했다. 넌 아직 멀었어, 지미보이. 어디선가 커크의 재채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Cut 2. Wind from Port of New York.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짠 내음을 가득 품고 있었다. 출렁이는 물결에 맞춰 정박되어 있는 작은 배들이 출렁거렸다. 작은 요트며 거대한 군함까지, 뉴욕항의 부두는 만석이었다. 물자를 실은 컨테이너 차들이 오가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빠르다. 휴식시간을 가지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 위 햇볕이 내리쬔다. 심술궂은 태양이 땀으로 젖어 반질거리는 사람들의 피부를 따갑게 내리쬐며 까맣게 태우고야 만다. 가을의 하늘은 청량하고 파랗게 구름 한 점 지나가질 않았다. 바람은 차고 햇살은 따갑고 사람들은 움직인다. 여느 가을과 같은 항구의 일상이었다.

 

 

"엣취!!!"

 

 

뉴욕 항에 근무하는 해상구조대 버니 웨버는 한가로운 시간을 사무실에서 신문을 보며 때우고 있었다. 뉴욕 타임즈에 실리는 결혼 섹션 란까지 넘겼을 때 문이 열리더니 시원한 재채기 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니 부두에 가장 큰 자리를 잡고 있는 군함의 함장, 제임스 커크가 보였다. 버니는 들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았다.

 

 

"감기 걸리셨어요?"

"아, 네, 뭐 버니, 혹시 감기약 있어요? 본즈가 어딜 갔는지 보이질 않아서... 그리고 남는 모포도 있으면 좀 빌려 주세요."

 

 

코를 훌쩍거리며 하는 부탁에 버니는 흔쾌히 사무실 구석에 쌓여있는 모포 몇 장과 상비약에 들어 있던 감기약을 건네 주었다.

 

 

"두 알 먹으면 돼요."

"그럼 네 알만 주세요."

"그건 너무 많은데..."

"나 말고 다른 사람 먹어야 해서 그래요. 몸도 약하면서 왜 거기 잠을 잤는지, 고집은 또 세가지고 일 많으니까 못나간다고 하고..."

"... 누구요?"

"아니에요, 혼잣말이에요."

 

 

들릴 듯 말 듯 궁시렁 거리더니 또 손을 젓는다. 그러면서 버니가 쥐어주는 감기약 네 알과 모포를 꼼꼼히 챙겨든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봉지 하나를 건네 버니의 손에 쥐어준다. 뭐냐고 묻자 요 근처 괜찮은 레스토랑에서 포장한 음식이라고 한다. 그리고는 가볍게 인사를 하더니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 버니는 멀어지는 커크의 뒷모습을 본다. 그와 똑같이 감기가 걸린, 고집이 세서 나가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식사를 들고 뛰는 그의 뒷모습은 생각보다 그렇게 귀찮거나 불편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아프다는 사람치고는 뛰는 발걸음이 더 가벼운 듯 보이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캡틴 커크에게 연인이 생긴 모양이다. 버니는 받은 봉지를 열어 안에 내용물을 꺼냈다. 플라스틱 상자에 들어있는 것은 잘 구워진 스테이크였다. 그는 상자를 열어 고기를 대충 잘라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맛있네.'

 

 

고기를 씹으며 멍하니 버니는 생각했다. 식지 않은 열기를 보면 아마 레스토랑에서 구워지자마자 엄청 달렸을 거다. 감기 걸린 것도 잊고, 저 차가운 바닷바람을 가르며 뛰었을 그를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난다. 사랑의 시작은 늘 그런 거니까. 다시 고기를 입에 밀어 넣으며 버니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미 다 식고 말라버린 제 사랑이 떠올라서, 버니는 슬퍼졌다. 공허한 가슴에 바람이 분다. 저 가을바람만큼 시리고 매서운 바람이...

 

 

 

 

 

Story 2. 당신의 이웃은 안녕하십니까? - (The Finest Hour) Bernie Webber And (Absolutely Anything) Neil Clarke.

 

 

 

#1.

 

시계가 퇴근 시간을 알리고 버니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화창한 가을 날씨에는 해상구조대도 한가해지곤 했다. 오늘도 무탈한 하루를 마친 그는 별것 없는 자리를 치우고 가방을 챙겼다. 오늘 순찰 내용을 상관하게 간략하게 보고하고 당직인 거스에게 인사를 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가자 차가운 바닷바람이 불어온다. 으- 하고 몸을 부르르 떤 버니는 목을 움츠린 채 바삐 걸으며 퇴근길을 재촉했다. 빠르게 부두를 지나가는 그에게 일꾼들이 인사를 한다. 버니, 퇴근하나? 데이트는 있고? 그는 그저 웃는다.

 

남들보다 늦은 퇴근에 지하철은 한산하다. 지린내가 나는 지저분한 지하철 한 구석에서 멀뚱하니 밖을 바라보다가 몇 정거장 가지 않아 지하철을 내린다. 브루클린에 위치한 그의 집은 항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근무지에서 멀지 않고 집값이 저렴한 곳을 따지면 브루클린 밖에는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뉴욕의 집은 그가 살던 메사추세츠 코드곶을 생각하면 건물도 오래되고 작은 평수에 비해 터무니없이 비쌌다. 하지만 대도시로 옮기기로 한 것은 자신의 결정이었기 때문에 딱히 불평을 늘어놓을 사람도 없다. 아니지, 도망쳐 왔다는 말이 더 맞겠지만. 버니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컬이 진 갈색머리와 사랑스러운 얼굴을 했던 옛 연인을 떠올렸다. 소심한 자신과는 달리 당차고 용감했던 그녀가 먼저 '결혼하자.' 라고 했을 때 밀려오는 현실감에 버니는 겁을 먹고 말았다. 안된다고 대답해 놓고 주절거렸던 변명은 치졸하기 그지없었다. 결국, 지친 연인은 떠나갔고, 버니만 그 자리에 남았다. 그는 등대처럼 그 자리에서 연인을 기다리며 파도처럼 밀려오는 후회와 회한을 견뎌야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소식은 그녀가 다른 이와 결혼한다는 소식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떠나왔다. 이 사람 많고 시끄러운 도시로. 누가 왔는지도, 누가 머물렀는지도 모를 정도로 많은 사람이 오가는 뉴욕에서 그 수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일상을 살다보면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되고 곧 상처도 무뎌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외로운 도시에서 새로운 연인은 고사하고 같이 고향을 떠나 온 거스를 제외하고는 달리 만든 친구도 없었다. 도시의 사람들은 차가웠고 버니는 외로웠다. 홀로 집에 있는 시간동안 버니는 끊임없이 자신을 자책하며 스스로를 담금질 했다. 그것 외에는 달리 할 게 없었다. 그는 우울감과 상실감에 목이 졸리는 것 같았다.

 

지하철역을 빠져나와 그는 집근처 식료품점으로 향했다. 집에 먹을 것이 떨어졌다. 그래봐야 혼자 사는데다가 집에 거의 없는 그에게 달리 살거리가 많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죽지 못해 살려면 먹어야 했다. 조명이 침침한 식료품점에서 레토로스 식품 몇 개와 맥주를 한 팩을 집어 든다. 그리고 아침에 먹는 시리얼을 잡으려고 했는데 불쑥 손 하나가 튀어나와 버니가 집은 상자를 건드린다. 엇갈린 손에 시리얼 박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죄송합니다."

"아니, 아닙니다."

 

 

더듬더듬 남자가 말을 더듬으며 바닥에 시리얼 박스를 줍는다. 허리를 숙이다가 한쪽 어깨에 맨 가방이 미끄러져 떨어지는 바람에 허둥지둥 거리다가 겨우겨우 박스를 잡아 들었다. 하- 여기 있어요. 그는 시리얼 박스를 버니에게 건네며 말했다.

 

 

"아뇨, 가져가세요. 보니까 하나 밖에 없는 것 같은데... 다른 거 사면 됩니다."

"어.. 그럼 저거 괜찮아요. 블루베리 말린 게 들어가는데 우유에 말면 싸구려 사탕 같은 맛이 나죠. 그 옆에꺼는 안사는 게 나아요. 톱밥 갈아 놓은 걸 씹는 느낌이에요. 물론 이건 제 개인적인 의견이긴 하지만, 이래봬도 미각이 둔하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거든요. 그렇다고 미식가는 아니지만... 사실 이게 제일 맛있긴 하죠. 드세요, 그냥. 저는, 저 블루베리.. 싸구려 사탕 같은 걸 먹으면 되요."

"정말 괜찮습..."

"이웃이잖아요. 이 정도는 해야 정 있고 좋죠."

 

 

횡설수설하며 설명을 하던 그가 기어이 버니에게 상자를 쥐어 주고 만다. 고마워요. 작게 답을 하자 그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옆에 있던 다른 시리얼을 집어 든다. 그리고 마주본 채로 우왕좌왕 하다가 결국 나란히 계산대로 향한다. 버니는 남자가 계산하는 물건들을 가만히 본다. 볼로네이즈 스파게티 소스와 싸구려 사탕 맛 시리얼, 우유 한 팩, 맥주 한 팩, 그리고 개 통조림 하나를 계산한다.

 

 

"개 키우세요?"

"네, 데니스라고 수컷입니다. 꽤 귀여운 놈이죠. 뭐, 배변을 잘 못 가리는 것만 빼면요. 개도 사람처럼 혼자서 화장실을 갈 수 있으면 참 편할 텐데 말이에요. 아니면 말을 한다던가... 개랑 혼자 떠들고 있으면 정신 이상자가 되는 기분이거든요."

 

 

남자는 수다스러웠고 또 엉뚱했다. 이것저것 늘어놓듯 떠들다가 또 뭘 잘 못 말한 사람처럼 말이 끝나고 나면 눈을 도록도록 굴리면서 얕은 한숨을 쉰다. 긴장을 한 사람처럼 몸을 잔뜩 굳힌채 이것저것 말하다가 자기가 실수 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웃이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남자는 자신을 아는 것 같았다. 계산을 마친 물건을 비닐봉지에 담고 나가려던 남자가 어색하게 인사를 했을 때, 버니는 충동적으로 그를 불러 세웠다. 저 이것만 계산하고 집에 가는데 같이 가죠. 그 말에 또 눈을 크게 뜨고 버니를 보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그러죠, 하며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 한다. 그 어설픈 능청스러움에 버니가 웃었다. 오랜만에 지어보는 즐거운 웃음이었다.

 

 

 

#2.

 

아- 어제의 나를 죽이고 싶다. 아침 햇살에 눈을 뜨며 닐이 가장 먼저 생각했던 것은 그것이었다. 어제 식료품점에서 충동적으로 시리얼 박스를 낚아챈 제 손을 잘라버리고 싶다. 어제 정신없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자 그는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쓴 채 이불에 발길질을 했다. 놀란 데니스가 왕왕- 짖었다. 이불 밖으로 나와 침대 아래 주저앉은 그는 제 볼을 핥아대는 데니스를 끌어안고 말했다.

 

 

"개가 말했으면 좋겠다니, 그딴 정신병자 같은 말이 어디 있어. 그치 데니스?"

 

 

개털은 마구잡이로 헤집고 나서야 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의 쪽팔림도 좋지만 일단 출근을 해야 했다. 그는 부엌으로 향한다. 선반을 열어 데니스의 아침을 챙겨주고 어제 산 시리얼을 집었다가 한숨을 푹 쉰다. 나 이거 진짜 싫어하는데. 도대체 자신은 무슨 생각으로 이걸 집어 들었단 말인가. 결국 뜯지 않은 시리얼을 도로 안에다 처박아 두고 우유 한 잔을 따라 마신다. 가는 길에 샌드위치나 사서 먹어야겠다, 하는 생각으로 그는 아침을 건너뛴 채 출근준비를 시작했다.

 

버니 웨버, 라고 했지. 닐은 칫솔로 이를 닦으면서 어제의 대화를 떠올렸다. 닐이 버니를 알게된 것은 꽤 오래 전이었다. 세 달 전 데니스를 산책시키다가 우연히 본, 제 아래층에 이사 온 남자는 말 그대로 닐의 취향에 적격 하는 사람이었다. 큰 키에 벌어진 어깨, 남자답고 거친 외모와 푸른 눈망울은 닐을 매료시키기에 적합한 것이었다. 하지만 달리 말을 걸어본 적은 없었다. 닐은 소심했고, 자신이 마음에 드는 사람 앞에서 지나치게 긴장해 함부로 말을 늘어놓는 경향이 있다. 물론 거짓말 섞인 허풍을 포함해서. 그리고 그건 대게 터무니없는 것이라 듣는 사람도 이게 거짓말이라는 걸 쉽게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신은 책임감이 없어요. 그가 다니는 학교 교장이 했던 말이다. 고 얄밉게 딱딱한 얼굴을 생각하니 또 열이 뻗힌다. 이렇게 살아온 걸 어쩌라고! 세면대에 퉤- 하고 침을 뱉는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러니까 닐이 그에게 말을 걸지 못한 것은 다 그런 이유다. 몇 달동안 봐왔던 그는 말이 없었고, 대게 진중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또 그닥 사교적이지 않은 듯 했다. 허풍덩어리인 자신이 함부로 상대했다가는 경멸을 당할 것이었고, 그랬다간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멀리서만 지켜봤다. 그가 뭘 하는지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런 것들, 약간 스토커 같긴 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눈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던 중에 어제 충동적으로 말을 걸고 나서야 아차, 싶었던 거다. 제가 한 어리석은 짓에 대해서.

 

그래, 바보 같았어. 사실 어제 대화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단 말이야. 이것저것 말을 꺼내다보니 집이었다. 남자는 말이 없었고 자신은 지나치게 말이 많았다. 어젯밤 대화에 남는 것은 자신의 헛소리에 남자가 짓던 낮은 웃음소리뿐이었다. 도대체 난 무슨 소리를 지껄여댄 걸까, 차라리 취하기라도 했으면 덜 창피했을 텐데. 으으- 닐은 괴로움에 제 머리를 헝클어버리고 만다. 그는 욕조 바닥에 주저앉았다.

 

진심으로, 닐은 어제의 자신을 죽이고 싶었다.

 

 

 

#3.

 

"현장학습이라니. 애들도 아니고."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는 동료 레이가 투덜거렸다. 그는 아침부터 사온 샌드위치 반쪽을 닐에게 뺏긴 것도 모자라 현장학습이라는 이 우스꽝스러운 행렬에 동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끔찍하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가 짝사랑 하는 여교사 프링글은 저 앞에서 다른 남교사와 공무를 가장한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으니 말이다. 반면 평소라면 귀찮아했을 닐은 오히려 기분이 나아졌다. 가을 시원한 바람이라도 맞으면 좀 어제 생각이 덜 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현장학습 장소는 뉴욕 항이었고, 부둣가를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잘 감시만 하면 되는 일이었으니 그리 어려울 것도 없었다. 물론 게 중에 말썽 피우는 아이들은 꼭 있기 나름이었는데, 선생이라는 직업을 가진 것 치고는 아이들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 그로서는 그 애들이 차라리 바다 속에 처박혀 버렸으면 하는 바램이 늘 있긴 했지만, 지금은 차라리 그런 식으로 자꾸 떠오르는 어제에 대한 생각을 분산 시켜주는 것이 퍽 고마울 따름이었다.

 

 

"야, 너 거기 있다가 빠진다!! 뛰지 마!! 그래서, 어쨌든 어제 말을 건 거는 실수였어. 앞으로 도망 다녀야 할까봐."

"도망 다니긴, 차라리 잘 됐네! 닐, 애인 좀 만들어. 언제까지 개나 끌어안고 살 거야?"

"데니스가 뭐 어때서. 게다가 어제 대화 해보니, 뭐... 생각보다 내 타입은 아닌 것 같더라고. 그리고 애인 생겨봐야 골만 아파."

"개랑 살더니 개소리만 늘었지. 누구나 애인은 필요해."

"너나 잘하셔."

 

 

레이의 잔소리에 투덜투덜 입을 삐죽거리며 닐은 앞서 걸었다. 왠지 레이와 이야기 하는 것이 소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입 만 열면 개소리인데 뭐. 그는 터덜터덜 부두 앞쪽으로 향했다. 배가 정박해 있는 너머로 넘실거리는 바다가 보인다. 짭짤한 바다 내음도 느껴지고 크게 숨을 쉬자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그래, 닐. 내일부터는 필사적으로 그 사람을 피해 다니는 거야. 네가 한 개소리는 잊어버리라고! 다시 한 번 스스로의 포부를 다잡고 있는데 옆에 한 무리 아이들이 보인다. 닐이 담당하는 반 아이들 중 장난기가 많기로 유명한 무리였다. 부두 끝에 아슬아슬하게 서서는 장난을 하는데, 어째 불안하다. 하! 저러다 바다에 떨어져 봐야 정신 차리지.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운동화 끈에 발이 걸린 아이 하나가 바다로 곤두박질 쳤다.

 

신이란 것들은 내가 원하는 건 하나도 안 들어 주면서 이딴 쓸데없는 데에 힘을 쓰지!! 닐은 속으로 온갖 한탄을 하면서 달려갔다. 아이들의 비명과 경비대를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로 어수선한 곳을 뚫고 들어가 닐은 부두 아래를 보았다. 다행이 아이는 수영을 할 줄 알았고 손을 뻗어 주자 쉽게 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내가, 뛰지 말라고 했잖아. 끌어 올린 아이의 등을 두드리며 그가 의미 없는 잔소리를 했다. 놀라기만 했는지 아이는 개구지게 웃었고 닐 역시 더 화를 내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젠장, 일진하고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뒤에서 절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닐? 하고, 아주 익숙한 목소리로. 그는 등골이 쭈뼛 서는 느낌이 들었다.

 

 

"버니?"

 

 

뒤를 돌아보자 아니나 다를까 어제 봤던 그 잘생긴 얼굴이 또 보인다. 경비대 복장을 하고 한 손에 튜브를 든 그는 반가우면서도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금세 혼자 납득한 듯 환한 얼굴을 한다.

 

 

"아, 선생님이라고 하셨죠? 현장학습 온다고 하던 학교가 닐이 근무하는 곳인 줄 몰랐어요."

"어... 저야 말로..."

"닐, 누구에요? 소개 좀 해줘요."

 

 

얼어서 제대로 된 말도 못하고 허둥거리고 있는데 얌체 같은 프링글이 옆에 붙어오며 닐을 쿡쿡 찌른다. 닐은 그제야 주변 모든 사람들이, 정확히 말하면 학생 교사 할 것 없이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여자들이 모두 버니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키가 훤칠하고 잘 생긴 얼굴이 웃기까지 하고 있으니 시선을 받을 만 했다. 심지어 해양경비대 옷을 입고 있으니 더욱이 눈에 뜨인다. 저런 남자를 혼자 탐하다니, 주제 넘치게. 닐은 가슴 속에 급격하게 밀려오는 우울감에 그와 마주했음에도 좀처럼 웃을 수가 없었다. 아무 말 없이 저를 바라보는 닐을 보며 버니는 조금 이상하다 여겼는지 다시 닐, 하고 이름을 불렀고 침묵을 참지 못한 프링글이 그를 밀치며 버니에게 다가가던 그 순간이었다. 프링글이 무의식중에 밀친 팔꿈치에 닐이 뒷걸음질을 쳤고, 불운하게도 하필이면 발 닿는 곳이 땅이 아닌 허공이었다. 어- 하는 순간 닐의 몸이 뒤로 넘어간다. 닐의 시야 앞에 모든 것이 슬로우 모션처럼 돌아간다. 자신을 돌아보는 수많은 눈들과 놀란 프링글의 얼굴, 그리고 자신에게 달려오는 버니의 모습이. 그리고 순간 머릿속에 강렬하게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아, 나 수영 못 하는데.'

 

 

풍덩- 물보라와 함께 차가운 물속으로 닐의 몸이 잠긴다. 그가 입은 외투며 셔츠 사이사이로 바닷물이 스몄고 온 몸을 얼얼하게 만드는 냉기는 온 몸을 굳히고 있었다. 닐은 일렁이는 수면이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아- 이대로 죽겠구나. 닐은 오늘 아침 했던 자신의 생각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수면을 가르고 뛰어 들어오는 어떤 이의 모습을 본다. 커다란 손이 자신의 겨드랑이 안쪽으로 들어와 등을 끌어안았고 발버둥을 치며 그의 몸을 위로 끌어 올렸다. 멀어졌던 수면이 다시 가까워진다. 수면 위로 오른다. 푸하- 하고 닐은 막혔던 숨을 내쉬다가 들이켠 바닷물 때문에 헛구역질을 했다. 

 

 

"괜찮아요, 괜찮아." 

 

 

귓가에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 멀어졌던 정신이 다시 돌아왔다. 닐은 눈앞에 남자를 본다. 자신을 구해줬던 버니의 젖은 얼굴을 보았다. 그 순간, 아마도 바닷물이 닐의 머리를 얼려버렸던가, 아니면 물에 젖어 있는 버니의 얼굴이 지나치게 잘생겨서 순간적으로 정신이 나간 것이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 서야 숨도 안 쉬고 그런 말을 토해냈을 리가 없었다.

 

 

"나랑 저녁 먹어요."

 

 

그리고 닐은 기절했다.

 

 

 

#4.

 

버니는 제 품에 안겨서 연신 달달 떨고 있는 닐을 보며 택시 기사를 재촉했다. 사무실에 모포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얼마 전에 누가 다 가져가버린 후로는 남아있는 것이 마땅치 않았다. 별 거 아니니까 병원에나 보내라는 상관의 냉정한 말에 버니는 자신도 젖었고, 닐과 같은 아파트를 사니 자신이 돌아가 돌보겠다고 반박을 했다. 평소와는 달리 고집스러운 얼굴을 한 그를 보며 상관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가 네 맘대로 하라는 식으로 일을 넘겨버렸다. 결국 거스가 잡아준 택시를 타고 그들은 아파트로 이동했다. 품 안에 닐은 눈을 뜨지 않았다. 이따금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듯 웅얼거리는 헛소리를 했는데, 대게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라 버니는 괜찮다는 대답만 연신 중얼거렸다.

 

아파트에 도착하자마자 버니는 닐을 번쩍 들어 올려 서둘러 제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어렵게 키를 꺼내 문을 열자마자 그는 욕실로 향했다. 그리고 닐을 욕조 안에 앉힌 채 온수를 틀었다. 바닥부터 차오르는 따뜻한 느낌에 닐이 정신이 조금 들었는지 눈을 살짝 뜨고 제 발가락을 오므렸다. 그리고는 추운 듯 몸을 웅크리기 시작했다. 버니는 그런 닐의 어깨를 잡아 몸을 펴주며 말했다.

 

 

"옷 벗어야 해요. 체온 더 떨어질 수 있으니까, 닐, 내말 들려요?"

 

 

여전히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지 눈을 얇게 뜨고 깜빡이며 닐은 입술을 달달 떨었다. 하는 수 없이 버니가 닐의 옷을 벗겨야 했다. 바닷물로 푹 젖은 자켓과 셔츠 단추를 푸르는 동안에도 닐은 눈만 깜빡이며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 손길을 받고 있었다. 속옷까지 벗기고 나자 온수는 닐의 가슴 위까지 차올라 있었다. 얼었던 하얀 피부에 조금씩 핏기가 도는 것을 보며 만족한 듯 버니는 그제야 제 옷을 벗었다. 물에 젖어 뻣뻣한 옷을 힘들게 벗어 내리고 샤워기를 들어 몸을 대충 씻어냈다. 소금기 어린 바닷물이 씻겨 내려갔다. 버니 역시 젖어 있던 것은 같았지만 닐을 데리고 움직인 탓인지 생각보다 체온이 많이 떨어지진 않았다. 그는 몸을 씻어내고 욕조에 있는 닐을 한 번 확인 한 뒤 욕실 밖으로 나가 옷을 갈아입었다. 닐이 입을 만한 옷과 속옷을 챙겨 들고 그는 다시 욕실로 들어갔다. 닐은 여전히 죽은 듯이 욕조에 앉아 있었다. 버니는 들고 있던 옷들을 옆에다 치워 두고 욕조에 다가가 난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닐의 가슴께에 손을 댔다. 얇은 피부 아래 뛰고 있는 심박을 느끼자 조금 안도한 듯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손으로 어깨며 목과 볼 같은 곳을 만져 주었다. 체온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따뜻한 물 때문인지 점점 홍조가 오르는 피부는 말랑거렸다. 그 위에 손가락으로 살짝 누르기만 해도 금방 자국이 남을 것 같아 버니는 힘을 주지 못했다. 대신 쓸어내리듯 그 위를 문지를 뿐이었다. 으- 하고 잠투정을 하듯 앓는 소리를 내자 버니는 살짝 손을 뗐다가 다시 고르게 숨을 쉬는 것을 보며 볼 위에 다시 손을 댔다. 체온이 많이 올라왔는지 손바닥에 닿는 그의 얼굴이 옅게나마 열이 올라있었다. 버니는 저도 모르게 작게 웃어버렸다.

 

이상한 이웃이다. 이사 온 지 3개월 만에 알게 된 사람이었는데 왜 이제야 알았을까 싶을 정도로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그의 외향이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냥 행동하는 거나 말 하는 것들이 그랬다. 제 앞에서 왜인지 모르게 긴장하는 것도 그렇고 그것 때문인지 자꾸 횡설수설 하는 것도 재밌었다. 말 없고 소심한 성격 탓인지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대화가 끊어지는 것에 신경 쓰게 되고 어색해하곤 했는데 그럴 겨를도 없이 어제의 짧은 대화는 유쾌하기만 했다. 나를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왜 이제야 말을 걸었던 걸까, 왜 오늘은 또 그렇게 당황스러워 했을까, 왜 깨어나자마자 저녁을 먹자고 했을까. 

 

그렇게 스스로 묻다 보니 이상한 기시감이 든다. 오래 전, 옛 연인을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의 모습. 가슴이 뛰어서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한 참을 고민하다가 겨우 꺼낸 말은 마냥 실수인 것 같기만 했고, 별 것도 아닌 일에도 괜히 겁먹는 새심장에, 겨우겨우 했던 고백은 영화에서처럼 화려하거나 소설처럼 로맨틱하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이 기시감은, 아마도 겪어 봤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거다. 그러니까 이건...

 

 

"혹시 나 좋아해요?"

 

 

그렇게 물어봐도 답이 없다. 그런데 괜히 자꾸 웃음이 난다. 날 언제 부터 알았을까? 언제부터 나를 그렇게 바라봤을까? 기분 나쁠 수도 있는 일인데 이상하게 그게 불쾌하지가 않았다. 골목 사이사이에서, 마켓의 선반 건너편에서, 아파트 계단 너머로, 조금만 돌아보았으면 보였을 동그란 얼굴을 생각하니 웃음이 자꾸 난다. 그렇게 생각하니 또 내가 너무 내 우울함에만 갇혀서 주변을 보지 못했구나 싶기도 했다. 어쩌지? 이거. 그렇게 생각하면서 물기가 흐르는 볼을 손가락으로 살짝 문지른다. 투명한 물방울이 떨어져 닿은 피부 사이로 스며든다. 으응- 하고 잠투정을 하듯 작게 신음하는 닐의 목소리가 욕조 벽에 부딪히며 울리는데 귀가 괜히 간지럽다. 

 

아마 이대로 모른 척 한다면 그는 자신이 제 마음을 알아차린 줄도 모르고 똑같은 행동을 반복 할 거다. 그렇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이웃이 된 채, 자신은 일상을 살고, 그는 먼 곳에서 그를 지켜보다가 어느 순간 마음을 접고 떠나가겠지. 버니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만약 이렇게 또 도망가듯 외면하고 만다면 지난 시간을 똑같이 후회와 회환 속에 살게 될 것 같았다. 제가 그에게 품은 마음이 호감인지 아닌지도 모르겠고, 앞으로 그와 이어나갈 인연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현실감을 따진다고 해서 미래가 안정되는 것이 아님을 누구보다 버니는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이 앞의 친절한 이웃을 마냥 외면하고 싶지 않아졌다.

 

 

 

#5.

 

아- 진심으로 죽고 싶다. 눈을 뜨자마자 닐이 했던 생각은 그것이었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주변을 두리번 거려보니 낯선 방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처음 보는 방이지만 어제의 기억을 되짚었을 때 이 방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커다란 침대와 제 몸을 짓누르는 두꺼운 이불에서는 다른 이의 체취가 느껴졌다. 닐은 코를 훌쩍거리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머리가 어지러워 도로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속이 울렁거리고 시야는 빙빙 돌았다. 바르작거리는 기척을 들었는지 방문이 열리고 버니가 들어온다. 닐, 괜찮아요? 퍽 다정하게 묻는 목소리를 들으니 닐은 울고 싶어졌다. 물에 빠져 구조되자마자 헛소리를 하더니 이제는 남의 집에서 민폐를 끼치는 자신이 한심스러워졌기 때문이었다.

 

 

"울어요? 열이 올라서 그러나. 많이 아파요?"

"아니에요, 킁. 제가, 신세를 많이... 끼친 것 같네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약 먹고 가요. 식사 후 먹어야 하니까 아침도 먹어야 하고요."

"...데니스 밥 줘야 하는데..."

"데니스 저기 있잖아요."

 

 

버니가 문 밖을 가리키자 아니나 다를까 밥통에 머리를 처박고 밥을 먹고 있는 데니스의 살랑살랑한 꼬리가 보인다. 제 주인이 일어났다는 걸 그래도 알아 차렸는지 고개를 들어 왕- 하고 짓더니 다시 밥에 매달린다. 도대체 쟤가 왜 저기 있나, 내가 헛것을 보는 건가, 싶을 정도로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닐에게 버니가 친절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개 키운다고 했잖아요. 참, 미안해요. 본의 아니게 주머니에서 키를 꺼냈는데.."

"아, 괜찮... 쿨럭... 저 출근..."

"교장 선생님께 연락 왔었어요. 내일까진 쉬고 몸 회복되면 나오라고 하던데요."

 

 

그렇군요. 하며 닐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 말은 내가 도망갈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말이네요, 라는 말을 삼키며 닐은 스르르 몸을 다시 뉘었다. 열이 나긴 나는 모양인지 시큰거리는 코는 둘째 치고 머리가 너무 아프고 정신은 몽롱했다. 생리적인 건지 눈물이 자꾸 흐르는 바람에 버니가 자꾸 눈가를 훔쳐주는데도 그게 떨릴 정신도 없었다. 그래도 아픈 덕분에 호사를 하는 건지, 아니면 내일 당장 아파트를 옮겨야 할 구실이 생긴 건지 닐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자 오만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한다. 버니는 그 복잡한 머릿속을 꿰뚫어 본 건지 슬쩍 웃음을 지었다.

 

 

"오늘은 말이 없네요."

 

 

전에 했던 대화 때문인지 그렇게 말하는데 닐은 가뜩이나 열이 오른 통에 귓가가 더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애써 태연한 척 굴려고 해도 이불 밑에 발가락은 끊임없이 꿈지락 거리기 바빴다. 말을 해야 하나 싶지만 목이 완전 가라앉았는지 한 마디 꺼내려고 입을 열 때마다 쇳소리만 자꾸 났다. 하지만 버니의 말은 닐이 말이 없어서 지루하다거나, 흥미가 떨어졌다거나 하는 류의 뉘앙스는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더 소리 내서 웃으며 닐의 땀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 주며 닐을 대신해서 많은 말을 늘어놓았다.

 

 

"내일 가도 되니까 여기 있어요. 아플 때 혼자 아프면 외롭더라구요. 뭐.. 솜씨는 보장할 순 없지만 아침도 만들어 놨으니까 약 먹고 푹 자면 좀 나아질 거예요. 저도 오늘 오프라 집에 있을 거니까 불편하면 말하고요. 이거... 참, 이상하네요. 말 없는 제가 더 많이 말을 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얼른 나아요. 그리고 저녁은..."

"아... 그거언..."

"오늘은 나가 먹기 힘들 것 같으니까 집에서 같이 먹어요. 나가서 먹는 건 그 다음에..."

"....어어...."

"아침 가져올게요."

 

 

민망한 듯 귀 뒤를 자꾸 긁으며 말을 흐리듯 그렇게 말하다가 아침을 가지러 간다며 돌아서는 발걸음이 빠르다. 뒤돌아 가는 그의 귓가가 빨갛게 달은 것을 보자 닐은 아까까지 자신을 억누르던 병환이 한 번에 씻어나가는 것 같은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단순히 저녁 먹자고 하던 자신의 말을 신경 쓴다고 하기에는 어쩐지 묘한 기류가 있었다. 기대하고 싶지 않았던 닐의 마음에 희망이 솟았다. 갑자기 그는 온 세상의 모든 것들이 긍정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토록 후회하던 말을 걸었던 순간부터 지금 이렇게 그에게 민폐를 끼치며 집에 눌러 앉아버린 이 상황이, 그리고 멋들어진 고백도 아닌 저녁먹자고 하는 식상한 데이트 멘트를 남겼던 그것마저도. 닐은 순간적으로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이 다 쉬어서 그럴 수는 없었다. 대신 두 팔을 벌려 하늘에게 감사의 인사를 던진다. 

 

 

'Thanks God!'

 

 

그 감사를 신이 들을 지, 아니면 저 우주 밖 어느 외계인이 들었을 지는 모르겠지만, 뭐가 되었든 드디어 자신이 원하는 자잘하기 짝이 없는 소망들을 들어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아니 사실 그건 누구의 도움도 아니었다. 스스로 바래왔던 소망을 엉뚱하지만 스스로 이뤄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닐의 소심했던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조금씩 용기가 돋아났다. 감기가 나으면 데니스를 데리고 같이 산책이라도 나가자고 해봐야 겠다, 그렇게 떠올리는 닐도, 쟁반에 스튜를 담아 가져오는 버니의 얼굴에도 과거의 먹구름이 가신 듯 햇살 같은 미소를 띠며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책과 영화에서도 다루지 않을 만큼 서툴고 조심스러운 평범한 두 이웃의 소박한 관계의 시작이었다.

 

 

 

 

 

Cut 3. Sunny Afternoon in Cafe at Brooklyn.

 

한낮의 카페는 한적했다.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노트북을 보고 있는 사람, 회의를 하고 있는지 서류들을 보고 있는 회사원들의 앞에 놓인 커피는 식어가고 있었고, 모처럼 한 숨 돌리는지 바리스타는 탁자를 정리하고 있었다. 창가로부터 내리는 볕이 따사롭다. 햇빛이 창가로부터 카페 안 탁자와 쇼파 위에 온기를 만들고 그 따스함 속에 데니스는 얌전히 누워 도롱도롱 낮잠을 자고 있었다. 쇼파 등받이에 기댄 채 비스듬히 앉아 닐은 노트북을 두드리며 사뭇 진지한 얼굴로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빛에 반짝이는 안경태가 그의 진지한 얼굴을 사뭇 더 지적으로 보이게 하고 있었다. 막 내린 커피 두 잔을 들고 오던 버니가 그런 닐을 새삼 넋 놓고 보았다. 그러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맞은편에 앉아 커피를 건넨다. 그러자 닐은 금세 딱딱한 얼굴을 풀고 웃는 낯을 한다.

 

 

"모르는 사람 같아요."

"네?"

"그냥... 그러고 있으니까요."

"아, 네, 뭐... 제가 이렇게 입 닫고 있을 때가 흔하진 않죠. 보시다시피 데니스도 자고 있고..."

"싫다는 건 아니었어요. 색 다르다는 거지... 근데 좋네요."

".... 네?"

"그런 거, 새로운 거요."

 

 

의외로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단 말이야. 닐이 급격하게 버니와 가까워지며 느낀 점이었다. 말이 많은 건 아닌데 뱉는 말이 대게 솔직하고 꾸밈이 없다. 그럴 때마다 좋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해서 더 말을 횡설수설 하고는 했다. 언제나 좀 편해질까 싶은데 아직 멀은 모양이다. 요즘은 아예 입을 닫아버리면서 말실수를 줄이려고 닐은 애쓰고 있었다. 그래도 달아오르는 귓바퀴까지는 통제가 되지 않아 버니는 항상 그걸 보며 웃곤 했다.

 

 

"그래서, 뭐 쓰는 거예요?"

"어... 별건 아니고 예전부터 작가가 하고 싶었거든요. 물론 다짐만 하고 마땅히 쓸 게 생각 안 나서 미루기 급급했지만. 뭔가 확 빠져들 만큼의 대단한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지금은... 뭐랄까. 평범한 걸 쓰고 싶어요. 일상적인 느낌으로."

"일상적인 거요?"

"네. 특별하지 않은 현실 속에서 특별한 걸 찾는다는 느낌인데... 예를 들어서 이 카페 풍경들처럼. 바리스타가 틀어 놨을 즐거운 노랫소리와, 저기 붙어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연인이나, 혼자 이어폰을 끼고 책을 읽는 소녀라든지... 아니면..."

"우리 헤어져."

"이런 좋은 날 헤어지는.... 엥?"

 

 

닐은 카페 안의 모습을 세밀하게 관찰하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에 고갤 돌렸다. 저만치 테이블에서 어떤 여자가 한 남자에게 이별을 고하고 있었다. 여자의 얼굴은 단호하기 짝이 없었고 뒷모습뿐이지만 남자의 어깨는 한 없이 축 처져있었다. 여자는 일방적으로 남자에게 퍼부어대고 있었다. 들을 생각은 없었는데 자꾸 귀에 들어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가끔 보면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건지, 아니면 당신 동거인을 사랑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당신 친구랑 경쟁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이 지긋지긋한 게임에서 난 빼줬으면 좋겠어. 그렇게 말한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페를 빠져나간다. 남자는 여자를 잡지 않았다. 잡지 않은 건지 잡지 못한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남자는 미동 없이 그 자리에서 한 참을 앉아 있다가 한숨을 푸욱- 쉬고 앞에 있는 커피 한 잔을 들이켠 다음에 느릿한 걸음으로 카페를 나간다. 뒤돌아 가는 남자의 등이 안쓰러워 한 참을 보고 있다가 닐은 눈앞에 버니를 보았다. 버니 역시 그들을 보고 있었는지 남자가 골목 사이로 사라진 후에야 다시 닐을 돌아본다. 닐은 저도 모르게 불쑥 그렇게 말했다.

 

 

"부탁이니까 이런 화창한 날엔 헤어지자 하지 말아요."

 

 

말하고도 아차 싶다. 아직 뭐 그렇다고 할 만한 관계도 아닌데 대뜸 헤어지는 문제를 두고 말을 꺼냈으니 별로 좋은 화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의 주둥이를 때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있는데 조금 놀란 듯하던 버니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웃기만 한다.

 

 

"글쎄요, 지금 같은 상황에선 태풍이 쳐도 말 안할 것 같은데..."

 

 

네? 하고 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자 버니는 쑥스러운 듯 옆에 있던 책을 들어 올리며 얼굴을 가렸다. 그래봐야 삐죽 나온 귓바퀴는 달아오른 지 오래다. 닐은 간질간질한 기분에 입 꼬리에 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피식피식 웃으며 노트북에 코를 박으려니 버니가 책 너머로 말한다. 다 쓰면 보여줘요. 노트북을 끌어안으며 닐이 답한다. 안돼요. 왜요? 부끄러우니까. 그리고 아직 챕터 1도 안 썼어요. 챕터 1 쓰면 보여줘요. 그러니까 싫데두... 왜요? 창피하다니까요, 되게 집요하네. 그래서, 싫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좋아요? 아, 진짜. 테이블 위 커피 두 잔을 앞에 두고 오가는 투닥거리는 말들이 일상의 소음 속에 섞인다. 빠르게 돌아가는 도시 속, 카페 안 공기만이 느리게 흘러간다. 어느새 잠이 깬 듯 데니스가 나른하게 하품을 했다. 그 늘어지는 하품만큼 평온한, 그런 오후였다.

 

 

 

 

 

Story 3. 숨. - (Z for Zachariah) Caleb And (Shaun of the Dead) Shaun Riley

 

#1.

 

어디서부터 잘 못 된 걸까? 한 손에는 식료품점에서 산 탄산음료를 연신 들이키며 숀은 생각했다. 벌써 다섯 번 째, 지금껏 숀이 만나고 일방적으로 차인 여자 친구의 수 였다. 그래도 이번엔 잘 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리즈는 이해심이 깊었고, 매사 무기력한 숀을 이끌 줄 아는 밝은 성격의 여자였다. 그렇게 이어나간 인연이 3년이 되었고, 이번에는 이 여자랑 결혼하겠구나 할 때쯤이 되자 리즈는 이별을 고했다. 이유는 물을 것도 없었다. 지난 네 번의 이별에 이유와 같았기 때문이다. 난 '그 인간'이랑 더 경쟁하고 싶지 않아. 숀, 나야? 아님 그 인간이야? 그렇게 따져 물을 때마다 숀은 물론 너지, 라고 답했지만 실상 했던 행동들을 되집어 보면 딱히 그렇진 않았다. 동거인 때문에 여자 친구와의 약속을 잊어버리기도 부지기수, 데이트에 우연히 만나 합석을 하는 일도 더러 있었고, 사정이 생겨 빨리 와달라는 친구 때문에 분위기를 잡던 중간에 나온 적도 있었으니, 여자 친구들이 하나 같이 숀을 몰아붙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걜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 숀은 몇 번인지 모를 한숨을 푹푹 쉬면서 집으로 향했다.

 

 

"왔어?"

"어. 무슨 냄새야?"

"라자냐. 너 좋아하잖아. 들어가서 씻고 나와."

 

 

부엌에서 만든 라자냐를 들고 자신을 맞이하는 케일럽을 보자 숀은 아까까지 우울하던 기분이 조금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탄산음료의 빈 캔을 대충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욕실로 향했다. 대충 얼굴을 씻고 나오자 식탁에는 먹음직스러운 식사가 한 가득 차려져 있었다. 식탁 한 가운데에는 로맨틱한 촛불까지 올라와 있었고, 숀은 그게 케일럽의 섬세한 성격답다고 생각했다. 누가 보면 너랑 나랑 데이트 하는 줄 알겠다. 투덜거리면서도 숀은 얌전히 자리에 앉았고 그런 그의 맞은편에 앉은 케일럽은 웃으며 그의 와인 잔에 와인을 한 가득 따라주었다.

 

 

"오늘 어땠어?"

"뭐, 늘 똑같지. 넌?"

"나도 뭐. 일이 몇 개 들어와서 작업 중이야. 아마 다음 주는 현장에 좀 나가야 할 것 같아."

"바빠지겠네."

"너랑 밥 먹을 시간은 있으니까 걱정 하지 마."

"걱정은 무슨, 엄마도 아니고..."

 

 

라자냐의 끄트머리를 푹 퍼서 입에 넣으며 숀이 중얼거렸다. 케일럽은 프리랜서 건축 디자이너였다. 특별히 관심 있질 않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쪽 계통에서는 꽤 유명한 것 같았다. 자연 친화주의 적인 디자인을 주로 한다고 잡지에서 떠들어 대는 말을 봤던 것도 같다. 그런 것 치고는 별도 사무실도 없이 집에서 주로 모든 작업을 했고, 현장에도 자주 나가지 않는 편이었다. 집이 편해. 케일럽은 그렇게 말했지만, 숀은 그가 5년 전 그 사건 이후로 유독 외부와 차단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그 트라우마에 시달린다는 것도.

 

 

"그래서, 리즈는 잘 지내?"

"어.... 어?"

"오늘 리즈 만난다며."

 

 

그렇게 상념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케일럽이 리즈의 안부를 묻는다. 갑자기 목이 타는 것 같아 숀은 눈 앞에 포도주를 벌컥벌컥 들이킨다. 

 

 

"헤어졌어."

"저런... 설마 또..."

"아냐,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이거 맛있네, 나 와인 한 잔 만 더 줘."

 

 

매번 반복되는 여자 친구와의 헤어짐에 대해서 모를 정도로 케일럽은 눈치가 없지 않았다. 퍽 미안한 표정을 짓는 그를 향해 숀은 손사래를 쳤다. 집에서 제 일 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친구가 문제될 게 뭐가 있겠는가. 문제는 우유부단하기 짝이 없고 지독히 케일럽에게 의존적인 자신에게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숀은 단 한 번도 그 오랜 시간동안 케일럽을 나무란 적이 없었다. 그녀들의 그런 질문에 대해서 억울하게 생각한 적도 없었고, 케일럽과 같이 살게 되어 싫다고 느낀 적은 더더욱 없다. 오히려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황에서도 저를 챙겨주는 친구가 고마울 뿐이었다. 여자야 다시 만나면 되지. 숀은 답지 않게 발랄한 목소리로 말하며 잔을 들었고, 케일럽은 거기에 잔을 부딪치며 마주 웃어주었다. 그래, 언젠간 인연이 닿는 사람이 생길거야, 라고 말하면서.

 

 

 

#2.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숀은 몇 번이나 자리를 뒤척였다. 포도주 한 병을 다 비웠는데도 이상하게 더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이건 아마 헤어짐의 후유증이겠지. 숀은 저 좋을 대로 제 몸 상태에 대해 판단을 내렸다. 결국 자리를 털고 일어나 물을 마시려 밖으로 나왔다. 불이 꺼진 집은 고요했다. 그는 발을 질질 끌며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 문을 열고 생수통을 잡아 벌컥벌컥 들이키고 나자 술로 인해 목에 끼었던 갈증이 사라진다. 반면 정신은 더욱이 또렷해졌다. 숀은 고개를 돌려 제 방 맞은편에 있는 케일럽의 방문을 물끄러미 보았다. 자고 있는지, 아니면 작업 중인 건지 방 안에서는 어떠한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랫배를 긴장시키는 묘한 긴장감에 침을 한 번 삼켰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고요한 방문에 머물러 있었다.

 

5년 전, 그 사건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둘은 어릴 때부터 항상 함께였던 친구였다. 영국 런던 외곽의 학교를 같이 다녔던 그들은 정 반대 타입의 친구였다. 늘상 소심하고 우유부단해서 눈에 띄지 않는 숀과는 달리 쾌활하고 진취적인 케일럽은 항상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는 했다. 그런 케일럽은 항상 숀을 우선시하며 먼저 챙기곤 했고, 그것에 익숙한 만큼 숀이 그에게 의지하는 것 역시 당연시 되었다. 안 되겠다, 이대로 가다간 넌 쟤 없인 완전 병신 되겠어. 둘째 형인 엔젤이 일 때문에 미국으로 건너가는 게 확실시 되자 첫째 형인 게리가 숀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렇게 숀은 제 의지와 상관없이 형들의 손에 잡혀 미국으로 건너와야 했다. 낯선 땅에서 낯선 생활은 쉽지 않았다. 워낙 독립적인 형들은 제 멋대로 살았지만 일생을 누군가에게 의지하며 살아온 숀에게는 그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멀리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보고 싶어. 그 한 마디에 케일럽은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당시 케일럽에게는 웨스트버지니아 주 작은 시골마을에서 받은 의뢰 건이 하나 있었다. 교회 겸 농장을 운영하던 집에서 리모델링을 요청했고 사실 케일럽은 이를 거절하려 했지만 숀의 연락을 받고 마음을 바꿨다. 그는 어차피 가는 길이니 잠깐 일을 보고 가겠다며 조금만 기달려 달라고 시무룩해 하는 숀을 달랬다. 숀은 손가락을 꼽으며 친구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일주일이 한 달이 되고, 그 사이에 실종신고가 들어갔지만 누구도 그를 찾지 못했다. 그를 찾은 것은 그가 마지막으로 연락 한 것으로부터 세 달이 지나서였다. 숀은 아직도 그 날을 잊을 수가 없었다. 강의 하류 쪽에 버려지듯이 있었다는 그의 몸은 온통 퉁퉁 붓고 어디 하나 성 한 곳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케일럽의 모습은 그 강을 따라 모두 씻겨 내려간 것 같았다. 숀은 병상에 앉아 엉엉 울며 스스로를 책망했다. 내가 조금 더 강했으면, 내가 조금 더 독립적이었다면, 내가 케일럽을 부르지만 않았어도...

 

숀의 발이 천천히 움직인다. 발자국 소리조차 없이 고요하게 그는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그리고 케일럽의 방 문 앞에 섰다. 그는 바닥을 보았다. 살짝 벌어진 문틈 사이에선 보일 듯 말 듯한 희미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숀은 가만히 망설이다가 문 위로 손을 올렸다. 힘주어 밀지 않았는데 문이 열린다. 안에서 문고리 잡는 소리가 나더니 삐걱 거리며 문틈이 벌어지고 케일럽이 보였다. 그는 얇은 잠옷을 입은 흐트러진 차림으로 말없이 문 앞에 숀을 바라보았다. 그의 푸른 눈은 탁하게 흐려져 있었고, 곧 울 것처럼 끝이 젖어 있었다. 숀은 그제야 그가 악몽을 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길 잘 했지. 숀은 문을 잡은 손을 뻗어 케일럽의 가슴팍을 쓸어내렸다. 후으- 하고 깊은 숨을 내쉬며 케일럽이 그 손목을 잡아 끌었다. 문이 열리고, 또 닫혔다.

 

 

"숀, 숀, 내 작은 숀."

"또 악몽을 꾼 거야?"

"그 폭포가 자꾸 나를 덮쳐. 발 닿는 곳이 없어."

"괜찮아, 꿈이야. 케일럽, 지나간 일이야."

 

 

쉬이- 하고 숀이 그를 달랜다. 연신 몸에 달라 붙어오는 케일럽을 마주 안아주며 그는 등을 쓸어주고 머리를 만져주며 어떻게든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이마를 맞대고 젖은 땀을 닦아준다. 케일럽의 눈이 숀의 눈과 마주친다. 그 순간 숀은 발끝에서부터 소름이 돋아 온 몸이 얼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꿈결에 흐리던 눈이 어느 때보다 또렷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는 그것이 어떠한 책망을 안고 체 안에 커져가는 죄책감을 긁어내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는 참지 못하고 눈을 감는다.

 

 

"꿈이라면..."

 

 

귓가에 닿는 케일럽의 목소리가 버석거렸다. 코앞에 닿는 숨결이 너무 뜨거웠다. 코끝이 닿았다. 숀은 두 팔을 올려 그의 목을 둘러 안았다. 그의 단단한 두 손이 숀의 낭창한 허벅지를 들어 올린다. 허공에 들린 몸이 벽에 붙는다. 허리에 감기는 숀의 두 다리가, 그 끝이 말려 다리 사이의 두터운 몸을 꽉 끌어안는다. 맞닿는 하체 너머로 열기가 느껴졌다. 숀은 다시 케일럽을 본다. 이글거리며 열망으로 타고 있는 새파란 불꽃을 보았다.

 

 

"증명해 줘."

 

 

그 말에 숀이 다급하게 손을 끌어당긴다. 입술이 닿았다. 열리는 입술 사이로 질척하고 텁텁한 욕정이 흘러넘친다. 숀은 제 허리춤을 잡아 내리는 케일럽의 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나야? 그 인간이야? 순간 귀에서 리즈의 비난이 들린다. 그래, 이런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 감히 리즈에게 무어라고 변명한단 말인가. 자신으로 인해 망가져버린 그를, 빛이 사그라든 그의 인생을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가 없어서, 겨우겨우 제 몸을 열어주어 그를 그 악몽으로부터 건지는 것 외에는 무능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다는 걸 안다. 그것만으로도 버거운 데 누구와 사랑을 하고 누구와 결혼을 꿈꾼단 말인가. 내가 배부른 착각을 했지. 숀은 스스로를 비웃으며 저를 안아오는 뜨거운 몸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었다. 단 하나 일 수 밖에 없었다.

 

 

 

#3.

 

케일럽에게 의뢰를 했던 이들은 어느 젊은 연인이라고 했다. 아니, 연인이라고 하기엔 좀 이상해 보였다고 했다. 한 10대 여자 아이가 있었고, 30대 남자가 있었다. 여자아이는 백인에 시골 아이 다운 순진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고, 남자는 흑인에 산전수전을 겪은 약간 신경질적인 성격이었다고 했다. 목사였던 소녀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자는 교회를 허물길 원했다. 농장은 고립되어 있었고 농사를 위해 새로이 물을 길어오고 자가 발전을 할 수 있는 수도와 전기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케일럽의 눈치에는 그 소녀, 앤은 그걸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앤은 신앙심이 깊었고 남자, 존은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케일럽 역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기에 그런 그녀를 이해했지만 어디까지나 그에게는 의뢰자의 요구에 맞춰주는 것이 중요했다. 받은 의뢰를 처리하기 위해 지질과 규모를 체크하며 일을 본지 삼 일 차에 앤이 케일럽을 찾아왔다고 했다. 날 여기서 꺼내줘요. 그 순한 눈에 눈물을 달고 하는 말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그 농장에서 케일럽은 일주일을 머물렀다고 했다. 둘이 있을 때 소녀는 밝게 웃었고, 케일럽은 그런 앤이 좋아졌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존을 경계해야했다. 존은 케일럽에게 친절하게 대했지만 가끔씩 그가 보내는 시선에서 묘한 적대감을 느낄 때가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보내기를 일 주일, 케일럽은 숀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뉴욕에 가야 한다고 했고, 때를 틈타 소녀를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이를 눈치챈 존이 가려던 케일럽을 잡아 집에서 멀리 떨어진 창고에 가둬두고 앤에게는 그가 영영 떠났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극소량의 식사만 가져다주며 앤이 케일럽을 그리워 할 때마다 그에게 폭력을 행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상한 것이 존은 그렇게 흠씬 그를 두들겨 패고 나서는 또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었다고 했다. 케일럽은 여전히 존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고 했다. 그렇게 몇 달을 가둬두고 마지막에 폭포에 던져 버릴 때까지도 존은 그에게 미안하다고 빌며 울었다고 했다. 그래서 아직도 꿈결에 그 소리가 자꾸 울린다고 했다.

 

숀은 존을 딱 한 번 본 적 있다. 케일럽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 엔젤이 존을 잡았다고 연락이 왔었다. 정확히 잡았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그 농장에 갔을 때 목을 메고 죽어있는 존을 발견했고, 앤은 어디론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고 했다. 보지 않는 게 좋아. 들것에 실려 나가는 시체를 보며 엔젤은 동생의 안위를 위해 눈을 가려주려 했지만, 숀은 바람에 말리는 흰천 너머로 존의 눈을 보았다. 뭐가 그리 억울한 지 부릅뜬 눈으로 저를 보고 있는 존을 보며 그는 저 들 것 위에 있는 것이 케일럽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팠지?"

"아니. 좋았어, 나."

 

 

벗은 어깨에 입술을 내리며 케일럽이 그렇게 물을 때마다 숀은 습관처럼 그렇게 답했다. 사실 아프지 않았다. 아플 수가 없다. 울면서 필사적으로 붙어오는 것은 저였으면서 케일럽은 숀을 곧 깨질 유리처럼 조심스럽게 대했다. 온 몸을 핥고 빨며 뼈까지 노골노골해질 정도로 그를 녹이고 나서야 제 욕망을 밀어 넣고는 했다. 숀이 싫다거나 아프다는 약간의 재스쳐만 해도 곧장 그만 두었다. 그게 더 안타깝다. 숀은 차라리 케일럽이 저를 거칠게 범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자신을 괴롭히며 벌을 줘야 제 안에 희석되지 않는 죄책감이 조금이나마 가실 것 같았다.

 

 

"난 너무 이기적이야."

 

 

이 순간에도 제 죄책감을 덜 생각을 하다니, 숀은 스스로가 혐오스러워 그렇게 내뱉고 곧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짧은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케일럽이 눈물이 맺히는 숀의 눈가에 입술을 문질렀다. 숀, 나의 숀, 아니야, 넌 사랑스러워. 그렇게 속삭이며 볼과 귀에 코와 입술을 부빈다. 숀의 울음소리가 더 거세졌다.

 

 

"그 날, 이후로, 흐읍... 넌 매일, 악몽만 꾸는데, 으으.. 흐윽, 나안..."

"네 잘못 아니야. 너 때문이 아니라 내가 너 보고 싶어서 온 거야. 내가 미련해서 그랬고. 숀, 나 봐바. 응?"

"흐어엉, 넌, 너언- 사람도 기피하고, 그런데... 나, 나느은, 여자나 만나고, 흡, 다니고오- 킁, 흐윽, 흐으으..."

"왜 그런 걸 신경써. 난 너 있잖아. 너 있어주는데 뭐가 문제야. 괜찮아. 울지 말고, 응? 뚝- 하자."

 

 

연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케일럽이 계속해서 그를 달랬다. 몇 번의 입맞춤과 얕은 속삭임이 오가고 나서야 숀의 울음은 점차 잦아들었다. 바튼 숨으로 오르내리는 등을 쓸어주며 케일럽이 숀을 한 품에 안았다. 넓은 어깨에 얼굴을 은닉하자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고 울음의 노곤함과 하루의 피곤이 쌓여 졸음이 밀려왔다. 뒤통수를 쓰다듬고 제 팔을 문지르는 케일럽의 손이 자꾸 졸음을 재촉하는데 숀은 어쩐지 잠들고 싶지 않았다. 자꾸 내려앉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그는 케일럽의 등 뒤를 손으로 문질렀다.

 

 

"어땠어?"

"...뭐가?"

"리즈랑 헤어질 때. 많이 슬펐어?"

 

 

지독하게 의존적인 관계로 인해 숀의 인간관계가 박살날 때 마다 그는 늘상 같은 물음을 했다. 그렇게 물을 때쯤이면 사실 숀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여자 친구라는 존재의 찌꺼기는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마치 그 강이 케일럽의 찬란함을 앗아간 것처럼, 정사 후 눈물로 씻겨나간 자리 남는 것은 어느 누구도 아닌 오롯이 한 사람을 향한 감정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하지만 숀은 오히려 그것에 더 안정감을 느낀다. 일종의 위안이었다. 누군가가 떠나간 자리를 채워주는 케일럽의 열 덩어리 때문에 공허하게 비어있을 틈이 없다. 자신이 그에게 의지하는 만큼, 케일럽이 자신을 의지해준다는 것이, 이 엉망진창이고 상식적이지 않은 관계가 내심 만족스러운 것이다, 이기적이고 한심한 자신은. 그러고 나면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죄책감이, 단순히 자신의 선택으로 그의 인생을 망쳤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 안 나."

 

 

그리고 마지막에 숀은 항상 그렇게 말한다. 기억 안 나. 분명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렇게 답하고 나면 케일럽은 더 묻지 않는다. 그저 숀을 더 꽉 품 안에 가둬둘 뿐이다. 그러고 나면 참아왔던 수마가 순식간에 몰려든다. 그런 밤에는 꿈결에 존도 앤도 그리고 리즈도 어느 누구도 감히 침범할 수 없었다. 둘이 끌어안은 네모난 침대의 테두리를 경계 안이 그들만이 살 수 있는 유일한 세계인 것처럼 악몽 없는 밤을 보내게 되는 것이었다.

 

 

 

#4.

 

"술 마셨냐?"

 

 

느즈막이 일어나보니 옆자리 케일럽이 없었다. 하품을 쩌억 하고 나왔더니 저를 반기는 것은 어젯밤 자신을 품어준 다정한 절친이 아닌 식탁에 떡하니 다리를 올려놓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큰 형 게리였다. 이렇게 불쑥불쑥 찾아오는 것이 한두 번도 아니라 숀은 별 놀랍지도 않은 듯 태연하게 손을 흔들었다. 형 왔어? 그는 티셔츠 아래로 배를 벅벅 긁으며 형의 옆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게리는 그런 숀이 밉지만은 않은 듯 그의 지푸라기 같은 짧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기분이 나아졌는지 숀이 고양이처럼 고롱고롱 거렸다. 그런 그의 손에 케일럽은 갓 내린 커피 한 잔을 들려주었다. 뜨거우니까 천천히 마셔,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 끄덕, 토스트 구워줄까? 하는 말에는 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밥 챙겨주는 강아지와 주인을 보는 것 같아 기가 찬 듯 게리가 코웃음을 쳤다.

 

 

"지랄한다. 야, 니가 자꾸 챙겨주니까 애가 이 모양이잖아."

"...내가 뭐 어때서."

"거울 안 봐? 가서 세수나 하고 눈꼽이나 떼."

 

 

형의 타박에 결국 몸을 일으켜 욕실로 터벅터벅 들어간다. 숀의 뒤꽁무니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게리는 제 맞은편에 앉은 케일럽을 본다. 누가 봐도 운 것처럼 눈이 퉁퉁 부어 있는 숀과는 달리 케일럽은 말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새벽부터 문을 두드렸을 때 맨 몸으로 저를 맞이하면서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고, 아침 준비를 한다면서 부엌에서 하는 행동은 일상적이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게다가 숀이 나온 방이 케일럽의 방이라는 걸 이 집에 몇 번이나 드나든 게리가 모르지 않았을 텐데도, 그는 별달리 변명조차 하지 않았다. 친절하게 제 앞에 놓아지는 커피를 힐끔 본 게리는 등 뒤에 샤워기 물소리가 들려오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잤냐?"

 

 

그 질문이 단순한 잠이 아니라는 것을 듣는 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케일럽은 잠시 멈칫 하더니 커피를 후루룩 들이켜고 태연하게 말했다.

 

 

"뭘 알면서 물어요."

"내가 만만하지? 넌."

"설마요. 참, 브라이언은 잘 지내요?"

".....야."

"다 죽어간다고 하던데, 피임은 잘 하는 거죠? 그거 체액으로 전염되는 거잖..."

"....야!!!"

"그러게 왜 이렇게 진지하게 굴어, 형답지 않게."

 

 

쾅! 하고 게리가 식탁을 내리치고 나서야 케일럽은 입을 다문다. 아까까지 숀에게 보이던 다정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이죽거리는 빈정거림만 가득하다. 둘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 너머로 물줄기 소리는 다행히 멈추지 않았다. 게리는 피우던 담배를 식탁에 아무렇게나 비벼 끄고 삐딱하게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케일럽을 노려보았다.

 

 

"너 저게 천치라고 나까지 병신 취급하면 곤란해."

"그러게 왜 자꾸 와서 사람을 들쑤셔요?"

"왜? 내가 폭로라도 할까봐? 동정심을 무기로 지 다리 사이 쑤시고 있는 새끼가 알고 보면 사기꾼에 살인자라고?"

 

 

게리의 말에 케일럽은 답이 없다. 그저 고요한 눈으로 게리를 노려볼 뿐이었다. 씹새끼, 이러다간 나도 죽이겠네. 커피를 들이키며 게리가 피식 웃었다. 게리는 케일럽이 싫었다. 어릴 때부터 봐왔던 그는 모범생이라는 멀끔한 가면 아래 음습한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뭔지 모르게 꺼림직 했지만 워낙 사교성 없고 모자란 동생을 옆에서 챙겨주는 터라 그저 제가 예민한 것이겠거니 생각하고 넘겼던 것이 화근이었다. 어느 순간 숀은 케일럽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지경에 이를 정도로 심각하게 그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아차, 싶었던 순간이었다. 겉으로는 챙겨주는 척 하면서 케일럽은 쥐도 새도 모르게 숀의 팔 다리를 잘라 버린 것이었다. 뒤늦게나마 이를 눈치 챈 게리는 숀을 미국으로 데려가기로 했다. 때마침 엔젤이 옮기기로 했으니 가족 전체가 움직인다는 명목 하에 우는 그를 억지로 비행기에 앉혀 놓았다.


하지만 그 딴 수작을 부릴 줄은 몰랐지. 게리는 혀를 찼다. 동생을 미국에 데려 오긴 했지만 딱히 책임감 없는 게리가 숀을 잘 돌볼 리 없었고, 일중독자인 엔젤 역시 말할 것도 없었다. 홀로 외로운 숀은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게 보냈고 우울함을 이기지 못한 채 기어이 케일럽을 불렀을 때, 사고가 터졌다. 물론 게리 역시 그 일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그 일로 인해 정서적 불안을 겪는 케일럽을 보며 게리는 이 상황을 만든 것이 제 결정 때문인 것 같아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딱 한 달 동안. 엔젤이 사건의 내막을 파헤치기 전까지의 일이었다.

 

 

"그 집 주인 목 메달아 놓고 지 혼자 폭포에 뛰어 든 주제에, 뭐? 트라우마? 개 수작 부리고 있네."

"어쩔 수 없었어요. 안 그러면 내가 죽겠더라고."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죽이는 새끼는 없어, 씹새야. 그리고 이때다 싶어서 숀한테 매달리는 거,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뱀 같은 새끼. 그렇게 노리던 걸 한 입에 꿀꺽 삼키게 생겼는데 그냥 넘어갈 리 없었겠지. 아니다, 애초에 그 집 간 거 자체가 다 니가 만들어 놓은 판 아냐?"

"... 좋을 대로 생각해요."

 

 

어깨를 으쓱 하며 태연하게 구는 케일럽을 보며 게리는 허- 하고 헛웃음을 쳤다. 씨발 저 등신 천치 같은 새끼는 어떻게 걸려도 이딴 사이코를 고르고 지랄이야? 그는 괜히 담배가 말려 품 안에서 담배 한 까치를 꺼내 입에 물고 담뱃불을 붙였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케일럽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입술 사이로 퍼지는 담배 연기가 케일럽에게 뿜어졌지만 맵지도 않은지 눈 하나 깜빡 하질 않는다. 하, 독한 새끼. 게리는 그런 그를 한 번 비웃고는 들릴듯 말듯 한 나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랑 엔젤이 왜 이 일 묻어두고 넘어가기로 했는줄 알아? 저 천치 같은 병신이, 그래도 우리 막내인데, 씨발 너 없으면 하루도 못 살고 뒤질 것 같으니까 그래. 그러니까, 니가 판 짜놓은 거면 알아서 잘 갈무리 해. 괜한 수작치지 말고. 그리고 혹여나 쟤한테 해코지 하면 넌 바로 감방행이야. 알아 들어?"



게리의 얼굴은 제법 진지했다. 정말 케일럽이 숀에게 해코지라도 하면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칼이라도 꽂아 넣을 기세였다. 케일럽은 지지 않고 게리를 본다. 하지만 거기에는 아까와는 달리 빈정거림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슬퍼 보였다. 그는 가만히 게리를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형은 몰라요."



뭘? 이라고 막 물어보려는 찰나, 숀이 욕실에서 나왔다. 서로를 향한 적개심과 팽팽한 긴장감이 순식간에 완화되었다.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도 뭐 느끼는 게 없는지 커다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하는 말이 그랬다. 형 안 가? 가뜩이나 눈치 없고 순진하기 짝이 없는 제 동생 때문에 이래저래 신경 쓰여서 꼭두새벽부터 왔건만 하는 말이 고작 저거라 게리는 뒷목이 뻐근해 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빨았다.



"넌 나한테 가란 말 밖에 못 하냐? 못난 동생 새끼야."

"나 출근해야 해. 케일럽도 일 해야 하고. 귀찮게 하지 말고 얼른 가."

"하여간 동생이라는 것들은 하나 같이... 아, 그래 간다, 가."



피우던 담배를 다시 또 대충 비벼 끄고 졌다는 듯 게리가 휘적휘적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남아 있던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 사이 숀은 제 방으로 들어가 셔츠를 껴입고 출근 준비를 했다. 어제 흘린 눈물로 눅진 정신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아 손으로 볼을 몇 번 치고 나서야 문 밖으로 나온다. 언제 따라 왔는지 케일럽이 숀의 삐뚤어진 넥타이를 정리 해주었다. 오늘 저녁은 타이 음식 배달시키자. 여상하게 하는 말에 숀이 순종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게리는 그 광경을 못마땅한 듯 쳐다보다가 숀이 잡아 끄는 힘에 못이긴 척 발을 돌린다. 마지막까지도 두 손가락으로 제 눈과 케일럽을 번갈아 가리키며 지켜보고 있다는 제스처를 하고 나서야 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사라진다. 


형제가 떠드는 목소리마저 사그라질 때 쯤 케일럽은 현관문을 닫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집 안은 적막뿐이었다. 케일럽은 부엌으로 가 다 마신 커피 잔을 치우다가 게리가 비벼 끄고 간 담배꽁초를 물끄러미 보았다. 인상을 찡그린 그는 휴지로 그것을 문질러 지워냈지만 나무 식탁 그을린 자국은 좀처럼 지워지질 않았다. 케일럽은 생각했다. 제 마음도 이만큼 까맣게 그을려 있을까 하고.




#5.


한 참 작업을 하다가 기지개를 키며 찌뿌두둥한 몸을 일으킨 케일럽은 시계를 보았다. 시계는 세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놓친 점심을 먹기엔 애매한 시간이었다. 그는 고민하다가 결국 커피 한 잔을 더 마시는 것으로 식사를 대신하기로 했다. 검고 진한 커피에서는 고소한 향이 퍼졌고 케일럽은 기분이 좋은 듯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제 책상에서 한참 작업하던 도면을 물끄러미 보았다. 도면 위에는 몇 번이나 지우고 다시 그려진 흔적이 가득한 작은 카페의 도안이 올라와 있었다. 이제 곧 있으면 근사한 카페를 선물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쪽에는 숀이 좋아하는 레코드판을 진열 해놓고 그 아이와 어울리는 작은 테이블을 놓으면 케일럽이 그동안 생각하던 완벽한 꿈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뿌듯하게 도안을 보고 있는데 핸드폰이 진동한다. 케일럽의 시선이 도안에서 멀어진다. 테이블 위에서 요란하게 울리는 핸드폰 액정 위에는 A라는 이름만이 덩그러니 떠있었다. 케일럽은 핸드폰을 쥐고 잠시간 고민하며 A라는 이름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어렵사리 통화 버튼을 눌렀다. 스피커 너머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케일럽.]

"앤."



그 시골에서 제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버리고 맨발로 달려가던 그 소녀였다. 발바닥에 돌이 박히고 피가 흘러도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은 채 갈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달리던 그녀였다. 오랜만에 듣는 그녀의 목소리는 케일럽이 처음 들었던 것 보다 안정되어 있었고 또 차분해 보였다.



"잘 지냈어?"

[응. 케일럽은?]

"잘 지냈지. 나한테 연락 하는 걸 보니 잡히진 않은 것 같네."

[좋은 분들이 도와주셨어.]

"넌 사람을 너무 많이 믿어."

[케일럽, 미안해.]

"네가 미안해 해야 할 건 내가 아냐."



웃는 낯으로, 다정한 어투로 말하고 있지만, 뱉는 말은 한없이 차갑고 냉정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앤은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얕은 숨소리를 내며 잠시간 침묵을 지키다가, 전과 다르지 않은 순진한 어투로 묻는다. 



[내가, 존을 사랑하는 편이 좋았을까?]



넌 어째 변하는 게 없구나. 그 먼 들판으로 독하게 도망가 놓고서도. 케일럽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는 존, 고집스럽고 신경질적이었던 남자를 떠올렸다.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단지 절박했을 뿐이다.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고 그 시골 동네에 숨어들어 순진한 계집애 하나를 꼬셔낼 만큼 악착같이 삶을 갈구하던 남자다. 부모 없이 홀로 남겨진 순진한 시골 여자애를 구슬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케일럽이 본 그는 불안한 마음을 숨기려 관대한 어른인 척 하고 있었고, 궁지에 몰리면 앤을 다그치며 겁을 주기도 했다. 외줄타기를 하던 남자는 어느 순간 자신이 꿰어낸 소녀를 사랑하게 되었고, 겉으로 연기하는 자신과 내면의 옹졸한 자신 사이에 갈피를 못 잡고 스스로를 궁지로 몰고 간 것이었다.


병신 같은 새끼. 케일럽은 그를 비웃었다. 앤과 자신은 한 번도 사랑에 빠진 적이 없었다. 앤은 그저 자신을 그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누군가가 간절했던 것이고, 케일럽은 숀 외에는 어떤 이에게도 절박한 감정을 느낀 적 없었다. 다만 욕망과 집착이 만들어낸 환상은 아마 그들을 그렇게 비춰냈던 모양이었다. 자신을 가둬두고 구타를 일삼으면서도 미안하다고 우짖는 그를 보며 케일럽은 신랄하게 비웃었다. 나라면 그러지 않았을 거야. 나라면 스스로 절대 내게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을 거야. 조곤조곤한 말로 왜 그가 어리석으며, 왜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지, 그가 연기하는 관대함이 얼마나 가소로운 지에 대해서 떠들어댔다. 결국 마지막에 그를 풀어주었던 것도 존이었다. 아마도 중간에 앤이 그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별 문제 없이 케일럽은 숀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네가 존을 사랑했다면 그 자리에 매달려 있던 건 나였겠지."



상황이 들키자 존은 이 모든 것들을 무조건 덮어 두려고 했다. 따지고 드는 앤을 밀치고 케일럽에게 달려들었다. 두 남자가 창고에서 뒹굴었다. 중간에 싸웠던 기억은 명확하진 않았지만 마지막에 목이 졸리던 존의 얼굴은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손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끝날 지도 모른다. 존이 죽고 나니 앤은 저만치 도망가고 없었다. 그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겼던 건, 적어도 앤이 존을 도와 자신을 죽이려 들지는 않았다는 것 때문이었다. 별 수 없이 케일럽은 존의 시체를 목 매달았다. 죄책감이 드냐면 모르겠다. 케일럽은 절박했다. 그는 몇 달 동안 갇혀 있었고 돌아가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이대로 여기서 잡혀가 감옥에서 썩어날 수는 없었다. 알리바이를 위해 폭포에 몸을 던지고 살아 남은 것은 순전히 운이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케일럽은 제 옆에서 울고 있는 숀을 붙잡았다. 영국에서 제 품을 떠나버린 숀을 다시 찾았다. 그리고 케일럽은 제 몇 달의 불행이 행운이라 여겨지리만큼 그 순간을 감사히 여겼다. 이제, 절대로 자신에게서 그는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



"앤, 널 원망하진 않아. 정말이야."

[... 그 사람은 만났어? 같이 있어야만 하는 사람.]

"응, 같이 살아. 같이 있어야만 하니까, 우린."



같이 있어야만 해서, 더 절박했다. 제 거짓말 아래 숀이 짊어져야 할 죄책감이라는 족쇄는 아무래도 좋다.



"걘 나의 숨인데..."



이제야 비로소 살아있는 것 같은데. 해코지라니. 케일럽은 오전에 했던 게리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감히 어떻게 자신이 숀을 함부로 대할 수 있단 말인가. 게리의 추측은 틀렸다. 누가 보나 숀이 자신에게 의지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난 걔 없으면 죽어, 목이 졸려 죽을 거야. 앤이 언젠가 사랑에 대해서 물어보았을 때, 케일럽은 그렇게 답했었다. 숀이 없는 영국에서의 시간이 그랬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존은 나를 사랑하는 건가요? 라고 물었을 때 케일럽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질척이는 집착과 애욕을 어떻게 사랑이 아니라 간주할 수 있겠는가. 제가 하는 것도 그와 다르지 않은데. 결국은 모두가 그렇게 목마름 속에서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그는 서툴렀고, 케일럽은 능통했을 뿐이다.


다음에 또 연락 할게. 앤은 짧은 인사를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케일럽은 쓴 입맛을 다시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앤도 언젠간 사랑을 알게 되겠지. 그 끊임없는 목마름과 허기짐을. 케일럽은 제 품에 서스럼없이 안겨오는 숀을 떠올렸다. 그 애가 자신을 사랑할까에 대한 답은 없다. 물어본 적도 없었고, 일부로 연인이라는 타이틀을 가져다 대며 관계를 개선하려 들지도 않았다. 연인이라는 틀은 너무나도 위태롭고 아슬아슬해서 금방 깨질 것만 같았다. 그 애가 내 숨인 것처럼, 나 없이는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그 애가 나를 필요로 해줬으면 좋겠다. 그건 과연 욕심일까? 케일럽은 스스로에게 그런 물음을 던져보다가 피식 하고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이제 와서 가능성을 따지기에는 너무 오래 와버렸다. 처음 그 작고 귀엽던 아이를 탐하던 마음이 여기까지 왔다. 그 오랜 시간 버텨온 마음인데 비록 허기가 져도 충분히 공을 들여 앞으로 있을 또 많은 시간들을 기다릴 자신이, 케일럽에게는 있었다.


케일럽은 시계를 흘끔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이 음식을 사와야지. 숀이 돌아오면 같이 식사를 하면서 무슨 얘기를 꺼내 볼까. 앤 이야기를 꺼내면 조금 더 나를 불쌍히 여겨줄까? 그걸 빌미로 다음 주 현장에 같이 가자고 졸라 볼까? 가는 길에 하루 정도는 좋은 곳에서 놀다 와도 좋겠지. 혼자 그런 상상을 하다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입술 사이로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경쾌했다. 아주 화창한 날 어떤 연인이 헤어졌던 카페에서 흘러나오던 노랫소리처럼, 무거움 없이 가볍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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